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가 출세하는데 있어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었다는 것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나가마사의 부인 오야야[おやや]가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ねね=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와 배다른 자매[각주:1]였기에 나가마사와 히데요시는 동서지간이 된다. 친족이 적었던 히데요시가 나가마사를 중용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군사에 관해서도 담당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외교나 민정가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민정가로서의 나가마사를 나타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후에 이 아사노 나가마사의 후손으로 겐로쿠[元
1688~1703] 시대 소위 '아코우 사건([赤事件][각주:2]'을 일으켜 당시 세상에 충격을 준 하리마[播磨] 아코우[赤穂] 5만석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나가노리[匠頭 長矩[각주:3]]가 있는데, 이 사건 최대의 주역이 되는 가로(家老)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内蔵[각주:4]]가 영내(領內) 순시를 위해 아보시[網干]라는 곳에 들렸을 때이다. 이 마을 중심가의 한 곳만 공터가 되어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궁금히 여겨 마을사람에게 물어보자,
 "이곳은 아사노 단죠우[
=나가마사]님이 히메지[路]에 계실 적에 그분의 저택이 있던 자리옵니다.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기에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곳은 풀 한 포기 손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고 답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휘하가 된 나가마사는 히데요시가 1573년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옛 영토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12만석을 하사 받자 히데요시에게서 120석을 받았고, 다음 해인 1574년 히데요시가 거성을 나가하마 성[長浜城]으로 옮긴 후 노부나가와 함께 전쟁터를 전전하였기에 히데요시가 부재인 동안 이 성을 다스릴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거기에 하리마[播磨], 츄우고쿠[国] 공략에서는 히데요시와 행동을 함께하며 전선부대장으로서 용전분투하였고 또한 히데요시의 거성 히메지 성[路城]의 보충 공사를 담당하거나 하였다.

 1586년은 아사노 가문의 장래를 보았을 때 기념할만한 해가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접촉하여 절친해지는 계기가 되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화해(和解)를 꾀하며 아비 다른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각주:5]를 이에야스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교섭성립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녀 이 1586년의 결혼을 성립시켰는데, 이때 성실히 임하는 모습을 이에야스에게도 인정받아 나가마사는 한층 더 명성을 높이게 된다.

 임진왜란 때 나가마사는 본진에서 근무하며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이때 세운 망루()가 후에 카라츠 성[唐津城]으로 옮겨졌는데 나가마사의 관도명(官途名)인 단죠우쇼우히츠[正少弼]의 이름을 따 단죠우망루[正櫓]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나고야에 있을 때 나가마사는 히데요시를 화나게 하여 자칫하면 죽을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서전의 파죽지세에 콧대가 높아진 히데요시는 작전회의 자리에서,

 "일본은 이에야스에게 맡기고선 나는 30만 군세를 이끌고 조선에 건너가 곧바로 명의 수도에 진격하여 황제가 될 생각이다"
 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야스가 그런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벅차다고 하자,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나가마사가 이에야스에게,
 "지금 칸파쿠 전하의 말씀은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필시 뭔가에 씌어 미치신 것 같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히데요시의 얼굴이 급변했다.
 "네 이놈 나가마사! 내 직접 네놈을 죽이겠다!"
 고 외치며 손에 칼을 쥐고 일어섰다. 동석해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
前田 利家]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鄕]가 열심히 말렸다. 그래도 나가마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절 죽여서 국가가 안정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근년 조선과의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은 궁핍해 있습니다. 거기에 전하가 바다를 건너시면 국내 치안은 흔들릴 것입니다. 바다 건너는 것도 중지하시고 파견군도 전부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히데요시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나가마사는 숙소에서 벌을 기다리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히고[
肥後]에서 반란[각주:6]이 일어나 나가마사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죄를 용서받았다. 그 후 진압되어 어수선한 히고[肥後]를 진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각주:7]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네 명의 대로(大老)[각주:8]와 다섯 행정관(五奉行)[각주:9]이 이에야스의 전횡에 분노하여 이에야스 타도를 꾀하였지만, 토시이에가 죽은 뒤 나가마사는 다른 행정관들과는 다른 행동을 취하며 이에야스와 기맥을 통하였다. 또한 1599년 무공파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제거하고자 했을 때도 나가마사는 아들 요시나가[幸長]를 무공파에 참가시켰다. 이제 나가사마는 확실히 이에야스 편에 섰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 즈음의 정치정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갑자기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인 카이[甲斐]로 내려갔다. 자세한 사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설에 따르면 9월 9일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頼]를 방문하고자 하였을 때, 행정관 중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등이,
 "마에다 토시나가[
前田 利長][각주:10]에게 모반의 낌새가 있습니다. 아사노 나가마사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히지카타 카츠히사[土方 勝久],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冶長]를 부추겨 암살을 꾀하려 하고 있습니다"
 고 이에야스에게 밀고하여 그 때문에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에 칩거를 명령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나가모리들의 참언을 믿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가마사는 카이[
甲斐]로 내려가자마자 에도[]에 가서 이에야스의 후계자 히데타다[秀忠]를 만나 그에게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가마사는 얼마 지나지 않은 1600년 1월에 셋째 아들 나가시게[長重]를 히데타다에게 출사시켰으며, 세키가하라 결전[原の戦い] 결전에서 나가마사는 히데타다를 따라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올라갔고 적남인 요시나가는 이에야스의 선봉으로 출진한 것이다.

 말년의 나가마사는 이에야스의 바둑상대로 자주 초대받았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천하의 정치정세에 대해 나가마사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나가마사가 죽자 이에야스도 바둑을 관두었다고 한다.

 아사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쟁 후 키이[紀伊] 37만4000석이 요시나가에게 주어졌고, 나가아키라[長晟]의 대[각주:11]가 되어 아키[安芸] 42만6000석에 봉해져 이후 아사노 가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이어진다.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1544년생. 야스이 시게츠구[
安井 継]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사노 나가카츠[浅野 長勝]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2]. 첫 이름은 나가요시[長吉]. 1587년 와카사[狭] 오바마[小浜] 성주.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에 건너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등과 함께 진주성 공격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카이[甲斐] 후츄우[府中] 22만5천석.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에는 적자 요시나가[幸長]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 1611년 4월 7일 죽었다. 68세.

  1. 키타노만도코로 즉 네네는 양녀(나가마사의 양부 아사노 나가카츠의 부인의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 성에서 바쿠후 의전 담당인 코우케[高家] 필두 키라 코우즈노스케[吉良 上野介]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당시는 싸움 당사자간에 누구에게 죄가 있건 양쪽 다 처벌을 받았으나[喧嘩両成敗], 토자마[外様]의 약소번(5만석)의 다이묘우[大名]인 아사노 나가노리는 할복 & 번 폐쇄라는 엄벌이 처해졌지만 막부의 요직에 있는 키라에게는 아무 벌도 없었다. 그에 대한 복수로 번 폐쇄로 직장을 잃은 아코우 낭인들의 키라를 살해한 사건. 보통 '츄우신구라[忠臣蔵]'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3. 나가마사의 현손(玄孫). 즉 나가마사의 손자인 아코우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나오[浅野 長直]의 손자 [본문으로]
  4.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코우 번 필두 가로로 아코우 사건의 주모자였다. 복수극에 성공한 이후 충성스런 신하 & 진정한 무사의 대명사가 된다. [본문으로]
  5.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선생이 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스루가고젠[駿河御前]. [본문으로]
  6.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가신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 国兼]가 일으킨 우메키타 반란[梅北一揆]를 말함. [본문으로]
  7.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18세기 중반의 유학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쓴 상산기담(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책에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를 제외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9.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10.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아들. [본문으로]
  11.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건너왔던 형 요시나가에게는 딸밖에 없어서 동생인 나가아키라가 후계를 이었다. [본문으로]
  12. 나가마사의 모친이 아사노 나가카츠의 누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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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05.23 1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히데요리 정권은 과연 아사노 나가마사, 기타노만도코로 등과 같은 히데요시의 가깝고 먼 친척들에게 '비정통적'인 정권이었을까. 히데요시에게 진절 머리가 난 걸까? 혹은 대세를 따른걸까? 아니면 히데요리가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을 정군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압적 성격이긴 하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가의 수호자로 비춰진걸까. 아님 히데요리는 천하통치의 능력이 없으니 사슴(천하의 패권)은 이에야스에게 안겨줘야 된다고 생각했을까. 히데요시의 친척들이 자의반 혹은 타의반 거의 히데요리를 떠나간 걸 보면 히데요시도 어지간히 사람관리는 안한 듯 합니다. 이래서 어찌보면 전통적인 가신과 귀족적 태생이 중요한걸지도? 저야 꼬시지만 말입니다 케케. 잘 읽고 갑니다.

  2. 朴先生 2009.05.26 0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가 있는 듯...
    '어수순한 히고를 진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된다' -> '어수선한 히고를'이 아닌가요?

  3. 나라 2009.05.28 0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 글을 읽다보면 가끔 바치다를 받히다 라고 쓰시는 경우가 있더군요. 죄송하지만 잘못 아시는 것 같아 적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8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제 고질병이옵죠. T.T

      그런 것을 발견하면 꼭 좀 지적해 주셨으면 하고...지적해 주시면 좋지 않냐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

 

 그랬다. 이에야스[家康]에게 측실은 다수 있었지만, 정실이었던 츠키야마도노[築山殿] 5년 전의 어느 안 좋은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한 후 아무도 정실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츠키야마도노와의 부부싸움에 질려있었던 만큼 홀아비 생활의 자유로움을 즐기는 듯한 상태이기도 하였다. 요약하면 독신이기는 했다.

 나이는 44. 신부가 되는 아사히히메는 43세이며, 원래부터 미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밭에서 일하였기에 피부가 쭈글쭈글했고, 햇볕에 탄 잔주름이 깊어 화장으로는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거기에 출신의 미천함은 유명했으며, 지금까지 관위도 없는 무사의 마누라였다. 그런 여성을 이에야스가 받아들일지 어떨지……

 

-가부가 어떻든, 우선 지금은 해보자.

 그 중매를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서는 형식으로 하여, 사자(使者)로 노부카츠의 중신으로 지금은 하시바 가문[羽柴家]의 직속 신하[参]가 되어 있는 히지카타 칸베에[土方 勘兵衛], 토미타 사콘[富田 左近]들을 하마마츠[浜松]로 내려 보냈다. 히지카타 칸베에는 언변이 뛰어난 남자였다. 이에야스 앞에서 천하와 양 가문의 안태(安泰)를 위해서 이토록 경사스런 일은 없다 고 열변을 토했다. 이에야스는 단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침묵을 지켰다. 마지막에 입을 열어,

 

 하룻밤 생각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자네들의 면목을 잃게 하지는 않겠다

 

 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가 중신들을 모아 상의를 하고자 할 즈음에는 이미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중신들 대부분이 안색을 바뀌고 혐오감을 드러내며 반대하였다. 주가(主家)에 어디의 개뼈다귀인지도 모르는 미천한 피를 섞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종삼위(從三位) 곤다이나곤[大納言]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닥쳐라

 

 이에야스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감정론을 백날 밤 들어보았자 아무 소용없었다. 실제로 그 미천한 출신의 43세 노파와 살을 맞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이 이에야스 자신이며 좋고 싫다는 감정을 먼저 내세운다고 하면 자기부터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 점을 꾹 참고 일은 어디까지나 정치 문제로써 결론을 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신랑 후보자는 굉장한 참을성을 갖추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이웃나라의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이마가와 일족에서 연상의 여성을 부인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부인인 츠키야마도노를 이십 수 년 뒤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강요로 인해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와 함께 죽였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 산하에 있던 토쿠가와 가문은 하루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며, 모든 것은 상기(上記)와 같이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 히데요시의 여동생이라는 막 이혼한 초로(初老)의 노파와 결혼하는 것도, 자신의 감정으로만 이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하시바 가문은 그 출신이 어떻든, 예전 이마가와 씨나 오다 씨[織田] 이상의 권세와 위세를 가지고 있고 또한 커져가는 중이었다. 정세가 그러한 이상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게

 

 이에야스는 다른 이유를 대서 가신들에게, 토쿠가와 가문 가신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워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사히히메는 그럴듯한 인질이라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히데요시는 천하의 반 이상을 손에 넣었지만 그러나 먼저 자기 쪽을 낮추어 여동생을 토우카이에 있는 자신에게 인질로 바치려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한번은 가신에게 시집 보냈던 사람을 되돌려 받아서까지 이런 일을 한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괴로움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정세를 보건대 - 하고 이에야스는 말을 이었다. 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시바 가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하(隸下)에 속할 수 밖에 없다. 이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안 이상, 될 수 있는 한 좋은 형태로 속하는 것을 생각하는 편이 득이다. 이 정도의 일로 그와 다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 정도의 일 이라는 것은 아사히히메와의 결혼문제였다.

 이에야스는 승낙하여, 그 뜻을 사자에게 전하는 한편, 가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에게 함을 들게 하여서는(納幣) 서둘러 오오사카[大坂]로 향하게 하였다.

 

 성공했구나~ 이런 경사스런 일이~”

 

 히데요시는 손뼉을 치며 굉장히 기쁜듯한 모습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내심 이 건을 이리도 쉽게 받아들인 이에야스라는 남자에게, 여태까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두려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재빠른 응답의 경쾌함도 저 뚱뚱한 사나이의 무략(武略)일 것이다.

 

 일이 진행되어 결혼 행사는 성대히 행해졌다. 아사히히메는 단지 몸을 그 진행에 맡기고 맡긴 채 멍하니 있는 것 외에는 없었다.

 몸이 오오사카 성[大坂城] 안에 있는 건물에서 가마에 태워졌다. 곧이어 텐마[満]에서 배에 옮겨졌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 쿄우[京]의 쥬라쿠테이[第]로 들여보내졌다. 이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이 그녀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다. 그녀는 식사를 하고 볼일을 보는 것 이외에는 단지 숨만 쉬고 있을 뿐으로, 모든 것이 알아서 진행되었다.

 

 결혼 성립 후 석 달이 지난 초여름.
 
그녀의 몸은 가마 위에 태워져 쿄우[]를 출발하였다. 그 결혼 행사의 담당관은 일족인 아사노 단죠우쇼우히츠 나가마사[
正少弼 長政], 오다 가문 일족인 츠다 하야토노쇼우 노부카츠[津田 隼人正 信勝], 타키가와 기다유우[ 儀太夫] 등으로 그들이 1000기 정도를 이끌고 앞뒤를 경호, 아사히히메 직속의 시녀와 호종의 무사 만으로 150여명, 부인용의 가마가 11, 끈으로 어깨에 매는 가마가 15채라는 마치 화려한 그림 속에 있는 듯한 행렬이 이어졌다.

 

 5 15일 하마마츠에 도착.

 그 날 곧바로 성 안에서 혼례가 치러졌고 끝나자마자 이 경사스런 행사가 무사히 마쳤음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토쿠가와 가문의 노신(老臣)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가 하마마츠를 출발했다.

 이에야스는 그날 밤, 당연하게도 아사히히메와 같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이에야스는 총애하는 측실이 많았다. 니시고오리노츠보네[西郡局][각주:1], 오만노카타[方][각주:2], 오아이노카타[方][각주:3], 오츠마노카타[都摩方][각주:4], 오차아노카타[茶阿方][각주:5], 오카메노카타[方][각주:6], 오카지노카타[お梶の方][각주:7] , 그 후궁들은 하나하나가 눈부신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기에, 이제 와서 이 노파 같은 아줌마와 같은 이불 속에서 즐기는 것에 색다른 맛을 추구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 인물의 놀라운 점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열심히 남들만큼이긴 했지만 첫날밤을 보낸 것이었다. 신부와 접하는 방식도 상냥하여, 피곤에 쩔어 있을 그 정신을 편안하게 하고자 필요한 위로의 말을 부족함 없이 사용하였다.

 아사히는 그에 대해 때때로 조그맣게 끄덕일 뿐으로 여전히 둔한 반응밖에 나타내지 않았지만 그러나 내심 신선한 충격에 놀라고 있었다.

 이에야스라고 하면 토우카이 제일의 무사[東海一弓取り]로 노부나가님조차 조심했다고 하는 대장(大將)이라 듣고 있었는데, 이 상냥함이란……  첫 남편인 소작농도, 다음 남편인 오와리[尾張]의 작은 호족 출신인 진베에[甚兵衛], 이만큼의 상냥함으로 아사히를 다뤄준 적이 없었다.

 그 감동이 아사히의 시선에 어리기 시작했을 때, 이에야스는 그것을 재빨리 눈치채고 이 다소 어려웠던 작업이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아 가벼운 안도감을 느꼈다.

 

 이에야스로서는 아사히를 상냥히 다루어야만 했다. 그 이불에 들어갈 때도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되었고, 오히려 총애하는 측실들과 접할 때 이상으로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사히에게 붙어 온 노녀(老女)가 다음날 아사히에게 그것을 들을 것이다. 들으면 곧바로 장문의 편지를 히데요시의 밑에 있는 노녀에게 보낼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아사히히메를 대하는 태도를 알고 싶어하여, 그 편지가 언제 오나 하고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이에야스에게 있어 이처럼 이불을 함께 덮는 것은 정치였으며, 아사히의 탄력 잃은 몸을 애무하는 것이 다소 인내를 필요로 했지만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있어 히데요시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중요한 기대는 이 결혼에 의해 이에야스가 상락(上洛)해 올 것이라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아사히를 그 집에 담아두기만 하고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으며, 토우카이의 경영에 열중하며 히데요시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식의 행동을 계속 견지했다.

 히데요시의 초조함이 커졌다. 이렇게 된 이상 이 혼례 이상의 희생을 치른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에야스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중요한 결심을 히데요시에게 하게 만들었다. 모친을 인질로 하마마츠로 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이에야스 상락에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보장을 하고자 하였다. 상락을 하여도 이에야스를 죽이는 일은 없다, 그 보증으로써 내 모친을 그 쪽으로 보낸다는 것이었으며, 이에야스에게 만에 하나라도 있을 시에는 이 모친을 죽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기도 했다.

 

 코이치로우, 그것을 어머니에게 말해봐 

 

 고 히데요시는 동생에게 명령하였다. 코이치로우 히데나가[小一 秀長]는 놀랐다. 칸파쿠[白] 히데요시라고 하면 이미 천하의 주인이다. 그런 분이 기껏해야 토우카이 수개 국의 지방 다이묘우[大名]를 상락시키기 위해서 여동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친을 인질로 받치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무문의 치욕이 아닌가? 하고 히데나가는 반대하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하마마츠님(이에야스)에게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상락을 재촉하고 따르지 않으면 싸워서 멸하면 될 뿐입니다.”

 

 고 말했다. 이것이 정론일 것이다. 필시 죽은 오다 노부나가라면 그렇게 했을 터이다. 이미 히데요시는 칸파쿠의 자리에 올라 그 판도에는 키슈우[紀州], 시코쿠[国]가 더해져 있었다. 이에야스를 복종시키기에 아무리 보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요시의 감각으로서는, 그러니까 무문의 치욕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의 강자(强者)가 시골의 약소한 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겸손이라는 것이지 치욕은 아니며, 세상도 당연히 그렇게 느껴 오히려 아름다운 일로 볼 것이다. 내 통일 방침은 쉽게 가는 것을 방침으로 하여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아끼고, 무력을 피하며,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한다. 방침은 그것 하나뿐이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현재 큐우슈우[九州] 정벌을 이미 휘하의 군단에게 명령을 내려, 스스로도 원정군을 이끌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동방의 위협을 없애고 천하를 안정시켜 두고 싶다. 히데요시는 계속 말했다. – 하마마츠님은 돌아가신 노부나가님의 동맹자이며, 그 위세와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하마마츠에서 달려 나와 내 막하에 들어온다고 하면, 그 순간 천하의 인심은 안정되고, 토요토미의 천하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목적은 거기에 있다. 얻는 것은 이에야스를 공격하여 멸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는 것이었다.

 

 모친인 오나카[仲]는 작년, 히데요시가 칸파쿠에 취임됨과 동시에 오오만도코로[大政所]라는 호칭을 궁정과 세간에서 얻고 있었다.

 - 알겠다.

 고 이 오오만도코로는 이외로 순순히 승낙하였다. 히데나가가 이 늙은 어미에게 정치 정세로 설득한다고 하여도 그녀를 당혹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기 때문에,

 

 어떻겠습니까? 오래간만에 아사히를 만나러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라는 것만을 그녀에게 말했을 뿐이다. 오나카에게 불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세간에도 그것을 이유로 공표하였다. 오오만도코로가 아사히히메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내려가신다 - 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의 이 제의에는 굴복하여 상락한다는 뜻을 전하고 그 준비를 하였다.

 곧이어 오오만도코로는 오오사카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이에야스는 오카자키[岡崎]까지 나와 마중하여, 손수 하마마츠에 안내할 예정을 세워두고 있었지만, 막료 중 한 사람이 굉장히 촌스러운 의견을 올렸다.

 

 가짜일지도 모릅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억측이었다. 그가 말하길, 저렇게 늙은 여자는 쿄우[]의 궁궐에 있는 여관(女官) 중에 넘칠 정도로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속이기 위해 어딘가에서 끌고 온 늙은이를 오오만도코로라고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 그건 그렇겠군.

 하고 이에야스도 수긍하여, 이미 그는 오카자키 성에 도착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계책을 짜 예정을 바꾸었다. 서둘러 하마마츠에서 아사히히메를 불러들였다. 그 꿍꿍이는 아사히히메가 오오만도코로와 대면하였을 때의 모습이나 행동을 가지고 판단하고자 한 것으로, 이에야스와 막료들은 전부 이 꿍꿍이를 맘 속에 숨겼다.

 하지만 저 부인은 기색을 확실히 읽을 수 없기에, 잘 될지…’

 라는 걱정도 있었다. 반사가 둔했고, 무표정이기에 마음 속을 알기 힘들었다.

 

 아사히히메가 예정 변경으로 인하여 황망히 하마마츠를 출발한 것은 10 17일이었다. 오카자키로는 이틀간의 여정이다. 그녀의 행렬이 오카자키의 성 밑 마을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인 18일 저녁 즈음이었다.

 그때 마침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오오만도코로의 행렬이 서쪽에서 오카자키로 들어와, 두 행렬이 성의 대문 앞에 있는 사거리에서 마주쳤다.

 

 저건 오오만도코로의 행렬이 아닌가?”

 

 아사히히메는 가마의 창문을 오려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녀로서는 신기하게도 빠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오만도코로도 눈치챘다. 서로가 동물 같은 후각과 반응이었다. 오오만도코로도 가마를 멈추게 하여 창문을 올렸다. 회색 머리를 가진 목이 창에서 나왔다.

 

 ~!”

 

 하고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른 것은 아사히히메 쪽이었다. 가마에서 굴러 나와 치마를 밟으며 내달렸고 그 때문에 넘어졌다. 아사히히메가 일어나는 것과 오오만도코로가 서둘러 가마에서 굴러 나온 것이 동시였다. 그 기세로 모녀가 길 위에서 서로 부둥켜 안았다. 아사히히메는 치마를 흙투성이로 만들면서 꼬꼬마 여자애와 같이 몸부림치며 울었다.

 - 틀림 없군.

 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실험실의 늙은 학자와 같이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은 이에야스의 막료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였다. 현명한 실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반면에 있는 잔인함은 나중에까지 이어지는 토쿠가와 가문 특유의 가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에 안심하여, 다다음날 쿄우[京]를 향해 출발했다.
 
이에야스 상락 중인 25일간, 오오만도코로와 아사히히메는 오카자키 성안에 있는 건물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그러는 동안 토쿠가와 가문의 장수들인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와 상기의 혼다 시게츠구가 수하들을 이끌고 그 건물을 감시했다. 혼다 시게츠구는 오오만도코로의 건물 주변에 산과 같이 마른 풀과 장작을 쌓아놓고 사졸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켜보게 하며, 쿄우[]에서 이에야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불을 붙여 모녀 함께 태워 죽인다는 자세를 보였다.

 - 너는 이런 집에 시집을 온 것이냐?

 하고 오오만도코로도 놀라, 이 막내딸의 불행을 지옥에서라도 발견한 듯한 생각이 들어 25일간 모녀가 함께 울며 보냈다. 이 오카자키에서 8[각주:8] 서쪽에, 그녀들이 나고 자라며 생활했던 오와리 나카무라[中村]가 있다. 그 땅에서 가난한 소작농일 즈음 지냈던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웠던 가를 번갈아 가며 질리지도 않은 듯 말을 서로 주고 받았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무사히 상락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오오만도코로는 오카자키를 떠났다. 이 직후, 이에야스는 그 거성(居城)을 하마마츠에서 순푸[駿府]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아사히도 그에 따라 이후 순푸 [駿府城]에서 살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스루가 고젠[駿河御前]

 

 이라 불렸다. 하지만 그 기간도 오래는 못 갔다.

 3년 후인 1589 7. 쿄우[]에 있던 오오만도코로가 병들었을 때, 병간호를 위해서 상락하였고, 다행스럽게도 오오만도코로는 완쾌하였지만 아사히히메는 정신이 병들어 그대로 쿄우에서 요양을 하였다. 실상은 순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정신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차츰 쇠약해져, 다음 해인 1590 1 14. 쥬라쿠테이[第]에서 죽었다.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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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는 그녀의 유골을, 그녀의 정신에 병이 들 정도로 계속 가기 꺼려했던 토쿠가와 가문에 보내지 않고, 쿄우[]의 교외 토바[鳥羽] 가도 옆에 있는 토우후쿠 사[東福寺]에 안장하여, [남명원전광실총욱자(南明院殿光室旭姉)]이라는 시호를 주고, 곧이어 칸토우[東]의 호우죠우 정벌[条征伐]을 위해 출발하였다.

 그 동정(東征)의 도중 순푸를 지날 때, 아사히히메가 생전에 아베 군[安倍郡] 즈이류우 사[竜寺]에 자주 참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박복함에 애처로움을 느껴 명복을 빌기 위해 절 안에 공양탑 한 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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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히메의 기묘함은 이 세상에 한 편의 와카[和歌] 조차 남기지 않은 것에 있다. 와카뿐만 아니다.

 이 시대, 토요토미와 토쿠가와 내외에는 다수의 기록자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기록을 후세에 남겼지만, 그녀의 말이라는 것을 어떤 기록도 전해주질 않는다. 굉장히 말이 없었던 것인지아니면 사람과 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인지

 어쨌든 역사 속에서 영원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駿河御前==================
  1.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의 부인 토쿠히메[督姫]의 모친. [본문으로]
  2.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의 모친. [본문으로]
  3. 보통 '사이고우노츠보네[西郷局]'로 알려져 있다,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모친. [본문으로]
  4. 이에야스 5남 타케다 노부요시[武田 信吉]의 모친. [본문으로]
  5. 이에야스 6남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 忠輝]의 모친 [본문으로]
  6. 후에 어삼가(御三家) 필두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 義直]를 낳지만, 사실 이 당시는 아직 이에야스와 만나기 전. [본문으로]
  7. 이 당시 8살. 13살에 이에야스와 만났다고 하니 아직 측실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8. 1리는 약 4km(3927.2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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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12 2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은 유우키 히데야스군요. 기대가 되네요.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그에 상응하니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귀무자에서도 나오는 유우키 히데야스군요. 많이 기대되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6.12 2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아사히 히메는 참 불쌍하네요. 그리고 이에야스의 자식들이 모두 모친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갑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그러니까~~~ 기대하지 마시라니까요!! ^^; (헤에~ 그렇군요. 귀무자 씨리즈는 일편 말고는 본 적이 없어서...)

    본다충승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그리고 이에야스의 자식 모친이 전부 다른 것은 아닙니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와 세키가하라 전투의 시작을 알린 철포 사격을 한 4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의 모친은 같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일본판 위키 토쿠가와 이에야스 항목의 하단 부분을 참조해 주시길...
    http://ja.wikipedia.org/wiki/%E5%BE%B3%E5%B7%9D%E5%AE%B6%E5%BA%B7#.E7.B3.BB.E8.AD.9C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14 0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의 이부제들은 전부 고생만 하다 가는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14 2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여성의 운명이란...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들 고생하거나 정략의 도구로 이용되네요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도 줄을 잘 서야(일평생의 줄)된다는 걸 새삼느끼고 갑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6 1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아들 빼앗기고 남편 귀양 간 친누나도 뭐... 그리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박선생님//힘이 모든 것을 우선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은 힘의 유무에 관계 없이...남녀에 관계없이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

 

 미츠히데[光秀]미나미야마시로[南山城]의 들판에서 쓰러뜨린 히데요시는 그 후, 눈을 북쪽으로 돌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까지 호쿠리쿠[北陸]에서 물리쳐 오다 정권[織田政権] 상속자로서의 발판을 다졌다.

 하지만 그것은 상속이 아니다. 찬탈이다. - 며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오와리[尾張]에서 거병하였고, 토우카이[東海]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동맹을 맺고는 그와 연계하였다.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い]이다.

 

 당시 히데요시는 쿄우[京]를 제압하고 오오사카[大坂]에 거성을 두어 그 세력범위는 24개국[国]에 이르렀으며, 총 석고는 620만석을 넘어 이미 판도는 옛 오다 정권보다도 컸다.

 그에 비해 오다 노부카츠는 107만석, 토쿠가와 이에야스 130만석이었다. 가지고 있는 힘으로만 보면 상당한 격차가 있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능력과 그 가신단의 용맹함을 크게 평가하여 이 싸움에서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였다.

 

 너무 조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총동원 능력 15만 명중에서 투입할 수 있을 만큼의 병력을 미노[美濃]오와리[尾張]에 전개시켰지만 그러나 전군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만 지키게 할 뿐으로, 이곳 저곳에 야전용 진지를 구축하여 광대한 요새선(要塞線)을 쌓아 대치전의 형태를 취했다. 이에야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이건 자신들 머리에서 지혜를 짜내 만든 진지를 구축하여 대치하고 있는 이상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지게 될 것이다.

 

 개전이 시작된 것은 3월이었다. 4월에 들어서 히데요시 측의 한 부대가 섣불리 움직였다. 장거리를 재빨리 이동하여 이에야스의 본거지 미카와[三河]를 습격하고자 은밀히 행군하던 중에 이에야스에게 간파 당하여 이에야스 주력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어 패주하였다.

 

 이에야스는 국지전에서 이겼다. 그 이후에는 진지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히데요시가 걸어오는 싸움에도 응하지 않은 채, 이 국지전 승리의 평판을 될 수 있는 한 천하로 퍼트리려 하였다. 히데요시는 조바심이 났다. 히데요시에게 있어 최선은 결전을 벌이고 그 결전을 통해 이에야스를 멸하고자 하는데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조개가 입을 다물고 있는 듯이 하고서는 응하지 않았고, 그 단 한번의 승리를 지키며 계속 지킴으로써 사태의 호전을 기다렸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싸움에 응하지 않자, 자신이 가진 가장 뛰어난 능력 중에 하나인 외교로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우선 이에야스의 동맹자인 오다 노부카츠를 꼬셔 농락하였다. 노부카츠는 이익에 낚여 아군인 이에야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히데요시와 강화(講和)해 버렸다. 이 때문에 이에야스도 충분한 여력을 남긴 상태로 전쟁터에서 이탈하여 자국으로 돌아갔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강화를 제시하였다. 이에야스로써도 천하의 추세가 이미 히데요시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납득하고 있었기에 그 강화를 받아들였다. 전쟁터의 승자이기는 했다. 그러나 모양새로는 패자의 모습을 해야만 했다. 인질을 히데요시에게 보낸 것이다.

 다만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입장을 생각하여 표면적으로는 인질이라 말하지 않고,

 - 아드님 중에 한 분을 졸자(拙者)의 양자로 얻고 싶습니다.

 고 말하였다. 실질이 어떻든 양자라고 한다면 이에야스의 면목도 설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승낙하여 둘째인 오기마루[於義丸]를 바치기로 하고, 가로(家老)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正]에게 호위시켜 오오사카[大坂]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오기마루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만나자마자 양부자(養父子)의 의식을 치렀고 곧바로 성인식(元服)을 행한 후, ‘히데[]’라는 글자를 내려 하시바 히데야스[羽柴 秀康]라는 이름을 칭하게 해서는 자기 가족의 일원으로 하였다. 후의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승리자라는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그 본거지인 토우카이 지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성을 나와 쿄우[京]와 오오사카로 올라와서는 히데요시와 대면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마치 항복한 사람처럼 비쳐지기에 이에야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정략(政略)이었다. 이에야스가 토우카이에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한 히데요시와 대등한 관계였으며, 오기마루를 보낸 것도 토쿠가와 가문이 하시바 가문으로 양자를 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런 이에야스의 태도에 당혹했다.

 당연했다. 이에야스가 토우카이 5개국[(미카와[三河],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에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한 시코쿠[国], 큐우슈우[九州], 토우호쿠[東北]의 여러 강호들은 이 이에야스와 연계하며 히데요시 정권에 계속 저항할 것이고, 예를 들어 당장 히데요시가 시코쿠를 정벌하고자 하여도 후방에 이에야스가 틈을 노리고 있기에 대군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랬다.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는 15만 명의 대군단을 토우카이에 계속 투입하였다면 언젠가는 이에야스를 멸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는 동안 천하는 흐트러지고 이제 막 성립되었을 뿐인 히데요시 정권은 무너질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천하 통일을 단기간에 이룰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전쟁보다도 막상 성사만 되면 단번에 끝나는 외교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에야스를 어떻게든 외교로 손에 넣고 싶었다. 이에야스를 가신으로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에야스를 이쪽으로 올라오게 하고 싶다. 올라와서 히데요시를 알현 이라는 형식으로 둘이 얼굴을 맞대기만 한다면 그걸로 주종관계가 된다.

 어떻게든 쿄우[]로 올라오게 할 수는 없을까?’

 히데요시는 예전부터 이 세상에서 노부나가[信長]를 가장 두려워 하였고, 그가 죽은 지금은 이에야스만을 두려운 자로 보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직면하게 되자 그 이상으로 두려운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자들처럼 달래는 것도 협박하는 것도 먹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인질을 잡았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정치적 결단으로는 오기마루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인질에 미련이 있었다면 이쪽으로 올라왔겠지만,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인질은 효과가 없었다. 

 히데요시는 필요로 몰렸다. 필요의 앞에 이치라는 것이 있더라도 치워버리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만약 이에야스가 가신이 되어 준다고 한다면 무릎을 꿇고 그의 발가락을 빨아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사히 히메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은 필요때문이었다.

 

 코이치로우[小一郎] 힘 좀 빌려줘

 

 하고 동생인 히데나가[秀長]에게 애걸복걸하듯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이 때이다. 일족의 희생이 없으면 안 되었다.

 

 만약 니가 싫다고 한다면 천하로의 희망이 사라지게 된다. 이제 막 생겼을 뿐인 하시바의 천하가 무너지고 이 가문은 멸망. 우리 일족은 죽게 된다. 그럴 정도로 중요한 것이 너의 한 마디 이라는 말에 달려있단다. 응이라고 말해주지 않을래?”

 

 라고 말했다.

 요건이라는 것은 아사히 히메를 이혼시켜 그녀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내고,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를 인척이라는 끈으로 이어서는 그를 히데요시 정권의 막하(幕下)에 집어 넣자는 것이었다. 그것 외에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모친인 오나카[仲], 즉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용서하겠냐는 것이다. 딸의 그러한 불행을 필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설득한다. 모친을 설득하기 위해서 히데요시보다는 모친이 히데요시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는 이 코이치로우 히데나가가 이야기 하는 편이 좋다. 또 하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아사히 히메는 아비 다른 여동생이기 때문에 반쪽 형제인 오빠 히데요시의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 보다 아사히 히메와 같은 아비, 어미인 히데나가의 입으로 이야기를 하게 하는 쪽이 잘 될 것이다. 그러니 아사히 히메 쪽의 설득도 부탁한다 는 것이었다.

 

 히데나가는 벙쪘다. 예부터 이런 일이 있었냐는 생각이 들었다. 전례가 없을 것이다. 아사히에게는 버젓한 남편이 있으며, 부부 사이도 남들만큼은 되어 아무런 풍파도 없이 편안히 살고 있다. 그 관계를 갑자기 찢고, 찢은 다음 곧바로 다른 남자의 마누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 부부의 역사 속에 여태껏 이랬던 적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는 절대 맡을 수 없습니다. – 고 히데나가는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알고 있다. 물론 잘 알고 있다

 

 라고 말하자 마자 히데요시는 소리 높여 통곡을 하였다. 히데요시는 웃을 때가 많은 남자이지만 감정이 격해지면 언제라도 울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울면서 그 어쩔 수 없는 필요와 이유를 빠른 말로 내뱉었고, 내뱉고 있는 동안 얼굴을 계속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이 히데나가를 침묵시켰다.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시다면 소에다 진베에[副田 甚兵衛]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진베에에게는 할 수 있는 만큼 해 주고 싶다. 5만석을 주어 다이묘우[大名]로 만들 생각이다.”

 

 마누라를 팔고 다이묘우가 되란 말이군 이라는 감정이 히데나가에게는 생기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히데나가는 너무도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우선은 얌전해 지겠군 이라고 생각할 뿐으로,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보다 모친인 오나카이며 여동생인 아사히였다. 그 설득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히데나가는 우선 모친에게 이야기했다. 생각했던 대로 오나카는 광란하였다. 코이치로우 들어라, 저 원숭이녀석은 꼬꼬마일 때부터 고생만 시켰다. 이런 생활을 하는 것도 내가 바란 것은 아니다. 저 원숭이녀석이 무사가 되어 이렇게 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 궁궐에서 살고 있는 거다. 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의 달빛 새는 지붕 아래서 살고 있었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 말했다. 그것을 히데나가는 어르고 달래어 어쨌든 승낙하게 하였다. 다음은 여동생이었다.

 

  히데나가는 아사히를 오오사카 성으로 불러 큰 언니인 토모[とも]와 함께 설득하며,

 

 이미 진베에도 승낙한 일이란다

 

 고 너무도 중대한 거짓말을 하였다. 이 한마디가 아사히의 수족을 차갑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한때는 숨이 멈추기도 했다. 의사가 회복시켰지만 새로운 결혼에 대한 것보다 진베에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뒤 아무런 말도 안 하게 되어, 히데나가가 하마마츠[浜松][각주:1]로 가는 것을 알겠지? 알겠지? 라고 거듭 묻자, 초점 없는 눈동자로 끄덕였을 뿐이었다.

 

 소에다 진베에는 이 당시 오우미[近江] 중앙부에 있는 하시바 가문 직할령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진베에도 아사히와는 별도로 오오사카의 스기하라 호우키[杉原 伯耆]의 저택으로 호출 받아, 대면하자 마자 갑자기,

 

 명령이다

 

 고 그것을 하달 받았다. 진베에는 분노했다.

 작은 칼[脇差]의 칼자루에 손이 갔다.

 

 진베에~ 어쩌려고 그러나

 

 호우키는 처음부터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는지, 사람이 하는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몸놀림으로 방바닥을 굴러 몸을 뺐다. 간격이 생겼다. 그 간격으로 좌우에 있던 스기하라 가문의 가신 10명 정도가 밀려 들어와 순식간에 둘 사이를 메웠다.

 

 , 날 죽이려는 것인가?”

 

 진베에는 굉장히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칼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방들의 눈빛만을 두려워했다.

 

 그럴 리 없잖습니까~”

 

 스기하라 가문의 늙은 가신이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하여 이 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기 위해서 미소를 만들어 말했다.

 

 손에 위험한 것을 가지고 계신지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선은 그 손에 드신 것을 좀…”

 

 하고 손바닥을 예의 있게 들어 진베에의 오른손 쪽을 가리켰다. 진베에는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오른손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렸다.

 

 “…아무 짓도안 할 것이네

 

 힘없이 손을 축 늘어트렸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칼에 손을 대었는지, 뽑아서 자신의 배라도 가르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스기하라 호우키에게 칼을 내리치고자 했는지 자신도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이 굴욕과 자신에게 내려진 이 어처구니 없는 운명에, 몸도 마음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이성을 잃고 이유도 없이 작은 칼에 손을 대고 만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호우키를 벨 용기도 없었다. 벤다고 해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짓도 안 하네

 

 하고 진베에는 한번 더 말했다. 벤다고 하면 히데요시이다. 하지만 이백수십 명의 다이묘우를 거느린 육십여 주()의 주인을 벨 수 있을까?

 

 거부한다!”

 

 한 시간 후에 진베에는 외치고 있었다. 거부하는 것 이외에 남자라고 할 수도 없다.

 라고 했지만 마누라 아사히를 빼앗기는 것에 거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홍수나 지진과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5만석의 다이묘우가 된다는 것은 거부할 수가 있었다. 이는 진베에의 자유이다. 자기는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거부한다. 마누라를 팔아서 그 대가로 5만석의 다이묘우가 되는 병진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고 진베에는 소리질렀다.

 

 대가는 필요 없다. 그냥 공짜로 가져 가도록. 진베에가 그리 말했다고 확실히 주군께 전해주시길. 절대 잊지 말도록

 

 현관까지 달려간 후, 거기서 뒤로 돌아서는 어두운 집안을 향해서 한번 더 같은 말을 외쳤다. 공짜이외다. 그냥 바칩니다. 그렇게 전해 주시길. 호우키님, 꼭 이외다. 이 말을 만약 전해주지 않는다면 진베에에게 기다리는 것은 지옥. 아미타(阿彌陀)미륵(彌勒)도 날 구해주지 못할 것이오. 적어도 이 말만은 꼭 위에 전해달라고 외치며 뛰쳐나갔고, 대문을 나서면서도 또 다시 뒤로 돌아서는 또 외쳤다. 그 모습이 결국 미쳤군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 저 사람, 치욕으로 인해 배를 가르겠지?

 하고 문안에 있던 사람들은 생각하였고 실제로 길 위에서 달리고 있는 진베에도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숙소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경우, 배를 가르는 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었다. 굴욕의 끝에 죽었다 고 세상에 퍼질 뿐이었다. 배를 가르는 것은 예로부터 자신을 과시하는 최고의 형식이며 화려한 것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이 경우 이렇게 혼자서 자결(自決)해 보았자 남들에게 우울한 동정을 살 뿐일 것이다. 그보다도 살아서 하시바 가문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단(無斷)으로 떠난다. 주인에게 실망하였기에 떠나는 형식이다. 거기에 담긴 무언의 항의와 비판을 세상은 읽어 줄 것이다.

 보통 이럴 경우, 떠난 이는 주군 가문에 대한 일종의 반역으로 여겨져 토벌대가 파견되겠지만, 상대가 천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만큼 부족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집의 얇은 벽 하나만 의지하여 크게 저항한 뒤 죽어 주마 , 그것 이외에 이 굴욕을 풀 방법은 없었다.

 

 진베에는 다음 날 새벽 숙소를 나와 오오사카를 떠났고, 도중 오우미의 저택에 들려 집을 정리한 뒤 고향인 오와리로 돌아와 아이치 군[愛知郡] 카스모리[烏森]자기 영지(領地) 내에 있는 에서 머리를 깎고 인사이(隠斎)’라는 호를 쓰며 은거해 버렸다.

 

 당연히 위에서 토벌대가 파견되었어야 했지만, 그런 점도 스기하라 호우키는 잘 처리하였다.

 다음날 아침. 진베에가 떠난 것을 확인한 뒤, 등성(登城)하여 히데요시를 알현하고서는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진베에가 오와리로 돌아간 것은 무단으로 떠난 것이 아닌 병으로 인한 은퇴이며 진베에가 제출한 퇴직서는 저한테 있습니다 - 고 적당히 얼버무린 후,

 

 은거 허락을 내리시겠습니까?”

 

 고 머리를 굴려 말했다.

 물론 히데요시는 호우키의 말 뒤편에 있는 진실이 생생히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경우 죄를 들추어 소란을 피우면 이쪽이 손해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고 허락하였다. 남아있는 더욱 중대한 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곧바로 사자를 하마마츠로 보내어 이에야스를 꼬셔 그를 자신의 매제가 되도록 승낙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잘 될까?’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에 대해선 자신이 없었다.

  1. 이에야스의 본거지가 있는 곳.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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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6.06 1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기마루를 '받치기로'의 수정이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06 12: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고맙습니다. ^^ 얼릉 고치겠'읍'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06 14: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너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충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어색함없이 읽히는게 상당히 매끄러운 번역같습니다(직접 원문을 보지는 못했으나^^;)

    아사히도 충격이 심했겠지만 굴욕의 사나이 진베에도 참...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하는 짓은 상당히 병진같습니다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당부할 필요는 없을텐데 말이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06 2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합니다... 처음 해 놓고 보니 제가 보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솔직히 매끄러운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그렇게 보아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

    억울하다 보니 어쩔 수 없겠죠. 진베에는....
    이해는 갑니다.
    (어떻게 보면, 배를 가른 사람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그만큼 희소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일본 무사들은 굴욕을 당하느니 배를 가른다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기에 오히려 배를 가른 사람들이 기록된 것은 아닐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6.07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쌍한 아사히// 아사히 일생에 행복한 날들은 히데요시가 찾아오기전 시골에서 첫번째 남편과 살적이 아닐까 싶네요. 스루가 고젠을 읽으면 공명의 갈림길에서의 아사히 모습이 떠오릅니다. 잘 읽고 갑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kun BlogIcon 고어핀드 2008.06.07 2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기다리고 있다능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07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할머니가 2차대전때 고베에서 살고 계셨는데 종종 하얀 장막 쳐놓고 하리키리 하는 모습을 봤다더군요. 그런데 어릴적에 그런걸 봐서인지 625동란때도 덤덤하셨다고..;;

    아무튼 뭐 멀쩡한 사람인 이상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말이 좀 역설이지만 참.. 상관에게 마누라 뺐긴 셀러리맨 느낌인지라..)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07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할복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않았을 수도 있군요...
    마치 조선시대에 삼족을 멸한다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어핀드님//T.T 흑~ 고맙습니다.

    다메엣찌님//제 생각엔, 그 즈음엔 에도 막부 배양 된 존황사상이 막말유신기에 꽃을 피워, 배를 가르는 것이 활성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다메엣찌님의 할머님도 修羅場をくぐってきましだね。)

    박선생님//어디까지나 생각만큼은... 이라는 의미입죠 ^^
    배를 갈랐던 사람도 있긴 있으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rknesseye BlogIcon 흑안 2008.06.17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 앞에 나오는 오다 노부카츠는 信雄 아닌가요? 信勝은 노부나가의 동생이었던 칸쥬로 노부유키의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본문에 저렇게 나와있는 것인지?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0 0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오타입니다. ^^;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二.

 

 하시바 가문이나 나가하마 성[長浜城] 성 밑 마을에서는 과부가 된 그녀를,

 '아사히 히메[]'

 라 불렀다. 히메[姫][각주:1]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햇볕에 탄 잔주름은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었고 나이도 30을 몇 개인가 넘어, 이제는 그 호칭에 걸맞은 눈이 부실 듯한 화려함[각주:2]은 없었다. 더구나 남편의 죽음으로 굉장한 충격을 받았는지 표정이 항상 어두웠고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어떤 심경인지……’

 히데요시[秀吉]만큼이나 사람 마음을 꿰뚫는 사람도 이 말없는 여동생이 지금 어떤 심정으로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새로운 남편을 찾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주변을 찾아보니 소에다 진베에[副田 甚兵衛]라는 자가 부인을 잃고 홀아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히데요시는 맘을 정하여 이때도 스기하라 호우키[杉原 伯耆]가 이 혼담을 담당하게 되었다.

 

 소에다 진베에의 신분은 원래부터 하시바 가문의 가신이 아니라, 이전 노부나가의 부하로써 히데요시에게 파견되었던 사람이지만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주가 된 이후 하시바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

 대단한 인물은 아니다

 히데요시는 그 점이 불만이었다. 무사(武士)로서 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장래 아무리 좋게 보아도 성()을 가질 수 있는 기량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매력은 - 오와리[尾張]의 소에다 씨[副田氏]라고 하면 아이치 [愛知郡]의 명문가라는 점이었다. 히데요시는 피의 고귀함을 원했다. 소에다 씨 정도가 고귀하다는 것은 이상했지만, 이 시기의 히데요시의 지위로 본다면 그 정도로도 충분히 고귀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단 당사자인 소에다 진베에가 이 결혼에 그다지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하고 단호히 호우키에게 말했다. 이유를 말하길, 자기는 기량이 부족하며 남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만약 장래 내가 조금이라도 출세를 하게 된다면, 남들은 이 소에다 진베에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누라와 결혼한 덕분에 영달하였다고들 말할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남자로서 참기 힘들다, 이 결혼식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해주시길 이라고 말했다.

 이외로 기골이 있는 사나이군

 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히데요시는 진베에를 달리 보게 되었다. 역시 아이치 군[愛知郡]의 지방 명문가 출신답게 자부심을 가진 사나이라고이 이야기를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게 되어,

 

 어떤가? 한번 더 가보시게

 

 라고 말했다. 말을 바꾸면 [명령]이었다. 호우키는 그렇게 소에다 진베에에게 전했다. 진베에도 이렇게까지 되면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맞이하고부터, 이렇게까지 기묘한 여자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가(武家)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세한 격식 같은 것을 몰랐다. 예를 들면 무가에는 연중행사가 많아 팔삭(八朔)이나 상서(祥瑞)로운 날은 어떤 가정 행사를 하고 자신은 어떤 의복을 입으며 남편에게는 어떤 준비를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몰랐고, 그러한 지식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소에다 가문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다스려갈 능력도 없었다. 다만 그러한 무가의 주인마님으로서의 일은 그녀에게 딸려 온 노녀(老女)가 전부 대행하였고, 그 밑의 시녀가 수족처럼 움직였다. 그런 점을 덮기 위해서 하시바 가문에서 화장할 때 쓰라는 명목으로 땅(化粧料)이 붙어왔다.

 

 아사히는 하루 종일 거실에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히데요시의 배려인 듯 ()나 습자(習字)의 선생이 붙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에도 흥미가 없는 듯했다. 이 여성은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탄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를 어떻게 누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도 모르겠군

 요괴와 같구먼 - 하고 소에다 진베에는 처음에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 말해야 할 것은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1개월 정도 지나 진베에는 과감하게 말해 보았다.

 

 조금만 더 힘내 줄 수 없으신가?”

 

 진베에는 말하길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어라. 행동도 씩씩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사히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같은 것을 말해 보았다.

 

 어떠하오?”

 

 하고 부드럽게 한번 더 말했다. 진베에는 이 시대의 무사로는 드물게도 여성의 마음을 세심하게 배려할 수가 있는 남자였던 것 같다. 그것이 아사히의 마음 어딘가를 단번에 녹였을 것이다.

 

 힘드옵니다!!”

 

 고 갑자기 외치듯이 말했다. 그 커다란 목소리에 진베에가 놀랄 정도였다. 아사히는 굉장히 괴로운 듯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을 들여다 보자 이를 악물고 있었다. 울고 있는 듯 했다.

 

 뭐가 그리 힘드신가?”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 보자, 둑이 터진 듯이 처음으로 울음 소리를 내었다.

 이것이 이 여자의 울음 소린가?’

 마치 꼬꼬마로 돌아간 듯이 자기를 잊은 막무가내의 울음소리였다. 진베에는 아사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목소리에 반한 듯할 감정에 휩싸였다. 틀림없는 인간 여성의 목소리였다.

 

 날이 새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네. 울고 싶으면 울게. 무언가 말하고 싶으면 말해시게. 나를 남이라 생각하지 말시게

 

 그렇게 말해주자, 아사히는 조금씩 입술 안 쪽에서 말을 만들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놀랍게도 이 집에 와서 자신은 너무 긴장하고 있다, 그것이 힘들다고 말하였다.

 ‘……그랬구나

 하고 진베에에게는 이외였다. 아시하의 친정은 종오위하(從五位下) 치쿠젠노카미[筑前守]. 소령(所領) 20만석이라는 다이묘우[大名]의 가문이었다. 소에다 가문은 오다 가문의 부하였을 때 100석이었고 지금은 200석에 지나지 않았다. 20만석에서 200석 부하 가문에 와서 긴장하여 거의 정신을 상실해 버릴 정도였다는 것은 정말로 뜻밖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사히가 태어난 곳은 오와리에서도 최하층 소작농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시집간 집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런 세계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면 아사히도 편안히 세상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비 다른 오빠인 히데요시가 아사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던 세계에서 파워엘리트가 되어, 전례가 없는 입신출세하였고 지금은 오다 계열의 다이묘우로서는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때문에 아사히의 운명도 환경도 일변했다. 나가하마로 오자 마님이라 불리는 신분이 되었다. 전남편이 죽은 후, 그 생모인 오오만도코로[大政所]와 함께 요 일년간 성안에서 살며 많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모든 것은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 시녀들은 모두 오와리나 오우미[近江]의 무가(武家) 출신자로 모든 것이 아사히와는 달랐다.

 아사히는 그녀들이 쓰는 무로마치[室町] 풍의 무가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말 없는 성격이 더 말이 없어지게 되었다. 거기에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는 가신인 소에다 가문에 시집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아사히의 가부도 묻지 않고 히데요시가 정하고는,

 

 소에다 가문은 누가 뭐라 하건 명문가다. 예의 범절이나 무가의 격식 등을 어서 빨리 배워 두렴

 

 이라고 말하며 예전에 오우미의 지배자였던 쿄우고쿠 가문[京極家]을 섬겼다는 노녀에게 배우게 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번거로움을 뭐라고 할까…… 예를 들면 남편과 같은 방에 있을 경우, 코를 풀기 위해서는 옆방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푸는 방식도 품 안에 있던 종이()를 꺼내어 처음엔 약하게, 다음은 조금 힘차게, 또 다음에는 처음과 같이 약하게 푼다. 세 번에 걸쳐 푸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러했다. 오와리에서 밭일하고 있을 즈음 종이 같은 것이 백성에게 있을 턱도 없기에 모두 손으로 풀고 털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급변한 환경일 것이다.

 

 그런 긴장이 소에다 가문에 와서 더욱 더 심해져 피의 순환이 막혔는지 혀도 움직이지 않았고 긴장했는지 몸동작도 가르쳐준 대로 따라지지 않아 그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계속 앉아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좋은 여자구나

 고 진베에는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으로 이 오동통한 마누라를 보았다. 자신이 종오위하 치쿠젠노카미의 여동생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이렇게 몸을 굳히고 있었다.

 

 잘 알았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네

 

 고 진베에는 웃지 않고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될 수 있는 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의작법이라는 것은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 하면 이것만큼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없다. 창피를 두려워하지 말고 틀린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느긋하게 행동하면서 조금씩 고쳐가라, 그것이 중요하다, 나도 가르쳐 줄 테니 나쁜 제자가 되어라, 좋은 제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내가 당신을 키워 주겠네

 

 라고 말했는데, 이는 진베에에게 있어서 아사히를 안심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여성을 무가의 부인으로 만드는 것에 열의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베에는 집에 있는 한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쓰며 아사히를 가르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젊지도 않았으며 30년을 넘게 백성의 여자로 살아 온 아사히를, 이제 와서 다른 여성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들짐승을 가축으로 만드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러나 진베에는 그런 것에도 열의를 느꼈다.

 

 한편 사적이 아닌 공적으로써의 진베에는 그다지 출세를 못했고,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500석으로 더해진 것 외에는 별다른 것도 없었다.

 하시바 가문이 군단(軍團)인 이상 이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를 들어 1000석이라면 자신의 가신이나 부여된 아시가루[軽] 한 조 정도[각주:3]는 이끌 수 있어, 한 개 전투 단위의 대장으로써 전쟁터에서는 단순한 용맹뿐만이 아닌 전술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기량이 없는 진베에에게 1000석을 주면 가문 내의 사기에 문제가 생길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군단의 활동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기에,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런 사정 때문에 진베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 줄 수는 없었다.

 

 세상의 난이 진정되면 성 하나는 주겠다

 

 고 히데요시는 아사히에게 그런 약속을 하였다. 평화로운 시대가 온다면 무능한 자에게 아무리 많은 땅을 주어도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 5년이 흘렀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으로 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 되어 오우미를 출발하여 하리마[播磨]로 향할 때, 진베에를 전열에서 빼서는 나가하마를 지키게 하며 영지(領地)의 민정을 담당시켰다. 이것은 다소 적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김에 700석으로 해 주었다.

 그 정도의 신분이었지만 소에다 가문은 소유한 석고(石高)보다 훨씬 유복했다. 성에서 아사히에게 보내지는 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쌀 덕분에 아사히는 충분히 작은 다이묘우[大名]급의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진베에는 물론 그 혜택을 관리하였다.

 

 진베에는 이 즈음 병이 많아져 더 이상 전쟁터에 갈 수 있는 몸이 아니게 되었다. 자주 열이 낫고, 열이 나면 10일 이상 자리에 누웠는데, 아사히는 이런 경우가 되면 마치 물을 만난 고기와 같이 활기를 찾아 열심히 병간호를 하였다.

 병간호를 시키면 이 여자보다 잘하는 마누라도 없을 것이다

 라고 진베에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사히는 여전히 들냄새가 빠지지 않았고 여전히 무가 부인으로서는 부족했지만, 그러나 환자의 간호에는 무로마치 풍습 등의 구속이 없었기에 아사히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해방된 듯한 마음으로 열심히 했을 것이다.

 

 아이가 없었다.

 이 점은 진베에도 곤란했다. 아사히가 석녀인 것이 확실해진 이상, 보통이라면 마땅한 여자를 들여서는 후계자를 만들어 소에다 가문의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다른 무사의 경우 필요이상으로 미녀를 들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진베에는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하고 있기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아사히에게 무가의 관습을 가르치면서 은근슬쩍 물어본 적이 있다. 진베에는 말했다. 무문의 가문이라는 것은 가문의 이름과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는데, 후계가 없을 경우 정실(正室)은 자신이 맘에 드는 시녀 중에 하나를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 통례이다. 그렇게 말하자 아사히도 원래부터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듯 아무 말도 안하고 엎드려 울어버렸다. 여전히 의사는 명료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말하자면 꼬꼬마와 같이 통곡하는 모양이 이미 세찬 거부를 표명하고 있었다.

 역시 안 되나?’

 이 하나만은 진베에도 아사히를 교육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따르지 않는 것을 보면 이는 본래의 질투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시 자란 곳이 무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무가에서 자랐다면 질투심의 억제는 가훈으로 행해졌으며 가문이 끊기지 않게 유지하는 것의 중요함도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을 터였다.

 결국 백성의 딸이군

 라고 이러한 때는 그리 생각할 수 밖에 없었으며, 거기에 그냥 백성의 출신보다 성가셨던 것은 그녀의 오빠가 진베에의 주인인 치쿠젠노카미라는 것으로, 이 때문에 무턱대고 강행할 수도 없었다.

 

 오빠한테도 아이는 없습니다

 

 고 아사히는 흐느껴 울면서 한마디만 하였다. 이런~ 그건 아니지~, 하고 진베에는 생각한 것이다. 하시바 가문 같은 것은 오다 가문 후다이[譜代]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 長秀]시바타 카츠이에[田 勝家]를 가져다 붙였을 뿐만인 성으로, 본성도 지역 연고도 없었다. 거기에 비해 소에다 가문은 작다고는 하지만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부터 내려오는 가문으로 노부나가의 오다 가문보다도 가문은 뚜렸했다. 친정인 하시바 가문과 같은 감각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이것을 말해보았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기에 진베에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4년 후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1582 6 2.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쿄우[]의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음을 당한 이다.

 미츠히데는 이 반란을 일으킨 후 오다 가문의 근거지인 오우미를 제압하고자 5일에 그 부장()아케치 미츠하루[明智 光春]에게 아즈치 성[安土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아즈치 성의 수비는 오다 가문의 모우 카타히데[蒲生 賢秀]가 지키고 있었지만 병력 부족으로 인하여 적이 오기 전에 성을 버리고 노부나가의 측실 20, 시녀 수백 명을 호위하며 카모우 군[蒲生郡] 히노[日野]자기 으로 철수했다. 아즈치 성의 북쪽으로는 오다 가문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의 거성인 사와야마[佐和山]가 있었지만, 여기도 지키는 병사가 소수였기에 빈 성이 되었다. 거기에서 그 북쪽은 히데요시의 나가하마 이었다. 하시바 가문의 유력 무장들은 하나같이 츄우고쿠[国]에 있었으며 나가하마에는 없었다.

 성에 있는 것은 몇 안 되는 무사와 히데요시의 가족뿐이었다. 단 이미 문관(文官)같은 일을 하고 있는 소에다 진베에가 있었다.

 

 성을 지킵시다

 

 고 처음엔 진베에가 떠들었다.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々]는 이 인물의 당황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성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성안에 무사다운 사람은 10명도 없지 않은가? 10명 정도의 무리도 오다 가문의 장래에 절망하였고 또한 진베에의 지휘하에서 싸우는 것을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슬며시 가족들을 데리고 미노[美濃], 오와리[尾張]로 도망쳐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막는다는 것일까?

 

 다음날 진베에는 주장을 바꾸어, 오와리로 도망칩시다, 고 말했다. 도망칠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 인물은 단지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을 시끄럽게 떠들 뿐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역시 싸울 때는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하고 네네는 진베에가 맘에 안 들어,

 

 내가 지시를 하겠네. 자네는 닥치고 있게

 

 하고 말했다. 이 나가하마의 동쪽에 히데요시가 예전에 오다니 성[小谷城]을 공격할 때 쌓았던 야전용의 성이 남아 있었다. 산성(山城)이었기에 적을 막기에 나가하마보다는 훨씬 든든했다. 거기로 물러나기로 하고 네네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을 보호하며 성에서 나왔다.

 그 성을 나올 때도 진베에는 짐들을 지키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성 밑 마을(城下町)이나 근처의 마을 사람들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리는 일 없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후일 히데요시의 마음을 굉장히 상하게 하였다. 진베에가 조금만 머리를 써서 적어도 편지 한 장이라도 츄우고쿠[国]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십니다 는 소식을 알렸다면 히데요시는 크게 안심하여 신경쓸  필요 없이 복수전에만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진베에라는 남자가 녹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빗츄우[備中]에서 서둘러 군세를 돌려 히메지[路]에서 아마가사키[尼崎]로 내달리고 내달리는 동안 말 위에서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는지 셀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보다 가신의 무능에 대해서 너그러운 편이었지만, 그러나 이 때는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초조해져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1. 보통 젊은 나이의 ‘아가씨’를 뜻 함. [본문으로]
  2. 아사히[旭]는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뜻한다. [본문으로]
  3. 예를 들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경우는 1000석의 부하에게 32명(기마무사 5명, 등에 깃발을 꼽은 자(指物) 10명, 창 10명, 부대 깃발 2명, 철포 5명)을 지휘케 하였다. 1581년 기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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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5.25 17: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몇 번이나 시집을 간 것인지... 이에야스가 3번 째인가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19: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책에서는 이에야스가 3번째입니다. 저도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인물인지라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들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5.25 1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내용이 공명의 갈림길에서 본것과 상당히 유사 하네요.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맘고생 하다가 진베에와 재혼하고 좀 잘 사나 싶었는데, 강제 이혼 당하고 이에야스에게 시집 가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무래도 관련 자료가 적어서 그런가 봅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26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사히 히메라.. 생각해보면 전혀 호칭과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군요, 30여년 하루종일 뙤양볕 내려쬐는 밭에서 밭일하며 태웠을테니(-_-..)

    아.. 하긴 아사히는 아침해를 뜻하니 좀 엇나간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횡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06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닷가에서 뱀새 술 마시고 모래 사장에서 자다 새벽 햇살에 깰 때의 따끔함은 장난 아니죠(저도 횡설..)

一.

 

 막내 여동생 아사히[旭]가 결혼할 즈음에 큰 오빠 히데요시[秀吉]는 그 근방에 없었다.

 

 “너에게는 7살 연상의 오빠가 있단다. 착실하게 괭이하고 가래질을 하고 있었으면 부모를 대신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하고 모친인 오나카[仲]는 투덜댔을 것이다. 오나카에게 있어서 히데요시는 죽은 첫 번째 남편인 야에몬[弥右衛門]과의 사이에 나온 자식으로, 그 때문에 야에몬이 죽은 뒤 재혼한 치쿠아미[竹阿弥]에게는 이 히데요시라는 존재가 조심스러웠고 불안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히데요시는 치쿠아미를 싫어하여 아직 꼬꼬마일 때 가출해 버렸다.

 그 후 바늘 장사를 하거나, 미카와[三河] 만담의 보조 광대[三河万(관련 사진(링크)][각주:1]되어 떠돌거나, 그릇을 굽는 곳에 노예로 몸을 팔거나[각주:2], 오와리[尾張]의 유랑인 길드라고도 할 수 있는 하치스카 코로쿠[蜂須賀 小六]의 길드원이 되는 등 수상쩍은 사회를 전전하고 있는 듯 하였다.

 

 그 히데요시가 오와리로 돌아와 오다 가문[織田家]의 허드레꾼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즈음, 여동생인 아사히는 결혼하였다.

 - 요즘은 키요스[洲] 오다 님의 하인들 무리에 꼽사리 껴서 산다고 하더군

 라는 소문이 나카무라[中村] 주변에서도 들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사히에게 큰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 이름은 요즘 토우키치로우[藤吉郎]라고 고친 것 같더군

 라는 소문도 돌던 중 곧이어 하급 무사로 출세하여 키노시타[木下]라는 성(姓)을 쓰게 되었다고도 들었다. 그 사이 물론 그 토우키치로우가 이 나카무라에도 왔었다.

 

 아사히가 결혼한 곳에도 찾아왔다.

 

 “여기냐? 여기가 아사히의 집이냐?”

 

 하고 토우키치로우는 시끄러운 소리로 혼잣말하며 들어왔다. 시아버지에게도 싹싹하게 인사를 하였고, 처음 보는 남편에게도 여어~여어~하고 어깨동무라도 하며 친근감을 보였다.

 ‘시끄러운 사람이다’

 아사히에게는 이 어색하기만 한 오빠가 그렇게 비추어졌다. 극도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오빠가 말을 걸어도 부끄러움이 앞서 아무 말 않고 끄덕이거나, 바쁜 척을 하거나 둘 중 하나여서 한 문장으로 된 말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아사히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하고 토우키치로우는 말했다.

 

 “니는 누구하고 닮았을까~?”

 

 아사히는 말이 많은 이 오빠와 너무도 달랐는데 생김새라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사히는 토우키치로우의 기괴한 상판과는 닮은 곳이 없어, 오나카의 배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눈코가 뚜렷하였고, 피부색도 농사일로 검게 타기는 하였지만 바탕은 흰 것 같았다.

 ‘눈가는 아비인 치쿠아미를 닮은 것 같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토우키치로우는 이미 죽은 양아비가 정말로 싫은 듯 그렇게 느꼈지만,

 - 치쿠아미랑 닮았구나

 라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와 닮았건 토우키치로우는 아사히가 막내 여동생인 것도 있어 너무도 귀엽다는 느낌을 가졌다.

 

 “어서 애를 낳으렴”

 

 그렇게 말하면서 오빠라기 보다는 남자의 시선으로 이 작은 몸집의 여동생 허리 주변을 눈으로 핥았다. 작은 몸집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육덕져 허리 주변이 과즙을 담고 있는 듯이 싱싱했다. 이 정도의 몸을 남편에게 바치면서 아이를 낳지 않고 있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토우키치로우가 오다 가문의 중급 장교가 되어 스노마타[墨股] 요새의 수비장수가 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28인가 29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토우키치로우는 나카무라에 사는 오나카 이하 혈연들을 이 성으로 초대하여 수일간 머물게 하며 대접하였다. 스노마타는 야전용 요새로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엮어 만들었을 뿐인 조악한 건물이었지만, 그래도 나카무라에 사는 미천한 백성의 마누라인 아시히에게는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듯한 궁궐같이 보였다.

 

 그 나카무라의 일행이 돌아간 뒤 부인인 네네(寧)가,

 

 “아사히님은 정말 얌전하시더군요.”

 

 라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그 연상의 막내 시누이는 머물던 중 어떤 일이건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바보는 아니겠지?’

 네네는 생각했지만 토우키치로우는,

 

 “아녀~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일 테지”

 

 하고 자신의 핏줄인 만큼 그러한 해석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토우키치로우에게 있어서 아사히보다도 더 관심이 갔던 것은 그 남편이었다. 켄스케[源助]라고 하던가? 카스케[嘉助]라고 했던가?

 ‘무사로 만들어 주자’

 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토우키치로우도 어엿한 중급 장교 나부랭이가 된 이상, 친척과 인척을 끌어들여 가신단의 중추로 만들어 가고 싶었다.

 그의 출신이 만약 태어나면서부터의 무사나 호족이었다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부하나 분가(分家)의 무리들을 데리고 강고한 가신단을 형성해 가는데 아무런 힘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랑인 출신에 빈농의 자식인 토우키치로우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던 만큼, 어서 빨리 자신의 주변을 살펴 무사로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네네 쪽의 친척에서 그녀의 양갓집 동생인 아사노 나가마사[野長政 – 아키[安芸] 아사노 가문의 가조(家祖)]나 숙부인 스기하라 시치로우자에몬[杉原 七左衛門 – 후에 후쿠치야마[福知山] 성주(城主)]을 채용하여, 각각 이 스노마타의 중요한 부서에서 일하게 하고 있었다.

 토우키치로우의 일족에서는 동생인 코이치로우[小一郎]를 지금부터 교육하고자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아사히의 남편은 어떤가? 쓸만하다면 쓰고 싶다고 토우키치로우는 기대하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이번 스노마타 초대를 기회로 면밀히 관찰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이 남편에게는 눈여겨볼만한 곳이 없었다. 눈코는 사람이었지만 머리는 소나 말과 다를 바 없었고, 더구나 소하고 말만큼의 힘도 없으며 눈동자가 멍했다. 무사는 재능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래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백성인가’

 라고 생각하여 실망한 만큼이나 아사히가 불쌍해졌다. 적어도 출납 장부라도 볼 줄 아는 남편이었다면 곧바로 창고나 수송대의 대장 정도는 맡겨줄 수 있었을 텐데, 그 정도도 못하니 아사히는 평생 저 남편을 위해서 밭에서 기어 다녀야만 할 것이다.

 다만, 토우키치로우의 이성은 그렇게 실망하였지만 감정은 남에게 한 없는 호의를 가지는 성격이었기에,

 

 “어떻겠나? 키노시타 성(姓)을 쓰시게”

 

 라고 말해 보았다. 자기와 동족(同族)으로 해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무사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사히의 남편은 썩소를 지으며 아니 원래가 그런 상판인 듯 했지만 –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양하게쯥니다”

 

 라고 쌀쌀맞게 대답했다.

 

 “싫은가?”

 

 라고 묻자,

 

 “싫건 좋건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선조들의 위패가 있쯥지요”

 

 라고 말했다. 즉 미천한 백성이긴 하지만 어엿하게 이어 내려오는 가문이다, 그리 쉽게 마누라 쪽의 가문에 몸을 파는 듯한 행위는 할 수 없다는 것일까? 그런 의미라고 한다면 이 좆병진 같은 남자라도 역시 나름대로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맘대로 하게”

 

 하고 화가 나 냅두고 있었지만, 그 후 10년 정도 히데요시가 전쟁터를 질주하는 동안, 오다 가문의 세력이 커져 히데요시의 사정도 크게 변했다. 노부나가오우미[近江]의 아자이 씨[井氏],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씨[朝倉氏]를 멸한 뒤, 자신 휘하의 군사령관들에게 지역을 나누어 준 것이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는 에치젠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는 남부 오우미[南近江]를, 히데요시에게는 북부 오우미[北近江]를 하사하였다. 히데요시는 비와[琵琶] 호반의 나가하마[長浜]에 성을 쌓아, 이때부터 성주(城主)의 신분이 되었다. 그 봉토는 20만석이었다. 이제는 신흥 귀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히를 저대로 버려 둘 수는 없다’

 불쌍하기도 했다. 거기에 이미 동생 코이치로우뿐만이 아닌 모친과 누나도 불러와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20만석 다이묘우[大名]의 여동생 되시는 분이 언제까지나 오와리 나카무라의 최하층 백성의 마누라로 좋은 것일까?

 

 “호우키[伯耆] 어떻게든 해봐”

 

 하고 히데요시는 명령했다.

 호우키[伯耆] - 라고 대단한 호칭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이 사람은 네네의 숙부 스기하라 시치로우자에몬 이에츠구[家次]였다. 무사로서는 능력이 없기에 하시바 가문[羽柴家] – 히데요시는 이 나가하마에 성을 쌓은 다음부터 키노시타에서 하시바 성으로 고쳤다 – 의 가재(家宰)를 맡고 있었다. 호우키는 곧바로 오와리로 내려가 아사히의 남편을 만나,

 

 “고맙게 생각하라. 자네를 무사로 만들어 주겠다”

 

 라고 전해자, 남편은 아둔한 얼굴로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왜 그러나?”

 

 하고 스기하라 호우키가 목소리를 높이자?

 

 “싫쯥니다”

 

 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를 대라”

 

 고 호우키는 반쯤 소리지르듯이 말하자, 이 백성에게는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한 줄 정리하면 있던 곳에서 움직이는 것이 싫었던 것뿐으로 환경이 변하는 것을 무조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것을 호우키가 달래듯이 하여 겨우 나가하마 이주를 승낙시켰다. 나가하마에는 으리으리한 저택이 준비되어 있었고, 놀면서 살면 되었다. 그러나 무가(武家)답게 성(姓)이 필요했다. 그 성도 스기하라 호우키는 준비해 두고 있었다. ‘사지[佐治]’라는 성이었다.

 '사지'라는 성은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때부터 오와리에 번영했던 명족으로, 치타 반도[知多半島]에 그 성터가 남아 있어, 지금은 힘이 없지만 그래도 오다 가문의 가신들 중에는 이 성을 쓰는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에 신관(神主)가 있어, 스기하라 호우키는 특별히 부탁하여 그 성을 쓸 수 있게 허락 받은 후 나가하마로 데려왔다.

 가문의 문장은 부채였다. 그 문장이 들어간 옷과 갑옷 등도 호우키는 준비해 두었다. 결국 이 남편은 무사로 만들어 졌다. 사지 휴우가[佐治 日向]이다.

 

 그러나 나가하마의 으리으리한 저택 생활이 정말 맞지 않았나 보다. 사지 휴우가는 이곳으로 온 후 얼마 동안은 일단 살이 쪘고 곧이어 이전보다 더 말라,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야채처럼 쇠약해져 죽어 버렸다. 그것을 전후로 하여 이 남자가 나카무라에서 데려 온 양친도 죽어, 모처럼의 사지 가문도 끊겼다. 아사히는 하시바 가문으로 되돌아왔다.


사지 씨[佐治氏]에 대해


  1. 사진 중 부채를 든 인물을 타유우[太夫]라고 하는데, 춤을 추거나 재미 있는 말을 한다. 검은 북을 든 사람는 ‘사이조우[才蔵]’라는 보조로, 북을 쳐서 타유우의 춤을 흥겹게 하거나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어 준다. [본문으로]
  2. 말은 노예지만, 결국 돈을 빌리고는 대신해서 그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것. 나중에 돈을 갚거나하면 면천되었다. [본문으로]
  3. 당시의 도기와 자기는 지금의 반도체와 맞먹는 가치가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본문으로]
  4. 미모는 근방에서 따를 자가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5. 후에 에도 막부[江戸幕府]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2011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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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18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이에야스에게 시집가는 여인이지요? [대망]에서는 남편이 히데요시로부터 '마누라 회수' 명령을 받고 자결했다던데, 여기서는 그냥 죽어버리네요. 하긴 어느쪽이든 큰 상관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8 1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맞습니다. ...대망이라... 보다가 코웃음 치게 만드는 부분이 많아서 중간까지만 읽은 듯 합니다. 전...
    (여담으로... 바벨2센지 3센지 그린 요코야마 미츠테루 선생이 그린 대망의 만화판은 과감한 삭제와 노부나가를 오히려 주인공으로 여기게 하는 부분이 있어 전 이쪽을 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19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생각해봤는데 같은 대정소님(;)의 자식이지만 치쿠아미의 씨들은 빨리 죽어버리는 듯 하군요. 히데나가도 간신히 50에, 스루가 고젠도 40대에 죽었으니..

    뭐, 생각해보면 당시 평균수명에 비하면 그 정도면 선전 한 것 아닌가도 싶지만 자연사 한 센고쿠시대 인물들은 은근히 수명이 긴편이었던지라(...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9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자는... 당시 수명이 짧았다는 것은 통계의 허점이라고들 하더군요.
    유아 사망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지, 그걸 제외하면 평균 수명은 나름 있었던 편이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다메엣찌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암은 유전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치쿠아미 측의 부계 유전이었는지도 모르죠.

    요즘엔 아예 히데츠구의 어미 닛슈우 부터 막내 아사히까지 전부 야에몬의 자식들이라고도 합니다만...

    여담으로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일본 측 기록에는 없다네요), 젊은이 한 명이 이세(伊勢)에서 20~30명의 무리를 끌고 와 히데요시의 동생이라고 우겼다가, 이것을 히데요시가 오오만도코로에게 물어보자 대답을 궁색히 하며 낳은 적 없다고 하여 일당 전부 참수. 그 이후 또 여동생 하나를 찾아내어(오와리의 백성의 여편네를 하고 있었다네요) 오오사카로 데려와 역시 참수... 그런 것을 따지면 위에 두 명(닛슈우와 히데요시) 빼 놓고는 히데나가가 제일 오래(51~2살) 살았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24 1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데이터에서는 대표값도 중요하지만, 분산 역시 중요하죠…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0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는 있는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w_walker BlogIcon 친구 2008.06.12 2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이 쪘다가 말라서 죽었다..라는 말을 보니 꼭 당뇨같네요.. 부귀영화가 몸에 안 맞았던 듯..^_^;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6 1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안 맞아도 좋으니, 꼭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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