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 사[大徳寺]에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미츠나리의 유골을 조사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골격은 여성과 착각할 정도로 얇았다고 한다. 마치 히로사키 시[弘前市] 스기야마 가문[杉山家][각주:1]에 전해지는 미츠나리 초상화[각주:2]처럼, 섬세하고 여성적인 풍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형의 사람은 고지식하며 비사교적, 유모어가 부족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자연이나 책 등을 사랑하는 지능형으로, 인간에 대해서는 냉담냉혹 한 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시다 미츠나리와 관련된 일화의 대부분에서 그런 특징을 옅볼 수 있다.

 미츠나리는 뛰어난 재치로 인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미츠나리의 출신지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근처에 있는 절에 심부름하는 아이[寺小姓]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는 15~16 즈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로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매사냥을 하던 도중 목이 말라 이 절에 목을 축이러 온 것이다.
 미츠나리가 접대를 맡았다. 곧바로 차를 끓여 히데요시에게 권했다. 첫 번째로 내온  차는 커다란 찻잔에 미지근한 차를 7~80%를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맛있게 전부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뜨거운 차를 찻잔의 반 정도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이것도 다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아주 뜨거운 차를 작은 찻잔에 조금만 담아 내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의 이런 재치가 맘에 들어 절의 주지에게 청하여 미츠나리를 데리고 와 곧바로 시동으로 삼았다. 이렇게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미츠나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재능을 발휘하며 차츰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갔다.[각주:3] [각주:4]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호출하여 지금까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500석을 가증(加增)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500석 대신에 우지[宇治], 요도[淀]의 양 천 기슭에 자라는 백성들이 맘대로 베고 있는 갈대의 예초권(刈草權)을 저에게 주신다면, 1만석에 상당하는 군역(軍役)을 부담하겠습니다”
 하고 청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미츠나리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양 천의 천기슭 수십 리 안에 있는 갈대를 베는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각주:5] 

 미츠나리 의 이러한 이재(理財)의 재능도 히데요시는 맘에 들었다. 더구나 미츠나리의 경우 그런 재능을 사욕이 아닌 히데요시에 대한 멸사봉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언제나 미츠나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은 주인에게서 받은 봉록을 전부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긴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다 써버리고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 단언하였다.

 이에 관한 일화로 용장(勇將)으로 이름 높은 시마 사콘[島 左近]을,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의 절반 가까이를 들여 가신으로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각주:6] 
 미츠나리는 뛰어난 무사에게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있도록 힘썼던 듯 하다. 그것도 히데요시에 대한 봉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츠나리 자신의 주변은 실로 꾸밈이 없고 수수했다. 후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패하여 거성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도 함락되었는데, 공격군의 병사가 성 안을 돌아보자 방은 모두 초벽(初壁)만 한 상태였으며, 바닥은 대부분 판자만 덧댄 채였다. 마당에 정원수(庭園樹)도 없었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도 굉장히 착실하였으며 다방면에 이르렀다. 밤중에 폭풍이 들이쳤을 때에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이미 성의 파손상태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즉 미츠나리는 이런 경우 철야를 해가며 성 안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원래 이런 역할을 해야 할 담당관은 10시 즈음이나 되어서야 보고하러 오는 꼴이었다.

 이상과 같은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는 결코 히데요시에게 아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주 히데요시에게 격한 말투로 간언(諫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츠나리는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에 임명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칭하게 되었을 때, 관백의 제대부(諸大夫) 12명[각주:7] 중 한 사람에 선정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토요토미 정권의 오봉행(五奉行)[각주:8] 중 한 사람으로 행정의 중책을 짊어지지만,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으로 순식간에 No.1 실력자가 된다.

 미츠나리의 치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히데요시가 중요시했던 사카이[堺]의 총독을 1586년부터 1588년까지 맡았으며,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때의 병참, 하카타[博多]의 부흥,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와의 외교절충에 힘 썼으며,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히데요시의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1]에 출진,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서는 침략군의 운송과 병참, 무기 보급 등의 지휘를 취하였으며 감찰[軍監]까지 맡았다. 거기에 관백 히데츠구[秀次] 사건[각주:12],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13]에도 참여하는 등등 히데요시가 행한 중요정책 전반에 미츠나리는 중요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했기에 히데요시도,
 “나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자는 미츠나리뿐”
 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미츠나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히데요시 정권의 No.1 실력자였다.
 코우야 산[高野山]의 모쿠지키 상인[木食 上人]은,
 “미츠나리는 오봉행 중 제일인자인 듯이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고 말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는,
 “태합의 고굉지신으로, 그 위세는 비견할 자가 없다”고 말하였고,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는 가신인 코다마 모토카네[児玉 元兼]가 가지고 있는 명도(名刀)를 미츠나리가 원하였는데, 제출이 늦어져[각주:14] 미츠나리의 기분이 상하면 큰일이라며 빨리 제출해 달라고 코다마 모토카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했기에 미츠나리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츠나리를 극도로 증오하는 무리가 있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등 창 한 자루로 돌격하며 출세한 히데요시의 아이들, 즉 무공파 무장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츠나리는 아무런 무공도 없는 주제에 히데요시의 맘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난체하며 이런저런 지휘를 하는 건방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오대로(五大老)[각주:15]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천하제패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저 무공파 장수들은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이에야스와 손잡고 미츠나리 등 문치파와 격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99년 3월, 문치파의 좌장적 존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자, 무공파 칠장[각주:16]은 미츠나리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미츠나리는 이때 하필이면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 난을 피할 수 있었는데[각주:17], 이런 모습에서 당시의 정치상화 속에서 고립된 미츠나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각주:18]. 이 사건으로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를 강요당해, 천하는 이에야스의 독무대가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은 대단원이었다. 대다수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각주:19]의 다이묘우는 미츠나리가 내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만으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츠나리의 중대한 오산이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패하여 도망치다 잡혔다. 그 뒤에 몇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의복이 더러워져 있었기에 이에야스가 입던 옷을 주었을 때, 그것을 미츠나리에게로 가지고 온 자가,
 “이것은 우에사마[上様]가 하사하신 것”
 이라고 하자,
 “히데요리[秀頼]님 말고 우에사마는 따로 없을 터”
 라고 말하며 그 옷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잡힌 미츠나리를 내려다 보며 욕을 하였을 때,
 “무운 다하여 네 놈을 이러한 처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고 대답했다고 한다.

 10월 1일. 로구죠우 강변[六条河原]의 처형장에 끌려갈 때, 미츠나리는 너무도 목이  말라 경비하는 자에게 따스한 물을 달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장 따스한 물을 구할 수 없어 경비무사는 대신으로 하라며 곶감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곶감이 가래병에 좋지 않다며 거절하였다. 경비무사는 지금 죽으러 가는 주제에 몸에 좋지 않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미츠나리는 말했다.
 “큰 뜻을 품은 자는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목숨을 아껴 어떻게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년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출생.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눈에 띄어 코우가[甲賀] 미나구치[水口] 성주가 되면서부터[각주:20] 출세하여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가 되었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으로 선정된다. 1595년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 19만 4천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참모로 삼아 서군(西軍) 8만을 이끌고 싸우지만 패하여 사형당했다. 41세.

  1. 미츠나리의 둘째 아들 이시다 시게나리[石田 重成]가 히로사키 번[弘前藩]으로 도망간 뒤 시게나리의 아들 요시나리[吉成] 때부터 스기야마 씨[杉山氏]를 칭함. [본문으로]
  2. 위에 있는 초상화. [본문으로]
  3.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 작자미상의 일화 모음집 무장감장기(武将感状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시게이에[重家]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8살 때 히데요시가 히메지[姫路]에서 츄우고쿠[中国] 방면을 담당했을 때부터 섬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후세의 군기물 ‘이시다 군기[石田軍記]에는 히데요시가 미츠나리의 후장을 파려고 시동으로 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갈대는 지붕을 만드는데 쓰이거나, 물건을 가리는 발(簾)을 만드는데 쓰였기에 거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로 미츠나리는 후에 이때 얻은 돈으로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백 기(騎)의 무사를 이끌고 와 히데요시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고금무가성쇄기(古今武家盛衰記)’에 실린 글이라 한다. [본문으로]
  6.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2만석을 떼어 주었다고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8.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1591년 1월의 오오사키-카사이의 난[大崎・葛西の乱]과 9월의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본문으로]
  12. 사실 미츠나리는 히데츠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츠나리는 칸토우[関東] 사타케 령[佐竹領]의 검지(検知)하기 위해 출장간 상태였다. [본문으로]
  13.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14. 살생관백 히데츠구[秀次]도 이 칼을 노리고 있었기에, 모토카네는 어느 쪽을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기에 늦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6.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7.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18. 사실 이 사건은 미츠나리 하나만 노린 사건이 아니라, 봉행파 다수를 노린 사건이었으나 은거를 하며 봉행직에서 물러난 것은 미츠나리 한명 뿐이라, 후세에 미츠나리만 공격받은 양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어 다이묘우가 된 무장들. [본문으로]
  20.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주가 된 적은 없다. 시마 사콘[島 左近]을 등용할 때 미나구치 4만석 중 2만석을 떼어 주었다는 일화 때문에 퍼진 낭설로, 당시(1590) 미나구치의 성주는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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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8.19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음침하고 어두운 이미지의 미쓰나리 인간상이 부각되면서 악당의 이미지였습니다만, 요새는 가장 인기있는 인물 중 하나로 부각되더군요(전국무쌍, 전국바사라를 포함한 응용창작매체 포함). 역사는 돌고 도는 건가봅니다.

    개인적으론 어떤 일화보다도 요시쓰구와의 일화가 미쓰나리라는 인물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는가 싶습니다. 소통하는 능력이 떨어졌던 인간성 좋은 사람 정도랄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1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가 에도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인기가 있었기에, 그런 영웅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대신 짊어질 사람이 필요했고, 그런 인간으로 적합했던 것이 신군(神君) 이에야스에게 끝까지 개긴 미츠나리. 뭐 미츠나리가 진정한 충신이라면 저 세상에서 히데요시의 방패막이가 된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지도 모르겠군요.

      사족으로....
      소슈 님은 제 블로그에 2000번째 리플을 다신 분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8.22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번째 밀레니엄을 달성했다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번째 영예도 제가 안았으면 좋겠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3 1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앞으로도 오래오래 찾아주십시오. ^^

  2. 간스케 2011.08.23 1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를 소인배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거 같더군요.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발해지랑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어보고 싶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그냥 미츠나리가 역사의 패배자이다 보니 이것저것 뒤집어 썼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혹시 그 글을 소개해 주셨음 감사드리겠습니다.

  3. ckyup 2011.08.2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친구 머리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던데.., 보통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시험으로 잣대를 삼았는데 이당시 전국시대엔 어떤 특별한 제도나 시험이 있었나요? 우리가 흔히아는 이당시 특출난 사람들 간베에, 미츠나리, 마사노부 등등..., 전부 알려진 바로는 우연한 인연으로 등용되던데요....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도나 그런 것은 없었고, 일반적으로 무사들이란 한 지역의 지배층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행정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평소에는 자신의 영지 혹은 맡겨진 영지의 행정을 담당(代官)하다가, 특별한 일(전쟁, 토목공사 등)이 생기면 상위의 무장(주군 혹은 요리오야[寄親])에게 담당관[奉行]에 임명되는 식이었습니다.(대충 간략하게는 이렇습니다)

      예를들어 쿠로다 칸베에의 경우 히메지[姫路]를 다스리는 작은 영주였다가, 그 위에 히데요시[秀吉]라는 인물이 오자 그 휘하에 속한 것입죠. 속한 상태에서 하리마[播磨] 지역에 있는 반노부나가 상태의 무사들을 회유 또는 동원령에 따라 히메지의 무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기는 했겠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히데요시의 참모 혹은 군사로 활약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등용문제는 지배구조에 관한 문제라 간단히 쓰기가 어렵군요. (제가 가진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뭐라 잘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

  4. 정동희 2011.08.31 14: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나우누리 신장동 시절에 닉네임으로 쓴 인물이었네요
    센코쿠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고, 격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이에야쓰와 대립한 큰 인물이었습니다
    위의 일화들을 보면 유능했지만 거만했다 라는 느낌인데
    사실 유능한 사람이 거만해지지 않기가 참 힘들죠
    그런 면에서 자신의 성질을 감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능력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클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를 쓰시더니.. 똥싸개 이에야스와 반대편에 서는 인물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유능한 미츠나리의 능력에 열폭한 사람들이 별걸 아닌 일에도 그의 행동을 거만하게 보고 그렇게 기록해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고요.

    • 정동희 2011.09.01 16: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 ㅋㅋ 희대의 두 영웅 밑에서 잘 굴러 먹었고 결국은 천하를 꿀꺽
      상황에 따라서는 마누라나 장남도 가차 없이 죽이고... 후흑술의 대가인데
      아무래도 정이 안가네요

    • 정동희 2011.09.01 1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츠나리 개인이 거만했고 아니고를 떠나서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위치였기 때문에 뭍 사람들의 질시를 받는 건 당연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가 좀 더 사려가 깊었다면 어떻게든 그런 이미지를 불식시키도록 노력을 했어야 했겠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만.... 질투 받는 것은 질투 하는 쪽의 인식이 변하기 전에는 받는 쪽이 아무리 노력해도 변함이 없는 것 같더군요.

  5. 정동희 2011.08.31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쓰나리의 거만함이나 독단이 이른바 무단파와의 갈등을 불러 결과적으로 토요토미를 멸망으로 몰아 넣은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구요
    토요토미 멸망의 가장 주요한 이유는 히데요시의 어처구니 없는 조일7년 전쟁의 휴유증 이라고
    개인적으로 단언합니다
    조일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정유재란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토요토미 정권이 그렇게 쉽게 망하진 않았을 겁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토요토미 정권은 임란 후에도, 세키가하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느 정도 방귀는 뀔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근래엔 이런 주장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토요토미 정권을 끝장낸 이에야스의 능력도 굉장히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1.09.01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시이에가 살았을 때 거병을 했다면,
      마시다 나가모리가 히데요시 직할지 재력만 미츠나리에게 지원 했다면
      뭐 그런 등 등 등의 설이 의미가 있겠습니까만은
      어쨌든 이에야쓰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저도 동감입니다
      특히 여러 다이묘들한테 이러 저러한 도움 주고 편지 보내고 공작하고 하는 건 참
      정말 어지간히 오지랍 넓고 부지런한 노인네였어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래에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인지라 저도 깊숙히는 모릅니다만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힘은 이에야스의 칸토우 정권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했기에 세키가하라 이후 15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토요토미 정권의 힘을 깍으려 한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pray4abyss.egloos.com/ BlogIcon 로날드럭 2011.09.01 16: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은근히 말년 히데요시가 잘못한 일을 미쓰나리가 뒤집어 쓰는 면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
    근데 요즘은 미쓰나리가 이에야스는 물론이고 히데요시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으니(....)

    눈팅은 오래 해왔는데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건 처음이네요.
    앞으로 자주 들리겠습니다(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대로 요즘 서브컬처에서는 미츠나리의 인기가 히데요시를 뛰어넘은 듯 하더군요. 뭐 히데요시야 워낙 오래(2차 대전 이전부터) 빨아대서 진물이 빠졌던 것도 있는 듯 합니다만.

      앞으로도 자주 들려주시고 알려주실 일 있음 많이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

  7. ㅇㅇ 2015.07.03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군 총대장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아닌 세키가하라에서 적극적으로 싸운 우키타 히데이에를 세웠다면 나은 결과가 나왔을 거 같네요.

    모우리 테루모토 정말 못난 놈, 일본판 유선(아두)이군요. 총대장이 오사카 성에 놀고 있다니...

    미츠나리 같은 편협한 놈이 총대장 대리역한다는 것 자체가 패배가 점쳐진거죠. 무공파의 이탈과 시마즈의 야습 진언 각하.
    원숭이 없으면 제 구실 못하는 놈.

  8. 마사무네 2017.03.14 1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확히는 담에 좋지 않아서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목표가 있고 그일을 반드시 이룰려고 하는자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절대로 인생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 이에야스[家康]로 이어지는 소위 겐키[元亀][각주:1] - 텐쇼우[天正][각주:2]의 천하 통일기에 저 3명과 가까이 하며 백만석의 기초를 쌓아 올린, 센고쿠[戦国] 역사에서도 특필할 만한 무장이었다.

 토시이에는 14살 때 당시 나고야[那古野] 성주였던 4살 연상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각주:3], 같은 해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섰다[각주:4]. 19살 때 노부나가가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信行]를 공격한 이노우 전투[稲生の合戦]에서 노부유키의 청년 친위대장[小姓頭] 미야이 칸베에[宮井 勘兵衛]라는 강적을 쓰러뜨리는 공적을 세웠다.[각주:5]

 이 즈음 토시이에는 카부키모노[かぶき者]로 성질이 급하여 자주 남과 싸웠다.
 ‘카부키모노’라는 것은 기발하고 특이한 복장이나 행동을 해서 남을 놀라게 하고는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기풍이었다. 예를 들어 토시이에는 굉장히 화려한 장식을 한 창을 들고 다녔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창의 마타사에몬[槍の又左衛門][각주:6]’이란 이명(異名)을 붙었기에 이를 들은 토시이에는 기뻐하였다.
 그런 토시이에였기에 늙어서도 특이한 젊은이를 사랑하였으며, 또한 말하길,
 “젊은이에게는 큰소리 치도록 만드는 편이 좋다. 그러면 자신이 했던 말들을 거짓으로 만들 수 없다며 분투하게 되니까”
 라고 하였다.

 카부키모노였던 22살의 1559년, 토시이에는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노부나가의 도우보우[同朋][각주:7] 쥬우아미[十阿弥]가 토시이에의 남성용 비녀[笄][각주:8]를 훔쳤다. 토시이에는 곧바로 노부나가에게 쥬우아미를 처벌할 테니 허락을 내려달라고 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토시이에는 주군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이런 토시이에를 보고 쥬아미 등이 ‘용기도 없는 놈’ , ‘무사라는 자가 한번 벤다고 했으면 베어야지 주군의 명령이라고 베지도 못하다니’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깠다.[각주:9]
토시이에는 이를 듣고 불문곡직하고 쥬우아미를 베어 죽였다. 더구나 일부러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을 골라서 죽여버린 것이다. 평소부터 카부키모노라는 점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토시이에로서는 당연한 행위였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토시이에를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노(宿老)들의 중재 덕분에 목숨만은 건져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낭인(浪人)이 된 토시이에가 취한 방도는 슬며시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세워 복귀를 허락 받는 것이었다.[각주:10] 그런 기회가 그 다음 해인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가 되어 찾아왔다. 토시이에는 오다 군[織田軍]에 참가하여 이마가와[今川] 측의 목을 세 개를 가져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시이에가 그 목을 노부나가의 앞으로 가져왔지만 노부나가가 무시했기에 그 목들을 버리고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결국 노부나가의 용서는 없었다.

 그 2년 뒤, 노부나가가 미노[美濃]를 침공하였을 때 토시이에는 또 참가하여 모리베 전투[森部の合戦]에서 ‘목 사냥꾼 아다치[首取り足立]’라는 이명(異名)을 가진 강한 무사를 죽이는 수훈을 세우자 노부나가도 용서를 하여, 다시 오다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복귀하게 되었다.[각주:11]

 그 후 토시이에는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함께 호쿠리쿠 방면[北陸方面]에서 활약하며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자,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곧이어 이 둘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토시이에의 입장은 복잡했다. 토시이에에게 있어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에서 쫓겨나 낭인으로 보내던 시대에 몇 번이나 도와주었던 은인이며, 오랜 기간 전쟁터를 함께 해 온 의리가 있었다. 한편 히데요시와도 젊었을 적부터 친교가 있어, 딸 중 하나인 ‘고우[豪]’[각주:12]는 태어나자마자 히데요시에게 양녀로 주었을 정도였다. 토시이에는 어느 쪽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 는 것이 본심이었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영지가 이웃인 시바타 측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1583년 4월 21일부터 다음 날 아침에 걸친 시즈가타케의 전투[賤ヶ岳の戦い]는 히데요시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지만, 이때 마에다 군[前田軍]은 그다지 전투에 참가하는 일 없이 영지(領地)인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로 철퇴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가 이 전투에 대한 기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히데요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토시이에가 농성하고 있는 후츄우의 성은 단숨에 낙성시킬 수 있었다. 이때가 토시이에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각주:13]

 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포위망을 친 히데요시는 혼자 말 타고 후츄우의 성문 앞에 와서는 “마타사[又左]~ 마타사~”하고 토시이에의 통칭을 불렀고, 성안에 들어 온 히데요시는, 서로 원한이 없으니 앞으로도 사이 좋게 지내자며 토시이에에게 말하였다. 이런 것은 히데요시의 특기인 남의 마을을 끌어들이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미움 받지 않는 토시이에의 인덕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리하여 토시이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멸망 당하여 죽은 뒤 히데요시의 둘도 없는 한 팔이 되어 신뢰를 받았고, 나중에는 여러 장수들에게서도 신뢰를 받아 히데요시 정권에서 무게감을 더해 갔다.

 토시이에가 여러 장수의 인망을 모았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병들었을 때, 토시이에는 당시 명의로서 명성을 떨치던 의사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에게 직접 의뢰하여 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며, 우지사토가 죽자 그 아들 츠루치요[鶴千代 = 후에 히데유키[秀行]]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즈[会津]라는 중요한 곳을 지키기 힘들다는 의견이 높았지만, 부인 호우슌인[芳春院]과 함께 히데요시 부부를 설득하여 가모우 가문[蒲生家]의 영지 상속을 실현시켜 주었다.[각주:14]
 
 또한 이해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 사건이 일어나 평소 히데츠구와 친밀했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가 연좌의 혐의를 받자, 토시이에는 온갖 수단을 다해 변호하여 아사노 부자에게 쏠린 혐의를 벗게 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조선에서의 행동 때문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근신 당하고 있다가 ‘지진 카토우[地震加藤]’[각주:15]라는 이명(異名)을 얻을 때의 활약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풀었는데, 이것도 토시이에의 중재에 의한 것이 컸던 듯 나중에까지 키요마사는 토시이에의 중재를 고마워하였다.

 이렇듯 토시이에가 장수들의 위기를 구했기에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신뢰할만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토시이에는 말년이 되어 적자 토시나가[利長]에게 여러 다이묘우들의 차용증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죽은 뒤 마에다 가문의 편에 선 다이묘우의 차용증은 돌려주라고 하며, 그렇게 되면 한층 더 아군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는 단순히 ‘좋은 인간성’만의 무장이 아니라 상당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시이에는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그것도 센고쿠 무장[戦国武将]로는 드물게 경제감각의 소유자로 수치에 밝아 항상 주판을 가지고 다니며 병사의 수를 세거나 금전 출납, 곡물을 계량할 때도 주판을 튕겼다. 그랬기에 토시이에는,
 “돈이 많으면 남에게도 세상에게도 겁먹을 일이 없지만, 가난해지면 세상이 무서운 법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1598년 8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가 죽었다. 정치와 어린 히데요리[秀頼]의 안전은 오대로(五大老)[각주:16], 오봉행(五奉行)[각주:17]의 손에 맡겨지게 되어, 토시이에는 주로 히데요리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대로의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우들과 사돈관계를 맺으려 하는 등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기 시작하기에 이르자, 토시이에는 긴박한 정치의 장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이에야스를 가장 적대시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봉행이었다. 그리고 이 미츠나리는 무공파(武功派)라 일컬어지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의 격한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리 되자 천하는 이에야스-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등 반 이에야스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에야스의 다음가는 실력자 마에다 토시이에는 미츠나리 등과 함께 이에야스에게 힐문장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변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답변으로 응대하였다. 오오사카의 토시이에와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간에 불온한 공기가 흘렀다.
 이 사태에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8]와 토시이에에게 은혜를 입은 카토우 키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 여러 장수들이 열심히 양자간의 사이를 중재하여 겨우 화해하였다고 한다.
 그때 토시이에는 이미 병상이 깊어 마에다 가문의 의지는 적자 토시나가가 결정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인망이 두터웠던 토시이에였기에 여러 장수들도 중재에 힘썼던 것이며, 이에야스 역시 예부터 알고 지낸 그런 토시이에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는 죽었다.
 그 임종의 자리에서 토시이에는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이빨을 간 뒤 베갯머리에 있던 ‘신도우고 쿠니유키[新藤吾 国行]’의 작은 칼[脇差]을 뽑지도 못해 칼집 채 가슴에 누르고는 무언가 크게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9]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83년
오와리[尾張] 출신. 통칭 이누치요[犬千代]. 오다 가문[織田家]를 섬겼고, 형 토시히사[利久]를 대신하여 본가를 이었다[각주:20].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공적을 세워 에치젠[越前] 후츄우 성[府中城]의 성주가 되었고[각주:21], 이어서 노토[能登] 나나오 성[七尾城]의 성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후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카가[加賀] 오야마 성[尾山城][각주:22] 성주가 된다. 1585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각주:23]의 칭호를 하사 받았고, 1590년에는 토요토미 성[豊臣姓]을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 죽은 지 8개월 후인 1599년 죽었다. 62세.[각주:24]

  1. 1570~1573년. [본문으로]
  2. 1573~1592년 [본문으로]
  3. 봉록은 50관.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이며 키요스[清須]의 성주인 오다 노부토모[織田 信友]와의 카야즈 전투[萱津の戦い]. [본문으로]
  5. 오와리 통일전에 참가하며 봉록은 100관으로 증가. [본문으로]
  6. 토시이에의 통칭이 마타사에몬[又左衛門]이었기에. [본문으로]
  7. 다이묘우[大名] 곁에서 잡무를 맡거나 다도[茶道]에 관련된 일을 하던 스님. [본문으로]
  8. 일본 시대극을 자주 보시는 분이라면, 주인공이 도망치는 적이나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표창 대신 젓가락 비슷한 것을 던지는 장면을 보셨을 것이다. 그것이 코우가이[笄]. 이것으로 머리를 긁거나 머리를 다듬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가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10. 이런 행위를 '진가리[陣借り]'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복귀하면서 얻은 봉록 300관. [본문으로]
  12. 토시이에의 4째 딸. 나중에 오대로 중 한 명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에게 시집간다. [본문으로]
  13. 도망치던 시바타 카츠이에는 토시이에의 후츄우 성[府中城]에 들러, 무단 퇴각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오랜 기간 자신을 잘 도와 주웠다는 것에 감사한 뒤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여기에는 토시이에의 2남 토시마사[利政]의 부인이 우지사토의 딸인 점이 컸을 듯. 즉 서로 사돈지간. [본문으로]
  15. 596년 9월 5일 킨키[近畿]에 지진이 일어나 후시미[伏見]가 혼란에 빠졌을 때 키요마사는 근신의 몸임에도 군사들을 이끌고 후시미 성[伏見城]에 가 히데요시를 수비하였기에 붙은 이명. [본문으로]
  16. 이 당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7.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18.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는 타다오키의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 즉 토시이에와 타다오키는 사돈지간. [본문으로]
  19. 일설에는 복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신도우고 쿠니유키의 작은 칼로 스스로 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토시이에는 4남이어서 원래 자격은 없으나, 1569년 토시히사가 병약해서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토시이에가 당주가 되도록 명령. [본문으로]
  21. 나가시노의 공적보다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감시역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2. 후에 카나자와 성[金沢城]으로 이름을 바꾼다. [본문으로]
  23. 히데요시가 한참 동안 쓰던 성과 관직명. [본문으로]
  24. 가보나 계보도에는 62세라고 하나, [케타신사 문서[気多神社文書]]나 [토시이에 야화[利家夜話]] 등에서 63세로 하는 사료도 많아 63세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노부나가 가신단 연구가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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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12 0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시대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지녔던 오다계열의 필두가신들 중에서 센고쿠 시대의 끝자락까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란 점에서 도시이에란 인물의 역량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니와나 삿사는 히데요시 손에 의해 숙청되었고 시바타, 다키가와, 아케치들은 히데요시에게 칼을 겨누는걸 택하고 패망했으니 말이죠. 예외라면 장렬히 죽으면서 아들 데루마사와 가문을 지킨 이케다 쇼뉴 정도일까요.

    결과론적으론 가모 히데유키를 아이즈에 놔두게 되면서 가모 가문이 쇠퇴하게 된 셈이네요. 차라리 가모 가문을 아이즈보다 중요도가 덜한 곳으로 전봉했으면 어떻게 되었을런지. 전국에 이러한 우호 가문들을 만들어놓은 것이 에도가 훗날에도 가가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동맹의 울타리에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2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1588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가 쥬라쿠다이[聚楽第]에 행재하여 다이묘우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문서를 쓸 때, 노부나가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히데요시 일족과 이에야스, 모토나리 등과 함께 오다 가문 계열 무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것만 보아선 히데요시의 신뢰와 더불어 역량도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시바타, 아케치, 타키가와 등은 아무래도 히데요시 보다 서열이 위거나 동등하다 보니 천하를 노리는 히데요시로서는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가모우 가문[蒲生家] 자체가 우지사토[氏郷]를 중심으로 급격히 커져 신규 가신들을 다수 받아들이다 보니 가모우 가문 자체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계자라고 하여도 히데유키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졌나 봅니다. 이건 아무래도 일찍 죽은 잘못이 있는 우지사토 때문인 듯 합니다.

      좀 벗어난 이야기 입니다만, 에도 시대 때 혼슈우[本州]에 있는 마에다 가문을 시코쿠[四国]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습죠. 막부도 나름 마에다 가문에는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습죠.

      마에다 가문도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자식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를 자신의 가문으로 초빙하여, 가신으로서는 파격인 7만석을 안겨주며 막부와의 절충에 힘쓸 정도로 에도시대 초기에는 카가 번[加賀藩]과 막부는 나름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었던 듯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06.03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즈카타케에서의 무단 이탈 + 딸 2명중 한명은 히데요시의 양녀로, 또다른 한명은 히데요시의 측실로... 갠적으로 이 두가지로 인해 평소 좋게 생각했던 마타자의 환상이 팍 깨져 버렸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가타케 전투 때 토시이에의 마에다군은 마지막까지 후군에서 달려드는 히데요시를 막았고, 토시이에는 직접 창을 쥐고 싸웠다고 하는 기록도 있더군요.

      히데요시도 니와 나가히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시이에를 살린 것은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방파제로 남긴 것으로 에치젠에 있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임. 토시이에에게 마음을 열지 마시길'
      이라고 보낼 정도로 시즈가타케 전투 직후에는 토시이에와 히데요시가 알려진 만큼 친하진 않았던 것 같더군요.

      더더군다나 딸 2명 중 하나(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 간 고우히메[豪姫])는 태어나자 마자 간 양녀이고, 마아히메[摩阿姫=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는 원래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바쳐진 인질을 히데요시가 인수했던 것이라, 당시 인식으로 보아서 토시이에를 욕하기는 좀 부족하지 않을지...

  3. 지나다가 오타지적 2011.11.06 04: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바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4문단 6번째 줄

  4. 한남충 2018.06.24 0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아무리 의리가있고 인덕이 있어도
    시바타와의 의리를 지키기위해 수많은 식솔들과 가신들의 목숨을 뒤바꾸기는 힘들었을겁니다.
    저는 토시이에의 상황이 이해가는군요..
    참 의외인게 이에야스가 히데타다의 딸 타마히메를 마에다가문에 시집보낸것인데..
    토시이에 사후라 카가정벌까지 결정할뻔했던걸 혼인동맹을 맺어주며 포용한것이..
    포상할 땅을 엄청 필요로해서 카가를 먹기는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듯한데..

八.

 히데요시(秀吉)의 죽음과 동시에 당연히 측근정치는 끝나고 그 정치적 붕당은 해산되어야만 했다. 붕당의 영수(領袖)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였다.
 하지만 제도로써 남았다. 히데요시는 유언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운영체재를 새로이 만들었다. 행정면에서 히데요리(秀
)의 대리인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였으며 가정면에서의 보호자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였다. 이 둘을 최고 결정권자로 하여 최고 의결기관(議決機關)에는 그 둘을 포함한 다섯 명의 대로(大老)[각주:1]로 구성하였다. [오대로(五大老)]이다. 이어서 조정기관(調停機關)으로 [삼중로(三中老)][각주:2]를 두었고 거기에 그들 밑에 사실상 토요토미 가문 집행기관(執行機關)으로 이시다 미츠나리 등 [오봉행(五奉行)][각주:3]을 두었다. 이 때문에 고인의 측근은 이 새로운 시대에서도 제도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각주:4]

 하지만 기껏해야 제도로써만이다. 그 측근으로서의 실질적 위력은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있었기에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이상 모든 신통력은 사라졌다.
- 토요토미 정권의 악(惡)은 모두 그들에게서 나왔다.
 라는 것이 히데요시 말년에 히데요시에게 피해를 입은 다이묘우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히데요시를 미워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 측근을 저주했다.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미츠나리)는 용서할 수 없다"

 라는 태도를 가장 농후하게 나타낸 것이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와 그 시녀단들이었다. 그녀들의 시각으로 보면 미츠나리는 천하의 행정관이 아닌 히데요시의 비서관에 지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비서관이 아닌 요도도노(淀殿)의 이익대변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당연하게도 어린 아이인 히데요리와 그 어미가 되었다. 그 대리인이 미츠나리였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그는 히데요시 시대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다행히 집정관 이시다 미츠나리 위에는 상부기관이 있었다. 그 대표가 토쿠가와 이에야스로 키타노만도코로와 그 시녀단은 이 이에야스의 힘을 빌려 저 요도도노 모자와 그 대리인의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 고 생각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키타노만도코로와 이에야스는 급속도로 가까워져 한때는 성안에서
- 두 분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닐까?
 하는 즈질적인 소문이 날 정도로 그 왕래가 빈번하였으며 둘의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 등은 특히 그랬다.

 이 당시 조선에서 돌아온 장수들 중 대부분이 그곳에 있을 때 본국에서 행해진 전공평가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었고, 그 불공평의 원흉이 히데요시 측근 이시다 미츠나리라고 하여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포함한 일곱 명의 다이묘우[각주:5]는 귀국 후 오오사카(大坂), 후시미(伏見)에서 시가전을 전개하여 미츠나리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당연 미츠나리파도 방비를 하였다. 때문에 오오사카, 후시미 성 밑은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 전쟁이 일어난다~
 고 오오사카와 후시미의 시민 중 눈치 빠른 자들은 재산을 멀리 그리고 뿔뿔이 분산시키는 사람이 많았다. 퍼진 소문에 따르면,

 "이시다 지부쇼우유우님의 뒤를 밀어주고 있는 것이 요도도노라고 한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요도도노 그 자체는 아무런 위계(位階)도 가지지 못하였고 어떠한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어린 주군인 히데요리를 그 무릎 위에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존재로 세간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카토우 키요마사들 마저 세간의 그런 풍문을 믿어

 "우리들은 키타노만도코로님의 힘을 얻지 않으면"

 하고 지금은 비구니가 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비호를 부탁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도 충분히 납득하여 그들의 보호를 대로 필두인 이에야스에게 부탁해서는 그 내락을 얻었다. 이에야스는 내심 이 토요토미 가문의 내분을 기뻐하며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며 오히려 은밀히 부채질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일들이 돌아가는 동안, 요도도노는 백치 같았다.
 - 아무래도 여러 다이묘우들 사이에 다툼이 있는 것 같다.
 는 것을 그녀가 안 것은 훨씬 후 –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에게 오봉행의 자리에서 파면되어 오오사카 성(城)을 떠나 자신의 거성(居城)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佐和山) 성()으로 은거 (위장이지만)한 전후[각주:6]였다. 그녀는 시세에 관해서 남들이 싸우는구나 하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세간에서는 그녀와 친밀하다고들 하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해서도 그렇게까지 자주 만난 적도 없었으며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단지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卿局)에게서,

 "이는 소문이옵니다만 에도 나이다이진(江戸内大臣=이에야스)이 히데요리님의 천하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더군요"

 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녀는,

 "설마"

 라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에야스라는 – 저 뚱뚱한 50대의 인물에 대해서는 그 온화한 풍모 이외에 지식이 없었다. 자연히 실감도 나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척도로 그것을 부정했다. 관팔주(八州=칸토우(東))의 주인에 불과한 이에야스가 천하의 제후(諸侯)들을 거느린 토요토미 가문에게 감히 칼을 들이댈 턱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랬던 그녀가 - 자신이 아무래도 엄청난 풍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사와야마에서 은거 중이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은밀히 거성(居城)에서 빠져 나와 밀행하여 오오사카 성(城)에 나타나면서였다. 요도도노와 대면했다.

 "나이후(府=이에야스)가 가진 야망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미츠나리는 이에야스가 얼마나 교묘한 수단으로 토요토미 가문에게서 정권을 찬탈하려는 가에 대해서 그 풍부한 정세인식과 너무도 날카로울 정도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했다.
 '말이 참 많구나'
 요도도노에게는 때때로 따분한 이야기였으며 때때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미츠나리라는 인물은 여성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은지에 관한 지식을 재능으로써 갖추자 못하고 있었다.

 "어려운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추측에 따르면 츄우나곤님(中納言=히데요리)은 어떻게 되신다는 것입니까?"

 하고 결국 참지 못하고 요도도노는 되물었다. 미츠나리는 말을 끊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렇게 된다면 위협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와뢰옵기 황송하오나 츄우나곤님은 얼마 안가 저 히데츠구님과 같이 되실 것이옵니다"

 "말도 안 됩니다. 히데츠구님은 나쁜 반역을 꾀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옵니다. 히데요리님이 반역이라뇨?"

 '이렇게 무지할 수가'
 하고 미츠나리는 생각했다. 히데츠구는 정치적인 이유로 토멸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행동에 따른 죄가 아니라는 것이 이 요도도노에게는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미츠나리는 방법을 바꾸어서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기후 츄우나곤님(岐阜中納言=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처럼 되실 것입니다"

 "기후 츄우나곤님?"

 요도도노는 미츠나리가 말하는 뜻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곁에 있던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卿局)에게 손짓하여 귓가로 와 설명하게 하였다.

 [기후 츄우나곤님]
 이라는 인물은 정삼위(正三位) 츄우나곤(中納言)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를 말한다. 히데노부는 노부나가(信長)의 적손(嫡孫)으로 오다 가문(織田家)의 정통 후계자였다. 히데요시에게서 노부나가 때부터의 거성(居城)인 기후 성(岐阜城)을 하사 받고 총 13만3천석의 영지(領地)에 봉해져 있었다. 나이는 20살 전후[각주:7]로 조부 노부나가에게 물려받은 듯한 수려한 용모와 화려함을 추구하는 성격을 이어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그릇과 재능을 전혀 물려받지 못하여 활달한 성격만이 장점인 평범한 젊은이였다.
 - 원래대로라면 기후 츄우나곤님이 천하의 주인이시다.
 고 제후(諸侯)들간에 은밀히 속삭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당시 옛 주인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치른 뒤 이 오다 히데노부에게 오다 가문 600만석의 패권을 상속시키지 않고 은근슬쩍 자신이 오다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을 이끌고 이곳 저곳의 적을 평정하여 그 영역을 천만석 이상으로 불린 다음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칸파쿠(
白)에 임명 받았다. 칸파쿠가 되면 오다 가문보다 가문의 격이 높으며 더구나 칸파쿠라는 신하로서 가장 높은 직책은 텐노우(天皇)를 대신하여 일본의 정치를 통괄하는 직무인 이상 당연히 옛 주인 노부나가의 자식이나 손자도 일본의 종주(宗主)인 텐노우(天皇)의 권위에 따라 히데요시에게 지배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논리에 따라 히데요시는 세상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오다 가문의 정권을 녹이듯이 없애버려 노부나가의 자식이나 손자도 자기 산하의 다이묘우로 만들어버렸다. 더구나 그 오다 히데노부는 히데요시를 앙모(仰慕)하여 오히려 진짜 아비인양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오다 가문은 일개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하고 요도도노는 미츠나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변하며 상체를 세차게 떨었다. 그러던 중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卿局)가 다가가 마치 여자아이를 대하듯이 요도도노의 손을 자신의 양 손으로 따스하게 감싸듯이 덮었다. 히데요리가 일개 다이묘우라는 위치로 떨어진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죽이면 될 일이지?"

 그 반역을 꾀한다는 이에야스를 말이다. 미츠나리는 넙죽 엎드렸다. 그 말 한마디가 필요했다. 나머지는 히데요리의 도장이 찍힌 교서(敎書)를 만들어 사방의 다이묘우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오오사카로 불러들이면 되었다.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2. 이코마 치카마사(生駒 親正),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一氏). [본문으로]
  3.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4. 상기의 오대로, 오봉행이 제도로써 정착되었다고 하는 것은 에도 시대 들어서의 군기물(ex.甫庵太閤記)에 나온 것으로 당시 오대로는 五人の衆 혹은 五人御奉行(다섯 명의 행정관)등으로 표현되었다. 오봉행은 꼭 다섯 명이나 상기의 인물들이 아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가 있는 등 확실치 않았다고 한다. '토요토미가문의 사람들 - 우키타 나오이에' 편에 언급된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히데요시의 유언을 적은 곳에 오봉행에 해당하는 단어는 "행정관 다섯 명(年寄衆五人)" 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6. 위에서 언급한 일곱 명에게 습격을 당할 뻔한 미츠나리는 기책을 발휘하여 오히려 그 숨겨진 수괴인 이에야스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였고, 이에야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편 일곱 명을 납득시키기기 위해서 사와야마 은거를 명하였다. [본문으로]
  7. 히데노부는 1580년생으로 이 당시(1599년)에는 19살...이지만 당시는 일본도 태어나면서 나이를 세어(数え年) 20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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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2.14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도도노 편은 특히 분량이 많군요. 마지막 오사카 싸움은 어떻게 서술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15 08: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그냥 다른 편들의 두 배정도이지만...

      가령 히데나가 편은 쓰는 저도 재미가 있다 보니 단 번에 번역할 수 있었는데 이번 편은 그냥 덤덤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2.15 0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이젠 토시이에도 죽고 코바야카와 크리가 터지겠군요;;

  3.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2 1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시다 미츠나리의 본거지인 사와야마가 사카이와 멀지 않은, 예전 미요시 일당의 근거지중 한곳이었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3 1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에 사와야마 링크 건 곳으로 가 축소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와야마는 오우미(近江)에서도 미노 측에 가까운 곳이고 사카이는 현재 오오사카(大坂)에 있던 곳입니다.

      미요시씨의 최전성기 때도 오우미에는 롯카쿠 사다요리(六角 定頼)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그의 거성 칸논지 성(観音寺城)보다 동쪽에 있는 사와야마까지는 손을 뻗칠 수는 없었죠.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6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지역과 착각을 했나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7 2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아직 많이 틀리는 편이라... ^^

.

 

 9월에 들어와서,

 "타이코우(太閤), 타계(他界)하시다"

 라는 경천동지할 소식이 성에서 새어 나와 그걸 들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퍼트려 제후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소문에 성 밑에 있던 저택마다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뛰어다니며 소식을 전하는 사자(使者)들로 온 거리가 소란스러웠지만, 정작 히데요시는 아직 혼마루[本丸]의 깊숙한 곳에 살아있었다. 진상을 말하자면 극도의 쇠약에 때마침 발작이 더해져 침상에서 두 시간 정도 기절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이 죽음의 오보(誤報)가 되었다. 그 뒤 다소 기력은 회복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제 자신의 생명에 끝이 왔음을 각오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토요토미[豊臣] 정권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운영 체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기까지 히데요시 정권에는 운영 상의 조직 같은 것 없이, 히데요시 자신이 독재(獨裁)하며 그 수족으로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의 비서관(秘書官)이 그때그때마다 명령을 행정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꾸어 그 비서관 다섯 명을 토요토미 가[豊臣家]의 행정관(行政官)으로 삼아 '오봉행(五奉行)'[각주:1]이라 칭했다.

 그 상부조직(上部組織)으로 다섯 명의 의정(議定官)을 두었다. '오대로(五大老=고다이로우(고타이로우))라 일컬어졌다. 대로 필두(筆頭)나이다이진[大臣]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이며, 히데요리[頼] 보좌의 수상(首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수상(副首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차석(次席) 대로인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이다. 이어서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이다. 이 다섯 명에게 히데요리를 보좌함에 있어서 최고의 발언권을 가지게 하였다. 물론 석고(石高), 관위(官位)를 보아도 그들은 여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도 특출났다. 그러나 그 능력, 성격, 신망(信望)이라는 점에서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세간 일반의 평가로 말하자면, 카게카츠는 우직(愚直)했으며, 테루모토는 너무 범용(凡庸)했고 또한 우키타 히데이에는 단순한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 새로운 조직을 병상에서 구술(口述)하였다.

 히데요시의 말을 받고 있던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시다 미츠나리 이하 다섯 명의 행정관들이었다. 그 중에는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구술을 끝마치자 감상을 말하였다. 오대로에 대한 인물평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한숨이 섞인 감상을 아사노 나가마사는 붓으로 적어 자식에게 전했고 또한 후세에 남겼다.

 

 에도님[殿=이에야스]은 의로운 분이시다. 그 의로움을 나는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의 손녀를 히데요리와 맺어주고 싶다. 의로우신 에도님께선 히데요리를 잘 보필해 줄 것이다.”

 

 이것은 관찰이라기 보다는 히데요시의 희망이 너무 깃들어 있었다. 또한 이 말이 이에야스에게 전해졌을 경우의 효과도 기대하였을 것이다.

 

 카가[加賀] 다이나곤(마에다 토시이에)[각주:2]…… 나와는 죽마지우(竹馬之友).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임명한다. 필시 히데요리를 위해서 잘 해줄 것이다.”

 

 카게카츠, 테루모토는 이 또한 의로운 사람들이다

 

 히데이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내가 손수 키워 온 아이다. 히데요리를 지키며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일이건 만에 한 가지 경우가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대로(大老)이기는 하나 봉행(奉行)들 틈에 껴 착실히 직무에 힘써 너희들과 대로들간의 사이에서 공평히 주선(周旋)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또한 오대로, 오봉행을 시작으로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도 토요토미 가문의 법도와 체제를 지켜 히데요리에 대한 봉공(奉公)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의 서약서를 쓰게 하여 거기에 혈판(血判)을 찍게 하였다. 한 번뿐만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쓰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에야스의 서약서는 히데요시가 공손히 받으며,

 

 이것만은 관에 가지고 들어가 명토(冥土)로 가져 가겠다

 

 라고 까지 말하였다. 하지만 허무했다. 그의 사후(死後),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산봉우리에 있던 히데요시의 묘소는 이에야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물론 직후가 아니라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가 끝난 다음의 일이긴 하지만.

 

 히데요시는 죽기 한 달 전 즈음 제후들에게 자신이 쓰던 옷이나 무구(武具) 등을 나누어 주었고, 자신이 죽은 후 법률이 될 수 있게 치밀한 유언을 써 남겼으나 아직 숨은 있었다. 죽은 15988 18일 전전날, 오대로를 병실로 불러 들였다. 한번 더 히데요리에 대한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명 중 우에스기 카게카츠만은 자신의 영지(領地)로 돌아가 있어 부재중이었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이하 네 명이 얼굴을 나란히 하였다. 베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가 주어졌다.

 

 어느 얼굴이건 심각하고 비통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만은 아랫입술을 악물고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히데이에 만은 병상에 있는 히데요시를 보고 그러한 정치적 얼굴 표정을 만들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이제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해져 눈을 감을 때마다 배 곪아 죽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살아있었다.

 이 모습이…… 타이코우이신가?’

 라 생각하자 히데이에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때로는 너무 격하여 중요한 히데요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눈동자만 히데이에를 향해 움직인 후 희미하게 말했다.

 

 하치로우~”

 

 라고. 모두 귀를 세웠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좀 조용히 해주지 않을래?”

 

 쇠약으로 인하여 의식이 희미해진 탓인지, 마치 어린 아이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히데요시는 말하였다. 그 말투와 목소리가 히데이에를 한층 더 슬프게 하였다. 어렸을 때 히데요시 곁에서 다른 꼬마 시동들과 장난 등을 쳤을 때의 꾸짖었던 그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어서 말했다.

 내용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히데요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오, 부탁 드립니다, 의로우신, 의로우신 등으로 애처롭게 호소할 뿐으로, 살아 남은 측의 잘난척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스운 망탄(妄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과 같은 정경(情景)을 이미 8살 때, 죽은 아비의 머리맡에서 체험했던 히데이에에게 있어서는 다른 세 명과는 전혀 다른 정념(情念) 속에 있었다. 당시 자신이 지금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이며, 죽은 나오이에[直家]가 히데요시였다. 당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였던 히데요시는 온 몸에서 광망(光芒)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안심하시길…… 하치로우님에 대한 것. 반드시 뜻하시는 바대로 받들겠습니다.”

 

 라고 나오이에의 귓가에서 말하였다. 그 말대로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손아래서 성인이 되었고 이제 20대 중반을 넘었으며 영지(領地)도 나오이에 때보다 커졌다. 임종(臨終)의 약속이 지켜진 증거가 지금 여기에 있는 히데이에의 존재 그 자체인 것이었다. 히데이에는 만약 히데요시가 자기 혼자 여기에 있게 해주었다면 목소리 높여 이불 자락에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게 안심하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작법(作法)에 따라 이 자리에서는 상석자(上席者)가 응답해야만 하였다. 상석자인 이에야스가 곧바로 무릎걸음하며 응답을 하였다.

 

 부디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목소리는 차분함 함께 목 끝에서 울리며 나와, 누가 들어도 신뢰감이 있을 듯한, 거의 장중(莊重)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들은 히데요시는 혼신의 힘을 담아서 미소 짓고 턱을 당겨 희미하게 끄덕였다.

 

 다다음 날 심야. 히데요시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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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의 죽음은 그 다음날부터 후시미[伏見]의 정계(政界)를 바꾸었다.

 이에야스는 딴 사람이 되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를 상정(想定)하여, 그 목표에 따라 행동하였다.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만든 법의 금지사항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며 제후들의 마음을 취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으로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법을 무시하여 자기 멋대로 제후들과 인척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것이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를 자극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 혹은 마에다 토시이에를 화나게 만들게 만들어 그들이 거병(擧兵)하게 한 후 그것을 토벌함으로써 정권 교체의 매듭을 짓고자 하였다. 이 목표를 향해서 이에야스는 치밀하고 더구나 대담하게 움직였다. 그런 이에야스의 동향을 보고 나름대로 추측한 토요토미 가의 제후들 대부분은 자기들이 나서서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였다.


 이 즈음. 우키타 가[宇喜多家]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 소동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지적했듯이 히데이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정치 능력이었을 것이다. 특히 히데이에는 가문을 다스리는데 어두웠고, 자신의 본거지에서 영지를 다스리던 중신(重臣)들과 친분이 얕았다. 이 때문에 중신들과의 정치에 관한 연락에는 나카무라 교우부[中村 刑部]라는 측근을 중용하였고 이를 총애하고 있었다.

 

 교우부는 원래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 아니었다. 카가[加賀] 사람이었다.

 고우히메[姫]에 딸린 부하로써, 카가 마에다 가[前田家]에서 우키타 가문에 편입되었다. 원래 마에다 가에서 오오사카 성[大坂城]과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던 인물로 사교(社交)에 뛰어났다.

 

 지로우베에[兵衛 교우부의 통칭]는 꽤 쓸만하군

 

 하고 히데이에는 무심코 이를 어떤 일이건 시켰고 그러던 중에 정치 관련의 연락도 담당하게 하였다. 연락이라는 것은 오오사카[大坂] 비젠지마[備前島]주재(駐在)하는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에 대한 심부름이었다. 그러던 중 교우부는 오사후네에게 아첨을 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츰 이 카가 사람은 히데이에와 오사후네 쌍방을 농락하게 되어 얼마 안가 히데이에, 오사후네 둘 다 이 남자가 끼지 않으면 서로의 뜻이 통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기에 나카무라의 눈치를 살피는 강대한 세력이 만들어졌다. 토요토미 가문의 이시다 미츠나리와 닮은 존재일 것이다. 히데이에는 이 교우부에게 2천석을 하사하여 가로의 말석에 앉게 하였다.

 

 벼락 출세한 놈이 우리들에게 지시를 내린다고?”

 

 라는 불만이 가문에 팽배해졌다.

 특히 이 악감정은 히데이에의 본거지에서 더 심했다. 오오사카 저택에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라는 명령이 본거지로 온다. 본거지에 사는 가신들은 궁핍했지만 명령 받은 만큼 금과 쌀을 오오사카로 보내야만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었기에 평소부터 감정이 편치 않았다.

 거기에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원래부터 인망이 없어 모든 것에 강압적이었고, 정치에 있어서도 한 쪽만 편드는 일이 많았다. 오사후네에 대한 원한은 장년(長年)에 걸쳐 쌓였던 만큼 교우부가 가로에 임명되기 이전부터 본거지에서는 오사후네를 죽인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점 히데이에도 모르지는 않았다.

 

 예전 조선에 있을 때 망부(亡父) 때부터의 노신(老臣)인 오카 부젠노카미[岡 豊前守]라는 사람이 진중(陣中)에서 병이 들어 부산에서 죽었다. 그 임종 전에 히데이에는 병 문안을 가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 준 공로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서 해 줄 말은 없는가?”

 

 하고 물었다. 부젠노카미는,

 

 보람도 없을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말해도 효과가 없다는 의미였다. 히데이에가 거듭 청하자,

 

 아닙니다. 말씀 드렸다고 하여도 들어주실 턱이 없지 말입니다

 

 라고 부젠노카미는 말했다. 또 히데이에는 바랬다. 그러자 부젠노카미는 알았다며,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대악인(大惡人)이지 말입니다. 저 인간을 계속 사용하신다면 가문에 난이 일어나지 말입니다. 불길한 말입니다만 결국에는 멸문하게 될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오카 부젠노카미는 죽었지만 그 예언대로 히데이에는 그 말을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망부 때부터 노신이며, 히데요시에게서 하시바[羽柴][각주:3]라는 성()을 하사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를 존중하고 있던 히데이에의 성격으로는 히데요시를 무시하는 듯이 이 노인을 정무(政務)에서 추방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또한 본거지의 반() 오사후네 파()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하시바 성[羽柴姓]인 오사후네에 대해서 공공연히 적대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죽음이 그들을 활성화시켰다.

 

 '타이코우가 죽었다. 그렇다면 이제 오사후네의 운명도 끝이다! 각각 수하들을 이끌고 카미가타[上方]로 밀고 올라가 오사후네와 일전(一戰)을 치루고 벼락 출세한 나카무라 교우부라는 놈과 함께 목을 따버리자!'

 

 라며 떠들썩하던 중에 당사자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가 갑자기 병이 나 오오사카 저택에서 죽었다. 한번 해보자며 들고 일어난 기세가 있었던 만큼 본거지의 반대파들은 실망했지만,

 

 '어떻게 하긴~ 아직 나카무라 교우부 놈이 살아있다!'

 

  며 일부는 교우부를 죽이기 위해서 이미 철포()를 준비해서는 본거지를 출발했다고 한다. 그것을 오오사카에서 전해 들은 교우부는 곧바로 야밤에 배를 타고는 후시미[伏見]로 와 히데이에의 저택으로 도망쳐 왔다. 히데이에는 저택에 있지 않았고 후시미 성에 있었다. 교우부는 저택에서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성에 입성하여 히데이에를 배알(拜謁)하고자 하였다.
  1.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2. 토시이에의 거성이 카가[加賀]에 있었기에, 토시이에의 관직과 합쳐 카가 다이나곤[加賀大納言]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3.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 이전에 쓰던 성(姓).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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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2.09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 때마다 차라리 히데쓰구에게 확실히 승계시키는것만 못했다는 생각밖에는 안듭니다. 결과론적인 말이긴 하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0 0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을 경우 나중에 히데츠구가 과연 정말로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주겠느냐~ 라는 것이 당시 히데요시의 생각이었을테니까요...(그리고 그럴 수 있을 만큼 인심 장악이 가능할 정도의 재능을 히데츠구가 보여주었던 것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히데요시도 마에다 토시이에가 그렇게 자기가 죽은 뒤 따라서 같이 죽을 줄은 생각도 못했을테니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2.10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가 죽지 않고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를 따라서 죽었더라면... 도요토미 정권은 평안을 지킬 수 있었을려나? 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6: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혼란의 시기가 길어졌을 수는 있지만(戰쟁이 아닌 政쟁으로..) 토요토미 정권이 오래가긴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마에다 토시이에는 이에야스가 기어 들어가기 전 칸토우의 주인인 호우죠우(北条)씨의 피가 흐르는 사람을 데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만약 마에다 가문이 토쿠가와 가문과 싸울 일이 있었으면 칸토우에선 선정을 펼쳐 인기가 높았다고 하는 호우죠우 가문의 후계자는 꽤나 요긴하게 쓰였을 것 같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1 1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튼 결과론적이라지만 마에다 토시이에의 이른 죽음 덕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말년의 포석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으니.. 서약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의 대로가 어디 토시이에 말고 있었겠나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2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감입니다. 토시이에가 한 번 큰소리치자 이에야스도 잠시동안 꼬리를 말았었으니까요.

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98 8 18일 병사 62

1536 ~ 1598.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을 섬기며, [스노마타 하룻밤 성(墨俣一夜城)[각주:1]]등의 공을 세웠다. 빗츄우(備中) 타카마츠(高松)() 공격 중에 혼노우(本能)()의 변을 듣자마자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각주:2])를 감행하여 야마자키(山崎)의 싸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쓰러뜨렸다. 후에 쵸우소카베(長宗我部), 시마즈(島津), 호우죠우(北条)()를 항복시켜 천하를 통일하였다.







현실도피의 꽃구경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1598년 새해가 밝자 교착상태에 빠진 조선 전선(朝鮮 戰線[각주:3])우울함에서 도피라도 하듯이 [다이고의 꽃구경(醍醐花見)]의 장소가 되는 다이고(醍醐)()의 정비에 열중했다. 1년 전부터 기획한 꽃구경이었지만 어두운 현실에서 눈을 돌려 도피하기에는 다시 없는 기회인 듯 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고독한 위정자(爲政者)였다.


 히데요시 스스로 다이고사()로 가서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황폐해진 절의 여러 건물()을 계속해서 수복(修復)하고 정원을 새로 만드는 것에도 직접 힘을 쏟는 등 진두지휘(陣頭指揮)하였다. 마치 이 꽃구경 행사가 [마지막 잔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히데요시 자신이 예지라도 한 것인지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의 만전을 기한 끝에 열린 3 15 [다이고의 꽃구경] 문자 그대로 호화찬란한 사상 최고의 꽃구경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어린 히데요리()와 함께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4]), 요도도노(淀殿[각주:5]),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6]), 산노마루도노(丸殿[각주:7])등의 정실(正室), 측실(側室)들을 시작으로, 그녀들의 시녀들이나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부인들과 함께 만개한 벚나무 아래를 거닐며 하루 종일 꽃구경 잔치를 즐겼다. 늙은 히데요시에게 있어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들 사이에서 즐기는 꽃구경은 현세를 잊고 도원경(桃源境)에서 노니는 심경이었음이 틀림 없다.


병에 걸린 히데요시


 꽃구경이 끝난 뒤에도 히데요시는 다이고사()에 들려 절 수복에 힘썼다. 여전히 어두운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도피하고픈 듯이.


 하지만 5 9.

 천하인(天下人)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하는 천하의 명석(名石 - 藤戸石) 히데요시의 손을 떠나 다이고사()로 옮겨져 산호우()()의 정원 정면 중앙에 놓여 졌을 때 히데요시는 후시미(伏見)()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 4일 전인 5 5일.

 갑자기 병에 걸려 그 날부터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당초는 본인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병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전국의 절과 신사(神社)들에게 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 내려졌고 조정(朝廷)에서도 임시 카구라(神楽[각주:8])를 행하여 병마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하는 기도가 행해졌다. 하지만 기도의 효험은 나타나질 않았고 한 때는 인사불성에 빠졌다.


비통한 최후와 유언장


 히데요시도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은 듯 하다.

 7 15일.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후계자인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서약서(誓紙)를 제출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대로(五大老), 오봉행(五奉行)을 정하여 당시 6살의 어린 히데요리를 위해 토요토미 정권 체제를 강화하는 등 죽을 때가 다 된 히데요시에게오직 히데요리의 미래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리고 8 5일.

 히데요시는 오대로에게 보낸 이승에서의 이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언장을 써서 계속해서 히데요리를 부탁하였다.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이것 말고는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습니다.

거듭거듭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다섯 분에게 부탁합니다.

막상 다섯 분에게 말씀드리고나니 이별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현세에 미련을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텐카비토(天下人) 히데요시의 비통한 마지막 말이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는 그 해인 1598 8 18일 새벽. 후시미 성에서 생이 마감하였다. 향년 62.


 히데요시에게는 또한 사세구()가 있다.

이슬 떨어져 이슬처럼 사라지는 나의 생명이려나

무슨 일(또는 오오사카)이건 꿈 속의 꿈

 오대로에게 보낸 유언장처럼 아쉬움이 배어 나오는 서글픈 시이다.

 하지만 이 시는 히데요시의 예언이기도 했는지 히데요시는 토요토미 가문을 시작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비극적인 결말까지 예견한 듯하다.


 히데요리는 히데요시가 그 후사를 부탁했던 오대로의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공격 당하여 토요토미 가문은는 멸망하였다. 거기에 히데요시가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오오사카 성()은 오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 불에 타 없어졌으며 후시미 성()도 세키가하라(ヶ原)의 싸움에서 공격 받은 피해로 인하여 폐성(廢城)이 되어 없어졌다. 그리고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호우고쿠(豊国) 신사(神社) 이에야스의 파괴 명령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 일대(一代)의 힘으로 쌓아 올린 토요토미 가 영광의 흔적은 이에야스에 의해 전부 이 세상에서 말살되어 그야말로 남가일몽(南柯一夢)처럼 허무하게 없어진 것이다.

  1. 스노마타에 하룻밤만에 성을 세웠다는 전설. [본문으로]
  2. 보통보다 더 빨리 철수한 것을 이름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4. 정실 네네(ねね). [본문으로]
  5. 히데요리의 친모(親母). [본문으로]
  6. 와카사 타케다(若狭 武田)씨(氏) 최후의 당주 타케다 모토아키(武田元明)의 부인. 타케다가 혼노(本能)사(寺)의 변 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편을 들어 후에 할복. 이에 따라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의 다섯 번째 딸. [본문으로]
  8. 신에 춤을 바치기 위해 추어진 가무(歌舞).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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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koll BlogIcon skoll 2007.06.19 1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happey1541 BlogIcon 블랙냥이 2007.08.07 1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갈께요 ^^ 숙제였는데 감사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09 1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움이 되었다면 저도 기쁘네요... 근데 전 링크만 걸게 해 놓아서, 담아가신다고 해도 만족을 하실지 어떨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4 23: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그런가요?
    전 우키타 히에이에(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9094884)가 미남이라고 생각합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1.20 17: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카에시를 대반전보다는 대회군으로 번역하는건 어떨까 합니다 ㅎㅎ;;
    그리고 히데요시의 지세이의 뒷부분은 "나니와(오-사카 지방의 옛 이름)의 영화는 꿈속의 또 꿈"
    으로 해석하는것이 깔끔하지않나 하네요 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1 1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반전'보다는 '회군'이란 단어가 의미상 뚜렸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왠지 '회군'은 느릿느릿 하는 것 같고 '반전'은 급하게 하는 것 같아서, '반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나오님의 해석은 확실히 부드럽군요.
    なにわ가 근데 왠지...그 음을 이용해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요건 좀 더 공부해 보겠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kumkang1471 BlogIcon 지족자부 2008.08.17 1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대망이란 책을 ?f습니다. ^^ 임종전의 시가 "몸이여, 이슬로 태어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던가. 나니와(오사카)의 영화는 꿈속의 또 꿈" 해석하자면 (몸)히데요시자신 (이슬)세월이 흘러가니 (나니와)히데요시자신이 세력을 구축한곳이며 (꿈속에또꿈)그때는 스쳐갓을뿐 다시오지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수잇습니다. 다시정리 하자면, 중원을 도모하지 못한체 나이는 먹고 병들었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쓰루마쓰)까지 잃어버린 현재의 상황에서 과거의 화려햇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자니 너무나도 처량하고 괴롭다는 뜻으로 정리 할수 잇겟습니다. 히데요시는 전형적인 엘리트 무사로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노부나가의 시종으로서 나중에는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일본의 세력을 통합한 일본내부에서 유래없는 공적을 세운 강력한 군주가 되엇?. 히데요시의 중원대륙을 향한 야망은 누구보다 컷으며, 그에게 조선은 눈에 차지않는 하나의 걸림돌이 뿐이엿습니다. 사실상 히데요시의 권력은 위태로웠죠. 겉으로는 충성을 하지만 과거의 자신의 신분과 개국공신의 권력을 이용당하는것을 경계한 히데요시는 외부로의 전쟁을 선택한하엿고 단기적으로 지위와 권력을 잡는데는 성공하죠. 하지만, 통치체제는 전장의 성과에 따라 약이되고 독이되는 법입니다. 누구말처럼, 권력은 잡는것보다 지키는것이 더 힙들다고 하더니 꼭! 이와같은 경우죠. 대망책 강추입니다. ^^v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18 21: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정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 지족자부 님이 부럽군요.
    대망 저도 좋아합니다. 노부나가가 나올 때까지만....이지만요..
    노부나가 빠돌이다 보니, 그 소설에서 노부나가가 죽은 이후부터 읽지 않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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