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祖父) 때부터 삼대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는 로마로 [텐쇼우 소년 사절단(天正少年使節)]을 파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 등의 다이묘우(大名)와 공동으로 파견하였는데 이 소년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아리마의 히노에 성(日野江城)아래에 만든 일본 최초의 세미나리요(초등신학교[각주:1]) 출신들이었다.
 사절단을 파견한 1582년에 하루노부는 16살이었다. 이 해의 1월 28일 4명의 소년들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하기 위해 저 먼 이탈리아를 향해서 출발한 것이었다.

 하루노부는 이 사절단 파견의 3년 전에 세례를 받아 '동 프로타지우(Don Protasio)[각주:2]'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하루노부는 세미나리요에 이어 영내(領內)인 카즈사(加津佐)에 고등신학교라 할 수 있는 '콜레지오'를 세웠다. 이곳에는 후에 소년 사절단이 유럽에서 가지고 온 일본 최초의 인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미나리요에서는 교리(敎理) 외에도 국어(일본어), 라틴어, 문학, 음악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회화(繪畵)나 천에 수를 놓는 자수(刺繡)까지 과목에 들어갔다.

 아리마 가문의 시조는 해적대장군으로 유명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 純友)[각주:3]라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선조인 타이라노 나오즈미(平 直純)가 스미토모의 아들이라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그런 설이 내려온 것이라 한다.
 후에
큐우슈우(九州)의 다섯 개 지역(
)[각주:4]과 두 개의 섬(島)[각주:5]을 영유(領有)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조부 하루즈미(晴純)때부터의 숙적이었다. 하루즈미는 히젠(肥前) 내의 4개 군(郡)을 영유(領有)하며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각주:6]에 이름을 올렸지만, 1563년 타카노부와 싸워 대패한 이래 아리마 가문(有馬家)은 류우조우지 가문 아래서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1581년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씨(島津氏)가 류우조우지 공격군을 일으켜 히고(肥後)로 진격해 왔다. 하루노부는 이 소식을 듣자 드디어 때가 왔다며 곧바로 류우조우지와의 협정을 파기하고 시마즈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전선은 고착되어 1584년에 되자 하루노부는 시마즈에 원군을 요청. 한편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도 5만7천의 대군을 이끌고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로 진격을 개시했다. 류우조우지 군은 무기도 풍부하여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정공법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3월 24일. 모리타케 성(
森岳) 기슭에 포진한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적을 자군 진영 깊숙이 끌어들여 적의 전열을 늘어지게 만든 뒤 복병을 이용하여 기습, 분단된 류우조우지의 대군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류우조우지 타카노부까지도 죽인 것이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에서도 살아남았지만 토쿠가와(川)의 세상이 되자 하루노부는 불행한 사건에 휘말려 자해하게 된다.
 발단은 1609년 12월에 일어났다. 나가사키(長崎)에 정박 중인 포루투갈의 배 '마드레 데 제우스(Madre de Deus)' 호를 하루노부가 습격하여 침몰[각주:7]시킨 것이다. 2년 전 아리마 가문의 무역선 승무원이 마카오에서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서양선 습격 사건이 뜻밖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라는 사기꾼에 낚인 것이다. 오카모토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으로 하루노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였다.
 이 오카모토가 하루노부에게 서양선 습격에 대한 은상으로 이에야스가 땅을 하사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온 것이다. 하루노부는 이 거짓말에 속아넘어가 막대한 금품을 오카모토에게 바친다. 기다려도 땅을 주겠다는 말이 없음에 오카모토를 수상히 여긴 하루노부의 문의로 거짓이란 것이 들어나지만 감옥에 갇힌 오카모토는 하루노부가 나가사키의 행정관을 암살하려 했다
[각주:8]고 고발한 것이다. 어째서인지 하루노부는 변명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 카이(甲斐) 츠루 군(都留郡)으로 귀양가 거기서 자해하였다.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
1567년생. 1576년 형 요시즈미(義純)의 뒤를 이어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가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ヶ原) 전쟁 때 처음에는 서군에 속했지만 나중에 동군으로 돌아서 영지(領地)를 안도 받는다. 1612년 5월 자살. 46세.

참고: 아리마 하루노부의 목상()을 볼 수 있는 사이트(더 큰 이미지)

  1. 포르투갈 어. seminaryo. [본문으로]
  2. 사족으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이런 이름으로 나온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의 타이라노 마사카도(平 将門)와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기에 서쪽에서 난을 일으켰다.[죠우헤이-텐교우의 난(承平天慶の乱)] [본문으로]
  4.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5.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6. 바쿠후의 중신. [본문으로]
  7. 선원들을 탈출시킨 뒤 선장이 자침. [본문으로]
  8. 포르투갈 배를 처리할 때 제대로 못한다고 핀잔주는 나가사키 행정관에게 '이 일이 끝나면 저 놈도 죽여주마'라고 홧김에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시마바라(島原)의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싸워 패사(敗死)했을 당시의 모습을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하였다.
 [타카노부는 너무 뚱뚱해 말에도 타지 못하였기에 6명이 메는 가마에서 지휘하였다]
 주색에 빠진 말년의 타카노부를 생생히 전해주는 기록이다.

 처음에 타카노부는 절에서 생활하였다. 류우조우지 가문과 인연이 깊은 호우린 원(淋院)에 들어가 '엔게츠(円月)' 혹은 '츄우나곤(中納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승려답지 않게 호방하며 거칠고 난폭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엔게츠가 17살 때 류우조우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행이 찾아온다.
 1545년 1월에 조부 이에즈미(家純), 부친 치카이에(周家)를 시작으로 한 숙부 등 일족의 주요한 면면들이 아야베(綾部) 성주 바바 요리치카(馬場
周)의 모략으로 인해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이다. 그때 90세가 넘는 증조부 이에카네(家兼)가 바바 요리치카를 물리쳐 복수했지만 그 다음해의 봄,
 "츄우나곤(타카노부)는 남다른 기개와 그릇을 가지고 있다. 류우조우지 가문을 재흥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아이일 것이다. 츄우나곤을 환속시켜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류우조우지 가문은 사가 성(佐賀城)에 종가인 '무라나카 류우조우지(村中 造寺)'와 분가인 '미즈가에 류우조우지( 竜造寺)'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타카노부는 분가 출생이었다. 증조부의 유언에 따라 환속하여 타네노부(胤信)라는 이름을 칭한 타카노부는 종가의 당주 타네미츠(胤栄)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종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그 2년 뒤에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의 이름 글자 하나를 하사 받아 타카노부()로 이름을 고쳤다.

 1551년 그 오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타카후사( 隆房)에게 살해당하자 타카노부의 주변도 소란스러워 진다. 여러 호족들과의 항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이들을 전부 정복하였으며, 1559년에는 큐우슈우(九州)의 명문 쇼우니 토키히사(少弐 時尚[각주:1])를 물리쳐 무명을 높였다. 그 후인 1570년 8월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 대군을 이끌고 타카노부의 본거지 사가 성에 육박하는 큰 위기에 빠지지만 타카노부의 외사촌[각주:2]이며 동생이기도 한[각주:3] 모신(謀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활약으로 간신히 낙성은 면했다.[각주:4]

 그 전투에서의 일이다.
 오오토모 측에서 타카노부의 어떤 중신에게,
 "타카노부를 배신하고 우리 쪽으로 온다면 무엇을 바라건 다 해주겠다"
 는 편지가 화살에 엮여 날라왔다. 이 중신은 평소 타카노부와 사이가 안 좋았던 가신이었다. 그 편지가 타카노부에게 전해지자,
 "우리의 결속을 무너뜨리려는 오오토모의 책략이다"
 고 하며 그 편지를 펴 볼 생각도 안하고 버렸다고 한다.

 1580년 오오토모 휘하의 벳키 아키츠라(戸次 鑑連=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와 화의를 맺었을 때도 타카노부는 호방한 태도를 보여준다.
 벳키 측에서 큰칼(
太刀), 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온 사자(使者)가 오자 마침 식사 중이던 타카노부는,
 "마침 잘 되었군. 그 술을 이리 다오"
 라고 한 것이다. 측근은 예부터 적이 보내온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통례이며 어쩌면 독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지만 타카노부는,
 "아키츠라는 당대의 명장. 그런 더러운 수를 쓸 사나이가 아니다"
 고 말하며 밥그릇에 술을 세 번 따라 마신 뒤,
 "이 잔을 아키츠라에게 주마"
 하고는 사자의 발 앞으로 던졌다. 사자는 그 호쾌한 태도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1580년 가독을 적자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준 뒤부터 주색에 빠진 타카노부는 정신이 황폐해지기 시작하여 류우조우지 가문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딸의 남편을 속여서 죽이거나[각주:5]어린 인질을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이거나 하는[각주:6] 등의 행태에 휘하 장수들의 마음도 떠나기 시작한다.

 1584년 3월. 타카노부에게 최후의 시간이 온다. 시마바라 반도의 모리타케()에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 싸워 무턱대고 돌격만 하다가 패하여 죽은 것이다.
 시마즈의 용사 카와카미 사쿄우노스케(
川上 左京亮)에게 목이 잘렸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비참하게도 그 수급을 류우조우지 가문에 전해졌을 때,
 "재수없는 머리통은 우리도 필요 없다"
 며 아군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국경 부근의 간고우 사(
願行寺)로 보냈다고 한다.

[류조지 다카노부(竜造寺 隆信)]
1529년생. 히젠(
肥前) 사가(佐賀) 성주. 한때는 5개 지역()[각주:7]과 두 개의 섬(島)[각주:8]. 1584년 3월 시마즈(島津),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시마바라(島原)에서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56세.

  1. 후에 후유히사(冬尚) [본문으로]
  2. 나오시게의 모친은 타카노부의 숙모. [본문으로]
  3. 타카노부의 모친이 나베시마 가문과의 끈을 강화하기 위해서 48살의 나이로 홀아비가 된 나오시게의 아비에게 멋대로 시집갔다. [본문으로]
  4.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 오오토모 6만 vs 류우조우지 5000. 류우조우지 군은 사가 성(佐賀城)에서 농성. 오오토모 군의 허술한 틈을 눈치챈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야습하여 승리한 전투. 그러나 전술적인 작은 승리에 불과하여 이후 류우조우지는 오오토모에 화의를 청하여 그 휘하로 들어간다. [본문으로]
  5. 카마치 시게나미(蒲池 鎮漣). 증조부 이에카네와 함께 도망친 곳이었으며, 그 후에도 분가출신이기에 류우조우지 종가의 가신들에게 추방당했던 타카노부는 카마치 가문의 신세를 지며 그 군사를 빌려 다시 당주에 앉을 수 있었으나 카마치의 영지인 야나가와(柳川)가 너무 탐났고 시마즈로 접근하며 독립심 강한 사위를 놀러 오라고 꼬셔서 살해. [본문으로]
  6.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 統家)의 14살짜리 적자와 8살짜리 딸. 무네이에는 이때의 원한으로 타카노부가 패사하는 '오키타(沖田) 외길(畷)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시마즈 측의 선봉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본문으로]
  7.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8.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

1612 5 6일 참형(斬刑) 46.

1567 ~ 1612.

아리마 요시사다(有馬 義貞)의 둘째 아들. 형 요시즈미(義純)에게서 가독을 상속. 시마즈(島津)()와 협력하여 히젠(肥前) 시마바라(島原)에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를 물리쳤다. 세키가하라(ヶ原) 전투 후에도 영지(領地)를 안도(安堵[각주:1])받지만,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의 꾀에 빠져 유배지인 카이(甲斐)에서 죽었다.

(가문(家紋)은 http://www2.harimaya.com/sengoku/html/farima_k.html 에서 무단 발췌)


소년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아리마 하루노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이에야스의 양녀[각주:2]를 아들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등 말 그대로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인생이었지만 말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빼앗겼던 선조 전래의 옛 땅을 - 돈만 주면 어떻게든 찾아 주겠다는 달콤한 말에 넘어간 것이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 46세의 나이에 죽음을 명령 받는 비운에 휩싸이게 된다.


 하루노부는 형이 병으로 죽는 바람에 불과 5살의 나이로 아리마 가 14대 당주가 되었다. 하지만 부친 요시사다(義貞)가 여전히 건재하여 부친이 정치를 돌보았다. 그러나 그랬던 부친도 하루노부가 10살 때 세상을 떠나 시마바라 반도(半島)의 히노에 성(日野江)과 하라 성([각주:3])을 다스리는 소년 성주가 되었다.


 아리마 씨()는 하루노부의 부친 요시사다의 시대 때 류우조우지 타카노부(竜造寺 隆信)에게 압박당하여 아리마 가문이 누대에 걸쳐 소유하던 히젠(肥前)의 후지츠(藤津), 키시마(杵島), 소노기(彼杵) 3()을 빼앗겼다. 그 류우조우지 가문의 위협은 하루노부의 시대가 되어서도 여전했다.
 하지만 1580년에 부친처럼 기독교에 입신한 하루노부(당시 14)예수회에게서 많은 식량, 무기, 탄약 등을 원조받아 사츠마(薩摩)의 시마즈씨()와 연합하여 승리. 타카노부를 패사(敗死)로 몰아넣었다.


 또한 하루노부는 서(西) 큐우슈우(九州)에 있으면서도 일본 전국에 퍼져있던 선교사들에게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두각을 나타내자 재빨리 히데요시에게 줄을 댓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강성하기 시작하자 세키가하라(ヶ原) 전투에서는 이에야스에게 붙는 등 천하의 동향을 정확히 판단하여 가문을 지켰다.


숙원인 옛 땅 회복


 하루노부는 기독교 다이묘우(大名)였기에 히데요시가 기독교 금지령을 선포했을 때에는 선교사들을 은닉하는 등 히데요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영지(領地)의 기독교화를 진행시키는 용기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런 하루노부는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적자(嫡子) 나오즈미(直純)를 이에야스에게 보내 그의 가신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에야스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배를 보내어 향수 무역을 행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들린 마카오에서 선원이 포르투갈 사람과 싸움이 나서 쌍방에서 죽는 사람까지 나왔을 뿐만 아니라 파견했던 배까지 불에 탔다.


 하루노부는 이 소식을 듣고 보복하고자 나가사키의 항구에 입항한 포르투갈 배인 [마드레 데 데우스(Madre de Deus)] 호에 불을 질러 침몰[각주:4]시켰다. 이는 이에야스의 심중을 미리 짐작하고 하루노부가 과감히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당연히 순푸(駿府)에 있던 이에야스 거기에 당시 쇼우군(
)인 히데타다(秀忠)는 이를 기뻐하여 큰 칼(太刀)을 하사하였고 이에야스는 쿠니히메(国姫 혼다 타다마사(本多 忠政[각주:5])의 딸로 이에야스의 외증손녀)를 양녀로 삼아 나오즈미와 결혼시켰다.


 이에야스의 큰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한 하루노부는 기뻤다. 그래서 과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에게 빼앗겨 지금은 나베시마 번(鍋島)의 영지(領地)가 되어있는 옛 땅을 바쿠후(幕府)의 힘으로 되찾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하루노부의 흑심을 파고든 것이 이에야스 넘버 원 측근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였다.


 당시 에도()의 쇼우군()과 순푸의 오오고쇼(大御所[각주:6])는 둘로 나뉘어 정무를 행했고 그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그의 적자(嫡子)인 마사즈미였다. 마사즈미의 가신인 다이하치는 나가사키 부교우쇼(長崎 奉行所[각주:7])에서 일한 적이 있었기에 하루노부와도 면식이 있었다.


텐모쿠잔(天目山) () 기슭에서 이슬로 떨어지다.


 다이하치에게 뇌물을 보내면 그가 마사노부, 마사즈미 부자(父子)에게 전해줄 것이고 이는 곧 옛 땅을 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며 수 차례 걸쳐 남만 무역으로 얻은 진기한 물품이나 백은(白銀) 6천냥을 다이하치에게 건냈다. 이것이 발각되어 다이하치는 순푸에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각주:8]


 이에야스는 일국의 다이묘우(大名)라는 자가 뇌물을 보내어 땅을 되찾으려 했다는 것에 크게 화를 내며 영지(領地)를 몰수한 후에 카이(甲斐)로 유배시켰다. 이때 뇌물이 혼다 부자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부자는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다이하치를 재빨리 처형하고 하루노부의 입도 막기 위하여 할복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하루노부는 카이(甲斐)의 산골에 유배되었다. 이곳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가 부인이나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노부나가(信長)()에 포위되어 죽은 타케다 씨() 종언(終焉)의 땅이기도 했다. 그런 타케다 가문과 연이 있는 텐모쿠잔 세이운 사(栖雲)에는 가슴에 금빛 찬란한 십자가를 걸고 있는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이 현존하고 있다. 이는 하루노부가 조악한 작은 집을 만들어 거기서 기도를 올릴 때 마리아 상을 대신한 것이라고 한다.


 바쿠후는 하루노부에게 할복을 명했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죽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여 참수를 바라여 1612 5 6일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례명은 [동 프로타지우].
 이에야스의 양녀를 부인으로 맞이한 아들 덕분에 영지(領地)는 아들인 나오즈미에게 주어졌고 아리마 가문은 끊기는 일 없이 존속할 수 있었다.

  1. 원래 가지고 있던 영지를 계속해서 영유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음. [본문으로]
  2.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손녀. [본문으로]
  3. 이 성은 후에 시마바라 난(乱)때 농민군이 점거하던 성이 된다. [본문으로]
  4. 실은 선장이 선원들을 탈출시키고 자침시켰다. [본문으로]
  5.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적남 [본문으로]
  6. 쇼우군을 은퇴한 사람을 높이 부르는 말. [본문으로]
  7. 나가사키에 있던 바쿠후(幕府)의 지방 기관. [본문으로]
  8.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에 하루노부가 마사즈미에게 물어보았다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마사즈미가 다이하치를 조사하였고, 조사하던 중에 다이하치는 혼자 죽을 수 없다며 하루노부가 나가사키 부교우를 살해하려 했다는 말을 하였다. 하루노부는 옆에서 깐죽대던 나가사키 부교우에게 홧김에 실제로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기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1587 4 17일 병사(病死) 55


스미타다의 사인[花押]

1533 ~ 1587.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城主) 아리마 하루즈미[有馬 晴純]의 아들.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서로 싸우던 양 가문의 화해(和解)를 위해서 오오무라 스미사키[大村 純前]의 양자가 된다. 또한 영내(領內)를 방문한 선교사(宣敎師)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가문[大村家] 18대 당주인 스미타다는 1563년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중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사실 스미타다는 히노에 성주인 아리마 하루즈미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伊][각주:1]의 딸이었다.

  17대 당주 스미사키에게는 타카아키[貴明]라는 서자(庶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타케오 성[武雄城]의 고토우 씨[後藤氏]를 잇게 하고,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일부러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하였다. 이 때문에 오오무라 가의 가신들은 분열되어 오오무라 가문 아래에 있던 열 여덟 가문이 타카아키를 따랐다.

 

 이 타카아키를 시작으로 스미타다의 정실(正室) 부인 오엔[おえん]의 친정이며 이사하야[諫早]에 본거지를 둔 사이고우 씨[西氏], 히라도[戸]의 마츠라 씨[松浦氏] 등 주변 영주(領主)에게 공격 받는 등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위협에서 영지(領地)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들을 인질로 받치는 등 말년에 이르러도 스미타다의 기반은 굉장히 약했다.

 

 이 약소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스미타다는 외국과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였고, 1569년 포르투갈의 배를 요코세[横瀬] 포구에 입항시켰다. 또한 다음 해 31살이 된 스미타다는 이 곳에서 선교사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세례를 받고 돈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주변 호족 연합은 이런 오오무라 씨의 이권을 뺏고자 요코세 포구를 공격하고 불을 질러 없애고, 스미타다도 일시적으로 거성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미타다는 예수회 선교사, 포르투갈 상인과 끊임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것이 영토 안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미타다가 세례를 결의한 배경에는 포르투갈에게 기대어 부와 무기를 얻고자 하는 흑심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차츰 기독교에 대해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다.

 

적은 인원으로 성을 지키다

 

 그러한 스미타다의 후반생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미타다에게는 4명의 측실(側室)이 있어 세자인 요시아키(善前)도 측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로 측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타다는 이를 무시하고 측실을 계속 두었다.

 한 편 정실 오엔은 남편이 측실을 두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처음엔 기독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은 지 7년 후에 기독교의 교리에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

 이 때 38살이 되어있던 스미타다는 오엔과 기독교의 서약에 따른 결혼식을 하였다. 이는 오엔의 희망에 따라, 처는 오엔 한 사람이며 측실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스미타다가 완전히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1573.

 스미타다는 주변 호족 연합에게 거성인 산죠우 성[三城城]까지 공격당하는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빠진다. 이때 선교사는 어떠한 때라도 자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미타다는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신의 목에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를 선교사와 교환하였다. 여기서도 신앙을 선택한 스미타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미타다는 과감히 성을 나와 돌격하는 등 적은 인원으로 성을 사수하여, '산죠우 칠기 농성[三城七騎籠もり]'[각주:2]이라 일컬어지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해, 스미타다는 6만의 오오무라 영민(領民)봉헌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1580년 오오무라를 방문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게 나가사키[長崎]와 모기[茂木]의 땅을 예수회에 기증했다. 나가사키는 이후 세계로 열린 항구로써 각광을 받게 된다.

 

하늘로 날려진 작은 새

 

 말년.

 스미타다는 사가[佐賀]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압박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세자인 요시아키를 사가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 요시아키가 인질이 된 2년 후, 동생 두 명도 인질로 보낼 수 밖에 없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강압적인 타카노부가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함으로 인해 스미타다가 겨우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이 51살 때이다.

 

 히데요[秀吉]가 시마즈 토벌의 군을 큐우슈우[九州]로 보낸 것은 15873월이었다. 오오무라 씨는 이 때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는데 스미타다는 종군(從軍)하지 않고 아들인 요시아키가 대신해서 출진했다. 왜냐면 이때 스미타다는 후두암폐결핵을 앓고 있어, 몸이 말라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신력은 신을 받아 들여 아름답게 빛났다고 기독교 사료는 말한다.

 

 스미타다는 의사가 하는 미신(迷信)에 바탕을 둔 치료를 원치 않았고, 신부에게 천당에 대해서 계속해서 들려주길 원했으며 그것을 들으면서 대단히 만족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카구치[坂口]의 은거 저택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스미타다는 영내(領內)구류(拘留)되어 있던 포로 200명을 석방했다. 마지막으로 새장에 있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4 17일. 반년에 걸친 투병 생활 끝에 5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1. 나중에 양아비가 되는 스미사키의 부친. [본문으로]
  2. 1500명을 상대로 7명의 무장과 70명의 여자들로 성을 지켰다고 한다. [본문으로]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 隆信)

1584 3 24일 전사(戰死) 56.

1529 ~ 1584.

류우조우지씨() 19당주(). 쇼우니()()를 물리치고 강대해져,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과 자주 다투었다. 히젠(肥前)을 평정한 후 치쿠고(筑後), 히고(肥後)에도 침공했다. 오오토모 씨()의 쇠퇴 후,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오키타(沖田) 외길()의 전투(沖田)]에서 패하여 죽었다.








출가(出家)환속(還俗)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는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는 자동차와 같은 인생을 보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말년에 접어들어 가독(家督)을 물려주고 승복(僧服)을 입고서는 하루 종일 염불을 외며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여 조용히 일생의 막을 내린다. 이러한 인생은 많은 사람들이 선망(羨望)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명(兒名)이 쵸우호우시마루(長法師丸)였던 타카노부는 7살의 나이에 출가했다. 현재의 초등생부터 고등학생 시대를 [엔게츠(円月)]라는 이름으로 절에서 보냈고 18살 때 환속했다. 인생에서 가장 학식이 몸에 붙는 나이다.
거기서 고승(高僧)이 되기 위해 불문(佛門)의 길을 일생 걸었다면 특필할 만한 인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50세를 넘어서부터 교만(驕慢), 잔인(), 비도(非道), 주색(酒色)에 빠짐 이라는 비난의 문구(文句)가 그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여생의 유무(有無)


 류우조우지 가 중흥(中興)의 시조로 숭상받는 타카노부의 증조부 이에카네(家兼)는 막 태어난 타카노부를 보자마자 [영리]하다고 느꼈다. [구족(九族)극락왕생할 수 있을 정도의 공덕을 쌓을 것]을 바라며 그를 출가 시켰다고 한다.


 그랬던 증조부가 이번엔 죽음을 앞두고,
 
그 애는 대기(器)이니 반드시 류우조우지 가문을 크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다. 환속시키거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 본인의 의사는 상관 없었다.


 거기에 19살의 나이로 무라나카(村中) 류우조우지 가의 미망인과 결혼을 하게 되어(宗)의 당주가 되었다. 즉 부설되어 있는 레일 위를 달렸을 뿐이다. 타카노부가 가독을 적남(嫡男)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주고 은거를 시작한 것은 1580년으로 52세의 나이였다.

 사가(佐賀)()에서 남쪽 약 2Km정도 떨어진 수코 성(須古)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자신의 힘으로 6년 전에 히라이 씨(平井)에게서 빼앗은 성이었다.

 다섯 주() – 히젠(肥前), 치쿠고(筑後), 히고(肥後)의 반치쿠젠(筑前) 아홉 군(), 부젠(豊前) 세 군() – 의 태수로 경외(敬畏)받으며 여생을 수코성()이 있는 시라이시(白石) 평야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향년은 56.
 
표면상의 은거 생활은 5년이다. 보통 사람의 노후로 본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지만 타카노부의 최후는 전쟁터에서 적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1584 3월이었다.


 공격 당하는 성을 관으로 삼아 죽은 것은 아니다.
 
출진 하지 말아달라는 충신들을 뿌리치고 성을 출발. 시마바라(島原) 반도(半島) 군세를 진출시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투였다. 더구나 주군을 안전 지대로 이동시키려 하는 가신들의 진언을 무시했던 결과로써 패하여 죽은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몸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결과 - 비대해진 몸으로 여섯 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지휘를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위풍당당한 총대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하다.

 낮은 언덕에 본진을 설치하고 의자에 앉아서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와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센고쿠 시대에 큐우슈우(九州)에서 시마즈, 오오토모(大友)씨와 3강을 이룰 정도의 강심장이었다.


 그러나 후방의 소란을 아군 병졸들의 싸움이라고 착각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운은 여기서 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타카노부의 최후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난 적장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 밖에 없게 된 타카노부는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어렸을 때의 쌓은 학식이 되살아났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적장에게 대장의 목을 베는 작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말에 적장이 대답을 주저하자 타카노부가 말했다고 한다.


 “홍로(紅爐[각주:1]) 위에 내린 눈 한 송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 위에 떨어진 눈 한 송이가 눈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저 세상의 염라대왕은 엄격했다.

 자아 도취를 용서치 않았다. 폭주 끝에 죽음은 비참했다.

 타카노부의 목이 사츠마(薩摩) ()에서 치쿠고(筑後)의 에노키()의 나루터까지 보내져 왔다. 돌려줄 테니 여기까지 받으러 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타카노부의 한 팔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는 그 목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타카노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이유였다.

 그의 목은 히고(肥後) 타카세()의 간교우(願行)()로 보내졌다.


=======================이하 역자 가필======================================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패배한 장수의 목은 재수가 없으니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1)당시 타카노부의 분노를 사서 삐져있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였기에 그런 말을 했다는것.

(2)목을 건네고 받을 때 시마즈의 사자에게 자신들의 약점을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타카노부의 목은 위의 이야기 외에, 타카노부에게 원한이 깊었던 어느 호족의 미망인[각주:2]에게 전해져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결국 역시 재수없다고 여긴 시마즈 쪽이 그냥 강물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1.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져 붉게 달거진 화로. [본문으로]
  2. 아카호시 가문(赤星家)의 미망인. 타카노부는 인질로 와 있던 그녀의 14살난 손자와 8살난 손녀를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