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와리[尾張]는 여덟 개의 군(郡)이다. 오와리 위쪽에 네 개의 군(郡)[각주:1]이 있어 이곳은 오다 이세노카미[織田 伊勢守][각주:2]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다스리며 이와쿠라[岩倉]를 거성으로 하고 있었다. 오와리 반국(半国) 아래의 군(郡)도 네 개 군[각주:3]으로 오다 야마토노카미[織田 大和守][각주:4]가 다스리고 있었다. 위와 아래의 군(郡)은 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다 야마토노카미는 키요스[清洲]의 성에 부에이 님[武衛様][각주:5]을 모시며 보호하고 있었다. 오다 야마토노가미 휘하에 삼봉행(三奉行)이 있었는데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 오다 토우자에몬[織田 藤左衛門],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中] 세 봉행(奉行)이다.[각주:6]

이 중 단죠우노죠우는 오와리의 변방 쇼바타[勝幡]라는 곳에 거성을 두고 있었다. 사이간[西巌][각주:7], 겟간[月巌][각주:8] 그리고 지금의 당주 빈고노카미[備後守][각주:9]의 동생인 요지로우 님[與二郎殿][각주:10], 마고사부로우 님[孫三郎殿][각주:11], 시로우지로우 님[四郎二郎殿][각주:12], 우에몬노죠우[右衛門尉][각주:13]라고 있었다. 이 가문은 대대로 무명이 높은가문이다. 빈고노카미 님은 특히나 뛰어난 기량을 갖춘 사람으로, 여러 가문의 능력있는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며 아군으로 삼았다.

어느 때인가 빈고노카미가 오와리 가운데에 있는 나고야[那古野]에 오셔서는 견고한 요새를 만들도록 명하신 후 이 성에 후계자인 오다 킷포우시 님[織田 吉法師殿][각주:14]에게 머물게 하며 필두 가로(家老) 하야시 신고로우[林 新五郎][각주:15], 차석 가로 히라테 나카츠카사[平手中務][각주:16], 삼번 가로 아오야마 요소우에몬[青山 與三右衛門][각주:17], 사번 가로에 나이토우 쇼우스케[内藤 勝介]를 배치하였으며, 재정을 히라테 나카츠카사에게 담당시켰다. 킷포우시는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텐노우보우[天王坊][각주:18]라는 절에 공부하러 다녔다.

빈고노카미는 나고야의 성을 킷포우시에게 물려주고 아츠타[熱田] 근방 후루와타리[古渡]라는 곳에 새로이 성을 쌓고 거성으로 삼으셨다. 재정담당으로 야마다 야에몬[山田彌右衛門]을 임명했다.

  1. 하구리 군[葉栗郡], 니와 군[丹羽郡], 나가시마 군[長島郡], 카스가이 군[春日井郡]. [본문으로]
  2. 오와리[尾張] 상사군(上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가문. 이 당시의 당주는 오다 노부야스[織田 信康] [본문으로]
  3. 카이사이 군[海西郡], 카이토우 군[海東郡], 아이치 군[愛知郡], 치타 군[知多郡]. [본문으로]
  4.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가문. 이 당시 당주는 오다 타츠카츠[織田 達勝]로 추정되고 있다. [본문으로]
  5.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수상 격인 칸레이[管領]가 될 수 있는 세 가문[三管領] 중 필두인 시바 가문[斯波家]의 종가(宗家). 무로마치 막부 중기부터 시바 가문 종가의 당주는 지부다이후[治部大輔]->사효우에노스케[左兵衛佐]->사효우에노카미[左兵衛督] 순으로 승진하였기에, 효우에[兵衛]의 당명(唐名)인 부에이[武衛]로 칭해졌다. 이 글에서 지칭하는 인물은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 [본문으로]
  6. 소위 '키요스 삼봉행[清洲三奉行]'. [본문으로]
  7. 노부나가의 증조부 오다 나가노부[織田 良信]의 법명. [본문으로]
  8. 노부나가의 조부 오다 노부사다[織田 信定]. 사족으로 이 오다 노부사다가 당시 오와리 제일의 상업도시였던 츠시마[津島]를 장악한 것이 단죠우노죠우 가문[弾正忠家] 비약의 초석이 되었다. [본문으로]
  9. 노부나가의 부친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 [본문으로]
  10. 요지로우는 '與(与)次郎'라고도 씀. 노부사다의 차남 오다 노부야스[織田 信康]. [본문으로]
  11. 노부히데 사후 세력이 약화된 노부나가를 도와 오와리 통일에 조력한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 노부사다의 삼남. [본문으로]
  12. 노부사다의 넷째 아들 오다 노부자네[織田 信実] [본문으로]
  13. 노부사다의 다섯째 아들 오다 노부츠구[織田 信次]. [본문으로]
  14.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본문으로]
  15.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 [본문으로]
  16. 히라테 마사히데[平手 政秀]. [본문으로]
  17.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 위키에서는 아오야마 노부마사[青山信昌]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라는 기록만 있다고 하니[谷口克広-織田信長家臣団辞典], 이 블로그에선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로 한다. [본문으로]
  18. 츠시마 신사[津島神社]. 우두천왕(牛頭天王)을 모셨기에 별칭이 텐노우 사[津島天王社]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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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2.01.10 0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새해 첫 포스팅(!) 신장공기 시작하시는군요(~!) 그러고보면 마침 요즘 학교근처 레스토랑에서 타임슬립 노부나가대역 고교생이 주인공인 信長協奏曲을 아주 열심히 읽는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피한방울 안나는 전국물(...)인데도 잡다한 역사적 내용은 많은터라 그러고보면 노부나가가 1551년이던가 斯波씨를 토벌한 다른 오다씨(..어휴 이놈의 오다씨는 왜 이렇게 많은지)를 치는 내용인가 하던것도 나오더군요. ..어휴 저도 발해지랑님처럼 이런걸 좀 읽어야 되는데 만화만 읽고 있으니..ㅠ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1.10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거 3년전부터 한다고 한다고 하다가 더 늦기 전에 우선 시작이나 해 둘려고요. ^^:

      요즘 화제의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고삐리가 타임슬립하는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보고 싶긴 한데...더 이상 집에 책을 놓을 곳이 없는지라 만화책은 센고쿠 천정기와 헤우게모노(효우게모노)만 모으려고 하고 있습죠.

      그 오다씨는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로 키요스에서 부에이[武衛=시바 씨[斯波氏]]와 함께 있던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입죠. 노부나가에게 있어선 바로 직속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문입니다.

      저도 주로 만화를 통해서 어떤 것에 관심을 갖는 편이라... 뭐 좋지 않나요.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cjswj BlogIcon 별마 2014.03.02 17: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나가 공기 우리 말 작업 완전 감사합니다 ㅎ

二.

 

 그 남자 히데요시(秀吉)의 진영으로 보내졌다고는 하여도, 본진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동남쪽에 있는 이치죠우다니()의 산 속이었다. 예전 이곳은 에치젠(越前)의 주인이었던 아사쿠라(朝倉) 가문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산림 속에 주춧돌만 남아있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보낸 삼나무들이 많은 이 골짜기의 습도와 옛 성터의 한적한 분위기가 세 소녀의 신경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줄 것이라는 히데요시의 마음씀씀이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이것은 나중에 차츰 알게 된 것인데, 히데요시라는 인물은 그러한 마음씀씀이가 후한때로는 너무 후하기까지 한 남자인 것 같았다.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인지 곧바로 그녀들과 만나지 않았다. 키타노쇼우(北ノ庄)성(城)을 낙성시킨 후, 카가(加賀)로 진격하여 각지의 성을 항복시키고 노토(能登), 엣츄우(越中)를 굴복시킨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에치젠(越前)으로 돌아왔다. 그 도중 히데요시는 이치죠우다니에 들렸다.

 

 챠챠()님과 만나자

 

 라고 말하였다. 그 만남의 장소는 절이었다. 히데요시는 절의 객관(書院)을 깨끗하게 청소시킨 후 그녀들을 불러서는 자신이 상석에 앉지 않고 자신과 동격의 자리를 주어,

 

 제가 치쿠젠(筑前)이옵니다.”

 

 라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투도 평소 덜렁대며 명랑한 인물과는 달리 오래된 종을 울렸을 때와 같은 긴 여음(餘音)을 남겼고, 어조는 극히 자연스럽게 젖어 있었다.

 

 무문(武門)의 길이라고는 하여도 어쩔 수 없이 슈리(修理=카츠이에(勝家))와 다투게 되었으며, 더구나 슈리 무운이 다하여 아씨님들의 모친도 함께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는 졸자 너무 슬퍼 드릴 말씀도 없사옵니다.”

 

 라는 듯한 것을 막힘 없이, 더구나 흘러 넘치는듯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씨님들은 고() 우다이진(右大臣=노부나가(信長))님의 조카이십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졸자에게 있어서 주인이 되십니다. 이제부터는…”

 

 하고 히데요시는 말을 한 박자 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돌아가신 우다이진님을 대신하여 이 치쿠젠(筑前)이 지켜드리겠사옵니다

 

 멋진 말솜씨였다. 노부나가(信長)의 이름을 거론함에 따라 히데요시의 행적과 입장은 모두 정의가 되어버렸다. 예전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공격도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번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성의 경우도 이미 노부나가가 죽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오다(織田) 가문의 후계자를 어느 사람으로 하느냐는 것에 대해 카츠이에와 히데요시의 의견이 서로 달라 그것을 이유로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쌍방 [사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다 가문을 위해서] 라는 것이었다. 노부나가의 이름만 이용하면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를 멸한 것도, 시바타 카츠이에를 자살로 몰아넣은 것도 히데요시는 아니다. 정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이 정의는 꼭 연기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막료들을 뒤돌아보며,

 

 아 아씨님들께서는 내 주인에 해당하시며 또한 불행한 환경에 처해있으시니, 너희들도 그런 것을 마음에 잘 새겨 정성을 다해 모시거라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흘리며 부하들의 정성을 요구했다. 본심이었다. 히데요시는 언제나 자신의 본심을 남들이 다 볼 수 있게 목의 핏줄처럼 드러내놓고 있는 인물이며 언제나 진심으로, 설령 거짓말을 할 때도 본심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드문 종류의 인물이었다. 성실이라는 것이 일편단심이라는 우둔함이 그에게는 없었으며, 그에게 있어서는 성실도 본심도 그 몸 안에 있는 혈관의 수만큼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죽은 옛 주군을 생각하며 추억할 때는 항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의 충성심을 가졌고,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옛 주군의 정권을 옛 주군의 자식에게 건네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활발히 움직일 수 있는 인물로, 실제로 그 끝없는 야망을 위해 병사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히데요시의 본심인 것이다.

 

 동시에,

 이 아씨를…’

 하고 히데요시는 자기 몸을 욱신거리게 만들 정도로 새하얀 챠챠의 목줄기를 주욱 훑어보며

 품고 심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또한 어김없는 본심으로,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고() 노부나가에 대한 충성심과 조금도 모순이 없었다. 오히려 옛 주군에 대한 동경이 이 욕망을 부채질하였다. 히데요시는 재앙이라고 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하며, 취향은 하천(下賤)한 여성이 아닌 귀족이었다. 귀족의 여성이야말로 이 비천(卑賤) 출신의 남자를 정염으로 불태웠다. 귀족이라고 하여도 그냥 귀족이어서는 안 되었다.

 상급 귀족인 쿠교우(公卿)의 딸은 관심 밖이었다. 쿠교우가 귀족중의 귀족이라고 하여도, 히데요시의 지금까지 인생길로 보면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가귀족(武家貴族)이 아니면 안 되었다. 때문이 이미 히데요시는 쿄우고쿠(京極) 가문 출신의 여성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우키타(宇喜多)()의 후처와도 통하였고, 혼간지(本願寺) 주지(門跡)의 부인과도 몇 번인가 연을 가졌지만, 그러나 히데요시의 실감 속에서의 귀족이라고 하면 누가 뭐라 하건 오다 가문이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웃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다 가문 같은 것은 노부나가의 부친 대가 되어서야 갑자기 오와리(尾張) 반 정도의 주인이 된 신흥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고, 그 선조가 뭐 하던 사람이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원숭이라 불렸던 밑바닥 즈음부터의 주인 가문으로, 오다 가문의 가족들이라고 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구름 위의 사람이었다. 그 가문의 딸들은 그에게 있어서 신과 같이 성스러웠고,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칠 듯이 아름다웠다. 가령 오다 가문의 여성 한 명이라도 품을 수 있다면 천명의 미녀를 포기하여도 후회가 없어, 이런 마음이 설사 천하고 비열할지라도, 동경이라는 점에서는 옛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 아씨의 모친도 아름다우셨지

 하고 카츠이에와 함께 불타는 키타노쇼우(北ノ庄)()에서 죽은 오이치() 부인을 생각하였다. 오이치는 희대의 미녀라 불릴 정도의 절색으로, 히데요시는 예전 이루지 못할 바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맘속으로 그것을 바랬다. 그 딸이 미모는 조금 떨어질지 모른다고 해도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하고 오다 가문에 대한 동경이 커지면 커질수록 - 언젠가 이 소녀와 이루어 지게 될 이불 속에서의 여러가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당사자인 챠챠는 눈을 내리깔고 히데요시를 한 번 쳐다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남자라고?’

 챠챠는 다소 이외였다. 자기에게 그렇게까지 위해를 계속 가해왔던 인물치고는, 그냥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동네 꼬마들처럼 천진난만하고, 명랑하게 떠들며 거리낌 없이 큰소리로 웃었고,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한여름의 하늘과 같이 맑아, 어딘가 얼이라도 빠진 듯한 남자였다. 이런 것에당혹했다.

 그 남자가 아니다

 라고 까지 생각했다. 그 남자라는 것은, 꼬꼬마 시절 자신의 오다니(小谷)()을 공격해서 무너뜨린 저 요코야마(山)성(城)오다니 성()을 감시하던 성 의 성주 토우키치로우(藤吉)는 이 남자가 아니다는 것이었다. 챠챠는 토오키치로우라는 남자의 별다른 모습을 뿌리박은 채 계속 자라왔건만 이 눈앞의 남자가 아니었다.

 

 저분은 좋은 분이십니다

 

 하고 나중에 말을 꺼낸 것은, 예전 토오키치로우에 대한 별개의 인상을 챠챠에게 계속 주입해 왔었던 유모였다. 유모는 서서히 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변한 듯했다. 이 즈음 태도도 묘하게 밝아져 히데요시에 대한 것을 자주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이야기의 요소요소에 예찬 가득한 형용사가 들어가, 명백히 챠챠가 히데요시를 좋아하게 만들고자 하고 있는 듯 했다.

 왜 이러지?’

 하고 챠챠는 생각하지 않았다. 챠챠는 이런 점에서 자라온 환경에 있을 법한 둔감함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챠챠가 눈치챈 것은 유모의 의복이 어느새 비싸고 화려한 것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유모는 어느새 자신의 고향 탄바(丹波)의 오오노(大野)에서 자식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유모는 탄바 오오노의 토착 사무라이(地侍)인 오오노 슈리노스케(大野修理亮)의 부인으로, 오다니 성()에 있었을 즈음에는 슈리노스케도 아자이 가문의 신하였지만, 낙성 후 그들은 탄바로 돌아갔었다. 남편은 그 후 병으로 죽었지만, 두 아이들은 무사히 성인이 되어, 장남은 이미 20살이 가까워져서는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冶長)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탄바의 오오노라는 곳은 미야즈(宮津) 서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었지. 맞어마을 근처에 타케노가와(竹野川)라는 강이 흘러 작은 계속을 만들고 있지

 

 하고 히데요시는 이 유모만 단독으로 불렀을 때 그렇게 그녀의 출신지에 대해 말했다. 히데요시는 탄바 오오노 같은 곳에 대해 몰랐었지만 마침 그 휘하에 있던 탄바의 다이묘우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에게 물어서 미리 지식을 얻어 놓고 있었다. 이에 유모는 감동을 먹었다. 그런 산골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갑자기 친근감이 들었다.

 

 자식은 있는가?”

 

 하고 히데요시는 물었다.

 

 있사옵니다

 

 하고 답하자,

 

 자네의 아이라면 똑똑하겠군. 이쪽으로 데려오시게. 내 친위대(馬廻)에 넣어주고서는 기량을 보아 나중에 높은 위치에 두고서 크게 쓰겠네

 

 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고마운 일이

 유모는 이날부터 몸 안의 내장이 바뀌기라도 한 듯이 사람이 변했다. 곧바로 파발꾼(飛脚)을 고향으로 보내었고, 유모의 자식들을 탄바 미야즈 항(港)에서 배로 에치젠(越前) 미쿠니() 에 입항해서는 빨리도 왔다. 히데요시는 약속대로 그 두 형제를 부하로 삼았다.

 챠챠는 신경질적인 면이 있는 그렇기에 그 눈은 언제나 빈틈없이 깜빡이며, 항상 반짝반짝 하고 괴이한 광채를 머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모의 자식이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그것과 유모의 태도 변화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류의 지혜는 어째서인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천성이라 할까? 그러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오오사카(大坂) ()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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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부나가의 성격은 크게 나누어 두 개의 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합리적인 근대(近代)에 대한 동경과 잔혹한 살육에 대한 의지가 그의 몸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프로이스(Luis Frois)는 직접 노부나가와 회견하였는데, 당시의 일을 로마 교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전략)…키가 크고 말랐으며, 수염이 적고, 목소리는 대단히 크며…(중략)… 전술이 뛰어나고, 대부분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으며, 부하의 진언에 따르는 것이 드물다…(후략)]

 고 쓰면서, 최하급의 병사와도 친근감 있게 이야기를 하는 대장(大將)이라 말하고 있다. 독선적인 성격이지만 뛰어난 군단지휘자의 풍모를 방불케 한다

 

 노부나가는 중세의 무거운 쇠사슬을 끊어, 일본에 근세의 여명기를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동시대의 영웅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차별화 되는 것은 이 근대적인 합리성일 것이다. 신겐이나 켄신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신불(神佛)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노부나가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신론자였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납득한 것도 노부나가였다. 이보다 백 년 뒤, 에도 바쿠후(幕府)의 어용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은 지구가 둥글다는 설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얼마나 시대에 앞선 근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코우베()코우베 시립박물(市立博物館)에는 노부나가가 애용하던 세계지도 병풍이 있다.

 

 너무 합리적인 나머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만 이용하려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쓸모 있는 자는 히데요시와 같이 그 출신에 구애 받지 않고 계속 출세시켜 주었지만, 한번이라도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가로(家老)로써 힘써온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혼간지(本願寺) 공략에서 아무런 활약이 없었다는 이유로 고우야(高野)산(山)으로 추방 당하였고 말년에는 길가에서 굶어 죽는 비참함 죽음을 맛보게 하였다.

 

 1571 9.

 노부나가는 히에이잔(比叡山)산(山)을 포위하여 건물, 석탑, 승가가람(僧伽藍摩)을 전부 불태움과 동시에 남녀노약을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어서 1574년 키소카와() 강 하구(河口)나가시마(長島)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를 토벌했을 때는, 퇴성(退城)을 허용한 듯이 속여서는 방심한 틈을 타서 일제 사격하고 성에 불을 질러 2만여 명의 남녀를 태워 죽였다. 에치젠(越前)의 잇코우잇키 정벌에서는, 그 시체들로 인하여 후츄우(府中)의 마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부 불교도에 대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증오가 표출된 것이다[각주:2].

 반대로 기독교에는 관대하여 오히려 보호하였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발령한 선교사 추방령을 해제하였고, 쿄우토(京都)에 교회당을 세우는데 원조까지 하였다.

 

 노부나가에게도 익살스러운 인간적인 측면이 있었다.

 별명을 붙이는 것이 장기로, 히데요시에게는 [원숭이([각주:3])]라던가, [대머리생쥐(げネズミ[각주:4])]라고 붙였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는 [대머리(キンカ)[각주:5]]라고 붙였다.

 

 따스한 인간성을 나타내는 편지가 남아있다. 히데요시의 마누라 네네(ねね)에게 보낸 것이다.

 […(전략)네네님 정도의 미인을 저 대머리생쥐 히데요시는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테니까, 네네님도 지금부터는 마님다운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질투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게…(후략)]

 히데요시가 여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네네가 노부나가에게 호소하자 그 답변으로 보낸 편지이다. 그 외에도 냉철한 무장의 이미지와는 상상할 수 없는 인간미 넘치는 일면이 있었다.

 스모우(相撲[각주:6])를 아주 좋아하여, 1578년에 아즈치(安土)성(城)에서 열린 스모우 대회에는 주변에서 300여명이 모였고, 이 중에서 23명의 우수 씨름꾼을 선발하여 승자에게는 부채 등의 상품을 내렸다.

 

 오다(織田) 가문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가문은 말류(末流)이다.

 오다 가문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을 보좌역인 시바(斯波) 가문의 오와리(尾張) 슈고다이(守護代[각주:7])였다. 이 오다 가문에 오와리 위쪽 4개군()이세노카미(伊勢守) 가문과 아래쪽 4개군()을 지배하는 야마토노카미(大和守) 가문이 있어, 노부나가가 태어난 가문은 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을 섬기는 세 행정관(三奉行[각주:8]) 중의 하나였다. 아시카가 쇼우군에서 보면 부하(斯波)의 부하(오다 종가(領家))의 부하(織田 大和守)의 부하(織田 正忠)에 지나지 않는다[각주:9].

 그러나 당시의 하극상 풍조를 타고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 시대에는 오와리(尾張) No.1 실력자로 올라선다.

 

 부친이 죽었을 때, 노부나가는 아직 16살로 세간에서 [최강 찌질이(うつけ)]로 불리며 얼간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라 그 풍모를 설명하자면, 반바지(半袴)에 나시(なしの浴衣)이며 헤어스타일은 챠센마게(茶筅), 머리를 묶는 끈(元結)은 빨간색이나 짙은 녹색 등의 강렬한 색을 좋아하였으며, 큰 칼(太刀)의 칼집은 붉은색. 무구(武具)도 새빨간 색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였고 걸어 다니며 밤, , 오이, 떡 등을 칠칠 맞게 흘려가면서 먹었다. 거기에 남의 어깨에 매달려 다니거나 하여 행동거지에 예절이 없는 것을 말하면 끝이 없었다.

 

 부친 노부히데의 장례식 날도 제대로 차려 입지 않고 나타나, 부처님 상 앞에 나아가서는 갑자기 향을 움켜쥐고는 부친의 위패에 집어 던지고서는 돌아갔다고 한다. 이 폭거에 교육을 담당한(傅役)인 노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 政秀)는 노부나가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배를 가르고 죽었다.

 

 오케하자마()의 일전이 그런 노부나가의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한 첫 번째 도약대였다.

 1560 5 19일 심야. 노부나가는 갑자기 나각(法螺貝)을 울리게 하여 병사를 동원하면서, 손수 코우와카마이(幸若舞[각주:10]) [아츠모리(敦盛)]를 춤추었다.

 [인간 오십년, 하천(下天)과 비교해 보니, 몽환(夢幻)과 같도다(人間五十年、下天のをくらぶれば、夢幻のごとくなり).]

 이 부분을 세번 춤추었다 한다. 춤이 끝나자 뜨뜻한 물에 밥을 말아서 먹은 뒤 질풍과 같이 달려 나갔다고 한다.

 

 적은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대군단을 이끄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다. 오와리 절반만 소유한 오다 씨()같은 것은 가볍게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다. 오다 가문의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였다. 이마가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습 전법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오다 군()덴가쿠하자마(楽狭)에서 쉬고 있는 이마가와 군의 허를 찔러 습격, 결국 대장 요시모토의 수급을 베고 승리의 함성을 울려 퍼지게 한 것이었다(누누이 말씀 드렸듯이 저는 아케치 님의 “[說]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 역자 주)

 

 1575 5나가시노(長篠)의 전투는 일본 전투 사상 획기적인 전투였다. 근대 전법을 구사한 오다 군이, 그때까지 센고쿠(戦国) 최강을 자랑하던 타케다(武田) 군단을 괴멸시킨 것이다. 노부나가는 철포 3000정을 끊임없이 타케다의 병마(兵馬)에 집중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각주:11].

 

 아즈치(安土) 7층루의 장대한 성을 쌍은 것은 1579년이다. 아즈치는 쿄우토(京都)와 가깝고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호쿠리쿠(北陸)와 통하며, 남쪽으로는 이세(伊勢)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7층의 텐슈카쿠(天守閣)의 내부는, 카노우(狩野)파의 벽화로 장식되었고, 최상층은 금박(金箔)을 입혔다고 한다. 일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성안의 어느 것이나 세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건물이라고 절찬하였다.

 

 희대의 영웅 노부나가는 1582 6 2. 갑자기 일어난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인해 혼노우(本能)()에서 쓰러졌다.

 이날,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보고로 모반의 군세가 아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단 한마디 [是非に及ばず 할 수 없군, 어쩔 수 없군한국어로 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역자 주]라고 말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손수 활을 들고 싸웠지만 이제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깨닫자 건물 깊숙이 들어가 문을 닫고 자인(自刃)했다.

 

 그는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이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적에게 자신의 시체를 보여지는 것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34년 노부히데(信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죽은 후 오와리 절반을 통일하였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맹을 맺어 오와리를 통일. 1564미노(美濃)를 공략. 1568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쿄우토(京都)에 입경한다. 이후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 등 여러 가문을 물리치고 혼간지(本願寺)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를 항복시켜 천하 제일의 실력자가 되지만, 패업(覇業)을 목전에 두고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하여,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 에서 자인했다. 49.
  1.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농민 폭동군. [본문으로]
  2. 증오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과격한 행동은 에도 시대의 혼간지(本願寺) 측이 왜곡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원숭이(일본 발음으론 사루(さる))라고 붙게 된 것은, 1591년 쿄우토(京都)에 낙서가 되어있길.. “말세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 아래 있는 어느 칸파쿠를 보더라도(末世とは別にはあらじ、木下にさる関白をみるにつけても)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나무 아래’는 키노시타(木下)로 히데요시가 하시바(羽柴) 성을 쓰기 전의 성이다. [본문으로]
  4.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칭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말로 대머리였다기 보다는, 미츠(光)의 아랫부분과 히데(秀)의 윗부분이 결합되어 ‘대머리 독(禿)’이 되었고, 그와 같은 뜻인 ‘キンカ頭’로 부르지 않았나 싶다. [본문으로]
  6. 일본 씨름 [본문으로]
  7.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 혹은 바쿠후(幕府)의 중요 직책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고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8.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 오다 토우자에몬(藤左衛門),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忠)의 세 가문. [본문으로]
  9. 이세노카미 가문(伊勢守)이 오다 가문의 종가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0. 단한 춤을 추며, 옛 무장들의 영웅담을 읊는 것. [본문으로]
  11. 3000의 철포와 3단 철포는 없었다는 것이 대세이다. 자세한 사항은 검색해 보시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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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9 0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이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이기에 만약 그 때까지 번역할 수 있다면 그가 짱 먹을 것 같습니다(예로 '무인 토시이에'의 주인공 마에다 토시이에 포스트(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23192573 )는 제 블로그에서 가장 많은 댓글과 링크 스크랩을 자랑하고 있습죠)

    문제는 나오에 카네츠구는 92번째 인물이고, 이제 노부나가는 19번째 인물이라는 거....
    (아마 내년 그 드라마가 끝날 즈음에나 가능하지 않을지...)

    개인적으로도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0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노부나가!!!
    역자 주에 쓰신 것 처럼 부풀려진 면도 있지만 어쨌든 대단한 인물이네요
    '빠'는 아니지만 여러가지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전국무장100화 중에서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리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보네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지인』은 나오에 카네츠구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군요
    내년엔 다시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대하드라마~!!! >ㅁ<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0 1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연은 워터보이즈에서 빤스입고 춤추던 츠마부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0 17: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분도 플레쉬 오버 덕분에 깔끔한 화장을 하실 수 있었던 듯 싶더군요(-_-;) 아무튼 이렇듯 허무하게 죽으리라고는..잔넨(-_-)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1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무라고 말씀하시니까, 프로이스가 노부나가의 죽음에 대해 말한 부분이 생각납니다.(저는 그 부분이 맘에 들더군요)
    [그 이름만으로도 만인을 공포에 떨게했던 인물이,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았다]...는 부분이(...자세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던 것 같네요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kanshiniove BlogIcon 루키아 2008.08.27 2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오다 노부나가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앗..ㅋ.ㅋ.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free_artist BlogIcon 2008.09.18 15: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키아님//저도 노부나가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

    쏭님//자주자주 들려주세요~

  10. 오호라 2016.09.02 0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림은 히데요시그림입니다.

. 

 하지만 20년이 지났다.
 
마치 하늘나라에 사는 것처럼 모든 환경도, 운명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을 계승하여 천하의 중앙부를 얻고, 쿄우[]를 발 밑에 두었으며, 오오사카[大坂]에 본거지를 두어 오나카[仲]는 그 성에서 수많은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치쿠아미[竹阿弥]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은 사지 휴우가노카미[佐治 日向守]라는 하시바 정권[羽柴政権]의 조그만 다이묘우[大名]의 부인이 되었고, 코이치로우 히데나가[小一 秀長]는 종오위하(從五位下) 하시바 미노노카미[羽柴 美濃守]라 칭하며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의 2개국 영주로써 히메지 성[城]을 거성(居城)으로 하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군
 
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단 오나카가 갑자기 이런 귀족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1년 전,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20만석의 다이묘우[大名]에 봉해졌을 때, 오나카는 기후[岐阜]의 저택에서 나가하마 성[長浜城]으로 옮겨와, 그 호반(湖畔)의 성()에서 처음으로 기와집(御殿)에 살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11년이었다.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올해 즈음부터 공가(公家)가 되고자 하는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거주구역[奥]을 공가(公家) 풍으로 바꾸기 위해서 쿄우[京]에서 공가(公家)의 딸들을 다수 여관(女官)으로 들여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화장실의 관례까지 바뀌어 버렸다.

 할멈은 혼자 갈 테다

 고 오나카가 말해도 시녀들은 허용치 않고 몇 명인가가 따라 붙어서는 입구에서 공가의 관례에 따라 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을 본 것의 떨어지는 장소는 항아리가 아니라 모래상자였다. 모래 위에 그것이 떨어지면 어떤 사람이 와서 그것을 가지고 가 버렸다.

 저건 거름으로 쓰려는 것인가?”

 하고 오나카는 어느 날 쿄우[]의 궁궐에서 온 여관에게 물었다. 백성으로 살아온 오나카는 저것을 채소밭에 뿌리는 건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요 하고 여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이치쿠사이가 살펴 봅니다

 하고 말했다. ‘수이치쿠사이라는 것은 뭘까? 일본말로 쿠사이는 냄새가 난다는 것을 뜻하기에, 웃기게도 오나카는 왠지 냄새 나는 것을 담당하는 관리를 그렇게 말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쿄우[京]의 궁정시의(宮廷侍醫)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라는 사람이 요즘 오오사카로 내려와 히데요시 일족의 시의(侍醫)가 되어 있었다. 그 호() '수이치쿠사이[雖知苦]'라고 하였다. ()기는 하지만() 답답하다()는 의미로 붙인 호일 것이다.[각주:1]

 갑작스런 영달이 오나카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또 있었다. 어느 날,

 마님께선 옛날에 궁중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여관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오와리[尾張] 고키소[御器所] 마을에서 가진 땅도 없이 소작이나 부쳐먹던 백성의 자식으로 태어나, 나카무라[中村]에 사는 야에몬[弥右衛門]의 배필이 되어, 다음 남편으로 치쿠아미를 들였다. 그랬을 뿐인 전반생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자, 이런히데요시가 말하고 있다고 했다.
 
저 녀석이?’
 
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녀석도 환경이 갑자기 변했기 때문에 미친 것은 아니겠지? 더 캐묻자 이야기는 정말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야기에서
 
오나카는 옛날 궁중에서 물을 담당하는 하녀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텐노우[天皇]인 고나라텐노우[後奈良天皇]가 오나카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오나카의 소매를 잡아 끄셨다. ‘갑자기 옥체(玉體)에 다가가 받든 적도 있다고 히데요시는 말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 오나카는 텐노우의 씨를 품고 태어난 고향 오와리로 돌아와서 낳은 것이 이 히데요시다 고 말하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것을 히데요시가 입 밖으로 낸 것은 쿄우토[京都]의 세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의 저택에 있을 때였다. 히데요시는 입궐할 때, 이 저택을 옷 갈아입는 장소로 빌리고 있었다. 들은 사람은 마츠나가 테이토쿠(松永 貞)였다.

 마츠나가 테이토쿠는 왕년에 쿄우()에서 위세를 떨쳤던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아들로[각주:2], 히사히데 멸망 후에는 무사(武士)를 버리고 쿄우[京]에서 렌가[連歌], 하이카이[俳諧]에 전념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공가(公家) 사회에 섞여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이 테이토쿠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둠으로 인해 공가(公家)의 소식도 알고, 조정의 정보도 알 수가 있었기에 쓰임이 좋았다. 이 날도 테이토쿠를 근시(近侍)시키고 있었다. 이날 옷을 갈아입고 기둥에 기대어 휴식을 하고 있던 중에,

 나의 모친 젊었을 적에……”

 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테이토쿠는 그것이 믿기건 믿기지 않건 제쳐두고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우선 그 이야기대로 필기하는 한편 사람들에게도 퍼트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오나카는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 후 히데요시가 키슈우[紀州] 정벌을 끝내고 오오사카 성으로 귀환했다. 이 효자(孝子)는 귀환해서 반드시 제일 먼저 오나카와 대면하여 모친의 건강을 묻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때 오나카는 일부러 사람들을 물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너는 감히 궁궐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구나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목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말을 퍼트렸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 일을? 허영심 때문이냐?”

 고 물었다. 아무리 오나카라도 이 자신이 낳은 자식놈의 심사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노부나가)님을 보시길

 하고 히데요시는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은 옛 주인의 예를 들었다. 노부나가의 선조도 가계(家系)가 애매했다. 오다 가문의 선조는 에치젠[越前] 니부 군[丹生郡] 오다 신사[織田(神社]의 신관(神官)으로, 노부나가부터 거슬러 올라가길 백 수십 년 전에 오와리로 흘러와 호족이 되었고 차츰 세력을 길렸다. 족성(族姓)은 후지와라 씨[藤原氏]라고 한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는 처음엔 후지와라 씨[藤原氏]를 칭하고 있었지만, 천하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을 즈음 갑자기,
 
-
우리 집안은 헤이시[平氏]이다. 타이라노 스케모리[平 資盛]의 후손이다[각주:3].

 라며 그 선조를 변경하였다. 이유는 겐지[源氏]인 아시카가 씨[足利氏]를 멸망시키고 그 천하를 잇기 위해서는 헤이시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당시 호족들은 [겐페이 교대사상(源平 交代思想)]이라는 것[각주:4]을 믿고 있었기에, 노부나가는 그 설을 이용하여 천하에 오다 대세론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노부나가는 유우히츠[祐筆]에게 명령하여 족보를 만들게 하였지만, 어째서 오다 가문이 헤이시[平氏]인 것이냐는 점에서 힘들었다. 그래서 타이라노 치카자네[平 親実]라는 가공의 인물을 창조하였다.

 치카자네를 단노우라[浦][각주:5]에서 죽은 타이라노 스케모리의 둘째 아들로, 헤이케[平家]가 멸망할 때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은 아기였지만, 그 어미가 품에 안고 오우미[近江]도망쳐 츠다[津田] 아무개의 부인이 되었다. 그 후, 에치젠[越前] 오다 신사의 신관 오다 씨[織田氏]가 치카자네의 운명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후사로 삼았다 는 것이 노부나가가 만들게 한 오다 가문의 헤이시 전설이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경우는 그러한 전설도 만들지 못할 정도로 비천한 출신이었다. 이럴 경우 히데요시는 겐지[源氏]를 칭하고 싶었을 것이다. 헤이시[平氏]인 노부나가 다음은 겐지인 히데요시여야 했다. 겐지라면 궁정의 전례에 따라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軍]에 임명 받아 막부(幕府)를 열 수가 있었다.[각주:6] 미카와[三河]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는 노부나가의 개성(改姓)과 비슷한 시기에 개성[각주:7]하여 족보를 창작해서는 겐지를 칭하고 있었지만 히데요시의 경우는 이제 와서 그것이 불가능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될 수 없는 이상, 히데요시는 아예 공가(公家)가 되어 칸파쿠()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각주:8] 칸파쿠는 셋케[家]의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 점이라면 편법을 써 누군가 친한 공가(公家)의 양자(養子) – 결국 키쿠테이 다이나곤(菊亭 大納言)의 유자(猶子)[각주:9]가 되었지만[각주:10]가 되어 버리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로 명문가에 들어간다고 하여도 자신의 출신이 지금과 같아서는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자신이 텐노우[天皇]의 씨라는 풍설을 유포시켰다.

 물론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래도 좋았다. 히데요시 자기도 그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묻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크게 한번 웃고 그 자리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치부할 생각이었다. 즉 후지와라 공가(公家)의 양자가 될 때까지의 시간 동안,
 
-
세간에서는 그렇다고도 한다.
 
라는 정도의 풍설만 만들어 퍼트려 두면, 형식 중시인 궁정은 히데요시라는 남자를 받아들이기 쉽게 될 것이다. 이 텐노우의 씨라는 설은 그것만을 위해 쓰려고 창작한 것으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모친이 트집을 부려오면 오히려 히데요시 자신이 곤란했다.

 너에게는 누나가 있지 않느냐

 라고 오나카는 말했다. 그 누나가 죽었다면 모를까, 지금 남편과 함께 아와[阿波]의 명족 미요시 씨[三好氏]의 성()을 잇고 있으며, 현재 그 아들 히데츠구[秀次]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오나카가 앳된 소녀일 즈음에 텐노우[天皇]의 씨를 품고 오와리[尾張]로 돌아왔다면, 이 누나의 존재가 이상해지지 않느냐? 아이가 있는 앳된 소녀라면 이야기의 설정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하하~”

 히데요시는 웃었다. 어떻든 상관 없는 것이다. 형식적인 것을 좋아하는 궁정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만들었을 뿐인 동화 같은 이야기에 딱 들어맞는 설정붕괴건 뭐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니 동생 코이치로우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건 치쿠아미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너만이 텐노우(天皇)의 아드님이신가?”

 오나카는 자못 무서운 말이라도 들을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가 낳은 아이이면서 이 야에몬의 씨로 낳은 자식은 꼬꼬마일 때 가출해버렸던 만큼 예상도 할 수 없는 인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치쿠아미의 씨인 코이치로우 히데나가는 성인이 될 때까지 오나카가 직접 키웠으며, 저런 형과 비교해 보면 어쩜 이렇게 솔직하고 귀염성이 있는 남자란 말인가……

  1. 斎라는 글자의 의미에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호에 많이 쓰였다. [본문으로]
  2. 사실 손자라고 한다.(이것조차 추측) [본문으로]
  3. 타이라노 스케모리는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서 무사의 모범이라고 하는 타이라노 시게모리[平 重盛]의 둘째 아들. 여담으로 시게모리는 무가(武家)로서는 처음으로 다이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첫째아들. 즉 스케모리는 키요모리의 손자. [본문으로]
  4.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교대로 천하를 쥔다는 사상. 카마쿠라 막부 쇼우군 가문[鎌倉幕府将軍家](겐지) -> 카마쿠라 막부 싯켄 호우죠우 가문[鎌倉幕府執権 北条家](헤이시) -> 무로마치 막부 쇼우군 아시카가 가문[室町幕府将軍家 足利家](겐지). [본문으로]
  5. 겐페이 쟁란 최후의 전투. 해전(海戰). [본문으로]
  6. 겐지[源氏]만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노부나가의 경우 조정에서 칸파쿠[関白],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중 아무 거나 하나 되라는 말을 들었다.(三職推任問題) [본문으로]
  7. 후지와라[藤原]에서 겐지[源氏]로. [본문으로]
  8. 실제로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보다 칸파쿠[関白] 되는 것이 훨~~~~씬 어렵다. [본문으로]
  9. 성이 바뀌지 않는 등 계약에 따른 양자 관계. [본문으로]
  10.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키쿠테이 가문[菊亭家]은 칸파쿠가 될 수 없는 세이가케[清華家]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히데요시는 셋케[摂家] 필두인 코노에 가문[近衛家]에 유자로 들어갔다. 키쿠테이는 그 코노에 가문과 히데요시를 연결해 주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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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27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 이번 편에서는 히데나가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7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 끝에 솔직하고 귀염성 있는 남자라고...^^;
    다음 편은 본격 히데나가 이야기입니다(원래 이번 편 자체가 히데나가긴 하지만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28 2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혁신 플레이 하다보면 키쿠테이공이 자꾸 헌납하라고 시쯔코이하게 불러대서 초반에 귀찮았던(이라고 말하고 힘들었던 이라 읽는다) 기억이..

    아무튼 고노에가의 유자로 히데요시가 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일제 강점기 때의..(뭐 실권은 없었다지만) 먼 후손(..이라고 말하면 비약일테지만)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떠오르네요. 나름대로 선조의 유지를 이은건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30 0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熙)라는 수상까지 만들었으니, 그걸로도 코노에 가문은 성공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82 6 2자인(自刃) 49.

1534 ~ 1582.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주(城主).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우()()를 멸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입경(入京).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지만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해 자해(自害)







최후의 상경(上京)


 1582 5 29.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安土)()을 출발하여 오래간만에 상경하였다. 이보다 앞선 1 28일에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중지된 적도 있기에 작년 3월 이래 실로 1 2개월 만의 상경이 되었다.

 2년 전. 이시야마(石山) 혼간지(本願寺)를 굴복시킴으로써 더 이상 키나이()에서 노부나가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게 되었다. 안도감(安堵感)때문인지 왕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을 이 즈음의 노부나가에게서는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유흥(遊興)적인 면을 [신장공기(信長公記)]의 기사에 빈번히 볼 수 있다.


 1581 2월에 상경한 노부나가는 선교사에게서 데려온 흑인[각주:1]을 선물 받았고 그 직후에는 궁궐의 동쪽 마장(馬場)에서 텐노우(天皇)나 쿠게(公家)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오다 군단의 열병식(閱兵式)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조로에(馬揃)를 행하였다.


 같은 해 9.

 차남(次男) 노부카츠(信雄)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가(伊賀) 정벌을 명하였고, 또한 1582 3월에는 첫째인 노부타다(信忠)를 총대장에 임명하여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정벌을 명하였지만, 노부나가 자신은 직접적으로 작전에 관여하는 일 없이 평정 후에 현지 검분(檢分) 만을 했을 뿐으로, 그 모습은 전적(戰跡地)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이(甲斐) 원정에서 귀국했던 노부나가에게 조정(朝廷)에서 칙사가 파견되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각주:2])추임(推任)한다는 뜻이 전해졌지만 노부나가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우(本能)()의 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5 29.

 오후 12시 즈음부터 내린 비 속에서 아와타(粟田口[각주:3]) 쪽을 통해서 시죠우() 니시노토우인(西洞院)에 있는 혼노우(本能)()에 도착했다. 아와타구치에는 미리 노부나가 일행을 마중하려는 쿠게(公家)의 무리들이 다수 모여있었지만 마중할 필요는 없다는 고지를 모리 란호우시(森 乱法師=란마루(蘭丸)) 나리토시(成利)가 와서 전했기에 쿠게(公家)들도 집들로 돌아간 후 였고 또한 함께 한 수하들도 [코쇼우(小姓) 2~30] 정도였기 때문에 상경 모습은 조용했다. 상경한 시각은 오후 2시 즈음이라고도 오후 4시 즈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건 이것이 마지막 상경이 될 것이라고 노부나가 자신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경의 주요한 목적은 츄우고쿠(), 시코쿠() 정벌이라는 양 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이즈미(和泉)의 사카이()에서 철갑선(鐵甲船)을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6 4일에는 쿄우토(京都)를 출발할 예정으로 있었기에 5일간 쿄우토에 있을 예정이었다. 혼노우(本能)()의 변은 그 재경(在京) 3일째에 일어난 것이다.


상경 축하의 나날


 그렇다면 그 3일간의 모습을 살펴보자.

 5 29일 상경했던 노부나가는 아와타구치에서 첫째 아들 노부타다(信忠)의 마중을 받아 함께 혼노우(本能)()로 왔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인 21.

 노부타다는 토오토우미(遠江)의 하마마츠(浜松)에서 아즈치(安土)로 올라 와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함께 쿄우토(京都)에 와 있었다. 하지만 27일이 되어서 노부나가가 갑자기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자, 구경하러 오오사카(大坂), 사카이()로 내려가는 이에야스 일행과 헤어져 쿄우토 니죠우()에 있는 노부타다 전용 숙소인 묘우가쿠()()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재경 이틀째인 6 1.

 혼노우(本能)()에는 텐노우(天皇)와 사네히토 신노우(誠仁 親王)가 파견한 곤다이나곤(大納言) 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 ), 곤츄우나곤(中納言) 카쥬우지 하레토요(修寺 晴豊)가 상경을 축하하는 칙사로서 방문했다. 또한 총 40명에 이르는 쿠게(公家)들을 시작으로 승려나 상인 등 다수의 사람들이 노부나가 상경을 축하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쿠게들과의 대면은 수 시간에 이르렀고 노부나가는 환담 중에 칸토()를 평정했을 때의 이야기와 삼일 후인 4일에 서쪽으로 출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공략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다회()가 행해져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수 많은 명물(名物) 다기(茶器)피로(披露)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밤이 되자 노부타다가 방문하여, 쇼시다이(所司代[각주:4])인 무라이 사다카츠(村井 貞勝)나 코쇼우(小姓)들과 환담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밤이 깊어져 노부타다가 묘우가쿠사()로 돌아가자 노부나가도 마지막 침상에 들었다.


 노부나가가 취침한 바로 그 즈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 3000의 군세를 이끌고 탄바(丹波) 카메야마(亀山)성(城)을 출발하여 한밤중에 쿄우토(京都)를 향해서 군세를 진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 2일 밤이 새기 전에 카츠라가(桂川) 천을 건너 쿄우토(京都)에 들어오기 직전, 미츠히데는 그제서야 혼노우(本能)()를 습격한다는 것을 전군에 전하였고 여명(黎明)에 이르러 혼노우사()를 포위하였다.


 6 2일 여명.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에게 습격 받았을 때, 노부나가는 아랫 것들의 싸움으로 인한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함성과 철포(鉄砲)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모반(謀反)임을 깨달아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싸웠지만 물량에는 당해내지 못하여 팔꿈치를 창에 찔리자 물러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깊숙이 들어가 침실 입구를 닫고 결국 배를 갈라 죽었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할복했다고 하는 사람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중략)…… 머리카락 한 올 남기는 일 없이 재로 변했다]

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 처음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계속 씻겨도 광택만 더할 뿐 검은 색이 없어지지 않자 그제서야 믿고서는 맘에 들어하며 '야스케(彌介)'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때 싸우다 잡혔지만 미츠히데는 '사람도 아닌 미물이 뭐 알겠냐'는 식의 말을 하며 풀어 주었고 이후 소식은 불명. [본문으로]
  2. 바쿠후(幕府)를 열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쿄우토(京都)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입구 중 하나. 요즘으로 치면 톨게이트와 같다고 할까.. [본문으로]
  4. 이 때는 쿄우토(京都)의 행정, 치안, 여러 집단(조정, 상인, 절 등)과의 교섭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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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1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육천마왕이 마계로 돌아간거죠(;)

    아무튼 말년의 깽판(...하타노가 징벌 때 있었던 미츠히데 숙모를 죽게 한 일이라던가..)덕에, 박통처럼 심복의 손에 사라지는 운명은 예견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만화... [KING OF ZIPANGU 信長]라는 만화의 끝 부분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저 남자는 "전국(戦国)을 끝내기 위해서 "사신(死神)"으로 이 세상에 강림했다. 쉴 새없이 계속 싸우다 떠나 갔다. 사람의 몸으로 "신"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이였던 것일까"

    ... 말씀대로 마계로 돌아간 것 같다는... ^^

    에이~ 설마 그거 믿으시고 계신 것은 아니시죠? 하타노는 성내의 반란으로 인해 성내 반란 세력이 하타노 형제를 받쳤다고 하더군요. 숙모인지 친모 이야기는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이 유력하다고 하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2.12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라니 미츠히데의 고지식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거 같군요.
    히데요시였다면 소사체 적당히 골라서 선전했을텐데, 이후 토벌당하기까지 미츠히데의 행보를 그대로 예고하는거 같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2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타노쪽 얘기가 그런 얘기이군요(오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2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와우~ 색다른 충격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겠군요. 이야~ 안목을 넓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메엣찌님//어이쿠... 이런... 설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 혹은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을테니까요. 단정을 지다시피 한 말. 죄송합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3.09 0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볼리바르님 말씀이 일리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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