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이에[秀家]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제일의 악모가(惡謀家)로 악명 높았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581년 나오이에가 죽기직전에 당시 오다 가문[織田家]의 쵸우고쿠[中国] 모우리 공략[毛利攻め]을 담당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히데이에(당시는 하치로우[八郎])의 후사를 부탁하여, 이에 응한 히데요시는 나중에 히데이에를 유자(猶子)[각주:1]로 삼게 된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름글자도 히데요시의 ‘히데[秀]’를 하사 받아 하치로우[八郎]에서 히데이에[秀家]로 바뀌었으며, 히데요시 덕분에 관위도 계속해서 승진하였다. 1594년 조선침략 중 공적을 세워 24살의 젊은 나이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 받아, ’비젠 츄우나곤[備前中納言]’으로 칭해질 정도였다.
 결혼 또한 히데요시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었다. 부인은 히데요시가 친자식처럼 기른 양녀 고우히메[豪姫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였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히데이에에 대한 애정은 친자식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도 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양자들 중 관백(関白) 히데츠구[秀次]는 자살을 언도 받았고, 히데아키[秀秋]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내졌지만, 이 히데이에만은 유자의 신분을 계속 보장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병상에 누워서 후사를 부탁한 오대로(五大老)[각주:2]의 면면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히데이에는 어렸을 적부터 내 손수 키웠던 사람이기에, 히데요리를 지켜는 것에 있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히데이에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첫 번째 신호는 집안싸움[御家騒動]이었다.
 히데이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은 꽤 있었지만, 영지(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 절반)를 다스리는 정치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과보호 상태에서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히데이에의 가신단 중 본거지에 있는 ‘본거지파[国許派]’와 수도권에 올라와 있던 ‘수도권파[上方派]’의 가로(家老)들 사이에 험악한 파벌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히데이에가 부인인 고우히메 휘하 가신으로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 파견된 나카무라 지로우베에[中村 治郎兵衛][각주:3]를 중용한 것이 본거지파를 자극했다.

 그래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공공연히 다툼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본거지파 가로들의 분노가 폭발, 나카무라를 주살해야 한다면 공공연히 병사를 일으켜 수도권으로 올라온 것이다. 필두가로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坂崎 出羽守]][각주:4], 토가와 히고노카미[戸川 肥後守][각주:5],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각주:6] 등이었다. 하지만 나카무라를 아낀 히데이에가 나카무라를 카가로 도망치게 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쿄우노스케 들은 이번엔 주군이 적이라며,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문 저택 앞에 바리케이트[逆茂木]를 치고 화톳불을 피워 전투준비를 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시가전으로 발전할 듯 하였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중재로 전투는 회피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커 우키타 가문의 본거지파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활약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히데이에는 서군의 부사령관 격으로 1만7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결전의 이틀 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군 제장들의 동요하는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그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있는 것이 든든하다’고 적었는데,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히데이에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초반의 활약은 훌륭했다.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7]가 이끈 우키타 군[宇喜多軍]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는 동군(東軍)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서군은 패했다. 히데이에는 전쟁터에서 후퇴, 해로(海路)를 타고 사츠마[薩摩]까지 잠행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끝까지 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당한다.

 이후 이 섬에서 살길 50년, 1655년 84세에 죽었다고 한다. 그 사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는 멸망하였고, 토쿠가와 쇼우군[徳川将軍]도 4대 이에츠구[家継]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1572년생. 히데요시[秀吉] 휘하로 시코쿠 정벌[四国征伐]
[각주:8],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조선의 역[朝鮮の役][각주:11]에 종군하였다. 전성기 때는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절반, 하리마[播磨] 일부를 합쳐 총 57만4천석을 영유했다.


  1. 양자와 같은 개념이나 양아비의 성(姓)과 재산을 상속받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3.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4와 5편에 등장하는 인물. [본문으로]
  4. 우키타 아키이에[宇喜多 詮家]. 히데이에와는 사촌지간(각각 아비가 형제) [본문으로]
  5. 토가와 타츠야스[戸川 達安]. [본문으로]
  6. 하나부사 마사나리[花房 正成] [본문으로]
  7.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5와 6편에 등장하는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을 말함. [본문으로]
  8. 1585년 행해진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羽柴秀長]의 시코쿠[四国] 침공.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합쳐 일본에선 이렇게도 부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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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7.18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의 글이시군요!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은 글에 첫 댓글을 남기는 것은 인터넷을 키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 감히 말하겠습니다.

    뭐랄까요, 어떠한 인물들의 삶에서 히데요시는 때론 냉혹하지만 때론 매우 따뜻한 사람의 양면성을 보이며 개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히데이에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을 떠나 정말로 히데이에를 사랑한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아마 히데이에의 착하고 순수한 성품이 순수한 일면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생각되네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에야스가 굳이 히데이에를 죽이지 않은 것은 마에다 가문과의 관계도 있지만 5대로 시절부터 그 역시 히데이에의 성품을 알고 있었던 것 역시 작용을 하지 않았나 감히 추측해봅니다. 물론 유배생활을 하게 된 히데이에는 자신이 50년을 더 살거라곤 생각을 못했겠지만 말입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시바 선생의 우키타 히데이에 #2에 이런 문장이 있습죠.
      " 히데요시 자신도 하치로우 모친의 몸을 알고 있던 만큼 어렴풋이 그렇게 착각할 법한 정념(情念)을 이 소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이라는 것은 원래 출산의 고통이라는 동물적인 체험이 없이, 단순히 그 아이의 모친의 몸을 알고 있을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히데요시는 히데이에 부친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 히데이에 모친 엔유우인[円融院]의 몸을 통해서 정말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을지도...

      저 개인적으로는 시바 선생의 평과 같습니다.
      이에야스가 생각하기에 히데이에가 주도적으로 큰 일을 벌일만한 그릇이 아니었기에(거기에 자신의 가문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도 있고), 그냥 유배로 끝나지 않았을지.
      (물론 성품이 뛰어난 것도 있었기에, 여러 다이묘우들의 조명탄원 운동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2. 맹꽁이서당 2011.07.18 18: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가의 사람들... 예전에 올리셨을 때 반갑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벌써 3년전이라니 세월 참 빠릅니다 ㅎㄷㄷ
    그나저나 우키다 가의 본거지파는 좀 어정쩡했겠네요. 아무리 도쿠가와를 위해 활약했더라도 세키가하라 이후 가문 자체가 날아간 상황이니.. 어디 다른 가문에 취직이라도 했을까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는 나름 자주 포스팅을 했었는데 말입죠.. 정말 세월 참 빠릅니다.

      주군의 가문 자체는 날아갔어도,

      사카자키(우키타 사쿄우)는 이와미[石見] 츠와노 번[津和野藩] 3만석(오오사카 공성전 후 가증 되어 약 4만 3000석).

      토가와 히고노카미(타츠야스)는 니와세 번[庭瀬藩] 3만석.

      하나부사 시마노카미(마사나리)는 5000석의 거물 하타모토[旗本]가 되었던 지라 나름 알아서들 출세했다고 보아야 합죠.

.

 

 하지만 이 이에야스의 말에는 다분히 회상이기에 생기는 허술함이 있었다. 현실의 세키가하라[ヶ原] 전장(戰場)에서 이에야스는 거의 절망적이었던 순간을 몇 번이나 맛보았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의 승패를 사전에 결정짓고자 하였다. 적인 서군에 참가한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 대해서 여러 방법으로 공작하고 회유(懷柔)하여 내응(內應)을 약속시켰다. 서군의 총수(總帥)인 모우리 씨[毛利]에게까지 공작하여 그 부하 장수인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家], 가로(家老)인 후쿠바라 히로토시[福原 俊] 등과 내응 약속을 하여 전장에서 절대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며, 총도 쏘지 않겠다는 밀약까지 맺었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으로 향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 속으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도중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밀사(密使)가 내응을 신청해 왔을 때도,


 애송이 따위의 상대할 필요도 없다

 

 고 말하며 두 번이나 묵살하였을 정도였다.

 

 동과 서의 싸움은 이에야스의 부대가 틀어박혀있던 후시미 성[伏見城]을 서군이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방면 서군 4만의 총대장으로 히데이에[秀家]가 선택되었다.

 관위(官位)가 높은 것도 있으며 병력이 많다는 점에서 당연할 것이다. 예전 아직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쓰던 히데요시[秀吉]가 히데이에의 망부(亡父) 나오이에[直家]의 임종 자리에서 약속했던 것과 같이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는 물론 일본국(日本)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수로 길러내 보이겠습니다'라는 말이 히데요시가 죽은 후 우연이겠지만 실현되었다.

 

 그렇군. 내가 지휘를 하는 것인가?”

 

 하고 히데이에는 순진하게 기뻐했다. 이 복잡한 정세 속에서 이 남자만은 아무런 정치적 고려도 하지 않고, () 타이코우[太閤]의 남겨진 아이를 위해서라는 소년과 같은 정의감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거병의 주모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 동료인 오봉행들 조차 뒤로는 어떻게 움직일지 수상쩍은 시기에 이 비젠 츄우나곤[備前 中納言]만은 신뢰하여,

 

 비젠 츄우나곤만은 안심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즉 정치, 정세(政勢)가 아군에 유리하다는 듯이 착색(着色)하거나, 전쟁이 끝난 후 이익을 약속할 필요도 없이 솔직히 부탁하면 솔직히 받아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구나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은 병사수도 압도적으로 많았고 또한 그 휘하의 비젠 병사들은 용감하였으며, 히데이에는 겁()을 미워하고 용()을 사랑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 17천의 병사 수야 말로 서군의 주력이 될 것이다.

 

 히데이에는 70명의 장수와 4만의 군세를 배치하여 공성전(攻城戰)을 개시해서는 곧바로 후시미 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히데이에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들에게 휴식을 준 후 곧이어 이세[伊勢]를 거쳐 미노[美濃] 오오가키[大垣]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밤의 어둠을 타고 빗속에서 행군을 하여 세키가하라[ヶ原]의 예정 전장에 도착하여, 그 분지의 서쪽에 융기하는 통칭 텐마야마[山] 산의 허리에 진지를 둘 곳을 고른 후 병사를 5단으로 배치하였다. 히데이에의 본진에는 부대 표식[大馬印]으로 '붉은색의 후키누키[赤池吹貫]'가 세워졌고, 산꼭대기에서 산허리에 걸쳐 '흰 바탕에 큰북의 원[太鼓紋]'을 그린 우키타 가문의 깃발이 내걸렸다. 밤이 걷힘과 동시에 포진이 완료되었다.

세키가하라 포진도. 하늘색이 서군(西軍), 붉은 색이 동군(東軍). 노란색은 처음엔 서군이었다가 나중에 동군으로 배신하는 부대이다.(누르면 커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야스가 움직였다.

 이에야스는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를 출발하여 서군의 뒤를 따라서 야간행군을 계속하여 밤이 물러감과 동시에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여 8만의 병사를 전개시켰다.

 하지만 날씨가 개전(開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개가 짙어 적과 아군의 식별이 불가능하여 쌍방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걷히기 시작한 것은 오전 8시를 지나서부터였다. 같은 시각에 최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싸움은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 6천이 서군을 향해 돌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정면으로 받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였다. 곧바로 격전으로 이어졌고 후쿠시마 부대는 선봉이 무너져 궤주(潰走). 결국에는 몇 백 미터 정도 퇴각하게 되었다. 마사노리는 크게 화를 내며 은()으로 된 부대 표식을 세차게 흔들며 몸소 진두로 달려나가 패잔병들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우키타 군의 세찬 공격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동군은 이 패색에 낭패했다. 곧바로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부대, 츠츠이 사다츠구[筒井 定次]의 부대가 달려들어 우키타 부대의 측면을 노리려 했지만 곧바로 반격당하여 후쿠시마 부대와 함께 퇴각했다.

 

 히데이에는 산허리의 높은 곳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서 이 전황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군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아카시 카몬 타케노리[明石 掃部 全登]가 맡았으며, 5단으로 나뉘어져 배치된 부대는 노부하라 토사[延原 土佐], 우키타 타로우자에몬[浮田 太左衛門], 오사후네 키치베이[長船 吉兵衛], 혼다 마사시게[本多 重][각주:1]등이 각각 지휘하였다. 이 용감하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대장의 휘하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용감함으로 싸웠다.

 

 고독한 싸움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왜냐하면 이에야스의 사전 공작에 의해 서군의 7할은 깃발을 움직이지 않았고, 총을 쏘지 않았으며, 진영을 땅바닥에 붙인 채였다. 나머지 3할만이 싸우고 있었다.

 3할의 주력은 우키타 부대이며, 거기에 더해 이시다 미츠나리 부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라는 2부대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7할은 잠이라도 자는 듯이 방관하고 있었다. 이 서군 7할의 방관을 보고 이에야스는 당초 이겼다고 생각했다.

 

 싸우고 있는 적은 어느 깃발과 어느 깃발인가?”

 

 라며 안개 속으로 척후를 보내어 확인해 보자 위와 같았다. 이에야스가 보기에 미츠나리에게는 무략(武略)이 없으며, 히데이에는 애송이가 지나지 않았다.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다소 뛰어나다고는 하여도 영지(領地)가 작았기 때문에 그 지휘하의 병사는 소수였으며, 거기에 요시츠구 자신은 갑옷도 입지 못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황은 이에야스의 낙관론을 차츰 배신하기 시작했다. 서군의 3할이 사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군은 전선(全線)에 걸쳐서 붕괴가 시작되어 이에야스의 지휘조차 거의 전해지지 않았고, 각 부대도 연계가 끊어져 각각 싸우고 있는 형세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 생애에서 자기 지휘하의 아군이 이렇게까지 지리멸렬한 상태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과 창의 한가운데서 병사들을 질타하고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몇 번인가 무너져 후퇴하면서도 그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이길 수 있다

 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대를 마구 무너뜨리고 있는 정면의 우키타 부대가 그 위세에 비해서는 돌격이 계속해서 이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후쿠시마 부대가 4~5백 미터나 퇴각하면 그들은 더 이상 병사들을 돌격시키지 않고 멈추게 하여, 분지의 중앙까지 쫓아가는 것을 두려워해 몇 번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기묘한 적군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마사노리는 알게 되었다. 우키타 부대에는 아군이 없었다. 서군의 여러 장수들은 주변의 산꼭대기, 산허리, 길 옆에 포진하고 있었지만 우키타 부대의 공격에 가세하려고 하지 않았다.

 

 적은 한 겹이다! 후속 부대가 없다! 두려워 마라!”

 

 마사노리가 포효하며 어벙대고 있던 사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이 적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부터였다. 마사노리가 보건대 우키타 부대에 아무리 위세가 있다고 하여도 결국엔 피로해 질 것이며, 결국에는 약해질 때가 올 것이다.

 

 마사노리는 무너져 있던 군사를 재정비해서는 역습에 나섰다. 이 때문에 사방의 진지에서 보고 있으면, 후쿠시마 가문의 산길 모양의 깃발과 우키타 가문의 큰북 깃발이 서로 검은 연기를 피우는 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고 때로는 서로 뒤엉켜, 때로는 한쪽이 쫓고, 때로는 한쪽이 쫓기거나 하여 어느 쪽이 이길지 알 수가 없었다. 오전 11시 즈음에는 이시다 진지 정면의 동군도 격퇴당하였고, 오오타니 진영분지 중앙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밀린 동군은 분지의 중앙부에 뭉쳐서 헛되이 인마(人馬)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오가 되어서 역전되었다.

 마츠오야마[松尾山] 산꼭대기에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반하여, 15천의 병사를 휘몰아 산허리에 진지를 갖추고 있던 서군 오오타니 부대를 치고 길게 늘어진 대형(隊型)의 옆구리를 찔러 그들을 거의 전멸시켰기 때문이었다. 요시츠구는 배를 갈랐다. 이 때문에 우키타 부대는 동군의 대부분에게 포위당하여 고립되었다.

 

 히데이에에게는 이 순간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건 킨고[金吾=히데아키]인가!? 킨고 일리가 없다!”

 

 처음 외친 것은 이 말이었다. 히데이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킨고 히데아키 거동의 수상쩍음에 대해서는 싸움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츠나리 등 서군 지휘부가 계속 의혹을 가지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는 어디까지나 낙관(樂觀)하여,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고 미츠나리에게도 말하였고, 요시츠구에게도 말했었다. 이 남자답게 그 이유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의 양자이다

 

 그 뿐이었다.

 

 그는 타이코우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다. 나도 양자라는 입장에서 킨고의 마음을 추측하건대, 설사 모두가 히데요리[頼]님을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랑 내기해도 좋다니까. 킨고는 절대 배반하지 않을 걸

 

 이라고. 그렇게만 히데이에는 말하였고, 더구나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정말 극단적인 낙관론자이시군

 

 라고 미츠나리는 뒤에서 히데이에를 그렇게 평했으며, 실제로 히데이에와는 거병 이래 그런 쪽의 복잡한 정세에 관한 내용을 거의 상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데이에는 세상의 기괴함을, 지금 이 전쟁터를 급변시키고 있는 이변에서 알게 되었다. 이 히데이에라는 시를 좋아하는 세상이 태평 성대한 때였다면 2류 정도의 시인이 되어 있었을 것 같은 이 인물은 자신의 우둔한 정치 감각을 깨닫는 것보다도 오히려 상대의 부도덕(不道德)에 분노했다.

 

 킨고를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용서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미 아래의 우키타 군세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 이제는 진형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건만, 히데이에의 관심사는 히데아키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으며 오히려 그리하다 죽으려고 결심하였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말을 끌고 와라

 

 라고 명령했다. 지금부터 말을 달려 코바야카와 진영으로 돌격하여 킨고를 찾아서는 그와 서로 찔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용서치 않으리

 

 라고 히데이에는 말하며, 등자에 발을 걸어서는 말 위에 올랐다. 아카시 카몬이 말 끈을 잡았다.

 

 옳지 않습니다

 

 카몬은 패전의 관례로써 주장(主將)인 히데이에를 이 전쟁터에서 도망가게 하고자 하고 있었다. 북동쪽을 보자 이미 미츠나리의 사사오야마[笹尾山] 진지[陣地]도 무너져, 방금 전까지 산꼭대기에서 휘날리고 있던 [大一大万大吉][각주:2]의 깃발이 없어진 것을 보면 미츠나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것을 카몬이 말하자,

 

 지부쇼우[冶部少]는 지부쇼우, 나는 나

 

 라고 이 젊은 시인은 말했다. 히데이에가 말하기를,

 

 지부쇼우는 어쩌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이 일전을 일으켰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의지로 이 장소에 와, 움직이고 있다. 다른 것은 모른다. 단지 고() 타이코우 전하의 유언을 받들어 히데요리님의 세상을 지키고자 있는 힘껏 싸웠다. 그것을 저 부도덕한 킨고 때문에 졌다. 킨고를 이 칼로 죽이는 것 이외에 내 의지를 관철할 길은 없다.”

 

 고 히데이에는 계속 말했지만 카몬은 듣지도 않고 재빨리 깃발을 말게 하고 부대 표식을 꺾고선 히데이에의 친위대들에게 그를 둘러싸고 도망치라고 명령하였다. 히데이에는 인마(人馬)의 흐름에 휩싸이듯이 서쪽으로 도망쳤다.

 

 히데이에는 지고 우키타 가문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가문의 번병(藩屛)으로 세웠던 양자들 중에 이 남자만이 양아비의 희망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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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의 히데이에의 생애는 다른 이야기꺼리가 된다.

 그는 이후 사츠마[薩摩]로 달아나 은밀히 시마즈 씨[島津氏]의 비호(庇護)를 받았다. 후에 시마즈 씨가 막부(幕府)에 항복한 뒤 그 존재가 들어났지만, 시마즈 가문과 거기에 그의 부인의 친정인 마에다 가문[前田家]이 함께 막부에 탄원하여 조명(助命)을 빌었기 때문에 사형은 면하여 일단 스루가[駿河]로 보내져 쿠노우잔[久能山] 산에 유폐되었다. 이에야스에게는,

 죽일 것 까지는 없다

 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후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瓊],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등의 주모자들은 처형당하여, 그 목은 쿄우토[京都]의 강변효수(梟首)되었지만, 히데이에는 원래부터 그들에게 정객(政客)으로 대우받지 않았었고, 단지 의협심과 전투력을 인정받아 참가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세키가하라의 전쟁터에서 저 정도로 활약하여 동군을 몇 번이나 위기로 몰아 넣었건만, 그러나 일이 지나고 보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어서, 그 존재 자체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이에야스는 판단했다.

 

 후에 쿠노우잔에서도 옮겨져, 에도[江戸] 남쪽 120(里)[각주:3] 떨어진 해상에 있는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되었다. 히데이에는 이 섬에서 40년을 살았다. 섬에서는 언제나 궁핍하여, 평소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그것을 먹을 것과 바꿔가며 간신히 덧없는 목숨을 이어갔다. 평소,


 한번이라도 쌀밥을 먹고 죽고 싶다


 가 입버릇처럼 되었다. 그것이 에도[戸]에까지 이야기가 퍼져, 어느 해인가 배편으로 몇 가마니의 쌀이 보내져 왔다. 보낸 사람은 그의 옛 신하로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섰기 때문에 지금은 에도에서 잘나가고 있는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였다. 옛 주인에 대해서 켕기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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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이에는 1655년 겨울. 84세의 고령으로 죽었다. 그 사이 히데요리도 죽고, 이에야스도 죽어 토쿠가와 쇼우군[軍]도 이미 4대째인 이에츠나[家綱]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의 패배자이기는 했지만 승리자의 어느 누구보다도, 이 귀양살이를 한 사람은 오래 살았다.

 

==========================================================宇喜多秀家,======================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수어지교를 맺었다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둘째 아들.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유모의 아들을 죽이고 토쿠가와 가문에서 나와 우키나 가문[宇喜多家]에서 2만석을 하사받고 가로를 하고 있었다. 후에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양자가 되기도 하였으나 나중엔 카가 마에다 가문[加賀 前田家]으로 이적하여 가로(家老)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시다 미츠나리의 부대표식에 쓰여 있던 말.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서,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 같다고 함. [본문으로]
  3. 약 480k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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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27 0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키가하라 서군 참전 무장중 최장수한 친구지요. 카이에키 당하기는 했지만 장수로 보상 받았다고 생각했다면 그걸로도 위안 삼을만은 했을듯?

    (P.S..그렇게 생각하자면..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쿨럭;)

    P.S.2 오타니 요시츠구의 분전은 대단하군요. 당시에 갑옷도 못 입을 정도였을 줄은 몰랐습니다(..그러니 평이 그렇게 좋을 수 밖에)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fined BlogIcon 고어핀드 2008.02.27 18: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집안의 사람들 중 제일 흥미 있는 캐릭터인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좋아하는데, 갑옷을 입지 못할 정도라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분전한 걸 보니 인기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28 0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이야~~~ 쌀밥 한 번 먹고 죽고 싶다고 할 정도면 위안까지는....^^;;

    여담이지만... 세키가하라 서군 측에 섰던 시마 사콘의 인기도 대단하다더군요.
    쿄우토(京都)는 오랜 기간 역사의 중심지였던 만큼 어느 곳이건 역사적인 자취가 있는 곳이라 그걸 일일이 자랑으로 하지 않는다는데, 어느 음식점은 과거 시마 사콘의 쿄우토 저택이 있던 곳을 아직까지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고 하더군요.
    ps;다메엣찌님은 호소카와 타다오키 팬?? ^^

    고어핀드님//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오오타니 요시츠구는....글로는 저렇게 간단히 표현되었겠지만, 실제로는 아마...정말...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눈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인 것 같습니다.
    계획으로는 이거 끝난다음에 만화 "꽃의 케이지"의 원작 "일몽안풍류기"를 하려고 하는데, 그 작품에선 마에다 케이지에게 감동을 주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로 나오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2.29 2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꽃의 케이지 +_+ 일본 전국시대를 처음 알게해준 만화. 중학생때 봤는데 참 충격이었던...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1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어떤 면에서 충격이셨을라나... 쩍쩍 갈라지는 것에서?
    쓸데없는 사족이겠지만...원작에선 조선으로 간답니다. 만화는 한국과의 마찰을 피하기위해서인지 류우큐우(오키나와)로 바꾸었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3.03 1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케이지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지요.
    만화 주인공으로 어울릴만한 인물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3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이 찌질하게 나오더군요 ^^

  8. 2013.09.04 1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번이라도 쌀밥을 먹고 싶은게 소원이라니ㅠㅠ내가 만나면 맛있는 한끼 대접할텐데

  9.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2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각주 3번을 48km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

 교우부(刑部)는 두려움에 참지 못하고 성으로 가, 대로(大老) 집무실에서 히데이에를 배알(拜謁)하였다. 집무실 앞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 있는 연못가에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싸리가 피어있었다.

 저것은 말이지 교우부. 알고 있나? 저건 미야기노[宮城野]의 싸리다

 라고 히데이에는 마당으로 시선을 향한 채 말하였다. 히데이에는 싸리를 좋아하여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저택 안에도, 후시미[伏見]에 있는 저택 안에 여러가지 싸리를 키우게 하고 있었다. ‘미야기노[宮城野]센다이[仙台]의 동쪽 교외에서 해안까지의 들판으로 가을에는 싸리, 도라지, 마타리가 흐드러지게 피며, 방울벌레나 귀뚜라미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곳이기에 옛날부터 와카[和歌]의 명소(名所)로 알려져 있다. 이 싸리는 오우슈우[州]다테 마사무네[伊達 正宗]가 히데요시에게 받친 것이라고 한다. 히데이에는 아쉽게도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에 참가하질 못하였기에 이 들판을 본 적이 없었지만, 이 들판을 상상하며 시를 만든 적도 있으며 코카[古歌]도 암송하곤 하였다. 여전히 마당으로 시선을 향한 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여러 마음들이 머무는 미야기노의 꽃과 곤충의 노래들
さまざまに心ぞとどむ宮城野の花のいろいろ虫の声々
라는 시가 튀어나오자,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교우부는 결국 참지 못하여,

 황송하옵니다만……”

 하고 고개를 들어 가문 내 소동(騷動)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교우부는 히데이에에게 자극을 줄 필요를 느껴,

 요전에 병으로 돌아가신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님은 병때문이 아닙니다. 독살(毒殺) 당한 것입니다. 독을 탄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히데이에는 놀랐다. 누가 독을 탔냐고 묻자, 본거지의 필두 가로(筆頭 家老)인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히데이에의 숙부 타다이에[忠家]의 아들.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 나오모리[坂崎 出羽守 直盛]]의 소행이라고 교우부는 말했다. 과연…… 사쿄우노스케의 성격을 보면 뭐든 화를 잘 내며, 생각이 없고 더구나 냉혹할 때도 있기에 독을 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본거지에 있으면서 그런 것이 가능할까? 거기에 무엇보다 증거가 없었다.

 교우부. 경솔한 말을 하지 말거라

 아닙니다. 경솔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사쿄우노스케 무리들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산요우 가도[山陽街道]를 이용하여 소리 높이며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사쿄우노스케 무리라는 것은, 사쿄우노스케를 필두로 토가와 히고노카미[川 肥後守], 오카 에치젠노카미[岡 越前守 전편에 부산에서 죽었다는 부젠노카미의 아들),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와 하나부사 스케노효우에[花房 助兵衛]를 지칭하며, 스케노효우에를 제외하곤 다들 식록(食祿) 5만석 이상인 거물들이었다. 만약 소동으로 발전한다면, 카미가타[上方]주재(駐在)하는 가신단과 본거지에 머물던 가신단 들간의 전투라는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히데이에는 낙관하였다.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과 잘 이야기 해보게

 라고 말하였다. 아카시 카몬은 이름을 타케노리[全登]라 하며 전투의 명인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로, 오사후네가 죽은 다음부터 카미가타 파()의 필두 가로를 맡고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사변(事變)이 되었다.
 
아카시 카몬이 중재에 나섰지만 쌍방을 설득시키지 못하였고, 우선 구() 오사후네파는 후시미[伏見] 저택에서 농성. 본거지파는 오오사카[大坂]로 진출해서 소규모 시가전을 펼쳐 비젠지마[備前島]의 우키타 가문의 오오사카 저택을 점령. 요도가와[淀川]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오사후네파와 본거지파간에 무장대치 상태가 되었다.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히데요시 생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보다가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히데이에와는 친밀한 사이인 오오타니 교우부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였다. 요시츠구는,

 실례가 안 된다면 중재에 나서고 싶은데

 라고 히데이에에게 말하였다. 히데이에는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여, 창피했지만 자기 가문 내분 처리를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말 잘했네. 꼭 좀 부탁하네

 라며 요시츠구에게 부탁하였다. 실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신뢰할 수 있는 남자였다.
 
츠루가[
敦賀] 5만석의 작은 다이묘우[大名]이기는 했지만,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행정을 담당하며 그 수완을 높게 평가 받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가 곁에 두고 키웠다. 히데요시의 바램대로 승진을 거듭하였고 시원스런 성격과 뛰어난 무략(武略)도 있었기에, 히데요시가 어렸을 때부터 키운 다이묘우[大名]들 중에서도 출중한 편에 속한다고 평가 받았다.

 한센병을 앓아 이미 얼굴이 무너져 항상 얼굴을 하얀 천으로 감싸고 양 눈만을 내 놓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토요토미 가의 파벌에 있어서는 출신이나 직무상의 교유관계로 인하여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연이 깊었다. 하지만 미츠나리처럼 파벌 활동은 하지 않고, 초연(超然)하였다.

 중재하기 위해서는 에도 나이후[府][각주:1]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하였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필두 대로(大老)이고 히데요리를 대리하여 정무를 맡고 있으며, 후시미[伏見]에서 정사(政事)를 살피고 있었다. 그 이에야스의 말이라고 하면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가로들도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 정도되는 인물이 일개 다이묘우의 가신단 다툼에 개입하기에는 신분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요시츠구는 이에야스 휘하의 다이묘우를 꼬시고자 하였다. 토쿠가와 휘하의 다이묘우라고 하면 첫손에 꼽히는 것이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였다. 야스마사는 이에야스가 아직 미카와[三河]에 있던 시대 때부터의 후다이[譜代], 칸토우[東]에 있는 이에야스의 영지 250만석 중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에 10만석을 하사 받고 있었다. 관위(官位)는 종오위하(從五位下) 시키부다유우[式部大輔]였다.

 곧바로 야스마사를 방문하였다.

 졸자(拙者)가 도움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라며 찬성하였다. 그 후 함께 분주히 뛰어다녔다. 쌍방의 대표를 후시미[伏見]에 있는 사카키바라 저택으로 부르거나 해서 교섭에 임하였지만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시츠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요시츠구 에게 있어서는 '히데요리 공[公]의 천하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디려는 이 때에' 이러한 소동이 나중에 대란(大亂)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이 둘이 함께 힘쓰고 있다는 소문이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갔다.

 이외로군. 우리 집의 코헤이타[小平太 = 야스마사의 통칭]까지 도와주고 있다는 것인가?”

 이에야스는 떨떠름했다.
 
이 남자는 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동이 천하 대란으로 이어졌을 때야말로,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가만둘 수 없다'는 명목으로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동원하여 그 한 쪽을 토벌하고, 그 토벌군의 기세로 막부(幕府)를 열어버린다 거나, 아니면 우키타 가문의 자멸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보건대 장래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일 것이다. 미츠나리는 기껏해야 20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이기 때문에 자신의 편에 서줄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시 주된 전력(戰力)으로 우키타 히데이에를 꼬실 것이다. 히데이에는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면 용감히 참여할 것임에 틀림없다. 어떤 일이 있건 이에야스에게는 적이 될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의 가문이 자멸하려 하고 있는 것은 이에야스에게는 만족할 만한 일이였다. 그렇기에 그것을 일부러 중재하려 하는 바보도 아니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우직할 정도의 기질을 가진 소박한 사나이로 전투를 경험한 횟수는 많았지만, 그러나 천하의 정치에 관여하거나 미묘한 정세의 움직임을 살피는 듯한 능력은 전혀 없었다.
 
이에야스로서는 지금같은 경우 야스마사를 훈계(訓戒)해야만 했다. 그러나 훈계하는 이상 이에야스는 자신의 은밀한 의도나 정략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지만, 지금은 그것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이 때 주위의 부하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이외로군. 우리 집의~'라고 말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코헤이타 말이다. 생각해 봐라. 이미 시치노스케[七之助]가 올라와 있지 않은가?”

 시치노스케라는 것은 히라이와 카즈에노카미 치카요시[平岩 主計頭 親吉]를 말하며, 이에야스 휘하 다이묘우 중 한 사람으로서 코우즈케 우마야바시 성[城] 3 3천석을 영유(領有)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렇게 칸토우[東]의 휘하 다이묘우를 교대로 후시미[伏見]로 올라오게 하고 있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이미 후시미 주재(駐在) 기간이 지나 있어, 히라이와와 교대하고 어서 귀국해야만 하는데 우키타 가 내분 중재로 바빠 그럴 기색조차 없었다.

 정말 좆병진에도 정도가 있다. 저건 필시 사례금(謝禮金)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중재가 성립되면 우키타 가문에서 사례로 돈이 나온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이에야스도 야스마사를 그런 남자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이럴 경우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이에야스의 말은 곧바로 야스마사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야스마사는 크게 화를 내며 곧바로 칸토우[東]의 본거지로 돌아갈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에야스는 그걸로 족했다. 이에야스는 태어날 때부터 정략가(政略家)인지, 자신의 부하를 움직일 때도 항상 이렇게 속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았고, 거의 버릇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역시 야스마사는 화를 내었다.

 날 그런 놈으로 생각하고 계신 건가!!”

 라고 친한 동료를 붙잡고는 이에야스에 대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고, 그 뒤 이에야스가 기대하던 대로 곧바로 부하들을 이끌고 칸토우로 돌아가 버렸다.

 야스마사가 일을 내팽개쳤기 교섭이 부서졌다. 더 이상 요시츠구 혼자서는 완고한 비젠[備前] 사람들을 달래며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결국 그도 손을 떼었다.

 히데이에는 사태의 정면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오오사카 비젠시마 저택에 농성 중인 우키타 사쿄우노스케의 무리들은 후시미로 올라와서는 히데이에에게 강하게 요구했다.

 우리에게 나카무라 교우부를 건네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사쿄우노스케의 말투만은 공손하였지만, 태도는 거만하였고 이렇게 된 이상 주군이라고 하여도 칼을 들고 응수할 수도 있다는 기세였다. 후에 이 인물은 '사카자키 데와노카미'라 이름을 바꾸고 이에야스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되는데 전설의 '센히메() 소동'[각주:2]뿐만 아니라, 여러 번 자기의 뜻대로만 하기 위해 소동을 일으켜 결국에는 자멸한다. 말하자면 성격적으로 '전문 소동꾼'이기에, 지금 같은 경우에 히데이에에게 조금 정치력이 있다고 하여도 부드럽게 처리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히데이에는 화를 내었다.

 교우부도 내 부하이다. 그를 버리고 너에게 건넨다면 가문 내에서 내 면목이 서질 않는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며 히데이에도 역시 눈에 핏발을 세우며 이 미친 사람 같은 가로를 달래려고 하였지만, 사쿄우노스케는 흥분만 할 뿐 손댈 수가 없을 정도였다. 후시미[伏見]로 왔을 때부터 이 미친 듯이 시끄러운 인간은 외모부터 특이하게 하고 나타났다. 머리를 빡빡 밀고서는,

 우리의 바램이 통할 때까지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

 며 그것을 자기들 무리에게도 강요하였다.

 다음 날도 사쿄우노스케는 왔다. 하지만 이 날 히데이에는 기분이 좋았다. 소동의 원인인 나카무라 교우부를 타일러 돈을 주어서는 지난 밤에 은밀히 카가[加賀]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교우부는 어딘가로 쫓아보냈다

 고 히데이에는 말하였다. 사쿄우노스케는 의심했다.

 거짓말이죠?”

 라며 빤히 쳐다보았다. 히데이에는 그 건방진 태도에 화가 날뻔했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사쿄우노스케는 우키타 가문 10명의 가로 중 7명을 자신의 무리에 끌어들여 이끌고 있는 이상, 잘못하면 가문이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이렇게 참고 있는 것만이 히데이에가 가진 쪼그만 정치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이 집을 자네 발로 직접 찾아 다니시게. 그런데 만약 찾아도 교우부가 없다면 자네의 그 태도는 가만 두지 않겠네

 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 날은 어쩔 수 없이 사쿄우노스케 들은 물러나, 오오사카의 비젠시마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쿄우노스케와 내통하고 있던 자가 있어, 교우부에게 돈까지 쥐어주며 보냈다는 것을 알렸다. 사쿄우노스케는 크게 화를 내며,

 메야! 주군이 그렇게까지 교우부를 두둔하신다면야 주군은 적이다!”

 라고 말하며, 비젠시마 저택의 요소요소에 전루(戰樓)를 세우고 길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였으며 밤에는 화톳불을 피워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당연히 이 상태로 놔두면 토요토미 정권의 수도(首都)라고 할 수 있는 오오사카에서 시가전이 벌이질 것이다. 히데요리를 대신하여 정무를 맡고 있던 이에야스도 이대로 놔둘 수는 없게 되어, 결국 몸을 움직여 대로(大老)로서 판결을 내렸다. 원래대로라면 주인에게 대항하려 한 가로들은 당연히 배를 갈라야 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다른 가문으로 보내 근신을 명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 그쪽 심정은 잘 알고 있다. 틈을 보아서 풀어주겠다는 식의 말을, 부하의 입으로 전하게 하였다. 더구나 다른 가문에서 근신 중인 기간 중에 은밀히 여러가지를 보내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이에야스에게 감사하였고 충성을 맹세했다. 벌을 받은 것은 우키타 사쿄우노스케, 토가와 히고노카미, 하나부사 시마노카미, 하나부사 스케노효우에. 이들은 후에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전부 이에야스 쪽에 붙었고, 사쿄우노스케와 히고노카미는 다이묘우[大名]가 되었으며, 시마노카미는 6000석의 상급 모토[旗本], 스케노효우에도 이에야스를 직접 모시는 자리에 앉게 된다.

 그 이상으로, 이 처리는 우키타 가문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떠났기 때문에 그들의 부하들도 떠나, 이 때문에 우키타 가의 동원 병력은 30% 정도 저하되었다.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이시다 미츠나리]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

 라고 이에야스는 나중에 이 사건을 떠올리며 술회하였다. 자기가 미츠나리였다면 히데이에에게 조언을 하여 우키타 가문의 내분을 어떻게든 조용히 시키고, 어쨌든 저렇게 죄인이 나오지 않게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우키타 가문의 머릿수가 적어진 결과 전쟁터에서의 움직임이 그만큼 둔해진 것이었는데, 미츠나리는 그때 거기까지 내다보질 못했다. 다른 가문의 작은 소란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 그런 것을 보아도 미츠나리는 원래부터 내 적이 될만한 인물은 아니다. 무략(武略)이 없다……고.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에도[江戸]는 이에야스의 본거지가 있던 곳. 나이후[内府]는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식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2.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센히메는 이에야스의 손녀이며,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부인이다. 오오사카 성이 함락될 때, 이에야스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누가 그녀를 구해올 자는 없는가? 바라는 것은 모두 들어 주겠다' 고 하여 사카자키(우키타 사쿄우노스케)가 이에 나섰다. 그는 무너지는 대들보로 인하여 얼굴에 화상을 입으면서 구했고, 구한 뒤 자신의 마누라로 삼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이미 얼굴이 화상으로 인하여 보기 흉하였기에, 센히메는 거절하고, 혼다 타다가츠의 손자이며 미남으로 유명한 혼다 타다토키[本多 忠刻]에게 시집가게 된다. 이에 분노한 사카자키는 시집을 가는 행렬의 가마를 탈취하려 하였지만, 미리 적발되어 1만명의 병사들이 저택을 포위하자 자살했다고 한다......그러나 실은 센히메는 토요토미 측에서 이에야스로 보내졌으며, 중간에 호위를 맡은 것이 사카자키였다고 한다. 시집 행렬 가마 탈취는, 이에야스가 센히메를 쿄우토[京都]의 쿠게[公家] 가문으로 시집 보내는 중매를 사카자키에게 의뢰하여 실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센히메가 혼다 타다토키에게 시집가는 것을 알고, 막부가 자기을 무시했다는 것과 상대편 쿠게[公家]에 대한 면목을 잃어 탈취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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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9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 미츠나리가 아무 관심도 안 기울였다니...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아깝군요_-_;;; 그 애송이 중녀석(본문 표현대로라면;)에게가 아니라, 오오타니 요시츠구에게57만석을 줘놨더라면 어땠을까 궁금해 지는데요(...)

    P.S. 예나 지금이나 얼굴에 관한 비극은 참... 센히메 소동도 그렇지만, 역시 잘 생기고 볼일(-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9 2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사람은 이런 해석을 하더군요.
    이시다 미츠나리는 어디까지나 히데요시의 유언을 존중하여, 이에야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고.
    그렇기에 주제넘게 나서지 않았다는 해석을 하더군요.

    떠도는 말로는 히데요시가 요시츠구에게 100만명을 맡기고의 그가 어떻게 지휘를 하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그렇기엔 너무 다방면으로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아니라면 세키가하라 때의 너무 선명한 죽음에 후세 사람들이 [判官贔屓]해서 과대 평가를 했을 수도 있고)..... 이 인물은 현재의 평가와 당시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s;초반만 그렇죠? :) 뭐 0에서 1로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다곤 합니다만, 경험 상 1까지만 가면 얼굴은 그다지 소용 없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20 1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키가하라에서 시종일관 치밀한 예측으로 싸우다 가장 멋지게 전사한(;)인물이기에, (시마 사콘은 합전 시작 얼마 안 되서 배에 구멍이 난 뒤로는 전장이탈이었고-_-;) 그런 평이 남지 않았나 싶더군요. 혁신에서 몇 안되는 캐러에게 있는 전용스킬 '강습'을 넣어 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듯 싶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20 14: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그 짧은 시간은 굉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요시츠구는 미담만 전해져 내려 오는 것이 왠지 전 이상하더군요(제가 모르는 추문이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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