1581년 9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에치고[越後]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서 모우리 히데히로[毛利 秀広]라는 무장이 카게카츠의 측근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각주:1]와 야마자키 슈우센[山崎 秀仙]을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모우리 히데히로는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 둘을 원흉이라 생각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각주:2]  
 카게카츠는 켄신[謙信] 때부터 우에스기 가문[上杉家] 집사(執事)의 가문인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가 후계자도 없이 살해당했기에 나오에 가문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자신의 시동[小姓] 히구치 요로쿠[樋口 与六]에게 나오에 가문을 잇게 하였다. 이 히구치 요로쿠가 후에 우에스기 가문을 지탱하고 있다고 칭송 받는 명신(名臣)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카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이다. 카게카츠의 시대에 우에스기 가문의 군정(軍政), 민정(民政)은 모두 이 나오에 카네츠구가 담당하였다.

 카네츠구는 키가 크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말을 하는데 막힘이 없어 변설(辯舌)에도 능했다고 한다. 더구나 문학적인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초기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도, 문무 양쪽에 뛰어난 인물로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거론하였다.

 우에스기 가문이 임진왜란에 종군하였을 때, 카네츠구는 점령한 조선 성에 들어가면 반드시 서고(書庫)부터 찾았다고 한다. 지금 요네자와 시[米沢市]에 있는 일본의 국보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그때의 전리품이다.[각주:3]
또한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도 일반적으로 ‘나오에 판 문선[直江版文選]’이라 칭해지는 『오신주문선(五臣註文選)』을 출판. 성 밑에 있는 젠린 사[禅林寺=현재는 호우센 사[法泉寺]]’에 학문소 ‘젠린 문고[禅林文庫]’를 열었다.

 카네츠구는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봄 기러기가 날 닮았나. 내가 기러기와 닮았나. 낙양성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돌아가네
春雁我に似たり 我雁に似たり 洛陽城裏花に背いて帰る[각주:4]
 라는 한시가 유명하다.

 카네츠구는 이렇게 학문적인 인간이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일화도 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아이즈를 영유하고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산호우지 쇼우조우[三法寺 勝蔵][각주:5]라는 무사가 자신의 하인을 죽였다. 죽일 정도의 죄는 아니었던 듯 하인의 친척들이 화를 내며 죽은 하인을 살려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를 들은 카네츠구는 백은(白銀) 20매로 합의를 보도록 하였지만, 하인의 친척들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를 쳤기에 카네츠구가 아무리 조정을 하려고 노력해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고 할 뿐으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카네츠구는 결국 마음을 정해 판결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염라대왕에게 편지를 써 줄 테니 너희가 저승에 가서 그 하인을 데려오도록”
 라며 소동을 일으킨 자들[각주:6]을 저승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서는 염라대왕과 저승사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맞이하는 자를 보냈으니 부디 죽은 자를 살려서 돌려 보내 주십시오”
 라는 푯말을 세워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 일리 없고 원래 중국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지만 민정가로서 유명했던 카네츠구와 연관시킨 것이 흥미롭다.[각주:7]

 또한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히데요시[秀吉]가 아직 살아있을 때의 일로, 후시미 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모였을 때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품속에서 커다란 황금판을 꺼내어 모두에게 자랑하였다. 커다란 황금판이 신기했는지 다이묘우들은 모두 조심스레 손에 들고는 구경하였다. 그 말석에 카네츠구도 있었다. 카네츠구에게도 차례가 오자 카네츠구는 부채를 펴서는 그 황금판을 받고 마치 배드민턴 라켓으로 셔틀콕을 튕기듯이 통통 튀기며 살펴보았다.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배신(陪臣=다이묘우의 가신)이기에 다른 다이묘우들과는 달리 나름 겸손하게 행동하는 줄 알고,
 “직접 손으로 잡고 보아도 되네”
 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카네츠구는,
 “제 손은 켄신 공[謙信公] 때부터 선봉장의 지휘봉을 쥔 손이외다.[각주:8] 저런 천한 물건을 손에 쥐면 손이 더러워지니 이렇게 부채에 올려서 보는 것이올시다.”
 라고 말하고는 부채로 탁 쳐서는 황금판을 마사무네 앞으로 보냈다고 한다.[각주:9]
 이 역시 사실이 아니지만, 카네츠구의 호방함을 말해줌과 동시에, 카네츠구가 배신이면서 다이묘우들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꿀림이 없는 위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카네츠구가 섬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켄신[謙信]이라는 영걸이 있었으며, 그의 자식[각주:10] 카게카츠[景勝]는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그 카게카츠의 중신인 카네츠구는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라 평가 받았고[각주:12] [각주:13], 그렇기에 카게카츠가 아이즈[会津] 120만 석을 영유했을 때 히데요시의 특명으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 석을 하사 받았다.[각주:14] 당시 30만 석 이상 영유하는 다이묘우[大名]는 이에야스[家康] 이하 11명,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무장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25만석,[각주:15]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20만 석[각주:16]이었다.
 이렇듯 카네츠구는 배신(陪臣)의 신분이면서도 보통의 다이묘우가 가지지 못한 기량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다른 다이묘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진면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휘된다.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죽음으로부터 1년 동안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에 대한 야심을 명확히 드러냈고,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나오에 카네츠구는 차례로 아이즈로 귀국하였다. 아이즈 120만 석으로 이봉되어 아직 1년 반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동안 히데요시의 조문을 위해 상경하거나 하여 아이즈 경영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게카츠가 영내에 도로나 다리의 정비, 성의 수축과 낭인을 새로이 등용하고 있다. 거기에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의 교외인 코우자시하라 평원[神指原]에 새로이 성을 쌓고, 본성인 와카마츠 성[若松城]의 해자를 깊게 파는 등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모반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의심했다.

 1600년 4월.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을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 동시에 나오에 카네츠구에게는 카네츠구와 친분이 있던 쇼우코쿠 사[相国寺]의 승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에게 명령하여 카게카츠의 상경을 권하라고 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다.
 카네츠구는 죠우타이에게 답서를 썼다. 카게카츠에게는 이미 허락을 맡은 상태였다. 이것이 후세에 ‘나오에 장[直江状]’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에야스에 대한 통렬한 도전장이다. 내용은 죠우타이[承兌]가 의심하며 거론한 항목 하나하나씩 반론한 것이기에 굉장히 장문이지만 요점을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상경 재촉에 대해서는, 신영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나마 여러 사정으로 영지 경영할 시간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착수해야만 한다는 뜻을 밝힌 후 ‘이번에 또 다시 상경하라면 영지를 다스릴 틈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며, 서약서를 제출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썼으며 또다시 같은 것을 쓰더라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튕겼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쿄우토 근방의 무사들은 차제구(茶諸具)를 모으겠지만 우리들 시골뜨기 무사들은 창이나 철포, 활과 화살을 모은다. 이는 그 지역의 풍속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소”라 하였다. 이는 반쯤 약올리는 생각으로 답했던 것이리라. 계속해서 말했다. “도로나 다리를 만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당연한 일. 만약 역심을 품었다면 다른 나라와의 국경에 해자를 파고 길을 끊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굉장히 도발적인 어구를 이어갔다.
 “역심이 없으면 상경하라니 이건 마치 아이들의 말투외다. 무엇보다 역심을 품었던 자가 실패해서 도망쳐 상경해서는 새로이 땅을 하사 받고 권세가(여기서는 이에야스를 지칭)와 인척관계를 맺으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러한 현 세태는 카게카츠의 마음과 맞지 않는다”고 한 뒤,
 “나이후 님[内府様=이에야스], 츄우나곤 님[中納言様=히데타다]께서 아이즈를 공격하러 오신다고 하는데 모든 것은 그때 해결합시다”고 끝을 맺었던 것이다.

 5월3일. 이 서장은 오오사카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는데, 이를 본 이에야스는, 
 “63살 내 평생 지금까지 이렇게 무례한 서장은 본 적이 없다”
 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의 군을 일으켰는데, 이후의 경과는 지금까지 몇 번 언급했기에 생략하지만,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 소식을 듣고 오야마의 진[小山の陣]에서 병을 되돌리자, 카네츠구는 언젠가 다시 이에야스와 싸우게 될 것이라며 그 전에 배후를 든든히 하기 위해 모가미 령[最上領]을 침공하지만 그러던 중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서군(西軍)의 패전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560년생.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고굉지신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도 인정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 후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카네츠구의 영지였던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되는데, 카네츠구는 계속해서 성과 성 밑 마을 조영을 담당했다. 1619년 12월 19일 에도[江戸]에서 죽었다. 60세.

  1. 나중에 카네츠구의 부인이 되는 오센노카타[お船の方]의 남편이었다. 나오에 가문에는 데릴사위로 들어와 나오에 카게츠나[直江 景綱]의 딸 오센노카타와 결혼하여 남자자식이 없었던 나오에 가문을 이었다. [본문으로]
  2. 모우리 히데히로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사망 후 후계자 다툼인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처음엔 카게카츠의 반대편인 카게토라[景虎] 측이었으나 그를 배신하고 카게카츠 측으로 넘어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동맹을 맺을 때는 카츠요리에게 사자로 파견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야마자키 슈우센은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배신자인 히데히로에게 약속된 은상을 못 받게 하였다. 이에 분노한 히데히로는 야마자키 슈우센과 말다툼하다 살해하였고 그 옆에서 말리던 나오에 노부츠나도 함께 살해하였다. [본문으로]
  3.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원래 일본에 있었던 것으로, 소유주였던 일본의 승려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조선에서 가져간 것은 『송신언행록(宋臣言行錄)』 65권 20책,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90권, 『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 221권, 『부석음주례주소(附釈音周礼註疏)』 42권,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4권, 『산곡시집(山谷詩集)』, 『오조명신언행록 전집(五朝名臣言行録前集)』 등이라 한다. [본문으로]
  4.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나, 일반적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수도였던 후시미[伏見]를 뒤로하고 아이즈[会津]로 향할 때 지어진 것이라 한다. 낙양성과 후시미를 엮은 것. [본문으로]
  5. 쇼우조우는 ‘카츠조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죽은 하인의 형, 큰아비, 조카. [본문으로]
  7. 이 일화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간행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권15[巻之十五]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 편에 실린 것으로, 원문에 따르면 푯말에는 케이쵸우 2년(慶長二年=1597년) 2월 7일이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즉 본문대로 카게카츠[景勝]가 아이즈[会津]를 영유하던 때가 아닌 아직 에치고[越後]에 머물 때이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되는 것은 1598년의 일 [본문으로]
  8. 에피소드 같은 일화 상이 아닌 실제로 카네츠구와 켄신이 만났을 가능성은 낮다. 더구나 켄신이 죽은 1578년 당시 카네츠구는 아직 19살. 지휘봉을 쥐기에는 너무도 어리 나이이다. [본문으로]
  9. 역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일화. [본문으로]
  10. 양자. 켄신 누나의 아들.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메이지 시대에 간행 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배신(陪臣)으로 나오에 카네츠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호리 나오마사[堀直政]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들이라며 절찬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한편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만들어진 사가 나베시마번[佐賀鍋島藩]의 번사(藩士)가 간행한 하가쿠레[葉隠]의 10권 145편에서 히데요시는 천하를 취하기 위해서는 대기(大氣), 용기(勇氣), 지혜(知慧)를 겸비해야 하는데, 현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배신(陪臣) 중에는 삼요소 중 두 개씩 가진 자가 세 명이 있다. 다만 나오에 카네츠구는 대기, 용기는 있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대기와 지혜는 있지만 용기가 부족,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용기와 지혜가 있지만 대기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14.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할 때, 히데요시가 카네츠구에게 30만석을 주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카네츠구가 카게카츠에게 하사 받은 것은 6만석(위키에 따르면 카네츠구 휘하 무장[与力]까지 포함하면 30만석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5. 카토우 키요마사는 히고[肥後]의 절반. 사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한 1598년 당시에는 19만 5천 석. [본문으로]
  16.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를 중심으로. 24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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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22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루리루리 2012.05.02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근 아이카와씨의 나오에 카네츠구의 책을 읽었는데,,
    말년에 카게가츠에게 버려졌다는 설이 있네요,,,
    드라마에서의 이미지로 최고의 군신관계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설마~라는 생각이 들지만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5.06 0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요즘 정신이 없다 보니 글을 써 주신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정말 죄송.

      아이카와라는 분의 견해는 흥미롭군요.
      괜찮으시다면 간단하게나마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이라는 느낌이군요.
      이후에도 카네츠구의 파벌인 요이타구미与板組와 그의 부인 오센お船가 내정과 부인들 사교에서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 수장인 카네츠구를 버릴 수 있을 거라고는 우선 생각하기 힘들군요.

      거기에 카네츠구는 죽자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까지 돈을 부쳐줄 정도로 에도 막부에도 파이프가 있는 사람인데 카게카츠가 무시할 순 없다고 역시 생각합니다.

  3. 루리루리 2012.05.09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과 카네츠구의 대우는 요네자와번으로 옮겨지고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센은 카네츠구의 사후 나오에가가 단절된 후에도 3000석의 화장료?(아마도 은거료라고 생각됩니다)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다카츠로 바뀐후에도 이 화장료는 유지가 되어서
    센이 카게카츠의 측실 문제와 후사인 사다카츠 결정등 우에스기 집안사 문제를 진두지휘하였다는게 아닐까라는 가설도 있군요,,
    아마도 키쿠히메가 죽은뒤 센이 집안의 큰어른과 같은 존재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입니다.
    반면 카네츠구는 나오에가를 상속등 단시간의 출세와
    미츠나리와 같은 문공파와 무공파의 갈등이 우에스기 집안에도 잠재적으로 존재하다가
    요네자와 이봉후 그간의 갈등이 폭발하지 않았는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간에 스스로 나오에가를 단절시켰다는 것도 후대에 미화된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추측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5.10 1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 아이카와라는 분의 글 만으로는 카네츠구가 백안시되었다고 말해주는 아무 것도 없네요.

      카네츠구는 죽기 5년전에 행해진 오오사카 농성전에서도 우에스기 가문의 총참모 적인 위치로 우에스기 군을 지휘했습니다. 물론 이때는 요네자와로 옮긴지도 꽤 된 상태였구요.

      후대에 미화된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추측도 그에 상응..아니 정설화 된 것을 뒤집기 위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 보다 2~3배나 많은 확고한 증거가 필요하니까요.

  4. 루리루리 2012.05.09 13: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네츠구가 문헌상으로 등장하는 것도 정확히는 오타테의 난 이후이여서
    그전의 기록은 대부분 추측성 소설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죠죠 마사시게와 권력 다툼후 승리한 카네츠구가 그간의 대내외적 사건을 전부 해결하였다는 가정아래 그의 공으로 돌린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다른쪽으로 흐르지만..
    책에서는 카게카츠도 역사상의 승리자여서 당연스럽게 우에스기 카게카츠라고 부르지만
    켄신은 카케토라를 관동관령으로 나가오계의 수장으로는 카게카츠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예로 켄신 사후부터 카게카츠가 우에스기성을 사용합니다..
    호죠,도쿠가와도 카게카츠를 나가오라고 부르구요,,
    히데요시와의 동맹후 자연스럽게 우에스기성을 인정받은 것 같습니다.
    카스가야마성의 혼마루를 사용하는 것도 카게토라구요 카게카츠는 외곽에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본 책이 100% 옳은건 아니지만 다른 입장으로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5.10 1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네츠구가 오타테의 난에서 거의 활약이 없었던 것은 압니다만, 말씀해 주신 것들은 에도시대에 간행된 군기물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군요.

      예를들어 카게토라를 우에스기 가문과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카게카츠를 나가오 가문과 에치고의 슈고守護...
      오타테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켄신이나 주변 다이묘우의 서장 등 1차사료에서는 카게카츠만을 후계자로 여겼지, 카게토라를 후계자로 생각한 듯한 증거는 전무하다고 합니다.

      또한 호우죠우北条가 카게카츠를 우에스기로 칭하지 않은 것은 우에스기 가문=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라는 정치적 이유였다고 합니다. 호우죠우의 주영향력이 칸토우인데 다른 이를 칸토우칸레이라 부를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여담으로 엣소우 동맹越相同盟때 호우죠우 가문이 켄신을 칸토우칸레이로 인정한다는 구절이 들어갈 정도로 양 측에서는 예민한 문제엿으니까요.(이에야스도 그러했다면 이도 역시 오다 가문 휘하였던 토쿠가와 가문이, 오다와 싸우던 카게카츠를 낮추어 보려는 역시 정치적 의도가 있었고요. 이는 켄신과 대립한 가문이 자주 쓰던 행위였습니다. 타케다 가문 역시 그랬고요.).

      카스가야마 성에서 카게토라와 카게카츠의 사는 곳은 착각하신 듯. 카게카츠는 御中城様라 불릴 정도로 성의 중심부에 있었고, 카게토라는 정확하진 않지만 오히려 성 밖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오타테의 난과 그것을 둘러싼 배경에 관해서는 작년(2011년)에 나온 이마후쿠 타다시今福匡의 「우에스기 카게토라-켄신의 후계자 자리를 노린 반주류파의 맹주上杉景虎―謙信後継を狙った反主流派の盟主」를 추천드립니다. 당시 1차사료를 중심으로 기술된 굉장히 좋은 책이더군요.

      다시 한번 장문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5. 소설이 열리는 나무 2012.07.02 14: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까지 이에야스를 분노케 했는데도 어떻게 감봉정도로 끝날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했던일만 살펴보면 세키가하라 이후 처형당한 이시다,안코쿠지,고니시에 전혀 뒤지지않아 보이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20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굉장히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우선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이 굉장한 명문이라는 점. -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특성 상 명문가란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거병 소식을 들은 뒤 세키가하라로 향한 이에야스의 뒤따마 내지는 빈집털기를 하지 않은 점.

      또하나 들자면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종전 직후에는 자기 맘에 안 든다고 한 가문을 뽀갤 수 있을 정도의 위세는 아직 갖추지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1578년 3월.
 천하에 용명이 자자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켄신은 평생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기에 친자식이 없어 자연스레 후계 다툼은 켄신의 양자 중 둘로 압축되었다.
 한 사람은 동족[각주:1]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와 켄신의 누나 센토우인[仙桃院]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게카츠[景勝], 또 한 사람은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의 성주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아들 카게토라[景虎]였다.

 카게카츠는 부친 마사카게가 켄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뒤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 定満]에게 살해[각주:2]당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친과 함께 켄신 아래서 자랐는데, 켄신과는 친척인 것도 있어 켄신에게 귀여움 받으면서 자랐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위해서 손수 습자첩(習字帖)을 만들어 주었으며, 켄신이 에치고를 통일했을 때 받은 ‘단죠우쇼우히츠[弾正少弼][각주:3]’의 관직명을 카게카츠에게 물려주었다. 그런 점 때문에 켄신은 카게카츠를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라 여겨졌다[각주:4].

 하지만 켄신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유언도 남겨지질 않아 카게토라에게도 충분히 후계자의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켄신의 장례식도 치러지지 않은 채 카게카츠와 카케토라 사이에 상속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 에치고를 둘로 나누는 쟁란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이라고 한다.
 다음 해인 1578년 3월 카게카츠는 오타테의 난의 승자가 되었다. 이때 카게카츠의 나이 25세였다.

 카게카츠는 과감한 무장이었다.
 오타테의 난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1582년 3월.
카이[甲斐]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멸문시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명령하여 우에스기 공략을 시작[각주:5]한 것이다. 카게카츠는 각오를 정했다. 칸토우[関東]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에게 그런 결의를 담아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활과 화살을 들고 에치고 하나만으로 일본 전토 60여주와 싸우려고 합니다. 일전을 치러 멸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명예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운 좋게 살아 남는다면 일본에 비할 바 없는 영웅으로 이름을 남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면목을 세우는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사옵니다.[각주:6]

 또한 시대는 나중이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의 도화선이 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생트집[각주:7][각주:8]이 있었을 때, 카게카츠는 휘하의 장수들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모반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냥 나이후[内府=
이에야스]에게 굴복하는 것도 내 뜻과 다르다. 이제는 결심했다. 싸우게 되면 우리 가문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지금 떠나도록”
 카게카츠가 실제로 저렇게 말했는지는 둘째치고 시국에 정면으로 맞서려 한 카게카츠다운 일화이다.

 카게카츠의 직속부하들은 카게카츠를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정말 추상같은 위엄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카게카츠는 직속부하들에게 단 한번도 따스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미소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카게카츠는 한 마리의 원숭이를 길렀다. 어느 날 이 원숭이가 카게카츠의 두건을 쓰고 카게카츠의 자리에 앉아 깍지를 끼고서는, 잘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명령을 내리는 흉내를 내었다. 아마 카게카츠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카게카츠는 웃었는데, 이 웃음은 카게카츠가 근신들에게 보인 생애 유일한 웃음이었다고 한다.

 또한 어느 때인가 후지가와[富士川] 강을 건널 때, 한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가라앉으려 하였다. 카게카츠는 노기 서린 얼굴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배에 있던 부하들은 일제히 강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어 카게카츠가 쿄우토[京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 이하 수백 명의 행렬은 너무도 조용하여 기침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고 오로지 사람과 말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는 막부군에 속하여 오오사카 시기노[鴨野]에 포진하였다. 그곳을 니와 나가시게[丹羽 長重][각주:9]가 방문하였는데, 그때 카게카츠는 몸에 갑주도 걸치지 않고 청죽(靑竹)으로 지팡이 삼아 걸상에 앉아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좌우에는 장병 300여명 모두가 창을 세우고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카게카츠와 함께 오오사카 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깃발은 켄신 때부터 이어져오는 감색 바탕에 히노마루[日の丸]의 부대표식[馬標]과 [毘]의 깃발을 치켜세운 진중은 너무나도 숙연하였다.
 나가시게는 군기가 너무도 빠릿빠릿한 그 모습에 뻑이 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시대를 앞으로 되돌려 1582년 4월부터 시작된 오다 군[織田軍]의 우에스기 공략은 6월 3일 엣츄우[越中]에 있는 우에스기의 속성(屬城) 우오즈 성[魚津城]이 함락되어 카게카츠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바로 이 전날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는 바람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건을 알게 된 오다 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카게카츠는
히데요시[秀吉]를 차세대 패자(覇者)로 보고 접근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오대로(五大老)[각주:10]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아이즈[会津] 120만석[각주:11]으로 당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에 이은 제3위이란 거대한 영지를 하사 받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카케카츠의 인생은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계속 보내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바뀌게 된다.

 천하를 향한 이에야스의 야망이 명확해지자,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지를 다스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1599년 고굉지신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함께 아이즈로 귀국하여, 이후 이에야스의 상경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내(領內)에 있는 성곽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이미 이에야스와의 전쟁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미리 손잡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카게카츠는 이에야스가 물러간 다음에도 병사들을 이에야스의 본거지 에도[江戸]가 있는 남쪽으로 보내지 않고, 배후에 있는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영지 야마가타[山形]를 공격하기 위해 나오에 카네츠구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카네츠구는 야마가타 성[山形城] 근방까지 진격했지만, 그때 이미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서군(西軍)이 패한 뒤였다. 카게카츠는 결국 항복의 길을 택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555년생. 처음엔 키헤이지[喜平次]. 가독(家督)을 이은 얼마 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항복하여 이후 충성을 다했다. 1586년 에치고[越後]를 중심으로 55만석을 영유했으며, 후에 토요토미[豊臣]의 성(姓)과 하시바[羽柴]의 씨(氏)를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임진왜란에도 참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의 패전으로 아이즈 [会津]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되어 이봉되었다. 1623년 죽었다. 69세.

  1. 켄신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가독을 물려받기 전의 성이 나가오[長尾] [본문으로]
  2. 보통 둘이 배타고 연못에서 놀았는데 술에 취해 둘이서 수영하다 익사하였다고 하며, 켄신에게 반항적인 마사카게를 여명 얼마 안 남은 사다미츠(76세)가 살해함으로써 주군 켄신을 편하게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군기물 北越軍談 이야기라고 한다. [본문으로]
  3. 관리를 감찰하는 기관 '단죠우다이[弾正台]'의 차관. 억지로 우리나라의 기관과 비교한다면 감사원 공직감찰본부장 쯤? [본문으로]
  4. 근래에 들어선 에치고의 영주에는 카게카츠,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는 카게토라에게 물려주려 한다는 시각이 대세인 듯. [본문으로]
  5. 엣츄우[越中] 방면에선 시바타 카츠이에, 시나노[信濃] 측에선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코우즈케[上野]에선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각각 카게카츠의 에치고[越後]를 노렸다. [본문으로]
  6. 사실 이때는 정세가 이렇게 사면초가가 되고 나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고,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노부나가와 화해하려고 노력했었다. [본문으로]
  7. 一. 영지 경영하지 말고 빨리 상경해라, 一. 어쩌면 조선을 다시 공격할 수도 있으니 그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 一. 에치고[越後]의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가 말하길 카게카츠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 一. 어째서 무기 사들이고, 길이나 다리를 고치며, 성을 새로 쌓고 있나? 등 [본문으로]
  8. 그러나 사실 우에스기 가문이 정비한 길이나 새로 만든 성 등은 모가미 영토로 침입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카게카츠에게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났을 때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영토로 침입하여 탈취하려 했던 것 같다. 또한 성을 새로 짓는 행위는 히데요시가 엄히 금했던 것이었던 만큼, 이에야스가 괜한 생트집을 잡는다고는 할 수 없다. [본문으로]
  9.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의 아들. 이 당시 히타치[常陸] 훗토 번[古渡] 1만석의 번주. [본문으로]
  10.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1. 아이즈[会津] 92만석, 사도[佐渡] 14만석, 쇼우나이[庄内] 14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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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5.27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게가쓰와 가게토라의 '분업'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군요. 매우 일리있어 보입니다. 나가오의 핏줄은 에치고를 포함한 호쿠리쿠를 유지하되, 호조의 핏줄을 내세워 간토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의도로 보이는군요. 해석이 제멋대로는 아닌지 모르겠네요.

    도해 전국무장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부분을 봤는데 사례가 제시되지 않아 발해지랑님께 여쭙겠습니다. 여기 보니 슈도에 관한 대목 중 적장에게 반해 사로잡고자한다는 설명이 있는데 혹시 사례를 아시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27 2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슈님이 말씀하시는 의도가 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켄신이 너무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사이가 나뻤던 우에다 나가오 가문[上田長尾家]과 코시 나가오가문[古志長尾家]을 축으로 갈리는 바람에 오타테의 난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집에 내일 들어가기에 그 부분을 좀 봐야겠군요. 다만 과문하여 그런 케이스는 첨 듣는군요.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5.28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가오 가문의 대립에 대해선 불초하여 잘 모릅니다만 간략히 서술해 주실 수 있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02 14: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음... 이건 따로 포스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2. 맹꽁이서당 2011.06.01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에스기 가문도 모리나 시마즈 가문처럼 막부 말기에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한을 풀려고 일어날만 했겠네요. 지역이 외진 곳이라 못 일어났을까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아이즈'라는 국명이 등장하던데, 아이즈 = 에치고 국인가요? 일본 66국 지도를 보면 노토반도 동쪽에서 동해안을 따라 엣츄, 에치고가 있고 그 북동쪽에 데와국이 있더라구요. 처음에 55만석을 받았다는 '에치고'에서 120만석 '아이즈'로 이동되었는지, 아니면 에치고 = 아이즈라서 그냥 영토가 확장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02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네자와 번[米沢藩]은 3대 츠나카츠[上杉綱勝] 때 츠나카츠가 급사하여 대가 끊어질 뻔 합니다만, 당시 막부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아이즈 번[会津藩]의 호시나 마사유키[保科 正之(아버지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도움으로, 츠나카츠의 여동생과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 츄우신구라[忠臣蔵]에서 유명한 악역] 사이에서 낳은 츠나노리[上杉綱憲]를 양자로 받아서 번을 유지할 수 있어(대신 30만석에서 15만석으로 감봉), 그 은혜를 막말까지 잊지 않고 있었기에 아이즈 번과 같은 길을 택하게 됩니다.
      (아이즈 번이야 쵸우슈우 지사들이 薩賊会奸[도적의 사츠마, 간신배의 아이즈]라고 하며 신발 바닥에 쓸 정도로 좌막파의 기수).

      아이즈[会津]는 무츠[陸奥] 남부에 있는 군(郡)의 이름입니다. 일본지도를 보시면 토우호쿠[東北] 지방에 후쿠시마 현[福島県]의 한 가운데 이나와시로 호수[猪苗代湖]가 있고, 그 옆에 분지가 있는데, 대충 그 부근입니다.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동된 것입니다. 우에스기 가문이 떠난 에치고의 자리엔 만화 센고쿠에도 등장하는 호리 히데마사[堀秀政=센고쿠에는 호리 규타로]의 아들 호리 히데하루[堀秀治]가 30만석으로 입국합니다(그 외 5~6만석급 가문이 몇개 더).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은 아이즈로 떠나면서 연공을 싸그리 가져가는 바람에, 호리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은 사이가 엄청 안 좋아지고, 그것이 주석 7번에 언급된 호리 가문이 우에스기 반란 운운하는 계기로 이어집니다.

    • 맹꽁이서당 2011.06.02 1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그럼 간토8주로 이봉된 이에야스처럼, 가게카쓰도 히데요시에 의해 더 많은 영지를 얻은 대신 더 먼 곳으로 이봉된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세키가하라 패전으로 이봉한 요네자와는 더 북쪽?)

      요세 '센고쿠' 2부가 번역되지 않아서 참 아쉽더라구요. 언제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아이즈라는 자리가 워낙 요충지다 보니 뭐 영전이라면 영전이라고 할 수 있습죠. 다만 그 시대는 워낙 자신들 본거지에 목을 메던 시대(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도 오와리를 내 놓고 이에야스가 다스리던 자리로 가라니까 거부했듯이)라 우에스키 가중은 조금 떨떠름해 하지 않았을지...

      그렇습죠. 요네자와는 아이즈보다 쪼금 북쪽으로 볼 수 있습죠.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6.02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게카츠가 켄신 죽고 카게토라보다 빨리 일을 착착 진행한걸 보면 어느 정도 준비는 하고 있었던거 같군요. 생전에 얘기를 안해뒀으니 생각 하고 있었던게 당연한 걸수도 있겠고...

    원군도 없고 교섭도 안먹히고 결국 자결한 카게토라도 카게토라지만
    카게토라 쪽에 붙었다 죽어버린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왠지 더 억울해 보이기도...
    애초에 왜 카게토라한테 붙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호죠라면 무지하게 싫을법도 한데...혹시 알고 계시면 가르침을 구해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착착 진행이라기 보다는, 운 좋게 켄신이 죽을 당시 친카게카츠 파들이 그 주위에 있어서, 카게토라 등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로 일을 진행시킨 듯 합니다.

      카게카츠파와 카게토라파가 처음 맞부딪힐 초기만 하더라도 에치고를 둘러싼 다이묘우들은 대개 카게토라를 응원했다고 하더군요. 카게카츠파의 공작이 그만큼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왜 붙었는지는 궁금하더군요. 다만 켄신이 죽고 카게카츠파가 우에스기 가문의 가독과 그에 딸린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의 직까지 계승한다고 선언하자, 노리마사가 '딴 건 몰라도 우에스기 가문 가독과 칸토우칸레이 만은 내 결제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말은 하였지만, 카게카츠파는 '이미 켄신이 정한 일이다'고 우겼다는 말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쪽에서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을지...

      어쩌면 그냥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 대항할 만한 곳이 노리마사 거관이었던 오타테[御館]였기에, 카게토라파가 그곳을 점령하다보니 휩쓸린 것이 아닐지...
      (...라고 예전엔 생각했습니다. 지금 오타테의 난을 다룬 책을 하나 기다리는 것이 있으니, 책 도착하여 특별한 것이 있으면 따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6.18 18: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제라...그럴수 있겠군요.
      개인적으론 결제로 맘 상하는거보다 자기 쫒아낸 집 자식인게 더 큰일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아비는 아비고 자식은 자식이었을런지;;;;

      적당히 물어본 질문에도 언제나 장문으로 답변을 써주셔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왠지 죄송하기도 하고...^^;; 그래도 신경써서 답변 달아주시니 매번 감사합니다.

  4. 본다충승 2011.06.03 14: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키헤이지 당신은 요로쿠를 멀리 했어야 했습니다. 갠적으로 우에스기 몰락(?ㅋ)의 주범을 야마시로노카미로 보기에... ㅎ 참으로 오랜간 만에 들어 왔습니다. (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카네츠구가 없었음 아예 그런 기회조차 없었을 것 같군요. 카네츠구는 알려진 만큼 뛰어난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619 12 19 병사(病死) 60


1560 ~ 1519.

에치고[越後] 요이타[与板] 성주 히구치 가문[樋口家] 출신.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중신 나오에 씨[直江氏]를 이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섬겨, 죠우다이카로우[城代家老][각주:1]로써 정무을 도맡아 보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손을 잡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타도를 계획. 그 때에 이에야스에게 보낸 '나오에장[直江状]'은 유명.










굳은 결속으로 맺어진 주종(主從)


 카네츠구[兼続]의 성은 나오에 가문[直江家]에 사위로 들어간 다음부터 성(姓)을 '나오에'라 칭한 것으로, 생가(生家)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태어난 가문인 우에다 나가오 가문[上田 長尾家]의 구신(舊臣)이다.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각주:2]의 사천왕 중의 한 명인 '히구치 지로우 카네미츠[樋口 次郞 兼光]'의 후예로 일컬어지는 나오미네[直峰] 성주 '히구치 이요노카미 카네토요[樋口 伊予守 兼豊]'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요로쿠[与六]라 했다.
 1560
년생으로 어렸을 적부터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의 양자가 된
카게카츠
를 근시(近侍)하였다. 우에스기 켄신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급사했기 때문에 두 명의 양자인 카게카츠[景勝], 카게토라[景虎] 사이에서 후계다툼이 일어났고, 그때 19세의 요로쿠[与六] 5살 연상의 주군 카게카츠를 위해 분투하였다.


 카게카츠의 시대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1582 10월. 후다이[譜代[각주:3]]의 중신으로 요이타[与板] 성주인 '나오에 요헤에 노부츠나[直江 与兵衛 信綱]'가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 있을 때, '모우리 나사에몬 히데히로[毛利 名左衛門 秀広]'의 칼에 죽는 바람에 명문가의 단절을 아쉬워한 카게카츠의 명령에 따라 3살 연상인 노부츠나의 부인[각주:4]에게 장가를 가서 이때부터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가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라는 이름을 칭하게 된다.


 이후 마지막까지 카게카츠에게 반항하던 아가키타[揚北]의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 重家] 4년의 시간을 들여 멸망시키거나 사도[佐渡]를 평정. 히데요시[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참전하여 호우죠우[北条]의 하치오우지 성[八王子城]을 함락시키는 등 대활약을 펼친다.


 인재 욕심이 많은 히데요시는 그러한 카네츠구에게 반하여, 카게카츠를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会津] 120만석으로 이봉(移封)할 때 그 중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을 배신(陪臣[각주:6])인 카네츠구에게 하사하여 명목상 직신(直臣)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카네츠구는 어디까지나 카게카츠의 신하라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에야스[家康]에게 도전장


 히데요시가 죽은 뒤 잠시 동안은 평화로웠지만 반년이 지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병으로 죽자 오대로(五大老)의 필두 이에야스의 전횡이 눈에 띠게 늘어났다. 카게카츠 - 카네츠구 주종은 신영토 관리라는 이유로 영지 아이즈[会津]로 돌아 와서는 만일을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아이즈 츄우나곤[中納言 - 카게카츠의 관위]에게 모반의 징조'

 라는 고소를 받은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변명과 굴종을 위한 상경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기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힐문했는데, 카네츠구의 달변에 아무 것도 못하고 돌아 왔다. 이때 사자는 카네츠구의 오랜 친구인 승() 죠우타이[承兌] 카네츠구에게 보낸 서장(書狀)을 지참하고 갔었다. 그 내용은 사자의 힐문 내용을 각 조에 걸쳐서 글로 쓴 것으로 옛 친구를 걱정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에야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쓴 것이라 간파한 카네츠구는 죠우타이[承兌]에게 답서를 썼다. 이것이 후에 [나오에장(直江状)]라 불리는 도전장이다. 하나하나씩 구체적으로 대응한 후에,

참소(讒訴)를 믿고 있는 나이후님[內府様 이에야스의 관위] 옳은지, 상락[上洛 상경(上京)을 뜻함]을 거부하고 있는 카게카츠가 옳은지는 세상의 평판을 기다려 보자

 고 세간의 여론을 들어보자는 태도를 표명한 후에,

, 나이후 사마가 허튼 소리를 받아들여 계속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 맹세도 서약도 거기서 끝이다.

 고 대놓고 큰소리를 쳤다. 그야말로 선전포고였다.


우에스기(上杉)()의 존속을 위하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대승(大勝)한 이에야스는 패권을 쥐자 전후 처리에 착수하였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항복을 신청한 후 카게카츠와 함께 다음해 7월 상락한 카네츠구는 이에야스를 만나서,

 "나이후 사마에게 거역한 것은 이 야마시로[山城 = 카네츠구] 혼자서 한 일이오니 마음대로 처분해주시길 바랍니다."

 고 사죄도 하지 않고 당당했다.

 카게츠구의 소령(所領)인 요네자와[米沢] 30만석은 몰수되어 대신 대감봉(大滅封)된 주군 카게카츠가 이봉해 와서막번체제(幕藩體制)에서 요네자와 번조(藩祖)가 되었다.


 카네츠구는 카게카츠 6만석 지급하려는 것을 거절하고 5천석만 받아 세키가하라[関ヶ原] 때의 책임을 졌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으로 '헤이하치 카게아키[平八 景明]'가 있으면서도 동생인 '오오쿠니 타지마노카미 사네요리[大国 但馬守 実頼]'의 딸을 양녀로 삼아 1604 8월 전후처리의 교섭으로 친밀해진 이에야스의 총신(寵臣)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에게 부탁하여 그의 둘째 아들 사헤이지[左平次][각주:7]를 데릴사위 겸 양자로 맞아들여[각주:8] 이름을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카츠요시[直江 大和守 勝吉]'로 칭하게 했다.
 우에스기 가문의 가명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 카츠요시[勝吉] 1611 5월 에도[江戶]에 돌아가서는 다음해 마에다 가문[前田家]를 섬겨버리고, 친자식 카게아키[景明] 1615 18살에 병으로 죽는다. 4년 후인 1619년 12 19 에도에 있던 카네츠구도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역자 가필: 카네츠구가 죽었을 때, 주군인 카게카츠

주군보다 먼저 죽는 놈이 있을까”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1. 참근교대로 성주가 에도에 갔을 때 영지에 남아 영지를 다스리던 가로. 한 마디로 No.1 가로.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노토 요리토모[源 頼朝]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몰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대대로 신하인 집안 [본문으로]
  4. 오센노카타(お船の方). 그녀가 나오에 씨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7.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 [본문으로]
  8. 이것은 두번에 걸친 결혼으로, 첫번째는 카네츠구의 친딸인 오마츠[於松]와 결혼시켰고, 그녀가 죽자 동생의 딸인 아토라[阿虎]를 양녀로 들여 그의 후실로 보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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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xkore BlogIcon 포증 2008.04.24 0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마 사콘, 사나다 마사유키와 함께 전국 3대 병법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마사유키 외에는 별다른 선전을 못보여준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장의야망 시리즈에서 능력치가 좀 짠것 같아서 - 특히 시마 사콘 - 능력치를 올려주고 플레이를 하곤 하죠.
    어디서는 카네츠구가 죽어서야 다른 신하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 역적'이라며 욕을 했다는데, 카게카쓰와 카네츠구가 겐신을 암살했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4 20: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마 사콘은.... 지력치? 같은 것은 더 높여 주어야 하나~ 고 생각하는 한편, 그에 평가에 비해서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없어서인 것 같습니다.(코에이의 능력치에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편입죠)

    암살설도 떠돌기는 하던데... 또한 그의 라이벌이었던 호우죠우 씨의 카게토라를 아낀 켄신, 켄신이 죽은 이후에 준비라도 했던 듯이 빠른 움직임과 일처리로 인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저는 이런 쪽으로는 귀가 얇아서 솔깃한 편이긴 합니다 ^^)

    나라를 망하게 한 역적은.... 바쿠후의 신군(이에야스)에게 개겼다는 이유때문이 아닐지...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바쿠후의 시선을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3. 본다충승 2009.02.05 0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9 대하드라마 주인공 이시군요. 아케치님 블로그에서 봤던, 모반설과 실제 후계자 설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5 1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몇 일전에 1편을 보았습니다. 카게카츠 역의 그 분은 우마 서먼이 나온 킬빌에서 거시기에 대한 농담하던 금발의 그 분!!

      아케치님 글 참 알기 쉽게 쓰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유명한 이야기죠. 켄신같은 화제성 많은 인물의 후계자 다툼이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모반설은 정황증거가 좀 되는 것이 있더군요. 전 오히려 그렇게 정황증거라는 말이 생길 만큼 카게카츠의 능력이 뛰었났다고 생각합니다.

      실제후계자 설은 정말 그럴 듯 하더군요. 이게 다 평소 술 많이 쳐먹고 나중 일 생각안 한 켄신이 왠수죠. ^^

  4. Favicon of http://pia3.eglooc.com BlogIcon azusa 2009.05.31 0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자가 틀렸네요. 야마시로노카미가 山城守가 아니라 야마토노카미大和守라고 적혀있네요. 실수하신 듯 ^^;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623 3 20 병사(病死) 69

1555 ~ 1623.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의 차남. 외숙부인 켄신(謙信)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의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해 토우호쿠[東北]에서 다테 가문[伊達家], 모가미 가문[最上家]과 싸우지만 서군의 패배로 항복. 아이즈(会津)에서 전봉(転封)되어 요네자와 번[米沢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후계자 다툼에서 승리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은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기 때문에 친자식이 없었지만 양자는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누나가 시집간 동족의 우에다[上田] 사카토 성[坂戶城]의 성주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의 둘째 아들 카게카츠[景勝] 1559 카게카츠의 나이 5살 때 양자로 삼았다.

 또 한 명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7남 우지히데[氏秀] 처음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양자로 보내졌으나 호우죠우와 타케다의 동맹이 끊어지면서 본가로 돌아온 것을 다시 우에스기와 동맹을 맺을 때 다시 인질로 온 것을 불쌍히 여긴 켄신이 자신의 전 이름[카게토라(景虎)]를 주어 양자로 삼아 카게카츠의 여동생과 결혼시켰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두번째 성곽[二の丸]에 살게 하며 '御中城様[고츄우죠우사마]'라 부르게 하고 군사를 이끌게 했기 에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정하지 않고 급하게 죽었기 때문에 두 사람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다.


 무력대결이 되면 형으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 매제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를 빽으로 두고 있는 카게토라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겨졌으나, 카게카츠는 재빨리 카츠요리와 불가침조약을 맺고 오다와라[小田原]의 원군이 미쿠니토우게 언덕[三国峠]을 넘어 도착하기 전에 단기 결전에 임해 카게토라를 사메가오 성[鮫ヶ尾城]으로 몰아 자살시키고 승리했다.


토요토미[豊臣]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고, 남보다 한 발 앞서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원수를 갚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천하 평정을 목표로 에치젠[越前]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공격을 시도하기에 앞서 카게카츠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때 저울질 하지 않고 곧바로 응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은 카게카츠는[각주:1] 1598년 1월 10 에치고[越後] 91만석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移封)되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揮元],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와 함께 오대로(五大老)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그 해 3 15다이고 사[醍醐寺]에서 꽃구경(花見)를 개최한 뒤에 병으로 쓰러져 8 18일에 후시미 성[伏見]에서 죽었다.


 다음 해(1599) 3 3일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까지 병으로 죽자 이에야스[家康]의 전횡이 심해져 갔다.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토를 정비한다는 이유로 아이즈[会津]로 귀국해서는 토요토미 가문의 장래를 걱정하며 새로이 성을 쌓고 군비를 증강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아이즈[会津]공격에 대응하다.


 카게카츠는 에치고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의 고소로 인한 이에야스의 힐문과 상경(上京) 요구를 뻣뻣한 태도로 거절했기 때문에 화가 난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공격을 결의하여 6 18일 후시미 성에서 출진한다. 하지만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까지 진군한 7 24일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거병하여 미노[美濃] 오오카키[大垣]로 출진했다는 급보가 도착했으므로, 이에야스는 둘째 아들인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를 우에스기의 대비책으로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에 남겨 놓고 재빨리 에도[江戶]로 돌아갔다.[각주:2] 남겨진 유우키 히데야스는 키누가와 강[鬼怒川]을 사이에 두고 우에스기 군()과 대치하며 도발해 왔으나 카게카츠는
 "
나이후도노[內府殿[각주:3]]가 공격해 왔기에 응한 거다. 되돌아 갔다면 이 쪽도 군을 물린다. 우에스기는 빈집털이는 하지 않는다"
 고 말하며 돌아 갔다고는 하지만
실은 배후에 있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진공(進攻)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가명(家名)을 남기다.


 이런 시원시원한 카게카츠의 태도가 맘에 든 히데야스[秀康]는 전후 처리의 자리에서 중신들과 함께 카게카츠를 변호하여,
 
"
카게카츠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모반은 확실치 않으며, 미츠나리와 미리 짜고 우리에게 공격한 것도 아닙니다. 우에스기[上杉]는 후지와라[藤原]의 분가로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이래의 명문. 카게카츠는 타이코우[太閤][각주:4]를 섬긴 이래로 사리에 맞는 행동을 해 온 정직하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입니다. 징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가명(家名)만은 존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 조명()에 힘써 이에야스[家康] 설득시켰다. 이에야스는 할 수 없이 아이즈[会津] 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滅封)시키는 것으로 카게카츠를 용서했다.


 1603 2월 막부에게 에도[江戸]의 소토사쿠라다[外桜田]에 저택을 하사 받은 카게카츠는 이곳을 요네자와 번저[米沢藩邸[각주:5]]로 삼았다. 카게카츠 나이 49세에 막번 체제(幕藩 體制)하에서 초대 번주(藩主)가 되었다. 그 후 오오사카 공성전 겨울의 진[大坂の陣 - 冬の陣]과 여름의 진[夏の陣]에도 참전하였고, 평화로운 시대가 된 에도 시대[江戸時代]에서 20년을 살다 이에야스의 죽은 지 7년 후인 1623년 3월 20 요네자와성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9세였다.

  1. 사실 응하기만 했을 뿐 히데요시를 도우지는 못했다. 카게카츠는 사방의 적들과 시바타 씨[新発田氏]의 반란으로 인해 외침을 할 능력이 없었다. 때문에 종전 후 히데요시는 카게카츠에게 왜 참전하지 않았냐며 따지는 편지를 보냈다. [본문으로]
  2. 사실 처음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대비책으로 남겨졌으나,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로 이동명령을 받자 그제서야 남겨진 것이 유우키 히데야스. [본문으로]
  3. 이에야스의 관도명, 즉 이에야스를 지칭. [본문으로]
  4. 타이코우(태합)은 관백[関白]에서 물러난 사람을 지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5. 번저는 각 번(藩)이 에도(江戶)에 세워 둔 연락소 겸 참근교대 시의 숙박소. 지금의 대사관이나 영사관이라 보면 될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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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3.27 22: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며…멸봉이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9 1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첨엔 왜 이런 말씀 하시나 했더니... 한자를 제가 잘 못 알고 있었군요..
    '滅'하고 '減'하고...언제 시간 내서 전부 바꾸어야 겠네요.
    (여태까지 잘 못 알고 있었을 줄이야...--;)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

  3. 마오리 2010.06.15 16: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산코쿠도우케(三國峠) --> 미쿠니도오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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