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시마바라(島原)의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싸워 패사(敗死)했을 당시의 모습을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하였다.
 [타카노부는 너무 뚱뚱해 말에도 타지 못하였기에 6명이 메는 가마에서 지휘하였다]
 주색에 빠진 말년의 타카노부를 생생히 전해주는 기록이다.

 처음에 타카노부는 절에서 생활하였다. 류우조우지 가문과 인연이 깊은 호우린 원(淋院)에 들어가 '엔게츠(円月)' 혹은 '츄우나곤(中納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승려답지 않게 호방하며 거칠고 난폭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엔게츠가 17살 때 류우조우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행이 찾아온다.
 1545년 1월에 조부 이에즈미(家純), 부친 치카이에(周家)를 시작으로 한 숙부 등 일족의 주요한 면면들이 아야베(綾部) 성주 바바 요리치카(馬場
周)의 모략으로 인해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이다. 그때 90세가 넘는 증조부 이에카네(家兼)가 바바 요리치카를 물리쳐 복수했지만 그 다음해의 봄,
 "츄우나곤(타카노부)는 남다른 기개와 그릇을 가지고 있다. 류우조우지 가문을 재흥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아이일 것이다. 츄우나곤을 환속시켜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류우조우지 가문은 사가 성(佐賀城)에 종가인 '무라나카 류우조우지(村中 造寺)'와 분가인 '미즈가에 류우조우지( 竜造寺)'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타카노부는 분가 출생이었다. 증조부의 유언에 따라 환속하여 타네노부(胤信)라는 이름을 칭한 타카노부는 종가의 당주 타네미츠(胤栄)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종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그 2년 뒤에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의 이름 글자 하나를 하사 받아 타카노부()로 이름을 고쳤다.

 1551년 그 오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타카후사( 隆房)에게 살해당하자 타카노부의 주변도 소란스러워 진다. 여러 호족들과의 항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이들을 전부 정복하였으며, 1559년에는 큐우슈우(九州)의 명문 쇼우니 토키히사(少弐 時尚[각주:1])를 물리쳐 무명을 높였다. 그 후인 1570년 8월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 대군을 이끌고 타카노부의 본거지 사가 성에 육박하는 큰 위기에 빠지지만 타카노부의 외사촌[각주:2]이며 동생이기도 한[각주:3] 모신(謀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활약으로 간신히 낙성은 면했다.[각주:4]

 그 전투에서의 일이다.
 오오토모 측에서 타카노부의 어떤 중신에게,
 "타카노부를 배신하고 우리 쪽으로 온다면 무엇을 바라건 다 해주겠다"
 는 편지가 화살에 엮여 날라왔다. 이 중신은 평소 타카노부와 사이가 안 좋았던 가신이었다. 그 편지가 타카노부에게 전해지자,
 "우리의 결속을 무너뜨리려는 오오토모의 책략이다"
 고 하며 그 편지를 펴 볼 생각도 안하고 버렸다고 한다.

 1580년 오오토모 휘하의 벳키 아키츠라(戸次 鑑連=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와 화의를 맺었을 때도 타카노부는 호방한 태도를 보여준다.
 벳키 측에서 큰칼(
太刀), 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온 사자(使者)가 오자 마침 식사 중이던 타카노부는,
 "마침 잘 되었군. 그 술을 이리 다오"
 라고 한 것이다. 측근은 예부터 적이 보내온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통례이며 어쩌면 독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지만 타카노부는,
 "아키츠라는 당대의 명장. 그런 더러운 수를 쓸 사나이가 아니다"
 고 말하며 밥그릇에 술을 세 번 따라 마신 뒤,
 "이 잔을 아키츠라에게 주마"
 하고는 사자의 발 앞으로 던졌다. 사자는 그 호쾌한 태도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1580년 가독을 적자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준 뒤부터 주색에 빠진 타카노부는 정신이 황폐해지기 시작하여 류우조우지 가문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딸의 남편을 속여서 죽이거나[각주:5]어린 인질을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이거나 하는[각주:6] 등의 행태에 휘하 장수들의 마음도 떠나기 시작한다.

 1584년 3월. 타카노부에게 최후의 시간이 온다. 시마바라 반도의 모리타케()에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 싸워 무턱대고 돌격만 하다가 패하여 죽은 것이다.
 시마즈의 용사 카와카미 사쿄우노스케(
川上 左京亮)에게 목이 잘렸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비참하게도 그 수급을 류우조우지 가문에 전해졌을 때,
 "재수없는 머리통은 우리도 필요 없다"
 며 아군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국경 부근의 간고우 사(
願行寺)로 보냈다고 한다.

[류조지 다카노부(竜造寺 隆信)]
1529년생. 히젠(
肥前) 사가(佐賀) 성주. 한때는 5개 지역()[각주:7]과 두 개의 섬(島)[각주:8]. 1584년 3월 시마즈(島津),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시마바라(島原)에서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56세.

  1. 후에 후유히사(冬尚) [본문으로]
  2. 나오시게의 모친은 타카노부의 숙모. [본문으로]
  3. 타카노부의 모친이 나베시마 가문과의 끈을 강화하기 위해서 48살의 나이로 홀아비가 된 나오시게의 아비에게 멋대로 시집갔다. [본문으로]
  4.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 오오토모 6만 vs 류우조우지 5000. 류우조우지 군은 사가 성(佐賀城)에서 농성. 오오토모 군의 허술한 틈을 눈치챈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야습하여 승리한 전투. 그러나 전술적인 작은 승리에 불과하여 이후 류우조우지는 오오토모에 화의를 청하여 그 휘하로 들어간다. [본문으로]
  5. 카마치 시게나미(蒲池 鎮漣). 증조부 이에카네와 함께 도망친 곳이었으며, 그 후에도 분가출신이기에 류우조우지 종가의 가신들에게 추방당했던 타카노부는 카마치 가문의 신세를 지며 그 군사를 빌려 다시 당주에 앉을 수 있었으나 카마치의 영지인 야나가와(柳川)가 너무 탐났고 시마즈로 접근하며 독립심 강한 사위를 놀러 오라고 꼬셔서 살해. [본문으로]
  6.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 統家)의 14살짜리 적자와 8살짜리 딸. 무네이에는 이때의 원한으로 타카노부가 패사하는 '오키타(沖田) 외길(畷)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시마즈 측의 선봉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본문으로]
  7.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8.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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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ente21 BlogIcon 클레멘테 2009.06.16 09: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584년 아리마 하루노부가 류조지씨를 배신했을 때 타카노부는 마사이에에게 아리마씨 토벌을 명령했지만 마사이에가 아리마씨 출신 아내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본인 스스로 아리마 토벌에 나섰다고 하더군요.

    그런 부분을 감안하면 타카노부가 전사한 것에 마사이에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17 1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류우조우지 당주인 마사이에가 제 앞가림 하는 놈이었다면 타카노부가 죽을 일은 확실히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뭐 아무리 뛰어났어도 자식 농사 못 지은 사람이 많은지라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도 나온 것 같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6.16 1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마 오오토모 프란시스코는 경건한 종교인으로서 몰락했으니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이 센고쿠판 동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죠(먼산)

    개인적으로는 별로 맘에 안드는 인물이라..(역시 종교에 따라 취향을 좀 타서..) 뭐 저 비참한 죽음도 자업자득이라 봅니다(..;)

 한때 큐우슈우[九州] 6개 지역[国]에서 위세를 떨친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로도 유명하다.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여 당시
야마구치[山口]에 머물고 있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자기 영지(領地)인 붕고[豊後]의 후나이[府
=현 오오이타 시[大分市]]로 초대하여 회견하였다. 소우린 22살 때였다. 이때부터 이 젊은 붕고의 주인은 이국(異國)의 종교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한다.
"…(전략)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들은 이 가르침보다 고귀한 말씀은 없었다. 또한 이 가르침보다 도리에 맞는 가르침 역시 없을 것이다"
 이때는 이렇게 고백하였지만 사실 당시만 해도 아직 기독교에 입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붕고 영내(領內)에 포교를 허용하였으며 후나이[府
内]에 교회를 세워 한때 소우린의 영지(領地)는 일본 기독교 활동의 근거지가 될 정도였다.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까지 지었다.

 한편 청년 소우린은 믿음직한 기독교 보호자이기는 하였지만 호전적이고 빠굴을 굉장히 좋아하는 센고쿠 무장이기도 하였다. 1553년에는 가신의 부인 중에 미모로 유명한 여성을 강제로 빼앗아 첩으로 삼았기 때문에 부인을 빼앗긴 핫토리 우쿄우노스케[服部 右京助]를 시작으로 한 이치마다 아키스케[一万田 鑑相], 무네카타 아키히사[宗像 鑑久] 등의 중신들이 모반을 일으켰다[각주:1]. 그외에도 소우린은 친족이나 가신들의 부인에게 손을 댔다.

 가독을 상속할 때 피비린내 나는 가문 내란이 일어났다.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
義鑑]가 난폭한 소우린[각주:2]을 미워하여 총애하던 측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시오이치마루[塩一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장자상속을 주장하는 두 중신[각주:3]이 1550년 2월 10일 밤에 오오토모 저택의 2층에서 자고 있던 요시아키를 습격하여 시오이치마루와 그 어미를 죽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이층의 붕괴[二階崩れ]'라고 한다.[각주:4]

 소우린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가 있으면 육친이라 하더라도 용서치 않았다.
 1554
히고[肥後]의 키쿠치 요시타케[菊池 義武][각주:5]가 붕고[豊後]를 노렸다는 이유로 나오이리 군[直入郡] 키하라[木原]로 불러들여서[각주:6] 살해하였다. 요시타케는 소우린의 숙부였다. 이 숙부의 수급을 검사할 때 소우린은 "오오토모 가문을 노린 괘씸한 놈"이라며 채찍을 휘둘러 그 목을 마구 쳤다고 한다.

 1559년부터 1570년 동안 오오토모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 사이에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고승 이운 화상[惟雲和尙]을 초대하여 그에게 사사 받아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즈이호우 소우린[瑞峯宗麟]'이라는 법호(法號)를 얻었다. 여전히 소우린은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1571년 소우린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軍]에게서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에 임명 받아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붕고[豊後], 히젠[肥前]의 6개 지역을 영유(領有)하는 거대 다이묘우가 되었다. 당시 후나이[府内]에 있던 선교사도 "일본 최대의 영주 중 한 명"이라며 소우린의 위세를 전해주고 있다.

 큐우슈우[九州]에 남은 곳이라고는 명문 시마즈 씨[島津氏]가 영유(領有)하는 휴우가[日向]의 일부, 사츠마[薩摩], 오오스미[隈] 3개 지역이었다. 그 시마즈 씨가 큐우슈우[九州] 제패를 목표로 북상하여 소우린의 이웃 나라인 휴우가[日向]에 침입하였다.

 이해 즉 1578년 49세의 소우린은 불교의 법의(法衣)를 벗고 세례를 받아 '프란시스코'[각주:7]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다년간 그의 입신을 거부해 왔던 부인을 버리고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여 입신한 것이었다. 신앙도 철저하여 영내(領內)에 있던 신사(神社), 사원(寺院)을 계속해서 불태워 파괴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우린의 기독교 개종과 동시에 오오토모 가문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1578년에 4만 대군으로 휴우가[日向]에 진출한 오오토모 군[
大友軍]은 시마즈 군[島津軍]이 선두에 내세운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의 깃발에 위압당해 전군이 붕괴되어 패주하였다. 사상자 2만에 달하는 참패였다. 이것이 유명한 휴우가[日向] 미미가와 전투[耳川の合戦]이다.

 이후 오오토모 왕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1587년 소우린은 실의 속에 이 세상을 떠났다.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30년생. 이름은 요시시게[
義鑑],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 1582년 오오무라[大村], 아리마[有馬] 등과 함께 일본 최초로 유럽의 로마 교황에게 사절(使節)을 파견하였다. 1587년 5월에 죽었다. 58세.

  1. 실은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에 후계자로 보낸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가 큐우슈우에 있던 오오우치 가문 영지에 손을 썼고 그에 동조하여 상기의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했다. 부인을 취한 것은 그 후의 일. 참고로 이치마다 아키스케의 부인도 취했다. [본문으로]
  2. 소우린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소우린을 폐적하고 시오이치마루 옹립을 주도적으로 꾀한 이리다 치카자네[入田 親誠='이리다'는 '뉴우타'라고도 읽는다]는 소우린의 후견인 & 스승이었다...지만 여기엔 또 히고[肥後]의 영지를 둘러싼 오오토모 가문 내의 파벌 싸움도 섞여 있었다. [본문으로]
  3. 소우린을 폐적하기 위해 요시아키는 네 명의 중신과 협의하였지만 네 명 다 반대. 그래서 요시아키는 네 명중 두 명을 살해하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두 명이 난을 일으켰다. [본문으로]
  4. 침입한 중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참살. 요시아키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틀 후 사망. [본문으로]
  5.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가 히고의 명문가인 키쿠치 가문을 빼앗기 위해 키쿠치 가문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자신의 동생(즉 소우린에게는 숙부가 됨)을 양자로 들여보냈지만 독립심과 야망, 멍멍이 같은 성격에 비해 능력이 딸려 결국 키쿠치 가문의 가신들에게 추방. [본문으로]
  6. 갈 곳이 없는 차에 소우린이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초대하였다. [본문으로]
  7. Dom Francisco.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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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06.02 19: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사람도 나름 능력자이긴 한데 종교에 잘못 빠져 그만 망한 듯...
    나중에 시마즈 씨에게 처절하게 깨지는 걸 보면 정말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히데요시가 조금이라도 천천히 왔다면 시마즈가 정말 큐슈 제패를 했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그래도 히데요시에게 깨졌겠지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창천항로...라는 만화에서 조조가 원소를 평하길..
      "원소는 패배를 자신의 승리로 만드는 힘이 있다"...
      미미가와에서 시마즈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우린은 그런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모우리, 류우조우지와의 전술적 패배에도 결국엔 전략적 승리로 이끌어 내는 것을 보면 능력은 상당한 것 같습니다.

      시마즈는 언제까지고 본거지를 사츠마(薩摩)에서 옮기지 않았던 것을 보면 설사 큐우슈우를 제패했더라도 일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2. 朴先生 2009.06.02 2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독교로 개종하면 악업을 구원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조강지처를 버리면서까지 개종한 걸 보면 다른 목적이 있었던걸까요? 스페인과의 교역이나 뭐 다른 이유로...
    하지만 그간 행적이 막장이었으니 전자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기독교 다이묘치고 타카야마 우콘이랑은 또 다른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워낙 많이 일어나는 가신들의 반란과 내분 속에서 정신적 안정을 종교에서 찾았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래서 머리 밀고 중도 되었으며, 거기서 만족감을 못 찾아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6.02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대인배였지만 내적모순과 외적모순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고밖에..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은 사람이지만 뭐 어차피 일본에서 기독교다이묘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조금 빠른 몰락'으로 받아들이면 되는거겠죠(어허허)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외로 동 시메온처럼 겉으로는 "안 믿을께요~"하고 뒤로는 믿으면서 신앙을 지켰을지도...

      노부나가, 이에야스, 마사무네처럼 본거지를 옮기며 영지를 재편하는 센스가 없는 한 결국 멸망만이 기다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4. 나라 2009.06.03 16: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 그렇게 따지면 역시 오다, 도쿠가와, 다테 정도만이 그런 센스를 가졌군요. 서국에선 의외로 그런 센스를 가진 다이묘가 없네요...; 우에스기도 옛 자기 영토에 좀 집착하고 말이죠. 도쿠가와는 어찌보면 앗싸 ㅋ 영지 바꿨다 ㅋ 라는 느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는 미카와(三河) 오카자키(岡崎)에서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에 자력으로 옮긴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고보니 서국도 미요시 나가요시 같은 사람은 본거지를 옮겼군요. 아와(阿波)에서 수도권(近畿)로.


 그야말로 이색의 쇼우군[軍]이었다.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게 비기 [히토츠노타치(太刀)]를 전수받았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전란 다발하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자기단련이었다. 1546년에 쇼우군[軍]이 되면서부터 요시테루에게는 하루라도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요시테루 치세인 1546년부터 1565년에 이르는 20년간은 중세의 암흑기에서 근세의 여명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였다. 일본에 온 하비에르[각주:1]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노부나가[信長]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쓰러뜨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격동기의 고뇌를 요시테루는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친 요시하루[義晴]와 함께 전란의 쿄우[京]에서 피신하여 오우미[近江]에 있었던 요시테루는, 쇼우군[軍]이 되어 쿄우[]로 돌아와서도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의 다툼에 휘말려, 부평초[浮萍草]처럼 양 세력 사이를 떠도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오우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 그러나 결국 미요시 쵸우케이의 실력에 굴복하여 미요시 체제에 옹립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때가 1558 11.

 쿄우()로 돌아온 요시테루는 이것이 정말로 기뻤던 듯, 어소[御所][각주:2]의 마당에 서서는 밤하늘을 향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이 즈음, 그제서야 칸파쿠[白]였던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친인 케이쥬인[寿院]이 오랫동안 권해왔던 이야기였다. 요시테루의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 준다.[각주:3]


 미요시 쵸우케이가 죽자, 요시테루는 지금이야말로 막부(幕府)의 실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붕고[豊後]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나,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등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쇼우군의 의도는 죽은 쵸우케이의 모신(謀臣)이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義栄][각주:4]를 새로이 쇼우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간파하기에 이른다. 히사히데는 같은 쵸우케이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과 상담한 후 선수를 쳐 요시테루의 어소(御所)를 습격하기로 한다.

 

 1565 5 19.

 때는 장마의 계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마츠나가, 미요시 군세는 갓과 우비를 입고서, 키요미즈 사[寺]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쿄우[京]로 올라가고 있었다.

 히사히데는 밤이 되기 직전에 일부러 어느 소송(訴訟)에 대한 서장을 어소에 제출했다. 응답에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노림수였다. 그 사이에 히사히데의 무리들은 어둠에 섞여 어소 안으로 잠입하여 마루나 복도 밑에 몸을 숨겼다.

 

 갑자기 함성이 울려 퍼졌다. 궐기의 신호였다. 어소에는 사무를 보는 몇몇 외에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명확해지자, 검호 쇼우군답게 각오를 정하여 금생의 이별 주연(酒宴)을 열었다. 호소카와 타카요시[細川 隆是]가 여관(女官)코소데[小袖]를 뒤집어 쓰고 춤을 추었다.

 이때 요시테루는, 그 코소데 위에 사세구(辭世)의 시를 적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내 이름을 알려라 구름 위에까지

五月雨は露かかほととぎす

わが名をあげて雲の上まで

 그때부터 요시테루의 활약은 눈부셔 몇 자루나 되는 칼을 마루에 꼽고서는 날이 무뎌지면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달려드는 적을 마구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다. 한 적병이 문틈에서 창으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 요시테루는 넘어졌다. 거기에 적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장지문으로 몸을 누르고는 그 위에서 창으로 내리 찔렀다. 그때 불길이 한꺼번에 번져 요시테루의 목을 베지 못한 채, 건물은 화재로 무너져버렸다고 한다.(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

1536년생. 첫 이름은 요시후지[義藤].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아들. 1546년 아시카가 제 13대 쇼우군이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를 칸레이[管領=쇼우군의 보좌역]로 임명 하였지만,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 氏綱],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등이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미요시 측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바쿠후의 실권은 쵸우케이가 쥐게 된다. 쵸우케이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서 정권탈환을 기도하지만 히사히데 등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1565년 당시 아직 30살이었다.
  1. 일본에서는 ‘자비에르[ザビエル]’ 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높은 귀인의 거처 겸 정무소.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요시테루의 모친 ‘케이쥬인’은 장인인 ‘코노에 타네이에’의 여동생이다. 즉 요시테루는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본문으로]
  4. 아시카가 바쿠후 14대 쇼우군, 요시테루와는 할아버지가 같은 사촌지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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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6.24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생각하는 사나다 노부시게와 더불어 사나이의 로망 중에 한사람이라고 취급받는 그 사람이네요. 원래 단기필마로 다수와 맞짱뜨기는 영원 불멸의 로망이랄까요 (먼산-_-)
    그러고 보니 고노에 가문이 어떻게 된지 궁금하군요. 아마 1600년대 당시 얼마 못가 단절 된걸로 아는데 찾아봐야겠네요. 마법선생 네기마보는 중에 코노에 코노카 보다가 이거 보니 갑자기 떠오른 물음 ^^
    요즘 전기공사실기 땜에 죽겠네요. 완전 삽질 ㅠㅠ 더운 여름입니다. 잘 보내세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플레쉬 오버덕분에 추한꼴을 면했군요(;; 노부나가도 그 덕을 봤더랬던;;;) 뭐 생각해보면 하늘에도 눈이 있어 히사히데 어르신도 염상에서 녹아나버리지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정말 막말의 간지쇼군(ㅋㅋㅋ) 어느 막부의 말에도 이런 쇼군은 없었다(!)랄까요.. 그런데 서른에 죽은 사람치고는 너무 삭아보이는군요(;;젊을적 고생이 심해서 그런겐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세구를 읽다보니 호토토기스를 번역을 빠뜨리신 듯 하네요. 위키에는不如帰라 적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촉의 망제의 설화를 떠올리게 하려 하지 않았으려나 싶네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로유메님//저도 갑자기 궁금해 져서 찾아보니 지금도 코노에 가는 있는 것 같습니다. http://ja.wikipedia.org/wiki/%E8%BF%91%E8%A1%9B%E5%AE%B6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5 1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로유메님//노부타다도 꽤나 멋있었다고 하더군요.
    제일 앞에 서서 정면 돌격하여 몰려드는 아케치의 잡병을 단번에 20명 가까이 벤 노부타다의 옆에 있던 근시에게 한 말...
    [용감하도다! 이번 생에서는 은상을 줄 수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은상을 내리마]... 라는 말이 있더군요.
    코노에 가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죠. 예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煕)의 외갓집이 코노에 가문이죠.
    전기 공사 실기. 무운을 빌겠습니다.

    다메엣찌님//플레쉬 오버?? 뭐죠 그건?? ^^; 저는 노부나가도 나름 멋지게 싸웠다고 생각하지만요 ^^.
    네덜란드의 로번(로벤)이라던가, 맨유의 전설 바비 찰튼의 10대 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젊은 편...
    참... 전 시쪽은 딸려서 그러는데, 그 호토토기스...는 번역할 때 집어 넣어야 하는 것인가요?
    형식의 하나다 보니 빼도 될 것 같아서 뺐습니다만...

    고사천사님//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 워낙 명문가다보니 단절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6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토토기스는 불여귀(두견새)를 의미하는 말인데 여기서 그냥 제 생각에 두견새전설(촉 망제가 부하에게 쫓겨나서 피를 토하며 죽었더라..)을 떠올리고 요시테루가 읊은게 아니었나 싶어서요.

    그나저나 그 난국에서도 살아 도망간 사람이 있었으니 저런 멋진 사세구가 남았지.. 그런 의미에서 혁신 켜서 한번 참수시켜봐야겠습니다(쿨럭;)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6 09: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플레쉬 오버는 제가 이쪽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론으로 설명하긴 힘든데.. 공장 화재 때 현장에서 한번 봤는데 잘 타던 건물이 한쪽 격벽 부서지니까 엄청난 불길이 바로 그쪽 격벽의 연소 가능한 산소를 태우러 몰려가더(..;)군요.

    불 났을때 엘리베이터 타지 말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엘리베이터에는 불이 좋아하는 맛있는(;) 산소가 가득 차 있는 상태기 때문에.. 신나게 내려가다 화재층에서 멈춰서 문 틈이 열리기라도 하면 그 사이로 엄청난 불길이 화르르르..들어와 버리거나 하는 일 때문에(;;)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6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군요.(좋은 거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근데 [鳴かぬなら殺してしまえ、ホトトギス]라는 말과 같이 왠지 형식적으로 집어 넣은 듯 해서 두견새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플레쉬 오버란 것이 그런 것이었군요!!! 이 또한 좋은 지식 감사드립니다.
    (전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기법 중의 하나를 말씀하시나 해서 착각했습니다. ^^; 그래서 노부나가 운운해 버렸구요...그러고보니 비오는 날의 혼노지도 그렇게 불타오른 것을 보면 거기도 비슷했나 봅니다)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87 5 23일 병사(病死) 58.

1530 ~ 1587.

이름은 요시시게[義鎮].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城主). 선교사 하비에르를 후나이[府内]로 초대하였고 후에 세례를 받아 이토우 만쇼[伊藤 マンショ] 등 텐쇼우 견구소년사절(天正遣少年使節[각주:1])을 로마로 파견했다. 큐우슈우[九州] 6개국을 지배했지만, 미미가와 강의 전투[耳川い]에서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패하여 쇠퇴(衰退)하였다.








신앙으로 인한 부부싸움.


 센고쿠[戦国]의 시대.
 오오토모 소우린의 전성기 때에는 붕고[豊後]를 중심으로 큐우슈우[九州]의 붕고, 부젠[豊前], 히젠[肥前], 히고[肥後],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의 슈고[守護][각주:2]에 임명 받았고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각주:3]도 병행해서 수행했다. 그러나 말년은 시마즈 씨()의 위협, 부인과의 싸움 건강 악화라는 고난으로 가득 찬 나날들이었다.


 소우린이란 이름은 불교인 선종()에 들어갔을 때 얻은 호() 원래는 요시시게라고 하였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으며 적자(嫡子)인 요시무네[義統[를 낳은 부인은 쿠니사키[東] 반도에 있는 나타 하치만 궁[奈多 八幡宮]의 대궁사(大宮司) 나타 아키모토[奈多 鑑基]의 딸이었다. 이 부인과 소우린은 자주 부부싸움을 하였다.


 젊었을 때의 소우린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남편을 죽이면서까지 남의 부인을 빼앗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그러나 나타 씨[奈多氏]라고 불린 부인과의 부부싸움 원인은 여성 문제가 아니었다. 부인은 해가 갈수록 소우린이 기독교에 빠져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소우린은 해외무역의 막대한 이익에 주목, 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권한을 가진 선교사와의 우호를 위해서 가신들 뿐만 아니라 혈연들에게까지 입교를 권했다.


 나타 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정은 대궁사(大宮司)를 하고 있으며 신도(神道)를 깊이 믿고 있던 나타 씨에게 있어 기독교는 사교(邪敎)였다.

 남편이 둘째 아들 치카이에[親家]에게 세례받도록 권한 것을 따졌으며, 또한 그녀는 자신의 친오빠 치카카타[親賢]와 함께 교회를 파괴하거나 선교사를 죽이려고 병사를 보내 크리스천 무사들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기에 부부 사이는 더 멀어졌다.


 선교사들은 이런 나타씨에게 이세벨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세벨이란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예언자를 추방한 여자였다. 프로이스의 [日本史] - 나타 씨는 행실이 좋지 못하였고 성격차이가 심했기에 소우린은 그녀를 혐오하였고 너무 고민한 나머지 병에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나타 씨의 시녀장(侍女長)은 병상에 있던 소우린을 정성껏 간호하였는데, 이 여성은 집안일을 다스리는데 뛰어났다. 소우린은 이 여자를 나타 씨의 저택에서 데리고 나와 세례를 받게 하여 '쥬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하였고 나타 씨와 이혼한 후 그녀와 결혼하였다. 1678년의 일로 소우린 49, 쥬리아 40세였다. 또한 소우린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순수하게 믿게 되어 결국 자신도 세례를 받고 [동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몰락의 시작


 이 즈음인 휴우가[日向]의 영유하고 있던 이토우 요시스케[伊東 義祐]가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에게 패해 도망쳐 와서는 소우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소우린은 침략자 시마즈를 쫓아내고 휴우가[日向]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고자 했다.


 처음에 해로를 택한 소우린은 배에 인도의 부왕(副王)에게 선물받은 붉은 십자가의 깃발을 앞세웠으며, 거기에 새로운 부인인 쥬리아 그리고 선교사들과 함께 휴우가[日向]로 향했다. 도중에 육로(陸路)를 택한 소우린은 가는 곳 마다 신사(神社) 절을 파괴하였으며 길이 험한 곳은 불상으로 메우면서 진격했다.

 오오토모 5만의 병사들 대부분은 기독교도가 아닌 신불을 믿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신불을 무시하는 소우린을 불신하여 사기는 낮아만 갈 뿐이었다. 또한 소우린은 시마즈를 경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도 커서 11월.

 7(里)[각주:4]의 산과 들에 2만이 넘는 시체가 널릴 정도로 미미가와 강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가신들은 신불이 내린 벌이라며 소우린을 비난하였고 이는 오오토모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기도로 보낸 은거생활


 가독(家督)을 물려주었던 적자 요시무네도 변변치 못하여 지역 호족들의 모반이 이어졌다.

 1586. 57세의 소우린은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큐우슈우[九州]로 군사들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마즈 씨의 압박은 계속 되어 우스키 성[臼杵城]이 포위당했다. 2문의 대포 '쿠니쿠즈시[国崩]'가 성 방어에 크게 활약했지만 성 밑 마을은 재로 변하였고 후나이[府内]도 불에 타고 파괴당했다. 이때 소우린은 전투 지휘는 물론 쥬리아 부인과 함께 영민(領民)들을 도우고자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농성에 의한 피곤으로 인하여 눈에 띌 정도로 쇠약해져 갔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에 와서 시마즈 씨를 쫓아 버렸다.

 그런 와중에 소우린은 자신의 남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츠쿠미[津久見]에 은거하며 쥬리아 부인과 함께 기도로 가득 찬 날들을 보낸다. 히데요시는 큐우슈우를 제압해 가는 도중에 소우린의 아들 요시무네에게 붕고[豊後]의 영지(領地)를 안도(安堵)해 주었다. 소우린은 안심했다. 또한 히데요시는 소우린에게 휴우가[日向]의 일부를 은거료(隱居料[각주:5])로 하사하려 했지만 사양하고 받질 않았다.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사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15일 후인 1587 5 23일.

 츠쿠미에서 쥬리아의 병간호를 받는 도중 58세의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렸다.

  1. 텐쇼우[天正]는 당시의 일본 연호. 이토우 만쇼, 치지와 미겔[千々石 ミゲル]의 정사(正使)와, 나카우라 쥬리안[中浦 ジュリアン], 하라 마르티노[原 マルティノ]의 부사로 구성된 사절단으로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왔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지던 지방관.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가 큐우슈우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의 장관. [본문으로]
  4. 리(里)는 길이의 단위, 약 4Km. 7리는 약 28Km. [본문으로]
  5.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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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3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앙으로 가정도 파탄나고, 민심도 잃고, 영지도 없애고, 수명도 단축하고 말았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3 1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죠.(아~ 정말 슬픈 일입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16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국붕..! 무려 오토모가 전용기술이건만 이런 슬픈 인연이..(;;)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7 0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름부터가 "나라 뭉개기".... 뭐 어느 쪽을 뭉개는지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만...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1.18 23: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도로 보낸 은거생활 부분에 년도가 잘못 된것 같아요. 1577년보다는 1586-1587사이 정도가 되겠네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0 1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컥~ 텐쇼우(天正) 14년이니 1586년인데.. 고맙습니다. 얼릉 고쳐놓겠습니다.

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571 6 14일 병사(病死) 75


1497 ~ 1571.

아키[安芸]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원래는 지방 호족(国人)으로, 오오우치 씨[氏]신종(臣從)하였지만,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 스오우[周防],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이와미[石見]를 평정(平定).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씨[尼子氏]를 멸망시켜 츄우고쿠[国] 지방 10개 국을 지배. 큐우슈우[九州]에서 오오토모 씨[大友氏]와도 싸웠다.






진두(陣頭)에 선 노장(老將)


 모우리 모토나리가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가독을 큰 아들인 타카모토[隆元]에게 물려주고 은거한 것은 오오우치 씨()를 멸망시킨 1557년으로 그의 나이 60세일 때였다. 그 이후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문서에는 타카모토의 후견인이라는 입장으로 서명(署名)을 함께 쓰게 되었다.


 그러나 들불처럼 영지를 넓혀가 아키[安芸], 빈고[備後],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의 맹주(盟主[각주:1])가 된 모우리 일족이다. 그로 인해 타카모토에게는 자신이 그것을 지키기엔 부담이 크다며 아비 모토나리의 편안한 은퇴 생활을 허용할 턱이 없었다. 정신차려 보니 은거는 커녕 타카모토의 책략에 말려들어 그 후에도 여전히 진두에 서서 전장(戰場)을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의 은거 선언


 이 상태로는 모우리 가문융성(隆盛)은 전적으로 자기 혼자만의 위업이라고 인식되어, 세간에는 가독을 이은 타카모토의 위엄이 서질 않게 된다. 상대 성을 탈취하는 데는 쿠니[国]와 구니[国]간에 정신적인 우열이 크게 좌우한다.

 타카모토도 이제는 35. 지금 모우리 가문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보는 타카모토의 두령(頭領)으로서의 위엄이다. 모토나리는 굴지의 지장(智將)으로 물러날 때를 판단할 수 있는 위대한 현자(賢者)이다. 물러날 때는 지금밖에 없다. 더군다나 조금씩 피로도 느끼기 시작했다. 아키[安芸] 사토우[佐東]에라도 은거시켜 달라는 말을 꺼내 보자[毛利家文書]


 이제는 완전히 쉬고 싶다는 이야기는 카츠라 모토타다[桂 元忠]에서 타카모토에게 전해졌다.

 타카모토는 깜짝 놀라, 그거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고 침을 튀기며 되받아 쳤다. 우선 문서로 동생들이며 모우리 양천[毛利 [각주:2]]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에게 모토나리 은거 반대 의사를 전하고 이어서 모토나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타카모토)에게 모우리 가문을 짊어질 만한 역량 따위 있을 턱이 없으며 아버지가 은거하신다면 저 또한 함께 은거하겠습니다. 아키[安芸]와 빈고[備後]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운데 거기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라면 더 이상 무리입니다. 부친이란 살아 있을 때는 자식의 뒤를 돌봐주어야만 하며,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도 두령(頭領)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만약 될 수 있다면 저도 은거해서는 코우츠루마루[幸鶴丸=테루모토(輝元), 5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습니다[毛利家文書]"


 그러나 모토나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타카모토의 애절한 바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타카모토는 최후의 결의문을 보냈다.


 아버님이 그렇게까지 은거를 하시고자 한다면 저 타카모토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겠습니다. 즉 제가 죽으면 아버님도 은거하여 편안히 살고 싶다는 말씀을 못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은거하시지 않고 가문을 다시리실 테니 모우리 가도 무너질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모토나리라도 은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타카모토가 단순히 제멋대로인 아들이었는지, 부친을 뛰어 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모토나리는 '마음은 은거, 몸은 현역'이라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거 소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채 스에 씨[氏] 잔당(殘黨)을 진압. 그 후에도 쉴 틈 없이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 빗츄우[備中], 분고[豊後],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등에서 모우리 일족(一族)분전(奮戰)이 계속 되었다.


 1563 8 3.

 타카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받아 이즈모[出雲]로 향했다. 도중에 빈고[備後]의 와치 사네하루[和智 誠春]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타카모토는 그 날 밤부터 격심한 복통(腹痛)이 찾아와 다음 날 아침 죽었다(향년 41).


 모토나리는 와치 씨가 타카모토를 암살한 것이라 의심하여 6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와치 씨와 관계가 있던 아카가와 모토야스[赤川 元保] 일족의 뿌리를 뽑고 결국에는 와치 사네하루를 죽였버렸다. 그러나 후에 아카가와의 무죄가 판명되어 모토나리는 크게 후회했다.


 이제는 어린 손자인 테루모토[輝元]의 뒤를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어 은거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모우리의 안태(安泰)를 기원하며


 이 즈음 사방에서 영토 침입의 위협이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북으로는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각주:3]].

 동으로는 비젠[備前]의 우라카미 무네카게[浦上 宗景].

 서로는 분고[豊後]오오토모 요시시게[大友 義[각주:4]].

 남으로는 이요[伊予] 노시마 수군[能島水軍]무라카미 타케요시[村上 武吉] 등이었다.


 모토나리는 건강에 대해서는 남보다 배는 더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1566년 결국 간헐적으로 발병하는 학질에 걸려, 재발이 계속 이어지던 1571 6 14일.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죽었다.

 향년 75.

 

묘소(墓所)는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의 토우슌 사[洞春寺]터에 있는데, 진기하게도 야마구치 현[山口県] 슈우난 시[周南市] 미츠오[三丘] '모토나리 이빨 사당[元就歯廟]'이 있다.

 이것은 미츠오 성주(城主)였던 모토나리의 7번째 아들인 아마노 모토마사[天野 元政] 부적으로 가지고 있던 모토나리의 이빨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1. 모우리 씨(氏)는 지방 호족 연맹의 맹주 격이었다. 즉 지방 호족들은 신하라기 보다는 대등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모토나리가 구축한 모우리 가문의 군사-정치 조직. 모토나리의 둘째와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낸 킷카와나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카와(川)라는 글자가 들어갔기에 이러한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증손자. 아마고 씨(氏)는 요시히사 대(代)에 망했다. [본문으로]
  4.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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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8.22 2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카모토가 좋게 가독을 물려받았으면 일찍 죽지 않았을텐데요. 지병이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역사엔 '만약'이 없다고 하는데, '만약'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22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 식중독이었을 것입니다. 와치씨가 타카모토를 죽일 특별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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