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라고 하면 부인의 내조를 받은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즈토요가 아직 이에몬[猪右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던 하급무사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에 동국(東國)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馬)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오다 가문의 무사들은 누구나가 그 말을 보고 경탄하였지만 그런 만큼 비쌌기에 아무도 사질 못하였다. 카즈토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기는커녕 자신과 부인 둘의 생활조차 근근한 처지였다.
 카즈토요는 한숨을 쉬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노부나가님의 열병식 때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이를 곁에서 부인 치요[千代]가 듣고
있었다. 치요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그 말의 가격이 황금 10냥[각주:1]라는 것을 카즈토요에게 듣고서는,
 “그렇다면 이 돈으로 그 말을 사십시오”
 라고 말하며 화장대 밑에서 황금 10냥를 꺼내 카즈토요에게 주었다.
 카즈토요는 놀랐다. 지금껏 빈곤했는데 이런 큰 돈이 어디서 생긴 것이냐고 묻자 치요는,
 “이 돈은 제가 시집올 때 아버님에게 ‘평소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너의 남편에게 아주 큰일이 생겼을 때만 사용하거라’하면서 주신 돈입니다. 열병식이라면 주군 노부나가님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의 눈에 띌 좋은 기회겠지요. 어서 그 명마를 사시옵소서”
 라고 말하였다. 카즈토요는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그 말을 사러 갔다.
 
얼마 후 쿄우토[京都]에서 열병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그리고 카즈토요의 말은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노부나가도 경탄을 하여[각주:2], 이를 계기로 카즈토요는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각주:3]

 이 에피소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기술된 몇몇 사료에 실려 있기에 시대성에서 본다면 ‘좋은 부인의 모범’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여성을 이러한 유교론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치요는 센고쿠의 여성이 보여주는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정신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덧붙여 치요의 내조에 대해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카즈토요가 결혼하였을 때 카즈토요는
오우미[近江] 카라쿠니[唐国]에 400석[각주:4]영지를 얻었지만 빈곤하여 집에 도마조차 없어 치요는 되를 뒤집어 대신 사용하였다.[각주:5]
 또한 당시 카즈토요가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되어 히데요시에게 축성의 감독을 명령 받았지만, 가난하여 인부들의 야식도 대접하지 못하자 치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사 와서 카즈토요의 면목을 세웠다고 한다.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각지를 전전하였지만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용맹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1573년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토벌전 때 패주하는 아사쿠라의 군세를 추격하여 오다 군[織田軍]이 에치젠과 오우미[近江]의 국경에 있는 토네자카[刀根坂]에 이르렀다. 이때 아사쿠라 군의 후군[殿]에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이라는 활을 잘 쏘는 무장이 있어, 오다 군은 그 활 때문에 쉽사리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즈토요가 창을 꼬나쥐고 단숨에 돌격하였다.
 진에몬은 자랑하는 활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즈토요의 볼을 꿰뚫어 어금니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그대로 진에몬에게 달려들어 뒤엉켰고 아군의 도움으로 진에몬을 죽였다.

 어쨌든 카즈토요는 히데요시 아래서 순조롭게 출세하여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의 공으로 카케가와 성[掛川城] 5만석의 성주로 봉해졌다. 카즈토요가 카케가와에 봉해진 것은 칸토우[関東]에 봉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감시하며 만일의 경우가 있을 때는 이에야스를 방비하려는 히데요시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자신이 배속되어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난행을 이유로 할복을 명령 받은 다음부터는, 오히려 이에야스의 수완에 장래를 맡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카즈토요는 히데츠구 사건의 전말을 보고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을 느끼게 된 것이다.

 1600년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을 위한 이에야스의 군세 속에 카즈토요의 모습이 있었다.
 7월 24일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 이르렀을 때, 카즈토요에게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치요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오오사카 측의 봉행[奉行]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의 이름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과 자기들 편에 참가를 요청하는 편지 한 통, 거기에 카즈토요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해 주십시오, 제 몸은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이 두 통의 들어간 상자의 봉인을 뜯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다.
 사실 카즈토요는 이것과는 따로 또 한 통의 밀서를 치요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령인 타나카 마고로쿠[田中 孫六]의 삿갓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치요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카즈토요는 다 읽은 뒤 곧바로 불살랐지만, 추측하건대 편지가 담긴 상자의 봉인을 풀지 말고 그대로 이에야스에게 제출을 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려, 이미 넘어가버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한 마디[각주:6]로 ‘미츠나리 타도’가 결정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카즈토요는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상경하는 군세를 위해서 도중에 있는 제 카케가와 성을 군량과 함께 전부 바치겠습니다. 거기에 인질도 바쳐 저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각주:7]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 성을 가지고 있던 무장들도 전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카즈토요의 공은 단번에 여러 무장들 중 눈에 띄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결전 때 카즈토요는 그다지 전공이 없었음[각주:8] 에도 이에야스는,
 “카즈토요가 오야마에서 한 말이 세키가하라 승리의 초석이 되었다”
 며, 영지배분 때 일약 토사[土佐] 전부인 24만석[각주:9][각주:10]을 주었던 것이다.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1545년 오와리[尾張] 출생. 1560년 미노[美濃] 마키무라 성[牧村城]의 성주 마키무라 마사토모[牧村 政倫], 이어서 오우미[近江] 세타 성[勢多城]의 성주인 야마오카 카게타카[山岡 景隆]를 섬겼다고 한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종군하여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5000석에 봉해지고 1년 후 2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카케가와[掛川] 5만석에서 토사[土佐] 24만석이 주어졌다. 1605년 61세로 죽었다.

  1. 당시 보통 말은 1냥, 좋은 말은 5냥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노부나가가 경탄한 것은 말 때문이 아니다. 노부나가는 카즈토요가 치요가 건네 준 돈으로 말을 산 것을 듣고 말하길 “동국 제일(東国第一)이라는 말을 상인이, 천하에 오다 가문만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도 먼 내 영지까지 끌고 와서 팔려 했는데도 아무도 사지 않았다면 안타까운 일이며 이는 노부나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그러던 때 오랫동안 낭인이었다는 카즈토요가 가난했음에도 말을 샀다. 무사의 마음가짐은 이래야 함이다.”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당시 열병식이 열린 시기는 서력 1581년. 당시 카즈토요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나 츄우고쿠[中国] 등에서의 활약으로 최대 2700석의 신분이었다. 당시 황금 10냥으로 대략 쌀을 140석 정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치요하고 카즈토요가 과소비하지 않는 한 살 수 있었단 이야기. 무엇보다 1581년 열병식 때 히데요시와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 즉 카즈토요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에 바빠 참가를 아예 못하였고, 노부나가 역시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4. 1573년 아사쿠라 침공전[朝倉攻め] 때 에치젠[越前]의 호걸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을 부상 당하면서도 쓰러뜨린 공적으로. [본문으로]
  5. 링크는 당시의 것이 아니다. 링크의 것은 1806년 후지나미 신사[藤並神社]에 봉납된 모조품.실물은 2차대전 때의 공습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크기는 종횡17cm * 17cm에 높이 8cm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대충 '나이 어린 히데요리가 이에야스 토벌을 명령 할리 없다. 이는 미츠나리가 사사로이 거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도용 당한 타다우지는 카즈토요에게 “평소 성실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면서 웃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당시 카즈토요의 부대는 난구우 산[南宮山]에 진을 친 모리 가문[毛利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선 후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모우리 가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즈토요의 부대도 피 흘리지 않았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9만 8000석. 나중엔 1605년 카즈토요가 제출한 영지 목록에 20만 2600석으로 이후 이것이 막부 공인이 됨. [본문으로]
  10. 24만석이 나온 숫자는, ‘쵸우소카베 영지조사장부[長宗我部地検帳]’에 토사[土佐]의 농작면적이 2만 4000정(町)으로 나와있는데 단순히 1반(反=1/10정(町))을 1석(石)으로 하여 24만석이 속설로 된 것으로, 1705년 번(藩)이나 다이묘우[大名], 하타모토[旗本] 등을 다룬 백과사전격인 '무감(武鑑)'부터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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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21 18: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칠 전 텐쇼대지진에 관해서 이도저도 아닌 글을 쓴 적이 있습지요.

    포커스는 우치가시마 가문에 맞추었지만 카즈토요도 만만치 않은 슬픔을 간직한 인물이라서 언제나 이 인물의 이름을 볼때마다 마음이 찡합니다.

    전혀 개연성없는 이야기지만 실용적인 카즈토요와 치요의 사고방식이 메이지를 이끈 도사번사들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나저나 야마노우치와 야마우치는 일본에서 모두 맞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이 맞습니까? '노'의 사용이 너무나도 말이 많아서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21 1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커헉...크롬은 역시 제 블로그와 상성이 안 맞는군요. 댓글 썼더니 이상한 글자나 나오고....--;

      사가미님의 블로그는 rss로 구독하고 있는데 1월달 이후로 없으시던데...딴 곳에 쓰신 것인가요??

      그쵸..단 하나 뿐인 딸이 죽었다고 하니...

      카즈토요가 쵸우소카베[長宗我部]의 토박이 가신들은 郷士, 외부에서 데리고 온 가신들을 上士로 나누어 에도시대 내내 차별했기에 그 불만이 쌓여서 도막(討幕)과 근황[勤皇] 사상으로 치달았다고 하더군요. 카즈토요도 화합의 정치(...어라 어느 나라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군요)를 하였다면 사카모토 료우마[坂本龍馬]라던가 타케이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 같은 이는 안 나왔을 지도 모릅죠.

      저도 그게 좀 그렇더군요.
      위키에는 '야마우치 카츠토요'라 되어 있더군요.

      에도시대 막부의 명으로 각 가문의 족보를 제출하게 해서 만든 寛政重修諸家譜에는 山内를 '야마우치'라고 쓰여 있다고 하네요.

      一豊도 여러 정황 증거로 보건데 '카츠토요'라고 합니다.

      다만 제가 가진 책들은 대부분이 '야마우치 카즈토요'로 되어 있으며, 공명의 갈림길 제작 시 NHK가 '一豊'를 야마우치 가문에 어떻게 불러야 하냐고 묻자, 널리 알려진 대로 해 주세요...라고 했다고 하니, 그냥 무난하게 '야마우치 카즈토요'로 괜찮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21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곳에는 쓴다는걸 까먹었었군요. 졸작이지만 한번만 읽어주신다면 황공하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21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 읽었습니다.

      사가미님처럼 직접 센고쿠 시대의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七.

 이 즈음, 쥬라쿠테이(聚楽第)를 방문하는 다이묘우(大名)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같은 자는 예전 가장 친한 척하며 한때는 10일에 한번 정도 방문했던 인물이었지만 발길을 끊었으며, 히데츠구에게 황금 100매를 빌렸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는 그로 인해 서로 사이가 좋다는 의심을 사는 것이 두려워 그 돈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결국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돈을 빌려 히데츠구에게 갚았다. 이에야스는 그 후 에도(江戸)로 돌아갈 일이 있었는데,쿄우(京)를 떠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쿄우(京)에 있던 세자(世子) 히데타다(秀忠)에게,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와 칸파쿠(関白=히데츠구)가 싸우게 되면 무조건 타이코우에게 붙어라. 타이코우가 만에 하나라도 죽는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오오사카(大坂)에 가서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각주:1])를 호위해라”

 는 말을 남겼다.
 이미 세상이 그렇게까지 과열되기 시작한 이상 히데츠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쿠마가이(熊谷)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정에 3000매의 백은(白銀)을
진납(進納)하였다. 장래 일의 경과에 따라 히데요시를 쓰러트렸을 경우 신정권을 곧바로 승인 받고자 위함이었다. 1595년 7월 3일이었다. 바로 그날로 이 비밀이 후시미(伏見)로 새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하여 다섯 명의 힐문사(詰問使)를 파견하였다.
 미야베 젠쇼우보우(宮部 善祥坊),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토미타 토모노부(富田 知信)였다.
 히데츠구는
인견(引見)하여, [모반이라니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모반할 생각은 없다]라는 뜻의 서약서를 써 건넸다. 백은을 진납한지 이틀째였다.

 다섯 명은 후시미(伏見)로 돌아와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그로부터 3일째 되던 날 다른 사자들이 쥬라쿠테이(聚楽第)로 파견되었다. 예전에 히데츠구의 숙로(宿老)였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 거기에 먼젓번의 미야베, 마에다 겡이를 포함한 다섯명이었다.

 “그런 뜬소문이 떠돌아 서로 의심이 생긴 것은 요컨대 서로 직접 이야기를 나누실 기회가 없어서일 것입니다. 후시미(伏見)까지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를 죽음의 사자라고 생각한 히데츠구는 끝까지 거부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그들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시미(伏見)에서 다른 이가 와서 별실에서
내알(內謁)을 청했다.
 비구니인 코우조우스(孝蔵主)라는 노녀(老女)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여관(女官)으로 히데츠구는 어릴 때부터 이 비구니와는 친했다.

 “이 비구니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세요”

 라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타이코우님은 기분 좋으십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하를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계시지는 않사옵니다. 아무 염려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숙로인 다이묘우(大名)들은 경계하였지만 이 비구니에게는 낚였다. 히데요시의 계략은 성공했다. 뒷문으로 들어온 이 비구니 쪽이 실은 죽음의 사자였다.

 “그런가? 그럼 가보세”

 라고 하며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측근인 쿠마가이들이 막을 틈도 없이 히데츠구는 비구니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히데요시에겐 손자뻘인 세 명의 아기들을 앞세우고 호위는 백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오후 조금 지나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출발하여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하였고 오후 3시 즈음에는 후시미에 도착했다. 후시미의 거리에서는 소란이 일어나 가재도구를 들고서 도망치는 이들도 많았다. 떠도는 소문에 히데츠구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온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생각치도 못했던 이런 반응에 놀랐다.
 ‘내가…… 내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인가?”

 “우선 오시는 길에서 맞은 먼지를 떨구시길”

 이라며 휴식소로 지정되었다는 키노시타 요시타카(木下 吉隆)의 저택으로 안내 받았다. 그러나 문에 들어서자 마자 은밀하고 재빨리 모든 문이 닫혔다. 이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곧이어 사자가 성(城)에서 와, 만날 필요 없다며 그대로 코우야(高野)산(山)에 가라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밤 승복(僧服)으로 갈아입고 후시미를 출발하여 이틀 후 코우야산(山)에 올라가 세이쥬쿠 사(青宿寺)에 도착하였다. 다섯 날째에 산기슭에서 타이코우 히데요시의 사자들이 각각 부하들을 이끌고 올라왔다. 정사(正使)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라 한다.

 “틀림없이 마사노리인가?”

 히데츠구는 확인을 위해서 물어보았다.

 “틀림없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달았다. 마사노리와는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안 좋은 채로 살아왔다. 그 마사노리가 이런 때 사자로 선정된 것을 보면 말로 듣지 않아도 명료했다. 죽음이다.

 역시 죽음을 언도 받았다.
 이 순간부터 히데츠구는 지금까지의 이 남자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죽음의 명령을 받았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문서담당관인 승려 사이도우(西堂)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의 이겨갈 때 즈음 마사노리의 명령을 받은 히데츠구의 측근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雀部 淡路守)가 와서는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히데츠구에게 보고했다. 히데츠구는 바둑판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겼다”

 고 뜬금없는 말을 하였다. 바둑이었다.

 “모두들 나중에 증거로 봐 두라고. 내가 이겼다”

 과연 주위가 그것을 보자 히데츠구가 이긴 바둑이었다. 이것 자체가 기묘했다. 여태까지 히데츠구가 사이도우에게 바둑으로 이겨본 적이 없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날 이때가 되어서야 이긴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기뻤는지 짝사랑을 앞에 둔 소년과 같이 볼을 붉히며,

 “지금부터 나는 배를 가르러 가지만 이 바둑판은 흩뜨려놓지 말게. 조심히 방으로 옮겨라. 모두 나중에 돌을 놓은 것을 잘들 살펴보게”

 라고 말하곤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를 향해,

 “유서를 쓰고 싶군. 허락되는지를 알아봐 주게”

 라 말하였다. 그것이 허용되었다.

 히데츠구는 자신의 친아비와 정실, 시첩(侍妾) 일동들에게 간결한 유서 한 통씩 세 통을 썼다. 붓놀림이 경쾌했다. 다 쓰고 난 후 붓을 던졌다. 던지고 난 후 승려 사이도우를 향해서,

 “내 일생은 타이코우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죽음도 또한 그렇다.”

 고 말했다. 자신의 생애가 하나하나 타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묘함을, 이 남자는 마음속 깊이 되돌아 본 것일 것이다.

 “이제 나는 죽는다. 이것도 타이코우의 뜻이다. 그렇지만 내가 내 배를 가르는 칼은 내 손안에 있다.”

 요컨대 배만은 자신이 가른다, 그것만은 자기자신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사이도우에게,

 “자네는 중일세. 죽을 필요는 없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이도우는,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제 맘대로 함께하겠습니다”

 라며 자신도 배를 가를 준비를 하였다. 사이도우는 참고로 코우조우스(孝蔵主)의 조카이다. 숙모의 거짓말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내심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 후, 곧이어 할복의 자리에 앉았다.
 착각을 했는지 이 남자는 동쪽을 향했다. 불법에 이르기를 부처는
서방십만억토(西方十萬億土)에 계시다고 한다. 서쪽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작법(作法)에 어긋납니다. 서쪽을 향하십시오”

 라고 사이도우가 충고를 하자 히데츠구는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다시 한번 충고를 하니,

 “부처님은 시방(十方)에 계시다고도 한다. 방위에 연연하진 않겠네”

 라고 말하였다. 적어도 생애의 마지막 정도는 자기 맘대로 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카이샤쿠(介錯)의 칼이 번쩍이며 시체는 작법이 틀린 채로 동쪽을 향해서 쓰러졌다.
 사이도우는 그것을 보고,

 “전하는…… 방향을…… 잘못 아시고 계시다. 이것이 묘하다. 전하의 생애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라고 말하였다.
 사이도우는 서쪽을 향했고 서쪽을 향해서 목이 떨어졌다. 자연히 시체는 히데츠구와는 반대 방향이 되었다. 사이도우가 마지막에 중얼거린 위에 말이 히데츠구의 생애를 상징한 말인 듯이 항간에 전해졌다.
 사실, 히데츠구는 태어난 연(縁)이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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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츠구가 죽은 뒤 그 처첩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는 성별의 구분 없이 전부 사형당했다.
 
형장(刑場)은 쿄우(京)의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이었다.
 60 평방미터 사방에
(濠)를 파고 거기에 울타리를 둘러쳤고 형을 집행하는 천인(賤人)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활과 화살을 들려주었다.

 집행된 것은 8월 2일.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남문(南門)부터 백색의
수의(壽衣)를 입은 그녀들을 몰아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천인들이 물건이라도 던지듯이 그들을 수레에 집어넣었고 한 대에 2~3명씩 태워서는 산죠우 강변으로 옮겼다.
 형장의 남쪽 구석에
토단(土壇)이 세워져 머리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히데츠구의 머리이었다.

 “저걸 봐라~! 저걸 보라구~!”

 라고 천인들은 소리 질렀고 지르면서 그녀들을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었다.
 울타리가 닫히고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녀들을 천인들이 쫓아가서 찌르고 잡아서는 베었다. 천인이 2~3살 먹은 어린 귀족을 잡아서는 모친의 눈 앞에서 강아지라도 죽이듯이 죽였고 그것을 보고 기절한 모친을 다른 천인이 안아 세워서는 목을 쳤다.

 이치노다이(一ノ台)도 그 딸인 미야노카타(宮ノ方)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녀는 사세구(辭世句)를 준비해 놓았다. 딸의 사세구는 이렇다.

 모녀의 헤어짐을 듣고 우울했지만, 같은 길을 가니 기쁘구나
 憂きはただ親子の別れと聞きしかど同じ道にし行くぞうれしき
 형은 공개로 행해졌다.
 수만의 구경꾼들이 형장을 에워쌌고 특히 장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죠우 다리에는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이 사형이 무엇 때문에 행해졌고,천하에 대해서 어떤 효과를 기대하며 공개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곧이어 처형은 종료되었고 원래부터 강변 한 켠에 파여져 있던 구덩이 속에 그들의 시체와 히데츠구의 머리가 함께 던져졌다. 흙이 덮이고, 그 무덤 위에 석탑이 세워졌다.
 악역을 저지른 히데츠구의 무덤[秀次悪逆塚]
 이라고 그 비석에는 새겨져 있다.

************************************************************************************************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의 친아비인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는 영지(領地)와 위관(位官)을 몰수당해 원래의 신분인 평민으로 떨어져 사누키(讃岐)로 유배당했다.

 “뭔 일이래……”

 이 야스케는 사누키(讃岐)의 유배지에서 자신이 먹을 땅을 괭이질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뭔 일인지... 이 친아비도 또한 자기 일생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殺生関白,了====================

  1. 히데요시의 정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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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요시 카즈미치야 뭐.. 본래의 운명으로 돌아갔으니 담담했을듯, 히데츠구도 마지막되니 제법 용자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는군요...

    그나저나 히데요시 친 누님은 어떻게 되었을련지.. 측근인 쿠마가이 녀석 운명도 궁금하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쪼록 수고하셨습니다. 대조해가며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할듯..(정말 소설은 읽으려니 ㅎㄷㄷ라..)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9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대조는 하지 말아주세요... 시바 선생의 필력을 살릴 수 없어서 여러 번 고생한 끝에 제멋대로 갔다붙인 곳이 많아서리..^^;

    참고로... 히데요시의 친누나이자 히데츠구의 어미인 즈이류우인 닛슈(瑞龍院 日秀)는 히데츠구가 죽은 후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 즈이류우인(瑞龍)원(院)을 세워 비구니 호인 닛슈(日秀)를 칭하며, 히데요시의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죽은 다음 해인 1625년 93살의 나이로 죽었다고 합니다... 친누나이니까 살려 주었나 보네요.

    쿠마가이 역시 연좌되어 할복을 명령받아 니손(二尊)원(院)에서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원서는 읽을 엄두도 안나서..(ㅎㅎ..)

    키타노만도코로보다 장수했다니..(히데요시보다 10여세 연하로 알고있는데..) 어지간한 장수군요...

    다시 읽어보니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소심함이 한층 엿보이는군요.. (어이, 아들내미한테는 한때는 이에야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며?ㅋㅋ..)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0 14: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이야기는 조금 의심이 가는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나)
    몇 몇 책에서는 히데츠구가 죽은 이후의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별일 아니었는데 히데요시 측에서 땡깡을 부렸다는 말도 있고, 또한 이에야스한테 돈을 빌렸다는 것도 조금... 왜냐면 그의 장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경우 돈을 잘 빌려주기로 유명했거든요.(뭐 하필이면 그 때 토시이에에게 돈이 없었다면 그 뿐이지만 말입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10 1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 돈 잘빌려주는 건 유명하지요(이아저씨는 꽃의 케이지에서의 주판영감이미지가 자꾸 떠올라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P.S. 타다오키 처 가라샤는 아케치 미쓰히데 딸내미로 알고 있는데.. 혈연이 참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습니다. (에휴...어려워서 원;)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0 2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로 힘이 있는 가문끼리 만세에 걸쳐 좋은 게 좋은 것지~ 라면서 겹사돈 맺는 거야 어느 시대 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가라샤...하면 전 타다오키의 의처증이 우선 생각나더군요... ^^ 쪼잔한 녀석~ 하면서..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7.12.11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살생관백 다음 챕터 대머리쥐의 일족 얘기도 있는지 궁금하군요. 고맙습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1 13: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위에서 다섯번째 리플... 타다오키의 장인 마에다 토시이에라 했는데, 사돈이군요... ^^; 이 실수는 자주 하는군요...--;

    깃쨩님//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은...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다룬 단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 히데요시의 정실 '오네'를 다룬 단편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 ->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를 다룬 단편
    스루가고젠(駿河御前) -> 히데요시의 막내 여동생을 다룬 단편.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인물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 황족으로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된 인물
    요도도노(淀殿)와 그 아들 ->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와 히데요리(秀頼)의 이야기......

    가 남아 있으며... 매주 일요일 업데이트 할 예정(이라고 쓰고 '어긋나기 위해 계획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석된다....)입니다.

  10.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7: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처형장면이 너무나 비참하군요. 처자들이 뭔 죄가 있다고 죽여도 곱게 죽이지 어찌 저리 잔인하게 죽인건지... 이 때 이미 히데요시 정권은 끝난것 같습니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그들의 명복을 빕니다

三.

 히데요시[秀吉]가 이 마고시치로우[孫七郎]를 위해서 붙여 준 숙노(宿老)라는 것은 -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히토츠야나기 나오스에[一柳 直末],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로 모두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의 장교일 때부터 직접 키워 온 다이묘우[大名]들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히데요시의 의도인지.
  그들은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온화하며 상식적이고 세상일에 익숙하여 [얼굴에 주름 많고,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건 조용히, 어떤 일이건 모나지 않게, 무슨 일이건, 참으세요, 참으세요 - 하고 그들은 입을 열면 입버릇처럼 말했다. 계속 그렇게 말하며 마고시치로우를 인형처럼 다루며 마고시치로우의 자유를 능수능란하게 봉하였고 더구나 히데요시에게는,

 "굉장히 뛰어난 기획력이 가지고 계시옵니다.”

 라고 하며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마고시치로우가 생각한 것처럼 말하여 히데요시의 기분을 좋게 하는데 전념했다.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그 후에도 마고시치로우가 큰 잘못이 없자,
 '과연……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변하는 법인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타사(又左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도 그랬지”

 하고 측근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마에다 토시이에도 10대일 때는 손을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양아치였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토시이에가 옛날의 그 마타사인가하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중후한 인물로 변해있다.

“송충이가 나비가 나비가 되듯이 마고녀석도 언제까지나 송충이일 턱이 없지”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도 없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이 혈연자 중 우두머리인 젊은이를 다음 해인 1585년 아직 18살짜리를 키슈우[紀州] 정벌군의 부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운이 좋았는지 큰 실수는 없었다. 이어서 그 해에 시코쿠[四国]정벌에 참가시켰고 이때도 큰 실수 없이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드디어 마음을 굳혀 같은 해의 윤8월 마고시치로우에게 하시바 성[羽柴姓]을 허용함과 동시에 오우미[近江]를 하사했다. 또한 히데요시가 칸파쿠[関白]가 되자 마고시치로우는 아직 18살이지만 – 조정에 요청하여 종사위하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로 만들었다.
 성(姓)도 없이 백성으로 자란 젊은이가 갑자기 조정의 대신이 된 적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다음해인 19살에 산기[参議]가 되었다. 이미 산기 이상은 공경(公卿)이다.

 이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행운에 공포를 느낀 사람이 있었다.
 실부(實父)인 야스케[弥助] – 지금은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였다. 쿄우[京]에서 자신의 아들인 마고시치로우를 만나,

 “천도(天道)를 두려워혀라”

 하고 오와리 백성들이 사용하는 말로 지겹도록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했다. 야스케는 어디서 들었는지,

 “감투가 크면 어깨를 누른다는 말이 있고, 높은 가지가 부러지기 쉽다는 말이 있다. 옛날부터 그 실력 없이 영달을 얻은 사람치고 제대로 된 말로를 보낸 사람이 읍어.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딘다. 두려워혀라”

 고 야스케는 말했다.

 “필시 너는 너무 빠른 승진 때문에 니 마음이 그것에 따라가지 못하여 결국 마음이건 뭐건 산산조각 나 버릴 것이여. 그것을 두려워혀라”

 하고 계속 말했다.

 “어떻게 두려워하라는 건데요?”

 마고시치로우는 무능한 그리고 언제나 무언가에 떨고 있는 듯한 이 친아비의 안스러운 농사꾼 얼굴이, 자신의 미천한 출신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기분 좋지 않았다. 마고시치로우는 말했다.

 “나는 무예가 뛰어나요. 지위는 그것에 걸맞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녀 아녀, 너는 잘못 생각혀고 있다”

 고 야스케는 말했지만, 산기[參議] 히데츠구 공[秀次公]이 된 마고시치로우의 날카로운 시선을 되받아 칠 기력도 없어 고개를 숙였다. 침묵은 했지만 야스케는 마고시치로우가 장식 인형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일 턱이 없다.
 단순히 토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 증거가 자신이었다. 오와리 오오타카 마을에서 끌려와 세 명의 아들을 전부 빼앗겼고, 더구나 자신은 토요토미 가문의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서 자기 성과 이름도 아닌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고향 사람들은 이런 나를 뒤에서 뭐라고들 지껄이고 있을까?

 “아버지. 이젠 오지 마세요”

 마고시치로우는 참다 못하여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였다. 이미 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받았으며, 후지와라 성[藤原姓]을 가진 입만 산 공경(公卿)들과 사귀지 않으면 안 되는 이때에, 궁상맞은 얼굴을 하고 이곳에 와서는 오와리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듯한 것을 하나하나 말하는 부친이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날 괴롭히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양부(養父)인 히데요시는 달랐다.
 마고시치로우에게 부귀영화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 천하의 모두가 납득할 만한 화려한 이력을 계속해서 만들어 주었다.

 20살 때에는 히데요시를 따라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종군하였다. 이때도 숙노(宿老)들의 보좌로 큰 잘못 없이 맡았고, 다음 해인 1588년에는 정삼위(正三位) 곤쥬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했다. 거기에 그 다음 달에는 종이위(從二位)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이례였다.

 “이 상태라면 필시 내년에는 다이나곤[大納言]이 되실 것입니다”

 하고, 이 즈음 토요토미 가문에서 조정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던 승려 출신의 쿄우토 봉행[京都奉行]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는 맛깔머리 없는 아부를 하여, 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가 될 것 같은 젊은이를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고시치로우는 너무도 빠른 승진에 이미 감동이 둔해져 있었다.

 “그런가……내년에는 다이나곤인가”

 하고 멍해서는 기뻐하지도 않았기에 겡이는 마음속으로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바보녀석’

 겡이는 안색 하나 바꾸진 않았지만 마고시치로우의 예법지도를 담당하고 있었던 겡이였던 만큼, 이 마고시치로우를 경멸하는데 겡이만한  인간도 없었다.
 ‘이건 암만 가르쳐도 안 되겠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시 다이나곤이 얼마나 높은 지위인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이나곤이라는 함은 후지와라 가문[藤原家]의 공경(公卿)중에서도 아네코우지[姉小路], 아스카이[飛鳥井] 가문이라는 우린[羽林[각주:1]]의 가격을 지닌 가문조차 노년(老年)이 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관위(官位)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이진[大臣[각주:2]] 다음 가는 관위이옵지요.”

 라고 말을 하자, 과연 마고시치로우도 안색을 바꾸며,

“그런가? 그런 다이나곤에 내년에는 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기뻐 되물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사건이라고 해선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에게 있어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사였다. 히데요시의 측실 아자이씨[浅井氏[각주:3]]
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내 몸에는 아기씨가 없는 것인가 하고 거의 포기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름은 장수(長壽)를 약속한다는 미신에 따라, 스테[捨[각주:4]]라고 이름 지어졌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뻤했다.
 천하는 거기에 맞추어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각각 영지(領地)가 휘청댈 정도로 수 많은 양의 축하 선물을 보냈었으며, 텐노우[天皇]조차 이 새롭게 등장한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를 위해 호화로운 애기 옷을 보냈다. 이 덴노우의 하사품(下賜品) 행사를 빈틈없이 처리한 것이 마에다 겡이였다.

 마고시치로우의 존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다이나곤은?’
 하고, 이 해에 마고시치로우는 기대했지만 결국 히데요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당연했다. 마고시치로우의 관작(官爵)을 너무 높여버리면 이 아기의 장래를 위해선 좋지 않다는 명쾌한 그리고 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히데요시와 토요토미 가문의 관료들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마고시치로우의 막중한 임무는 예전과 같았다. 스테가 탄생한 다음 해에 행해진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5]에서도 이 인물은 여전히 부사령관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그 정벌이 끝나자 히데요시는 후계자의 위치를 잃은 마고시치로우를 위해서 공경(公卿)으로서의 관작은 올려주지 않았지만 다이묘우[大名]로는 가장 내실있는 위로를 해 주었다. 석고가 일약 100만석이 되었다. 주어진 것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와 그 옆의 이세[伊勢]였다.

 “기쁘지?”

 라는 말을 히데요시에게 들었지만, 마고시치로우는 어떻게 기뻐하면 좋을지 몰랐다.

 “열심히 해라”

 라고 히데요시는 또 말했다. 더 이상 열심히 하면 후계자로 한다는, 오랫동안 계속했던 그 말은 없었지만 대신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너는 내 대리인이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가 생각하기에 대리인은 직무이지 관작이 아니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오다와라 정벌이 끝나자 마자 계속해서 마고시치로우는 오우슈우[奥州] 정벌에 종군하였고, 개선하자 마자 쿄우[京]에서 쉴 틈도 없이 다시 쿠노헤의 반란 진압을 위해서 오우슈우로 출정했다.
 이때는 히데요시가 직접 가지 않고 마고시치로우가 처음으로 히데요시를 대리하여 참전하였다. 단지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의 실력이 불안하였기에 사실상의 총사령관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동행시켰다. 이때 어쩌다 보니 이에야스의 관직이 다이나곤이었기 때문에 격을 맞추기 위해서, 단지 그런 이유 하나 만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 젊은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곤다이나곤[権大納言[각주:6]]에 임명받았다. 그러나 기뻐할 틈도 없이 출정하였고 오우슈우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후 반란은 진압된 이 해 10월 오오사카로 개선했다.

 오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형식적인 치하를 받았지만, 놀랍게도 이 외숙부의 자랑이며 육체적 특징 중에 하나인 북을 치는 듯한 목소리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말에 힘이 없었기에 떨어져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예전엔 시끄러울 정도로 활기찼던 쥬라쿠테이[聚楽第]도 마치 절간과 같이 조용했다.
 마고시치로우는 그 이유를 개선하는 도중 들었다. 2개월 정도 전에 츠루마츠[鶴松 – 스테를 말 함]가 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1. 고급 귀족인 공경(公卿)의 가문의 격(格) 중 4번째에 해당하는 문벌. 코노에쇼우쇼우[近衛少将], 코노에츄우죠우[近衛中将] 등 무관을 거쳐 다이나곤까지 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2. 조선시대 식으로 말하면 좌의정이나 영의정 급을 말한다. [본문으로]
  3. 후에 요도도노[淀殿]를 말함. [본문으로]
  4. 버린 애라는 뜻. 즉 내 놓은 자식은 오래 산다는 미신. [본문으로]
  5.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를 멸망시킨 전쟁. [본문으로]
  6. 곤[権]은 정규인수 외에 임명받은 사람에게 붙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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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1 05: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되고 말았군요.
    더군다나 양자인 그는 히데요시에게 적자가 생기면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구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2 2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로는 나름 능력있었기에, 그것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고도 합니다.
    역사의 패자(敗者)란 없던 사실도 뒤집어 쓰는 것이다 보니, 정말 실제로는 어땠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3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긴 그런 경우도 많죠. 역사는 승자가 써내려간 것이라고들 하니까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5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 ㅎㄷㄷ군요.. 이녀석을 보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떠오르는군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도 무능의 극치로만 그려진다지만 실체는 어땠을련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5 17: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갸는 무능했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좋게 생각할려고 해도 그렇게 삽질만 하는지... 뚜렷하게 뭔가를 정해놓은 것도 없이, 그 때 그 때 땜빵메우기 식이다 보니 줏대도 없어보이고...결국엔 배신자라는 낙인밖에 남은 것이 없으니까요.

야마우치 가즈토요[ 一豊]

1605 9 20일 병사(病死) 61.

 

1546 ~ 1605.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아네가와 강 전투[姉川の戦い] 등을 경험하였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휘하에서 토오토우미[遠江] 카케가와[掛川] 성주(城主)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토사[土佐] 일국을 하사 받아, 토사 번[土佐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카즈토요에게 말을 살 수 있는 돈을 건 낸 부인과의 일화가 유명.

 

 

 




세키가하라[ヶ原]와 카즈토요

 

 [쌈짓돈]으로 남편에게 명마(名馬)를 살 수 있도록 돈을 주었고 그 명마 덕분에 전공을 세워 출세한 일화가 유명해져 내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부인 치요[千代 와카미야 토모오키[若宮 友興]의 딸, 후의 켄쇼우인[見性院]].

 그런 현모양처가 이목을 끌기에 그다지 눈에 띄는 무장이 아니라 여겨지는 야마우치 카즈토요이지만, 수많은 전공을 세워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가로(家老)에 임명되었으며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평정된 다음에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지(要地)인 카케가와 성[掛川] 5만석이 주어졌다.

 

 그렇게 히데요시에게 중용(重用)받은 카즈토요였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이에야스[家康]에게 접근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 비축한 식량뿐만 아니라 아예 카케가와 성을 동군에게 통채로 바쳤다.[각주:1] 이것을 계기로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도 앞다투어 성을 받쳤다고 한다. 더구나 조카인 마사토요[政豊]를 오다와라에 인질로 입성시키고는 출진하였다.

 이런 카즈토요의 행동에는 처 치요의 조언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치요는 오오사카[大坂]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동향과 여러 다이묘우[大名]부인이나 자녀의 정세 등을 기록한 밀서를 남편에게 보내면서, 밀서를 전하는 전령의 입을 통해서 봉투를 열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토사[土佐]의 태수(太守)

 

 세키가하라[ヶ原]에서의 전공으로 토사[土佐] 20만석으로 가증(加增)된 카즈토요는 1601년 우라토[浦戸]에 입성했다.

 카즈토요는 영국(領國) 통치의 상징으로써 같은 해 10월에 오오타카사카 성[大高坂 - 후에 코우치 성[高知城]]으로 개명 - 의 축성과 성 밑 마을[城下町]의 경영에 착수했다. 이 배경에는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 체제를 불식(拂拭)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배경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쵸우소카베 유신(遺臣)의 습격을 경계해가면서 축성을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각주:2]. 한편 이 축성과 성 밑 마을 경영은 야마우치 가문을 결속시켜 가신단 편성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코우치 성이 굉장히 실전적인 성곽인 것을 보면 카즈토요는 쵸우소카베 유신의 반란을 염두에 두고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카즈토요는 우라토 반란[浦戸 一揆][각주:3]나 타키야마 반란[一揆]의 평정에 고심했다.

 

 1603 3 25일.

 종사위하(四位下) 토사노카미[土佐守]가 되었지만 영내(領內)에는 여전히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11월에는 타카이시 사마노스케[高石 左馬助] 등이 타키야마 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타키야마 잇키이다. 야마우치 나이키[ 記], 야마우치 카몬[ 掃部]을 파견하여 이를 간신히 처리했다.

 

 카즈토요는 성 밑 마을의 건설과 함께 도로의 정비, 중신(重臣)을 각지에 배치한 지배 체제의 강화, 검지([각주:4]), 인구 조사 등 농촌 지배, 법제의 시행 등 영국 지배의 확립에 정력을 쏟았다.

 1601년에는 가신의 적극적인 등용, 지배의 조직화를 꾀함과 동시에 영내(領內)순시하며 지형(地形), 풍토, 사람, 산업 등의 실정을 파악하는데 힘썼다.

 

카즈토요의 후계자

 

 카즈토요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로 동생 야스토요[康豊]의 아들 즉 카즈토요에게는 조카가 되는 쿠니마츠[松]를 양자로 삼았다. 쿠니마츠는 1605 5월에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를 알현했을 때 '타다[]'라는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타다요시[忠義]라 개명했다.[각주:5]

 

 그 이전인 4 17일.

 쿠니마츠(후의 타다요시)가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이에야스의 양녀 쿠마히메[이에야스의 이부제(異父弟) 마츠다이라 사다카츠[松平 定勝]의 둘째 딸)와의 혼약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결혼식은 안타깝게도 카즈토요가 죽은 뒤인 1606 4 17일에 행해졌지만 타다요시는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서임되어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임관된다.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인척 관계를 맺는 것에 성공한 카즈토요는 야마우치 가문[山内家]의 장래를 걱정했던 만큼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안심하여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5개월 뒤인 1605 4 20(21일이라는 설도 있다) 죽었다. 향년 61(60세라는 설도 있음). 너무도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지주막하출혈의 가능성이 있다.

 

 여담이지만 카즈토요의 처가 쌈짓돈을 주어서 명마를 사게 했다는 내조의 공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야마우치 가문 사료 카즈토요공 기록(山内家史料一豊公記)]에는 실려 있지 않다. 당시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실인지 어떤지 판단할 순 없지만,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6]]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7]], 무로 큐우소우[室 鳩巣[각주:8]]가 쓴 [큐우소우 소설(鳩巣小說)], 유아사 죠우잔[ 常山] [죠우산 기담(常山紀談)] 등에는 기록되어 있기에 에도 시대 중기 즈음에는 이 이야기가 유명했을 것이다.

  1.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항상 똑같은 복장을 한 다섯 명의 카게무샤[影武者]와 함께 움직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즈토요가 토사[土佐]로 입국하기 전에 토사[土佐]의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들이 우라토 성의 개성을 거부. 개성 조건으로 그때까지의 주군인 모리치카[盛親]에게 토사[土佐] 반국(半国)의 할양을 요구하다 몰살된 사건. [본문으로]
  4.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5. 상기에 세키가하라 때 인질로 받쳐진 마사토요(政豊)의 형이다. [본문으로]
  6.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7. 에도 막부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 번주[甲府藩主]로 있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 가(家)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8.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 8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 吉宗]의 브레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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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9.27 0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료타로 소설의 주인공이자 NHK 대하드라마의 주인공 부부네요.
    결국 아들이 없었군요.
    카즈토요가 외지에서 왔고, 쵸-소카베 가문이 기반을 다진 곳이기 때문에 쵸-소카베 지지자들의 저항은 필연적이었겠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7 1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쵸우소카베씨가 그만큼 농민들을 위한 정치를 했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도 임기가 끝나 떠나가는 선정을 펼친 사또를 못 나가게 하기 위해서, 백성들이 사또가 못 떠나게 마을 입구에서 절을 하고 비키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많잖습니까.(대표적 인물 경상우수사 배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9.28 08: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이 포스팅 보니 <공명의 갈림길>을 보고 싶군요.
    요즘 J 채널인가 하는 케이블 방송사에서 해주더라구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8 09: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제 방에 TV가 없어진 관계로 못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라마는...한꺼번에 몰아서 보는 편이라, 언젠가 한꺼번에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감질맛 나는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서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9.29 10: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번 시즌 대하드라마인 <풍림화산>을 한번에 몰아서 보려고 벼르고 있는 중입니다.
    매주 하나씩 보려니 힘들더라구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9 1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센구미(新撰組)는 보셨나요? 근래 본 것 중에선 가장 재미있더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8.08 16: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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