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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노부카츠'에 해당되는 글 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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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9.21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6- (9)
  3. 2008.06.06 스루가고젠[駿河御前] -3- (11)
  4. 2008.02.10 오다 노부나가 (6)
  5. 2007.12.14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1- (12)

十一.

 세간에게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
)란 육체가 없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자질과 성격을 가진 젊은이인지를 동시대의 어느 누구도 – 그 모친과 시녀들 등 극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 알 방도가 없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 분께서는 어떻게 자라셨나?"

 라는 질문을 오오사카(大坂)에서 사람이 오면 꼭 물어보았지만 천편일률적인 것밖에 듣지 못하였다.
 - 똑똑한가? 바보인가?
 라는 것 하나만은 이에야스가 꼭 듣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골적으로 그렇게 물을 수 없기에 더더욱 없는 재료에서 억측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똑똑하다면 일찌감치 난을 일으켜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바보라면 – 역시 죽일 수 밖에 없지만, 단지 죽인다는 것을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마지막으로 히데요리를 본 것은 히데요리가 만 10살 때인 1603년 2월 4일이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전쟁이 3년 전 과거였으며 이에야스는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이기는 했지만 아직 쇼우군(軍)이 되어 있지는 않았던 상태로, 이때 이에야스는 직접 오오사카로 내려가 가신의 신분으로 새해 인사를 올렸다. 그때도,
 '극히 평범한, 뭐 하나 볼 것 없는 아이군'
 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안심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둔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피부가 희멀건 하며 아래쪽이 큰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였고, 정신상태가 축 처졌는지 10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알현의 자리에서 위엄을 지키지 못하여 걸핏하면 유모의 무릎에 파고들려고 하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 알현을 마지막으로, 바로 이 해의 바로 같은 달[각주:1]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軍)이 되어 명실공히 지배자의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 이 해의 7월, 이에야스는 6살 난 손녀딸 오센(於千)을 오오사카로 내려 보내 히데요리와 결혼시켰다[각주:2]. 센히메(千)의 결혼은 굳이 이에야스가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고(故) 히데요시(秀吉)가 임종의 자리에서 남긴 유언으로, 이 유언을 지키지 않으면 히데요시의 휘하에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고 히데요시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어쩌면 동요할지도 몰라,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막 태어났을 뿐인 토쿠가와 정권의 안정과 그들 토자마다이묘우(外大名)의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 소년과 꼬마숙녀의 결혼을 진행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해의 3월.
 이에야스는 후시미(伏見)에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제 자신이 세이이타이쇼우군인 이상 오오사카로 가서 신년인사를 하는 통례대신,

 "그쪽에서 신년인사를 하러 오게"

 라는 뜻을 토요토미 가문에 넌지시 비쳤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과거가 어찌되었건 현재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자신의 주인인 히데요리에게 알려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연히 오오사카는 놀랐다. 아무리 세키가하라 이후 이쪽 토요토미 가문의 영지가 불과 70여만석이라는 일개 다이묘우정도로 봉토가 깎였을지언정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의 신하인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가 고 히데요시에게 '히데요리님을 보살펴 키우겠습니다'라고 맹세한 쿠마노 서약서(熊野誓紙[각주:3]
)의 서약은 아직 살아있다. 거기에 관위(官位)라는 점에서도 히데요리, 이에야스에게는 상하가 없었다. 그러한데 어째서 히데요리가 이에야스를 알현하기 위해서 후시미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주인이 가신에게 알현한 예가 일본 밖의 나라들은 몰라도 일본에는 있을 턱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요도도노(淀殿)는 가로(家老)인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향해서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그렇게는 안 된다. 토쿠가와님이야말로 이쪽으로 오시라고 하게, 그렇게 전하게, 라고 말했다.

 "말씀대로 하게"

 하고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도 달린 입마다 요도도노와 같은 뜻의 말을 했다. 카츠모토는,
 '이렇게 몰라서야'
 하고 거의 절망했다. 여성에게 가장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물론 도리로 따지면 진정 하시는 말씀대로 일 것이옵니다만"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이치는 물론 그러하옵니다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옵니다, 하고 현실을 턱이 빠질 정도로 설득하였건만 끝내 여성들은 납득하지 못하여 결국 카타기리 카츠모토가 히데요리의 대리인이라는 형식으로 사자(使者)가 되어 후시미(伏見)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신년인사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자네가 대리인으로 가는 것이라면 좋네"

 하고 요도도노(히데요시가 죽은 뒤 다이구인(大虞院)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지만)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했다. 이런 면에서도 도리 운운하며 떠벌리는 것치고는 논리의 개념이 요도도노에게 부족한 점이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체면론을 강행하려고 하는 이상 아무리 대리인이라도 히데요리의 굴욕인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안전을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오오사카성에서 후시미로 보내고 싶지 않은 것뿐 단지 그뿐이었다. 요도도노는 다른 수많은 모친과 마찬가지로 자기 몸의 연장으로서의 히데요리만을, 오직 그 안전 하나뿐으로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질 않는 듯했다.

 카츠모토는 후시미로 올라가 이에야스를 배알하고 신년인사를 올렸다.

 "히데요리님은 어떻게 되셨는가?"

 하고 이에야스는 배경이 알 것 같으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카츠모토도 모나지 않도록,

 "죄송합니다만 감기이옵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야스는 아무 생각 없다는 듯 끄덕이며,

 "그거 걱정되는먼. 그러나 그 감기도 내년에는 낫겠지? 내년은 쿄우(京)에서 만나고 싶구나"

 하고 말했다. 즉 내년에는 꼭 오게, 라는 뜻일 것이다. 카츠모토도,

 "내년에는 꼭"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다짐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크게 끄덕였다.

 그 내년(1605년)이 왔다. 이 해 4월, 이에야스는 자신의 적자 히데타다(秀忠)에게 세이이타이쇼우군을 계승시켜 정권을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천하는 토쿠가와 가문이 세습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히데타다는 쿄우(京)에 올라가 취임 인사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입궐하였고, 만천하의 다이묘우들은 모두 쿄우로 몰려들어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우다이진(右大臣) 토요토미노 히데요리만은 쿄우(京)에 가지 않았고, 이에야스 부자에게도 축하를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조바심이 났다. 히데요리를 자신 쪽으로 오게 함으로써 토요토미 가문도 이젠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고, 토요토미 가문에게도 이 새로운 관계를 인정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쿄우(京)에 살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식 명칭은 코게츠니고우(湖月尼公))를 움직여 그녀에게서 오오사카(大坂)로 사자(使者)를 보내게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명목상 히데요리의 공식 모친이기에 그런 점에서 가장 권위가 있을 터였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는 주둥이를 앙 다문 조개와 같이 그 권고를 묵살했다.

 다음 해인 1606년도 쌍방은 만나는 일 없었고, 그 다다음 해 2월에 히데요리는 천연두를 앓아 한때는 사망설조차 퍼졌다. 이에야스는 이 시기 에도(江)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히데요리는 죽은 건가? 히데요리는 죽지 않은 것일까?"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죽는 것이 천하를 위해서일 것이다. 살아있으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이를 죽이기 위한 싸움을 걸어 멸하여 자기 후손들에 대한 후환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의 죽음을 기도하고 싶을 정도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의 늙은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말했다. 일찍부터 마사노부는 토요토미 가문을 조기에 멸해야 한다는 주장론자로, 지난 1604년 히데요리가 감기를 이유로 상경 거부를 했을 때도 그것을 이유로 싸움을 일으키면 좋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를 꼬셨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세간의 반응이 두려웠다. 고 히데요시의 무덤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도 히데요리를 죽여버리면 세간의 평판은 어찌될까? 지금은 좀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 서쪽으로 보낸 다이묘우들이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고는 해도 본심은 몰랐다. 특히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이르러서는 히데요리에게 은밀히 안부를 묻는 사자를 보낸다고 하며, 그 중에서도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은,
 -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고 히데요리나 요도도노에게 속삭이고 있다고도 한다. '때'라는 것은 이에야스가 늙어 죽을 때를 기다리라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히데요시의 옛 은혜를 기억하는 다이묘우들을 규합하여 정권을 에도에서 오오사카로 옮기겠다 – 고 말한다는 것이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다른 다이묘우들도 이에야스를 겁내 필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나 키요마사도 이에야스에게는 은혜를 입고 있어 그를 상대로 싸움을 걸 마음도 생기지 않지만, 그러나 히데타다의 대가 된다면 더 이상 지킬 의리도 용서도 없다. 그런 것이었다......
 마사노리는 그런 것을 말하며 요도도노와 그녀의 측근들이 경거망동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정보가 이에야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정보의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저 경솔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라면 할 듯한 말이며 다른 토자마다이묘우(
外様大名)들도 크건 작건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문제는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나이였다. 이에야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늙고 약해지는 반면 히데요리는 시간이 갈수록 성인이 되어간다.

 "이외로 히데요리님이 천연두로 돌아가시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은 오히려 카토우, 후쿠시마 패거리들이지 않겠습니까?"

 하고 마사노부는 말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자들이지만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서(이유는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 대한 증오와 그 이상으로 자기 가문에 대한 보신 때문이었지만), 후쿠시마는 전쟁터에서 선봉이 되었으며 카토우는 큐우슈우(九州)에서 서군의 코니시(小西), 시마즈(島津)를 틀어막아 각각 토쿠가와의 천하 수립에 다대한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남들보다 배는 더 애증이 깊은 성격인 만큼 토요토미 가문의 쇠퇴에 마음을 아파하여 히데요리에게 자기 가문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존재나마 지키고자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여기서 히데요리가 자연사라도 하면 그들의 감정은 해방되어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사노부는 그 낌새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에게는 불행하게도 히데요리는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졌다. 이에야스는 실망했지만, 그러나 그러는 사이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정보가 귀에 들어왔다. 히데요리가 생사를 왔다갔다하는 동안 그 어느 다이묘우도 그에게 병문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를 두려워하는 다이묘우의 마음이 그렇게 강하였고, 토쿠가와 정권의 견고함과 지속성을 그렇게 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외였다.

 참고로 이런 정보들은 오오사카성 안에서 보내지고 있었다. 정보제공자는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히데요리의 친위군[각주:4] 부대장 7명 중 2명(아오키 카즈시게(青木 一重), 이토우 탄고(伊藤 丹後))은 이에야스의 프락치였으며, 거기에 고 히데요시의 오토키슈우(御伽衆[각주:5])였던 오다 죠우신 뉴우도우(織田 常真 入道=노부나가(信長)의 둘째아들[각주:6])는 나이차이가 나긴 하여도 요도도노의 외사촌이었기에 오오사카성 안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히데요시 사후엔 뭐든 칸토우()를 위해서 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에야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히데요리의 회복은 이에야스와 그의 측근에게 속으로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이제 이 젊은이를 이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는 확고한 정략과 군사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상 오오사카성의 실권자는 요도도노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라는 것을 이에야스도 혼다 마사노부도 알고 있었다. 마사노부는 여러 사람을 거치는 방식으로 칸토우의 사주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능숙히 이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에게 하나의 공포심을 심었다. 지금 당장 신사불각(神社佛閣)을 세우지 않으면 히데요리님이 죽는다 - 는 것이었다. 히데요리가 이번에 천연두를 앓은 것도 원령(怨靈)의 저주 때문이다 – 고 하였다. 고 히데요시공은 그 생애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터에 나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원령들의 저주가 앞으로도 히데요리님을 괴롭힐 것이다. 천하에 쓰러져가는 신사불각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재건하면 악령들은 물러갈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남들에게 들은 그대로 요도도노에게 전했다. 요도도노는 전율했다.

  1. 정확히는 1603년 2월 12일. [본문으로]
  2. 센히메의 모친 오고우(小督)는 요도도노의 막내동생. 따라서 히데요리와는 외사촌지간이다. [본문으로]
  3. 쿠마노는 일본의 거대한 신사(神社)가 있던 곳으로, 여기서 발행되는 부적과 같은 서약서 뒤에 서로 약속한 것을 쓰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를 어기면 하늘의 벌을 받아 반드시 죽는다고 믿었다. [본문으로]
  4. 명칭은 나나테구미(七手組). 7개의 부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말상대. 히데요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지식을 늘려갔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즉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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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2 1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카츠가 나중에 불문에 귀의했었군요.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 정말 재밌네요. 이거 다 읽으면 9권까지 읽다 중단한 <료마가 간다>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3 17: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엔 굉장히 유행한 듯 합니다.
      중이 되는 것은...

      신겐이나 켄신...같이 쪼큼 특이하게 읽는 사람들은 거의 중이 되면서 바꾼 호..더군요.

      료마가 간다...는 꽤 긴가 보군요. 전 절대 못 읽을 듯...
      만화로 된 '어이~ 료마'도 꽤 길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읽으면서 굉장히 힘들었거든요...그래도 이건 정말 재미있게 본 듯.

      ps;여담으로...료우마...라는 이름이 나오면 항상 그의 부인(오료우(お龍)의 나중 일이 떠올라서 개인적으로 쪼큼 울적(??)한 기분이 듭니다.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4 0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절 이름, 호나 출가 후의 법명은 다 음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료가 어떻게 됐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5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료우마가 죽은 뒤, 이러저러하다 궁핍하게 되어 예전 료우마의 부하나 동료로 당시는 메이지 정부의 고관들을 찾아 가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 하나 도움 주지 않았고(이는 오료우가 료우마 생존 시 성질이 개같았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도움 줌 사람은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로 20엔(...억지로 현재 한국 화폐가치로 치면 약 200~300만원 정도)을 주었다고 하네요.

      나중에 재혼하였는데 알콜의존증에 걸려서는 매일 술 마시며 취해서는 "나는 사카모토 료우마의 부인이다"라고 외쳤다고 하네요. 평소 입고 다니는 옷도 사카모토 가문의 문양이 박힌 옷을 입고 다녔고요.

      그런 것을 지켜봤어야 했을 오료우의 남편과 그런 식으로나마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오료우... 둘 다 불쌍해서요.

      여담으로...
      여러 매체에서 타카스기 신사쿠가 피를 토하면 키스하며 그 피를 닦아주던 알흠다운 사랑을 보여주던 우노'라는 여성은 섹스중독자였던 듯... 신사쿠가 죽자 그의 이름을 지키려 하는 신사쿠의 꼬봉 이토우 히로부미, 이노우에 몬타 등이 비구니로 만들어 신사쿠의 보제사에 갇아 놓고 주변에 감시인을 배치하였다고 하네요(뜬금없이 이 이야기는 왜 하냐고요? 잘난체 하고 싶었습니다. 우하하하)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7 1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덕분에 좋은거 많이 알게 됐네요.
      뭐, 잘난체 하시면 덩달아 더 많이 배우게 되니 참 좋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해주시길 바랄게요 ㅋ

      우노 라는 여자 참 불행했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23 1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야흐로 君臣豊樂이 나올때가 도래했군요. 뭐 저도 이 남은일가들의 생명연장은 말 그대로 '단지 생명연장일 따름'이라고 생각했고, 사실 이사람들이 어지간히 똑똑했다면 세키가하라 이후 납작 엎드렸어야 됐을텐데 결국 그것도 아니었던지라 죽음을 자초한 것이라고 밖에(..ㅡㅡ;)

    한편으로 생각하면 히데요시에대한 원령에 요도도노가 히데요리의 목숨에 불안을 느꼈다는걸 보면 씨도둑질(;;;...)은 아니라는 설에 시바선생은 무게를 두는 것도 같군요..(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3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설 상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말하는 것 처럼 이에야스가 죽기까지 납죽 업드리고 있었다면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반반입니다.
      예전에는 히데요시 이외의 씨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임신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러다 보니 요즘은 히데요시의 씨다...라는 생각이 강해진 상태입니다.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29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요도도노는 뭐...조삼모사로군요;;;

.

 

 1588. 미야[] 12살이 되었다.

 이 해의 봄, 히데요시[秀吉]는 이 나라의 궁정이 생긴 이래 가장 성대한 유흥을 기획하였다.

 흔히 말하는 쥬라쿠테이 행행[第 行幸]이다. 히데요시의 쿄우토[京都] 저택인 쥬라쿠테이에 텐노우[天皇] 이하 궁정사람들을 초대하여 무신(武臣)들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었다.


 미야도 당연히 초대를 받았다. 미야는 히데요시의 쥬라쿠테이[第]를 예전부터 보고 싶어하였기 때문에, 이 기획을 들은 날부터 당일까지가 너무 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 쥬라쿠테이[第]라는 성곽과 저택을 겸한 장대하고 아름다운 건조물은 작년 가을에 쿄우[京]의 우치노[野]에 준공하여, 큐우슈우[九州] 정복을 끝낸 히데요시는 개선 후에 거기서 살며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 장대하고 아름다움은 수도 안에 또 하나의 수도가 생긴 것과 같았으며, 어떤 화가(畵家)의 붓으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4 14일이 그 당일이었다.

 그날 아침. 히데요시는 직접 텐노우를 마중하러 나왔다. 텐노우[天皇]시신덴[紫宸殿]에서 출어(出御)하여 봉련(鳳輦)까지 걸어가는 동안 히데요시는 그 배후로 돌아가 텐노우의 옷 끝자락을 들고 모셨다.

 어소(御所)에서 쥬라쿠테이[第]까지 약 1636미터이다. 1636미터의 길을 경비하던 무사들의 수는 육 천명이었으며, 그 사이를 화려한 행렬이 지나갔다. 미야[]도 겉을 옻칠한 상자와 같은 가마(塗輿)에 타고 텐노우[天皇]의 뒤를 따랐다.

 

 건물 주위에 둘러친 해자(垓子)에 붉은색 다리가 세워져 있어 다리를 건너 쥬라쿠테이[第]의 성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미야는 별천지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 웅대하고 화려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기품 속에 화려함이 있어, 지금까지 대건축물의 상징인 사원(寺院)들과 같은 축축함이 없었고, 어디까지나 현세(現世)를 한 없이 즐기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마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것이 실속 없는 아름다움으로 격하될 지도 모르는 것을, 히데요시의 다도취향(茶道趣向)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서는 실속 없는 아름다움을 억눌러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 호우칸파쿠[=히데요시]이니 할 수 있는.

 이라고 미야는 후년까지 이때의 감동을 잊지 못했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불도를 닦는 승이 그림으로 자신의 기개(氣槪)와 품격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과 같이 히데요시는 건축으로 그것을 하고자 하려는 것 같았다.

 

 텐노우[天皇]가 준비된 자리에 들어섰다. 히데요시가 나아가 착석의 의식을 치렀고 곧이어 주연(酒宴)이 시작되었다.

 연회가 행해지는 자리의 서쪽은 활짝 개방되어 있어 그 앞에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은 온통 새싹들의 향연이었다. 거기에 철 늦은 벚꽃, 일찍 핀 진달래, 제철인 황매화, 제비붓꽃 등이 색을 더해, 그 근방에서 피어오르는 꽃내음 속에서 연회가 진행되었다. 연회 중간에 히데요시가 수많은 헌상품을 받쳤다. 밤의 연회는 음악이 중심이었다. 텐노우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는지 직접 소우[]라는 악기를 옆에 누이고 멋지게 연주하였다.

 

 연회는 3일간 이어졌다. 3일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텐노우[天皇]는 더 즐기고 싶었는지이틀 더 있고 싶다고 말하였다. 유사이례 예가 없었던 일로 군신들은 놀랐다.

 미카도[帝]도 히데요시가 좋으신 것이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와 좋아하는 점이 일치했다는 것에 날뛰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뻤다. 미야는 이 텐노우[天皇]필시 역사상 어느 텐노우[天皇]보다도 교양이 높았을 이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를 평생 존경하였다. 텐노우는 미야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중국 시학(詩學)의 재미를 가르쳐 준 것도 이 텐노우였으며, 백씨문집[白氏文集]의 기초를 쌓아 준 것도 이 고요우제이[後陽成]였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미야는 신경이 쓰였지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이 연기(延期)를 가장 기뻐한 이는 당연히 히데요시 자신이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을 텐노우[天皇] 앞에 모이게 하였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다. 소집된 자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 삼위[三位][각주:1] 이상의 계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였다. 이들보다 위계가 낮은 자들은 별실에 모여있었다.

 

 히데요시는 앞으로 나아가,

 -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훈계를 하였다. 그 훈계의 주된 내용은,

 

 지금 이처럼 우리들 같이 무신(武臣)같은 것들에게 텐노우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허용해주신 이번 행행(行幸)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의 영광이다. 이 기쁨에 우리들은 몸 둘 바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들 자손은 어떨까? 성은을 잊거나 혹은 무()를 내세워 텐노우에 대해 무례를 꾀하는 자가 나타날지 두렵다. 그러니 서약서를 제출하여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텐노우에 대해 배신하는 일 없도록 맹세하도록

 

 라는 것이었다.

 모두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미야는 그 자리의 처음과 끝을 그 눈으로 보았다. 보면서 위복(位服) 속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히데요시의 행동에 감격하였다. 미야의 조부(祖父)에 해당하는 선대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가 나이 어렸을 시기, 무가(武家)는 황실 같은 것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어소는 평소 수라(水剌)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빈곤하였는데 그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 히데요시와 같이 황실을 생각해 주는 인물이 나타난 것 자체가 기적이지 않은가?

 

 물론 히데요시는 히데요시대로의 꿍꿍이가 있었다. 히데요시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예전 그 자신과 동격이거나 아니면 오다 노부카츠,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그 자신보다도 상격(上格)에 있던 자들이 많았지만, 앞으로도 토요토미 가문이 그런 그들을 통제하는 한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계속 이어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텐노우[天皇]의 신성함을 빌려, 그 신성함을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철저하게 주입시켜서는 그로 인해 신하 중 제일인 칸파쿠 가문이 얼마나 중한가를 교육하여, 텐노우[天皇]를 따르는 것과 같이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을 따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그렇듯 심술궂게 이 현상을 관찰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았으며 거기에 무엇보다도 미야는 히데요시 빠돌이였기에 히데요시의 순수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미야는 토쿠가와 다이나곤[大納言] 이에야스라는 인물을 보았다. 이에야스는 극히 최근까지 히데요시와 싸우고 있던 토우카이[東海]의 패자(覇者), 히데요시도 이 인물에게는 조심하여 휘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빈객(賓客)을 대하는 것과 같이 응대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었다. 목이 두꺼운 인물이었다.

 구레나룻이 엷고 볼통통한 얼굴이었으며 동작에 지장을 줄 정도로 뚱뚱하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히데요시의 군사를 물리쳤다는 무인의 거만함 없이 공손하고 정중하여 그 행동거지나 풍모는 아무리 보아도 은거한 거상(巨商)과 같았다. 이에야스도 서약서를 써 제출하였다.

 

 시를 읊는 시회(詩會)의 행사도 행해졌다.

 참석자는 상급귀족(公卿) 측에서 24, 무가 측은 히데요시를 포함한 4명으로 합계 28명이었다. 자리순은 히데요시가 최상석으로 이어서 미야[], 말석에서 두 번째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각각의 무릎 앞에는 직접 지은 시를 필사하기 위한 벼루와 종이가 놓여졌다. 시회의 진행에 필요한 역할도 정해졌다. 시회 진행자[御歌奉行], 주제를 선정하는 사람[다이샤(題者)], 시가 쓰인 종이를 정리하여 낭독자[코우시(講師)]에게 전해주는 사람[도쿠시()], 낭독자 뒤에서 가락을 넣는 사람[핫세이(発声)] 등의 역할이다. 텐노우의 시가 적힌 종이를 옮기는 것[師]은 히데요시가 직접 하였다.

 텐노우[天皇]의 시는 정말 군자(君子)답다는 그의 인격에 어울리는 가락의 산뜻함이 갖추어진 것이었다.

그리도 오늘까지 기다린 보람이 있으니 소나무 가지에

온 세상의 언약을 매달아 보면서

わきて今日待つ甲斐あれや松が枝の

の契りをかけてみせつつ

 미야가 그것에 화답시를 만들었고, 거기에 히데요시도 그것의 화답시를 지었다. 히데요시의 그것은,

만대에 걸쳐 임금이 놀러 오시는 것을 익숙한 풍경으로 한다.

나무가 높은 건물에 쓰이는 것과 같이

よろづ代の君がみゆき(行幸)になれなれむ

みどり木高玉松 


 ‘이에야스는 어떨까?’

 하고 미야는 말석에 가까운 이에야스를 보았다. 미야는 이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영웅이라는 소문을 예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었다.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의 말에 의하면, 히데요시와 같은 예술적 취미를 일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화려한 의상을 좋아하지 않고 화려한 건축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 거성(居城)하마마츠 성[浜松城]도 극히 실용적이며 소박한 건조물에 지나지 않아, 성안에는 다실(茶室)도 없다고 한다. ()를 이에야스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으며, 와카[和歌] 등도 일체 읊는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사나이가 시회에 섞여 있었다. 읊었을 턱이 없는 와카를 저 뚱뚱한 사나이는 어떻게 읊을 것일까?

 

 미야는 계속 관심을 가졌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것을 한자한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옮겨 적다니!’

 하고 미야는 놀랐다. 필시 대작(代作)일 것이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임에 틀림이 없다고 미야는 생각했다. 왜냐면 이 이에야스가 재작년 10,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어 그 휘하에 들어오기 위한 의식을 치르러 오오사카[大坂]에 왔을 때, 그 회견석의 접대역을 예식(禮式)에 밝은 유우사이가 맡았다. 그것을 미야는 유우사이에게 직접 들었었다. 그 이래 유우사이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두터이 하고 있다고 한다. 대작을 했다고 하면 필시 유우사이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조금 남의 눈을 피하면서 베껴 적으면 좋을 것을 이에야스는 당당히 종이쪽지를 펼쳐 거리낌없이 베껴 적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야는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취했던 공손한 태도와는 대략 다른 뻔뻔스러움이 있어, 과장되게 말하면 텐노우[天皇]의 앞에 있다는 경외감(敬畏感)같은 것을 조금도 가지지 않은 듯 했다. 곧이어 읽는이[講師]가 그 이에야스의 시를 읽었다.

녹색 창연한 소나무 잎마다 임금의

천 년을 언약으로 본다.

たつ松の葉ごとにこの君の

を契りてぞ見る 

 라는 것이었다. 소나무의 잎은 수없이 많다. 그 수많은 소나무 잎마다 텐노우[天皇] 천 년의 번영을 빌었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시가 만약 지은이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야스도 또한 이 시에 따라 궁정의 번영을 보증했다 - 는 것이 될 듯했다.

 

 1590년이 되었다.

 미야는 이제 성인식을 치러 '토모히토 친왕[智仁 親王][각주:2]'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이 14세였다.

 그 전해에 토요토미 가문에 친자식이 태어났다. 츠루마츠[鶴松]였다.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칙사를 오오사카[大坂]로 내려 보내어 축하선물로 큰 칼[太刀]을 하사하였다. 이후 화제는 자연스럽게 미야를 토요토미 가문 유자(猶子)라는 신분에서 풀어놓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논으로 이어졌다. 히데요시에게 친자식이 생겼고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이 기회에 미야를 원래의 순수한 궁정인으로 되돌려놔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한때 자신의 유자였던 이 미야를 위해서 어떤 보답이건 해 주고 싶었다. 생각 끝에 독립된 궁가(宮家)를 창설시키자는 것으로 생각이 미쳤다. 궁가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영지(領地)와 저택이 필요했다. 우선 영지(領地) 3000석을 주었고, 이 새로운 가문의 명칭을 [하치죠우노미야 가문[]]으로 하였으며, 그 저택을 하치죠우[条] 강변[河原]에 마련해 주었다.

 

 이해의 정월.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3] 준비로 매우 바빴지만, 틈을 보아 입궐해서는 미야를 저택공사지로 데려갔다.

 

 미야의 저택 건물배치는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여전히 건축을 좋아했다. 히데요시는 미야를 저택의 예정지로 데리고 가서는 현장에 토목(普請), 건축(作事) 담당관리(奉行)와 장인(匠人)들을 불러 우선 기본방침을 세웠다.

 

 굉장히 어렵게들 생각하는군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친왕의 주거지이기에 어소(御所) 풍의 - 즉 토노모 형식[主殿造り][각주:4]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쾌함이 결여된다. 채광(採光)도 나빴고 무엇보다 너무 고풍스러웠다. 거기에 신흥(新興)의 스키야 형식[奇屋造 다실(茶室) 풍의 건축]도 가미하라 - 는 것이 히데요시의 주문이었다.

 

 미야도 무언가 말씀하시길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지만, 미야는 아직 건축에 대해 잘 몰라,

 

 모두 공(公)에게 맡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히데요시는 장인에게 도면을 그리게 하여 오오사카[大坂]에 돌아가서 그것을 받아보고서는 직접 붉은 먹을 먹인 붓으로 수정을 한 뒤,

 - 미야께도 보여드려라

 고 명했다. 미야는 그 도면을 보았다. 히데요시의 것은 너무 다도(茶道)의 취향이 드러나 있는 듯 했다. 미야는 그 점에 대해 그다지 불만이 있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말하자면 위로 매달아 열어 햇빛이나 비를 막는 시토미[蔀] 등을 사용한 왕조(王朝) 풍의 요소도 다소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 즈음 형인 텐노우[天皇]와 함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고찰에 몰두하고 있던 미야로서는 그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공간이 하나 있었으면 했을 것이다. 그 의견이 히데요시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지당하신 말씀이다

 

 라며 마지막 붉은 선을 그려 넣고서는 오다와라 정벌을 향해 출발하였다. 하지만 오다와라의 진영에서도 건축 진행 상태를 신경 써 하나하나 보고시켰다.

 미야도 자주 건축현장에 가서는 장인들 틈에 섞여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 미야가 차츰 건물과 건축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이 하치죠우[条] 저택의 건축부터일 것이다.

 

 연말에 건물이 거의 완성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에서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맹장지에 그려지는 그림()만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후원하던 화가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에게 재촉했다. 그 해의 마지막 날 전에 그것이 완성되어 저택에 설치되었다.

 그림의 주제는 노송나무였다.

 큰 화면 가득 짙은 묵의 선을 달리게 하여 노송나무를 그렸고 거기에 농후한 색채의 물, 하늘, 바위를 곁들인 그야말로 히데요시가 좋아하는 - 말하자면 쥬라쿠테이[第] 풍의 호화장려(豪華壯麗)한 구도로 히데요시가 만들어 낸 이 시대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듯 했다.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의 그림. 현재는 병풍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참고로 화가인 카노우 에이토쿠는 그 해의 10월(1590년 10월)에 사망하였기에, 완성을 한 것은 아마 제자일 것이라고 한다.

  새해가 되자, 미야는 이 새로운 저택으로 옮겼다. 이어 9월에 히데요시는 동방에서 개선한 뒤에 이 저택에 들렸다.

 

 잘 만들어진 것 같군요

 

 히데요시는 저택 안을 확인해 보면서 몇 번이나 말하였는데, 단지 정원만이 맘에 들지 않은 듯 직접 지휘를 해서는 바위를 이곳 저곳으로 옮겼다.

 

  1591년은 토요토미 가문에 불행이 이어졌다. 정월에 히데요시의 동생인 야마토다이나곤[大和大納言] 히데나가[秀長] 죽었으며, 8월에는 츠루마츠가 죽었다.

 토요토미 가문은 다시 후계자를 잃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을 하여, 이 해의 11월 조카인 히데츠구[秀次] 받아들여 자로 삼고, 그 다음 달에 칸파쿠 직책을 이 양자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조선 침략이 시작되었지만 히데요시는 이 즈음부터 몸의 심이 부러졌는지 갑자기 노쇠하기 시작했다.

  1. 이 삼위(三位)가 되면 당상가라 하여 궁궐에 입궐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공경(公卿)라 하여 상급귀족이 되었다. - 사족으로 정사위(正四位) 산기[参議]에 임명된 자는 사위(四位)임에도 특별히 공경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위키에는 ‘토시히토’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 호우죠우 씨[北条氏]와의 전쟁. [본문으로]
  4. 그 건물 안에 여러 행사나 침식 등을 모두 행할 수 있는 다목적 슈덴(主殿)이라는 건축물이 저택의 중심에 있는 저택형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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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9.21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는 인물이라,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 나갈지 궁금해집니다.
    이번편도 잘 읽었습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옛시가 많다는 이유로 질질 끌어왔던 이 '하치죠우노미야'편도 다음이 마지막입니다....(근데 그러고 보니 시는 몇 편 없었네요 ^^;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9.22 0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조선이고 일본이고 시는 어렵군요. ^^; 재밌게 읽었습니다.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2 1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읽고 관심이 생겨, 카노우 에이토쿠에 대해 찾아보니 의외로 요절했더군요. 위키에서는 과로사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적혀있었지만서도...

    문화인은 대체로 장수하는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조금 의외였습니다(~~;)

    이에야스 경우엔 참.. 뚱뚱이 외관을 잘 묘사했더군요~~; 뭐, 취미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르겠습니다만서도 그래도 대놓고 컨닝은 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2 1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참고로 시의 해석은 엉터리입니다. 고어는 자신도 없고,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보니 그냥 단어 뜻의 나열(겸 대충 때려 맞춘 것)입니다. 그래서 밑에 원어를 적어 넣었습니다. 잘 아시는 분이 보시면 알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 이건 넓은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다메엣찌님//그런 방면에 일이 많던 시기에, 그 분야에서 No.1급의 인물이다보니 이곳저곳 많이 불려다녀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근데 정말 저렇게 뚱뚱하였을지... 제 이미지로는 그냥 북두의 권의 작가가 그린 &quot;꽃의 케이지&quot;에 나오는 정도입죠...(그것이 동작에 지장을 줄 정도로 뚱뚱함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이에야스니까 조금 당당하고 거만하게 비춰지는 것이겠죠... 하지만 찌찔이급이 그랬다면 어떤 이야기가 되었을지 궁금하군요.(무엇보다 저렇게 베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늦지 의문이지만요. 처음 들어 보는 일이다 보니... 함 찾아봐야 겠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22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단지 베껴썼다고 싫어하게된건가 싶었는데 위키를 보니 좀더 큰 일이 있었군요;;
    다음 화에 나오려나요...? 기대해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2 2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다음이 마지막 편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9.23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곱게 자라 풍파없이 곱게 황실로 돌아간...
    과연 마지막 편에는 무슨 일이 있으려나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3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떠한 고민도 가져다 주는 일 없이 잘 먹여주고, 잘 대접해주고, 집까지 지어주고....
    저래주었는데도 빠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하치죠우노미야가 천하의 개*놈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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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츠히데[光秀]미나미야마시로[南山城]의 들판에서 쓰러뜨린 히데요시는 그 후, 눈을 북쪽으로 돌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까지 호쿠리쿠[北陸]에서 물리쳐 오다 정권[織田政権] 상속자로서의 발판을 다졌다.

 하지만 그것은 상속이 아니다. 찬탈이다. - 며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오와리[尾張]에서 거병하였고, 토우카이[東海]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동맹을 맺고는 그와 연계하였다.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い]이다.

 

 당시 히데요시는 쿄우[京]를 제압하고 오오사카[大坂]에 거성을 두어 그 세력범위는 24개국[国]에 이르렀으며, 총 석고는 620만석을 넘어 이미 판도는 옛 오다 정권보다도 컸다.

 그에 비해 오다 노부카츠는 107만석, 토쿠가와 이에야스 130만석이었다. 가지고 있는 힘으로만 보면 상당한 격차가 있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능력과 그 가신단의 용맹함을 크게 평가하여 이 싸움에서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였다.

 

 너무 조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총동원 능력 15만 명중에서 투입할 수 있을 만큼의 병력을 미노[美濃]오와리[尾張]에 전개시켰지만 그러나 전군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만 지키게 할 뿐으로, 이곳 저곳에 야전용 진지를 구축하여 광대한 요새선(要塞線)을 쌓아 대치전의 형태를 취했다. 이에야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이건 자신들 머리에서 지혜를 짜내 만든 진지를 구축하여 대치하고 있는 이상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지게 될 것이다.

 

 개전이 시작된 것은 3월이었다. 4월에 들어서 히데요시 측의 한 부대가 섣불리 움직였다. 장거리를 재빨리 이동하여 이에야스의 본거지 미카와[三河]를 습격하고자 은밀히 행군하던 중에 이에야스에게 간파 당하여 이에야스 주력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어 패주하였다.

 

 이에야스는 국지전에서 이겼다. 그 이후에는 진지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히데요시가 걸어오는 싸움에도 응하지 않은 채, 이 국지전 승리의 평판을 될 수 있는 한 천하로 퍼트리려 하였다. 히데요시는 조바심이 났다. 히데요시에게 있어 최선은 결전을 벌이고 그 결전을 통해 이에야스를 멸하고자 하는데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조개가 입을 다물고 있는 듯이 하고서는 응하지 않았고, 그 단 한번의 승리를 지키며 계속 지킴으로써 사태의 호전을 기다렸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싸움에 응하지 않자, 자신이 가진 가장 뛰어난 능력 중에 하나인 외교로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우선 이에야스의 동맹자인 오다 노부카츠를 꼬셔 농락하였다. 노부카츠는 이익에 낚여 아군인 이에야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히데요시와 강화(講和)해 버렸다. 이 때문에 이에야스도 충분한 여력을 남긴 상태로 전쟁터에서 이탈하여 자국으로 돌아갔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강화를 제시하였다. 이에야스로써도 천하의 추세가 이미 히데요시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납득하고 있었기에 그 강화를 받아들였다. 전쟁터의 승자이기는 했다. 그러나 모양새로는 패자의 모습을 해야만 했다. 인질을 히데요시에게 보낸 것이다.

 다만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입장을 생각하여 표면적으로는 인질이라 말하지 않고,

 - 아드님 중에 한 분을 졸자(拙者)의 양자로 얻고 싶습니다.

 고 말하였다. 실질이 어떻든 양자라고 한다면 이에야스의 면목도 설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승낙하여 둘째인 오기마루[於義丸]를 바치기로 하고, 가로(家老)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正]에게 호위시켜 오오사카[大坂]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오기마루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만나자마자 양부자(養父子)의 의식을 치렀고 곧바로 성인식(元服)을 행한 후, ‘히데[]’라는 글자를 내려 하시바 히데야스[羽柴 秀康]라는 이름을 칭하게 해서는 자기 가족의 일원으로 하였다. 후의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승리자라는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그 본거지인 토우카이 지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성을 나와 쿄우[京]와 오오사카로 올라와서는 히데요시와 대면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마치 항복한 사람처럼 비쳐지기에 이에야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정략(政略)이었다. 이에야스가 토우카이에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한 히데요시와 대등한 관계였으며, 오기마루를 보낸 것도 토쿠가와 가문이 하시바 가문으로 양자를 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런 이에야스의 태도에 당혹했다.

 당연했다. 이에야스가 토우카이 5개국[(미카와[三河],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에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한 시코쿠[国], 큐우슈우[九州], 토우호쿠[東北]의 여러 강호들은 이 이에야스와 연계하며 히데요시 정권에 계속 저항할 것이고, 예를 들어 당장 히데요시가 시코쿠를 정벌하고자 하여도 후방에 이에야스가 틈을 노리고 있기에 대군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랬다.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는 15만 명의 대군단을 토우카이에 계속 투입하였다면 언젠가는 이에야스를 멸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는 동안 천하는 흐트러지고 이제 막 성립되었을 뿐인 히데요시 정권은 무너질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천하 통일을 단기간에 이룰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전쟁보다도 막상 성사만 되면 단번에 끝나는 외교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에야스를 어떻게든 외교로 손에 넣고 싶었다. 이에야스를 가신으로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에야스를 이쪽으로 올라오게 하고 싶다. 올라와서 히데요시를 알현 이라는 형식으로 둘이 얼굴을 맞대기만 한다면 그걸로 주종관계가 된다.

 어떻게든 쿄우[]로 올라오게 할 수는 없을까?’

 히데요시는 예전부터 이 세상에서 노부나가[信長]를 가장 두려워 하였고, 그가 죽은 지금은 이에야스만을 두려운 자로 보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직면하게 되자 그 이상으로 두려운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자들처럼 달래는 것도 협박하는 것도 먹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인질을 잡았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정치적 결단으로는 오기마루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인질에 미련이 있었다면 이쪽으로 올라왔겠지만,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인질은 효과가 없었다. 

 히데요시는 필요로 몰렸다. 필요의 앞에 이치라는 것이 있더라도 치워버리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만약 이에야스가 가신이 되어 준다고 한다면 무릎을 꿇고 그의 발가락을 빨아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사히 히메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은 필요때문이었다.

 

 코이치로우[小一郎] 힘 좀 빌려줘

 

 하고 동생인 히데나가[秀長]에게 애걸복걸하듯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이 때이다. 일족의 희생이 없으면 안 되었다.

 

 만약 니가 싫다고 한다면 천하로의 희망이 사라지게 된다. 이제 막 생겼을 뿐인 하시바의 천하가 무너지고 이 가문은 멸망. 우리 일족은 죽게 된다. 그럴 정도로 중요한 것이 너의 한 마디 이라는 말에 달려있단다. 응이라고 말해주지 않을래?”

 

 라고 말했다.

 요건이라는 것은 아사히 히메를 이혼시켜 그녀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내고,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를 인척이라는 끈으로 이어서는 그를 히데요시 정권의 막하(幕下)에 집어 넣자는 것이었다. 그것 외에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모친인 오나카[仲], 즉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용서하겠냐는 것이다. 딸의 그러한 불행을 필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설득한다. 모친을 설득하기 위해서 히데요시보다는 모친이 히데요시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는 이 코이치로우 히데나가가 이야기 하는 편이 좋다. 또 하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아사히 히메는 아비 다른 여동생이기 때문에 반쪽 형제인 오빠 히데요시의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 보다 아사히 히메와 같은 아비, 어미인 히데나가의 입으로 이야기를 하게 하는 쪽이 잘 될 것이다. 그러니 아사히 히메 쪽의 설득도 부탁한다 는 것이었다.

 

 히데나가는 벙쪘다. 예부터 이런 일이 있었냐는 생각이 들었다. 전례가 없을 것이다. 아사히에게는 버젓한 남편이 있으며, 부부 사이도 남들만큼은 되어 아무런 풍파도 없이 편안히 살고 있다. 그 관계를 갑자기 찢고, 찢은 다음 곧바로 다른 남자의 마누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 부부의 역사 속에 여태껏 이랬던 적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는 절대 맡을 수 없습니다. – 고 히데나가는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알고 있다. 물론 잘 알고 있다

 

 라고 말하자 마자 히데요시는 소리 높여 통곡을 하였다. 히데요시는 웃을 때가 많은 남자이지만 감정이 격해지면 언제라도 울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울면서 그 어쩔 수 없는 필요와 이유를 빠른 말로 내뱉었고, 내뱉고 있는 동안 얼굴을 계속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이 히데나가를 침묵시켰다.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시다면 소에다 진베에[副田 甚兵衛]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진베에에게는 할 수 있는 만큼 해 주고 싶다. 5만석을 주어 다이묘우[大名]로 만들 생각이다.”

 

 마누라를 팔고 다이묘우가 되란 말이군 이라는 감정이 히데나가에게는 생기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히데나가는 너무도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우선은 얌전해 지겠군 이라고 생각할 뿐으로,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보다 모친인 오나카이며 여동생인 아사히였다. 그 설득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히데나가는 우선 모친에게 이야기했다. 생각했던 대로 오나카는 광란하였다. 코이치로우 들어라, 저 원숭이녀석은 꼬꼬마일 때부터 고생만 시켰다. 이런 생활을 하는 것도 내가 바란 것은 아니다. 저 원숭이녀석이 무사가 되어 이렇게 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 궁궐에서 살고 있는 거다. 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의 달빛 새는 지붕 아래서 살고 있었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 말했다. 그것을 히데나가는 어르고 달래어 어쨌든 승낙하게 하였다. 다음은 여동생이었다.

 

  히데나가는 아사히를 오오사카 성으로 불러 큰 언니인 토모[とも]와 함께 설득하며,

 

 이미 진베에도 승낙한 일이란다

 

 고 너무도 중대한 거짓말을 하였다. 이 한마디가 아사히의 수족을 차갑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한때는 숨이 멈추기도 했다. 의사가 회복시켰지만 새로운 결혼에 대한 것보다 진베에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뒤 아무런 말도 안 하게 되어, 히데나가가 하마마츠[浜松][각주:1]로 가는 것을 알겠지? 알겠지? 라고 거듭 묻자, 초점 없는 눈동자로 끄덕였을 뿐이었다.

 

 소에다 진베에는 이 당시 오우미[近江] 중앙부에 있는 하시바 가문 직할령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진베에도 아사히와는 별도로 오오사카의 스기하라 호우키[杉原 伯耆]의 저택으로 호출 받아, 대면하자 마자 갑자기,

 

 명령이다

 

 고 그것을 하달 받았다. 진베에는 분노했다.

 작은 칼[脇差]의 칼자루에 손이 갔다.

 

 진베에~ 어쩌려고 그러나

 

 호우키는 처음부터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는지, 사람이 하는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몸놀림으로 방바닥을 굴러 몸을 뺐다. 간격이 생겼다. 그 간격으로 좌우에 있던 스기하라 가문의 가신 10명 정도가 밀려 들어와 순식간에 둘 사이를 메웠다.

 

 , 날 죽이려는 것인가?”

 

 진베에는 굉장히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칼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방들의 눈빛만을 두려워했다.

 

 그럴 리 없잖습니까~”

 

 스기하라 가문의 늙은 가신이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하여 이 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기 위해서 미소를 만들어 말했다.

 

 손에 위험한 것을 가지고 계신지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선은 그 손에 드신 것을 좀…”

 

 하고 손바닥을 예의 있게 들어 진베에의 오른손 쪽을 가리켰다. 진베에는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오른손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렸다.

 

 “…아무 짓도안 할 것이네

 

 힘없이 손을 축 늘어트렸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칼에 손을 대었는지, 뽑아서 자신의 배라도 가르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스기하라 호우키에게 칼을 내리치고자 했는지 자신도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이 굴욕과 자신에게 내려진 이 어처구니 없는 운명에, 몸도 마음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이성을 잃고 이유도 없이 작은 칼에 손을 대고 만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호우키를 벨 용기도 없었다. 벤다고 해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짓도 안 하네

 

 하고 진베에는 한번 더 말했다. 벤다고 하면 히데요시이다. 하지만 이백수십 명의 다이묘우를 거느린 육십여 주()의 주인을 벨 수 있을까?

 

 거부한다!”

 

 한 시간 후에 진베에는 외치고 있었다. 거부하는 것 이외에 남자라고 할 수도 없다.

 라고 했지만 마누라 아사히를 빼앗기는 것에 거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홍수나 지진과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5만석의 다이묘우가 된다는 것은 거부할 수가 있었다. 이는 진베에의 자유이다. 자기는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거부한다. 마누라를 팔아서 그 대가로 5만석의 다이묘우가 되는 병진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고 진베에는 소리질렀다.

 

 대가는 필요 없다. 그냥 공짜로 가져 가도록. 진베에가 그리 말했다고 확실히 주군께 전해주시길. 절대 잊지 말도록

 

 현관까지 달려간 후, 거기서 뒤로 돌아서는 어두운 집안을 향해서 한번 더 같은 말을 외쳤다. 공짜이외다. 그냥 바칩니다. 그렇게 전해 주시길. 호우키님, 꼭 이외다. 이 말을 만약 전해주지 않는다면 진베에에게 기다리는 것은 지옥. 아미타(阿彌陀)미륵(彌勒)도 날 구해주지 못할 것이오. 적어도 이 말만은 꼭 위에 전해달라고 외치며 뛰쳐나갔고, 대문을 나서면서도 또 다시 뒤로 돌아서는 또 외쳤다. 그 모습이 결국 미쳤군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 저 사람, 치욕으로 인해 배를 가르겠지?

 하고 문안에 있던 사람들은 생각하였고 실제로 길 위에서 달리고 있는 진베에도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숙소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경우, 배를 가르는 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었다. 굴욕의 끝에 죽었다 고 세상에 퍼질 뿐이었다. 배를 가르는 것은 예로부터 자신을 과시하는 최고의 형식이며 화려한 것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이 경우 이렇게 혼자서 자결(自決)해 보았자 남들에게 우울한 동정을 살 뿐일 것이다. 그보다도 살아서 하시바 가문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단(無斷)으로 떠난다. 주인에게 실망하였기에 떠나는 형식이다. 거기에 담긴 무언의 항의와 비판을 세상은 읽어 줄 것이다.

 보통 이럴 경우, 떠난 이는 주군 가문에 대한 일종의 반역으로 여겨져 토벌대가 파견되겠지만, 상대가 천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만큼 부족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집의 얇은 벽 하나만 의지하여 크게 저항한 뒤 죽어 주마 , 그것 이외에 이 굴욕을 풀 방법은 없었다.

 

 진베에는 다음 날 새벽 숙소를 나와 오오사카를 떠났고, 도중 오우미의 저택에 들려 집을 정리한 뒤 고향인 오와리로 돌아와 아이치 군[愛知郡] 카스모리[烏森]자기 영지(領地) 내에 있는 에서 머리를 깎고 인사이(隠斎)’라는 호를 쓰며 은거해 버렸다.

 

 당연히 위에서 토벌대가 파견되었어야 했지만, 그런 점도 스기하라 호우키는 잘 처리하였다.

 다음날 아침. 진베에가 떠난 것을 확인한 뒤, 등성(登城)하여 히데요시를 알현하고서는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진베에가 오와리로 돌아간 것은 무단으로 떠난 것이 아닌 병으로 인한 은퇴이며 진베에가 제출한 퇴직서는 저한테 있습니다 - 고 적당히 얼버무린 후,

 

 은거 허락을 내리시겠습니까?”

 

 고 머리를 굴려 말했다.

 물론 히데요시는 호우키의 말 뒤편에 있는 진실이 생생히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경우 죄를 들추어 소란을 피우면 이쪽이 손해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고 허락하였다. 남아있는 더욱 중대한 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곧바로 사자를 하마마츠로 보내어 이에야스를 꼬셔 그를 자신의 매제가 되도록 승낙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잘 될까?’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에 대해선 자신이 없었다.

  1. 이에야스의 본거지가 있는 곳.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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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6.06 1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기마루를 '받치기로'의 수정이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06 12: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고맙습니다. ^^ 얼릉 고치겠'읍'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06 14: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너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충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어색함없이 읽히는게 상당히 매끄러운 번역같습니다(직접 원문을 보지는 못했으나^^;)

    아사히도 충격이 심했겠지만 굴욕의 사나이 진베에도 참...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하는 짓은 상당히 병진같습니다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당부할 필요는 없을텐데 말이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06 2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합니다... 처음 해 놓고 보니 제가 보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솔직히 매끄러운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그렇게 보아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

    억울하다 보니 어쩔 수 없겠죠. 진베에는....
    이해는 갑니다.
    (어떻게 보면, 배를 가른 사람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그만큼 희소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일본 무사들은 굴욕을 당하느니 배를 가른다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기에 오히려 배를 가른 사람들이 기록된 것은 아닐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6.07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쌍한 아사히// 아사히 일생에 행복한 날들은 히데요시가 찾아오기전 시골에서 첫번째 남편과 살적이 아닐까 싶네요. 스루가 고젠을 읽으면 공명의 갈림길에서의 아사히 모습이 떠오릅니다. 잘 읽고 갑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kun BlogIcon 고어핀드 2008.06.07 2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기다리고 있다능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07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할머니가 2차대전때 고베에서 살고 계셨는데 종종 하얀 장막 쳐놓고 하리키리 하는 모습을 봤다더군요. 그런데 어릴적에 그런걸 봐서인지 625동란때도 덤덤하셨다고..;;

    아무튼 뭐 멀쩡한 사람인 이상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말이 좀 역설이지만 참.. 상관에게 마누라 뺐긴 셀러리맨 느낌인지라..)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07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할복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않았을 수도 있군요...
    마치 조선시대에 삼족을 멸한다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어핀드님//T.T 흑~ 고맙습니다.

    다메엣찌님//제 생각엔, 그 즈음엔 에도 막부 배양 된 존황사상이 막말유신기에 꽃을 피워, 배를 가르는 것이 활성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다메엣찌님의 할머님도 修羅場をくぐってきましだね。)

    박선생님//어디까지나 생각만큼은... 이라는 의미입죠 ^^
    배를 갈랐던 사람도 있긴 있으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rknesseye BlogIcon 흑안 2008.06.17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 앞에 나오는 오다 노부카츠는 信雄 아닌가요? 信勝은 노부나가의 동생이었던 칸쥬로 노부유키의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본문에 저렇게 나와있는 것인지?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0 0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오타입니다. ^^;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82 6 2자인(自刃) 49.

1534 ~ 1582.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주(城主).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우()()를 멸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입경(入京).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지만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해 자해(自害)







최후의 상경(上京)


 1582 5 29.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安土)()을 출발하여 오래간만에 상경하였다. 이보다 앞선 1 28일에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중지된 적도 있기에 작년 3월 이래 실로 1 2개월 만의 상경이 되었다.

 2년 전. 이시야마(石山) 혼간지(本願寺)를 굴복시킴으로써 더 이상 키나이()에서 노부나가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게 되었다. 안도감(安堵感)때문인지 왕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을 이 즈음의 노부나가에게서는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유흥(遊興)적인 면을 [신장공기(信長公記)]의 기사에 빈번히 볼 수 있다.


 1581 2월에 상경한 노부나가는 선교사에게서 데려온 흑인[각주:1]을 선물 받았고 그 직후에는 궁궐의 동쪽 마장(馬場)에서 텐노우(天皇)나 쿠게(公家)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오다 군단의 열병식(閱兵式)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조로에(馬揃)를 행하였다.


 같은 해 9.

 차남(次男) 노부카츠(信雄)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가(伊賀) 정벌을 명하였고, 또한 1582 3월에는 첫째인 노부타다(信忠)를 총대장에 임명하여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정벌을 명하였지만, 노부나가 자신은 직접적으로 작전에 관여하는 일 없이 평정 후에 현지 검분(檢分) 만을 했을 뿐으로, 그 모습은 전적(戰跡地)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이(甲斐) 원정에서 귀국했던 노부나가에게 조정(朝廷)에서 칙사가 파견되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각주:2])추임(推任)한다는 뜻이 전해졌지만 노부나가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우(本能)()의 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5 29.

 오후 12시 즈음부터 내린 비 속에서 아와타(粟田口[각주:3]) 쪽을 통해서 시죠우() 니시노토우인(西洞院)에 있는 혼노우(本能)()에 도착했다. 아와타구치에는 미리 노부나가 일행을 마중하려는 쿠게(公家)의 무리들이 다수 모여있었지만 마중할 필요는 없다는 고지를 모리 란호우시(森 乱法師=란마루(蘭丸)) 나리토시(成利)가 와서 전했기에 쿠게(公家)들도 집들로 돌아간 후 였고 또한 함께 한 수하들도 [코쇼우(小姓) 2~30] 정도였기 때문에 상경 모습은 조용했다. 상경한 시각은 오후 2시 즈음이라고도 오후 4시 즈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건 이것이 마지막 상경이 될 것이라고 노부나가 자신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경의 주요한 목적은 츄우고쿠(), 시코쿠() 정벌이라는 양 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이즈미(和泉)의 사카이()에서 철갑선(鐵甲船)을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6 4일에는 쿄우토(京都)를 출발할 예정으로 있었기에 5일간 쿄우토에 있을 예정이었다. 혼노우(本能)()의 변은 그 재경(在京) 3일째에 일어난 것이다.


상경 축하의 나날


 그렇다면 그 3일간의 모습을 살펴보자.

 5 29일 상경했던 노부나가는 아와타구치에서 첫째 아들 노부타다(信忠)의 마중을 받아 함께 혼노우(本能)()로 왔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인 21.

 노부타다는 토오토우미(遠江)의 하마마츠(浜松)에서 아즈치(安土)로 올라 와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함께 쿄우토(京都)에 와 있었다. 하지만 27일이 되어서 노부나가가 갑자기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자, 구경하러 오오사카(大坂), 사카이()로 내려가는 이에야스 일행과 헤어져 쿄우토 니죠우()에 있는 노부타다 전용 숙소인 묘우가쿠()()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재경 이틀째인 6 1.

 혼노우(本能)()에는 텐노우(天皇)와 사네히토 신노우(誠仁 親王)가 파견한 곤다이나곤(大納言) 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 ), 곤츄우나곤(中納言) 카쥬우지 하레토요(修寺 晴豊)가 상경을 축하하는 칙사로서 방문했다. 또한 총 40명에 이르는 쿠게(公家)들을 시작으로 승려나 상인 등 다수의 사람들이 노부나가 상경을 축하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쿠게들과의 대면은 수 시간에 이르렀고 노부나가는 환담 중에 칸토()를 평정했을 때의 이야기와 삼일 후인 4일에 서쪽으로 출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공략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다회()가 행해져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수 많은 명물(名物) 다기(茶器)피로(披露)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밤이 되자 노부타다가 방문하여, 쇼시다이(所司代[각주:4])인 무라이 사다카츠(村井 貞勝)나 코쇼우(小姓)들과 환담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밤이 깊어져 노부타다가 묘우가쿠사()로 돌아가자 노부나가도 마지막 침상에 들었다.


 노부나가가 취침한 바로 그 즈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 3000의 군세를 이끌고 탄바(丹波) 카메야마(亀山)성(城)을 출발하여 한밤중에 쿄우토(京都)를 향해서 군세를 진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 2일 밤이 새기 전에 카츠라가(桂川) 천을 건너 쿄우토(京都)에 들어오기 직전, 미츠히데는 그제서야 혼노우(本能)()를 습격한다는 것을 전군에 전하였고 여명(黎明)에 이르러 혼노우사()를 포위하였다.


 6 2일 여명.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에게 습격 받았을 때, 노부나가는 아랫 것들의 싸움으로 인한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함성과 철포(鉄砲)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모반(謀反)임을 깨달아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싸웠지만 물량에는 당해내지 못하여 팔꿈치를 창에 찔리자 물러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깊숙이 들어가 침실 입구를 닫고 결국 배를 갈라 죽었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할복했다고 하는 사람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중략)…… 머리카락 한 올 남기는 일 없이 재로 변했다]

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 처음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계속 씻겨도 광택만 더할 뿐 검은 색이 없어지지 않자 그제서야 믿고서는 맘에 들어하며 '야스케(彌介)'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때 싸우다 잡혔지만 미츠히데는 '사람도 아닌 미물이 뭐 알겠냐'는 식의 말을 하며 풀어 주었고 이후 소식은 불명. [본문으로]
  2. 바쿠후(幕府)를 열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쿄우토(京都)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입구 중 하나. 요즘으로 치면 톨게이트와 같다고 할까.. [본문으로]
  4. 이 때는 쿄우토(京都)의 행정, 치안, 여러 집단(조정, 상인, 절 등)과의 교섭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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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1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육천마왕이 마계로 돌아간거죠(;)

    아무튼 말년의 깽판(...하타노가 징벌 때 있었던 미츠히데 숙모를 죽게 한 일이라던가..)덕에, 박통처럼 심복의 손에 사라지는 운명은 예견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만화... [KING OF ZIPANGU 信長]라는 만화의 끝 부분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quot;저 남자는 &quot;전국(&amp;#25126;&amp;#22269;)을 끝내기 위해서 &quot;사신(死神)&quot;으로 이 세상에 강림했다. 쉴 새없이 계속 싸우다 떠나 갔다. 사람의 몸으로 &quot;신&quot;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이였던 것일까&quot;

    ... 말씀대로 마계로 돌아간 것 같다는... ^^

    에이~ 설마 그거 믿으시고 계신 것은 아니시죠? 하타노는 성내의 반란으로 인해 성내 반란 세력이 하타노 형제를 받쳤다고 하더군요. 숙모인지 친모 이야기는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이 유력하다고 하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2.12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라니 미츠히데의 고지식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거 같군요.
    히데요시였다면 소사체 적당히 골라서 선전했을텐데, 이후 토벌당하기까지 미츠히데의 행보를 그대로 예고하는거 같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2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타노쪽 얘기가 그런 얘기이군요(오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2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와우~ 색다른 충격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겠군요. 이야~ 안목을 넓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메엣찌님//어이쿠... 이런... 설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 혹은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을테니까요. 단정을 지다시피 한 말. 죄송합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3.09 0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볼리바르님 말씀이 일리가 있네요.

一.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통칭 네네(寧々). 히데요시의 정실이기에 당연히 토요토미 가문[豊臣家門] 가정(家庭)의
주재자(主宰者)이다. 소탈하고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종일위(從一位)라는 신분이 되어서도 잘난 척하지 않았고 삶이 끝나는 날까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사용하였으며 히데요시와의 대화도 누가 보건 말건 꺼리낌이 없었다.

 어느 날, 부부가 함께 란부[舞]를 보고 있었다. 보던 중 뭔 일인지 말싸움이 시작되어 서로 언성을 높였지만 둘 다 오와리 사투리로 빨리 내뱉었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가 깔깔거리며 웃었고 히데요시도 등이 휘도록 웃어 제꼈다.
 ‘싸움이 아니었나 보군’
 이라 생각하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안심하였는데, 히데요시는 그런
예인(藝人)들에게,

 “지금 싸움을 어떻게 보았나?”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어떤 때이건 밝은 분위기로 만들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어, 쿄우카[狂歌]나 임기웅변(臨機應變)적인 재치를 굉장히 좋아했다. 예인들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우선 큰 북을 치던 이가,

 “부부싸움에 모두 놀랐습니다요”

 라며 갑자기 북을 쳐 좌중을 놀라게 하며 대답했다. 피리를 불던 이가 곧바로,

 “어느 쪽이건 삐리리비리리♪”

 어느 쪽이건 잘못 하였고() 또한 말이 맞다()……라고 피리의 음에 맞추어 말하였다. 이 재치 있는 대답에 부부는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런 귀부인(貴婦人)이었다.

 이 귀부인이 아이를 낳았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운명도 크게 변했을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토요토미 정권이 성립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이 입에는 담지 않았지만 맘속으로는,
 ‘이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하가 살아계신 동안만이다.’
 라 생각하여 다음에 이 천하를 계승할 사람이 누굴까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당연 누구의 눈에건 실력을 말해도, 혈통을 말해도, 인물을 말해도, 관위를 말해도
제후(諸侯) 필두(筆頭)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을 존중하고는 있었지만, 뒤로는 이에야스와 끈을 잇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히데요시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은 이에야스와 다이묘우[大名]라는 점에서는 동격이면서도 은밀히 이에야스에게,

 “절 부하로 여기시옵소서.”

 라고 까지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요토미 가문은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이 그런 의미에서는 이 정권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불행은 혈연(血緣)이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히데츠구 이외에 더 이상 적당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혈연이 아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까지도 양자로 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일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히데요시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킨고 츄우나곤[金吾 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까지 히데요시의 양자 중 한 명이 된 데에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히데아키는 키타노만도코로의 혈연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친정집은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두 곳이 있다.
 그녀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미관(微官)이었던 스기하라[杉原 = 후에 키노시타[木下]로 성을 바꾸었다] 스케자에몬 사다토시[助左衛門 定利]의 딸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이모가 있던 아사노 가문[浅野家]에서 키워졌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 것과 동시에 이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도 아사노 가문도 제후가 되었고, 기묘하게도(이유는 있지만) 키타노만도코로의 이 두 친정만은 토쿠가와 다이묘우[徳川大名]로 남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살아 남는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할 즈음, 키타노만도코로의 생가 스기하라 가문 당주는 그녀와 연년생 동생 이에사다[家定]였다. 그 이에사다에게는 자식들이 많아 키타노만도코로는 일찍부터,

 “니가 가진 많은 아이들 중에서 한 명 갖고 싶구나”

 고 말했었다. 그 키노시타 가문에 다섯 번째 남자아이가 1582년 태어났다. 히데아키였다.
 이 당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츄우고쿠[中国] 방면 사령관이었으며, 키타노만도코로는 거성(居城)인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었다. 스기하라 가문은 이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있었기에 당연히 그 집은 나가하마 성 밑에 있었다. 그녀는 성주 부인이면서도 자신의 친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동생이자 부하인 이에사다의 집에 방문하였다.

 “얘는 참 귀엽구나”

 아기를 들여다보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손벽을 치며 기뻐했다. 아예 이 아이를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에사다에게 말하자,

 “그 정도로 맘에 드신다면”

 하면서 누이의 뜻에 따라주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서 돌아 온 히데요시에게 그 뜻을 말하자,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양자로 삼자구”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 히데요시는 간단히 처의 요청을 승낙하였고, 이로 인해 히데아키는 나가하마 성에서 돌보게 되었다. 물론 유모가 있었지만 키타노만도코로 자신도 아이를 좋아하였기에 아기보기도 –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 치고는 능숙했다.

 히데아키는 무사히 성장했다. 통칭을 타츠노스케[辰之助]라고 하였다.
 동그란 얼굴에 흰 피부로 눈동자 움직임이 빨랐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서도 굉장히 똑똑해 보였다.

 “저 아이가 자라면 한 몫을 할만한 인물이 될 거에요”

 라고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군”

 히데요시도 고양이와 아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거기에 히데요시는 자기 처의 장점 중 하나가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다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히데요시도 히데아키에게 기대를 하였다. 집안 내에서 히데아키의 위치는 양자 서열 1위인 히데츠구의 동생이라는 순위였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에게 만약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가문의 상속권을 주어도 좋다고까지 히데요시는 생각하여,

 “네네, 이 가문을 저 아이에게 물려주어도 좋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시게”

 라고 까지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말하였다.

 1585년 히데요시는 관백(関白)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조정에 요청하여 12살인 히데아키를 종사위하(從四位下)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에 임명 받게 하였다. 이 관을 당명(唐名)으로는 킨고쇼우군[金吾将軍]이라고 한다. 궁문(宮門)의 경비대장이며, 금혁(金革)을 차고 문을 지킨다고 하여 [금오(金吾=킨고)]라는 호칭이 생겼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제후들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소년을,
  "킨고님"
 이라 부르며 각별한 경의를 표했다. 물론 뒤에서는 ‘킨고놈’ 이라고 소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즈음부터 히데아키는 아이였을 때의 귀여움이 사라지고 영특함이 사라져, 간단히 말하면 우매해지고 얼빠지기 시작했다. 장래
상급 귀족(公卿) 사회에서 창피를 당하지 말라고 글과 시의 선생을 붙여주었지만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것 같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것을 깨닫기에 이르러 차츰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조정에서도 행동거지가 나빠 코를 흘리고 엄숙해야 할 곳에서 갑자기 웃거나 했다. 아주 조심히 걸어야만 하는 조정의 복도에서 동동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저 아이만큼은 창피하네요”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푸념했다.
 원래 그녀의 생가인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의 핏줄은 모두 무사(武士)로서의 용기나 과감함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닮아서 총명한 인물도 많아, 히데아키의 큰 형 
카츠토시[勝俊 = 지쥬우[侍従], 후에 쵸우쇼우지[長嘯子]] 등은 시에 대한 재능에 있어서만은 어느 제후의 자식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게”

 히데요시는 그 점에 있어서 낙관적이었다. 어렸을 때의 얼간이 짓이라면 자기 또한 그러했으며, 그의 옛 주군이며 생애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악동(惡童)스러움은 당시 오다 가문의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그에 비추어보아 어릴 때의 난폭함과 우둔함을 가지고 나중의 그 인물이 현명하게 될지 어리석게 될지를 잴 수 없다.

 “뭐 그런 것일세”

 히데요시는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키타노만도코로를 달랬다.
 그러나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은 좋아지질 않았다. 왜냐하면 히데아키는 12살의 꼬꼬마인 주제에 성(性)에 대한 관심만은 이상할 정도로 강하여,
여관(女官)들이 방에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을 때면 어느 순간에 들어왔는지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타이르면 미친 사람마냥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히데요시는,

 “색을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개성이나 경향과 같은 것으로 착하고 나쁘고 현명하고 우둔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가~ 킨고도 벌써 훔쳐보기인가.. 나이에 비하면 빠르군”

 이라 말하며 웃을 것이 뻔했다. 호색(好色)과 조숙(早熟)이라는 점에서는 히데요시 자신도 그러했기에 이런 남편에게 호소해 보았자 였다.
 히데요시는 오히려 자신의 친족인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 쪽을 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1588년.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조영(造營)하여 4월 14일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방문을 요청하였다. 텐노우[天皇]가 신하의 사저(私邸)에 방문하는 것은 요 백 년 동안 없었기에,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화려하게 알릴 수 있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온 힘을 다하여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날 쿄우토[京都]의 근방은 물론 먼 지방 사람들까지 구경을 하려 몰려들어, 길가와 거리를 경비하는 경비병 만으로 6000명이 동원되었다. 행렬은 화려함의 극을 달했다.
 -텐노우님이라는 것은 이렇게까지 존귀하신 것인가?
 라고 다이묘우[大名] 이하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가 기대했던 이 의식의 정치적 효과였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천하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텐노우 다음가는 이는 관백(関白)이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알게 됨에 따라 자연히 관백의 신성함도 알 수 있게 됨에 틀림이 없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천하가 갑자기 성립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후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가신으로 있었을 때의 옛 동료들이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오다 가문과 동맹했던 나라의 국주(国主)로 히데요시보다 오히려 지위가 높았다. 거기에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는 옛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이었다. 히데요시가 무력과 운(運)으로 그들을 휘하에 두고는 있었지만 출신이 출신인만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복종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에게 존비(尊卑)의 가치관만큼이나 완고한 것은 없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부수고자 했다. 천자의 존귀함을 빌려 그것을 선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존비관(尊卑觀)과 질서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텐노우는 쥬라쿠테이에서 4일간 머물렀다.
 머물던 중 마당을 구경하려는 텐노우[天皇]의 짚신을 천하의 지배자인 히데요시가 마당으로 내려가 자기 손으로 직접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또한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방 하나에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힘 있는 여섯 명의 제후를 모아 놓고 텐노우를 모시고 와 이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여섯 명은 다음과 같다.

나이다이진[内大臣]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다이나곤[大納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곤다이나곤[権大納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 히데요시의 동생]
츄우나곤[権中納言]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산기사코노에노츄우죠우[参議左近衛中将]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우코노에노곤쇼우쇼우[
右近衛権少将]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들에게,

 “너희들은 들으라. 이제 천자(天子)의 고마움과 고귀함에 감루(感淚)를 흘렸을 것이다.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서에 써서 제출하도록”

 하고 명령하였다. 앉은 자리 앞으로 서약서가 놓였다. 이미 문장은 쓰여있었기에 일동은 여기에 혈판(血判) 서명을 하기만 한 것이다. 서약서에 쓰인 문장의 말미에,

칸파쿠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것이든 따르며 조금이라도 거부하지 않겠다.

 고 적혀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텐노우[天皇] 앞에서 제후에게 복종을 맹세시키는 이 일이야말로 이번 텐노우의 쥬라쿠테이[聚楽第] 방문 최대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서약서를 받는 인물은 히데요시 본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대리인(代理人)이었다.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대리인에 히데아키를 선택하였다.
 [킨고님]
 이라고 서약서에는 미리 쓰여져 있었다. 맹세하는 상대는 15살의 킨고 히데아키에 대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는,
 ‘이외로 킨고님이?
 라는 것이 되었다. 당연한
추찰(推察)이었다. 이 서약서로 인해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의 히데아키 지위는 명확해졌다. 비약(飛躍)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에게 천하를 물려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킨고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되지’
 라 다이묘우[大名]들은 생각하며 이제 막 ‘이방 수염’이 나기 시작한 소년에게 알랑거리기 위해서 다투듯이 선물을 보내게 되었다.

 “저래서는 거만해지지 않을까?”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걱정했지만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히데아키에 대해서도 제후들이 떠받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 했다.

 “선물 같은 것 받게 내비 두시게. 히데아키가 얼마나 존귀한가를 천하에 알리는 편이 좋은 것일세”

 “그러나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킨고님에게는 독이 될 것입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말했지만 그러나 가정(家庭)에서의 히데요시는 팔불출(八不出)에 가까웠다.

 “쓸데없는 걱정일세”

 그 총명함에 있어서는 고금무쌍(古今無雙)이라 일컬어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단점이 있었다. 자식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하지만, 교육은 원래 쓸데없는 걱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히데요시는 교육을 받지 않고 어른이 되었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결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문은 갑자기 성립된 귀족(貴族)인 만큼 다른 다이묘우[大名]나 하다못해 촌구석의 조그만 호족 가문에도 반드시 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는 자녀교육이라는 것을
가풍(家風)으로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관위를 승진시켜주는 것 정도였다.
 히데아키가 15살이 되는 해인 1591년에는 산기[参議]에 임명되었는데,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는 그대로 겸하게 하였다.
 16살인 1592년에는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되어 정삼위(正三位)로 승진하였다. 이리하여 세간에서는,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이라 불렀다. 단 히데아키 승진의 속도는 이 곤츄우나곤에서 우선 멈추게 된다. 왜냐면 이 해에 형 뻘인 히데츠구가 갑자기
약진(躍進). 관백에 임명되어서는 명실공히 천하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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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7.12.15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왜 서약서에 히데아키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이때는 히데아키의 성이 도요토미 였을려나?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15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을 읽어보니, 히데아키가 1577년에 태어난건가요? 위키페디아나 여타 자료처럼 1582년에 태어난건가요..(음..)

    도요토미가의 자식교육이 캐실패(;)였다는건 공감합니다. 오히려 거의 손을 못댄 히데요리쪽이 가장 괜찮아 보일 정도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7 0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이 당시는 아직 토요토미 성이었죠.

    다메엣찌님//그렇습니다... 본문은 천정 5년이라고 나왔지만, 1582로 고쳤습니다. 문맥상(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함 즈음...)으로 보아도(다른 책들을 보아도 천정 10년 1582년생이라고 하더군요)

    중간에 1584 -&gt; 1585로 고칩니다... 근데 그럼 두살인데 열두살... 책이 잘 못 된것인지... 시바 선생이 착각했는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1.31 04: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가 조정의 권한으로 히데요리를 교토로상경하라고 명했을때,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 가토,아사노 2명에게 호위를 하도록하여 상경한것을 보고, &quot;히데요리는 어지리만 얕잡아볼수 없는 인물이다, 살려놓으면 나중에 큰 후환이 될 것이다.&quot;라고도 말한적이 있지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1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이 글에 어째서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만남에 대한 덧글을 다셨는지 조금 의문이군요...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 언급하셔서 인가요?)

    미묘하게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군요.

    조정의 권한이라기 보다는 손녀 사위 얼굴 함 보자는 의미였고, 토요토미 가문은 쿠게(公家)에서도 쿠교우(公卿)인지라 텐노우(天皇)가 바뀌는데 참석 안 할 수가 없었죠.

    상경하면 죽인다뇨? 대의명분 없이 자기 주인격인 히데요리를 죽이면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할려구...이에야스도 그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서 호우코우(方&amp;#24195;)사(寺) 종명 사건을 만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대의명분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있더라도 상전을 이유없이 죽였다간 후에 당장은 자기한테 머리를 숙이고 있는 토자마(外&amp;#27096;)들에게 나중에 들고 일어날 명분을 줄 수 있으니까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를 언급하셔서 몇자 더 적어보았구요.
    이에야스가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 히데요리의 장인어른의 신분이였지만, 정략결혼에 의한것이지요. 도요토미가가 공경가문인것 맞는말이지만 그 당시 시국으로보아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이미 세키가하라 전투후 도요토미가를 표면적으로 받느는 가문은 거의 없다시피했지요. 히데요리가 교토로 상경하면 이에야스가 표면적으로 죽이지않고 암살을 할것이기때문이죠. 외냐하면 새로운 천황이 등극하는시기에 히데요리가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는 데리고 교토로 상경할수 없으니, 히데요리는 십중팔구 이에야스의 의지에따라 교토로상경하면 암살될것이란걸 알고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경하지않는다면 반역으로 몰아 도요토미가를 공격하려고 했던것이죠.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를 멸할 명분은 찾고있었으므로.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기때문에 히데요리가 얻은 방법이 자신에게 교토로 상경할것을 설득하러온 카토,아사노에게 호위를 하도록 하죠. 이렇게되면 이에야스에게있어서는 히데요리는 결국 교토에 상경하였으니 반역으로 몰아넣을수도 없었고, 암살을하자니 가토와 아사노까지 죽이면 도요토미계 출신장수들이 반발할것임은 분명했으니 말이죠. 그래서 히데요리는 얕볼수없는 자라고 평하기도했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코사종명사건은 상황이 좀 틀립니다. 호코사종명사건은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서 칩거할때의 얘기죠.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 틀어박혀있는동안은 암살은 꿈도 못꾸는것이니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암살에 대의명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암살을해도 대명들은 심증만 있을뿐잊 물증이 없을테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리에게 오사카성 밖은 결코 안전할수 없는곳이였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글 감사합니다.

    미묘하게 서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전 chaosrinor님께서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라고 언급하시길레 그에 대한 반론으로 상경한다고 죽이면 대의명분이 없기에 나중에 호오코우사 종명 사건을 이으켜 대의명분을 얻었다고 말씀 드린 것이고....

    chaosrinor님께서 오늘 달아주신 말씀은 저와 비슷한 의견이시군요.
    (표면적으로 죽이지 않고 암살을 한다는 말씀은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겠고, 상경하면 암살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다르지만...)

    상경하면 부하인 이에야스의 명령에 주가인 토요토미 가문이 부하에게 굴복한 꼴이 되고,
    상경을 거부하면 실질적인 힘(무가의 톱인 쇼우군 가문)을 가진 이에야스가 대의명분으로 삼을 것이고..

    때문에 그 중간책을 사용해서, 손녀 사위의 얼굴을 본다는 말이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끝나지 않으셨었군요...

    자꾸 반역 반역 하시는데, 반역이란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가는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부하가문은 토쿠가와.
    하지만 토쿠가와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이이다이쇼우군 이라는 무가 정치를 만들어서 복잡하게 된 것입니다.

    호코우사 종명 사건은 왜 일어났을 까요?
    토요토미 가문이 가지고 있던 재산(즉 '힘')을 소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쿄우토에서 만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토요토미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쟁이란 그리 쉽게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이에야스가 그렇다고는 전 생각할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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