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99년 윤 3 3 병사 62

1538 ~ 1599.

오와리[尾張] 아라코[荒子] 성주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昌]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전공을 세웠고,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따르며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영지를 받아 '카가 백만석[加賀百万石]'의 기초를 쌓았다.









히데요시의 말벗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출생 후 1년 뒤인 1538년에 태어난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보다 1년 더살아 1599년에 62세로 죽었다. 히데요시와 산 시간이 거의 겹치는 토시이에의 인생은 좋건 나쁘건 히데요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말년 히데요시 정권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1591년부터 토시이에의 존재는 무게감을 더해 갔다.


 1591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가 병사했으며, 센노 리큐[千 利休]가 할복하였다. 정권의 중추에 있던 두 사람을 잃고 계속해서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일찍 죽어버리는 불행을 맛 본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오토키슈우[伽衆]에 임명하여 공과 사에 걸쳐 상담 상대로 하였다. 이 때 토시이에 54.


 다음 해인 1592년.

 히데요시의 조선 출진에 토시이에는 병 8천을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 길어지고 있던 진중 생활에 살기(殺氣) 어린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사이를 중재하고 가난한 시골 다이묘우의 뒤를 보아주는 등 남을 잘 살펴주는 인품을 발휘했다. 이때 함께 했던 측실인 치요가 임신하여 후에 3대 번주가 되는 4남 토시츠네[利常]를 낳았다.


깊어지는 히데요시와의 친밀도


 토시츠네가 카가 카나자와[金沢]에서 탄생한 1593년.

 히데요시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아이 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났다. 이 히데요리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을 물려주고 있던 조카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와 그의 일족, 파벌을 멸하였다. 그 직후 모든 다이묘우는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온 천하에 인식되었다.


 히데츠구와도 친했던 토시이에였지만 히데요시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후견인[=傳役]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모든 다이묘우[大名] 중에서 유일하게 항상 수도권[上方]에 머물면서 후견을 맡는 큰 역할이었다. 육친조차 믿지 않던 독재자도 토시이에의 '의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양녀가 된 토시이에의 딸들과의 2, 3중으로 엮어진 연도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은 그러한 친밀함을 우려하여 이에야스나 토시이에 둘 다 야심이 많기에 언젠가 둘이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예언은 반은 적중했지만 반은 빗나갔다.


 1598 8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에야스, 토시이에 등 대로와봉행(五奉行)들에게 계속해서 후사를 부탁한 히데요시가 죽자 곧바로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토시이에였다. 이때 토시이에도 또한 병들어 있었다. 조선과의 평화 교섭으로 일본에 와 있던 명()심유경(沈惟敬)에게 지속성의 독을 히데요시와 함께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퍼지는 등 병증의 악화가 매우 빨랐다.

 이 때문에 토시이에는 이미 가독(家督)을 토시나가[利長]에게 물려준 은거료 15천석의 신분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유언을 무시하며 여러 다이묘우와 혼인을 맺으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다이묘우들도 양 쪽으로 나뉘는 큰 소동으로 발전했지만,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연을 맺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들의 노력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의리 있는 사나이의 평범한 죽음


 1599년 정월.

 토시이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를 만나 화해를 의한 회담을 가졌다.


 3 8일에는 이에야스의 답례 방문이 이어졌다.

 토시이에는 괴로운 숨소리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토시나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이에야스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은 이때 이에야스를 죽이고자 했지만 가신들이 반대했다고도 토시나가가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토시이에에게는 이미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3 15일. 죽음이 가까워 짐을 안 토시이에는 자잘하고 상세하게 유산 분배를 하였다.


 3 21일.

 머리맡으로 정실인 마츠를 불러 토시나가에게 보내는 '유훈 11개조[遺戒十一箇条]'를 필기시켰다. 앞으로 3년간 토시나가는 본거지 카가[加賀]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병사 1 6천을 카가[加賀]와 오오사카[大坂]에 둘로 나누어 주둔시키고 모반의 징조가 있으면 합류해서 싸우라며 마지막까지도 히데요리를 걱정하였다.


 10일 후.

 점점 더 중태에 빠졌다. 마츠가,
 
"당신은 예전에 싸움터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에 갔을 때를 대비해 이것을 입어주세요"
 라며 준비한 경문이 쓰여진 수의를 입으라고 하자 토시이에는,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힌 적은 없다. 때문에 난 죄가 없다. 죄가 없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만약 지옥의 염라대왕이나 도깨비들이 날 얕보고 괴롭힌다면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 우리 가문의 용사들을 이끌고 그 곳을 정벌하겠다"
 
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윤 3 3일.

 마츠와 토시나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센고쿠 무장[戦国武将]치고는 드문 평범한 죽음이었다.

  1.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타카[忠隆]와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世]는 부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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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overmint BlogIcon 한걸음씩 2006.07.28 2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갈게요... 정말 잘 쓰셨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edge7744 BlogIcon 우에스기 2006.08.08 1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갔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oisiimir BlogIcon 유코유코 2006.08.13 0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지나가다 한마디 적고 갑니다. 말년에 이에야스 암살계획 시 직접 이에야스를 베겠다고 자청한 자가 바로 토시나가입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oisiimir BlogIcon 유코유코 2006.08.13 0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히려 봉행자(미츠나리 등)들과 이에야스 사이에서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던 사람은 토시이에였습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08.13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오히려 전 유코유코님의 토시나가 주도설을 처음 듣는군요. 토시나가가 그렇게 과감했다면, 토쿠가와 막부가 아닌 마에다 막부가 들어섰을 것 같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lovenoran BlogIcon 럽노란 2006.10.09 1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가 딸 치요가 결혼한 사람은 호시카와 타다타카 였습니다. 타다오키의 아들입니다. 타다오키의 부인은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 부인이었구요~ 세키가하라 이후 치요히메는 호소카와 가로부터 이혼당합니다. 하지만 타다타카는 아버지의 이혼 명령을 납득하지 못한채 이혼후에도 교토에서 치요히메랑 몇 년간 함께 살았다고 하더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10.09 2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럽노란'님의 말씀이 맞군요.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입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l91768 BlogIcon 이번에는 2007.06.16 1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라고 좋게 말을해도 우리입장에서는 국토를 유린하고 인구의 1/3이상이 죽었으며..10만명가량이 포로로 끌려간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정권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이죠..내가 일본사람이었다면 뭐..조금은 멋있었다고도 생각할수도 있으나..한국인의 입장에서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6.16 17: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시각에서의 주장 고맙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군요. 종국엔 토요토미 정권의 유지에 필요한 세금을 낸 일반 시민들 까지도 모두 미워해야 할테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l91768 BlogIcon 이번에는 2007.06.25 0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인전체를 미워한다는 시각이 아니라..특정정권의 중심인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위에 자료는 정말 좋은 자료인것은 분명하나..저건 분명 일본인의 시각에서의 역사적사실이니까요..토시이에라는 인물이 임진왜란때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는데..위의 자료 이상의 자료는 찾을수가 없네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oir3197 BlogIcon 누와르 2007.08.02 16: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토시이에와 마츠를 보면서 알게?榮쨉 주인공이라 그런지 호감도가 팍팍 상승하더군요.. 히데요시에게 이런 멋진 가신이 있었다니..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02 2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케일이 워낙 커진 토시이에다 보니, '가신'이라는 말씀에 위화감이 드는군요. ^^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830922790210 BlogIcon 830922790210 2008.06.28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토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함께 임진왜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시대 통일 후, 즉, 도요토미 정권의 모든 무장이 전부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지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들은 정권의 정점에 있던 대명(다이모)들보다 전국시대 이후 공적을 세울 수 없어 출세할 수 없게 된 일반 무장들의 참전이 더 많았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의 경우는 도요토미와는 오다 노부나가의 근습이였던 시절부터 친구라고는 하나 그의 유언장을 보면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향수는 없고 오다가의 가신이었을 때를 회상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이 오다 노부나가에 더 향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 다 차치하고도 일단 한국사람인지라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호감도 상승입니다...;;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1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음, 굳이 변명하자면 전 황금왕보다는 오다가 좋다는... 그쪽으로 좀 더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토시이에의 유훈의 내용에 대해서도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만은 이에야스에게 남긴 말 중에 몇가지만을 기억할 뿐...;; 도쿠가와라는 둥 도요토미라는 둥 떠드는 소리가 만연한데 지나간 도요토미에 몰중에서 도쿠가와를 무시하는 자나 반대로 도요토미를 무시자들을 멀리하라라던지, 전국시대의 유물을 계승하지 말고 천하인으로서 신도나 불교, 상업과 외교 가능하면 크리스찬도 포용하라고 했다든지 말년에 병으로 인해 누워만있던 토시이에의 식견이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히데요리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진정 도요토미가를 생각한 장은 도시이에 뿐' 이라는 말도 전해지는 것 같고 말이지요. 정말 개인적으로는 전국시대 당시 오다가의 수하에서 함께 싸우던 이누(犬)와 사루(猿),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와 키노시타 토오키치 시절까지가 제가 좋아하는 기간이랄까...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했을 당시부터 지략가로서의 기량을 더 펼치는 도요토미이지만 왠지 싫다는... 그것도 다 저 또한 갖고 있는 전국시대 오와리에서부터 시작한 오다가의 향수랄까요...;;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1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끔없는 이야기 입니다만...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의 무기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아무리 찾아도 도요토미에게 하사받았다라고 해야할까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여하튼 현재 일본 국보로 마에다육성회에서 소지하고 있는 오오텐타 미츠요(大典太 光世)라는 칼에 대해서만 나올 뿐 애용했던 창의 이름이랄까 하는 것은 없더군요. 혹시 아신다면 리리플 부탁드리겠습니다...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2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변명을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측면을 살펴 보는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근거로 한 가지만을 가지고 내세워서는 조금 그렇지 않나? 라는 뜻에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글쎄요. 저도 아는 것이라고는 그 천하오검의 하나인 오오텐타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토시이에 정도의 인물이 어떤 한 무기에 구속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오오텐타는 미술품일 뿐이고).

  1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2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나가다님... 의견 감사드립니다. 다만 출세할 수 없게 된 일반 무장들 보다는,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이 원정에 나섰다고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말씀하신 토시이에의 유훈(遺誡11か条)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위키는 그렇게 쓰여 있는 듯 합니다만).
    히데요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고, 난이 일어날 때의 대처 등이 쓰여있으며, 노부나가에 대한 것은 '공격시는 무조건 침공! 자국에서 방어 즐~. 노부나가공은 한 번도 자국내에서 합전을 한 적이 없다'인데, 그 외는 합전 시의 마음가짐, 중신과 공신에 대한 처우와 평가 등인데 이걸로 노부나가만 짱, 히데요시 그냥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위키는 개인적인 감상이 개입될 수 있는 백과사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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