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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우라쿠'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05.05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14- (17)
  2. 2009.04.07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12- (10)
  3. 2008.12.18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4-
  4. 2008.12.03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3-
  5. 2006.05.12 오다 나가마스

十四.

 참고로 이 다음해부터 다 다음해에 걸쳐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와 유대가 깊었던 다이묘우(大名)가 계속해서 죽었다.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 65세,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69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53세,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50세, 아사노 요시나가(幸長) 38세 등이었다. 그들이 살아있었다고 하여도 – 가령 그것이 키요마사라고 하더라도 – 히데요리(秀)를 끝까지 보호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인물은 없었고 또한 막상 일이 벌어지면 자기 가문 보전이 우선이었기에 봉토와 자신을 따르는 가신단의 운명을 걸면서까지 위험한 도박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소위 '종명사건(鐘銘事件)'이 일어난다. 주조를 마친 호우코우 사(方寺)의 범종에 세이칸(韓)이라는 중이 지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 글 중에 [국가안강(家安康)][군신풍락(君臣豊)]이라는 구절이 있어 이에야스(家康)가 말하길 자긴 이름 가운데에 안(安)자를 새겨 갈라 놓은 것은 목과 몸통이 떨어지라는 저주를 담은 것이라고 하였다. '군신풍락(君臣豊)', '자손은창(子孫殷昌)'은 토요토미(豊臣)를 왕(君)으로 하여 자손(子孫) 번창(繁昌)을 즐(樂)긴다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며, '그러니 히데요리님이 역심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하여 오오사카(大坂)측에 엄중히 따졌다.

 오오사카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하지만 요도도노(淀殿)와 그녀의 시녀단은 당황하면서도 이 오해만 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풀 생각에 몰두하였다. 곧바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순푸(駿府)의 이에야스에게 보내는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불안했는지 카츠모토가 떠난 10일정도 후에 요도도노는 자신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오노츠보네(大卿局)를 정사(正史), 쇼우에이니(正尼)와 니이노츠보네(二位局)를 부사로 하여 파견하였다.

 그 두 사절단이 각각 돌아와서 보고한 것이 정반대였다. 카타기리 카츠모토가 말하는, '오오고쇼(大御所=이에야스)의 생각은' – 요도도노는 물론 오오사카 성의 부엌에서 물 긷는 하녀조차도 충격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순푸의 의향은 세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요도도노를 칸토우(東)에 인질로 보내라는 것. 두 번째는 히데요리의 영지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 마지막으로 히데요리가 직접 칸토우로 와서 용서를 비는 것. 이것 말고는 이에야스의 분노를 풀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카츠모토가 순푸에 갔다 왔다고 하여도 직접 이에야스와 만난 것은 아니었다. 카츠모토는 거듭 청했지만 이에야스가 만나주지 않았기에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이에야스 측근으로 승려이자 책사인 텐카이(天海)등과 만나 겨우 이에야스의 의향이라는 것을 전해 듣고 왔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조금 늦게 간 노시녀단들과 허물없이 만났다. 기분이 좋으신 이 '순푸의 오오고쇼(大御所)'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며 종명사건 등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행동하여 반대로 노시녀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야스가 말하길,

 "히데요리님은 쇼우군(軍=토쿠가와 히데타다(川 秀忠)의 사위이기에 나에게는 손자와 마찬가지인 분. 거기에 요도도노는 쇼우군의 부인되시는 분과 자매관계이시니만큼 내가 그분들을 해칠 이유가 없지 않소?"

 라는 것이었다. 노시녀들은 기뻤다.


 양측의 보고를 받은 요도도노에게 이에야스와 직접 만나고 온 노시녀들의 보고야말로 진실이었고 그에 비해 카츠모토가 가져온 말은 굉장히 기괴했다. 카츠모토는 칸토우의 책략에 놀아난 것이거나 아니면 꿍꿍이가 맞아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요도도노를 인질로 한다거나 히데요리가 오오사카 성에서 나가라니 말이 되기나 하단 말인가?
 이제 요도도노의 감정은 카츠모토를 이대로 둘 수는 없다는 데까지 왔다. 곧바로 히데요리의 측근그룹을 모아 논의하게 하였고 그들은 카츠모토를 할복하게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우선 실행에 앞서 카츠모토를 소환했다. 카츠모토는 자신에게 처해진 위험을 눈치채 소환에 응하지 않았고 일족과 부하들과 함께 오오사카 성에서 무장한 채 빠져 나와 자신의 거성(居城)인 셋츠(
津) 이바라키 성(茨木城)에 처박혀 굳게 지켰다.
 이러는 일들이 벌어지는 사이. 이에야스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대로 요도도노들이 놀아나는 것을 보고 통쾌하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어리석은 자의 무모함에 소름까지 돋았을 것이다. 오오사카에서 물러난 카츠모토는 곧바로 칸토우에 부하를 보내어 이에야스에게 붙었다. 이 시대는 가문보전이 최우선이었기에 에도시대가 되어서야 이론화되고 정리된 충의사상을 카츠모토에게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카츠모토가 요도도노를 떠난 뒤에도 이에야스의 시나리오는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카츠모토가 전한 [칸토우의 요구]야말로 틀림없는 외교상의 정식 요구이며 절차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에야스는 말했다. 그것을 오오사카는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의 요구를 전한 카츠모토를 할복까지 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칸토우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그렇게 이에야스는 이유를 만들었다.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만들어졌다. 이에야스는 틈을 주지 않고 오오사카 토벌의 군령을 내렸다.

 이에야스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토요토미 가문은 당황만 할 뿐이었다.
 당황하면서도 사정이 이렇게 된 이상 서둘러 방어 준비를 해야 했기에 대규모 낭인을 모집하였다. 모병담당은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治長)였다. 하루나가가 카츠모토 퇴거 뒤의 토요토미 가문 재상이 되었다.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왕성할 때부터의 가신이었지만 오오노 하루나가는 말년의 히데요시를 잠깐 섬겼을 뿐 히데요시와의 인연보다는 다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하루나가는 요도도노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의 아들이었다. 하루나가에 이은 No.2로 군직(軍職)의 중추에 앉은 것이 히데요리의 유모의 아들인 키무라 시게나리(木村 重成)였다. 오오사카 성은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모르는 요도도노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의 파벌이 중추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여성들과 그녀들의 자식 밑으로 수많은 낭인들이 모여들었다. 세키가하라(
ヶ原)에서 몰락한 다이묘우(大名) 혹은 다이묘우의 일족이 옛 가신들을 이끌고 입성하는 경우가 가장 많아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각주:1], 사나다 유키무라( 行村), 모우리 카츠나가(毛利 勝永)[각주:2], 고토우 모토츠구(後藤 基次)[각주:3], 센고쿠 소우야(仙石 宗也)[각주:4], 오오타니 다이가쿠(大谷 大)[각주:5], 마시타 모리츠구( 盛次)[각주:6], 히라츠카 사마노스케(平塚 左馬助)[각주:7], 호리우치 우지히로(堀)[각주:8],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9] 등이 그 주된 얼굴들이었다. 이들 낭인들에 토요토미 가문의 직신(直臣)들을 합치면 성 안의 인수는 12만 이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 중 여성의 수가 1만 정도 되었다. 여성들 대부분이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시녀들에 속하였기에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이 성의 특성을 상징하는 듯했다.

 한편 이에야스가 다이묘우들에게 명령을 내려 동원한 인수는 35만이 넘었다. 세키가하라의 배는 되는 규모로 하나의 성을 공격하는 인원으로서는 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였다. 동원에 앞서 이에야스는 '쇼우군()에게 역심을 품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다이묘우들에게 제출하게 하였다. 옛 토요토미 계의 다이묘우들 역시 전부 제출하였으며 이는 물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단 이에야스는 마사노리에게 불안감을 느껴 출진대신 에도 성(江) 수비를 명했다. 이에야스가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마사노리는 49만 8200석의 봉토를 버리면서까지 토요토미 가문과 함께 할 정도로 순박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는 개전에 앞서 히데요리에게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호의를 보였다. [토쿠가와를 따르십시오]라는 편지였다. [결코 칸토우를 거역하려 하지 마옵소서. 요도도노를 에도에 인질로 받치십시오. 또한 소인에게 도움을 바라지 마십시오. 만약 우다이진(右大臣=히데요리)님께서 오오사카 성에서 농성이라도 하신다면 소인은 에도의 쇼우군과 함께 오오사카를 공격하겠습니다]고 마사노리는 사자(使者)의 입을 통해 말했다. 요도도노는 격노하여 사자를 쫓아버렸다. 그녀는 정치적 고려보다도 인질로 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그녀는 마사노리의 사자를 쫓아버리기에 앞서 말했다.

 "나는 노부나가공(信長公)의 조카이네. 죽은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싫었는데 이제 또 이에야스와 이불을 같이 쓰라니! 생각만해도 불쾌하네"

 라 말했다. 사자는 정신이 선녀가 있다는 먼 별나라로 가는 듯 했다. 이에야스가 요구한 에도에 인질로 오라는 말은 이불을 같이 쓰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야스가 아무리 특이한 것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40이 넘고 자존심만 센 아줌마에게 손을 뻗칠 사람도 아니었고 그런 종류의 취향도 없었다. 그러나 요도도노는 이런 식으로 뭐든 자신의 육체를 매개로 해서만 생각을 하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저런 격한 말투로 나오지 않았을까? 원래부터 요도도노에게는 정치적 즉 냉철한 이성과 예리한 고려를 필요로 하는 사고(思考)가 불가능하였으며 또한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자 한 적도 없었다. 단지 운명이 그런 사고를 필요로 하는 장소에 그녀를 배치하였을 뿐이며 또한 그녀는 그곳에서 그때그때 생겨난 감정에 충실히 따르고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오오사카 포위를 완료하였고 자기 자신도 직접 출진하여 그의 직할대가 10월 22일 오우미(近江) 쿠사츠(草津) 북쪽 나가하라(永原)에 도착했을 때, 미리 오오사카 성안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들여보냈던 마에니와 한뉴우(前庭 半入)가 돌아와 보고하였다. 그의 첩보에 따르면 오오사카의 장수와 병사들은 요도도노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한다. 요도도노가 직접 군령을 내리기에 만사가 혼란스럽고 또한 오해를 불러 실무가 이루어지질 않아 의욕을 잃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 테지"

 이에야스에게 이것만큼 기분 좋은 첩보는 없었다. 예로부터 성은 바깥의 무력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불화로 인해 무너진다고 하기에 공격군의 총수에게 이보다 나은 소식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었나?"

 하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그 실례를 듣고자 하였다. 마에니와 한뉴우는 상세히 열거하였는데 요는 무장보다 요도도노의 시녀가 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뉴우의 말에 따르면 요도도노와 그녀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모집된 낭인들을 신용하지 않아 감시로써 통솔코자 하였다. 이 때문에 요도도노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여성이면서도 금과 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갑주를 두르고 역시 화려한 갑주에 나기나타(薙刀)를 든 시녀들과 성의 이곳 저곳을 순시했다고 한다. 낭인들 대부분은 바다 건너 조선과 세키가하라 등 여러 전쟁터를 전전했던 자들이었기에 이 감시가 오히려 사기를 저하시키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 한술 더 떠 히데요리는 기묘한 인물이라고 한뉴우는 말했다. 농성하는 무장들과 병사들은 여성들에게 감독 받는 것을 꺼려하며,

 "우리들은 히데요리공에게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 달려 온 사람들이오. 그런데도 히데요리공은 거처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시질 않아 존안도 알 수 없소. 이러한 대장은 고금에 예가 없소"

 고 모두 떠들어대며 '부디 저희들 앞에 모습을'이라고 오오노 하루나가에게 졸랐다.
 때문에 히데요리는 단 한번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것도 각 부대별로가 아니었다. 우선 무사 신분 이상인 사람들을 주성곽(本丸)의 대청(
大廳)과 그 앞마당에 발 디딜 틈 없이 집결시킨 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히데요시 이래 토요토미 가문의 부대 표식(馬標)인 황금 표주박이 세워져 그것을 열석한 자들이 올려다 보게 하였다. 열석한 무장들은 그것을 보고 왕년을 떠올리며 용기를 북돋았다. 그때 히데요리가 나타나,
 - 모두 수고.
 단지 그 한마디를 조그맣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뿐이었다.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모습도 볼 수 없었기에 웅성대고 중얼거리며,

 "이래서는 저 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없다"

 고들 말하며 어깨를 떨구었다.
 그 뒤에도 해산하지 않고 더 나와 줄 것을 요구하자,

 "어머님께서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는 답변이 되돌아 왔다. 요도도노가 히데요리의 안전을 생각하여(낭인들 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섞여있을지도 모르기에) 절대 거처에서 내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나이 22이나 되는 토요토미 가문의 당주가 모친이 하는 말만 듣고 총사령관으로서 해야 마땅한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뭐라 말해야 한단 말인가?
 - 우둔하신 분.
 이라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렇지 않네. 저분의 서체를 본 적이 있는데 엄청난 필적(筆跡)이었지. 그러니 우둔하신 분이 아닐세, 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히데요리님은 핏덩이였던 시절부터 주위는 전부 여성들뿐이었고 또한 여성들의 손에 의해 커오셨다. 그것도 고급 귀족(公卿)식으로 자라셨다. 더구나 성의 바깥이라는 것을 아시지 못한다. 이에야스와의 대면을 위해서 니죠우 성(二条城)에 갔을 때를 제외하곤 아주 어리실 적에 스미요시(住吉)의 바닷가에 놀러 가신 것이 유일한 것이라 한다. 여러 특이한 성장환경 때문에 많은 무사들 앞에 나서는 것이 불가능하신, 말하자면 기형적인 남성이 되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데요리 옹호론자조차 히데요리가 직접 격려해주길 바랬다.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 있는 싸움조차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으며 그런 주장을 사나다 유키무라, 고토우 모토츠구 등 낭인대장이 오오노 하루나가에게 요구했다.
 이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의 아들은 당연히 자신의 모친에게 청했다. 모친은 요도도노와 상담했다.
 - 안 된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라는 것이 절대 변하지 않는 답변이었다. 그녀에게는 에도의 인질이 되지 않겠다는 것과 히데요리를 건물 깊숙이 숨겨 놓고 무사들 앞에 내보이지 않겠다는 것이 같은 비중이었다. 그 방침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녀는 오히려 죽음을 선택할지도 몰랐다. 아니 선택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다른 노시녀들인 쇼우에이니(正栄尼), 니이노츠보네(二位局), 아이바노츠보네(饗庭局), 아챠노츠보네(
阿茶局), 아코노츠보네(阿古局) 등과 상담한 끝에 대신할 수 있는 자를 내보내 무사들을 납득시키기로 하였다. 성안에,
 - 사에몬님(
左衛門)
 라는 존귀한 인물이 있었다. 오다 우라쿠(
織田 =노부나가의 동생)의 적자였다. 우라쿠는 요도도노의 혈연이었기에 자신의 아들과 함께 오오사카 성에 살고 있었으며 오다 가문이라는 존귀한 가문 출신일 뿐만 아니라 관위가 종사위하(四位下)에 전(前) 지쥬우()였다. 그런 우라쿠의 아들인 사에몬[각주:10]이라면 성 안의 무사들도 기뻐할 것이다. 요도도노의 노시녀들의 생각으로 무사나부랭이들은 히데요리의 존귀함에 동경하고 있으니 히데요리가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그에 버금가는 존귀한 젊은이를 내보내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에몬님. 성 안을 돌아봐 주지 않겠습니까?

 하고 요도도노는 친족이었기에 편안함을 가지고 부탁하였다. 사에몬은,

 "귀찮아요. 귀찮아"

 하며 응석을 부리듯이 목을 저었지만 결국 히데요리의 대리인으로서 순찰을 맡게 되었다. 선척적으로 경솔한 인물이었다. 거기에 부친 우라쿠가 토쿠가와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제정신으로 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담으로 우라쿠와 그의 아들 사에몬 나가마사(左衛門 長政[각주:11])는 후에 토쿠가와의 다이묘우가 되어 야마토(大和) 시바무라(芝村) 1만석을 영유하였고 그 가계(家系)는 메이지(明治) 시대까지 이어진다.

 순찰은 매일 1회였다. 사에몬의 무장은 금색 비늘을 붉은 실과 보라색 실로 엮은 화려한 갑주를 입고 말을 탄 무사 7~8기를 이끌고서 순찰을 돌았지만 차츰 귀찮아져 총애하는 유녀(遊女)와 함께 다니게 되었다. 이름이 시치쥬우로우(七十朗)라는 유녀로 갑주, 두 자루의 칼, 등 뒤에 매는 풍선 같은 화살막이 등을 모두 새빨간 색으로 물들인 여성을 데리고 일곱 군데의 초소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어느 날 밤, 불침번을 서고 있던 무사가 졸고 있던 것을 발견한 사에몬은,

 "시치쥬우로우! 죽여라!"

 고 들고 있던 나기나타로 졸고 있는 무사의 목을 베도록 명령했다. 시치쥬우로우는 명령대로 하였다. 유녀에게 목이 베인 무사의 불운도 그러했지만 이런 사에몬의 방식에 다른 낭인들이 분노하여 자신들의 대장에게 불만을 표했다. 그 7명의 대장 – 사나다 유키무라, 고토우 모토츠구, 쵸우소카베 모리치카 들은 오오노 하루나가에게 이를 항의했다. 하루나가도 이것만큼은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사에몬에게 간언(諫言)하자,

 "그 아이는 히데요리님에게 보내는 사자(使者)로 쓰고 있소"

 하고 강변했기에 하루나가도 그 이상 말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는 그 자란 환경 탓으로 남성을 향해 뭔가를 말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좋아하지 않아 여성을 상대로 말하는 편이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나왔다. 그 유녀는 그런 히데요리를 생각하여 전령으로 쓰고 있다. 때문에 그녀를 데리고 다닌다는 오다 사에몬의 말에 하루나가도 그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라는 인물은 일족인 오다 사에몬에게조차 그런 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 이에야스는 전날 밤 마에니와 한뉴우의 보고를 듣고 처음에는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니죠우 성에서 보았던 저 위풍당당한 미장부는 몸만 크고 안은 소문대로 '우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고쳤다.

 소위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冬)은 이에야스에게 있어 포위와 공갈과 외교만으로 끝났다. 이에야스가 성을 조금 찔러보았지만 농성중인 낭인무리들은 이외일 정도로 강하여 첩보와는 달랐다. 추측하건대 낭인들은 자신들을 직접 지휘하는 장수로 뛰어난 무장을 만날 수 있었기에 토요토미 가문의 내부사정에 실망하면서도 막상 전투에서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하면 그들 낭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성을 버린다 하여도 그들에게 편안한 여생이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었고 그 때문에 승패가 어느 쪽으로 갈리건 이곳을 죽을 장소로 각오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에야스는 강화 협상을 제안했다.

 이에야스는 야전의 명인이라 일컬어지고 있었지만 공성(攻城)은 서툴렀고 자기자신도 꺼려했다. 그 이에야스의 약점을 세상도 알고 있었고 오오사카 측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이 강화 제안을 일축했다. 완고히 거부한대에는 이에야스가 먼저 강화를 제안한 것을 보고 승리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가 변했다. 왜냐하면 이에야스가 예전 토요토미 가문의 가로(
家老)인 카타기리 카츠모토 (그는 주인을 바꾸어 이에야스의 진영에 있었다)에게,
- 요도도노는 성의 어느 쯤에 있는가?
 라는 것을 물었다. 카츠모토는 성 내부를 그림으로 그려 가리켰다. 이에야스는 이번 공성전을 위해서 네덜란드 상인에게 대포(
佛郞機) 3문을 구입해 두었었고 그것을 전면에 배치하여 12월 16일 아침 일제히 발사시켰다. 그 중 한발이 텐슈(天守)의 기둥 중 하나를 부수었으며 거기에 또 한발이 요도도노가 살고 있는 건물의 시녀들 거소에 떨어져 찻장을 가루로 만들었다. 요도도노는 그곳에서 매일 아침 높은 신분의 시녀들과 함께 아침 차를 마시는 것이 일과였는데 때마침 그러던 중이었기에 여성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였고 요도도노도 그 소동에 휘말려 공포를 느껴 결국 이에야스의 신청에 굴복하여 강화를 받아들였다.

 이에야스가 제시한 강화조건은 오오사카 성 외부 해자(垓子)를 메우자는 것으로 요도도노 모자도 그것을 승낙하였다. 이에야스는 이 작업에 곧바로 수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눈깜짝할 새에 외각 해자를 메웠을 뿐만 아니라 성안에 침입하여 두 번째 성곽(), 세 번째 성곽()의 내부 해자도 메웠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토담이나 망루도 부수었다. 요도도노는 그 소식에 놀라 항의하기 위해 오타마노츠보네(お玉局)라는 시녀를 보냈다. 오타마는 성안에서 제일가는 미녀로 일컬어지고 있었으며 나이도 어리고 영특했다. 그녀는 작업현장에 가서 감독자인 나루세 하야토노쇼우( 隼人正[각주:12])와 안도우 타테와키(安藤 帯刀[각주:13])라는 이에야스의 부하 장수와 만났지만 그들은 즈질스런 말들을 하며 오타마를 놀려 그녀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게 만드는 한편 작업을 계속 진행해 나갔다. 오타마는 어쩔 수 없이 쿄우()에 올라가 이에야스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항의하였다. 마사노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야토노쇼우, 타테와키 녀석들은 무례한 놈들이군요. 반드시 혼내겠습니다."

 고 말하여 오타마를 돌려보냈지만 그러나 마사노부들은[각주:14] 이에야스가 쓴 시나리오의 배우이기도 하여 단순히 연극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오사카의 여성들은 단지 놀림감일 뿐이었다.

 다음 해 봄. 화의가 결렬되었다.
 이에야스에게는 예정된 결렬이었다. 그는 다시 60여주의 다이묘우(
大名)들을 전부 모아 대군을 일으켜 그들을 오오사카에 집결시켰다. 상기의 책략 – 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린애 눈속임 – 으로 오오사카 성은 벌거숭이나 마찬가지인 이상 자신이 서툴러하는 공성전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토요토미 가문은 불과 3일 동안 치른 전투로 무너졌다.
 낭인들과 그 낭인출신의 여러 무장에게 있어서는 이 괴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이 벌거숭이가 된 이상 성을 버리고 성밖 출진이라는 자살적 전법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들은 해자가 메워진 다음부터 자신들의 운명에 절망하였지만 그 절망이 성밖의 여러 전장에서 엄청난 활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전쟁 역사상 이 소위 여름의 전투만큼 수 많은 전사자를 낸 싸움이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 낭인들의 괴물과 같은 활약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마지막 시텐노우지(
四天王寺) 방면의 전투에서는 몇 번에 걸쳐 이에야스의 직할군이 패주하였다. 그 방면 지휘관이었던 사나다 유키무라 등도 이 절망적인 상황에 단념하고 있었으면서도 일시적으로 찾아온 국지적 승리에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여,

 "지금 히데요리 공이 출진하신다면!"

 하고 목마른 자가 물을 떠올리는 심정으로 열망하여 여러 번 후방 오오사카 성에 사자(使者)를 보냈다. 유키무라가 보기에 진두에 히데요리의 부대 표식인 황금 표주박만 뜬다면 막부군의 옛 토오토미 계열 다이묘우(大名)나 사졸들은 그것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기세가 눌릴 것이다. 그 틈을 계속 밀어붙이면 만에 하나라도 활로가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전선에서의 출진요청에 대해서도 요도도노는 반대했다. 위험하다 – 고 하였다. 유키무라가 보낸 급사가 수 차례에 이르렀을 때 오오노 하루나가는 결국 요도도노를 통하지 않고 히데요리 앞에 나아가 직접 결단 내리라고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이외로 히데요리는 선선히 출진하겠다고 하였다.
 - 말을 내오라고 하신다
 라는 것이 친위기마병이나 참모, 전령 등 친위대에게 전해졌기에 그들은 크게 사기가 올라 히데요리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 성문 안쪽에 도열하였다. 그 친위대의 군용(
軍容)은 히데요시 때부터 전해지는 것으로 황금 표주박의 큰 부대 표식, 황금 종이를 잘게 나눈 작은 부대 표식, 검붉은 후키누키(吹貫) 10개, 대모갑 코팅의 창 천 자루 거기에 히데요리의 말로 타이헤이라쿠(太平)라는 이름의 위풍당당한 말에 나시지(梨子地)의 안장이 얹혀져 이끌려 나오는 이 광경에, 타이코우(太閤)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며 잡병들 중에는 소리 높여 우는 병사조차 있었다.

 그들은 기다렸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당사자 히데요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요도도노가 그것을 알고 막았다고도 하며 히데요리의 출진과 함께 성안의 내응자가 봉기한다는 소문을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가 듣고 제지했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히데요리는 결국 나오지 않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선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가 전사했다.

 그 뒤 막부군이 성안에 난입하여 성은 사실상 낙성되었다. 하지만 요도도노와 그 아들의 모습이 없었기에 이에야스는 성안을 탐색시켰다. 밤이 되어 모자가 측근들과 함께 화제 속에서[각주:15] 운 좋게 제 모습을 간직한 식량창고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카타기리 카츠모토가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였다. 이 모자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이에야스도 이 추태에는 할 말을 잊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부하 무장들은 죽었고 성이 함락되었으며 성안은 전부 막부군에게 점령당하였는데 성주와 그 모친만이 창고에 처박혀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미의식으로 보면 정상이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그 창고를 포위하고 어쨌든 날이 밝는 것을 기다렸다. 이 광경은 이제 전쟁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창고에 숨어든 쌀도둑을 포졸들이 포위하고 있는 듯한, 그러한 정도로까지 전락되었다. 이러는 동안 요도도노는 마지막 행동에 나섰다. 오오노 하루나가를 창고 밖으로 내보내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이에야스에게 빌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묵살했다.
 날이 밝았지만 창고는 침묵을 지켰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에야스의 마음에 자비심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포위하던 병사들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총을 들어 일제히 쏘아댔다. 이에야스의 의사였다. 탄환은 벽을 뚫지는 못했지만 그 총성은 이에야스의 의사를 창고 안으로 전달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공격군의 사졸들도 창고 안에 있는 존귀한 분들이 일본의 관습대로 자해하여 그 마지막을 장식해 주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총성으로 창고 안 사람들은 절망한 듯했다.
 곧이어 흰 연기가 내부에서부터 피어 오르는 것을 밖의 사람들은 보았다. 창고 안의 존귀한 분들이 그제서야 자살을 결심하고 완료했을 것이다. 흰 연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화염으로 변하였고 그 화염은 점점 커져 지붕을 기우뚱하게 하더니 주저앉게 만들었다. 그 불탄 자리에서 남녀 20명 정도의 유골이 재가 되어 나타났다. 그 36㎡의 불탄 자리가 토요토미 가문 최후의 장소가 되었다. 1615년 5월 8일 정오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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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리에게는 사세구(辭世句)가 없다. 사세구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이나 마음 속을 추측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23년의 생애 속에 남기지 않았다. 히데요리는 그림자와 같이 살았으며 죽었다. 그 죽음도 아마 다른 사람이 그 손을 잡고 힘을 가해 불문곡직하며 죽음으로 인도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 광경도 잔인했을 터이지만 그 죽음은 이후 역사에 시로도 노래로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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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이 가문은 멸망했다. 이렇게 훑어보니 토요토미 가문의 영화(榮華)는 히데요시라는 천재가 낳은 한 겹의 환영(幻影)과 같다는 생각조차 든다.

  1. 시코쿠(四国)에서 날렸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의 네째 아들. 입성 전에는 쿄우토(京都)에서 서당(寺子屋 - 우리네의 서당과는 조금 다르지만)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원래 성은 모리(森). 오와리(尾張) 출신으로 츄우고쿠(中国)의 모우리(毛利)와는 혈연적인 연관은 없지만, 히데요시가 모우리(毛利)라는 성을 쓰게 만들었다(여기에는 그의 영지가 코쿠라(小倉)라는 모우리 씨를 견제하기 알맞은 곳이며 그런 곳에 둔 만큼 모우리 씨의 감정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었기에 삭탈관직. [본문으로]
  3. 보통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세키가하라 때 실질 부사령관 이었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부하 장수였지만, 고토우 모토츠구를 필생의 라이벌로 여긴 쿠로다 나가마사의 이지메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 나왔지만 역시 나가마사의 방해 공작으로 다른 가문에 취직 못하고 거렁뱅이짓을 하다가 입성. [본문으로]
  4. 만화 '센고쿠'의 주인공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둘째 아들 겸 적남(嫡男). 원래 이름은 센고쿠 히데노리(仙石 秀範)였으나 세키가하라(関が原)에서 부친과 달리 서군편에 서서 폐적. 당시 쿄우토(京都)에 있는 서당(寺子屋)에서 글자 이쁘게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함. [본문으로]
  5.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의 참모장 격이었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아들 혹은 동생. 세키가하라에서는 눈이 멀었던 아비를 대신해 꽤 활약. 전후 이곳저곳 도망다니다 입성. 오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는 그의 누나의 남편 즉 매형인 사나다 유키무라의 부대에 속하여 활약하다 전사.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소위 다섯 행정관(五奉行) 중 하나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아들. 겨울의 전투 까지만 해도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이며 어삼가(御三家) 필두 요시나오(義直)에 속해 있었으나 무슨 생각인지 여름의 전투에서 망해가는 오오사카 측으로 돌아서서 전투 중 사망. 즉 이 당시는 아직 토쿠가와 측에 있었음. [본문으로]
  7. 세키가하라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부대에 속하여 활약한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 為広)의 아들. 그에 대해선 이름(諱)조차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아무 기록이 없다. [본문으로]
  8. 키이(紀伊)의 호족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 氏善)의 적남. 또한 이르을 신구우 유키토모(新宮 行朝)라고 한다. 개전 전에는 키이를 영유한 아사노 가문(浅野)에 속했으나 너무 박한 연봉에 박차고 나와 떠돌다가 키이를 준다는 약속에 입성. 엄청난 달변가였는지 성안의 사기를 높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고 함...마치 그의 선조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 行家)처럼.. [본문으로]
  9.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편에서 뚜렷한 무사관을 펼치던 히데이에를 가볍게 무시한 그 무장. [본문으로]
  10. 오다 우라쿠의 둘째 아들이자 적남 오다 요리나가(織田 頼長). 급격히 변하는 성격은 그의 큰아버지 노부나가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는 사에몬이 아니라 사몬(左門)이다. [본문으로]
  11. 오다 우라쿠의 넷째 아들. 상기의 인물과는 다른 인물이다. 오다 우라쿠의 영지를 이어받는다. [본문으로]
  12. 나루세 마사나리(成瀬 正成). [본문으로]
  13. 안도우 나오츠구(安藤 直次) [본문으로]
  14. 해자를 메우는 담당관은 상기의 안도우 나오츠구, 나루세 마사나리 그리고 마사노부의 아들인 마사즈미(本多 正純)이다. 본문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내부해자도 메우기로 약정이 되어 있었다. 다만 외부해자만 막부가 메우기로 하고 내부는 오오사카 측이 메우기로 하였지만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막부가 밀고 들어가 메우는 김에 담, 문, 망루 등도 무너뜨렸기에 오오사카가 분노하게 된다. [본문으로]
  15. 화제는 성안에 있던 사람이 마구간에 불을 질렀고 그것이 번졌다고 한다. 오후 4시 즈음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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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meh 2009.05.05 14: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뭐 해자를 매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시간문제였다고 봅니다만.. 뭐 현재 복원된 오사카성의 규모따윈 비교가 안될만큼 압도적인 크기의 오사카성이었다고 해도 오다와라의 경우를 보면(..;)

    요도도노와 아들내미가 자결한곳은 비석이 하나 서있던걸로(...이것도 가물가물해서 원;) 거기가 쌀창고였는지 어떤지는 시바선생의 글을 어느정도 믿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확신은 못하겠지만요(ㄷㄷ...;)

    오랜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시바선생소설 '한권'은 제대로 읽었다고 나름대로 자부할 수 있게 되어 기쁩(..음; 막말의 암살자들은 사실 뭐 소설이라기 보다는 사건의 나열에 가까웠던 의미라;)니다.

    골든위크인데 기숙사방바닥에서 이러고 있군요. 리포트도 리포트지만 비가오니까 원 나가기가 싫어서(..게을러서 원..ㅡㅡ;)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後詰め가 없는 농성이다니보니 끝은 뻔했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장소는 대개 전편인 하치죠우노미야 편에서 언급되었던 야마사토쿠루와(山里曲輪..전 '산골성곽'이라고 번역했던)였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干飯蔵(전 '식량창고'라 번역)..라고 干飯라는 쌀을 쪄서 말린 오늘날의 인스턴트 식량을 보존하던 곳...인데..보통 히데요리가 숨어 있던 곳을 '창고(蔵)..'라고 기록된 곳이 많긴 합니다만 야마사토쿠루와가 오오사카성 텐슈(天守)의 북쪽 가까운데 있기에 식량창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여기까지 같이 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눈쌀 찌푸릴 참담한 번역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골든위크...라...
      전 미리 ATM에서 돈 뽑아 놓지 않았다가 쫄딱 일주일을 고생한 적이 있습죠.

  2. 朴先生 2009.05.06 0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 드디어 끝이군요 이렇게 시바선생의 소설 한 권이 제 완료 리스트에 추가되었습니다 아직 번역도 안 된 작품이기에 매번 다음 화를 기다렸었지요~
    그 동안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4: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난잡한 번역투의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오히려 제가 "읽어 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란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3. Tily 2009.05.06 0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정치 집단의 운명이 걸린 사자를 보내는데, '오사카 제일의 미녀' 라는 어린 시녀를 보낸다는건 대체
    어떤 정치적 결과를 얻기 위함인것인지. 이에야스만한 정략, 모략, 군략의 달인을 상대할때는 적어도 책임있는
    결정을 내리거나 고민을 할만한 사람을 내세웠어야 할터인데...

    몰락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틀린말이 아닌거 같습니다.

    그리고 오사카 여름전투의 마지막 도묘오지 전투부터 유키무라의 죽음까지는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전투들로
    손색이 없는 전무후무한 격전의 연속이었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4: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은 소설 상의 이야기로 실제로는 오오노 하루나가, 오다 우라쿠...가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마사노부의 아들)에게 따진 것으로 되어 있습죠.

      또한 실제로는 바깥해자는 물론 니노마루, 산노마루도 메우는 것이 겨울의 전투 후 화의 성립의 조건이었습니다. 다만 바깥해자는 막부군이...니노마루와 산노마루는 토요토미 군이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도와준다는 구실로 막부군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 메우긴 했지만요.

      여담입니다만....
      화의 조건이 오고가던 중에 실제로 요도도노는 인질로 에도로 가기로 하였지만 이에야스가 거부하였습죠.
      또한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전통으로 만들어 놓은 텐노우(天皇)의 정전명령도 이에야스는 거부...

      결국 이 전투는 이에야스의 마음에 달려 있었지 토요토미 측이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끝날 전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4. 맹꽁이서당 2009.05.08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대단원이군요.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4: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매번 난잡한 번역투를(제 나름으로는 시바 선생의 글체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5. ckyup 2009.05.09 05: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좋은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요즘 대망을 읽고있는데요, 이곳에 있는 글들과 비교해보며 읽는재미가 아주 좋습니다. 번역하시는 글들을 읽어보면, 일본글과 말의 냄새를 아주 잘 살려서 하시는것 같아, 아주 흥미스럽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부탁드립니다. 가끔 질문있으면 올리테니 답변좀 부탁드립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10 1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망이라...참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그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었으면서 너구리는 왜 그런 식으로 만들었는지...(개인적으로 오케하자마 전후의 노부나가는 제가 본 센고쿠 관련 소설 중에서는 가장 멋있더군요)

      그 번역투를 그렇게 좋게 보아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비꼬시는 거 아니죠? 그쵸?? ^^; )

      자주 들려 주세요!!!

      질문 대환영입니다!!....라고 하니 잘난 척하는 것같군요..^^ 저도 많이 아는 편은 아니기에 답변 드리고자 책, 위키, 검색 등등을 해야하다 보니 저도 공부가 되더군요. 그러니 같이 공부해요~♥

  6.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5.11 2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카츠모토는 뭐랄까...죽어라 뛰어다니는데 할복하란 소리 나오니 암담하군요;;
    그리고 마지막 히데요리에 대한 얘기는 왠지 인상 깊네요...히데요시와는 달리 이렇다 할게 없는 느낌이라는게...음..;;;

    ...쨌든 안그래도 요도도노편은 길었는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12 17: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계속 쌓였던 의심이 결국 그런 지경으로 몰고 간 것 같습니다.

      너무 밝고 큰 별 옆에 있으면 빛을 잃게 되더니 그 꼴 같습니다. 결국 사람들에 의한 인상은 이 글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데요리라는 이름보다 아들..로만 남은 것 같습니다.

      읽어 주셔서 거듭 고맙습니다. ^^

  7. 마사히코 2010.02.02 15: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들려야겠네요.

  8. 2013.09.07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만 보면 히데요리는 너무 저능아였군요

  9. 츠가와 2017.01.23 0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착을 못짓고 이에야스를 관동으로 이봉시켜서 키워준 원숭이 잘못이군요.

十二.  

 이 챠챠 부인(茶御料人), 요도도노(淀殿), 다이구인(大虞院)이라고 불리는 여성이 자기 자식 히데요리(秀)의 이름으로 이 땅에 남긴 업적이라면 신사나 절을 다시 부흥시킨 정도였는데 그 광신적인 종교에 대한 투자가 이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쿄우(京)의 키타노 신사(北野社), 이즈모(出雲)의 타이샤(大社), 쿠라마(鞍馬)의 비사문당(毘沙門堂), 카와치(河)의 혼다 하치만 궁(田八幡宮), 쿄우(京)의 토우지(東寺) 남대문, 에이잔(叡山)의 요카와(川) 중당(中堂), 산죠우(三) 돈게 원(曇華院), 셋츠(津)의 카츠오 사(勝尾寺), 오오사카(大坂)의 시텐노우 사(四天王寺), 타이고(醍醐)의 산보우 원(三院) 인왕문(仁王門), 쿄우(京)의 난젠 사(南寺) 법당(法堂), 야마시로(山城)의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岩水八幡宮), 오오사카(大坂)의 이쿠쿠니타마 신사(生魂社), 카미다이고(上醍醐)의 미에이 당(御影堂)과 오대당(五大堂), 여의륜당(如意輪堂), 사쿠라 문(門) 등이다. 킨키(近畿) 및 그 주변에서 [우다이진 히데요리 건립(右大臣秀建立)] 혹은 수축했다는 현판(懸板[각주:1])이나 기록이 보이지 않는 옛 신사나 절 오히려 드물다고 해도 될 정도로 엄청났다. 절이나 사원의 건립이나 수리는 하나의 절, 하나의 사원에도 많은 돈이 든다고 하기에 이런 것들에게 든 돈은 기절할 정도의 금액이었으며, 요도도노가 히데요리의 앞날을 비는 성심에는 칸토우(東)에 있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어이구~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야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故) 타이코우(太閤)의 남겨진 재산은 엄청나지 않습니까?"

 하며 마사노부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 세상에 히데요시(秀吉)만큼이나 돈에 관해서 도가 튼 사람도 드물 것이다.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즈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직할령은 불과 200만여 석에 지나지 않았다. 그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칸토우(東) 250만여 석에 봉하였으니 석고로 따지자면 신종(臣從)하는 이에야스(家康) 쪽이 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미곡중심의 경제에서 자시의 두뇌를 빼내었다. 그는 사도 금산(佐渡金山[각주:2]) 등을 개발하여 광업이익을 독점하였으며, 사카이(堺[각주:3])나 하카타(博多[각주:4])의 무역을 진흥하여 관세를 받았고, 비와고(琵琶湖) 호수 교통의 거점인 오오츠(大津)를 도시화하여 국내 무역의 이윤을 얻거나 하는 식의 수익으로 정권과 토요토미 가문의 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실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축적되어 히데요리에게 상속되었다.

 "오오사카의 어리석은 아줌마와 아이는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하고 혼다 마사노부는 입버릇같이 말했다. 사실 에도(江戸) 정권이 이미 여러 다이묘우(大名)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히데요리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에도 정권에 금이 가는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두 가지 점에 있어서 불안했다. 서쪽의 다이묘우(大名)가 야심을 품으며 히데요리를 내세우려고 할 지도 모른다는 점과 토요토미 가문이 가진 재산이었다. 히데요시는 금화를 주조하여 유통경제 체제를 확립하였는데 그 때문에 쌀이 없어도 돈만 있다면 단번에 10만의 낭인을 고용하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었다. 그 돈을 줄이기 위해서 마사노부는 여러 사람을 거치는 방식으로 요도도노와 그녀의 유모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에게 원령(怨靈)의 공포를 불어넣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들은 칸토우(関東)의 모략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유산은 말이 연못의 물을 마신 정도 밖에도 줄이지 못한 듯했다. 그 정도로는.

 "쿄우()의 대불(大佛)을 재건시키면 어떨까?"

 하고 이에야스는 마사노부에게 말했다. 오오~, 하고 마사노부는 외치며, 과연 묘안이지 않습니까? 하고 무릎을 쳤다. 쿄우의 대불이라는 것은 히가시야마(東山)의 호우코우 사()의 불상으로 히데요시가 그것을 건립했다. 히데요시는 나라(奈良)의 대불[각주:5]보다도 거대한 것을 만들고자 하였고 실제로 그것을 만들었다. 단 이 시대는 주조기술에 있어 가장 퇴보한 시기였기에 목조 회반죽으로 하였다. 건물의 높이는 약 60.6미터, 대불의 높이는 약 48.48미터로 이를 위해 소비한 일수는 이천일, 총인원 1천만 명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대불은 1596년의 후시미(伏見)-쿄우토(京都) 지진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없었다.

 "필시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도 미련이 남으셨을 걸세. 유지를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토요토미 가문의 가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불러 직접 이에야스가 말했다. 카츠모토는 넙죽 엎드려 절해 그 말을 받들고는 서둘러 오오사카 성으로 돌아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에게 그 뜻을 보고하자 그들은 –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 크게 기뻐하였다. 항상 배석해 있는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 등은 미칠 듯이 기뻐하여 카츠모토의 이야기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곧이어 요도도노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이는 모두 타이코우 전하가 저 세상에서까지 가문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시작하시옵소서"

 라고 말했다. 감격에 몸을 떨고 있었다.
 요도도노도 떨고 있었다. 그녀들의 기쁨은 이에야스의 마음에 악마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로써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 타이코우의 유지를 받들라는 식의 말이 이에야스의 입에서 나올 줄은, 세키가하라(
) 후의 저 영감탱이의 태도로 보았을 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의 안녕을 빌기 위해 신불에게 수없이 투자했던 보람도 이걸로 보답 받은 듯 했으며, 하늘도 이에야스의 마음에 따스한 바람을 불어 넣는 듯했다. 요도도노는 히데요시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금동불상을 주조하기로 하였다. 기술상 조금 작게 만들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약 19미터라는 웅대함이었다.

 대불 건립은 예전 쇼우무 텐노우(聖武天皇) 때도 알 수 있듯이[각주:6] 국가적 규모의 사업이지 아무리 히데요시의 유산이 많다고는 해도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70만석이 될까 말까 한 일개 다이묘우(大名)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도도노는 그것을 했다. 곧이어 주조가 중반쯤 진행되고 안치하는 건물도 거의 다 되었을 무렵 주물사(鑄物師)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그렇게 공들인 대불도 녹고 건물도 재로 변했다.

 하지만 요도도노와 그녀의 유모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굴하지 않았다. 새로이 시작하려 하였다. 단지 그 많다던 토요토미 가문의 재산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가 남긴 황금 중 다이훈도우킨(大法馬金)이라는 대형 주괴(鑄塊)를 녹이기로 하였다. 이 덩어리 하나로 오오반(大判)이라는 금화 천 닢을 만들 수 있다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부터 천수각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지만 결국 그것에 손댔다[각주:7]. 그러나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기에 부족한 분은 에도 바쿠후(幕府)에게 원조받고자 하였다. 요도도노는 그녀의 친동생인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부인 오고우(お)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히데타다를 설득시켰다. 참고로 히데타다는 오오사카(大坂)에 대한 밀모에 대해서 부친 이에야스에게 조금도 전해 듣지 못한 상태였다. 히데타다는 곧바로 사자를 순푸(駿府)의 이에야스에게 보내어 그 뜻을 상담하게 하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하고 이에야스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때처럼 떫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히데타다의 사람 좋음에도 화가 났다. 더불어 또한 이에야스에게 있어 적 –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인 토요토미 가문 여성들의 사람 좋음, 어리석음, 순진함도 이렇게까지 한도 끝도 없으면 불유쾌했다. 예를 들면 이에야스 정도나 되는 인물이 토요토미 가문의 기껏해야 여성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서 장기를 두고 있는데 상대는 그렇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순진하게 한 수 물려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에야스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며 현 쇼우군 히데타다라고 하여도, 실은 이 대불 재건을 권한 나에게 타이코우의 명복 어쩌고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으며 토요토미 가문의 재산을 없애기 위해 서란다 – 는 마음 속의 것을 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타다 놈은 알아서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또 화가 나,

 "처먹을 만큼 처먹은 나이로 그런 말밖에 못하나?"

 하며 입술을 여덟 팔자로 만들었다. [스루가 토산(駿河土産)[각주:8]]이라는 옛 서적에는 이에야스의 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히데요리는 어린아이, 요도도노는 여성이기에 철없는 소리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매사에 숙련된 사나이들이다. 그런데도 어린아이인 히데요리나 부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더구나 그것을 나한테까지 상담해 오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당초부터 호우코우 사()의 대불건립이라는 것은 고 타이코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지 천하를 위한 사업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히데요리의 재건도 자기네 가문의 사사로운 일에 지나지 않으니 그렇기에 쇼우군 가문에 있는 자가 관련할 문제도 아니다"

 고 이에야스는 내뱉듯이 말하고는 자리를 떠버렸다.
 그 보고는 오오사카(
大坂)로 전해졌다.

 "그렇게 말했나?"

 하고 요도도노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일단 달리 생각했던 이에야스에 대한 생각을 제자리로 원위치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전히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차가웠다.
 요도도노는 토요토미 가문만의 돈으로 하기로 하여 카타기리 카츠모토에게 그렇게 명령하였다. 금고가 그로 인해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을 카츠모토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이에야스의 본심을 이 노인은 알고 있었던 만큼 애써 요도도노의 낭비에 목숨 걸고 '아니되옵니다'를 할 마음도 일지 않았으며 또한 의견을 낸다고 해서 들을 요도도노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재정담당관에게 그렇게 전했다.

 대불공사는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 쿄우토(
京都)에서는 여러가지 소문이나 유언비어가 난무하며 요도도노의 귀에도 들어왔다. 난무했던 만큼 소문 중에는 이에야스의 책모를 정말로 제대로 눈치챈 듯한 것도 있어, '이에야스는 대불건립을 이용하여 히데요리를 서서히 궁핍하게 하여 무일푼으로 만든 뒤 공격하여 죽이려는 생각인 듯하다'는 것이었다. 요도도노는 그것을 듣고 놀람과 공포와 분노로 인하여 갑자기 다리가 얼음과 같이 차가워지고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결국 쓰러졌다. 복도 여기저기서 의사를 부르고 물을 준비하는 여관들로 떠들썩했지만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핏덩이일 때부터 요도도노를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이 자리는 우선 요도도노가 안심할 만한 말을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씨. 걱정할 것은 없사옵니다. 카가(加賀)의 마에다(前田)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됩니다. 명령하여 이에야스를 물리치게 하는 것입니다"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카가(
加賀)의 마에다 가문(前田家)은 창업자인 다이나곤(大納言) 토시이에(利家)가 히데요시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참고로 토시이에는 히데요시가 젊었을 적부터의 친구로 히데요시는 병상에서 자신의 죽음을 깨닫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 토시이에는 내 죽마고우이며 또한 다시 없는 의리의 사나이이니,
 라는 말을 눈물 섞인 목소리로 거듭했다. 토시이에야말로 자신이 죽은 뒤의 히데요리를 지켜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히데요시는 한창 잘 나갈 때도 이에야스의 대항자로서 항상 토시이에를 키웠다. 이에야스의 관위를 승진시킬 때는 반드시 토시이에의 관위도 승진시켰다. 이에야스의 관위 쪽이 항상 한 단계 위였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평소 잡담을 나눌 때는 '다이나곤(토시이에), 나이후(
=이에야스)'라고 순위를 반드시 반대로 하여 토시이에의 이름을 먼저 말하는 식으로 배려를 함으로써 토시이에의 마음을 잡고자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 토시이에를 자신의 사후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만든 것인데, 다행히도 토시이에의 의리는 그에 응했으며 또한 토시이에만큼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사후의 다음 해 뒤를 쫓듯이 죽었다.
 때문에 마에다 가문은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
利長)가 당주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부친 토시이에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 계속 품어왔던 감상이 전혀 없었다. 토시나가는 앞으로의 천하가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것이라 내다보고 이에야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친을 에도로 보내어 인질로 삼게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도 이에야스 편으로 호쿠리쿠(北陸)에서 싸웠으며 싸움 후 영지가 증가되었다. 카가(加賀) 백만석이라고들 하지만 히데요시 시대의 마에다 가문은 80여만석에 지나지 않았으며,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노토(能登) 1개국과 그 외의 지역을 하사 받아 100만석이 되었다[각주:9]. 이후 히데요리의 후견인이 되어야만 할 가문이면서도 토시나가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눈길을 보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런 토시나가인데도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그에게 이에야스를 물리치게 하시옵소서"

 라고 요도도노에게 말한 것이다. 그랬다. 마에다 가문은 현재 다이묘우(大名)로서는 가장 컸으며 거기에 히데요시의 유언도 있었기에 토시나가가 히데요리를 옹립하여 다이묘우들을 규합하면 에도 정권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물론 어디까지 꿈 속에서의 이야기지만.
 단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에게 있어서는 이것만큼 현실감 넘치는 착상(
着想)도 없었다. 그녀의 두뇌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엄격한 자기중심 논리가 섞였을 때 현실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요도도노도 다를 바 없다. 요도도노는 이 한마디에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곧바로, 서둘러 오늘 안으로 카가(加賀)에 사자를 보내라, 토시나가에게 충성심을 보이게 하라, 고 떠들어댔다.

 사자가 카가(加賀)로 달려갔다.
 이때가 1610년 가을이었다. 이 즈음 세간에서는 마에다 토시나가를 '카가 재상(
加賀宰相)'이라고 불렀다. 나이는 이제 50에 가까웠으며 매일 생각하는 것이라곤 자기 가문을 후세까지 보전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랬던 만큼 과거의 망령과 같이 오오사카의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서 온 밀사(密使)만큼이나 이 소심한 재상님을 놀라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오오사카의 여성들이 그렇게까지 마에다 가문에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에다 가문에 있어 몰락을 의미했다. 한편으로 마에다 가문은 토쿠가와에게 있어 눈 위의 혹이기에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뭉개질지도 몰랐다. 때문에 토시나가는 친모인 호우슌인(芳春院)을 에도에 인질로 보냈으며 또한 그걸로도 부족한 듯하여 토시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아첨을 떨어 토쿠가와 가문의 직신 중 하나를 마에다 가문 필두가로로 보내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혼다 아와노카미(本多 安房守)[각주:10]가 바로 그로, 가로는 명색일 뿐 마에다 가문에 대한 감시자였다.
 토시나가는 어중간한 태도가 반대로 해를 불러온다고 생각하였다. 오오사카의 여성들에게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 타이코우의 은혜는 크게 느끼고 있소. 그러나 그 은혜를 갚으라고 하는데, 망부 토시이에가 오오사카 성에 머물며 히데요리님에게 진력을 다하여 그 때문도 있어 병환으로 돌아가셨소. 그것으로 은혜는 전부 다 갚은 셈이 될 것이오. 졸자(拙者) 같은 경우 망부와는 또 입장이 다르오. 졸자는 망부와는 달리 새로 에도에 은혜를 입어 그 새로운 은혜덕분에 카가(加賀), 엣츄우(越中), 노토(能登) 3국의 태수가 될 수 있었소. 이 큰 은혜는 칸토우()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다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한 일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소. 그러하니 졸자에게 기대를 품고자 하는 것은 큰 착각이며 이쪽에게 이보다 더 큰 폐는 없을 것이오."

 라는 것이었다.
 이 답변을 요도도노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가 오오사카에서 받았을 때, 잠시 동안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침묵이 이어졌지만 곧이어 꿈에서라도 깨어난 듯이 달린 입들마다 떠들며 토시나가의 배은망덕을 공격했다.

 한편 마에다 토시나가는 그래도 불안했다. 이로 인해 토쿠가와 가문이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토시나가는 은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예전에 토요토미 가문에 들락날락한 자신이 당주로 있는 한 오오사카는 이루어지지도 않는 원조를 계속 기대할 것이라 생각하여 이것을 계기로 막냇동생인 토시츠네(利常)를 양자로 삼아 당주자리를 물려주기로 하고 순푸(駿府)에 급사를 보내어 그 뜻을 전하며 이에야스의 의향을 살피게 하였다. 물론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서 밀사가 왔다는 것도 이에야스에게 알렸다.

 "카가 재상(토시나가)님이 하신 처치는 정말로 맘에 드는구려"

 하고 이에야스는 크게 칭찬하였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오오사카가 칸토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이 거기까지 끓기 시작한 이상 서둘러 오오사카를 멸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멸하기 위해서는 천하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이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생기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지'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적당한 이유가 성장하여 숙성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금까지 이에야스가 해 온 사고방식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기다리기에는 이에야스가 너무 늙었다. 지금 오오사카에 있는 후환의 뿌리를 남긴 채 죽어버리면 이에야스의 사후 천하는 히데요리에게 빼앗겨 이에야스가 살아 생전에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여생 얼마 안 남았으니 지금은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오오사카를 도발해서 저 모자를 화나게 하여 그쪽에서 먼저 칼을 뽑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야스가 그 결의를 품고 상경한 것은 1611년 3월이었다. 숙소를 니죠우 성()로 정했다. 이 성은 이에야스가 쿄우토에 토쿠가와 가문의 성으로 전년에 세운 것으로, 쿄우토 조정의 감시와 이에야스-히데타다 상경시의 숙소라는 두 가지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곧바로 오오사카(
大坂)에게,

 "상경하여 나에게 인사하러 오라"

 고 사자를 보냈다. 사자는 토쿠가와 가문에 있어서도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도 옛 주인 격에 해당하는 오다 우라쿠(織田 )가 선정되었다. 다인(茶人)이며 웅변가로 또한 무엇보다도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있어 친족[각주:11]이었기에 사자로서는 최적이었을 것이다.
 - 만약 히데요리가 상경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인식하여 힘에 의지할 생각이다. 겸해서 또한 이것이 히데요리에 대한 최후통첩임을 명심하도록.
 이라는 결의를 사자에게 전했다. 오다 우라쿠도 긴장하였고 쿄우토(
京都)의 시민들까지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거라며 떠들어댔다. 이에야스는 이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는 김에 확실히 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패도 꺼냈다. 코우다이인 네네(高台院 )였다. 이 히데요시의 미망인 –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는 세키가하라 승리의 배후 공로자이지만 – 은 이에야스의 두터운 신뢰 속에서 쿄우() 히가시야마(東山)의 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이야말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설득시키기에는 가장 알맞은 인물일 것이다.

 코우다이인도 이에야스의 결의를 듣고 긴장하여 곧바로 자신이 손수 키웠다 할 수 있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와 자기 친정의 당주인 아사노 요시나가( 幸長) 거기에 오오사카(大坂)의 가로인 카타기리 카츠모토를 불러 요도도노에게 세상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시키도록 의뢰했다. 코우다이인이 생각하기에 이미 이에야스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오오사카(大坂)도 과거의 권위에만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이에야스를 따를 것이며, 그 성을 건네라고 하면 성을 건네고, 5만석 정도의 신분으로 참으라고 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토요토미 가문의 장래와 히데요리를 위함이다 - 는 것이었다. 그러니 상경하라는 말을 들으면 얌전히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요도도노가 그런 당연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토요토미 가문을 망치는 사람은 요도도노라는 것을 키요마사, 요시나가, 카츠모토에게 말했다. 그들도 그 뜻에 이의(異意)가 없었다.

늦었다고요?

  1. 지금으로 말하면 머리돌 같은 것. [본문으로]
  2. 참고로 사도 금산의 금맥이 발견된 것은 1601년. 히데요시가 죽은 해는 1598년. [본문으로]
  3. 현 오오사카(大阪) [본문으로]
  4. 현 후쿠오카(福岡) [본문으로]
  5. 약 15미터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나라(奈良)의 대불은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본문으로]
  7. 이것을 특히 다이부츠 오오반(大仏大判), 즉 '대불을 만들기 위해 만든 돈'이라고 하여 1608년부터 1612년까지 주조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1720년 전후에 '다이도우지 유우잔(大道寺 友山)'이라는 인물이 세키가하라 이후부터 이에야스가 죽을 때까지의 일화를 기록. 이에야스가 은거하면서 에도 바쿠후(江戸幕府)를 조종하는 모습이 잘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노토(能登)는 토시이에의 차남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政)의 영지였다(약 21만석). 즉 마에다 가문 전체의 석고는 이때 이미 100만석을 넘어있었다. 세키가하라 때 토시마사는 중립을 견지하였기에 이에야스는 그의 노토를 빼앗아 형인 토시나가에게 주었다. 본문의 80여 만석은 토시이에-토시나가만을 뜻함. [본문으로]
  10.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 본편에서 자주 언급되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차남이다. 여담으로 본문에 언급되는 것은 두 번째로, 첫 번째는 1604년까지 섬기다가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세키가하라 때 이에야스에게 반항하여 바쿠후에게 위험시 되고 있던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안정에 조력하고 있었다. 1611년 마에다 가문 복귀. [본문으로]
  11. 요도도노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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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4.07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뜻밖의 애교인가요? ㅋㅋ

  2. 朴先生 2009.04.08 0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찌나 기다렸던지... 화가 나려다(저 따위가;) 마지막 한 마디에 풀려버렸습니다ㅋㅋ^^
    말씀하시던대로 역시 요도도노 편이 제일 기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8 11: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약속 못 지킨 것은 저이니 화 내셔도 괜찮습니다. 때리지만 않으신다면 어떠한 것도 달게 받겠습니다.(그러니까 때리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한..15~17까지는 가지 않을지..
      (지금이 12니까....oTL)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4.08 0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네네 조언대로 고분고분 따른다고 해도 결국 무슨 꼬투리를 잡힐 것은 뻔한 일이고...
    히데요리 모자가 목숨을 부지하려면 해외 도피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a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8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힘만 버렸다면 명맥은 유지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일개 쿠게(公家)로 남아 있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인식하기에는 변화가 너무 급격했던 것 같고요. 천하인이었던 1600부터 본문이 언급하는 1610년 즈음까지 불과 10년사이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듯한 느낌을 받았을테니까요.

  4. dameh 2009.04.09 2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늦었습니다만 잘 보고 갑니다. 일본이란덴 인터넷 되는데가 참 적어서..ㅡㅡ;

    여담이지만 도무지 사람의 한심함엔 끝이 없는것 같군요. 요도도노편은 볼때마다 참 가슴이 답답해지는 편이라..ㅡㅡ;

    토시츠네가 이때 이 이유로 가독을 물려받은것이었군요. 또 하나 지식을 알아 가는 것 같아서 즐겁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12 1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을 늦었습니다.
      (요즘 감기 걸려서 몸과 머리가 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요도도노는...그쵸...
      뭐 이건 애초부터 게임이 안 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많은 센고쿠 경험(약소국 출신, 인질, 하극상, 지 아들 죽이기, 대패로 인해 똥싸기, 대승을 거두었지만 추녀와 빠구리 뛰기 등등)을 가진 불세출의 인물과 온실에서 지 하고 싶은대로 하고만 자란 아가씨가 센고쿠에서 살아 남기에 대한 머리 싸움을 하는 것이다 보니..

      실제로는 1605년 6월 즈음...본문에서 언급('1610년 가을'이라고 언급)되는 것 보다 약 5년 정도 이른 시기에 아들이 없던 토시마사의 양자가 되어 3대번주에 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司馬史観을 그냥 믿으면 위험합니다~

    • dameh 2009.04.22 14: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긴 시바선생글을 100%믿을수야.. 그 사도금산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ㅎㅎㅎ; 그런데 추녀와 성관계라니 히데요시 여동생을 이야기 하시는 건가요?ㄷㄷ;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2 16: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지기라도 했음 그럴 일 없었을 텐데 말입죠.

四.

 

 삼 년이 지났다.

 챠챠(茶々)는 20살이 되었다.

 “아자이 님(浅井殿)의 아씨를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하고 어느 날 밤에 히데요시에게 물은 것은 놀랍게도 그의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였다.

 “이미 시집갈 곳은 정하셨겠죠?”

 “아직이다”

 히데요시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아직이요?”

 “그렇다”

 “알고 계십니까? 벌써 스무 살이옵니다”

 말할 것까지도 없사옵니다만 -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거듭 말했다.

 “보통 15살이면 시집을 갑니다. 20살이면 좋은 날이 다 가 정실이 먼저 죽은 곳이라도 찾을 수 밖에 없는 나이라고 할 수 있죠. 소중한 분을 맡고 계시면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하고 그녀가 끈질기게 말한 것은 성안의 소문을 하루 종일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존귀한 핏줄이며 저렇게 미인인데도 – 하고 소문은 말한다. 어디로 갈 것이라는 결혼 소식을 전혀 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하는 뭐랄까 그 거시기 한 마음이 있으신 것은 아닐까? 필시 그럴 것이다 - 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호색은 천하에 유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시대는 남자건 여자건 모이면은 그런 종류의 이야깃거리로 쑤군거렸다. 예를 들어 성안의 소문에 따르면 –

히데요시님은 옛날부터 챠챠 님의 모친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을 짝사랑하고 계셨었다. 아자이 씨(氏) 멸망 후 오이치 마님께서 오다 가문(織田家)으로 돌아오셨을 때도, 제발~제발~하면서 돌아가신 노부나가 님께 매달려서는, 제 부인으로 받아 들이고 싶습니다고 부탁하였지만 정작 오이치 님께선 그 분을 싫어하여 우연히 정실이 돌아가셔 홀몸이셨던 시바타(柴田)님께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시바타 공격은 사랑의 복수이죠. 그 증거로 히데요시님은 좀처럼 적을 죽이시지 않던 분이셨는데 시바타 님만은 용서하지 않고 텐슈각(天守閣)을 아예 재로 만드셨잖아요.

 라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았다. 오이치가 아직 결혼하기 전엔 짝사랑하고자 하여도 아예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또한 오이치가 과부가 되었을 때 히데요시가 그녀를 부인으로 하고 싶다며 울며 매달렸다고 하지만 히데요시에게는 비루한 신분일 때부터 처 네네(寧々) –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엄청난 호색한이었으면서도 이 조강지처를 유난히도 존중하며 둘도 없는 상담 상대로 하였고 겸해서 조심하는데 있어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처를 버리고 오이치를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우선 이 남자에 한해서 있을 수 없었다. 참고로 호쿠리쿠(北陸)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공격하여 죽였을 때는,

 “카츠이에를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하고 몇 번이나 부하들에게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카츠이에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가 안정 되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다 - 고 말하였다. 히데요시에게 놓여진 조건이 카츠이에를 죽여버렸다. 오다 정권의 필두가로를 이 세상에 살려두면 히데요시 정권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 놀음이 아니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원한을 몸 안에 저장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원한, 복수라는 에너지가 이 인물의 성정에서는 절대 끓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소문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처음으로 성숙해진 챠챠를 보았을 때 이렇게 오이치님과 똑 빼 닮을 수 있을까? 하고 틀림없이 피가 끓었다. 오이치를 짝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과거는 없었다고 하여도, 오이치를 이 세상에서 미모가 제일인 사람이라고 마음 속으로 깊이 동경했었던 적은 틀림없이 있었으며 이는 히데요시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오다 가문의 가신들 중에서 수 없이 많이 있었을 터이며 오이치는 그런 존재였다. 오이치는 하늘나라 사람이었다. 히데요시는 거기까지 손을 뻗으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것이 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현실인식 감각이 너무 예리했던 그 당시의 히데요시는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할 정도 별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치젠 이치죠우다니의 단계에서 달랐다.

 ‘이 아이는 내 날개 품 속에 있다’

 라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이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녀와 쏙 빼 닮은 소녀가 하늘나라에서 떨어져 자신의 날개 품에서 보호받는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품어주마 하고 몰래 결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히데요시의 기분을 집요하게 윤색하고 왜곡하면 소문과 같은 이야기처럼 될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 삼 년 챠챠를 조용히 그 생활 속에서 살게 해 두었다.

 - 조용히……

 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챠챠에 대한 방침이며 머지않아 챠챠를 얻는 길이라고도 믿고 있었다. 그것은 공성전과도 닮아있었다.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도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도 히데요시는 결코 무리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장기 포위전 형태를 취하며 적의 보급선을 끊고 수로를 끊어 때로는 수공을 하여, 어쨌든 농성하는 병사들의 전의를 잃게 하는 전술에 주안점을 두어왔다. 그런 감각으로 챠챠라는 존재를 보고 있었다. 무턱대고 챠챠의 침실에 함부로 뛰어드는 식의 어리석음을 이 남자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챠챠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긴 시간이 챠챠가 가지고 있는 옛 상처를 아물게 할 것이다. 그 동안 빈번한… 그러나 담백하고 온정에 넘치는 접촉이 히데요시에 대한 챠챠의 마음을 조금씩 바꾸어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요 삼 년 궁중의례를 위해서 쿄우(京)에 올라와서 전쟁 때문에 몇 번이나 스즈카토우게(鈴鹿峠) 고개를 넘어[각주:1] 동쪽으로 정벌하러 떠나면서, 그렇게 간 곳곳마다 반드시 챠챠에게 진귀한 선물들을 보내며 근황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 자연스레 챠챠도 예의상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챠챠에게 있어서 요 삼 년은 일분일초가 히데요시의 온정 속에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네네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거동을 그렇게 볼 수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시녀들에게서도 여러가지 소문을 듣고 있었다. 편지 왕복 등도 챠챠의 시녀가 남들에게 흘렸기 때문에 네네의 귀까지 들어왔다.

 불길한 생각을 계속 하던 차에 몇 일전 오다 우라쿠(織田 有楽)가 차(茶)의 자리에서,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열심이더군요”

 라는 것을 네네에게 뜬금없이 말한 것이다. 우라쿠는 많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네의 현명함은 그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오우미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주력인 오와리 파벌(尾張衆)에 대항하기 위해 열심일 것이다. 오와리 파벌은 이 네네에게 옹호 받고 있다고 세간에서는 보고 있었다. 오와리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나 무장이 히데요시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하면 반드시 네네에게 울며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 대한 중재를 부탁했다. 네네는 언제나 기분 좋게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네에게 그 이상의 야망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성안의 소문은 달랐다. 오와리 파벌이라는 이 오오사카 성에서 가장 큰 관료, 무신 세력의 중심에 네네가 있다고 보고 있어, 네네의 존재는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선명하게 정치적 자력(磁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네도 시녀의 입으로 그러한 풍문은 듣고 있었다.

 “오우미의 사람들이 자기들도 오와리에 태어나고 싶었다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네네에게 있어서는 이외였다. 오우미 파벌의 대다수는 이 네네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으며 부탁하러도 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극소수의 오우미 사람만이 네네와 접촉하고 있었다. 서 오우미 출신인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나 비와고(琵琶湖) 호수 동쪽 중부 출신인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이 그들로, 그들은 오히려 같은 지역인 오우미 사람들과는 소원하며 오와리 파벌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참고로 오와리 파벌의 대표적 인물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일 것이다. 그 외에 젊은 축으로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다소 나이가 있는 자로는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등이 있으며, 모두 초창기의 히데요시와 함께 전쟁터의 먼지를 뒤집어 쓰며 성장한 역전의 무장들이었다. 오와리 파벌의 특색은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라는 것에 있었다.

 이 점 오우미 파벌은 관리에 뛰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나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는 거의 ‘희대의’라고 붙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경제 관료로, 미츠나리 등은 거대하게 성장한 히데요시의 재산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각종 장부를 발명했다. 천하 재정을 위한 장부부터 부엌의 자잘한 출납장에 이르기까지 장부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하위 관료들을 지휘하였고 관리하였다. 그들 오우미 파벌의 관료가 없으면 히데요시는 병사를 일으킬 수 없었고, 직할지를 다스릴 수 없어 하루라도 편안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미 이 신정권의 중추에는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의 걱정은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만약 결속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라쿠는 네네에게 말로 하지 않았을 뿐, 조심하시길, 만약 그들이 옛 주인격인 아자이 님(浅井殿=챠챠(茶々))을 옹립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라기보다 좀더 대놓고 말하면,

- 그들은 아자이 님께서 측실이 되신다면……

 라고 그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아예 까놓고 말하면 그들 오우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었다.

  1. 교통의 요지로 스즈카 산맥 중 가장 낮은 위치에 있어 이로부터 동쪽을 東国이라 일컬었다. 쿄우토에서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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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이 일행이 에치젠(越前)을 떠나 오오사카(大坂)에 들어섰을 땐 이미 히데요시가 각별한 건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그 건축 완성의 빠름으로 추측하건데,

 “아씨를 만나기 전부터 오오사카에 부하를 보내어 지시해 놓으셨나 봅니다”

 하고 유모는 또다시 히데요시(秀吉)를 칭찬하였다. 챠챠(茶々)는 여태껏 이렇게 훌륭한 건물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의미에서는 만족하였다. 유모는 말했다.

 “히데요시님이 얼마나 마음씀씀이가 좋은 분이신가 하면, 망부이신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님, 망모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의 기일(忌日)에는 스님을 불러 재를 올리라고 일부러 말씀해 주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호의 이상인 것이옵니다.”

 하고 유모는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 중요한 것으로,

 “아자이님 일족의 여성들을 불러도 괜찮네”

 라고도 히데요시는 말해주었다. 노부나가(信長) 시대의 아자이 가문은 천하의 대역죄인 이었다. 노부나가는 다년간 악전고투하며 아자이 가문을 멸하자마자, 자신의 매제인 나가마사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고 금가루를 입혀서 그것을 잔으로 해서는 술을 마셨고 부하들에게도 파도타기를 시켰다. 그럴 정도로 굉장히 증오하였다. 그의 일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들 중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런 금제(禁制)를 풀어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 능력에 따라서는 거두어들이겠다.

 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옵니까?”

 유모는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치고는 평소 신앙하는 아타고(愛宕)의 승군지장(勝軍地藏) 쪽을 향해서 감사하였고, 챠챠에게도,

 “아씨 기뻐하십시오. 이리 되어야만 가문의 영령들 한 분 한 분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이리 기쁠 수가”

 하고 말했다. 하지만, 챠챠는 그다지 감동도 하지 않고,

 “그렇구나”

 하고 끄덕였을 뿐이었다. 딴 뜻이나 반감이 있어서 무감동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가문의 영령들이 기뻐한다고 해서 유모와 같이 박수를 칠 마음은 나지 않았다. 챠챠는 항상 이러했으며 항상 말이 없었다. 이런 말없음이 챠챠라는 소녀를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마음이 굴절된, 상대하기 어려운 소녀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유모조차 이 소녀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으로 애태우는 일이 많았다.

 이 히데요시의 허가로 인해, 여기저기 숨어있던 아자이 가문의 일족들이 기어 나왔다. 낙성 후 타오 모에몬(田尾 茂右衛門)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있던 아자이 마사타카(浅井 政高), 거기에 아자이 오오이노스케(浅井 大炊助), 더욱이 아자이 나가마사 첩의 자식인 아자이 이요리(浅井 井頼)라는 자까지 나타났다. 챠챠에게 있어서는 배다른 동생이지만, 챠챠는 그 얼굴을 보는 것조차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어~ 아자이의 핏줄들 왔는가? 반갑구먼. 모두 미노노카미(美濃守=히데나가(秀長))의 휘하로 들어가시게”

 라며 히데요시는 그렇게 조치해주었다.

 챠챠들은 오오사카 성안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 주인이시옵니다.
 라는 히데요시의 챠챠들에 대한 존경 – 어느 정도 히데요시다운 과장이 들어있기는 하더라도 그 뜻이 성안 구석구석 수만 명의 남녀들에게까지 철저히 지켜져, 이 떠돌이 자매들로서는 결코 살기 힘든 장소는 아니었다. 거기에 챠챠나 동생들과 그 시녀들이 오오사카 성(城)에 와서야 알게 된 것인데, 이 성안에 아자이 가문의 옛 신하들이나 그 방계(傍系), 혹은 아자이 가문과 연이 있던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님의 직속 신하 10명중 3명은 오우미 사람이 아닐까요?”

 하고 유모도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아자이 가문이 망하면서부터 노부나가에게 아자이 가문의 영토 – 북 오우미(近江)의 3군(郡) 중 20만석을 얻어 처음으로 오다(織田) 가문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로 출세하였다. 오다니(小谷)성(城)을 거성(居城)으로 삼아야 했지만 산성(山城)이라는 불편함도 있고 영내(領內)의 인심을 새로이 한다는 이유도 있어, 호숫가에 새로이 성을 쌓아 ‘나가하마(長浜)성(城)’이라 이름 지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20만석이라는 갑작스러운 신분에 필요한 만큼의 군용(軍容)을 갖추기 위해서 사졸(士卒)을 대량으로 모집하였고, 모집에 응한 사람들 대부분이 영내(領內)의 사람들이었기에 자연히 아자이 가문의 가신이나 백성이 많았다.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다이묘우(大名) 급으로는 미야베 젠쇼우보우 케이쥰(宮部 善祥坊 継潤) 등이 있고, 실력 있는 야전가(野戰家)로서는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가 있으며, 관료로서의 재능이 있는 자로서는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조금 신분은 떨어지지만 다른 사람을 보좌하는데 있어서는 천재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그 외에 오우미 출신의 소규모 다이묘우(大名)로서는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카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 키무라 히타치노스케 시게모토(木村 常陸介 重茲) 등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있었다. 중급 이하의 부하에 대해서는 세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이다.

 다만 통틀어 오우미(近江) 사람이라고 하여도 아자이 씨(氏)와 연이 깊은 것은 북부 3군(郡)만으로, 중앙부는 이미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하여 흔적도 없는 롯카쿠(六角)씨(氏)의 옛 영토였고, 남부의 코우가(甲賀) 지방은 예부터 지역 무사들의 자립지역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와(琵琶) 호수 서안 산악지대의 쿠츠키(朽木)씨(氏) 등은 그다지 아자이 씨(氏)와 연이 없었다. 하지만 오우미(近江) 중에서도 성안에 가장 많은 것은 북부 오우미(近江)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 오다니(小谷=아자이 씨(氏))의 아씨께서 계시다.
 
라며 챠챠들이 있는 건물에 그리움, 반가움에 더해 각별한 경의를 치렀고, 옛 주인에 대하는 예를 취했다. 그 중에서도 이시다 미츠나리는,

 “어떤 일이건 불편한 것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꼭 말씀해 주시길”

 하고 유모에게 몇 번이나 힘주며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향당의식(鄕黨意識)은 이 챠챠가 사는 건물을 중심으로 뭉쳐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오와리(尾張)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하고 유모는 챠챠에게 일러주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출신이 오와리(尾張)였기 때문에 이 성안에서 기세가 등등한 사람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억양이 억센 오와리 사투리를 쓰고 있다고 말해도 좋았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히데요시의 나가하마 성(城)시대부터 섬긴 오우미(近江) 사람들은 어떤 일이건 결속하려 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어 그 마음의 오갈 데를 챠챠들에게 향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챠챠 모친의 친정인 오다 가문 사람들 중 몇 명은 히데요시를 섬기고 있었다. 노부히데(信秀[각주:1])의 12번째 아들인 오다 우라쿠(織田有楽)도 그러하여, 성안에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중개(仲介)하거나 차(茶) 놀이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도 챠챠의 외숙부이기에,

 “뭐 불편은 없느냐?”

 등등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 주었던 것이다. 단지 우라쿠는 그녀를 이용하려 하는 마음 같은 것이 없었다. 또한 다인(茶人)이기에 성안의 뒷세계에도 정통하여, 일부의 오우미(近江) 사람들처럼 자신의 조카들에게 음습한 정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 아이를 빨리 시집 보내는 편이 좋을 터인데”

 하고 은밀히 친구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斎)에게만은 말하였다. 우라쿠 나름의 이 신흥정권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걱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히데요시다. 그는 저 아이에게 빠굴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만약 챠챠의 방에 히데요시가 들락날락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생길 것이다. 오우미 사람들이 측실인(아직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챠챠를 중심으로 붕당을 만들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이 정권에는 오우미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거기에 각각 실력을 가졌으며 또한 세력도 있었다. 그들이 챠챠라는 여성과 결속하여 한 덩어리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오우미 사람들에게 농단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유우사이는 일소에 부쳤다. 유우사이만큼이나 그런 감각에 날카로운 인물조차, 우라쿠의 걱정이 너무 기우인 생각이라고 여겼다.

  1.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 노부나가의 부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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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나가마스(織田 長益)

1621 12 13 병사 75

1547 ~ 162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생. 출가하여 우라쿠사이(有樂).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이어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으며,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전투의 화평 교섭 등에서 활약. 후에 다인(茶人)으로 살아가며, 토우쿄우(東京) 유우라쿠쵸우(有樂町)에 그 이름을 남겼다.









다인(茶人) [우라쿠(有樂)]의 탄생


 토우쿄우(東京)유우라쿠쵸우(有樂町)라는 번화가가 있다.

 이 지명은 오다(織田) 우라쿠(有樂)가 에도(江戶) 초기에 이 곳에 저택을 지어 살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오다 우라쿠'라는 인물은 노부나가의 동생인 나가마스(長益)를 지칭하는 것이다. 노부나가의 동생들 중에 에도 시대까지 살아 남은 것은 노부카네(信包)와 나가마스, 두 사람이었지만 바쿠마츠(幕末)[각주:1]까지 다이묘우로 존속한 것은 나가마스의 가계(家系)뿐이다.


 나가마스는 1547년생으로 노부나가와는 13살 차이가 난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의 행적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전장에 나간 기록도 1582 카이(甲斐) 타케다(武田)씨를 정벌 할 때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의 부하로 키소(木曽) 방면에서 침공한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혼노우(本能)()의 변 후, 나가마스는 오와리(尾張)나 북() 이세(伊勢)를 영유(領有)하는 조카인 노부카츠(信雄)를 섬기며, 1 3천관을 식록(祿)으로 받는 유력한 가신이 되어 검지봉행(奉行[각주:2]) 등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寛政重修諸家譜[각주:3]]에 의거하여 [혼노우(本能)()의 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셋츠() 시마시타(島下)() 마이타(昧舌)에서 2천석을 치교우(知行)로 받았다]라는 설(國史大辭典 등)은 잘못된 것이다.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는 것은 1590 9월로 그 직전에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오와리를 빼앗기는 등 카이에키(改易[각주:4])당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고 [우라쿠(有樂)]라는 호를 칭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우라쿠 44살 때였다. 필시 셋츠 치교우를 지급 받은 것도 이 즈음이라고 추측된다.


 우라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뛰어난 제자 일곱명(利休七哲[각주:5])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데, 차를 즐기게 된 것은 리큐우가 노부나가의 사도우(茶頭[각주:6])를 맡을 즈음인 것 같다. 하지만 다도(茶道)의 세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우라쿠라는 호를 칭하는 시기부터라고 한다.


 1591 2월 리큐우가 죽자 [차의 장인(宗匠)]라 불리며 히데요시가 다도회를 열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일이 많아졌고, 다음 해인 1592년에 조선 출병이 시작되자 히데요시를 따라서 큐우슈우(九州)로 내려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에서 자주 다회를 열었다.


 또한 전년 9월에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御伽衆)'에 들어갔다. 오토기(御伽)라는 것은 주군이 심심할 때 말상대를 해주는 것을 말하며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오토기슈우'라 칭했다. 필시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에 더해짐으로써 다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 것이라 추측된다. [리큐우 류()]를 기반으로 하면서 독자적인 다풍(茶風)을 가미한 [우라쿠 류()]의 다도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는 우에스기(上杉)를 정벌하기 위하여 칸토우()로 내려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이어서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도 무공을 세웠다. 싸움이 끝난 뒤 은상으로 셋츠에 가지고 있던 2천관에 더하여 야마토(大和) 3만석이 주어졌다. 다인(茶人) 다이묘우 오다 우라쿠의 탄생이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노부나가의 적류(嫡流)인 기후(岐阜) 성주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노부나가의 맏손자)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성주 오다 히데카츠(織田 秀雄 노부카츠의 장남)가 서군에 속하여 카이에키 당하였기에 에도(江戶) 바쿠후(幕府) 초창기에 오다 일족 중에서 다이묘우로써 남아 있던 것은 우라쿠의 가계(家系)뿐이었다.


()로 보내는 나날


 토쿠가와 쇼우군()의 지배를 받는 다이묘우가 된 우라쿠는 에도나 순푸(駿府)에 자주 출사(出仕)하였고, 그러는 한편 오오사카(大坂) 성에도 빈번히 출입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의 생모 요도도노(淀殿)의 외숙부라는 인척 관계로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1611 3월.

 히데요리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니죠우(二条)성에서 회견했을 때 우라쿠가 히데요리를 따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흥미 깊다.그 후 토쿠가와-토요토미 양 가문의 사이가 악화되자 우라쿠의 정치적 입장도 미묘하게 되어 일설에 의하면 우라쿠는 이에야스의 첩자가 되어 토요토미 측의 비밀을 보고 했다고도 하며, 오오사카 겨울의 전투가 시작되자 오오사카 성 안에서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이에야스를 복종하도록 계속해서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의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오오사카 성을 빠져나와 쿄우토에 가서 살며 아들 나가마사(長政)와 히사나가(尚長)에게 각각 1만석씩 나누고 자신은 남은 1만석을 가지고 살았다.


 우라쿠는 항상 쿄우토에 칩거하며 다도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내었고 1621년 12월 13 중풍으로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에서 죽었다. 고죠우(五条) 강변(河原)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히가시야마의 겐인(建仁)() 세이덴(正伝)()에 묻혔다. 향년 75.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말기를 말함.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하는 행정관 [본문으로]
  3. 칸세이(寛政=1789‐1801)년간에 에도 바쿠후(幕府)가 토쿠가와 일족을 제외한 다이묘우, 하타모토 등에게 족보를 제출하게 하여 각 가문의 유례를 기록한 것. 자유 제출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조상을 띄우기 위해 날조나 왜곡이 많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영지를 삭감 혹은 전부 몰수 당하고 심하면 평민으로 강등 [본문으로]
  5.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오다 우라쿠사이의 경우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6. 다이묘우를 섬기며 다도에 관한 것을 관장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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