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회는 소빙하기에 따른 한랭화가 진행된 기근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과연 ‘금융’이라는 것이 발행할 수 있었을까? 우선 농민의 벼농사 경제 실태를 살펴 보자.
 농민들은 벼농사를 하기 위해 봄에 볍씨를 빌려 수확을 거둔 가을에 쌀로 반환하는 행위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을
출거(出擧)라고 한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쌀’이라는 농작물은 마법과 같은 작물이다. 우선 쌀의 생산력은 모든 농작물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쌀알 하나가 수확기에는 100~300알 정도의 낟알을 가진 이삭으로 자란다. 단순계산으로 생산효율은 100배에서 300배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몇 년간은 보관도 할 수 있다. 창고에 넣어두면 비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볍씨의 이자율은 몇 퍼센트였을까?
 1459년 11월 2일에 제정된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室町幕府法追加法]' 260조에는 이자율이 정해져 있다.

전당물의 이자율에 대해. 옷…(중략)등은 5부이자로 한다. 쟁반, 향합, 차제구(茶諸具)…(중략) 미곡(米穀) 등은 6부이자로 할 것
 5부이자이기에 월리 5%에 연리 60%, 6부이자는 월리6%에 연리 72%이다. 더구나 중세의 관례로 이자는 원본의 2배까지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어느 농민이 1알의 볍씨를 빌려 100알의 수확을 거두었다고 하자. 쌀은 6부이자이기에 이자율은 72%. 따라서 2알로 갚는다. 5% 정도의 세(
조용조)로 5알. 수확량 중 경작한 농민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93알.
 간단히 변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 농민의 감각이다. 이런 감각으로 말하면 연리 50%나 100%라고 하여도 꼭 폭리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금융업자를 ‘도소우[土倉]’라고 부른 것은 원래 쌀을 빌려주었던 것이 발단이기 때문이다. 그 쌀을 바탕으로 ‘쌀 금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발달한 것이다. 그러다가 보다 보존이 용이한 화폐와 병용되어 갔다.
 물론 ‘도소우’에는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도 있었다. 여기에 작은 도소우에 빌려주는 큰 도소우와 같은 존재가 생기는 것도 필연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쌀을 비축할 수 있는 신사(神社), 사원(寺院)도 금융활동을 행하였다. 여기에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로 이어지는 금융의 원천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세의 농촌사회에 타격을 주는 소빙하기가 찾아온다. 끊이지 않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내일의 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궁핍한 농민들은 볍씨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쌀알을 먹어버리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무리 생산효율이 높은 농작물이라도 심지 않으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제로는 아무리 큰 수를 곱해도 제로인 것이다.

 더욱이 기근의 만성화로 화폐보다 식량 쪽이 귀중해졌다. 『잡병 이야기[雑兵物語]』’에 “갑옷을 팔아서도 주먹밥 하나와 교환할 것”이라는 서민의 감각은 당시의 농민이 가진 숨길 수 없는 심경이 아닐까?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어도 먹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기근 때는 아무리 돈을 주어도 쌀을 팔지 않았다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도소우’에는 쌀이 아니라 ‘화폐’가 쌓여 갔다. 그래서 도소우도 자기방위라고 할 수 있는 ‘폭주’를 시작한다. 앞서 본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에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여러 도소우 이자율에 대해서. 근년 마구 방치된 채인 것에 안타까운 일이다. 고리에 대해서는 도소우 조합끼리 이자율을 정하여 엄밀히 지킬 것
 중세의 임차계약은 개별계약이었다. 즉 도소우들은 막부의 이자제한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근, 가뭄이 들 때마다 이자는 크게 오르고 내렸다. 하지만 이자의 근본이 되는 농작물(실물경제)의 생산효율이 오르지 않았는데도 이자가 오르거나 하면 갚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도소우 들은 ‘차용증 매매’라는 파생상품을 개발하였다. ‘오케하자마 전기’의 작품 속에서도 나오는데 ‘차용증’ 그 자체를 매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용증은 매매될 때마다 가격이 올라갔다. 매매될 때마다 논밭이나 장원(荘園), 조합의 전매권이 더해졌다. 그렇게 토지나 전매권을 손에 넣어 부(富)를 축적해 간 것이다. 물론 그러다보니 궁핍한 농민들이 세상에 넘치게 되었다.

 그래서 행해진 것이 당시의 개인회생제도라 할 수 있는 ‘덕정령(徳政令)’이다.
 ‘채무면제=덕정력’은 선정(善政)인 듯이 쓰이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확실히 채무로 인하여 가난해진 농민이 이 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은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빚이 늘기만 하는 불량채무자, 지급불능자를 많이 짊어지고 있었던 ‘도소우’는 아무런 부(富)도 창출하지 못했다. 빚을 갚다 극도로 가난해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경작하는 인간이 없어진 논밭뿐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 일단 채무자에게서 채무를 떼어주고 다시 일할 상태로 만들어 일하게 만드는 편이 경제효율로 따지면 더 좋은 것이다. 덕정령이라는 것을 그러한 의미로 다시 살펴보면, 오히려 채권자 즉 도소우[土倉]나 유력무사, 신사(神社), 사원(寺院)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센고쿠 시대[戦国時代]가 끝나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서도 1622년의 법령에는, “이자는 서로 합의하에 정할 것”이라고 하여 당사자들간에 맘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1692년에 100문(文)당 월리 3부이자, 연리 3할7분5리까지 이자의 상한을 두었다(質屋作法御定書之事). 센고쿠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자는 제한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雄一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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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kyup 2010.09.23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번역글, 또 잘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쌀은 단순한 식량일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를 좌지우지 했던, 어떻게 보면 무기와도 같았네요.
    앞으로도 좋은글 자주 부탁드립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24 0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뭐든 무기가 되는 것 같더군요. 어디까지나 힘이 있을 때의 이야깁니다만..

      잊지 않고 찾아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

十.

 이에야스(家康)도 요도도노(淀殿)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그녀가 성질이라도 부려 히데요리(秀)를 내세워서는 또다시 옛 토요토미(豊臣)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규합이라도 한다면 곧바로 천하에 난이 일어나 이에야스가 어렵사리 손에 넣은 천하가 주먹에서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ヶ原)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일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등은 이에야스에게 각각 50만석 전후의 봉토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히데요리의 가신이기도 하다는 이중적인 입장을 지키며 틈만 나면 오오사카성(大坂城 )에 가 히데요리를 배알하고 인사를 올렸다. 만약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가혹하게 대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에도(江)에 있으면서도 토요토미 가문의 필두 대로라는 자격으로 천하에 임했다. 세키가하라부터 2년 뒤인 1602년 2월 14일에 재차 오오사카에 나타났고, 다음 해 3월 14일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평소 문안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이제서야 신년인사를 올리옵니다"

 라고 말하였다. 3월 중순이 되어서야 신년인사를 하는 것도 묘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가신으로써의 예를 취하였고 취함에 따라 카토우 키요마사 등 옛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감정을 진정시켰다. 다음 해 1603년의 배알을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오오사카에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제서야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한때 일본을 지배한 강성했던 이름을 잊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오오사카 성 밑도 쇠퇴하였고 대신해서 에도가 번창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도 에도에 저택을 세워서는 자신들의 처자식을 자발적으로 에도에서 살게 하는 식으로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바쳤다. 카토우 키요마사 조차 – 라기보다 오히려 키요마사가 앞장서 미야케자카(三宅坂) 고개 위에 집터[각주:1]를 달라고 해서는 황금을 여기저기 처바른 저택을 만들어 처와 자식을 살게 하였다. 이제 에도 정권에 거역하지 않겠다는 증거를 이에야스와 천하에 공언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키요마사를 따라 다른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들도 그리하였다. 이에야스는,
 - 이제 오오사카에 새해 인사할 필요가 없겠군
 하고 생각하여 오오사카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히데요리는 힘을 상실했다.
 하지만 관위만큼은 남다르게 승진했다. 승진하는 것이 당연했다. 토요토미 가문이 가진 봉토의 규모야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다이묘우와 다른 점은 부친 히데요시나 히데요리에게는 형 뻘인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츠구(秀次)가 칸파쿠(
白)에 임명 받은 것처럼 귀족(公家)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런 점은 다섯 셋케(五家-섭정, 칸파쿠가 될 수 있는 문벌)인 코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쿠죠우(九), 니죠우(二), 이치죠우(一条)와 다를 바 없었다. 히데요리는 소년이었지만 1601년에 종이위(從二位) 다이나곤(大納言)에 임명 받았으며, 1603년에 나이다이진(内大臣)이 되었다. 10살의 어린 나이다이진은 과거를 찾아보아도 드물 것이다.
 나이다이진 정도 되면 조정 백관의 총수라고 말해도 좋았다. 이 때문에 쿄우토(京都) 조정은 오오사카에 마땅한 예를 치렀다. 신년이라도 되면 친왕(親王), 상급귀족(公卿) 등이 오오사카로 대거 내려와, 성내에 있는 건물에서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이 토요토미 성(姓) 2대째인 귀인(貴人)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런 점에서만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만이 신년인사 하러 오는 것을 그만둔 이유, 더불어 상기와 같은 이유가 있음에도 그만 둔 더 큰 이유는 - 이 해에 이에야스가 조정에 주청하여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에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은 아주 옛날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
[각주: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각주:3]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겐지(源氏)가 아니면 임명 받지 못한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각주:4]도 겐지였기에 임명되었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도 토키 겐지(土岐 源氏)를 칭하였기에 임명 받았다[각주:5].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 시대에 본성(本姓)을 공개적으로 칭하지 않았으며 한때 헤이시(平氏)를 칭했기 때문에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주청하여 조정이 만들어 준 성(姓)을 받는(朝臣) 형식으로 토요토미(豊臣)를 하사 받아서는 귀족(公家)이 되었고 칸파쿠()라는 자격으로 일본을 통치하였다. 이에야스도 처음엔 겐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信長)와 동맹을 맺고 있던 시절에 조정에 청하여 겐지 공칭을 허락 받았다[각주:6]. 다행스럽게도 이로 인해 쇼우군 가문(軍家)에 임명되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의 최대 특전은 바쿠후(幕府)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쟁 후 이어지고 있던 에도의 비합법적 정부를 바쿠후 창설로 인해 정당화 할 수 있었으며 그런 합법성을 갖고 다이묘우를 거느리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형식상이나마 머리를 굽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지 이미 3년이 지난 상태였다.

 이 소식은 곧바로 오오사카에 전해져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을 놀라게 하였다.

 "가신 주제에 바쿠후를 연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바쿠후를 연 이상 이젠 정권을 토요토미 가문에게 반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아닌가?
 이때도 요도도노는 카타기리 카츠모토(
片桐 且元)를 불러 마치 카츠모토가 이에야스인 마냥 힐문했다.

 "자네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하고 요도도노는 숨을 거칠게 하며 책망하였다. 카츠모토는 즉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후 자기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남몰래 바라고 있던 것을 흡사 이에야스의 머리 속 생각인양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쇼우군() 직은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그 후에는 히데요리님께 물려주실 생각이옵니다"

 이 시기 에도에서 자기 영지(領地)인 히로시마(広島)로 돌아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오오사카에 들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배알하여 비슷한 말을 하였다.

 "잠시 동안만 참으시면 되옵니다"

 라는 것이었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는 1543년 호랑이띠로 이미 노령이다. 그와 반대로 나이다이진(内大事=히데요리)님은 어린 나무가 쭉쭉 자라듯이 커가며, 커갈수록 이에야스가 죽음에 가까워진다. 이에야스가 죽으면 졸자(拙者)를 시작으로 한 천하의 제후들은 더 이상 토쿠가와 가문에 세울 의리가 없어진다. 토쿠가와 가문 자체도 이에야스를 잃으면 지금과 같은 강한 전투력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옵니다. 초조해하지 말고 난을 일으킬 생각하는 일 없이 일단 에도의 지시를 따르시길. 언젠가 때가 오면 아무리 토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반환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활과 칼을 들고 토요토미 가문으로 되찾아 오겠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그리 하겠사옵니다"

 하고 마사노리는 힘주어 말했다.

 이 너무도 듬직한 말에는 안심이 되는 한편 아무리 요도도노라도 걱정도 되었다.

 "사에몬다유우(左衛門太夫=마사노리)님. 그러한 말씀하셔서 행여라도 에도(江戸)로 그 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하고 이 귀부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남을 걱정하였다. 마사노리는 그것만으로도 감동하여 눈물을 머금고,

 "고맙사옵니다"

 라며 목소리를 적셨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쳐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듣더라도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원래 에도님(江戸殿=이에야스)에게 있어 저는 은인이옵니다. 저 세키가하라 때 제가 미츠나리(三成)를 미워한 나머지 에도님에게 가담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제후들은 앞다투어 에도님을 따른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했다. 선대 히데요시와 친척인 자[각주:7]로, 그 때문에 토요토미 다이묘우 중에서는 키요마사와 더불어 후다이(譜代)[각주:8] 필두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세키가하라 즈음에는 그런 마사노리조차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였기에 다른 다이묘우들도 거리낌없이 오오사카 측을 물리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시기의 이에야스에게 있어 마사노리의 정략적 가치는 그만큼 거대한 것으로 그러한 자신의 가치를 마사노리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마사노리는 이에야스 측의 선봉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서 용맹한 활약을 벌여 서군을 무너뜨렸다. 어쨌든 마사노리가 이에야스에게 기여한 것은 누구보다도 컸다. 거기에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이전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에야스 편에 서라고 권유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에게 마사노리는,

 "에도님을 돕기는 하겠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츠나리(三成)에 대한 원한 때문일세. 이 전투에서 에도님이 이긴 후 결코 히데요리님의 신상에 지장이 없도록 에도님의 입으로 확약을 듣고 싶네"

 라고 말하여 이에야스는 나가마사를 통하여,

 "그러한 일은 없다"

 라는 뜻의 말을 받았다. 그런 후쿠시마 사에몬다유우이기에 가령 이 말이 칸토우(関東)에 전해지더라도 이에야스는 퉁퉁거리지도 못할 터이다 – 라고 말하였다. 요도도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러나 에도의 이에야스는 마사노리 정도의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가볍게 쇼우군 직을 사퇴한 것이다. 취임한지 2년 후인 1605년의 4월이었다. 그런데 그 사임한 그날 조정에 주청하여 쇼우군 직을 적자 히데타다(
秀忠)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지배권을 세습시켰다. 이 소식만큼이나 오오사카를 낙담시키고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단을 분개시킨 것은 없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쇼우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줌으로써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이때 히데요리는 13살로 관위는 우다이진(右大臣)에 임명된 상태였다. 앞으로 승진한다면 칸파쿠밖에 없었으며 칸파쿠가 되면 죽은 아비 히데요시의 선례를 따라 한편으론 백관을 거느리고 조정의 중심에 서며 한편으론 이백여 제후들을 이끌며 천하의 정치를 총괄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 이래 무가(武家)의 통솔자로 여겨지는 세이이타이쇼우군과 당연하게도 충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 현재 일본의 헌정기념관. '미야케자카 고개(三宅坂)'라는 이름은 시간이 흘러 17세기 중반에 미야케 가문(三宅家) 참근교대시에 이용하는 에도저택이 생기면서부터 생긴 이름으로 당시는 ...뭐라고 불렸는지 모르겠음. 데헤~ [본문으로]
  2. 미나모노토 요리토모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5.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미츠히데가 지원을 호소하며 호소카와 유우사이에게 보낸 편지(明智光秀公家譜覚書)에 나타나는 말로 종삼위(従三位)와 쇼우군에 임명받았다고 주장했다. 혼노우지의 변에 있어서의 조정흑막설의 증거로 많이 사용되는 떡밥이지만 개인적으로 당시까지 미츠히데의 관위인 종오위(従五位) 휴우가노카미(日向守)에서 무가로써는 하나의 허들인 사위(四位)를 뛰어넘어 단번에 종삼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빙성은 없다고 생각한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본문으로]
  6. 1566년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그때까지 쓰던 마츠다이라(松平)를 토쿠가와(徳川)로 바꾸면서. 마츠다이라 자체의 본성은 가모(賀茂)인 듯 싶지만 이때부터 본성은 미나모토(源)라고 우겼다. [본문으로]
  7. 마사노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숙모. [본문으로]
  8. 대대로 그 가문을 섬기는 가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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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13 18: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이번에도 시달리는군요(...)뭐 아무리 쪼고 볶은들 뭐 히데요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다이진 위로는 못올라가겠습니다만(ㅎㅎ;)


    히데요리에 대해 또 이글을 읽어 관심이 생겨 위키를 찾아보니, 히데요리의 남자아이들 중에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당한 쿠니마츠 말고도, 求猒上人라는 사람이 겐로쿠 초두에 80세로 죽었을때 낙성시에 3세였던 차남이었다는 설이 있다고 하더군요. 뭐 위키에도 이 대목 말고는 안나오는이니 누구인지는 잘 알수는 없지만;


    P.S. 전혀 관계 없는 사족입니다만 네이버블로그의 머리에 요구르트 핼멧을 쓴 쥐X이가 아주 인상깊었습니다(허허헛)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 보는 이름인지라 검색해 보니...

      [일본의 슬기로운 중들(浄土本朝高僧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

      태어날 때부터 현명하고 설법에도 뛰어난 '큐우엔(求猒)'이라는 고승(上人)이 말년에 후시미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겐로쿠 초반 80세의 나이로 죽었다.

      임종의 자리에서 제자에게 자신은 히데요리의 둘째 아들로 낙성시 3살이었다는 것, 에도에 숨어산 후 조우죠우 사(増上寺 - 에도에 있는 절)에서 학승이 되었다고 고백.

      중년이 되어서 간 오오사카 성의 거대함과 후시미 성터 쓸쓸함을 보고 세태의 흐름에 개탄도 하였지만 말년에는 '천하는 한 사람만의 천하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니들도 망념과 집착을 버리고 세태에 구애 받는 일 없도록 하라'

      ps;일본에 관한 것을 검색하실 때는 야후저팬에서도 꼭 검색해 보시길...일본에 관해서만이라면 구글보단 오히려 더 좋은 검색엔진입죠.

  2. 맹꽁이서당 2009.03.13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쿠시마도 말은 저렇게 했겠지만.. 결국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 측으로 참전한 다이묘는 없었겠죠?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 후쿠시마 편을 찾아보니 1619년까지 살아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신경쓰이는 다이묘우들는 에도성을 지키게 했습니다(에도성을 공격당할 일은 없으니 이름만 다른 억류). 그 중에는 물론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있었고, 그는 오오사카로 와 달라는 히데요리의 친서도 펼쳐 보지 않았고 사자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뭐 설사 억류당하지 않았더라도 오오사카 측에 서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만)

      여담으로...
      에도성에 남겨진 인물 중 가장 이외였던 인물은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라고 합니다. 본문에도 잠깐 언급되듯이 세키가하라에서는 거의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으며 실질 뒤에서 가장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결과가 되었으니까요. 뭐 결국 여름의 전투에는 참가하게 되지만요.

  3.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4 0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제부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이 이것과 비교적 겹치는 부분이 있군요. 언제 한 번 시바 료타로에 대해 알려주시길 부탁드려요 ^^ 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4 0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동시대의 이야기를 그리는 같은 작가의 것이다 보니 비슷할지도...참 저는 아직 그것을 읽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연이 닿으면 읽어 보고 싶군요.

      에...저같은 경우 시바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위키에 실린 거 읽는 정도? 그분의 책도 완독한 것이라곤 '타올라라 검'과 '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 "역사의 교차점에서" 뿐입죠.

  4. 카즈토요 2009.03.20 16: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시바 선생의 작품중에서도 그 방대한 사료의 토대위에 과감한 취사를 통해 극적인 내용들을 빠른 속도로 써내려가고 있어서 정말 빨리 읽히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근대를 결정짓는 극적인 사건의 원인과 전개, 연계된 인물들의 심리, 다양한 성격들의 조화와 갈등이 마치 큰 강이 흐르는 듯 속도감있게 읽혀졌습니다.
    대세앞에서 처세하는 군상들의 세세한 묘사와 여러 유명한 사건들이 주는 재미들도 솔솔하구요.

    다만... 시바 료타로 식의 역사 다루기가 조금 위험해 보일때도 있습니다. 마치 NHK사극을 보듯이 인물과 사건의 묘사가 너무나도 주관적으로 디테일하고 생생한데 이것은 독자가 해당역사에 대해 중도적 관점을 냉정하게 유지하고 있지 않다면 작가의 주관적 픽션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오류의 위험이 크다고 느끼곤 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미있는 책인가 보군요. 시바 선생의 세키가하라.
      틈나면 꼭 읽어 보겠습니다.

      그쵸...
      소설은 소설일 뿐입죠.
      이 10편을 쓰다가 이상한 것이 있어 따로 포스팅하려다 ....귀찮아서요~..못하고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20 19: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 하고 말했는데 불과 2년후에 히데타다가 넘겨 받았으니...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헐 님아...좀..." 싶겠군요(...)
    ...암튼 이번화도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선수끼리인데요..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인지...신경이 쓰이는 인물입니다. 카츠모토는..

  6. 본다충승 2009.05.06 1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구리 니 본성 가모 라며? ㄴㄴ 미나모토임... 우기면 장떙..... -_-;; 몇달 못봤더니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다시 읽고 있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4: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賀茂...는 이에야스의 선조 토쿠아미(徳阿弥)..가 오기 전의 마츠다이라(松平)의 본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이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마츠다이라고우(松平郷)라는 지역의 호족으로 마츠다이라 씨가 있었고 그곳에 떠돌이 중(遊行僧)을 하던 徳阿弥가 마츠다이라 씨의 사위로 들어가서 마츠다이라 치카우지(松平 親氏)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이옵죠.

      본문의 주석을 달 때만 해도 저는 미카와 통일 후 겐지(源氏)를 칭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요즘 새로 읽은 책(신 역사군상 12. 토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토쿠가와(徳川)란 성을 처음 칭했을 때만 해도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썼고, 후년 쇼우군(将軍)이 되고 나서야 그때부터 겐지(源氏)를 칭했다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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