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安芸]의 산골에 있던 미력(微力)한 소영주(小領主)에서 출발하여, 실로 10개 쿠니[]에 걸친 거대 다이묘우[大名]로 성장한 모우리 모토나리. 그는 자신의 생애를 시종일관 철저한 모략가(謀略家)로 살았다. 그의 고독한 성장 과정이 원인이었다.

 1558 8월에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5살에 어머니와 이별하고 10살에 아버지와 사별(死別)하였다. 오로지 형 오키모토[興元]만을 의지하였지만 이 형도 내가 19살 때 죽어버렸다. 이후로는 부모형제도 없고 백부, 조카 등 친척 중에서도 도와주는 친척이 없어, 단지 혼자서 오늘날까지 어떻게든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고 술회하였다.


 모토나리는 모우리 씨[毛利氏]의 본거지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당주 히로모토[弘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살 때까지 코오리야마의 서쪽에 있는 타지히[多治比] 루가케 성[猿掛城]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모우리 가문의 부하 격인 이노우에[井上] 일족의 힘이 강하여 그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그대신 모토나리의 땅을 횡령 당하거나 하였다. 모토나리는 이때부터 20여 년간, 이노우에 씨()의 세력 아래서 인종의 나날을 보내었다. 이런 인종의 나날 속에서 옆 군()의 호족 킷카와 쿠니츠네[吉川 国経]의 딸 묘우큐우[妙玖]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1523년에는 장남 타카모토를 얻었다. 모토나리는 27살이 되어 있었다. 이해의 여름이 끝날 즈음 모토나리의 환경이 급변하였다.


 모우리 종가(宗家)인 형 오키모토가 24살에 죽고(1516), 그 뒤를 이은 오키모토의 아들 코우쇼우마루[幸松丸]도 불과 9살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후임 자리를 두고 내란이 일어났다.

 모토나리와 배다른 동생인 모토츠나[元綱[각주:1]]를 축으로 가문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 내란 때 이노우에 일족의 도움으로 모토나리가 상속자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이때 라이벌 모토츠나를 죽였다[각주:2].

 조연에서 단번에 주연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된 모토나리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옹립해 준 이노우에 일족에게는 또다시 갚아야 할 빚를 만들고 말았다. 때문에 모토나리는 여전히 긴 인종의 세월을 이어가야 했다.


 그의 고독하고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이때 배양된 것이다. 후에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 가문이 잘 되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있을지언정, 이 나라에는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모토나리의 소위 네거티브한 면인데, 포지티브한 면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13살 때였다. 가신과 함께 이츠쿠시마 신사[(神社]에 참배한 후 모토나리는 가신에게 무엇을 빌었는지를 물었다. 가신은 우리 주군이 츄우고쿠[国]의 큰 영주가 되게 해달라 빌었다고 했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몽둥이만큼 빌어도 바늘 정도밖에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빌 거라면 어째서 천하를 잡게 해달라고 빌지 않은 것이냐?”

 기개와 도량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이다[각주:3].


 또한 17살 때 중국 명()나라 사람들이 모우리 가문에 들렸는데, 그 일행 중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모토나리의 얼굴을 살펴보고서는,

 너는 고조, 태종의 관상을 겸비하고 있다. 장래 반드시 위세를 사방에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모토나리가 당시 직면하고 있던 츄우고쿠[国]의 정세를 말하자면, 산인[山陰] 지방에는 아마고 씨[尼子氏]가 패권을 쥐고 있었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에 걸쳐서는 오오우치 씨[氏]가 세력을 뻗고 있었다. 두 거대 세력에 끼인 소영주(小領主) 모우리 가문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고도의 외교적 수완이 필요했다.


 1531.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4]와 의형제를 맺고 있었지만, 1537년에 결별하고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에게 적자인 타카모토를 인질로 받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1541년 가을.

 아마고 씨()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모우리의 본거지 코오리야마[郡山]로 진격해 왔을 때 오오우치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에게 1만의 군세를 주어 구원하도록 하였다. 아마고 군세는 이때 큰 눈을 만나 보급선이 끊겨 참패를 당하였다. 오오우치 군세도 아마고 군세를 이즈모[出雲]까지 깊숙이 추격하였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 양 세력의 약체화는 모우리 가문이 바라던 바였다. 모토나리는 곧바로 아키 슈고[安芸守護] 타케다 씨[武田氏]를 멸하여 아키[安芸]에 군림한 것이다. 또한 이 지배 체제를 강고히 하기 위해서 모토나리는 세토 내해[瀬戸內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과 산인[山陰]국경에 있는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모략을 이용해 탈취하여,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셋째인 타카카게[隆景], 킷카와 가문에는 둘째인 모토하루[元春]를 각 가문의 당주 자리에 앉혔다.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어디까지나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 세상에서는 이를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5]'이라고 불렀다.


 양 가문을 손에 넣자, 모토나리는 지금이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중신 이노우에 일족의 숙청이었다. 20년간 모토나리는 그들의 전횡(專橫)을 참아왔던 것이다. 그 숙청은 철저의 극에 달하여 일족의 장로 모토카네[元兼] 이하 30명 이상을 죽였다. 이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가문 내의 공포는 굉장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강력한 권력을 일거에 장악하여 가신들에게 복종을 맹세시켰던 것이다.


 이 결집된 힘을 이용하여 모우리 가문은 유명한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에 돌입하게 된다.

 츄우고쿠[国]의 명문 오오우치 가문[内家]을 격퇴하여 더욱 크게 웅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오오우치 가문은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 요시타카를 자살로 몰아 넣고, 그 자리에 요시나가[義長]를 앉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략전에서 모토나리는 진가를 발휘하였다.

 오오우치 씨()의 거점인 야마구치[山口]에 모우리의 밀정들을 잠입시켰다. 모토나리는 그들에게 스에[]의 부하인 용장() 에라 후사히데[江良 房栄]가 모우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유포시키게 하였다. 작은 의혹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결국 하루카타도 그런 소문을 믿고 후사히데를 죽여버린 것이다.


 1555년 봄.

 모토나리는 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츠쿠시마 섬[島]에 미야오 성[宮尾城]을 쌓았다. 적의 대군을 작은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성을 쌓으려고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완성할 때까지 스에[陶] 군이 쳐들어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적측에 새어 나갈 수 있도록 모토나리를 손을 써 두었다. 하루카타가 조금 찔러보자 이외로 세찬 반응이 일어났다. 모우리의 숙장(宿) 중의 한 사람이 내응을 약속해 온 것이다.

 모든 것은 모토나리가 놓은 덫이었다.

 결국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의 유인에 넘어왔다. 하루카타는 2만의 대군을 500척의 군선에 태워서는 이츠쿠시마에 상륙시킨 후 토우노오카[岡]에 본진을 두고서는, 모우리의 미야오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555 9 21일이었다.

 30일 아침, 모우리 군은 은밀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비바람 세찬 날,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100척의 배로 이츠쿠시마[]로 건너 가서는 기습한 것이다.

 스에 군 2만은 4천의 모우리 군에 참패. 총대장 하루카타는 겨우 도망쳤지만 결국 섬의 서안 오오에[大江]의 바위 그늘에서 배를 갈랐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 전투>

 이후 모토나리는 여세를 몰아 빙고[備後], 아키[安芸],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를 손안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죽을 때까지 현역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는데, 자신이 죽은 후의 것까지 절치부심하였다.

 3명의 아들에 대한 교훈장[三子],

 '너희 셋 중에 조금이라도 사이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셋 다 멸망 당한다고 생각할 것'

 이라 써서 일치단결의 중요성을 말했으며, 세 아들에게서 서약서까지 받아 두었다.

 2차 대전 전의 일본 국정교과서에 실렸던 [세 대의 화살 교훈]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 대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가 있지만, 세 대를 합치면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깨닫게 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맹세케 하였다 한다. 이것은 위의 교훈장을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각주:6]

 

 1570, 손자인 테루모토[輝元]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를 공략하러 보낸 모토나리는 그 보고를 듣지 못하고 다음 해 파란만장했던 생애의 막을 내렸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497년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지토우[地頭]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에 속하였고, 후에 오오우치[内] 휘하가 된다. 킷카와-코바야카와 가문을 손에 넣은 다음부터 차츰 세력을 넓혀, 스에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패권을 확립. 후에 츄우고쿠[国] 10개 쿠니[国]와 부젠[豊前]이요[伊予]의 일부를 영유하는 거대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71 6 14일 죽었다. 75.

  1. 가지고 있던 영지(領地)가 아이오우[相合]에 있었기에 풀네임은 ‘아이오우 모토츠나[相合 元綱]’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때 모토츠나는 아마고[尼子]의 푸쉬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과 멀어지게 된다. [본문으로]
  3. 여담으로 나이를 먹고 죽기 전에는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아무리 영화를 자랑하더라도,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쇠하게 되어 자손까지 그 영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보다는 일본을 다섯으로 나눠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잘 보전하여 자자손손까지 이 위세를 남겨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小早'川']든 킷카와[吉'川']든 성에 내 천川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 [본문으로]
  6. 이 이야기가 이어져 예전 노정윤이 뛰었던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サンフレッチェ広島]의 ‘산프레체’는, 일본 말로 3을 의미하는 ‘산(サン)’과 화살들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체(frecce)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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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3.27 13: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쓰면서 기억나는거 2가지.
    첫 번째는 모리 료센을 료카와로 착각해서 포스트를 근1년동안 방치하고 있었던거 -_-;; 하지만 전 러시아어 공부하니까 패스. 일본어 히라가나정도 밖에 못읽으니까 ㅎㅎ

    두 번째는 뜨뜻한 방안에서 귤이나 까먹으면서 노신들하고 장기나 둘나이에 다카모토가 제발 죽을때가지 전쟁터좀 뛰어주세요 해서 바리바리 뛰어다녔던 모토나리가 항상 불쌍하다고 생각했던거. 사실 모토나리도 은근히 계속 현역으로 활동하고 싶었겠지만 이렇게나 늙은 나이까지 빡시게 뛰어다닐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7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검색해보니 [료우카와]...라고 읽을 수도 있다고도 하네요.
    (부럽습니다. 러시아어!!)

    그러게 말입니다. 전쟁터라는 곳은 정말 가혹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총대장이라도 자는 곳은 방 안의 이불 위만 못할 것이며 식사, 배설물 등의 처리 등등을 생각하면 죽기 전까지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던 모토나리는 불쌍하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3.27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석에 달린 교훈장을 보니, 병X 히데아키 때문에 모리 료센에서 탈락한 고바야카와 가문이 어째 불쌍하게 여겨지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3.28 0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좋은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히로시마 구단의 이름에 그런 뜻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
    근데.. 막부 성립 이후 킷카와, 코마야카와 가문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9 1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대신 종가를 지킬 수 있었으니 그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았을지...

    맹꽁서당님//처음 댓글 남겨주신 것 같군요. 환영 &amp; 반갑습니다. ^^

    킷카와 가문은 이와쿠니(岩&amp;#22269;)번을 성립시켰지만, 막부에게는 대명 취급을 받았지만, 정작 쵸우슈우 모리번에게서는 대명 급으로 대우를 안 했다고 하더군요. 세키가하라와 오오사카 농성전(사노 도우카 사건) 등으로 인해서 종가와는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다고 하더군요.

    코바야카와 가문은 아시겠지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계승하였지만 세키가하라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아키가 죽는 바람에 멸문 취급당했습니다. 에도 막부가 멸망한 뒤 메이지 유신기에 당주의 아들 중 하나가 코바야카와 성을 받아 화족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01 2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시도 타카이에가 누구이기에 딸내미 인생이 안됐다고 얘기 한걸까요..

    13조까지 진지함 일관이다가 14조에 노인 특유의 골계미가 느껴지는 마무리라니.. 역시 꾀돌이 영감다운 맛이 있다랄까요. 잘 봤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4.04 13: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국으로 시작했던 오다씨나, 가신한테 눌려있던 모오리씨나 성공했으니 다행이지, 안그랬으면 정말 안습인채로 마무리할 뻔 했지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4 2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분위기로 보아서는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가문에게 시집을 보낸 것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인가...싶지만..솔직히 모르겠네요.
    여담으로 시시도 가문은 막말까지도 변함없이 모우리 가문에서 힘이 있었는지, 4개국 연합함대에 패배한 쵸우슈우 번의 사자로써 하찮은 가문 출신(150석)인 타카스기 신사쿠(高杉 晋作)는 급히 가로인 시시도 비젠노카미(&amp;#23437;&amp;#25144; 備前守)의 양자가 되어 [시시도 교우마(&amp;#23437;&amp;#25144; 刑馬)]라는 이름을 얻어 전후 처리를 맡았다고 하더군요.

    shotokanfist님//또한 그만큼 성공했기에 이렇게 역사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9. 2010.11.02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02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

      출처만 밝혀주신다면 좋습니다만... 이 전국무장 100화 - 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닌 일화들이 많이 실린 책이다 보니 주의를 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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