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스모우'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7.28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6- (9)

六.

 그 다음 해 7월. 미츠나리[三成]가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다. 이에야스의 죄상을 열거하고, 그를 물리쳐 히데요리[秀頼]의 정권을 보전한다 – 는 것이 거병의 명목이었다.
 이 때 이에야스는 칸토우[関東]의
오야마[小山]에 있었다. 히데야스[秀康]의 거성인 유우키[結城]에서 가깝다. 불과 2리[각주:1] 정도일 것이다. 이에야스[家康]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물리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를 정벌하려는 이에야스의 공식적 위치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대로(大老)로서이며, 이 출정은 공공을 위한 싸움이었다. 이 때문에 토요토미 가문의 여러 수 많은 다이묘우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에야스로서는 이들을 가지고 오오사카의 반란 다이묘우 무리들을 물리치면 좋았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도 의향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의향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옛 성터가 있는 이 오야마 언덕에 다이묘우들을 모아 거취를 결정케 하였다. 운명의 선택에 주저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에야스 측에 서는 것을 소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곧이어 모두 그 자리의 분위기에 물들여져,
 - 이의 없사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2]]
와 운명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고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이 이에야스가 생각하던 대로 되었다. 이에야스는 만족했다. 이에야스에게 부여된 이 이후의 모든 운명은, 이 7월 25일 오야마 군의(軍議)의 성공이 기초가 되었다 – 고 말해도 좋았다.

 회의는 곧바로 미츠나리 토벌을 위한 작전회의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 토요토미 계의 다이묘우들로 편성되어 곧바로 서쪽을 향해서 출발했다. 이에야스는 일단 에도[江戸]로 돌아간 후, 토쿠가와 군(軍)을 이끌고 토우카이도우[東海道]로 나아가기로 하였고, 적자(嫡子) 츄우나곤[中納言] 히데타다[秀忠]에게는 토쿠가와 제2군을 이끌게 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이용하게 하였다.

 문제는 히데야스였다.
 전투에는 참가시킬 수 없다 – 는 방침을 이에야스는 세웠다. 이에야스가 보건대 히데야스는 필시 전쟁터에서 용맹할 것이다. 만약 큰 공을 세우기라도 한다면 크게 상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렇게 되면 히데야스의 존재가 커져 적자 히데타다와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히데야스와 함께 야전을 하고 성을 공격하며 고락(苦樂)을 함께 맛보게 될 토쿠가와 휘하의 장졸들은 어느덧 히데야스를 따르게 되어, 온화하기만 한 것이 장점인 히데타다를 능가하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음 대는 히데타다 – 라고 정하고 있던 토쿠가와 가문의 통제가 그로 인해 흔들릴 것이며, 히데야스 자신도 자신감을 팽창시켜 동생의 영화를 시기하고 모반할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야스를 잔류군의 장수로 하였다. 우에스기 군(軍)의 견제로써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하고 칸토우[関東]의 동북변에 머물면서, 먼 에도 성(城)의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 뜻을 히데야스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 알렸다. 사자는 일족인 마츠다이라 겐바노카미 이에키요[松平 玄蕃頭 家清]였다.

 히데야스는 사자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듣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의 기세로,

 “말도 안돼!!”

 하고 성을 내며 소리질렀다. 무문(武門)에서 태어나 이렇게 큰 전투를 앞두고 잔류군을 맡으라니 말이 되느냐? 나는 따르지 않겠다. 오늘 밤에라도 진을 거두고, 선봉이 되어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갈 생각이다, 그렇게 아버님에게 전하도록……

 사자인 이에키요는 새파래져서는 오야마의 이에야스에게로 돌아왔다.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한 후,

 “알았다. 히데야스를 곧바로 여기로 오라고 전하도록”

 라고 말했다. 저런 기세가 센 젊은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이 있다. 이에키요는 그것을 몰랐다. 히데야스가 오야마의 언덕으로 올라왔다. 이에야스는 일부러 일어서서 히데야스를 진영의 현관에서 직접 맞이하여 별실로 안내했다. 마치 높으신 분을 접대라도 하는듯한 정중함이었다. 자리에서 이번 전투의 전략을 설명하며,

 “지금 동쪽의 적인 우에스기 씨(氏)를 남겨 놓은 채 서쪽의 적을 치려고 한다. 토쿠가와 가문이 죽느냐 사느냐다. 만약 서쪽의 미츠나리와 교전 중에 배후의 우에스기가 들고 일어나서 아이즈[会津] 분지에서 뛰쳐나와 칸토우 평야에 난입하여 그 기세를 타 에도를 등뒤에서 공격해 오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가문은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
 심각한 전략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이에야스는 그 문제를 해결해 놓고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에 대해서는 다테 씨[伊達氏]와 모가미 씨[最上氏] 등의 걸림돌을 배치시켜 놓았으며, 또한 우에스기 씨(氏)는 칸토우[関東]를 절대 습격하지 못한다.

 이에야스는 그리 내다보고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 100만석의 병력으로는 아이즈 분지에서의 방위선이 한계이며, 밖으로 싸우러 나갈 정도의 능력은 없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미치지 않는 한, 그들 우에스기 병사가 칸토우 평야로 출격해 오는 일은 우선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우키 히데야스에게는 그렇게 속 편히 말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 사태는 비통한 일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위기를 과장하고, 히데야스가 가진 젊은이의 비장감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에스기 가문은 켄신[謙信] 때 부터 천하를 떨치는 강호(强豪)이다. 카게카츠는 켄신이 남긴 법을 잘 지키고 있으며, 그 가로(家老)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直江 山城守]의 무략은 당대에 비견되는 이 없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인물로는 안되므로 고심 끝에 소장(少将)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맡아주겠는가?”

 하고 말했다. 히데야스는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한 듯 기뻐하며 이 임무를 받아들였다. 이에야스는 거기에 전술상의 조언도 덧붙였다.

 “노림수는 이렇다”

 하고 이에야스는 짐짓 세세하게 말했다. 우에스기 세(勢)가 칸토우에 출격해 온다. 그것을 우츠노미야 성(城)에서 방어하며 싸우려고 생각하지 마라. 성을 버려라.

 “성을 버리는 것입니까?”

 “버리는 것이다”

 우츠노미야 성(城)은 평지에 있는 평성(平城)으로, 농성한다고 하여도 그다지 방어가 되지는 않는다. 그보다 야외에서 결전을 벌여라. 야외에 진을 치고 적이 토네가와 강[利根川]을 다 건너면 멀리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기세를 보여라. 적은 그것을 보고 당황해서는 아이즈[会津]로 돌아갈 것이다. –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전술로써 이 이상 멋진 것은 없을 것이다. 우에스기 씨(氏)가 칸토우[関東]로 나왔을 경우, 그 너무도 장대한 원정이기에 후방에 대한 위험을 계속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약점을 자극하면 반드시 이긴다 – 는 것이었다.

 히데야스는 더욱 더 기뻐했다. 일단 거부했던 것이 얕은 생각이었다고 후회했다. 이번 전란(戰亂)에서 이보다 화려한 전선(戰線)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 토쿠가와 군단 속에서 히데타다, 히데야스, 타다요시[忠吉]라는 이에야스의 세 아들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듯이 비평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이에야스의 직속 신하[旗本] 중 하나인 나가이 나오키요[永井 直清]가 글로 써 남겼다. 이 미츠나리 거병이라는 소식이 오야마 진영에 도착하였을 때,

히데타다 님은 무언가 걱정하는 듯 하셨고, 미카와노카미(=히데야스) 님은 히죽히죽 웃으셨다. 사츠마노카미[薩摩守=타다요시] 님은 흥분하여 명성을 높일 기회라고 기뻐하셨다
라는 것이었다. 히데야스가 히죽히죽 하고 있었던 것은 운만 좋으면 이 난을 틈타 천하를 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적자 히데타다는 모처럼 이에야스에게 물려받을 예정인 천하를 미츠나리의 거병으로 인해 놓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 는 것이었다. 이 비평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히데야스와 히데타다의 성격론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정곡을 꿰뚫고 있었으며, 이에야스도 그런 점을 염려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투는 이에야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아무런 전공도 없었다. 우에스기 씨(氏)는 결국 아이즈[会津]에서 나오지 않았고, 히데야스는 우츠노미야 성(城)에서 머물기만 하면서 단 한발의 총탄을 쏠 기회조차도 없었다. 잉여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젊은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제비만을 항상 뽑는 운명이 부여된 것 같았다.

 덧붙여 말하면 적자인 히데타다는 제2군을 이끌고 나카센도우[中仙道]를 나아가, 미노[美濃]에서 이에야스의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온 제1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시나노[信濃]에서 서군(西軍)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에게 방해 받아 결국 세키가하라의 일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히데타다는 성실했지만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조금 기분 나쁜 것을 표시했을 뿐으로, 싸움이 끝난 후에도 히데타다에게서 세자의 자리를 뺏지 않았다. 그것을 들을 때마다 히데야스는 자신의 패기와 의욕이 덧없었다. 자신에게 나카센도우의 군을 이끌게 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이 일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일개 다이묘우의 위치로 전락하였고 이에야스는 천하를 얻었다. 다이묘우들을 재배치하고, 만들고, 폐하는 것이 행해졌을 때 히데야스를 북국(北国)에 봉했다.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현 후쿠이 시[福井市])를 거성(居城)으로 삼았고 에치젠[越前] 전체와 와카사[若狭], 시나노[信濃]의 일부를 합하여 75만석이라는 거대한 영지(領地)를 히데야스는 얻었다. 하지만 어느 곳이건 겨울에는 눈 때문에 중원으로 나올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눈의 감옥에 갇힌 것 같다”

 고 히데야스는 에도에서 파견되어 온 부속가로[付家老] 하세가와 우네메[長谷川 采女]에게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도에서는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어 토쿠가와 막부(幕府)를 성립시켰으며, 2년 후에 쇼우군 자리를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순푸[駿府]에 은거하였다.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이면서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다. 성(姓)은 토쿠가와 가문의 별성(別姓)인 마츠다이라[松平]로 복귀하였지만, 세간에서는 유우키 소장[結城 少将]이라 통칭되며 조금 음습함을 띠운 존숭(尊崇)을 그에게 보냈다.

 소년일 즈음부터 그의 특징이었던 천부(天賦)의 위엄 – 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너무 예리했던 듯하지만 – 은 나이와 함께 더욱더 농후한 색채를 더했다.
 1604년 7월, 이에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체재하고 있었을 때 히데야스는 자택에서 스모우[相撲] 대회를 열어 부친 이에야스도 초대했다. 자연히 여러 다이묘우나 이에야스의 직속 신하[旗本]들이 따라왔다. 곧이어 동과 서로 나뉜 스모우 꾼들이 14시합을 마친 후, 메인이벤트로 동서(東西)의 오오제키[大関[각주:3]
]인 '아라시옷테[嵐追手]'와 '쥰레이[順礼]' 양 선수가 모래판[土俵]에 오르게 되자 온 마당이 들끓었다.

 ‘아라시옷테’는 에치고[越後] 출신으로 쿄우토[京都]에서 활약하고 있으면서, 어느 상급 귀족[公卿]의 후원을 받으며 당대 천하제일이라 평판이 높았다.

 ‘쥰레이’는 카가[加賀] 출신으로 마에다 가문[前田家]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예전에 쿄우[京]의 키타노텐만[北野天満]에서 모금을 위해 개최된 스모우 대회에 나가 7일간 33번의 시합에서 연승하여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쥰레이[각주:4]’라고 개칭한 인물이었다.

 구경꾼들은 이 시합에 열광하며 다이묘우들도 모두 일어섰고 직속 신하들도 환호성을 질러,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이 때, 히데야스는 모래판 정면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섰을 뿐이었다. 한 마디도 안하고 서서는 천천히 마당을 둘러보았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도 모래판 주위의 모든 건물과 온 마당이 깊은 산속에 있는 양 정적에 휩싸였다.
 이에야스는 몹시 놀라며 감탄했다. 후에,

오늘의 구경, 흥이 있었지만
히데야스의 위엄이 놀랍도다.
  고 주위에 말했다. 이 천부의 위엄은 전쟁터에서 쓰여야 했지만 결국 그 기회가 그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두려워했다. 그를 에치젠 75만석에 봉한 뒤, 비와고 호수[琵琶湖] 동쪽 호숫가에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다시 세워,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겨온 믿을 수 있는 나이토우 씨[内藤氏]에게 지키게 하였다. 만약 오오사카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가 난이라도 일으킨다면, 그의 형뻘인 에치젠의 히데야스가 이에 호응할지도 모른다 – 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오우미[近江]의 나가하마는 에치젠과 쿄우[京] 근방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으로, 히데야스가 오오사카와 합체하기 위해 남하해 왔을 때 나가하마에서 이를 막는다 – 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오사카 성(城)의 히데요리와 에치젠의 히데야스가 한편이 되었을 경우 에도의 토쿠가와 히데타다가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지 어떤지가, 이에야스에게는 의문이었다.

 실제로 소문마저 돌았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히데야스의 저택에 방문하였을 때 술에 취해서는,

 “만약 천하에 큰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소인는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 의미는 오오사카에서 토요토미노 히데요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만약 히데야스가 형제의 정으로 히데요리 편에 선다면, 이 마사노리는 아무 생각할 것 없이 당신과 함께 싸우겠다. 그것을 약속한다 – 는 것으로, 에도 정권이 가장 위험시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위험한 시기도 공허해졌다.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이 소위 겨울-여름의 싸움을 일으키기 이전인 1607년에 히데야스는 병이 들어 자기 영지(領地)에서 죽었다. 34살이었다. 사인은 악성 매독과 이상쇠약이었던 것 같다.

**********************************************************************************

 히데야스는 살아있을 때 무언가를 일으킬 거라 여겨졌다. 그가 에도에 왔을 때, 토쿠가와 가문의 접대 태도는 도를 넘어설 정도로, 쇼우군[将軍] 히데타다는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와,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가는 도중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뒤에 놓으려고 할 정도였다. 히데야스는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두 가마가 나란히 하여 가는 방식이 되었다. 히데타다의 이 과도한 마음씀씀이는 필시 이에야스에게서 나온 지시였을 것이다. 히데야스에 대한 예의를 과도하게 함으로서 그의 웅대한 기상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런 주도면밀한 배려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히데야스가 태어나면서부터 그 생애는 공허하였다. 드라마틱한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그 생애는 아무 드라마틱한 요소도 가지지 못했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또한 일어나지도 않았다.

 무엇 때문에 자신은 태어났는가? –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 성[北ノ庄城]에서 마지막 숨을 들이켰을 때, 문득 그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다.

=====================================================================了==================

  1. 약 7.8km [본문으로]
  2. 이 당시의 이에야스의 관직이 '나이다이진[内大臣]'으로 그 나이다이진을 중국식(唐名)으로 나이후[内府]라 불렀다. [본문으로]
  3. 지금과 달리 최고위는 요코즈나[横綱]가 아닌 오오제키였다. [본문으로]
  4. 성지'순례’의 그 ‘순례’의 일본 발음이 '쥰레이'이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cogwtw.tistory.com BlogIcon NOA 2008.07.28 2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는김에 1편부터 차례대로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찾아보니 교보에는 들여와있는 책 같아서 구입해볼까합니다. 가격도 싼것 같고^^;

    4번째 문단에서 "저 온화하기만" 에서 "그"가 빠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9 1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엔화가 쌀 때 사서, 우리 나라 도서보다 싼 가격에 구입했습죠.

    에?? 사투리? 젤나가의 피조물?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9 19: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저의 의미로 사용하신게 아니었나 보군요;; 실례했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7.29 1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9 2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OA님//확실히 NOA님이 하시는 말슴대로 하는 편이 부드럽습니다. 다만 될 수 있으면 아주 어색하지 않는 한 원문을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원문은 [人気があのおだやかなだけが取柄の秀忠をしのぐ・・・]입니다.

    맹꽁이서당님//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9 2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어이 갔군요. (허허..-_-;) 히데야스가 가담한 오사카의 진이라.. 상당히 재밌었을 것도 같습니다. -假定의 문제지만..-나이토 박살내고 남진하는 히데야스에.. 카토도 후쿠시마도 건재할때니 시마즈까지 가담한다면 적어도 큐슈의 도쿠가와 세력은 전멸이었겠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30 1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뒤에 있던 마에다와 아사노까지 오오사카에 섰다면 파괴력은 정말 발군이었겠다고 생각합니다.
    오오사카 전투에서 오오사카 측의 약점은 거물이 없었다는 점도 하나라고 보는데, 히데야스가 있었다면 오오사카 측에 서는 가문도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큐우슈우는 (토쿠가와에게) 조금 위험한 애들 모아 놓은 곳이라, 말씀대로 되었을지도 모르죠.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7.31 0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 하니 이런 인생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인생이니라-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31 2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그럴 수도 있군요. 저러한 인생도 있다는 것...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