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우토[京都]의 산쥬우산켄 당[三十三間堂] 앞에 요우겐 원[養源院]이라는 절이 있다. 사람들은 요우겐 원 본당의 천장을 일컬어, ‘혈천정[血天井]’이라고 하다. 기분 나쁜 흑색으로 천장에 늘러 붙은 혈흔 – 그것이 장렬한 낙성을 보여준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와 그의 사졸들이 흘린 피였던 것이다.

 절의 역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절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가 망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였지만 나중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각주:1] 요도도노의 동생이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수우겐인[崇源院][각주:2]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각주:3] 재건할 때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이 세웠던 절을 재건시킬 수 없다고 하자, 후시미 성에서 전사한 토리이 모토타다 들의 혈흔이 새겨진 후시미 성의 마루바닥을 요우겐 원의 천장으로 하여 모토타다 들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세웠다고 한다.[각주:4]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의 전초전 격으로 치러지고 낙성된 후시미 공방전이야 말로 미카와 무사[三河武士]의 본질을 잘 알려주는 전투였다. 의리 있고 완고하며 주군을 위해서는 온 몸을 바친다. 그러한 미카와 무사의 전형을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가 농성전에서 보여준 것이다.

 토리이 모토타다는 부친 이가노카미 타다요시[伊賀守 忠吉][각주:5]의 아들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당시엔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을 대대로 섬겼다는 가문[普代]에서 태어났다. 모토다다는 13살 때부터 3살 연하인 이에야스[家康]를 근시(近侍)하였다.

 미카와 무사 모토타다의 충섬심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땐가 이에야스가 모토타다에게 몇 번 모토타다의 공적을 상찬하는 표창장[感状]을 주려고 하자 모토타다는,
 “표창장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다른 가문에 취직할 때 이력서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토쿠가와 가문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가진 적이 없기에 그러한 표창장은 저에겐 휴지쪼가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고 거절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히데요시[秀吉]가 모토타다에게 조정의 관직을 주력 하자 모토타다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뭘 하건 서투르기에 이군(二君)에게 충성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거기에 미카와에서 자란 시골뜨기라 역시 뭘 하건 투박하여 도저히 관위를 얻어 전하(=히데요시)의 앞에서 어떤 실수를 할 지 모르옵니다. 부디 관위에 관해서는 생각을 거두어 주시길.”
 하고 완고히 사퇴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정중하면서도 히데요시에 대한 접근을 거부한 것이다.

 모토타다의 경우 이러한 의리 있는 모습, 완고함은 자신의 주군 이에야스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1580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 측의 타카텐진 성[高天神城]을 공격하였을 때, 격전을 치른 뒤 모토타다의 부대는 험한 산길에 본진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급부대가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계속 된 격전에 피로와 굶주림으로 지쳐갔다. 그러던 중 모토타다에게 한 병사가 밥을 한 상 차려왔다. 부근의 민가를 돌아다니며 조달해 온 것이었다. 모토타다는 병사의 얼굴을 보고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으나 행여라도 싶어 보급대가 도착하였는지, 병사들은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역시 아니라고 하였다. 모토타다는 말했다.
 “장수인 자가 병사들과 함께 고생도 하지 않고 무슨 전공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식량이 없다면 너희 병사들과 함께 굶어 죽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고 말하며 차려온 밥상을 눈 앞의 절벽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1600년 5월 17일. 이에야스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기 전날이었다. 중간에 후시미 성에 들른 이에야스는 이미 62세가 된 모토타다를 불러, 자신이 부재 중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로 임명하였다.
 이미 이에야스는 자신이 동쪽으로 떠나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거병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여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이 후시미 성은 사방에서 이시다 측에게 포위되어 고성(孤城)이 될 것이다. 그런 희생양을 부탁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토리이 모토타다 말고는 없다고 이에야스는 생각한 것이다.
 모토타다는 이에야스에게 수비장수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이시다 측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있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수비장수의 역할은 힘들 것이네. 수비병도 많이 남기지 못하여 고생할 테이지만…”
 하고 말을 꺼내자,
 “지금은 아이즈로 출병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한 부대라도 많이 데려가시길”
 하고 답하며 모토타다와 함께 후시미 성의 수비역할을 맡게 된 나이토우 이에나가[内藤 家長],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 家忠]들도 아이즈로 데려가길 바란다며 반대로 이에야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이것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날 밤. 이에야스와 모토타다는 술을 마시며 어렸을 적 추억 등[각주:6]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모토타다가,
 “만약 이시다의 거병 등이 있다면 오늘 밤이 이번 생의 마지막이옵니다.”
 고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모토타다의 뒷모습을 보며 이에야스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예상대로 한 달이 지나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거병하여 곧바로 후시미 성 공격에 나섰다. 공성군 총세 4만에 수비하는 병사는 2000미만[각주:7]이었다. 누가 보아도 낙성은 시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성 수비병의 사기가 높아 10일간의 포위공격이 이어져도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공격군 속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가 휘하의 코우가[甲賀] 출신자를 이용하여 그의 일족으로 성안에서 수비를 하고 있던 자에게 내응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고향에 있는 너의 부인이나 아들을 전부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응자가 지른 불로 성안에 불이 나 혼란에 빠지자 공격군이 단번에 성 안으로 진입했다. 세 번째 성관[三の丸]의 수비장인 마츠다이라 이에타다, 서측 성관[西の丸]의 수비장인 나이토우 이에나가도 연달아 전사하여 남은 것은 본성[本丸]의 토리이 모토타다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모토타다는 마지막까지 할복을 거부, 적병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죽이기 위해 계속 분전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62세의 노구에 피로가 쌓였다. 지친 모토타다는 나기나타[薙刀]를 지팡이 삼아 계단에 앉아있을 때 적 사이카 마고이치[雑賀 孫一][각주:8]가 그 목을 베었다고 한다.

도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1539년 생. 토쿠가와[徳川]를 대대로 섬긴 집안 출신.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공을 세웠고,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때 발에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한다.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뒤 카이[甲斐]에서 호우죠우 우지카츠[北条 氏勝][각주:9]의 부대를 격파[각주:10]하여 카이 군[甲斐郡] 안에 영지를 하사[각주:11]받았으며, 이에야스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 됨에 따라 시모우사[下総] 야하기[矢作] 4만석에 봉해졌다.[각주:12]

  1. 1619년. [본문으로]
  2. 2011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 오고우[お江]. [본문으로]
  3. 1621년. [본문으로]
  4. 요우겐 원 뿐만이 아니라 후시미 성의 혈천정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본문으로]
  5. 소설 ‘대망’에서, 인질시대의 이에야스가 조상의 성묘를 핑계로 오카자키에 잠깐 들렸을 때, 타다요시는 자신의 집 창고에 이마가와 가문 파견 무장들의 눈을 피해 쌀과 돈, 무구 등을 축적하여 보여주며 다시 이 성의 주군이 되었을 때 쓰라며 미카와 무사들의 와신상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에 나오는 그 인물. [본문으로]
  6. 모토타다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인질로 잡혀있을 때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었다. 또한 이에야스는 같이 놀다 맘에 안 들어 모토타다를 발로 찼다는 일화도 있다. [본문으로]
  7. 처음엔 약 1800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이에야스의 정무소였던 오오사카 성[大坂城] 서측성곽[西の丸]를 지키던 사노우 츠나마사[佐野 綱正]와 휘하 600명이 모우리 가문[毛利家]에 쫓겨 후시미로 왔고, 이에야스의 오우미의 영지 코우가 군[甲賀郡]의 호족 - 이 들중 하나가 나중에 서군과 내통 - 들이 입성하여 후시미 성의 수비군은 총 2500~3000 사이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사이카 마고이치는 스즈키 시게토모[鈴木 重朝]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미토 토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에 임관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의 맹장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손자. [본문으로]
  10. 호우죠우 1만에 대하여 미즈노 카츠나리[水野 勝成]와 함께 2000여를 이끌고 기습하여 승리. 이에야스는 “이 땅은 자네가 무용으로 취한 땅이니 앞으로도 이 땅을 다스려라” [본문으로]
  11. 사족으로 이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에야스가 타케다[武田]의 명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의 딸을 찾아서 데려오라고 하자 모토타다는 찾을 수 없다며 보고했다. 나중에 어떤 이가 이에야스에게 노부후사의 딸이 있는 곳을 보고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모토타다가 데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모토타다 녀석 빈틈이 없구만”이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모토타다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3남1녀를 낳았다.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삼걸인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2만석,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10만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0만석에 이어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와 같은 4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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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kyup 2011.03.30 0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전형적인 이에야스 가신이지요. 이 친구 아들이 이에야스 큰칼잡이 시동이었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30 09: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토리이 모토타다는 항상 덧붙여지는 말이 "미카와 무사의 거울"이더군요.

      큰칼잡이 시동이라...죄송하지만 거까지는 모르겠군요. ^^;
      대충 언제 쯤의 큰칼잡이[太刀持ち]면 모토타다의 몇 번째 아들정도는 추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그런 일을 맡았는지는 제 지식이 부족하여 모르겠습니다.

    • ckyup 2011.04.01 0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는 잘 기억이 않나지만요, 이름은 아마 '신타로'로 기억하네요. 그때가 아마 히데요시가 한참 정권잡고 잘나갈때 였던가...?, 암튼 그랬던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2 1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밑에 소슈님의 말씀을 듣고 대망에서 찾아 보았더니... 있군요. 이에야스가 상락하여 히데요시의 군문에 들어가는 자리에서 칼을 들고 있던 토리이 신타로[鳥居 新太郎]우 나중에 토리이 타다마사[鳥居 忠政]가 되는 인물이군요.

      대망에선 확실히 몇 시간 동안 칼을 들고서 조금도 흩으러지지 않아 그것을 맘에 들어한 히데요시가 이부제 히데나가의 딸(양녀)과 신타로우를 결혼시키려고까지 하는 것으로 나오는군요(어이가 안드로메다로~)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서는 그의 아비인 토리이 모토타다가 확실히 이에야스를 따라 상락하는 인물 중에 한 명으로 나오긴 하는데, 역시 (대망에 따르면)당시엔 코쇼우[小姓]라는 미관말직에 있었던 지라 신타로우의 이름을 찾아 볼 수는 없군요.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02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분의 기억이 맞습니다.

    대망에서는 도리이 신타로가 큰 칼을 하도 잘 잡고 있어서 히데요시에게 무쇠팔뚝이란 이름을 하사받는다는 챕터가 있지요.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의 결혼 동맹을 체결하기 직전 쿄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이야기는 잠시 각설하고, 후시미 성의 방어는 아마 세키가하라의 승부에서 동군에게 큰 이득을 안겨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일설에는 시마즈가 동군쪽을 편들고 싶었던 것을 거부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서군의 진행을 늦추면서 이에야스에게 많은 시간을 벌어준 셈이니까요.

    아마 그 이후로도 도리이 가문은 다이묘의 위치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막부와 함께 운명을 다했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2 1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대망의 해당 부분을 찾아보았는데, 이에야스의 코쇼우[小姓]따위에게 무려 종사위하(従四位下) 산기[参議]의 양녀와 맺어주려고 하는군요. 제가 가진 지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후시미 성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입성은....
      우선 요시히로의 편지를 보면 이에야스의 입으로 직접 부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근데 그걸 문서화 해서 달라는 요시히로에게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에 바쁜 이에야스는 깜빡 잊고 그냥 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몇 번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요시히로를 토리이 모토타다 등이 거부했다고 하는군요.

      당시 요시히로는 휘하에 군사가 적어서 (약 1000 미만이었다고 하네요 - 것도 대부분 조카 토요히사[豊久]의 군사였다고 하네요. 요시히로 직속은 대략 200~300정도) 주도적으로 자신의 거취를 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던 듯 합니다. 사츠마[薩摩]로 편지를 보내서는 계속 '군사 좀 보내주세요 징징~'댄 거 보면 한탕 노리려고는 했는지 몰라도 동군 편에 설려고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이에야스하고는 굉장히 친했다고는 합니다...만 주위가 온통 서군인지라...)

      토리이 가문은..
      신타로우 즉 토리이 타다마사[鳥居 忠政] 때 아비 모토타다가 후시미 성에서 죽은 덕분에 차츰차츰 가증되어 모가미 가문[最上家] 카이에키[改易] 뒤 빈땅이 되어 있던 야마가타[山形]에 최대 24만석의 영주가 되었습니다만....모토타다의 손자(타다츠네[忠恒] 때 병크(남아있는 배 다른 동생을 양자로 세우면 되는데 다른 가문에 양자로 보낸 친동생을 다시 데려와 죽기 바로 직전에 양자로 세우려다 막부에게 인정 못 받음)로 3만 여석(최저일 때는 1만석) 정도로 떨어지는 식으로 부침이 있었지만 이후 모토타다의 핏줄은 끊기는 일 없이 6대 타다테루[忠英] 이후는 대대로 막부의 요직(소우샤반[奏者番] 겸 지샤부교우[寺社奉行] -> 와카토시요리[若年寄])을 거쳤고 그 중 한명(8대 타다오키[忠意])은 막부의 수상인 '로우쥬우[老中]'가 될 정도로 중용 받습니다.

      막말유신기 때는 에도[江戸]에 가까운 미부 번[壬生藩]에 있으면서도 좌막이 아닌 근왕으로 신정부 측에 서 번을 유지할 수 있었고(12대 타다토미[忠宝]), 폐번치현 이후 신정부의 거물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의 구미사절단[岩倉使節団] 때 꼽사리 껴 미국에 사비유학한 뒤 자작(子爵) 위를 받았다(13대 타다후미[忠文])고 합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02 2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도리이 가문이 그렇게 존속이 되는군요. 시대의 흐름을 나름대로 참 잘 읽은 셈이네요. 미부라는 단어를 보니 생각나는건 미부로시가 생각나는군요. 역사란 배우고 배워도 여기서 튀어나오고 저기서 튀어나오고.

      그나저나 제가 언제나 이 곳에서 가르침을 받아가서 너무 이문(?)이 많이 남는군요. 감사함을 어떻게 표시해야할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3 08: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부로시[壬生浪士] 즉 신센구미[新選組]는 쿄우토[京都]의 미부[壬生]라는 곳에 있는 곳이고, 토리이의 미부 번[壬生藩]은 칸토우[関東] 시모츠케[下野] 즉 지금의 토치키 현[栃木県]에 있던 곳입죠.

      미부[壬生]의 어원의 저습지..라고 하더군요. 칸토우에 있는 미부건 쿄우토의 미부건 그런 이유로 같은 이름이 붙지 않았을지..

      이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그저 우연히 관련 자료가 있었을 뿐입니다.

  3. Gyuphy IV 2011.04.03 0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PS3에 쩔어살다보니 이래저래 답방이 늦습니다(__) 그러고보면 플3계 게임 전국무쌍3에서 토리이 모토타다 지키는 후시미성을 불바다로 만드는 미션이 있긴 했었는데 큐슈에서 텔레포트 해오신겐지 긴치요님이 낙성 시킨다는 황당무계한 설정이더군요(허어..)

    그러고보면 이야기가 좀 삼천포로 가버리긴 합니다만 이와쿠라 토모미 구미사절단이 미국에 내려놓고(;)간 사람들이 꽤 되는군요. 이를테면 오오쿠보 토시미치의 차남 마키노 백작이라거나.. 시대는 좀 다르지만 카네코 후작이라거나 니토베 이나조라거나 미국유학파출신이 메이지후기에 큰 영향을 주는걸 보면 참 메이지때의 이나라 사람들의 선견지명은 좀 놀라운데가 있습니다(ㄷㄷ..)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3 0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 그 부인은 왜 후시미 성에... 남편 따라 이세[伊勢] 오오츠 성[大津城]에나 가시지...아....사이 안 좋으시지..

      과연 규피 님!! 그쪽에 먼저 눈이 가시는군요. ^^
      근데 전 메이지 신정부 이후는 문외한에 가까운지라...

      다만 그런 것 같습니다.
      바로 전까지 양이(攘夷)를 외치던 인간들이 그것이 허황됨을 깨닫자 마자 순식간에 몰려가 배우려는 자세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물론 이것도 요즘엔 '다이죠우이[大攘夷]'라 해서 외국문물을 배우는 것도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펼쳐 서양에 대항하기에 '죠우이 '라는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지만 말입죠)

 사서는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모략 있는 인물이었지만 얼핏 보기에는 여성을 보는 듯 했다]
 흰 피부에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던 듯하다.
 전투에 임해서도 위압감을 풍기는 듯한 인물이 아니었다. 말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고 목면으로 된 겉옷(
羽織)를 걸쳤으며 투구의 장식이 이치노타니()[각주:1]라는 평범한 것이었다.

 한베에에게는 기묘한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리를 자주 움직였으며 추울 때는 손을 파리처럼 비벼댔다. 자신의 주군인 히데요시(
秀吉)[각주:2]의 앞이라 하더라도 다리를 정신 사납게 떨거나 바꾸었다. 매우 의아히 여긴 어느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다. 한베에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것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야. 갑작스런 사태가 일어났을 때 막상 다리가 저리거나 손이 얼어서 움직이지 못하면 어처구니가 없잖아? 조금 버릇없이 보일지는 몰라도 급작스런 때를 의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지"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임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한베에는 센고쿠(戦国) 굴지의 천재군략가로서 유명하다. 그 병법의 묘를 완벽한 작품으로써 살려 세상에 이름을 날린 것이 미노(美濃) 이나바야바 성(稲葉山城) 쿠데타이다.
 1564년 한베에는 21살. 도우산(
道三)의 시대부터 사이토우 가문(斉藤家)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이 당시의 사이토우 가문 당주는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竜興)였다. 암우하며 주색에 허우적대는 인망이 없는 당주였다.
 한베에의 장인인 안도우 이가노카미(
安藤 伊賀守)[각주:3]가 행실을 올바로 하라고 충언을 하자 타츠오키는 도리어 화를 내며 근신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타츠오키의 측근들은 안도우 이가노카미의 사위인 한베에도 무시하기 시작하여 어느 날 술 마시고 있던 요시오키의 총신()은 망루에서 등성하고 있던 한베에에게 오줌을 쌌다. 이때 한베에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지만 마음속으로는 주군 타츠오키를 시작으로 한 이나바야마 성 안에 있는 자들의 콧대를 꺾어 놓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한베에는 타츠오키의 시동인 동생 큐우사쿠(久作)[각주:4]에게 꾀병을 부리라고 하여 그 간병을 핑계로 의약품을 실은 수레를 성 안에 들여보냈다. 그 안에는 무구를 숨겨 놓았다. 이렇게 한베에와 그 부하 17명은 성 안 깊숙한 곳에 있는 큐우사쿠의 방에 들어가 거기서 날이 저무는 것을 기다렸다. 곧이어 밤이 되자 한베에 일당은 재빨리 전투준비를 마치고 그 중 한 명이 성 안에 위급을 알리는 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북을 쳤다. 갑작스런 북소리에 성 안 모두가 당황했다. 그 순간 숨어있던 한베에의 부하들이 숙직하는 무사들을 습격했다.
 처음 약속한대로 다시 북을 치자 한베에의 장인인 안도우 이가노카미가 수하 천여 명이 이끌고 단번에 성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타츠오키는 여성들과 함께 서둘러 도망쳤다.

 한베에는 뛰어난 지략으로 순식간에 이나바야마 성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빼앗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 뒤 순순히 성을 타츠오키에게 건넸다.[각주:5] 그리고 자신은 모반을 일으킨 사람이라며 거성인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를 동생 큐우사쿠에게 물려주고는 오우미(近江) 이부키야마(伊吹山) 산기슭에 은거해버렸다. 거기서 세상과 연을 끊고 독서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한베에가 다시 전란의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였다. 1567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공격받은 사이토우 타츠오키가 이세(伊勢)로 도망쳐 미노(美濃)는 노부나가의 것이 되었다. 한베에도 장인 이가노카미의 주선으로 오다 가문을 섬겼고 다음 해인 1568년에는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각주:6]에게 파견되어 이후 히데요시의 참모로서 그 지능을 한껏 발휘하게 된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浅井)-아사쿠라(朝倉) 연합군을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물리쳤고 그와 동시에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거성 오다니 성(小谷城)의 지성(枝城)인 요코야마 성(横山城)를 점거하여 히데요시에게 수비를 명했다.
 다음 해인 1571년.
 아자이 나가마사는 이 요코야마 성을 탈취하기 위해서 히데요시가 없는 틈을 타 7000의 군사를 이끌고 맹공을 가했다. 한베에가 수성의 지휘를 맡았다. 한베에는 일부러 성안 병사가 적게 보이도록 만든 뒤 적이 깔보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기다려 일제히 사격했다. 아자이 군의 기세가 죽어 물러나면 쫓는 일 없이 제자리를 지켰고 또 공격해 오면 총과 활을 쏘는 전법을 거듭했다.
 곧이어 해가 저물자 아자이 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베에가 기다리던 바였다. 미리 성 밖에 수백 명의 저격병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성에서도 추격대를 내보냈다. 협공에 아자이 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오다니 성으로 도망쳤다. 한베에는 깊이 쫓는 일 없이 성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히데요시가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아자이 나가마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즈음의 한베에에 대해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군대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한베에는 아들인 사쿄우(
左京)[각주:7]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사쿄우가 잠깐 자리를 떴다. 화장실에 갔다 온 것이다. 한베에는 그런 자세를 못마땅해 하며 화를 냈다.
 "소변이 마려우면 앉아서 싸라. 무도(
武道)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바지에 오줌을 쌌다고 하면 칭찬을 들을지언정 누가 비웃겠느냐!?"

 1575년 한베에는 나가시노 전투(長篠い)에 참전하였고 그 후 히데요시가 츄우고쿠() 정벌의 사령관에 임명되자 그의 참모로 종군하였다. 특히 히데요시가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의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을 [말려 죽이기(干殺し) 전법]으로 나가게 만든 것은 한베에의 헌책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기도 전에 한베에는 죽었다. 결핵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은 병간호를 위해 쿄우토(京都)에 갔었지만 전황이 걱정된다며[각주:8] 다시 하리마(播磨)로 돌아와 거기서 결국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났다.

[다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
1544년 미노(
美濃) 이케다 군(池田郡)[각주:9]에서 태어났다. 부친 시게모토(重元)가 죽어 10살의 나이[각주:10]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 성주가 된다.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 요시타츠(義竜), 타츠오키(竜興)의 삼대를 섬겼지만 미노(美濃)가 노부나가(信長)에게 넘어가자 오다 가문(織田家)을 섬기다 1579년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 포위 중 병으로 죽었다. 36세.

  1. 겐페이(源平)가 싸우던 시대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가 깍아 세운 듯한 절벽을 타고 내려와 이치노타니(一ノ谷)에 있는 헤이케 군을 물리친 것에서 본받고자 만든 투구의 장식. 임전무퇴를 상징하는 것으로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 링크를 누르면 볼 수 있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투구가 유명한데 이것이 원래 타케나카 한베에의 투구였다고 한다. 죽을 때 유품분배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함께 있던 쿠로다 나가마사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는 주군이 아니다. 한베에의 주군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信長)로, 히데요시에게는 파견을 나가있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미노 삼인중(美濃三人衆)의 하나인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 [본문으로]
  4. 타케나카 시게노리(竹中 重矩).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노부나가 군 행세를 하며 본진으로 들어와 노부나가의 목숨을 노리던 엔도우 나오츠네(遠藤 直経)를 죽인 인물. [본문으로]
  5. 실제로는 약 1년 가까이 계속 점령하며 이제 미노는 내꺼임~ 이라는 푯말과 세금고지서를 날리는 식으로 노력했지만 다른 호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성을 내놓고 본거지로 퇴거. [본문으로]
  6. 초창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이름 [본문으로]
  7. 타케나카 시게카도(竹中 重門). 후에 '토요카가미[豊鏡]'라는 히데요시 일대기를 저술. [본문으로]
  8. 무사는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다며 돌아왔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9. 현재는 이비군(揖斐郡)에 통합되어 있다. [본문으로]
  10. 16세~20세까지 여러 설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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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들바람 2009.05.12 1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케나카 한베에는 왜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나라훔친 이야기를 쓴 시바료타로는 역사적으로는 히데요시가 스노마타성을 만든 이후에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등용하러 갔는데 6번실패하고 7번째에 오다노부나가의 가신이 아니라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는 조건으로 승락한 것이다 라고 하더군요. 안도 이가노카미도 한베에가 등용되고 나서 등용되었지만 1년 후에 반란을 획책하다 발각되어 도망가서 영지가 몰수되었다고 하고요. 이 내용은 본문의 내용과 엇갈리는 듯 하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12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책에 실린 차례대로 하느라 늦어졌습니다. ^^

      소설 상의 이야기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베에와 히데요시가 마치 제갈공명과 유비와 같이 쓰여진 것은 그의 아들인 시게카도(重門) - 본문에서는 사쿄우(左京)로 나오는 - 의 토요카가미(豊鑑)의 기술로, 정사로 여겨지는 신장공기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내용입니다.(신장공기에서는 오히려 타케나카 한베에보다 그의 동생(본문에서 꾀병을 부려 이나바야마 탈취를 도운)인 큐우사쿠(久作)가 엔도우(遠藤)를 죽인 이야기가 먼저 나올 정도입죠.

      안도우 이가노카미는 1580년에 타케다 가문과 내통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쓰기 전까지 계속 오다 가문에 속해 있었습니다. 1570년(이나바야마 성이 노부나가에게 함락되는 것은 1567년)의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도 참가했습니다.

      신장공기에서 한베에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히데요시에게 하리마와 타지마를 맡긴다는 1577년의 기사에서 나올 정도입니다.

      덧붙여...스노마타 성도 히데요시가 축성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많으니까요(있던 성을 수축했다는 설이 강합니다)

      일본에는 시바사관(司馬史觀)...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입죠. 역사가들은 강연할 때마다 시바 선생님의 글과 다르다는 말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할 정도라고 하네요.

  2. 산들바람 2009.05.13 0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가 삼국지로 따지면 진수의 정사에 해당되나 봅니다. 주로 접하는 책이 역사소설이다보니 작가들이 중간중간 달아놓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언급해 놓은 것 외에는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근거를 찾기가 쉽지가 않아 확인도 어려워 보통 비판없이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신장 공기는 언제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14 1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정사..라고 할 정도로 거창하진 않고 신빙성이 높은 자료입니다.

      본전과 열전...식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측근이라고 하던 사람이 노부나가에 관해서 쓴 글인데, 어리석을 정도로 솔직하다는 소릴 들을 정도에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서도 정확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생각없이 단어를 선택해 혼란스럽게 한 점 죄송합니다.

  3. dameh 2009.05.13 1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그 쿠로다 나가마사의 태양전지판 투구의 정체가 궁금했었는데 이 글덕분에 어느정도 의문이 풀린것같습니다(심심한 감사를..)

    여담이지만 역시 정사나 야사나 통치와는 별로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군요(;;역시 미노는 호족이 참..)

  4. t 2012.06.13 1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베는 멋진 인물이군요 ^^

三. 

 이 일행이 에치젠(越前)을 떠나 오오사카(大坂)에 들어섰을 땐 이미 히데요시가 각별한 건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그 건축 완성의 빠름으로 추측하건데,

 “아씨를 만나기 전부터 오오사카에 부하를 보내어 지시해 놓으셨나 봅니다”

 하고 유모는 또다시 히데요시(秀吉)를 칭찬하였다. 챠챠(茶々)는 여태껏 이렇게 훌륭한 건물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의미에서는 만족하였다. 유모는 말했다.

 “히데요시님이 얼마나 마음씀씀이가 좋은 분이신가 하면, 망부이신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님, 망모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의 기일(忌日)에는 스님을 불러 재를 올리라고 일부러 말씀해 주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호의 이상인 것이옵니다.”

 하고 유모는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 중요한 것으로,

 “아자이님 일족의 여성들을 불러도 괜찮네”

 라고도 히데요시는 말해주었다. 노부나가(信長) 시대의 아자이 가문은 천하의 대역죄인 이었다. 노부나가는 다년간 악전고투하며 아자이 가문을 멸하자마자, 자신의 매제인 나가마사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고 금가루를 입혀서 그것을 잔으로 해서는 술을 마셨고 부하들에게도 파도타기를 시켰다. 그럴 정도로 굉장히 증오하였다. 그의 일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들 중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런 금제(禁制)를 풀어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 능력에 따라서는 거두어들이겠다.

 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옵니까?”

 유모는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치고는 평소 신앙하는 아타고(愛宕)의 승군지장(勝軍地藏) 쪽을 향해서 감사하였고, 챠챠에게도,

 “아씨 기뻐하십시오. 이리 되어야만 가문의 영령들 한 분 한 분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이리 기쁠 수가”

 하고 말했다. 하지만, 챠챠는 그다지 감동도 하지 않고,

 “그렇구나”

 하고 끄덕였을 뿐이었다. 딴 뜻이나 반감이 있어서 무감동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가문의 영령들이 기뻐한다고 해서 유모와 같이 박수를 칠 마음은 나지 않았다. 챠챠는 항상 이러했으며 항상 말이 없었다. 이런 말없음이 챠챠라는 소녀를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마음이 굴절된, 상대하기 어려운 소녀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유모조차 이 소녀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으로 애태우는 일이 많았다.

 이 히데요시의 허가로 인해, 여기저기 숨어있던 아자이 가문의 일족들이 기어 나왔다. 낙성 후 타오 모에몬(田尾 茂右衛門)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있던 아자이 마사타카(浅井 政高), 거기에 아자이 오오이노스케(浅井 大炊助), 더욱이 아자이 나가마사 첩의 자식인 아자이 이요리(浅井 井頼)라는 자까지 나타났다. 챠챠에게 있어서는 배다른 동생이지만, 챠챠는 그 얼굴을 보는 것조차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어~ 아자이의 핏줄들 왔는가? 반갑구먼. 모두 미노노카미(美濃守=히데나가(秀長))의 휘하로 들어가시게”

 라며 히데요시는 그렇게 조치해주었다.

 챠챠들은 오오사카 성안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 주인이시옵니다.
 라는 히데요시의 챠챠들에 대한 존경 – 어느 정도 히데요시다운 과장이 들어있기는 하더라도 그 뜻이 성안 구석구석 수만 명의 남녀들에게까지 철저히 지켜져, 이 떠돌이 자매들로서는 결코 살기 힘든 장소는 아니었다. 거기에 챠챠나 동생들과 그 시녀들이 오오사카 성(城)에 와서야 알게 된 것인데, 이 성안에 아자이 가문의 옛 신하들이나 그 방계(傍系), 혹은 아자이 가문과 연이 있던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님의 직속 신하 10명중 3명은 오우미 사람이 아닐까요?”

 하고 유모도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아자이 가문이 망하면서부터 노부나가에게 아자이 가문의 영토 – 북 오우미(近江)의 3군(郡) 중 20만석을 얻어 처음으로 오다(織田) 가문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로 출세하였다. 오다니(小谷)성(城)을 거성(居城)으로 삼아야 했지만 산성(山城)이라는 불편함도 있고 영내(領內)의 인심을 새로이 한다는 이유도 있어, 호숫가에 새로이 성을 쌓아 ‘나가하마(長浜)성(城)’이라 이름 지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20만석이라는 갑작스러운 신분에 필요한 만큼의 군용(軍容)을 갖추기 위해서 사졸(士卒)을 대량으로 모집하였고, 모집에 응한 사람들 대부분이 영내(領內)의 사람들이었기에 자연히 아자이 가문의 가신이나 백성이 많았다.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다이묘우(大名) 급으로는 미야베 젠쇼우보우 케이쥰(宮部 善祥坊 継潤) 등이 있고, 실력 있는 야전가(野戰家)로서는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가 있으며, 관료로서의 재능이 있는 자로서는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조금 신분은 떨어지지만 다른 사람을 보좌하는데 있어서는 천재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그 외에 오우미 출신의 소규모 다이묘우(大名)로서는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카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 키무라 히타치노스케 시게모토(木村 常陸介 重茲) 등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있었다. 중급 이하의 부하에 대해서는 세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이다.

 다만 통틀어 오우미(近江) 사람이라고 하여도 아자이 씨(氏)와 연이 깊은 것은 북부 3군(郡)만으로, 중앙부는 이미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하여 흔적도 없는 롯카쿠(六角)씨(氏)의 옛 영토였고, 남부의 코우가(甲賀) 지방은 예부터 지역 무사들의 자립지역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와(琵琶) 호수 서안 산악지대의 쿠츠키(朽木)씨(氏) 등은 그다지 아자이 씨(氏)와 연이 없었다. 하지만 오우미(近江) 중에서도 성안에 가장 많은 것은 북부 오우미(近江)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 오다니(小谷=아자이 씨(氏))의 아씨께서 계시다.
 
라며 챠챠들이 있는 건물에 그리움, 반가움에 더해 각별한 경의를 치렀고, 옛 주인에 대하는 예를 취했다. 그 중에서도 이시다 미츠나리는,

 “어떤 일이건 불편한 것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꼭 말씀해 주시길”

 하고 유모에게 몇 번이나 힘주며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향당의식(鄕黨意識)은 이 챠챠가 사는 건물을 중심으로 뭉쳐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오와리(尾張)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하고 유모는 챠챠에게 일러주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출신이 오와리(尾張)였기 때문에 이 성안에서 기세가 등등한 사람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억양이 억센 오와리 사투리를 쓰고 있다고 말해도 좋았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히데요시의 나가하마 성(城)시대부터 섬긴 오우미(近江) 사람들은 어떤 일이건 결속하려 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어 그 마음의 오갈 데를 챠챠들에게 향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챠챠 모친의 친정인 오다 가문 사람들 중 몇 명은 히데요시를 섬기고 있었다. 노부히데(信秀[각주:1])의 12번째 아들인 오다 우라쿠(織田有楽)도 그러하여, 성안에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중개(仲介)하거나 차(茶) 놀이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도 챠챠의 외숙부이기에,

 “뭐 불편은 없느냐?”

 등등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 주었던 것이다. 단지 우라쿠는 그녀를 이용하려 하는 마음 같은 것이 없었다. 또한 다인(茶人)이기에 성안의 뒷세계에도 정통하여, 일부의 오우미(近江) 사람들처럼 자신의 조카들에게 음습한 정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 아이를 빨리 시집 보내는 편이 좋을 터인데”

 하고 은밀히 친구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斎)에게만은 말하였다. 우라쿠 나름의 이 신흥정권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걱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히데요시다. 그는 저 아이에게 빠굴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만약 챠챠의 방에 히데요시가 들락날락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생길 것이다. 오우미 사람들이 측실인(아직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챠챠를 중심으로 붕당을 만들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이 정권에는 오우미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거기에 각각 실력을 가졌으며 또한 세력도 있었다. 그들이 챠챠라는 여성과 결속하여 한 덩어리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오우미 사람들에게 농단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유우사이는 일소에 부쳤다. 유우사이만큼이나 그런 감각에 날카로운 인물조차, 우라쿠의 걱정이 너무 기우인 생각이라고 여겼다.

  1.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 노부나가의 부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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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히데요시(秀吉)가 남들과 다른 것 중에 하나는, 그가 너무 과도하다고 할 정도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것에 있을 것이다. 장년일 즈음에는 그것을 자제하였다. 말년에는 자제의 테가 느슨해졌다. 요도도노(淀殿)는 그 시기에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았고, 히데요리()를 낳았다.

 

 이 여성은 오우미(近江) 출신이다. 꼬마숙녀일 즈음 - 7살까지 오우미에서 살았다.

 친가(親家)는 오우미 북부의 지배자였던 아자이()()이다. 거성(居城)은 오다니(小谷)에 있었다.

 오다니 성(城)은 산꼭대기에 있던 성이었다. 뒤로 이어진 산맥은 멀리 호쿠리쿠(北陸)까지 이어졌으며, 동남쪽으로 이부키야마(伊吹山) 이 있고, 산꼭대기에 서면 눈 아래로 비와(琵琶) 호수를 오가는 흰 돛단배가 조그만 벌레의 날개와 같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산꼭대기의 성새(城塞)에서 그녀는 태어났다. 생이 다할 때까지 그녀는 이 성과 이곳의 풍경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꼬마숙녀기는 슬픔이 많았다. 철이 들었을 때는 성과 산이 적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산허리까지 차오른 적의 깃발과 인마(人馬) 속에서 꼬마숙녀기를 보내며, 매일 총소리를 들었으며 그 총소리 아래서의 생활은 아득할 정도로 길었다. 1570 7월부터 1573 9월까지 만 3년하고 2개월이나 이어졌다.

 

 - 적은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 히데요시(木下 藤吉 秀吉)

 라고 유모 후에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卿局) – 의 입에서 나오는 증오가 담긴 이름을 계속 들어왔다. 정확하게 하자면 적의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라고 말해야만 옳았다. 그러나 유모는 그 이름에 삼감이 있었다. 오다 가문은 꼬마숙녀의 모친 오이치()의 친정으로, 노부나가는 오이치의 오빠이기에 이 꼬마숙녀에게 있어서는 외삼촌이었다.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는 그의 부하장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토우키치로우라는 인물은 이 아자이 씨()의 오다니 성() 공격을 위한, 오다 가문에 있어서의 담당관이었다. 그 이름을 증오하면 지장이 없었다.

 

 꼬마숙녀는 평생 기억하고 있었다. 성의 남측 벽에 있는 활을 쏘는 구멍()을 통해 내려다 보면, 멀리 아래로 벌판을 사이에 두고 언덕이 있고 거기에 적인 토우키치로우의 본진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역민들은 그 언덕을 요코야마(山) 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완만한 경사의 고분(古墳)이었다. 고분에는 견고한 성이 세워져 있어 낮에는 수많은 깃발이 나부꼈고, 밤에는 무수한 화톳불이 춤을 추었다. 그것이 32개월 동안의 풍경이었으며, 거기에서 아시가루()부터 벼락출세했다는 오다 가문의 부하장수 토우키치로우가 핍박하는 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저 남자를 아시옵니까?”

 

 하고 모친인 오이치에게 물어보았다. 오이치는 알고 있을 터였다. 오이치가 이 아자이 가문에 시집올 즈음 이미 히데요시는 상당한 지위에 있었고, 실제로 그녀가 기후(岐阜)에서 오우미(近江)로 시집가는 행렬의 관리관 중 한 명이었다. 애교 있는 미소와 날카로운 눈, 밝고 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난쟁이처럼 작고, 얼굴은 막 태어난 미숙아처럼 추했다.

 

 “……………”

 

 오이치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는 것도 싫다 고 할 정도로 세찬 증오심이 날카로운 칼과 같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꼬마숙녀는 모친의 얼굴에 생긴 험악함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낙성의 날이 왔다. 꼬마숙녀에게는 전황에 대해 어떠한 지식도 전해지지 않았으며, 단지 이날 아침 미명에 깨워져 부친 나가마사(長政)와 대면했다. 그 후 모친인 오이치, 유모들, 거기에 두 여동생들과 함께 각각 가마(駕籠)에 태워져 성문을 나왔다.

 -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하고 가마 안에서 창을 두들기며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유모는 답해주지 않았다. 결국 오다 가문의 진중으로 옮겨져, 외삼촌이라는 노부나가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노부나가는 갑주를 입지 않고 시원하게 명주로 된 코소데(小袖) 한 벌만을 입고 있었다. 그 옆에 놀랄 만큼 왜소한 무장이 퉁퉁 부은 눈으로 여전히 울고 있었다.

 토우키치로우라는 남자는 이 자가 아닐까?’

 하고 후년 어렴풋이 생각해 낼 수 있을 정도의 애매한 기억으로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대로 그녀들은 오와리(尾張) 키요스(洲)성(城)으로 보내져 거기서 살았다.

 

 참고로 그녀는 그 생애에 있어 적어도 8개 이상의 성에 살았을 것이다. 평생 성에서 성으로 전전했다.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성(城), 야마시로(山城) 요도(淀)성(城), 사가미(相模) 오다와라(小田原)성(城)을 포위하던 성, 치쿠젠(筑前) 나고야(名護屋) 성(城), 야마시로(山城) 후시미(伏見) 성(城), 오오사카(大坂) 성(城). …

 

 오와리 키요스 성()에서 생활한 기간도 길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치젠 키타노쇼우 성()으로 옮겼다. 왜냐하면 그 성의 성주이며, 또한 오다 가문의 호쿠리쿠(北陸) 방면 총사령관(元締)이었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그녀의 모친인 오이치가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이 성도 함락당한다.


 적은 친가인 오다니 성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토우키치로우였다. 10년 동안 토우키치로우의 신분은 변화하여 그 호칭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로 바뀌어있었다. 이전 오다니 공격 때와 달라져 있던 것은, 그가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에치젠에 난입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의지로 대군을 일으켜 그 인마(人馬)를 이끌고 키노메토우게(芽峠) 고개를 넘어 에치젠 평야에 난입해서는 키타노쇼우 성을 포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미 노부나가가 이 세상에 없었다. 이 해의 전년, 쿄우토(京都)의 혼노우(本能)()에서 자신의 부하장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그 미츠히데는 히데요시의 재빠른 도전에 의해 쓰러졌다. 자연히 오다 정권의 후계자 자리에 히데요시가 앉을 듯한 기세로 이어졌지만, 그러나 노신(老臣) No.1인 시바타 카츠이에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서로 반목하고 단교(斷交)하여 결국 북부 오우미(近江)시즈가타케(賤ヶ岳)옛 오다니 성에서 가까운 에서 결전을 벌이기에 이르러서는, 히데요시가 해낸 절묘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군사를 잘 이끌어 카츠이에의 진영은 무너졌고 카츠이에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카츠이에는 자신의 거성 키타노쇼우(北ノ庄) ()에 도망쳐 들어와 성문을 닫았다. 히데요시는 쉬지 않고 그것을 추적했다. 그 하시바 측의 대군이 성을 포위하였을 때,

 어째서 저 남자는 이러는 것인가?’

 하고 그녀는 자신의 생애에서 두 번이나 자신의 생활을 부수려는 듯 총을 쏘아 대는 그 남자에게 증오보다 오히려 공포를 느꼈다. 4 24, 밤이 아직 밝기 전 즈음, 성이 무너질 정도로 흔드는 총성이 일제히 일어나, 그녀는 자신의 침실에서 튕겨지듯이 일어나고 곧 쓰러졌다. 유모가 그녀의 포동포동한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녀는 17살이 되어있었다. 어두웠다. 방에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직 밤입니까?”

 

 겨우 말을 하였다.

 

 아니옵니다. 좀 있으면 밝아지겠지만, 그러나 아직 밝지는 않사옵니다

 

 하고 유모가 귀에 대고 느릿하게 소곤거렸다. 그렇게 소곤대는 것은 기억의 한 구석에 있었다. 오다니 성이 함락될 때도, 이 유모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간도, 그 미칠듯한 총 소리도, 하나하나가 오다니 성에서의 그 때와 닮아있었다.

 그녀가 쓰러진 이 시각에, 이미 히데요시의 군사들은 성내의 한곳에 돌입해 있었다. 성 안이 전쟁터가 되었다. 카츠이에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텐슈(天守)로 이동했다. 이미 이 성주와 그 가족을 지키는 사람들의 수가 200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 양부(養父) – 시바타 카츠이에가 그녀의 망부(亡父) 아자이 나가마사와 농후하게 공통되는 점은, 자신의 마지막에 화려함을 희구하고자 하는 기질에 있었다. 실제로 카츠이에는 그러하였다.

 카츠이에는 적을 향해서, 자신이 자인(自刃)한다는 뜻을 통고했다. 그 후 텐슈의 누상에서 주연(酒宴)을 열었다. 살아남은 무사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신은 검붉은색의 잠옷을 입고 화려하게 춤을 추는 낙성 당할 때의 연회를 작법대로 행한 후, 이어서 적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금부터 텐슈에 불을 질러 자인한다. 그러니 멀리 물러나 있으라

 

 하고 충고하였다. 텐슈에는 20년간 모은 화약이 꽉 차있었다. 불타오르면 여기에 불이 붙고 폭발해서 기둥이건 지붕이건 날려버릴 것이다. 부상 당하지 마라 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텐슈는 굉음과 함께 땅을 울렸고 곧이어 하늘 쪽으로 날라갔다. 양부 카츠이에, 친모 오이치는 30여명의 신하들과 함께 자신들의 시체를 산산조각 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를 이번에도 더 살게 만들었다. 그녀는 두 여동생들과 함께 카츠이에의 명령으로 적 측으로 보내졌다. 카츠이에는 자살하기 전에, 

 - 이 세 소녀를 구하도록 

 하고 히데요시에게 요구했다. 그 이유는, 

이 세 소녀는 귀하도 아는 바대로 이 카츠이에의 자식이 아니라,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이들일세. 따라서 돌아가신 우다이진(右大臣=노부나가) 님의 조카딸이며, 귀하에게 있어서는 주인댁이다. 보호할 것.
 이라는 것으로, 히데요시는 물론 받아들였다. 이런 점도 오다니 함락 시와 같았으며, 오히려 너무 똑같았다. 이 아명이 챠챠()라는 소녀는 - 꼬마숙녀 때부터 한창 꽃필 나이에 걸쳐, 살아서 지옥의 업화를 경험하였고 더구나 그것도 마치 지옥의 옥졸들이 착각이라도 한 듯이 같은 종류의 지옥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최초의 지옥에서 친아비가 죽었고, 다음 지옥에서 친어미가 죽었다. 항상 그 지옥을 출현시켰던 것은 같은 남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적극성 있다고 평가 받는 남자였다. 그 남자…… 예전엔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였고, 지금은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라고 불리고 있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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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kun BlogIcon 고어핀드 2008.10.05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정성스레 번역해 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난세가 다 그렇지만, 요도도노의 삶은 정말 기구하기 짝이 없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10.05 2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아자이때도 히데요시고 시바타때도 히데요시군요..-_-; 충분히 증오할만도 하겠다 싶습니다마는, 그렇다고는 해도 뭐 히데요시 말년에는 충분히 그 노망난 영감을 이용했으니 피장파장이려나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10.06 0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내년에 시작하는 nhk 대하드라마에서 요도기미를 후카다 쿄코가 연기한다더군요.
    일단 보기전 느낌은 뭔가 영 매치가 안되는 느낌;;;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10.06 1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어핀드님//좋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亂世라 불리나 봅니다.

    다메엣찌님//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이용했다면 다메엣찌님 말씀마따나 피장파장이라는 생각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제 머리 속의 요도도노는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움직인 것 같지는 않더군요.

    zardizm님//오~ 그렇습니까??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후카?을 일본 여성 중에서 가장 이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기대감 만빵입니다. 우헤헤~ (어울리지 않나요? 맹하고 어눌한 말투하며... 거기다 통통하기까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10.07 0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덕진 후카다 쿄코 -_-)b 기대되는군요~!!!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후쿠이(福井)()에서 아스와가와(足羽川)()을 내륙 쪽으로 10km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에치젠 평야(越前平野)가 끝나면서 산맥이 주위를 둘러싼 작은 골짜기의 마을로 들어간다. 거기가 이치죠우다니(). 지금은 한적한 농촌이지만, 센고쿠(戦国) 시대에 이곳은 에치젠 일국을 지배했던 아사쿠라(朝倉)()의 본거지였다. 근년[각주:1]이 되어 이 지역은 갑자기 주목 받았다. 아사쿠라 씨()의 저택이 발굴 조사되어 거의 그 전모가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센고쿠다이묘우(戦国大名)의 생활 실태라는 것이 생생히 떠오르게 되었다.

 저택의 유적 전체가 탄 흙과 재로 구성된 층으로 덮여 주춧돌이나 정원석(庭園石)의 겉은 타고 금이 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573 8월 아사쿠라 가문이 괴멸될 때 이치죠우다니()는 큰 불에 휩싸여 소실(燒失)되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함과 동시에 그 종언(終焉)의 무시무시했었음을 유적은 말해주고 있다.


 센고쿠 시대. 이치죠우다니는 ‘호쿠리쿠(北陸)의 쿄우토(京都)’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화려한 성 밑 마을(城下町)이었다. 여기에는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쿄우토를 피해온 상급 귀족(公卿)이나 문화인들이 모여있었다. 우다이진(右大臣) 산죠우 킨요리([각주:2])나 다이나곤(大納言) 아스카이 마사츠나(飛鳥井 正綱)가 와있었으며, 렌가(連歌)의 제1인자 소우기(宗祇), 소우쵸우(宗長)의 사제(師弟)도 방문했었다. 당대 제일의 국학(国学) 키요하라 노부카타( 宣賢)도 초대받았다.

 그 중에서도 거물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 요시테루(義輝)의 동생 요시아키(義秋)였다. 요시아키는 1567 11월에 이치죠우다니(一乗)를 찾아왔다. 2년 전에 형 요시테루가 미요시(三好)-마츠나가(松永) 일당에게 습격 받아 죽은 다음부터 바쿠후(幕府) 재건의 뜻을 세우고는 요시카게의 힘을 빌리려 찾아온 것이었다.

 요시카게는 이 귀공자의 방문을 크게 기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하였고 일부러 안요우지(安養寺) 저택을 신축해서는 시가(詩歌) 모임, 눈구경 잔치, 꽃구경 잔치를 열었다. 쿄우토(京都)에서 칸파쿠() 니죠우 하루요시(二条 晴良)를 초빙해서 성인식까지 치러주었다. 이때 요시아키()를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환영해주는 잔치보다 요시카게의 무력(武力)을 원했다. 아사쿠라의 힘을 빌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쇼우군() ()을 잇고자 했던 것이다. 요시카게에게 있어서도 천하를 바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이 모처럼의 찬스를 요시카게는 허사로 만들었다. 우유부단한 태도를 일관하여 요시아키의 실망을 사고 말은 것이다. 얄궂게도 이후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노부나가는 이 기회를 잡자마자 요시아키를 내세워 쿄우토에 올라가 쇼우군의 명성을 빌려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요시카게는 무장()이라기 보다는 문화인의 색체가 강했다.

 그는 1548년에 16살의 나이로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가 되었지만 군정(軍政)도 내정(內政)도 숙부인 노리카게()에게 맡겼다. 노리카게는 불문에 들어가 소우테키(宗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데 그는 일대의 걸물이었다. 아사쿠라 가문의 기둥이 되어 활약하며 주변에 무명(武名)을 떨쳤지만, 1555카가(加賀)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와의 싸움 도중 안타깝게도 병으로 전쟁터의 진영(陣營)에서 죽었다. 79살의 고령이었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토대(土臺)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대손실이었다.


 요시카게는 문약(文弱)으로 내달렸을 뿐만 아니라 여성관계도 화려했다. 첫 번째 부인은 일찌감치 죽었지만, 두 번째 부인은 코노에(近衛) 가문의 딸로 [미모가 견줄 이 없다(容色無雙)]는 절세의 미녀였다고 한다. 세번째 부인은 코사이쇼우노츠보네(小宰相局)라고 하며 두 딸을 낳았다.

 가장 요시카게의 마음을 빼앗았던 이가 네 번째 부인이었다. 사이토우 효우부쇼우유우(藤 兵部少輔)의 딸로, 코쇼우쇼우(小少)라고 불렸다. 미녀에다가 말까지 잘하였기에 요시카게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하였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은 그녀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원인이 되었다고 일컬어질 정도이다.


 요시아키를 쇼우군에 앉힌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이름으로 요시카게에게 상경하라는 친서를 보냈다. 요시카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부나가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1570 4, 노부나가가 에치젠에 3만여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갔다. 오우미(近江)에 가까운 전선기지인 테즈츠야마(手筒山)성(城)이 하루 만에 낙성되어 성병 1400이 죽었다. 계속해서 오다 군()은 츠루가(敦賀)카네가사키(崎)성(城)으로 몰려들었다. 다행히도 이때의 위기는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동맹을 맺고 있던 아자이 군()이 노부나가의 배후를 공격,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도망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2개월 뒤, 아네가와(姉川) 천(川)에서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군 2만과 오다-토쿠가와() 연합군 35천이 격전을 전개하여, 아사쿠라-아자이는 패했다. 이때 요시카게는 출진하지 않고 일족인 카게타케(景健)가 지휘하였다.


 3년 후인 1573년은 아사쿠라 가문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해가 되었다.

 아자이 씨()오다니(小谷)성(城)이 오다 군의 맹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요시카게는 뭉기적대고 있던 엉덩이를 들어 출격한 것이다. 따르는 군세는 15천이었다. 그러나 왕년의 위세가 없었으며 전년도부터 오다 측의 모략의 손길이 뻗쳤기에 이미 마에바 요시츠구(前波 吉), 토미타 나가시게(富田 長繁) 등의 유력 무장이 오다 측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거기에 막 출격할 때가 되어서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가 병이 걸렸다는 이유로 출진을 거부하였으며, 미조에 나가야스(溝江 長逸)도 역시 출진을 거부한 것이다. 요시카게의 약화된 통제력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사쿠라 군은 오다니 성()에 도착하긴 하였지만, 오다 측의 활발한 모략의 손길이 계속 뻗쳐와 가신들이 계속해서 배신하였다. 요시카게는 도착한 지 3일만에 에치젠으로 도망쳤다. 본거지인 이치죠우다니()도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패주해 온 요시카게에게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을 터인 카게아키라가 출두한 것이다. 충성스런 표정으로 오오노(大野)로 옮기라고 진언했다. 요시카게가 오오노의 도우운(洞雲)사(寺)로 옮기자, 또다시 카게아키라에게서 도우운 사()는 제 거성 이누야마(犬山)()에서 떨어져 있으니, 로쿠보우(六坊)의 켄쇼우(賢松)()로 이동해 주십시오라는 연락이 왔다.


 카게아키라의 덫이었다.

 요시카게가 켄쇼우 사()로 옮기자, 카게아키라의 군사들이 몰려와 포위한 것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요시카게는, “네놈들 부자(父子)의 생명은 필시 3년 안에 끊어질 것이다[각주:4]고 저주를 퍼붓고는 자해(自害)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33년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에서 태어나 16살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처음엔 노부카게(延景)’라 하였지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의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요시카게(義景)’로 개명. 노신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가 죽은 후는 무위를 떨치지 못하고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패배, 3년 후에 멸망하였다. 41.

  1. 참고로 이 책은 1978년에 발행된 책. [본문으로]
  2.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모반으로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함께 죽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장인이다.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해당 지역 내 반란군. [본문으로]
  4. 카게아키라는 다음 년도 1574년에 잇코우잇키 군에 공격받아 전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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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31 23: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모우리 테루모토는 장수 했으니..(흠흠;) 그나저나 이치죠타니의 마지막 군주 치고는 참으로 비참한 죽음이군요(훗날 두개골 사건도 그렇고...) 뭐, 80을 바라보는 소우테키에게 모든걸 맡겼다는 점에서 무능은 숨길 수 없어보이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8.01 0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찾고보니 다테 마사무네 아버지 테루무네도 테루가 편휘군요... 허걱... 모가미 요시아키도 요시가 요시테루한테 받은 편휘이고... 흠 기분 탓일지도...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01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검호장군 요시테루(義輝)가 이름 글자를 요시(義)는 50냥, 테루(輝)는 그것보다 싸면 된다(대략 30냥 정도였다고 하네요)고 해서 지방의 유력 다이묘우들에게 반 강매를 하다시피 남들에게 팔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메엣찌님//반대로 보면 소우테키가 그렇게 해서 요시카게에게 아무 것도 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사쿠라 가문은 가문 내의 파벌 싸움이 복잡한 듯 하여 제 머리 속에서는 정리가 잘 안되더군요.... 뭐 멸망한 가문의 마지막 주인이야 필요 이상으로 무능의 낙인이 찍히는 법이긴 합니다만...

  4.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8.01 23: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시테루가 스스로 이름을 팔아먹었었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05 2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도 생기고, 이치지하이료우(一字&amp;#25309;領, 일자배령)로 특별한 관계로 서로 득(쇼우군은 지방의 유력 다이묘우를 직신으로 둔 듯 해서 자신의 힘을 더 강화시킬 수 있었고, 지방 유력 다이묘우는 천하의 쇼우군사마와 특별한 관계라고 주변에 자랑할 수 있는)이 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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