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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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2.02.23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나다 가문의 인물들은 평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수많은 창작물에 의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센고쿠시대의 아이돌급 인물들이기 때문이겠죠.

    신슈가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생각은 자주 듭니다. 신겐도 무참히 박살난 것이 여러번이요, 도쿠가와도 신슈 전역을 통치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이에야스는 본인이 마사유키에게 직접 패한 적은 없었는데 왜 마사유키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느꼈던걸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3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도 막부의 창시자를 부자이대에 걸쳐 괴롭혔다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나노信濃는 아무래도 남북으로 길며 거기에 산악지방이다 보니 하나의 쿠니国치고는 다양한 세력들이 작게나마 많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생각합니다.
      거기에 시나노라는 지역이 무로마치 시대 때 좀 특수한 지역이었습니다. 쿄우토 무로마치 막부에서 보기에 라이벌인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영향권과 맞다은 곳이다 보니 다른 곳과는 다른 특혜나 명예가 좀 주어졌던 곳이더군요. 아무래도 그러다보니 다른 곳에서 시나노를 차지하는데 더 힘이 든 것 같습니다.

      상기의 일화 등은 에도시대 사나다 가문의 가신인 타케노우치 노리사다[竹内 軌定]가 지은 진무내전(真武内伝)이란 책에 실린 것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조금 의문시됩지요. 이에야스가 실제로 두려움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 대전란에서 도쿠가와 잡는 장면 정말 재밌게봤는데 6편 이후로 번역이 안되니 너무 아쉽습니다.

 1578년 3월.
 천하에 용명이 자자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켄신은 평생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기에 친자식이 없어 자연스레 후계 다툼은 켄신의 양자 중 둘로 압축되었다.
 한 사람은 동족[각주:1]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와 켄신의 누나 센토우인[仙桃院]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게카츠[景勝], 또 한 사람은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의 성주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아들 카게토라[景虎]였다.

 카게카츠는 부친 마사카게가 켄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뒤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 定満]에게 살해[각주:2]당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친과 함께 켄신 아래서 자랐는데, 켄신과는 친척인 것도 있어 켄신에게 귀여움 받으면서 자랐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위해서 손수 습자첩(習字帖)을 만들어 주었으며, 켄신이 에치고를 통일했을 때 받은 ‘단죠우쇼우히츠[弾正少弼][각주:3]’의 관직명을 카게카츠에게 물려주었다. 그런 점 때문에 켄신은 카게카츠를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라 여겨졌다[각주:4].

 하지만 켄신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유언도 남겨지질 않아 카게토라에게도 충분히 후계자의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켄신의 장례식도 치러지지 않은 채 카게카츠와 카케토라 사이에 상속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 에치고를 둘로 나누는 쟁란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이라고 한다.
 다음 해인 1578년 3월 카게카츠는 오타테의 난의 승자가 되었다. 이때 카게카츠의 나이 25세였다.

 카게카츠는 과감한 무장이었다.
 오타테의 난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1582년 3월.
카이[甲斐]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멸문시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명령하여 우에스기 공략을 시작[각주:5]한 것이다. 카게카츠는 각오를 정했다. 칸토우[関東]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에게 그런 결의를 담아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활과 화살을 들고 에치고 하나만으로 일본 전토 60여주와 싸우려고 합니다. 일전을 치러 멸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명예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운 좋게 살아 남는다면 일본에 비할 바 없는 영웅으로 이름을 남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면목을 세우는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사옵니다.[각주:6]

 또한 시대는 나중이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의 도화선이 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생트집[각주:7][각주:8]이 있었을 때, 카게카츠는 휘하의 장수들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모반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냥 나이후[内府=
이에야스]에게 굴복하는 것도 내 뜻과 다르다. 이제는 결심했다. 싸우게 되면 우리 가문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지금 떠나도록”
 카게카츠가 실제로 저렇게 말했는지는 둘째치고 시국에 정면으로 맞서려 한 카게카츠다운 일화이다.

 카게카츠의 직속부하들은 카게카츠를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정말 추상같은 위엄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카게카츠는 직속부하들에게 단 한번도 따스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미소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카게카츠는 한 마리의 원숭이를 길렀다. 어느 날 이 원숭이가 카게카츠의 두건을 쓰고 카게카츠의 자리에 앉아 깍지를 끼고서는, 잘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명령을 내리는 흉내를 내었다. 아마 카게카츠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카게카츠는 웃었는데, 이 웃음은 카게카츠가 근신들에게 보인 생애 유일한 웃음이었다고 한다.

 또한 어느 때인가 후지가와[富士川] 강을 건널 때, 한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가라앉으려 하였다. 카게카츠는 노기 서린 얼굴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배에 있던 부하들은 일제히 강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어 카게카츠가 쿄우토[京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 이하 수백 명의 행렬은 너무도 조용하여 기침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고 오로지 사람과 말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는 막부군에 속하여 오오사카 시기노[鴨野]에 포진하였다. 그곳을 니와 나가시게[丹羽 長重][각주:9]가 방문하였는데, 그때 카게카츠는 몸에 갑주도 걸치지 않고 청죽(靑竹)으로 지팡이 삼아 걸상에 앉아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좌우에는 장병 300여명 모두가 창을 세우고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카게카츠와 함께 오오사카 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깃발은 켄신 때부터 이어져오는 감색 바탕에 히노마루[日の丸]의 부대표식[馬標]과 [毘]의 깃발을 치켜세운 진중은 너무나도 숙연하였다.
 나가시게는 군기가 너무도 빠릿빠릿한 그 모습에 뻑이 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시대를 앞으로 되돌려 1582년 4월부터 시작된 오다 군[織田軍]의 우에스기 공략은 6월 3일 엣츄우[越中]에 있는 우에스기의 속성(屬城) 우오즈 성[魚津城]이 함락되어 카게카츠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바로 이 전날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는 바람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건을 알게 된 오다 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카게카츠는
히데요시[秀吉]를 차세대 패자(覇者)로 보고 접근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오대로(五大老)[각주:10]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아이즈[会津] 120만석[각주:11]으로 당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에 이은 제3위이란 거대한 영지를 하사 받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카케카츠의 인생은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계속 보내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바뀌게 된다.

 천하를 향한 이에야스의 야망이 명확해지자,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지를 다스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1599년 고굉지신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함께 아이즈로 귀국하여, 이후 이에야스의 상경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내(領內)에 있는 성곽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이미 이에야스와의 전쟁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미리 손잡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카게카츠는 이에야스가 물러간 다음에도 병사들을 이에야스의 본거지 에도[江戸]가 있는 남쪽으로 보내지 않고, 배후에 있는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영지 야마가타[山形]를 공격하기 위해 나오에 카네츠구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카네츠구는 야마가타 성[山形城] 근방까지 진격했지만, 그때 이미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서군(西軍)이 패한 뒤였다. 카게카츠는 결국 항복의 길을 택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555년생. 처음엔 키헤이지[喜平次]. 가독(家督)을 이은 얼마 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항복하여 이후 충성을 다했다. 1586년 에치고[越後]를 중심으로 55만석을 영유했으며, 후에 토요토미[豊臣]의 성(姓)과 하시바[羽柴]의 씨(氏)를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임진왜란에도 참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의 패전으로 아이즈 [会津]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되어 이봉되었다. 1623년 죽었다. 69세.

  1. 켄신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가독을 물려받기 전의 성이 나가오[長尾] [본문으로]
  2. 보통 둘이 배타고 연못에서 놀았는데 술에 취해 둘이서 수영하다 익사하였다고 하며, 켄신에게 반항적인 마사카게를 여명 얼마 안 남은 사다미츠(76세)가 살해함으로써 주군 켄신을 편하게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군기물 北越軍談 이야기라고 한다. [본문으로]
  3. 관리를 감찰하는 기관 '단죠우다이[弾正台]'의 차관. 억지로 우리나라의 기관과 비교한다면 감사원 공직감찰본부장 쯤? [본문으로]
  4. 근래에 들어선 에치고의 영주에는 카게카츠,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는 카게토라에게 물려주려 한다는 시각이 대세인 듯. [본문으로]
  5. 엣츄우[越中] 방면에선 시바타 카츠이에, 시나노[信濃] 측에선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코우즈케[上野]에선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각각 카게카츠의 에치고[越後]를 노렸다. [본문으로]
  6. 사실 이때는 정세가 이렇게 사면초가가 되고 나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고,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노부나가와 화해하려고 노력했었다. [본문으로]
  7. 一. 영지 경영하지 말고 빨리 상경해라, 一. 어쩌면 조선을 다시 공격할 수도 있으니 그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 一. 에치고[越後]의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가 말하길 카게카츠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 一. 어째서 무기 사들이고, 길이나 다리를 고치며, 성을 새로 쌓고 있나? 등 [본문으로]
  8. 그러나 사실 우에스기 가문이 정비한 길이나 새로 만든 성 등은 모가미 영토로 침입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카게카츠에게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났을 때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영토로 침입하여 탈취하려 했던 것 같다. 또한 성을 새로 짓는 행위는 히데요시가 엄히 금했던 것이었던 만큼, 이에야스가 괜한 생트집을 잡는다고는 할 수 없다. [본문으로]
  9.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의 아들. 이 당시 히타치[常陸] 훗토 번[古渡] 1만석의 번주. [본문으로]
  10.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1. 아이즈[会津] 92만석, 사도[佐渡] 14만석, 쇼우나이[庄内] 14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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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5.27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게가쓰와 가게토라의 '분업'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군요. 매우 일리있어 보입니다. 나가오의 핏줄은 에치고를 포함한 호쿠리쿠를 유지하되, 호조의 핏줄을 내세워 간토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의도로 보이는군요. 해석이 제멋대로는 아닌지 모르겠네요.

    도해 전국무장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부분을 봤는데 사례가 제시되지 않아 발해지랑님께 여쭙겠습니다. 여기 보니 슈도에 관한 대목 중 적장에게 반해 사로잡고자한다는 설명이 있는데 혹시 사례를 아시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27 2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슈님이 말씀하시는 의도가 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켄신이 너무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사이가 나뻤던 우에다 나가오 가문[上田長尾家]과 코시 나가오가문[古志長尾家]을 축으로 갈리는 바람에 오타테의 난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집에 내일 들어가기에 그 부분을 좀 봐야겠군요. 다만 과문하여 그런 케이스는 첨 듣는군요.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5.28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가오 가문의 대립에 대해선 불초하여 잘 모릅니다만 간략히 서술해 주실 수 있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02 14: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음... 이건 따로 포스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2. 맹꽁이서당 2011.06.01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에스기 가문도 모리나 시마즈 가문처럼 막부 말기에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한을 풀려고 일어날만 했겠네요. 지역이 외진 곳이라 못 일어났을까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아이즈'라는 국명이 등장하던데, 아이즈 = 에치고 국인가요? 일본 66국 지도를 보면 노토반도 동쪽에서 동해안을 따라 엣츄, 에치고가 있고 그 북동쪽에 데와국이 있더라구요. 처음에 55만석을 받았다는 '에치고'에서 120만석 '아이즈'로 이동되었는지, 아니면 에치고 = 아이즈라서 그냥 영토가 확장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02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네자와 번[米沢藩]은 3대 츠나카츠[上杉綱勝] 때 츠나카츠가 급사하여 대가 끊어질 뻔 합니다만, 당시 막부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아이즈 번[会津藩]의 호시나 마사유키[保科 正之(아버지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도움으로, 츠나카츠의 여동생과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 츄우신구라[忠臣蔵]에서 유명한 악역] 사이에서 낳은 츠나노리[上杉綱憲]를 양자로 받아서 번을 유지할 수 있어(대신 30만석에서 15만석으로 감봉), 그 은혜를 막말까지 잊지 않고 있었기에 아이즈 번과 같은 길을 택하게 됩니다.
      (아이즈 번이야 쵸우슈우 지사들이 薩賊会奸[도적의 사츠마, 간신배의 아이즈]라고 하며 신발 바닥에 쓸 정도로 좌막파의 기수).

      아이즈[会津]는 무츠[陸奥] 남부에 있는 군(郡)의 이름입니다. 일본지도를 보시면 토우호쿠[東北] 지방에 후쿠시마 현[福島県]의 한 가운데 이나와시로 호수[猪苗代湖]가 있고, 그 옆에 분지가 있는데, 대충 그 부근입니다.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동된 것입니다. 우에스기 가문이 떠난 에치고의 자리엔 만화 센고쿠에도 등장하는 호리 히데마사[堀秀政=센고쿠에는 호리 규타로]의 아들 호리 히데하루[堀秀治]가 30만석으로 입국합니다(그 외 5~6만석급 가문이 몇개 더).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은 아이즈로 떠나면서 연공을 싸그리 가져가는 바람에, 호리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은 사이가 엄청 안 좋아지고, 그것이 주석 7번에 언급된 호리 가문이 우에스기 반란 운운하는 계기로 이어집니다.

    • 맹꽁이서당 2011.06.02 1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그럼 간토8주로 이봉된 이에야스처럼, 가게카쓰도 히데요시에 의해 더 많은 영지를 얻은 대신 더 먼 곳으로 이봉된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세키가하라 패전으로 이봉한 요네자와는 더 북쪽?)

      요세 '센고쿠' 2부가 번역되지 않아서 참 아쉽더라구요. 언제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아이즈라는 자리가 워낙 요충지다 보니 뭐 영전이라면 영전이라고 할 수 있습죠. 다만 그 시대는 워낙 자신들 본거지에 목을 메던 시대(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도 오와리를 내 놓고 이에야스가 다스리던 자리로 가라니까 거부했듯이)라 우에스키 가중은 조금 떨떠름해 하지 않았을지...

      그렇습죠. 요네자와는 아이즈보다 쪼금 북쪽으로 볼 수 있습죠.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6.02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게카츠가 켄신 죽고 카게토라보다 빨리 일을 착착 진행한걸 보면 어느 정도 준비는 하고 있었던거 같군요. 생전에 얘기를 안해뒀으니 생각 하고 있었던게 당연한 걸수도 있겠고...

    원군도 없고 교섭도 안먹히고 결국 자결한 카게토라도 카게토라지만
    카게토라 쪽에 붙었다 죽어버린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왠지 더 억울해 보이기도...
    애초에 왜 카게토라한테 붙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호죠라면 무지하게 싫을법도 한데...혹시 알고 계시면 가르침을 구해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착착 진행이라기 보다는, 운 좋게 켄신이 죽을 당시 친카게카츠 파들이 그 주위에 있어서, 카게토라 등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로 일을 진행시킨 듯 합니다.

      카게카츠파와 카게토라파가 처음 맞부딪힐 초기만 하더라도 에치고를 둘러싼 다이묘우들은 대개 카게토라를 응원했다고 하더군요. 카게카츠파의 공작이 그만큼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왜 붙었는지는 궁금하더군요. 다만 켄신이 죽고 카게카츠파가 우에스기 가문의 가독과 그에 딸린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의 직까지 계승한다고 선언하자, 노리마사가 '딴 건 몰라도 우에스기 가문 가독과 칸토우칸레이 만은 내 결제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말은 하였지만, 카게카츠파는 '이미 켄신이 정한 일이다'고 우겼다는 말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쪽에서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을지...

      어쩌면 그냥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 대항할 만한 곳이 노리마사 거관이었던 오타테[御館]였기에, 카게토라파가 그곳을 점령하다보니 휩쓸린 것이 아닐지...
      (...라고 예전엔 생각했습니다. 지금 오타테의 난을 다룬 책을 하나 기다리는 것이 있으니, 책 도착하여 특별한 것이 있으면 따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6.18 18: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제라...그럴수 있겠군요.
      개인적으론 결제로 맘 상하는거보다 자기 쫒아낸 집 자식인게 더 큰일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아비는 아비고 자식은 자식이었을런지;;;;

      적당히 물어본 질문에도 언제나 장문으로 답변을 써주셔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왠지 죄송하기도 하고...^^;; 그래도 신경써서 답변 달아주시니 매번 감사합니다.

  4. 본다충승 2011.06.03 14: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키헤이지 당신은 요로쿠를 멀리 했어야 했습니다. 갠적으로 우에스기 몰락(?ㅋ)의 주범을 야마시로노카미로 보기에... ㅎ 참으로 오랜간 만에 들어 왔습니다. (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카네츠구가 없었음 아예 그런 기회조차 없었을 것 같군요. 카네츠구는 알려진 만큼 뛰어난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후리타 오리베[古田 織部]의 이름은 센고쿠 무장[戦国 武将]이라기 보다는 다인(茶人), 도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오리베 애호[織部好み]’라 불리는 기발한 그릇 모양과 특색있는 문양을 가진 도기(陶器)를 창시하였고, 그것이 지금 ‘오리베야키[織部焼]’라는 이름으로 명물이 되어 있다.

 오리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후세에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인 다인 다이묘우[茶人大名]이다. 그러한 오리베였기에 특별한 무공은 없었다. 다도를 좋아했던 히데요시[秀吉]에게 총애를 받아 히데요시의 말상대인 ‘오토키슈우[御咄衆]’까지 출세하였다.

 스승으로 섬긴 리큐우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자살을 언도 받은 뒤 오리베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져, 오리베의 저택에는 다이묘우나 다인(茶人)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다. 오리베가 감정을 하고 보증서를 하나 써주면 바로 지금까지 부엌 한 구석에 놓여있던 투박한 사발[茶碗]도 곧바로 천금의 가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곧이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자 오리베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속하여,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통하고 있던 히타치[常陸]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를 설득하여 서군에 참가하려던 요시노부를 중립에 서게 만들었고, 이 공적으로 인해 이에야스에게 1만석을 하사 받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2] 거기에 더해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다도사범이라는 지위를 얻어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에게 다도를 가르치는 몸이 되었다.

 이때까지 오리베의 인생은 순풍에 돛이 단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시작된다.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는 별일 없었다. 오히려 웃긴 일화조차 전해진다.

 어느 날 오리베는 살기등등한 진중 속에서 다도의 벗인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의 본진에 방문하였다.
 참고로 사타케 씨[佐竹氏]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의 행동으로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 전후(戰後) 아키타[秋田]로 이봉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에야스의 속한 무장으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요시노부는 최전선에 설치된 시요리[仕寄 – 대나무 묶음 등을 연달아 이은 총탄 방어용 방패와 같은 것]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리베는 그 안에 기어들어가기 위해서 투구를 벗고 들어갔고, 잠시 동안 요시노부와 쌓인 이야기를 한 뒤 차를 다리기 시작했다. 총탄이 오가는 와중에 지금으로 보면 실로 재수없는 행동이었다. 거기에 이 시요리[仕寄]의 대나무 묶음 속에 작은 차주걱[茶杓] 될 만한 좋은 대나무가 없나 하고 몸을 숙여가며 찾기 시작한 것이다. ‘싸움에 쓰이는 도구라도 다도에 쓰인다’는 오리베 류[織部流] 다도의 특색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좁은 시요리[仕寄]에서 몸을 움직였기에 오리베의 머리[キンカ頭]가 시요리[仕寄] 밖으로 삐져나와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것이 성 방어군의 눈에 띄었다. 이 빛을 향해서 철포가 불을 뿜었다. 그 중 한발이 오리베의 머리를 빗맞혔다. 오리베는 ‘꺄아~”라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지고 옆에 놓아두었던 찻잔을 닦는 수건[茶巾]과 받침으로 쓰는 헝겊[ふくさ]로 흐르는 피를 막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사타케의 군사들은 ‘다도인에 걸맞은 붕대구만’하고 낄낄대며 웃었다고 한다.

 이 다음 해인 1615년 여름 전투[大阪夏の陣] 직후 오리베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 전투도 마지막이 다가왔을 무렵, 오오사카 성 안에서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3]에게 밀고하는 자가 있었다.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의 가신(家臣) 키무라 무네요시[木村 宗喜]라는 자가 미리 오오사카 측과 의논하여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가 오오사카를 향해서 후시미[伏見]를 출발하는 것에 맞추어 쿄우토[京都]에서 거병하고, 오오사카 측과 호응하여 토쿠가와 군(軍)을 협격하려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일당의 체포가 시작되어 오리베도 역시 잡히는 몸이 되었고, 오오사카 낙성 후 할복이 언도되었다. 오리베가 정말 모반을 꾸몄는지, 만약 정말로 그러했다면 무엇이 원인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
1544년 미노[美濃]에서 태어났다고 한다[각주:4]. 이름은 시게나리 혹은 시게테루[重然], 통칭은 사스케[左助]. 나카카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매제로, 처음엔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휘하 무장[与力]이였고,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거쳐.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긴다. ‘다도백개조(茶道百箇条)’를 저술하였고,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 혼아미 코우에츠[本阿弥 光悦], 코보리 엔슈우[小堀 遠州][각주:5]의 다도 스승이었다. 1615년 6월 아들 야마시로노카미 시게히로[山城守 重広]와 함께 자해. 72세.

  1.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 [본문으로]
  2. 이미 이전에 히데요시에게 야마시로[山城] 니시가오카[西ヶ岡]에 3만5천 석을 하사 받아 다이묘우[大名]인 상태였다. 여담으로 '만화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에서 히데요시는 오리베에게 니시가오카 3만 5척석을 주며 "쿄우[京] 주변의 3만5천석은 중한 것이네"라는 대사를 한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일화 - 쿄우토 주변이라면 영지가 적어도천하를 바라 볼 수 있었을 것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쿄우토 주변은 적은 영지라도 무게감 있는 자리였다. [본문으로]
  3. 쿄우토 행정, 조정의 수호와 감시, 키나이[畿内]와 하리마[播磨]의 소송, 쿄우토, 나라[奈良], 후시미[伏見]의 각 봉행(奉行)를 통괄하던 직책. [본문으로]
  4. 노부나가 가신단 연구자인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씨는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에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직할군에 속해 있다는 기록과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4촌이라는 기록에 따라 킨키[近畿] 출신이 아닌가 - 라고 추론하고 있다. [본문으로]
  5. 근대 다도(茶道)를 집성시킨 인물. 또한 그 역시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였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의 다도사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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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키운 무장들[秀吉の子飼い] 중에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무장이다. 둘 다 맹장(猛將)으로 유명한 것에 더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된 방식과 토쿠가와 정권하에서 멸문하게 되는 운명 등 둘은 비슷한 경력을 걸었다. 단지 키요마사 쪽은 아들 타다히로[忠広] 때 삭탈관직 당하지만, 양쪽 다 토요토미 은고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였기에 막부(幕府)가 판 함정에 빠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키요마사와 같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다. 나이도 마사노리가 한 살 연상 혹은 동갑이라고 한다. 히데요시와는 아비 측의 연으로 어렸을 적부터 히데요시를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가 나무통 직공의 아들로 부친이 히데요시의 아비와 아비 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속설이기에 확증은 없다.

 어쨌든 그 즈음에 이치마츠[市松]라 불렸던 마사노리는 츄우고쿠[中国] 공략군의 사령관으로 하리마[播磨]의 히메지 성[姫路城]를 본거지로 하였던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도 또한 모친 쪽 연으로 데려온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 = 키요마사]와 마찬가지로, 이 이치마츠를 자신의 팔다리로 만들기 위해 곁에 두고 가르쳤다.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기대대로 용맹한 무장의 재능을 보이게 된다.

 1578년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공략 때 18살의 나이로 데뷔하여 공적을 세웠고, 그 후에도 톳토리 성[鳥取城],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각주:2]]에서 공을 세워 명성을 높여갔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용장 하이고우 이에요시[拝郷 家嘉]를 쓰러뜨려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3])’이라 용명을 얻는 수훈을 세워, 상으로 혼자서만 5000석을 하사 받아, 칠본창 중 다른 멤버들이 3000석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세운 공적이 다른 멤버들을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마사노리는 히데요리를 따라 각지를 전전.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했지만 1594년에는 귀국하여, 다음 해인 1595년 히데요시에게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코우야 산[高野山]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을 때 검시관에 임명되었다. 전쟁터의 마사노리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편으로 인정이 깊은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은혜를 입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히데요시의 애미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병에 걸렸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호했다고 하며, 히데츠구가 배를 갈랐을 때는 그 가엾은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고도 한다.

 그 후 마사노리는 히데츠구의 영지였던 오와리 키요스[清須] 24만석으로 가증(加增) 받았는데, 이때 마사노리는 어렸을 적에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지모쿠 사[甚目寺]라는 절의 늙은 비구니를 찾아, 예전 은혜를 갖는다며 먹을 것을 계속 보냈다. 더구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로시마[広島]로 옮기게 되자, 새로 오와리의 영주가 되는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각주:4]]의 가로(家老)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종래대로 늙은 비구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후 떠났다 한다.

 인정가(人情家)이기도 한 마사노리는 그런 만큼 격정가(激情家)이기도 했다.
 히로시마로 옮겼을 때의 이야기로, 어느 날 측근 중 하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이에 화가 난 마사노리는 이 측근을 굶겨 죽이고자 성 한 켠에 가두어 놓고 식사반입을 금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마사노리가 그 측근의 생사를 살펴보자 어찌된 일인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마사노리는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냐고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도의 자리에서 시중드는 중[茶坊主]이, 자기가 그러했다며 그 측근은 예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측근이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억지로 먹였다고 하며, 측근을 대신해서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중은 물론 유폐했던 측근까지 죄를 용서하였다.

 이러한 마사노리의 격정은 토요토미 정권의 행정관[奉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도 나타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600년. 마사노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따라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군에 종군하였는데, 이시다 미츠나리 거병 소식에 따라 열린 대책회의인 ‘오야마 군의[小山軍議]’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나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 유력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하였어도, 진중에 있던 다이묘우들 대부분은 토요토미 가문에게 은의를 느끼는 다이묘우였으며 게다가 오오사카[大坂]에 처자를 두고 있었다. 히데요리[秀頼]의 명령을 바탕으로 한 미츠나리의 거병이었기에 다이묘우들이 동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츠나리와 한편이 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소. 즉각 오오사카니 돌아가시길.”
 자리에 있던 다이묘우들은 이것저것 재보고 눈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츠나리의 거병은 히데요리 공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불과 8살의 어린 주군께서 그러한 생각을 하실 리가 없소. 즉 미츠나리 놈의 잔꾀일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마사노리는 나이후[内府=이에야스]와 함께 할 생각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마사노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다른 다이묘우들도 잇따라 이에야스에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히데요시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고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마사노리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이미 천하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의 앞길을 크게 넓혀준 것이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도 마사노리는 최전선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고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승리한 동군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무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을 마사노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지 전투 직후 어느 사건을 너무도 강인하게 해결하고자 하여 마사노리의 앞날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된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마사노리는 쿄우토[京都]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연락할 일이 있어 사자(使者)인 사쿠마 카에몬[佐久間 加右衛門]를 쿄우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히노오카[日ノ岡]의 검문소를 점거하여 왕래하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던 토쿠가와의 직속 신하[旗本] 이나 즈쇼노카미[伊奈 図書頭] 휘하의 부하들과 말싸움을 하다가 이나의 부하들에게 사쿠마는 몽둥이에 맞고 쫓겨나 버린 것이다. 사쿠마는 마사노리에게 돌아와 사정을 보고하고 난 뒤, 마사노리의 허락을 받고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마사노리는 이때,
 “반드시 이나 즈쇼의 목을 자네의 무덤으로 가져오겠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쿠마의 자결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게 사쿠마의 목을 보내고선, 이나 즈쇼의 목을 달라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재촉하면서 토쿠가와 측의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하여 결국 이나 즈쇼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어쨌든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으로 아키[安芸], 빙고[備後] 2개 지역 49만8천2백석이라는 큰 영지를 얻게 되지만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시세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뒤에도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여, 1608년에 히데요리가 천연두를 앓았을 때는 급거 히로시마에서 오오사카로 달려가 막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일어나지만, 마사노리는 겨울과 여름 양 전투에서 에도 성 잔류[留守居]를 명령 받았기에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았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마사노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막부의 처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요토미 측이 은밀히 마사노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마사노리는,
 “이에야스는 야전이 특기로 공성전은 잘하지 못한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은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5]가 세우신 천하제일의 성이니 이를 굳게 지키면 낙성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사자(使者)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오오사카에 있는 후쿠시마 가문[福島家]의 비축미(備蓄米)도 맘대로 쓰라고 했다 한다. 직접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내심 히데요리[秀頼]를 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오사카 공성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여 토쿠가와 정권의 기반이 강고히 다져지자, 토요토미 가문과 끈이 강했던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매서운 숙청정책이 시작되었다.
 1617년 마사노리는 법도(法度)에 따라 홍수로 파손된 히로시마 성[広島城] 보수공사를 해도 되는지 막부에 요청하여, 노중(老中)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각주:6]]에게,
 “뭐 조금 정도 보수하는 것이라면 괜찮겠죠”
 라는 구두 언약을 믿고서 정식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채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이것을 ‘모반의 징조’라는 생트집에 잡혀, 1619년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5천석[각주:7]으로 감봉되었다.

 더구나 마사노리가 죽었을 때 막부의 검시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유체를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후쿠시마 가문은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561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清須]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5000석을 하사 받았으며, 1585년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 10만석, 1595년 오와리 키요스 24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공적을 세워 히로시마 49만8천200석이 되었지만, 1619년 실각, 4만5천석으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 1624년 죽었다. 64세.

  1.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2.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히데요시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5. 히데요시를 말한다. [본문으로]
  6.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아들. [본문으로]
  7. 이 중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영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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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09.12.28 1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싸움에는 능했지만 정치에는 서툴렀다고 해야 할까요
    인생 후반기에 너구리 영감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사기꾼한테 사기 당하면서도 난 사기당한게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순진남이랄까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2.28 1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보처럼 인정에 휘둘리는가 하면 때때로는 어느 쪽이 득실이 있는가를 파악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니까요.(아무리 미쓰나리가 미워도 서군이 압승을 거둘 상황이었으면 서군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마사노리의 성품상 동군에 잔류해서 자폭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도요토미 가문이 불꽃처럼 번졌다가 사라진 것처럼 키워낸 이들도 불꽃처럼 사라지는 걸 보면 역사란 재미있습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P.S : 加藤 嘉明는 가토 요시아키가 맞는 건가요, 요시아키라가 맞는 건가요? 요새는 아사이가 '아자이'로 바뀌었다가 다시 어느 학자가 아사이가 맞다고 하기도 하고. 아직도 논란인 山內가 야마우치/야마노우치가 맞는가 논쟁도 있고. 사람들이 만드는 일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14: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땠을까요... 이시다에게 과연 넘어왔을지...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 이 인간은 좀 조심스럽군요.

      두번 째 문단은 좋은 말씀이십니다.

      ps;저도 보는 책마다 달라 헷갈리더군요. 일단은 양 쪽 다 괜찮지 않을까요? ^^; 일본 사람들 이름 읽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 정동희 2009.12.28 15: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 뭐...
      전에 일본사 강의 들을 때,
      왜 겐페이 시대에는 성뒤에 노를 붙였습니까
      (ex : 후지와라노, 다이라노, 미나모토노 )
      라고 교수한테 물어 보니
      당시에는 개인의 이름보다 어느 집안 출신이냐를 중시해서
      그렇게 불렀다(뭐 그 이후에는 안그랬나 마는...)
      좀 캐 물으니 정확한 사유는 안나오더군요 딱히 언제부터 그랬다 라는 것도 없고

      또 일본 사람들은 대충 한자나 가나로 이름 적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대로 부른다네요 어느정도 규칙은 있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는다는...

      아사이나 아자이, 야마우치나 야마노우치
      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너무 지엽적인거 가지고 이게 맞다 저게 맞다
      굳이 따질 필요가 있나 싶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동희님께//
      조금 이야기가 샙니다만 순서상 ^^

      후지와라 -> 우에스기[上杉], 사토우[佐藤]
      타이라 -> 호우죠우[北条], 치바[千葉], 오다[織田]??
      미나모토 -> 아시카가[足利], 닛타[新田]...
      로 나뉘어 지듯이, 후지와라, 타이라, 미나모토를 저는 우리나라의 김씨, 이씨, 박씨... 등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령 저같은 경우 함창 김씨 이니, 일본식으로 이름을 쓴다면 '함창 태진'....이 되지 않을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

      후지와라나 겐지, 헤이시가 각각 안 쓰이게 되는 상황 등을 살펴 보면 나올 것도 같습니다(헤이시가 太政大臣을 한 다음 멸문한 다음 '타이라'라고 칭하지 않았다거나, 겐지가 将軍을 한 뒤 '미나모토'를 직접 칭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뭔가 법칙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야~ 법칙은 있습니다.(가령 지금도 이름으로 쓸 수 없는 한자가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 사람이 원하는 식으로 불러 주는 것이 올바르다 생각합니다.
      가령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는 당시에 서로간의 편지나 족보 등에 '야마우치 카츠토요'라고 되어 있다고 하니, 그렇게 불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도 저는 입에 배었는지 '야마노우치 카즈토요'라고 하지만요)

  3. Gyuphi IV 2009.12.28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이 사람은.. 뭐 결과론적인 말입니다만 중요한 순간의 어리석은 선택의 반복으로 인생 쫑낸 것 같이 느껴지더군요. 명줄이라도 카토 키요마사처럼 짧았어도 이렇게나 당대에 망가지진 않았을것을.. 역시 바보라서 별 걱정도 생각도 없어서 오래 산건가 싶기도 싶기도 하고 말이죠-_-;;

    그런데 정말이지 오사카성 말입니다만.. 뭐 지금의 공구리 보수 이전의 규모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만, 후쿠시마 마사노리 말 마따나 오사카측이 선택에 전연 미스 없이, 굳게 지키고 있었다면 낙성당하지 않았으려나요, 해자를 메운다는게 정말이지 일반적인 상상 이상의 도쿠가와가에게 전술적 이득을 안겨준 행위였던가, 싶네요. (라곤 해도 나고야성 가보면 그 해자도 참 깊다 생각드는데 당시 규모의 오사카성이었다면..)

    후세인이란 그러고보니 참 편한듯 합니다. 이정도 세월이 지나면 그 당대의 고민따윈 크게 의식않고 막 말해도 잡아가는 사람도 없으니까요(아, 이건 참 역사에 흥미있는 사람들의 특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30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 곳을 정하면 무작정 그 방향으로만 냅다 뛰는 성격이 아닐지... 왠지 저에겐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전쟁과 성 쪽은 제가 좀 딸리는 편이라 말하기 뭐합니다만, 토쿠가와 쪽의 오오사카 성이 이시가키[石垣]가 더 높고 텐슈[天守]도 크고 높으며, 성 면적 자체도 조금 더 커졌더군요. 그렇게 만든 놈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라고 하던데, 직접 오오사카 공성전에 참가한 놈이었던 만큼, 뭔가 허술한 점을 찾았기에 히데요시와는 다른 형태의 성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합니다.(뭐 대포가 쓰인 것도 있었고 말입니다)

      그쵸. 당시에 그 사람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 했다간 斬り捨て御免이었을테니까요. ^^;

  4. 맹꽁이서당 2010.01.01 2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두번째 분 (상?장안) 님의 두번째 문단에 공감이 가네요.
    (근데 도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인물 들 중에서도, 도요토미 본가나 가토, 후쿠시마 와는 달리 에도 막부 시대에도 건재했던 가문도 있을 법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하여튼 올 한해도 좋은 글 잘 읽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2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사가미 나가야스[相模 長安]'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사가미님 ^^

      호소카와 가문[細川家]가 우선 떠오르는군요. 토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가문으로. 뭐 마에다 가문[前田家]도 100만석 이상 얻어 떵떵거리며 살았고, 아사노 가문[浅野家]이라던가,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 야마우치 가문[山内家]도 그 범주에 포함될 듯.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저 역시 올 한 해 잘 부탁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0.01.08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가미 나가야스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저같은 소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할 따름. (헤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가장 비밀스런 모의를 할 때 상담을 나누던 모신(謀臣)이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아예 친구와 같이 대했다 한다.

 “백성의 재산을 남지도 않게 부족하지도 않게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로 유명한 [본좌록[本佐[각주:1]]은 마사노부가 썼다고 한다.[각주:2]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각주:3]]가 부친 요시히로[義弘]에게 보낸 편지에,
“이에야스 님은 정치에 관해 사슈우[佐州=마사노부]하고만 상담을 나누는 것 같이 보입니다”
라고 쓴 것을 보아도 마사노부가 이에야스 정권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이에야스가 살아있을 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한다.
 “카리 님, 사도 님, 오로쿠 님[雁殿、佐渡殿、お六殿]”라는 말로, 카리 님은 매사냥을 말하며[각주:4], 오로쿠 님은 측실 중 한 명[각주:5] 그리고 사도 님은 마사노부를 이른다.
 이렇게 이에야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노부는 불과 2만2천석의 영지를 받는 것에 만족하였다. 미움 받기 쉬운 자신의 존재를 잘 이해하고 있어 많은 영지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사서에 따르면 마사노부의 용모는 매독으로 인하여 피부가 떨어져 나가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심했다 한다.

 마사노부는 하급무사로 매조련사[ 출신이라고 한다. 1563년 미카와[三河]에서 봉기한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6]는 이에야스에게 처음으로 찾아 온 시련이었는데, 마사노부는 이 잇코우잇키 군의 참모가 되어 이에야스에게 반항하였다.
 반란군 측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의 사이에 화의가 맺어지자 마사노부는 쿄우토[京都]로 탈출, 일시적으로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弾正 久秀] 밑에서 지냈다.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살해한 이 효웅도 마사노부를 보고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며 기량을 인정했다 한다. 그 후 마사노부는 카가[加賀], 에치고[越後]를 유랑한 후 유명한 오오쿠보 히코자에몬[大久保 彦左衛門[각주:7]]의 형이며,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의 추천으로 다시 토쿠가와 가문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각주:8]

 전쟁터에서의 활약 같은 것은 마사노부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사노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다 가문[武田家]이 멸망하면서 부터로, 당시는 외교관적인 자리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기 전날 밤부터 오오사카 농성전[大坂の陣]에 걸쳐 마사노부의 모략적인 재능은 풀가동하게 된다.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시기였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자, 그때까지 히데요시의 측근 행정관으로서 권세를 떨쳐왔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미워하고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등 무공파의 면면들이 결국 미츠나리를 없애기 위하여 움직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미츠나리를 구했다. 이것도 마사노부의 헌책이었다.
 “미츠나리를 살려두면 타이코우[太閤[각주:9]]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는 다이묘우[大名]도 미츠나리를 너무 원망하는 나머지 언젠가 토쿠가와 편을 들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하였다.

 오오사카 농성전에서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으로 이끄는 스토리는 거의 마사노부 혼자서 쓴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에 일어난 농성전[大坂冬の陣] 강화 조건으로써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외측 해자를 메우게 되었는데, 토쿠가와 측은 세 번째 성곽[三の丸]뿐만 아니라 내측인 두 번째 성곽[二の丸]까지 마구 메워버린 것이다. 토요토미 측이 몇 번이나 항의하였지만 공사 책임자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마사노부의 아들]의 답변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회피하여 전혀 진전이 없었다. 참다 못한 요도도노[淀殿]가 쿄우토의 마사노부에게 사자를 파견하자, 마사노부는 오오고쇼[大御所[각주:10]]가 감기에 걸려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답변을 회피하였다. 더구나 그 후에는 자신이 감기 걸렸다며 역시 답변을 회피하였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오사카 성의 내측 해자도 전부 메워 버렸다. 마사노부는 적당한 때를 살펴 오오사카 성으로 향했다.
 이때 마사노부의 말이 기발했다. 메워진 내측 해자를 보고,
 “이런 기괴한 일이 다 있나”
 고 말하며 공사 책임자인 자기 아들 마사즈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화를 낸 것이다. 철저한 오리발 작전으로 오오사카 측을 가지고 논 것이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1538년생. 1590년 사가미[相模] 타마나와[玉縄] 2만2천석.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노중(老中)이 된다.[각주:11] 1616년 6월 죽다. 59세.

  1. 마사노부의 성 혼다[本多]의 앞 글자 本과 관도명 사도노카미[佐渡守]의 佐를 따서 만든 것으로, 이렇게 앞 글자씩을 따와 두글자로 상대를 부르는 것을 카타묘우지[片名字 혹은 片苗字]라 부르며 상대에게 경의를 표할 때 쓴다고 한다. [본문으로]
  2.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물음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정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관해 7개조로 쓴 책이라 한다. 혼다 마사노부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 유명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가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가명성리(仮名性理)라는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 손을 댄 후 마사노부의 이름을 사칭해서 나온 책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사츠마 번[薩摩藩] 초대 번주이자 요시히로[義弘]의 아들인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를 말한다. 처음엔 타다츠네 였으나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 받아 이에히사[家久]로 개명. [본문으로]
  4. 사냥을 뜻 하는 狩り와 기러기를 의미하는 雁는 둘 다 발음이 '카리'이다. 이에야스는 매사냥의 장점으로 하루 종일 사냥하느라 뛰어다니면 배가 고파져 식사도 더 맛있어 지고 밤에는 피곤하기에 일찍 잘 수 있어 자연스레 빠구리도 안 할 수 있기에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5. 이에야스 측실 중 가장 똑똑했다는 에이쇼우인[英勝院 - 여담으로 만화 '영무자 이에야스'의 여주인공 같은 역으로 나왔다]의 하녀 같은 존재였으나, 이에야스의 눈에 들어 그의 측실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에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한 갈래인 오유미 쿠보우[小弓 公方]의 피를 잇는 아시카가 요시치카[足利 義親]에게 시집간다. 29살에 닛코우에 있는 이에야스의 묘소[日光東照宮]에 참배하여 분향하였을 때 향로가 터져 파편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에도 쇼우군 가문의 여성들을 다룬 '막부조윤전[幕府祚胤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당시로서는 당연시 되던 남편 죽은 뒤 머리 밀고 비구니가 되는 일 없이 미모를 너무 뽐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쓰여 있다. [본문으로]
  6.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종교 반란. [본문으로]
  7. 오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 忠教]. 토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손에 넣는데 큰 공적을 세운 무공파들보다 신참이며 주판알 잘 굴리는 문치파들을 중용하는 체제를 비판하며 토쿠가와 가문이 걸어온 길과 자기 오오쿠보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설파한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를 써서, 당시 문치파에 밀려 불만 많던 무공파 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 [본문으로]
  8. 관정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따르면 7년 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 따르면 19년 뒤에 토쿠가와 가문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타이코우란 칸파쿠[関白]자리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 사람에 대한 경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10. 에도 시대에는 살아서 쇼우군[将軍] 자리에서 은퇴한 전 쇼우군을 지칭. 즉 여기서는 이에야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11. 아들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이에야스의 곁에 있었기에 이에야스의 의향을 히데타다에게 전하는(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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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10.29 1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오 저 이에야스 바둑친구가 원래 이에야스에 반기를 들었던 자라니... 역사란 참 재밌네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같은 침대를 썼다거나 연예 편지를 보낸 것 같지는 않지만 굉장히 친했던 것 같습니다.

      오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 長安]에서 보듯이 이에야스도 쓸 모가 있다고 생각하면 마구 이용하지만 쓸 모가 없다고 판단되면(여기서는 나가야스의 죽음) 씨를 말리는 것을 보면 마사노부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우정이라고도 생각합니다.

  2. 나라 2009.10.29 1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언제나 포스팅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0.29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람도 쿠로다 칸베에처럼 매독의 희생자(-_-..)였군요, 어금니가 보인다니 이거 뭐 할로윈 특집도 아니고(...;) (오늘 영어 수업에 할로윈 동영상을 보여주는데 딱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측이 됩니다 ㅎ;)

    여담이지만 카리라기에 문득 사냥狩り를 생각했는데 그 한자가 아니었군요. 그러고보니 결과적으론 뜻이 비슷한 센스..

    아.. 영무자 이에야스에서의 그 처자..는 아니고 그 처자의 여종이라지만; 아무튼 죽은 이에야스 폴터 가이스트 따위에 맞아 죽다니..(;;) 아쉬운 일이에요. 아니, 미인 박명이기에 어쩌면 더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결국 그것도 복이려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 전 칸베에 매독설을 부정합죠 ^^

      저 어금니 보인다는 것은 그의 정적 중 하나가 일기인지 뭔지에 마사노부가 그 꼴이 되었다고 낄낄대며 쓴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어디서 읽었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참고로 주석에도 썼던 막부조윤전이란 책에는 급사(頓死)라고만 나옵죠[日光御宮に参詣、神前に於て頓死す]. 일본 웹에서 파편에 죽었다고 해서 썼는데, 지금 보니 확인되지 않은 것을 쓴 쓸데없는 사족인 것 같군요...(개인적으로는 믿을 만한 사이트이긴 합니다만)

  4. ckyup 2009.10.30 0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하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마사노부는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을때쯤 서서히 드러나다가, 세키카하라 전후로는 거의 견줄만한 상대가 없을정도의 너구리 그림자가 되더군요.... 그러고보면 이에야스는 역시 현명한 정치를 펼친것 같습니다 - 혼란시에는 무관을 중용하고, 그 이후에는 문치중심으로 나가는..... 어쩌면 박대통령이 그점에서 인간경영에 실패한것 같군요 - 혁명과 정권안정때에 중용하던 군출신들을 끝까지 측근에 두었다가, 그 측근들이 술과 여자 바치는 아첨배로 점점바뀌며 저희들끼리 힘과 신임의 암투를 벌이는 가운데 암살당하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란의 시대때는 무공파를, 패권이 확립된 뒤로는 문치파를...한 고조 유방이나, 왕자의 난을 제패한 태종 이방원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 사후 무공파와 문치파의 싸움이 일어난 것(세키가하라 전쟁)도 그로 인해서 입죠. 히데요시가 더 살아 강력한 중앙집권(즉 문치파 득세)이 실현되었다면 세키가하라는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생각합니다.

      전혀 딴소리가 되겠지만 그만큼 외로웠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하가 그렇게 해 쳐먹는 것을 알면서도 왠간해선 곁에 두어야 할 정도로 대화상대가 필요하지 않았을지...권력자의 자리는 외롭다고들 하니까요.(참고로 외로워도 좋으니 전 그 자리를 꼭 맛보고 싶군요.)

  5. Favicon of http://strasbourg.egloos.com/ BlogIcon Orca 2009.10.30 0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사노부가 죽은 뒤, 마사즈미 대에서도 계속 쇼군 가의 측군으로 활약해, 나중에는 시모츠케 우츠노미야 15만석에 이르지만, 결국 히데타다 시대 때 한방에 몰락. 그냥, 나중에 그걸 알게 되니까 씁쓸하더라구요.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사노부는 죽으면서 마사즈미에게,
      "많이 바라지 마라, 3만석까지는 좋다. 그 이상은 바라지 마라"
      고 했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한방에 훅~ 갈 정도로 정적이 많은 것도 원인인 듯 싶습니다. 같은 편이 많았음 그렇게까지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역시 빽과 끈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6. 골룸 2009.11.05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한 사람의 성격과 기질이 태어나면서 완전히 정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타고난 기질이 중요하겠지만 살면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것도 달라지는 것 같네요
    잇꼬잇끼와 패배, 유랑, 복귀... 뭐 이런 걸 거치면서 혼다 마사노부라는 인간이 만들어 진 것 같습니다
    이거 절대 딴지는 아닌데 위에 마사노부 1583년생은 아닌거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5 17: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살아온 환경이나 경험에 따라 사람의 인성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예. 1538년을 오기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얼릉 고치겠습니다. ^^ 제가 워낙 오타가 많으니 보이시면 꼭 알려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립니다.

  7. seeker 2017.10.05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잘봤는데요. 혼다 마사노부는 59세가 아닌 79세 죽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정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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