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세상이 된 다음의 일이다. 
 어느 날,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거성 치쿠젠[筑前] 후쿠오카 성[福岡城]에서 무사들이 모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무사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시마 사콘[島 左近]은 정말 무서웠지. 지금도 눈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니까”고 몸서리치며 말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도 그러하다며 수긍하였다. 
 그러나 그 시마 사콘이 당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기억들이 달라 서로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침 쿠로다 가문에 있던 미츠나리의 옛 가신(家臣)이었던 사람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그 가신의 말에 따르면 투구의 앞장식[立物]은 삼 척(尺)[각주:1] 정도 되는 텐츠키[天衝]를 붙이고, 갑옷은 옻칠을 한 가죽 몸통갑옷[溜塗り桶革胴], 연황색 목면의 전포[陣羽織]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링크:당시 시마 사콘이 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갑옷 - 위에서 두 번째 것이 시마 사콘의 갑옷
 이것을 듣고 모여있던 쿠로다 가문의 무사들은, “보통 그렇게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잊지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우리 쿠로다 가문은 이시다 가문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잖아. 정말 그렇게 가까이서 사콘을 보았으면서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우리는 정말 당황했었나 보군, 정말 쪽 팔린 일이로세”하고 개탄하였다. 그래도 그 중 하나가, “아니지. 그렇게 온몸의 털이 다 설 정도로 공포에 떨었으며, 자칫하면 우리들 목도 사콘의 창에 꿰였을 수도 있을 터인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마 사콘 –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개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의 성[佐和山城]’이라 일컬었을 정도의 무장이지만, 그의 이력은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엔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의 성주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를 섬기었으며, 쥰케이의 가신 마츠쿠라 우콘[松倉 右近]과 쌍벽을 이루며 ‘우콘-사콘’이라 칭해진 전술가(戰術家)였다. 후에 낭인이 되어 오우미[近江] 타카미야[高宮]에 은거하고 있을 때, 사콘의 장재(將材)를 높이 산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듭된 부탁에 꺾여 미츠나리를 섬겼다. 그때 미츠나리는 4만석의 소령(所領) 중 반분 가까운 1만5천석을 사콘에게 주었다고 한다.[각주: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이런 사콘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빠지자, 검술사범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를 사콘에게 파견하여 사콘의 뱃속을 살피게 하였다. 무네노리와 사콘은 동향 출신이었으며, 또한 무네노리 역시 츠츠이 가문[筒井家]을 섬긴 적이 있어 사콘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각주:3] 
 잠시 잡담을 나눈 후 무네노리는 사콘에게 천하의 향방이 어찌될 것 같은지에 대해 물었다. 사콘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처럼 지모와 결단력 있는 인물이 없기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주군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모는 있어도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사실 사콘은 몇 번이나 미츠나리에게 중대한 결단을 촉구했으며, 그럴 때마다 각하 당했다.

 미츠나리가 무공파 칠장[각주:4]에게 공격받아 이에야스의 중재로 사와야마에 은퇴하게 되었을 때, 사콘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며 이런 작전을 세웠다. “사와야마를 1천의 병사로 수비하고, 2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시미[伏見]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이에야스를 죽여버립시다.”고 진언하였다. 미츠나리는 때가 아니라며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또한 이 이후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에 향하던 도중 오우미[近江] 미나구치[水口]에 머문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도 사콘은 야습을 진언했지만 미츠나리는, “그에 대해서는 미나구치 성주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맡겨두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0년 9월 14일 세키가하라 결전의 하루 전. 아이즈 정벌군을 회군한 동군(東軍)의 총수 이에야스가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에 도착하자, 오오가키[大垣]에 있던 서군(西軍)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때 사콘은 아군의 사기를 여기서 높이지 않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이라 보고, 500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오오가키와 아카사카 사이에 흐르는 쿠이세 강[杭瀬川]까지 진출하여 동군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아리마 토요우지[有馬 豊氏]의 군을 유인해서는 쳐부수어 서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어서 그날 밤 작전회의에서 야습을 진언했지만 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콘은 자신의 진소(陣所)에 돌아가서는 가신들을 모아, 가신들의 목숨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전했다 한다.

시마 사콘[島 左近]
이름은 키요오키[清興]. 일반적으로 카츠타케[勝猛]가 유명하다. 츠츠이 가문[筒井家] 다음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의 아들[각주:5] 히데야스[秀保]도 섬긴 적이 있다고 한다.

  1. 약 91cm. [본문으로]
  2.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이러했다고는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거기에 더해 사콘의 딸은 무네노리의 조카이며 후에 오와리 야규우[尾張柳生]의 시조인 야규우 토시토시[柳生 利厳]의 부인이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5. 양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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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2.02.19 2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머리에 시마사콘이 밟고있는 꼬리를 보니 여우인지 모를 사이클롭스(..)는 뭘까 궁금하네요. 시마사콘의 오니 퇴치 전설같은거라도 따로 있는거려나요.

    그러고보면 시마 사콘이 진언한 야습내지 기습을 족족 각하시켰다는건 이시다 미츠나리로서는 정공법으로 승부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라고 해석할수 있는 여지가 있으려나요. 만약 그랬다면 요즘 신나게 주가를 띄우고있는 캡콤겜이라거나 코에이겜에서의 미츠나리도 좀 평가절하되야겠습니다만(허헣;)

    사족이지만 올려주신 링크페이지를 내려 구족들 훑어보니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수리부분에 빗자루를 달아놓은듯한 투구와 예의 그 쿠로다 나가마사 태양전지판 투구(..)가 굉장히 눈에 띄는군요. 그밑으로도 토도 타카토라는 무슨 프로펠러같은걸 투구에 붙여놓은거라더가(;;)

    타치바나 무네시게도 꽤 기이한 투구를 쓴듯 싶은데 이거 전국무쌍3에서의 성기사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터라 실제로 이런걸 보면 갭이 크군요. (어이쿠;;)


    아 로또당첨 축하드립니다. 저는 왕회장님과 영광스럽게도 악수하는 꿈을꾸고 한장인가 사봤는데 5등(..)나왔던게 제일 잘나온것이더군요. 도대체 누구와 만나야 1등을 받을수 있는걸련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0 1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글로 써진 부분에 그런 것이라도 있나? 해서 읽어보아도 그런 것은 없더군요.

      근데 그 야습설이라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미츠나리 까기 위해서 쓰인 글들이라...예를들어, 시마즈 요시히로나 토요히사가 야습을 진언했을 때 물리친 것은 시마 사콘인데, 이때 사콘은 "내일 작전대로 정면 승부한다면 필시 이에야스의 갑옷 뒷모습을 보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토요히사가 "당신은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기는 한가?"라고 하자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을 때 미카타가하라에서 도망치는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소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죠.(여담으로 이 일화를 가지고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던 적이 있네 없네 하죠..--; ). 기본적으로 야습이란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필연적으로 소인수 밖에 움직일 수 없으니 성공한다고 쳐도 그 성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상대도 병신이 아니니 대비가 되어있을테니까요.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기본적으로 야습을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국지연의 등의 소설이 유포된 뒤에 군담작가들이 생각해 낸 것이 각종 야습설이라 생각합니다.

      타카토라 투구의 저것은 중국 관리들이 쓰는 모자(冠帽)를 흉내낸 것인데..좀 大袈裟인듯요.

      고맙습니다. ^^ 당첨금으로 담배나 좀 쟁여놔야 겠습니다.

  2. ㅇㅇ 2015.07.05 07: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 3병법이라는 명성에 비해 나오에랑 활약이 적군요. 아니면 모셨던 주군들이 변변치 못했다던지.

 1912년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 사[大徳寺]에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미츠나리의 유골을 조사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골격은 여성과 착각할 정도로 얇았다고 한다. 마치 히로사키 시[弘前市] 스기야마 가문[杉山家][각주:1]에 전해지는 미츠나리 초상화[각주:2]처럼, 섬세하고 여성적인 풍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형의 사람은 고지식하며 비사교적, 유모어가 부족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자연이나 책 등을 사랑하는 지능형으로, 인간에 대해서는 냉담냉혹 한 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시다 미츠나리와 관련된 일화의 대부분에서 그런 특징을 옅볼 수 있다.

 미츠나리는 뛰어난 재치로 인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미츠나리의 출신지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근처에 있는 절에 심부름하는 아이[寺小姓]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는 15~16 즈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로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매사냥을 하던 도중 목이 말라 이 절에 목을 축이러 온 것이다.
 미츠나리가 접대를 맡았다. 곧바로 차를 끓여 히데요시에게 권했다. 첫 번째로 내온  차는 커다란 찻잔에 미지근한 차를 7~80%를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맛있게 전부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뜨거운 차를 찻잔의 반 정도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이것도 다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아주 뜨거운 차를 작은 찻잔에 조금만 담아 내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의 이런 재치가 맘에 들어 절의 주지에게 청하여 미츠나리를 데리고 와 곧바로 시동으로 삼았다. 이렇게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미츠나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재능을 발휘하며 차츰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갔다.[각주:3] [각주:4]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호출하여 지금까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500석을 가증(加增)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500석 대신에 우지[宇治], 요도[淀]의 양 천 기슭에 자라는 백성들이 맘대로 베고 있는 갈대의 예초권(刈草權)을 저에게 주신다면, 1만석에 상당하는 군역(軍役)을 부담하겠습니다”
 하고 청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미츠나리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양 천의 천기슭 수십 리 안에 있는 갈대를 베는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각주:5] 

 미츠나리 의 이러한 이재(理財)의 재능도 히데요시는 맘에 들었다. 더구나 미츠나리의 경우 그런 재능을 사욕이 아닌 히데요시에 대한 멸사봉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언제나 미츠나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은 주인에게서 받은 봉록을 전부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긴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다 써버리고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 단언하였다.

 이에 관한 일화로 용장(勇將)으로 이름 높은 시마 사콘[島 左近]을,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의 절반 가까이를 들여 가신으로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각주:6] 
 미츠나리는 뛰어난 무사에게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있도록 힘썼던 듯 하다. 그것도 히데요시에 대한 봉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츠나리 자신의 주변은 실로 꾸밈이 없고 수수했다. 후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패하여 거성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도 함락되었는데, 공격군의 병사가 성 안을 돌아보자 방은 모두 초벽(初壁)만 한 상태였으며, 바닥은 대부분 판자만 덧댄 채였다. 마당에 정원수(庭園樹)도 없었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도 굉장히 착실하였으며 다방면에 이르렀다. 밤중에 폭풍이 들이쳤을 때에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이미 성의 파손상태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즉 미츠나리는 이런 경우 철야를 해가며 성 안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원래 이런 역할을 해야 할 담당관은 10시 즈음이나 되어서야 보고하러 오는 꼴이었다.

 이상과 같은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는 결코 히데요시에게 아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주 히데요시에게 격한 말투로 간언(諫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츠나리는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에 임명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칭하게 되었을 때, 관백의 제대부(諸大夫) 12명[각주:7] 중 한 사람에 선정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토요토미 정권의 오봉행(五奉行)[각주:8] 중 한 사람으로 행정의 중책을 짊어지지만,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으로 순식간에 No.1 실력자가 된다.

 미츠나리의 치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히데요시가 중요시했던 사카이[堺]의 총독을 1586년부터 1588년까지 맡았으며,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때의 병참, 하카타[博多]의 부흥,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와의 외교절충에 힘 썼으며,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히데요시의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1]에 출진,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서는 침략군의 운송과 병참, 무기 보급 등의 지휘를 취하였으며 감찰[軍監]까지 맡았다. 거기에 관백 히데츠구[秀次] 사건[각주:12],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13]에도 참여하는 등등 히데요시가 행한 중요정책 전반에 미츠나리는 중요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했기에 히데요시도,
 “나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자는 미츠나리뿐”
 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미츠나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히데요시 정권의 No.1 실력자였다.
 코우야 산[高野山]의 모쿠지키 상인[木食 上人]은,
 “미츠나리는 오봉행 중 제일인자인 듯이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고 말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는,
 “태합의 고굉지신으로, 그 위세는 비견할 자가 없다”고 말하였고,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는 가신인 코다마 모토카네[児玉 元兼]가 가지고 있는 명도(名刀)를 미츠나리가 원하였는데, 제출이 늦어져[각주:14] 미츠나리의 기분이 상하면 큰일이라며 빨리 제출해 달라고 코다마 모토카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했기에 미츠나리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츠나리를 극도로 증오하는 무리가 있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등 창 한 자루로 돌격하며 출세한 히데요시의 아이들, 즉 무공파 무장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츠나리는 아무런 무공도 없는 주제에 히데요시의 맘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난체하며 이런저런 지휘를 하는 건방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오대로(五大老)[각주:15]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천하제패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저 무공파 장수들은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이에야스와 손잡고 미츠나리 등 문치파와 격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99년 3월, 문치파의 좌장적 존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자, 무공파 칠장[각주:16]은 미츠나리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미츠나리는 이때 하필이면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 난을 피할 수 있었는데[각주:17], 이런 모습에서 당시의 정치상화 속에서 고립된 미츠나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각주:18]. 이 사건으로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를 강요당해, 천하는 이에야스의 독무대가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은 대단원이었다. 대다수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각주:19]의 다이묘우는 미츠나리가 내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만으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츠나리의 중대한 오산이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패하여 도망치다 잡혔다. 그 뒤에 몇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의복이 더러워져 있었기에 이에야스가 입던 옷을 주었을 때, 그것을 미츠나리에게로 가지고 온 자가,
 “이것은 우에사마[上様]가 하사하신 것”
 이라고 하자,
 “히데요리[秀頼]님 말고 우에사마는 따로 없을 터”
 라고 말하며 그 옷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잡힌 미츠나리를 내려다 보며 욕을 하였을 때,
 “무운 다하여 네 놈을 이러한 처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고 대답했다고 한다.

 10월 1일. 로구죠우 강변[六条河原]의 처형장에 끌려갈 때, 미츠나리는 너무도 목이  말라 경비하는 자에게 따스한 물을 달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장 따스한 물을 구할 수 없어 경비무사는 대신으로 하라며 곶감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곶감이 가래병에 좋지 않다며 거절하였다. 경비무사는 지금 죽으러 가는 주제에 몸에 좋지 않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미츠나리는 말했다.
 “큰 뜻을 품은 자는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목숨을 아껴 어떻게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년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출생.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눈에 띄어 코우가[甲賀] 미나구치[水口] 성주가 되면서부터[각주:20] 출세하여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가 되었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으로 선정된다. 1595년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 19만 4천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참모로 삼아 서군(西軍) 8만을 이끌고 싸우지만 패하여 사형당했다. 41세.

  1. 미츠나리의 둘째 아들 이시다 시게나리[石田 重成]가 히로사키 번[弘前藩]으로 도망간 뒤 시게나리의 아들 요시나리[吉成] 때부터 스기야마 씨[杉山氏]를 칭함. [본문으로]
  2. 위에 있는 초상화. [본문으로]
  3.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 작자미상의 일화 모음집 무장감장기(武将感状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시게이에[重家]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8살 때 히데요시가 히메지[姫路]에서 츄우고쿠[中国] 방면을 담당했을 때부터 섬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후세의 군기물 ‘이시다 군기[石田軍記]에는 히데요시가 미츠나리의 후장을 파려고 시동으로 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갈대는 지붕을 만드는데 쓰이거나, 물건을 가리는 발(簾)을 만드는데 쓰였기에 거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로 미츠나리는 후에 이때 얻은 돈으로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백 기(騎)의 무사를 이끌고 와 히데요시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고금무가성쇄기(古今武家盛衰記)’에 실린 글이라 한다. [본문으로]
  6.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2만석을 떼어 주었다고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8.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1591년 1월의 오오사키-카사이의 난[大崎・葛西の乱]과 9월의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본문으로]
  12. 사실 미츠나리는 히데츠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츠나리는 칸토우[関東] 사타케 령[佐竹領]의 검지(検知)하기 위해 출장간 상태였다. [본문으로]
  13.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14. 살생관백 히데츠구[秀次]도 이 칼을 노리고 있었기에, 모토카네는 어느 쪽을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기에 늦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6.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7.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18. 사실 이 사건은 미츠나리 하나만 노린 사건이 아니라, 봉행파 다수를 노린 사건이었으나 은거를 하며 봉행직에서 물러난 것은 미츠나리 한명 뿐이라, 후세에 미츠나리만 공격받은 양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어 다이묘우가 된 무장들. [본문으로]
  20.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주가 된 적은 없다. 시마 사콘[島 左近]을 등용할 때 미나구치 4만석 중 2만석을 떼어 주었다는 일화 때문에 퍼진 낭설로, 당시(1590) 미나구치의 성주는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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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8.19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음침하고 어두운 이미지의 미쓰나리 인간상이 부각되면서 악당의 이미지였습니다만, 요새는 가장 인기있는 인물 중 하나로 부각되더군요(전국무쌍, 전국바사라를 포함한 응용창작매체 포함). 역사는 돌고 도는 건가봅니다.

    개인적으론 어떤 일화보다도 요시쓰구와의 일화가 미쓰나리라는 인물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는가 싶습니다. 소통하는 능력이 떨어졌던 인간성 좋은 사람 정도랄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1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가 에도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인기가 있었기에, 그런 영웅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대신 짊어질 사람이 필요했고, 그런 인간으로 적합했던 것이 신군(神君) 이에야스에게 끝까지 개긴 미츠나리. 뭐 미츠나리가 진정한 충신이라면 저 세상에서 히데요시의 방패막이가 된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지도 모르겠군요.

      사족으로....
      소슈 님은 제 블로그에 2000번째 리플을 다신 분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8.22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번째 밀레니엄을 달성했다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번째 영예도 제가 안았으면 좋겠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3 1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앞으로도 오래오래 찾아주십시오. ^^

  2. 간스케 2011.08.23 1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를 소인배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거 같더군요.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발해지랑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어보고 싶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그냥 미츠나리가 역사의 패배자이다 보니 이것저것 뒤집어 썼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혹시 그 글을 소개해 주셨음 감사드리겠습니다.

  3. ckyup 2011.08.2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친구 머리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던데.., 보통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시험으로 잣대를 삼았는데 이당시 전국시대엔 어떤 특별한 제도나 시험이 있었나요? 우리가 흔히아는 이당시 특출난 사람들 간베에, 미츠나리, 마사노부 등등..., 전부 알려진 바로는 우연한 인연으로 등용되던데요....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도나 그런 것은 없었고, 일반적으로 무사들이란 한 지역의 지배층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행정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평소에는 자신의 영지 혹은 맡겨진 영지의 행정을 담당(代官)하다가, 특별한 일(전쟁, 토목공사 등)이 생기면 상위의 무장(주군 혹은 요리오야[寄親])에게 담당관[奉行]에 임명되는 식이었습니다.(대충 간략하게는 이렇습니다)

      예를들어 쿠로다 칸베에의 경우 히메지[姫路]를 다스리는 작은 영주였다가, 그 위에 히데요시[秀吉]라는 인물이 오자 그 휘하에 속한 것입죠. 속한 상태에서 하리마[播磨] 지역에 있는 반노부나가 상태의 무사들을 회유 또는 동원령에 따라 히메지의 무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기는 했겠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히데요시의 참모 혹은 군사로 활약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등용문제는 지배구조에 관한 문제라 간단히 쓰기가 어렵군요. (제가 가진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뭐라 잘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

  4. 정동희 2011.08.31 14: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나우누리 신장동 시절에 닉네임으로 쓴 인물이었네요
    센코쿠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고, 격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이에야쓰와 대립한 큰 인물이었습니다
    위의 일화들을 보면 유능했지만 거만했다 라는 느낌인데
    사실 유능한 사람이 거만해지지 않기가 참 힘들죠
    그런 면에서 자신의 성질을 감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능력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클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를 쓰시더니.. 똥싸개 이에야스와 반대편에 서는 인물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유능한 미츠나리의 능력에 열폭한 사람들이 별걸 아닌 일에도 그의 행동을 거만하게 보고 그렇게 기록해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고요.

    • 정동희 2011.09.01 16: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 ㅋㅋ 희대의 두 영웅 밑에서 잘 굴러 먹었고 결국은 천하를 꿀꺽
      상황에 따라서는 마누라나 장남도 가차 없이 죽이고... 후흑술의 대가인데
      아무래도 정이 안가네요

    • 정동희 2011.09.01 1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츠나리 개인이 거만했고 아니고를 떠나서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위치였기 때문에 뭍 사람들의 질시를 받는 건 당연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가 좀 더 사려가 깊었다면 어떻게든 그런 이미지를 불식시키도록 노력을 했어야 했겠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만.... 질투 받는 것은 질투 하는 쪽의 인식이 변하기 전에는 받는 쪽이 아무리 노력해도 변함이 없는 것 같더군요.

  5. 정동희 2011.08.31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쓰나리의 거만함이나 독단이 이른바 무단파와의 갈등을 불러 결과적으로 토요토미를 멸망으로 몰아 넣은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구요
    토요토미 멸망의 가장 주요한 이유는 히데요시의 어처구니 없는 조일7년 전쟁의 휴유증 이라고
    개인적으로 단언합니다
    조일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정유재란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토요토미 정권이 그렇게 쉽게 망하진 않았을 겁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토요토미 정권은 임란 후에도, 세키가하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느 정도 방귀는 뀔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근래엔 이런 주장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토요토미 정권을 끝장낸 이에야스의 능력도 굉장히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1.09.01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시이에가 살았을 때 거병을 했다면,
      마시다 나가모리가 히데요시 직할지 재력만 미츠나리에게 지원 했다면
      뭐 그런 등 등 등의 설이 의미가 있겠습니까만은
      어쨌든 이에야쓰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저도 동감입니다
      특히 여러 다이묘들한테 이러 저러한 도움 주고 편지 보내고 공작하고 하는 건 참
      정말 어지간히 오지랍 넓고 부지런한 노인네였어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래에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인지라 저도 깊숙히는 모릅니다만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힘은 이에야스의 칸토우 정권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했기에 세키가하라 이후 15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토요토미 정권의 힘을 깍으려 한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pray4abyss.egloos.com/ BlogIcon 로날드럭 2011.09.01 16: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은근히 말년 히데요시가 잘못한 일을 미쓰나리가 뒤집어 쓰는 면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
    근데 요즘은 미쓰나리가 이에야스는 물론이고 히데요시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으니(....)

    눈팅은 오래 해왔는데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건 처음이네요.
    앞으로 자주 들리겠습니다(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대로 요즘 서브컬처에서는 미츠나리의 인기가 히데요시를 뛰어넘은 듯 하더군요. 뭐 히데요시야 워낙 오래(2차 대전 이전부터) 빨아대서 진물이 빠졌던 것도 있는 듯 합니다만.

      앞으로도 자주 들려주시고 알려주실 일 있음 많이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

  7. ㅇㅇ 2015.07.03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군 총대장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아닌 세키가하라에서 적극적으로 싸운 우키타 히데이에를 세웠다면 나은 결과가 나왔을 거 같네요.

    모우리 테루모토 정말 못난 놈, 일본판 유선(아두)이군요. 총대장이 오사카 성에 놀고 있다니...

    미츠나리 같은 편협한 놈이 총대장 대리역한다는 것 자체가 패배가 점쳐진거죠. 무공파의 이탈과 시마즈의 야습 진언 각하.
    원숭이 없으면 제 구실 못하는 놈.

  8. 마사무네 2017.03.14 1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확히는 담에 좋지 않아서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목표가 있고 그일을 반드시 이룰려고 하는자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절대로 인생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닛코우[日光]에 가면 토우쇼우 궁[東照宮][각주:1]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오오토리이[大鳥居]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가 저 먼 큐우슈우[九州]에서 거대한 바위를 옮겨와 건조한 것이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힘들었을 듯한 이런 공정을 나가마사는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에도[江戸]에서 닛코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돌기둥 하나를 배 한 척에 싣고, 그 배의 양쪽에 굵은 밧줄을 연결한 배 두 척이 끌게 하였다. 육로로 옮겨지자 슈라구루마[修羅車]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나 큰 목재를 옮기는 수레에 싣고 수 마리의 소로 끌게 하였다. 닛코우로 가는 길은 흑토(黑土)라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두꺼운 널빤지를 200여 미터정도 빈틈없이 깔아가며 옮겼다.
 
오오토리이를 조립하는데도 고생하였다. 기둥을 양쪽에 세운 후 상부에 돌을 얹어야 했는데, 나가마사는 근처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쌀, 보리, 메밀, 콩을 채운 가마니를 사 모은 뒤 이 가마니를 쌓아 발판으로 삼고 도르래를 장치하여 돌을 끌어 올렸다. 이것만으로도 천 명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였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호쾌한 기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덩치가 컸기에 전쟁터의 모습은 괴물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가신(家臣) 시마 사콘[島 左近]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사'라고 경외 받았는데, 어느 날 갑주를 입고 살기를 풍기는 사콘을 보고 사콘의 부인조차 공포에 떨었다. 그러자 사콘은 "참 겁도 많으시군. 쿠로다 카이노카미[黒田 甲斐守=나가마사]가 갑주 입은 것을 보면 아예 기절하시겠구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터에서의 활약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는 나가마사의 부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때부터 쿠로다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나가마사는 전투에서 언제나 이 마타베에와 치열한 공적다툼을 벌였다. 가신들이 목숨을 아까지 않는 이런 무모한 모습에 간언하자,
"아버지(죠스이)가 안 계시다면 아들 타다유키[忠之]에게 선봉을 맡기고 나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겠지만, 아직 아버지는 건재하시다. 만약 내가 전사하더라도 우리 집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라고 말했다 한다.

 부친 죠스이의 교육 방침으로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형제처럼 자랐지만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욕하여, 둘은 어렸을 때부터 끝없이 싸웠다.[각주:2]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마타베에는 나가마사가 강 한가운데서 조선 장수[각주:3]와 필사적으로 격투하고 있는 것을 방관만하며 도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각주:4].
  나가마사에게는 마타베에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전의관(全義館)에 포진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마굿간에 침입하여 말을 잡아먹은 사건이 일어났다. 가신 칸 마사토시[菅 政利][각주:5] [각주:6]가 퇴치하고자 달려들었지만 호랑이는 더욱 날뛰었다. 마사토시가 위험에 처하자 마타베에가 달려들어 호랑이의 미간에 두 번 칼질을 퍼부어 겨우 잡았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마타베에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부대의 대장이라는 자가 축생과 싸우다니 이 무슨 짓이더냐?"하고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각주:7]

 1606년 결국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헤어진다. 나가마사가 노[能]를 관람하는 자리에서 마타베에의 아들 모토노리[基則]에게 작은 북[小鼓]을 치게 만든 것에 분노[각주:8]하여 마타베에는 1만6천석의 가록(家祿)을 버리고 쿠로다 가문을 떠났다.[각주:9]

 나가마사는 무용일변도인 외견과는 달리 굉장히 뛰어난 정략가(政略家)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은 뒤의 혼돈스런 정치정세 속에서 토쿠가와 정권수립을 위해 암약한 것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토벌군을 일으켜 시모츠케[下野]의 오야마[小山]까지 갔을 때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여기서 토쿠가와 가문의 운명을 나누는 사상 유명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야스를 따라온 다이묘우[大名] 대부분이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의 다이묘우였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명령에 따라 토쿠가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향배가 이에야스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이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존재가 급격히 클로즈업 된다.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맹장(猛將)이며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런 사내가 토쿠가와 편에 선다고 표명한다면 다른 장수들도 전부 이에 따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가마사는 이런 흐름을 민감히 캐치하여 이에야스에게 부탁받기 전에 마사노리의 진소(鎭所)를 방문하였다. 나가마사는 다음과 같이 마사노리를 설득했다고 한다.
  "미츠나리놈은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천하를 쥘 심산이다. 생각해보게나. 어리신 히데요리님에게 거병의 의지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무공파 다이묘우[武功派大名]의 대표격인 인물로, 문치파인 미츠나리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나가마사는 마사노리의 그런 증오심을 자극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나가마사의 교묘한 설득에 넘어가 단번에 미츠나리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켜 미츠나리와 싸우는 것을 맹세한 것이다.

 다음 날 열린 오야마 군의는 마사노리가 발언한 말에 따라 장수들은 전부 토쿠가와 측에 서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의 행동이 굉장히 기뻤는지 애용하던 투구와 말을 한 마리 주었다. 나중에 나가마사에게 치쿠젠[筑前] 52만 3천석이라는 거대한 영지를 준 것도 이 오야마 군의에서의 공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각주:10]

 정계의 막후 모사라 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나가마사였지만 그의 부친 죠스이의 기량에는 결국 이르지 못했다. 나가마사는 항상, "나는 14살 때부터 여러 번 공적을 세웠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칭찬해 주지 않았다.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아들]는 천하의 누구나가 그의 무용을 칭송한다. 이는 요시나가의 부친 나가마사에게 특별한 무공(武功)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나가의 이름이 빛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은근히 너무나 위대했던 아비를 갖았다는 것에 한탄하였다고 한다. [각주:11]

 그렇다고 하여도 부친 죠스이의 영향은 커 영지경영에 대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친의 방식을 지켰으며, 임종할 때에도 아들 타다유키에게 오로지 죠스이의 노선을 지키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1568년생. 요시타카[孝高=죠스이[如水]]의 아들. 1589년 가문을 이어 부젠[豊前]의 6개 군(郡)과 카와치[河内] 탄보쿠 군[丹北郡][각주:12]을 영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하여 김해성(金海城) 공략. 1597년 정유재란에서는 직산(稷山)에서 1만의 명나라 군을 격파[각주:13].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 18만석에서 치쿠젠[筑前] 52만석[각주:14]이 된다. 1623년 8월 4일 죽었다. 56세.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神社).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쿠로다 죠스이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혀 유폐되었을 때, 마타베에의 백부 2명이 쿠로다 가문을 떠나는데, 마타베에도 함께 쿠로다 가문을 떠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를 섬긴다. 그러나 나가마사가 마타베에의 기량을 아까워해 다시 불러들였다. 오히려 죠스이는 배신자의 핏줄이기에 가까이 쓰지 말라고 하여, 나가마사는 쿠리야마 시로우에몬[栗山 四郎衛門]의 요리키[与力]로 삼아 100석만 주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응리(李應(応)理)라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겠음. [본문으로]
  4. 당신의 주군이니 구하라고 하는 코니시[小西] 부대 사람의 말에 "내 주군이라면 저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오" 라고 고토우 마타베에는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나가마사는 간신히 이기고 나왔는데, 마타베에는 태연히 부채질하면서 구경하고 있었기에 벙쪄했다 한다. [본문으로]
  5. 菅은 '스게'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사족으로 이 칸 마사토시는 세키가하라에서 시마 사콘[島 左近]을 부상(혹은 사망)당하게 하는 철포대의 지휘관이었다. [본문으로]
  7. 물론 칸 마사토시도 함께 혼났다. [본문으로]
  8. 모토노리는 원래 작은 북을 잘 쳐 나가마사가 시킨 것이기는 했지만, 무사인 자신이 연극배우[能楽師]의 흥을 위해서 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비인 마타베에에게 일러 일이 발생. [본문으로]
  9. 마타베에의 영지는 오오쿠마 성[大隈城]였는데, 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興元]의 영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쿠로다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는 호소카와 가문이 부젠[豊前]에 오기 전 영주인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으로 이동하면서 연공(年貢)을 싹슬이 가져가는 바람에 호소카와는 초기 영지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만큼 쿠로다 나가마사를 미워했다. 나가마사 역시 자꾸 항의하는 호소카와 가문에 화가 나 가신들에게 호소카와 가문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였다. 호소카와를 감시하고 압박을 주라고 배치한 마타베에가 오히려 호소카와와 친하게 지내자 나가마사가 자주 화를 내었기에 이런 불화가 쿠로다 나가마사와 코토우 마테베에 양측에 쌓인 면도 있다. [본문으로]
  10. 거기에 세키가하라 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신하도록 암약한 것도 나가마사였다고 한다. 전투가 행해질 때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지 않자 초조해진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에게 사자를 보내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는 것이 확실한지 다그칠 정도였다. 즉 히데아키는 나가마사가 담당했다. 여담으로 다그치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나가마사는, “히데아키가 배신할지 어떨지 내가 지금 그걸 어케 알어!! 싸우기 바쁜데 짜증나게 할래?”…라고 했다고 한다. 보고를 들은 이에야스는 짜증이 확 나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물어뜯어 피 철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그러나 효심은 깊어,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전초전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의 강공 때 사쿠마 군세의 공세에 놀란 죠스이가 죽음을 각오하며 부하 쿠리야마 시로베에[栗山 四郎兵衛]에게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하여 쿠리야마는 나가마사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은채 나가마사와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나중에 쿠리야마에게 이동지를 묻다가 사정을 알아챈 나가마사는 “아무리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아들이 아비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면서 전장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덧붙여 이 시즈가타케에서 수급을 얻어 450석을 하사 받음. [본문으로]
  12. 전부는 아니고 쿠로다 나가마사의 시즈가타케 활약 450석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때 후방을 노리던 네고로[根来], 사이카[雑賀]를 격퇴하여 2000석 + 쿠로다 죠스이 가족 재경료 500석. [본문으로]
  13. 직산 전투를 말하는 것인데, 명나라 기병 4000에 쿠로다 5000의 격돌. 몇 차례 접촉은 있었으나 서로 물러났음. [본문으로]
  14. 치쿠젠 전부, 히젠[肥前] 2군(郡), 치쿠고[筑後] 2군을 포함하여 정확히는 52만2천4백여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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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08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망의 세키가하라 전투 대목을 읽다보면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나가마사와 마타베에의 일화와 똑같은 포지션에 놓이는 일이 있었지요. 소하치씨는 뻔뻔한(?) 소설가인 셈이군요.

    그러고보니 다케나카 가문은 시게카도가 번을 세웠나요? 한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큰 은인셈이지만 자기 가문엔 마땅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 되는건데 말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8 08: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 어떤 에피소드인가요? 대망은 노부나가 죽은 이후부터는 읽질 않아서요.

      입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분발하고 나름 큰 공적(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생포)에 자기 영지에서 전투(세키가하라)가 일어났는데도 가증을 못 받은 것을 보면 정치외교력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08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망 9권 '늙은 호랑이와 젊은 표범'이란 챕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탈출과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추격이 주 소재인데 여기서 다다요시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섣불리 추격을 하다가 시마즈 무사에게 목숨을 잃게 될 상황에 처하지요.

      이때 (여기선 이에야스의 전령이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호로무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오구리 다이로쿠란 도쿠가와 무사가 지나가다가 요코타 진에몬이란 다른 무사가 다다요시를 구해주려는 것을 저지합니다. 다다요시는 가까스로 살아나온 후 눈이 벌개져 다이로쿠와 진에몬을 찾지만 이미 주위에선 사라졌지요.

      세키가하라의 피냄새가 멎을 무렵 이에야스가 군대를 점검할때 다다요시가 오구리 다이로쿠에 대해 따지게 되고, 이에야스의 질문에 다이로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대장의 신분이었으므로 그리하였습니다"

      이에야스는 다다요시에게 자상한 훈계를 하면서 훈훈한 엔딩을 맞습니다.

      볼때마다 매우 흡사한 에피소드라고 생각됩니다만 학식이 짧은터라 다른 분들에겐 아니라고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케나카 시게카도가 글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아는데 애석히도 그쪽의 재주는 없군요. 그러고보면 미노계 인물들 중 마지막까지 웃은 사람은 별로 없다는게 또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9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도련님께서 직접 싸우신다는 것이 우선 에러군요(^^)

      아마 찾으면 좀 있을 것 같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은 모리 란마루 집안의 모리 가[森家]군요. 미마사카 18만석으로 입번하지만 중간에 후계없어서 폐번크리.

      뭐 그래도 미노 계열 중 가장 출세한 사람이라면 이번 년도 NHK대하드라마 고우[江]의 라이벌이 되는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인 듯하군요(태어난 곳은 탄바[丹波]라고 합니다만..)

  2. ckyup 2011.03.09 05: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친구에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치도 나쁘지도 않은것 같던데요, 마사노리나 기요마사와 더불어 전국말기에 흥미를 더해주는 무장임에는 분명한것 같습니다 - 왠지 전투에 데리고 나가서 본진 앞에두면 든든할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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