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직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인 칸파쿠(白) 다이죠우다이진(太政大臣)까지 되었지만 그 출신이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의 성(姓)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렸을 적에 도적 하치스카 고로쿠(蜂須賀 小六)의 밑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유명하지만 스루가(駿河) 이마가와 가문(今川)에 속해있던 마츠시타 카헤이(松下 嘉兵衛)를 섬겼을 때의 이야기도 소년시대의 히데요시의 풍모를 전해주고 있어 흥미롭다.
 마츠시타 카헤에가 하마마츠(浜松)의 마을 밖의 히쿠마가와(曳馬川) 강 근처에서 얼굴이 특이한 아이를 주웠다.
 [원숭이인가? 하면 사람. 사람인가? 하면 원숭이]
 어느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는데 그것이 히데요시였다. 이때 카헤이는 하마마츠의 영주 이이오 부젠(飯尾 豊前)을 방문하여 "특이하게 생긴 꼬마를 주웠다네"하며 이 히데요시를 구경거리로 데리고 간 것이다. 이이오 부젠의 부인이나 딸들이 신기해하며 밤을 던져주자 히데요시는 마치 원숭이처럼 입으로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녀들은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후세에 만들어진 위의 이야기처럼 사서로 전해지는 것에서도 히데요시의 용모는 원숭이와 닮았던 듯 하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원숭이(猿=사루)'라고 불렀던 것은 너무도 유명한데[각주:1] 히데요시를 보았던 모우리(毛利)의 신하 타마키 요시야스(玉木 吉保)는 [붉은 수염을 기르고 원숭이 눈과 같이 정신 없이 움직인다.[각주:2]]하고 쓰여 있으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
)도 조선 침공 계획을 듣고 "원숭이놈 죽을 자리를 못 찾아서 미쳤나?"라 욕하고 있다.

 이쯤에서 히데요시가 출세할 수 있었던 비결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본다.
 우선 돈을 쓰는 방법이 절묘했다.
 전투를 할 때도 공을 세운 병사에게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상금을 주었다. 톳토리 성(鳥取城) 공략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가 성을 정찰하러 갔다가 적을 만나 물리치고서는 보고를 하였는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곧바로 황금 한 웅큼과 100석을 가증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
츄우고쿠(中
)에서 급히 아케치(明智)를 물리치기 위해 쿄우토(京都)로 향했을 때 돈을 뿌린 방식이 굉장했다. 히메지 성(路城)에 있던 금은과 쌀을 하나도 남김없이 부하들에게 준 것이다. 즉 이때 히데요시는 무일푼이 되었던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로 히데요시는 천하를 얻은 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돈이라고 하면 천하를 얻은 후 쥬라쿠테이(聚
第) 문 밖에서 돈을 나누어 준 것은 고금에 예를 볼 수 없었던 쇼였다. 금은 합계 36만 5천냥을 친족부터 시작해서 고급 귀족(公卿)이나 다이묘우(大名)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분배하였다.

 또 하나 히데요시 출세의 비결은 어떤 일이건 철저히 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철저히 봉사를 함으로써 주군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았다. 짚신을 따스하게 덥혔다는 에피소드에서 상징되듯이 오로지 주군만을 생각하였으며 자그마한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어떠한 공을 세우더라도 영지(領地)에 대한 야심은 병아리 눈곱만큼도 보이질 않았다. 츄우고쿠 정벌 때 노부나가가 하리마(播磨)를 준다고 하였지만 사퇴하면서 그보다도 조선(朝鮮)을 공략하게 되면 그 나라를 받겠습니다 – 라며 꿈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열석해 있던 다른 무장들은 코웃음 쳤지만 노부나가는 그 무욕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581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오우미(近江),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 등 70여만석이라는 영지(領地)를 하사 받았는데 이 때 고마움을 나타내고자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냈다. 타치(太刀) 한 자루, 은자(銀子) 6000매, 옷(小袖) 백 벌, 가죽 200매, 종이 200다발, 말린 도미 1000마리, 그 외에 도자기 등이 끝없는 행렬을 만들며 아즈치 성(安土城)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도 히데요시는 뛰어났다.
 천성적으로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인정미가 넘쳤고 미천한 신분 시대에 얻은 거짓말 안하기, 남을 속이지 않기가 다른 사람의 신용을 얻는 것이라는 '생활의 지혜'가 그 기본이 되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을 섬겼으며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시모츠케(下野)에 3만석을 하사 받은 사노 후사츠나(佐野 房綱)는 "신겐공이나 켄신공을 만날 때는 분위기가 엄격하여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히데요시공은 '여어~ 텐토쿠지(天
寺=후사츠네의 호). 잘 오셨네'며 굉장히 친근하면서도 정중한 말투를 쓰셨기에 감개무량하였다"고 히데요시의 거드름 피우지 않는 성격을 전해주고 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도,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등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산하의 다이묘우(大名)가 인질을 받쳐 충성을 맹세하고자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그럴 필요 없소"하며 인질을 받지 않았다.

 또한 히데요시는 남을 직접 돌봐줄 때도 마치 자기 친형제에게 하는 듯이 애정 넘쳤다. 나가쿠테 전투(長久手合)에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모토스케(助)가 전사하였을 때, 츠네오키의 부인을 위로하고 남겨진 차남 테루마사(輝政)를 친자식처럼 키웠으며, 비젠(備前)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노부나가에게 미움 받았을 때는 노부나가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감쌌다.
 속이지 않으며 약속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저 나오이에에게 약속한대로 아들인 히데이에를 후에 오대로(
五大老)의 한 명으로 만들 정도로 크게 중용하였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경우 그의 주인 요시카게(義景)를 배반한 요시아키라의 행위에 노부나가는 혐오하며 용서치 않으려고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끝까지 노부나가를 설득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다.

 조선의 기록에 파격적인 히데요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있다.
 1590년 11월 조선의 사자(使者)를 접견했을 때였다. 술을 내어 접대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는 잠깐 나갔다가 갓난아이(장남 츠루마츠(鶴松))를 안고 들어왔다. 안고서 실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조선의 악사(樂師)들에게 연주를 시키게 하던 중 그 갓난아이가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히데요시의 옷도 다 젖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웃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고 한다. 조선의 사신은 이를 '방약무인'이라고 평하였다.[각주:3]

 무엇이든 스케일이 다른 히데요시는 호색도 남달라 수 많은 측실을 데리고 있었지만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에 대한 배려만은 허술히 하지 않았으며 세세했다. [신신당부하네만 대변이 나올 수 있게 쓰셨으면 하는 마음에…]하고 설사약에 대한 것까지 편지에 적고 있다.
 후계자를 낳은 요도도노(
淀殿)에 대한 애정은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20일 즈음에 반드시 네게로 가 도련님(츠루마츠)을 안고 싶구나. 밤에는 너와 함께 자고 싶다…]고 쪽팔리지도 않은 듯이 편지를 쓰고 있다. 한편으론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진영에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어서는 '당신 말고는 요도가 맘에 들더군' 라는 등 서열을 확실히 정하여 그녀의 우월감을 만족시켰다. 또한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에 대한 효심도 깊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이던 1592년에 오오만도코로가 죽자 히데요시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기절했다고 한다.

 센고쿠(戦国) 시대는 사람 좋은 것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다. 히데요시도 또한 센고쿠 무장이다. 천하인(天下人)이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무장이 아니면 안 된다. 히데요시가 천재적인 무략가라는 예를 들어보자.
 1582년 6월. 히데요시 46살 때였다. 빗츄우(
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수공(水攻)하고 있던 6월 3일 한밤중의 히데요시 본진에 혼노우(本能)사()의 변보가 전해졌다.
 이 순간부터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일개 부장에서 천하인으로의 길을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군을 질타하여 폭풍우 속의 타카마츠를 출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였다. 히메지(
)까지 100km를 불과 하루 만에 돌파라는 엄청난 스피드였다. 이것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순식간에 물리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후 시즈가타케()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격파한 것도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오로지 히데요리()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져 더 이상 천하를 취한 영웅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는 그냥 평범한 노인으로 변모하였다. 3살의 히데요리에게 보낸 편지에 '곧 너를 보러 갈 테니 그 때까지 엄마의 젖을 많이 빨고 있으렴' 등을 쓰며 요도도노의 모유 상태까지 걱정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히데요리의 장래가 걱정되었는지 죽음이 가까운 1598년 8월 5일 병상에서 이에야스(家康)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등 오대로(五大老)에게 '히데요리가 다 클 때까지…'하고 불안하다는 듯이 유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13일 뒤인 18일 미명. 63세의 나이로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년 오와리(尾張)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다 가문(織田家)의 아시가루() 키노시타 야에몽(木下 弥右衛門). 최초의 이름은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1574년에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가 되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멸망시켰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후 화해. 1585년 49살 때 칸파쿠()가 된다. 다음 해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되어 성을 토요토미(豊臣)로 바꾸었다. 1587년 쥬라쿠테이() 완성. 1598년 8월 제2차 조선역(朝鮮役)[각주:4]이 한창이던 중에 죽었다.

2007/03/23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1. 노부나가가 그를 '원숭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노부나가는 그를 대머리생쥐(禿げ鼠)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것도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만 보이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2. 원문의 猿まなこをぎょろつかせ・・・猿まなこ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낸다는 뜻이지 원숭이와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즉 이 책의 저자는 예시를 잘못 들은 듯. [본문으로]
  3. 有頃, 秀吉 入內, 在席者不動。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小兒遺溺衣上, 秀吉 笑呼侍者, 一女 倭 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3번째 기사. [본문으로]
  4. 정유재란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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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2.26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
    그러고보니 궁금한 것이.. [헤이케 모노가타리]에서 성과 이름 사이에 '노'를 붙인 것을 많이 봤지요. 보통 전국시대 무장들 이름엔 '노'가 없던데 번역하신 책에서 풍신수길에게만 '노'를 붙인 특정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7 2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게 또 별로 안 복잡하면서 설명하기는 쪼큼 힘든 것이라...

      우선 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 수가와라(菅原) 등등등...그냥 텐노우가 하사하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 본성의 아래에 있는 개념(??)으로, 어느 곳의 땅을 얻어서 그 땅의 지명을 성으로 이용한 것이 묘우지(苗字)... 오다 가문의 경우 후지와라의 후손 중 하나가 오다장(織田庄)의 영주가 되면서부터 사용한 것이 오다씨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오다(織田)는 묘우지(苗字 - 성의 발상지)이며, 그의 본성(本姓)는 전성기때는 타이라(平), 초창기는 후지와라(藤原), 그 오다 가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베(忌部)라고 하지만...어쨌든... 오다 노부나가도 타이라의 성을 이용할 경우는 타라이노 노부나가(平 信長)가 되옵죠..

      히데요시의 경우 텐노우에게 토요토미(豊臣)라는 본성을 하사받은 다음 부터는 그것만을 사용했다고 하기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하시바(羽柴)나 키노시타(木下)라는 묘우지를 사용할 경우는 그냥 하시바 히데요시, 키노시타 토우키치로...로 하고 있습죠.

      보통 본성은 궁정에서 활동할 때 주로 쓰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냥 본성일 경우 '**노 **'..라고 쓰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과 토요토미 성을 하사 받은 이후 히데요시는 본성만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2.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6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만화방에 갔는데 '센고쿠'라는 만화책이 있더군요. 전국시대를 사는 무사 이야기를 다뤄서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거기서도 히데요시의 '대머리 생쥐' 별명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3. 히히후 2011.08.15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통일하고 천하인이라니 허세가 하늘을 찌를듯하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15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일본에서 '천하'라는 개념이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거기에 히히후님이 천하를 어떤 개념으로 아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한 문명의 권력면에서 정점에 다다른 자라면 천하인이란 단어를 못 쓸 것도 없습지요.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후쿠이(福井)()에서 아스와가와(足羽川)()을 내륙 쪽으로 10km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에치젠 평야(越前平野)가 끝나면서 산맥이 주위를 둘러싼 작은 골짜기의 마을로 들어간다. 거기가 이치죠우다니(). 지금은 한적한 농촌이지만, 센고쿠(戦国) 시대에 이곳은 에치젠 일국을 지배했던 아사쿠라(朝倉)()의 본거지였다. 근년[각주:1]이 되어 이 지역은 갑자기 주목 받았다. 아사쿠라 씨()의 저택이 발굴 조사되어 거의 그 전모가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센고쿠다이묘우(戦国大名)의 생활 실태라는 것이 생생히 떠오르게 되었다.

 저택의 유적 전체가 탄 흙과 재로 구성된 층으로 덮여 주춧돌이나 정원석(庭園石)의 겉은 타고 금이 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573 8월 아사쿠라 가문이 괴멸될 때 이치죠우다니()는 큰 불에 휩싸여 소실(燒失)되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함과 동시에 그 종언(終焉)의 무시무시했었음을 유적은 말해주고 있다.


 센고쿠 시대. 이치죠우다니는 ‘호쿠리쿠(北陸)의 쿄우토(京都)’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화려한 성 밑 마을(城下町)이었다. 여기에는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쿄우토를 피해온 상급 귀족(公卿)이나 문화인들이 모여있었다. 우다이진(右大臣) 산죠우 킨요리([각주:2])나 다이나곤(大納言) 아스카이 마사츠나(飛鳥井 正綱)가 와있었으며, 렌가(連歌)의 제1인자 소우기(宗祇), 소우쵸우(宗長)의 사제(師弟)도 방문했었다. 당대 제일의 국학(国学) 키요하라 노부카타( 宣賢)도 초대받았다.

 그 중에서도 거물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 요시테루(義輝)의 동생 요시아키(義秋)였다. 요시아키는 1567 11월에 이치죠우다니(一乗)를 찾아왔다. 2년 전에 형 요시테루가 미요시(三好)-마츠나가(松永) 일당에게 습격 받아 죽은 다음부터 바쿠후(幕府) 재건의 뜻을 세우고는 요시카게의 힘을 빌리려 찾아온 것이었다.

 요시카게는 이 귀공자의 방문을 크게 기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하였고 일부러 안요우지(安養寺) 저택을 신축해서는 시가(詩歌) 모임, 눈구경 잔치, 꽃구경 잔치를 열었다. 쿄우토(京都)에서 칸파쿠() 니죠우 하루요시(二条 晴良)를 초빙해서 성인식까지 치러주었다. 이때 요시아키()를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환영해주는 잔치보다 요시카게의 무력(武力)을 원했다. 아사쿠라의 힘을 빌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쇼우군() ()을 잇고자 했던 것이다. 요시카게에게 있어서도 천하를 바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이 모처럼의 찬스를 요시카게는 허사로 만들었다. 우유부단한 태도를 일관하여 요시아키의 실망을 사고 말은 것이다. 얄궂게도 이후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노부나가는 이 기회를 잡자마자 요시아키를 내세워 쿄우토에 올라가 쇼우군의 명성을 빌려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요시카게는 무장()이라기 보다는 문화인의 색체가 강했다.

 그는 1548년에 16살의 나이로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가 되었지만 군정(軍政)도 내정(內政)도 숙부인 노리카게()에게 맡겼다. 노리카게는 불문에 들어가 소우테키(宗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데 그는 일대의 걸물이었다. 아사쿠라 가문의 기둥이 되어 활약하며 주변에 무명(武名)을 떨쳤지만, 1555카가(加賀)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와의 싸움 도중 안타깝게도 병으로 전쟁터의 진영(陣營)에서 죽었다. 79살의 고령이었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토대(土臺)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대손실이었다.


 요시카게는 문약(文弱)으로 내달렸을 뿐만 아니라 여성관계도 화려했다. 첫 번째 부인은 일찌감치 죽었지만, 두 번째 부인은 코노에(近衛) 가문의 딸로 [미모가 견줄 이 없다(容色無雙)]는 절세의 미녀였다고 한다. 세번째 부인은 코사이쇼우노츠보네(小宰相局)라고 하며 두 딸을 낳았다.

 가장 요시카게의 마음을 빼앗았던 이가 네 번째 부인이었다. 사이토우 효우부쇼우유우(藤 兵部少輔)의 딸로, 코쇼우쇼우(小少)라고 불렸다. 미녀에다가 말까지 잘하였기에 요시카게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하였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은 그녀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원인이 되었다고 일컬어질 정도이다.


 요시아키를 쇼우군에 앉힌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이름으로 요시카게에게 상경하라는 친서를 보냈다. 요시카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부나가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1570 4, 노부나가가 에치젠에 3만여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갔다. 오우미(近江)에 가까운 전선기지인 테즈츠야마(手筒山)성(城)이 하루 만에 낙성되어 성병 1400이 죽었다. 계속해서 오다 군()은 츠루가(敦賀)카네가사키(崎)성(城)으로 몰려들었다. 다행히도 이때의 위기는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동맹을 맺고 있던 아자이 군()이 노부나가의 배후를 공격,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도망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2개월 뒤, 아네가와(姉川) 천(川)에서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군 2만과 오다-토쿠가와() 연합군 35천이 격전을 전개하여, 아사쿠라-아자이는 패했다. 이때 요시카게는 출진하지 않고 일족인 카게타케(景健)가 지휘하였다.


 3년 후인 1573년은 아사쿠라 가문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해가 되었다.

 아자이 씨()오다니(小谷)성(城)이 오다 군의 맹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요시카게는 뭉기적대고 있던 엉덩이를 들어 출격한 것이다. 따르는 군세는 15천이었다. 그러나 왕년의 위세가 없었으며 전년도부터 오다 측의 모략의 손길이 뻗쳤기에 이미 마에바 요시츠구(前波 吉), 토미타 나가시게(富田 長繁) 등의 유력 무장이 오다 측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거기에 막 출격할 때가 되어서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가 병이 걸렸다는 이유로 출진을 거부하였으며, 미조에 나가야스(溝江 長逸)도 역시 출진을 거부한 것이다. 요시카게의 약화된 통제력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사쿠라 군은 오다니 성()에 도착하긴 하였지만, 오다 측의 활발한 모략의 손길이 계속 뻗쳐와 가신들이 계속해서 배신하였다. 요시카게는 도착한 지 3일만에 에치젠으로 도망쳤다. 본거지인 이치죠우다니()도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패주해 온 요시카게에게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을 터인 카게아키라가 출두한 것이다. 충성스런 표정으로 오오노(大野)로 옮기라고 진언했다. 요시카게가 오오노의 도우운(洞雲)사(寺)로 옮기자, 또다시 카게아키라에게서 도우운 사()는 제 거성 이누야마(犬山)()에서 떨어져 있으니, 로쿠보우(六坊)의 켄쇼우(賢松)()로 이동해 주십시오라는 연락이 왔다.


 카게아키라의 덫이었다.

 요시카게가 켄쇼우 사()로 옮기자, 카게아키라의 군사들이 몰려와 포위한 것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요시카게는, “네놈들 부자(父子)의 생명은 필시 3년 안에 끊어질 것이다[각주:4]고 저주를 퍼붓고는 자해(自害)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33년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에서 태어나 16살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처음엔 노부카게(延景)’라 하였지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의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요시카게(義景)’로 개명. 노신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가 죽은 후는 무위를 떨치지 못하고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패배, 3년 후에 멸망하였다. 41.

  1. 참고로 이 책은 1978년에 발행된 책. [본문으로]
  2.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모반으로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함께 죽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장인이다.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해당 지역 내 반란군. [본문으로]
  4. 카게아키라는 다음 년도 1574년에 잇코우잇키 군에 공격받아 전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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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31 23: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모우리 테루모토는 장수 했으니..(흠흠;) 그나저나 이치죠타니의 마지막 군주 치고는 참으로 비참한 죽음이군요(훗날 두개골 사건도 그렇고...) 뭐, 80을 바라보는 소우테키에게 모든걸 맡겼다는 점에서 무능은 숨길 수 없어보이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8.01 0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찾고보니 다테 마사무네 아버지 테루무네도 테루가 편휘군요... 허걱... 모가미 요시아키도 요시가 요시테루한테 받은 편휘이고... 흠 기분 탓일지도...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01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검호장군 요시테루(義輝)가 이름 글자를 요시(義)는 50냥, 테루(輝)는 그것보다 싸면 된다(대략 30냥 정도였다고 하네요)고 해서 지방의 유력 다이묘우들에게 반 강매를 하다시피 남들에게 팔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메엣찌님//반대로 보면 소우테키가 그렇게 해서 요시카게에게 아무 것도 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사쿠라 가문은 가문 내의 파벌 싸움이 복잡한 듯 하여 제 머리 속에서는 정리가 잘 안되더군요.... 뭐 멸망한 가문의 마지막 주인이야 필요 이상으로 무능의 낙인이 찍히는 법이긴 합니다만...

  4.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8.01 23: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시테루가 스스로 이름을 팔아먹었었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05 2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도 생기고, 이치지하이료우(一字&amp;#25309;領, 일자배령)로 특별한 관계로 서로 득(쇼우군은 지방의 유력 다이묘우를 직신으로 둔 듯 해서 자신의 힘을 더 강화시킬 수 있었고, 지방 유력 다이묘우는 천하의 쇼우군사마와 특별한 관계라고 주변에 자랑할 수 있는)이 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73 8 20 할복 41

1533년 ~ 1573년.
아사쿠라씨 제 5대 가주. 에치젠(越前), 카가(加賀), 노토(能登)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와 싸웠다.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과 대립.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와 손을 잡고 아네가와(姉川) 천에서 싸웠으나 패배. 본거지 이치죠우다니(一乗谷)를 노부나가에게 공격 받아, 친족인 카게아키라(景鏡)에게 배반당해 할복하였다.









이치죠우다니의 망명객


 1533년.

 에치젠의 센고쿠 다이묘우 아사쿠라 타카카게(朝倉 孝景)의 장남으로 태어난 요시카게는 1573 41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명문가 아사쿠라에게 몰락의 징조가 나타난 것은 난을 피해 에치젠으로 도망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이치죠우다니를 떠나 오다 노부나가의 기후(岐阜)로 향한 1568 7월로 볼 수 있다. 이 때 요시카게는 36세였다.


 오히려 요시카게 자신은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전년인 1567 11월에 에치젠 츠루가(敦賀)에서 이치죠우다니로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이 때는 아직 義秋)가 아사쿠라 저택으로의 비공식적인 방문이 성사 되었으며, 새해가 밝은 1568 요시아키의 추천으로 요시카게를 낳은 모친의 위작이 이위(二位)에 서임되었다. 또한 봄에는 경치가 뛰어난 객관(客館)인 난요우(南陽)()로 요시아키를 초대하여 화려한 연회를 열어서는 화려하게 핀 벗나무를 주제로 요시카게는 참석한 귀족(公家)들과 함께 시와 노래를 즐겼다. 이어 아사쿠라 저택에서 요시아키(義秋)는 성년식을 치르고 [義昭]로 개명했다. 그리고 5월에는 공식적인 방문이 실현. 요시카게는 최고의 명예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요시카게와는 달리 굉장히 정치적이며 야심가이기도 했다.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일부러 에치젠까지 내려올 리가 없었으며 아사쿠라 가()의 무력 지원을 받아서 쿄우()로 올라가 쇼우군()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8개월 정도 머물고 있는 동안, 요시카게에게 움직일 마음과 준비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요시아키는 결국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노력으로 새로운 지원자가 되어 준 노부나가에게로 향했다.


노부나가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다.


 1568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을 이루고 천하를 향한 발판을 마련했다. 반대로 요시카게는 요시아키를 놓쳐 귀중한 기회를 잃게 되었다. 오히려 그 당시 요시카게는 세력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일족끼리의 다툼이 방해를 하였다. 오오노(大野)()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와 츠루가(敦賀) 군(郡)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츠네(朝倉 景恒)와의 다툼이 끊이질 않았으며, 이 둘의 중재에 요시카게는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요시아키가 떠나기 직전, 요시카게의 적자 쿠마키미(阿君)가 독살당하는 괴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진상은 확실치 않지만 요시아키를 둘러쌓고 요시카게와 사이가 틀어져 버린 아케치 미츠히데 쪽의 책모는 아닐까 하는 말이 있다.


 다음 해인 1569년.

 쇼우군 요시아키의 어소(御所)를 만들기 위해 노부나가는 여러 나라의 다이묘우들에게 쿄우로 와서 건설에 참가하기를 원했다. 요시카게에게도 상경의 재촉이 있었으나 회의 결과 무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노부나가와의 적대 관계가 명확히 되어 1570년에 아네가와 전투라는 결과가 되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군() 1 5천과 아자이 나가마사 군() 5 ~ 6천이 아네가와를 사이에 끼고 오다-토쿠가와(德川) 연합군 3 4천과 대치하였다. 일반적으로는 격전 끝에 아사쿠라-아자이측이 대패배를 당했다는 듯이 알려져 있지만 양 측 다 많은 전사자를 내며 물러났으며 나가마사도 오다니(小谷) 성을 지킬 수 있었으니 우선은 비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요시카게보다도 노부나가가 위기에 빠진다.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는 노부나가가 원망스러운 쇼우군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아사쿠라, 아자이,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 잇코우잇키(一向一揆), 히에이잔(比叡山), 마츠나가(松永), 미요시(三好) 등의 세력과 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까지도 참가하는 강대한 노부나가 포위망이 형성된 것이다. 요시아키의 생각을 받들어 요시카게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배반당한 요시카게의 최후


 하지만 노부나가군과 몇 번이나 싸우면서도 요시카게는 한 번만 더 밀면 되는 곳에서 철군하는 등 승기를 놓쳤다. 한 편 각개 격파로 포위망을 뚫고 위기를 탈출한 노부나가는 1573오우미(近江)로 쳐들어 온다. 오다니성 구원을 위하여 달려온 요시카게였지만 이미 노부나가군의 신속한 공격으로 두 개의 지성(支城)이 함락되어 오다니성도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알고 구원을 중지하고 퇴각하였으나 추격해 온 노부나가 군과 오우미 토네사카(刀禰坂)에서 조우하여 요시카게군은 대패하였다.


  5 ~ 6기(騎)와 함께 이치죠우다니로 도망 온 요시카게는 사촌인 요시아키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에치젠 오오노로 도망가 토우운(洞雲)()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도 기대하고 있던 헤이센(平泉)() 중도(衆徒)의 지원을 얻지 못하였고, 더구나 카게아키라의 꼬임으로 로쿠보우켄쇼우(六坊賢松)()로 거처를 옮긴 상태에서 배반한 카게아키라의 군세에 포위되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된 요시카게는 8 20일 오전 10시경,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쓰러진 40년 인생.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七転八倒 四十年中
 無他無自 四大本空

 이라는 사세구를벽에 피로 쓴 후,배를 열십자로 그어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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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wien1 BlogIcon wien1 2006.06.21 15: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나가다 한가지 재미있는 얘기 써놓고 갑니다. 일본 학계에선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일문에서 배신당한 것이 실은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 보는 설도 있다네요. 본래 오미 슈고 롯가쿠 사다요리(六角定賴)의 아들인데 에치젠에 양자로 가서 가문을 이었고, 그때문에 아사쿠라 일족과 불화를 겪었다는 이설이 있다고 해서 참고삼아 적어봅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06.21 16: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지식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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