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두 명이었다는 놀랄만한 이설(異說)을 발표한 사람이 있다. 사의(史疑)라는 책을 저술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이다. 토우카이 지방[東海地方]의 지방관리로 근무하던 중 미카와[三河]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후년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세라타 모토노부[世良田 元信]라는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고 한다. 그는 진짜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의 부하가 되어 불시에 진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이런 이설이 나올 정도이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선조 역시 확실치 않다. 닛타 겐지[新田源治][각주:1]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지만 이는 나중에 날조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토쿠가와 가문의 시작은 코우즈케[上野] 닛타 군[新田郡]에 살던 토쿠아미[徳阿弥]라는 행각승()으로, 이 스님은 떠돌던 중 미카와에 와서 서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의 호족 타로우사에몬[太郎左衛門]의 사위가 되어 환속, 이름을 마츠다이라 타로우사에몬 치카우지[松平 太郎左衛門 親氏]라고 했다 한다.[각주:2]
 후년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었을 때 아시카가 겐지[足利源氏][각주:3]의 명문 키라 씨[吉良氏][각주:4] [각주:5]의 족보를 물려 받은 것[각주:6]도 이런 애매한 선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족보사칭이다.

 

화제를 돌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는 두견이[ほととぎす]에 비유하여,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가 노부나가[信長], ‘울게 만들겠다’가 히데요시[秀吉],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식으로 정권의 자리를 획득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江戸時代] 후기 턴포우[天保] 연간[각주:7]에 그려진 풍속도에는 갑주를 입은 남자들이 떡을 만들고 있는 장면이 있어, 절구공이를 들고 막 찧으려고 하는 것이 노부나가, 그 옆에서 떡을 만들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 그리고 최상석에 가만히 앉아서 떡을 먹는 것이 이에야스이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를 비꼰 그림으로 그 때문에 만든이인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 芳虎]는 막부(幕府)에 체포되어 60일간 수갑이라는 형(刑)과 절판이라는 벌에 처해졌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이라 알려진[각주:8] 이 말은 그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참을 인(忍)이라는 글자가 그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보다 8살, 히데요시보다는 5살 어리다. 조부 키요야스[清康]의 시대부터 미카와 오카자키[岡崎] 성주가 되었지만, 동쪽의 이마가와[今川], 서쪽의 오다[織田]라는 강력한 세력에 끼어 약소세력의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조부 키요야스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부터 마츠다이라 가문은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보호를 받기 위해 어린 이에야스는 인질로 바쳤고, 그로 인해 이에야스와 마츠다이라 가문은 인종의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12년간 마츠다이라 주종(主從)은 고난 속에서 허덕이지만, 이 시기에 이에야스의 참을성 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

 1560년 5월 19일.
 오다 노부나가의 전격작전으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어, 덕분에 이에야스도 인질생활에서 해방된다. 이에야스는 19살이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관계를 끊고 오다와 동맹을 맺어 미카와 통일을 이룬다. 1563년, 그때까지 모토야스[元康]에서 이에야스[家康]로 개명한다.

 막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나 본거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 봉기한다. 영내에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9]가 봉기한 것이다. 미카와에 있던 이마가와 잔당에 더해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섬기던 미카와의 무사들까지도 반기를 들었다.
 이를 반년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는데, 강화 조건의 실시에서 이에야스는 일찌감치 후년의 뻔뻔한 정치성을 발휘한다. 잇코우 종[一向宗][각주:10] 사원의 안전을 보장했으면서도 막상 반란이 진정되자 잇코우의 절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약자와 맺은 약속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지만, 강자에게는 어디까지나 의리를 지키는 정책이 일찍이도 이때부터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즈음 강자 노부나가에게는 자신의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에게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시켜 충성의 뜻을 나타내었고, 나중에는 그 노부나가가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 노부야스를 죽이기까지 한다.(이 부분은 졸역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처자식을 죽였다?"를 참조 삼아 보시길.)

 이에야스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서면 그의 호방함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1572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2만 군세와 싸운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그런 모습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는 센고쿠 최강인 코우슈우[甲州]의 군세가 상대. 더구나 상경(京)하려는 대군이었다. 이에야스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서 싸워 실제로 참패하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해 온 이에야스는 일부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안팎으로 화톳불을 대낮같이 밝히게 하였다. 적에게 공격해 볼 테면 하라는 대담한 전술이었다. 뒤를 쫓아 온 코우슈우의 병사들은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공격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은 뜨슨 물에 밥을 말아 세 그릇을 비우고는 코를 크게 골며 잤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후 타케다의 맹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는, “토쿠가와 군의 전사자는 모두 우리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죽었다”고 신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야스는 패하기는 했지만, 토우카이 No.1 무장[각주:11]이라고 일컬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전쟁터에서 이에야스가 지휘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처음엔 지휘봉을 휘두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먹을 쥐고 말 안장 앞부분을 두드리며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너무도 세게 두드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였다고 한다.

 천하에 대한 야망이 이에야스의 마음 속에서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각주:12] 때부터 일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태두로 그 꿈은 잠시 접어 둔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대놓고 정권획득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바친 서약서를 어기고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그들의 자식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 보냈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여러 다이묘우의 영지를 가증시켜 많은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에게 보낸 편지는 실로 179통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을 격파하였고,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확인 사살하여 토쿠가와 정권을 반석에 올려 놓은 것이다.

 말년의 이에야스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50세 전후부터 비만 체형이 되었고 아랫배가 나와 혼자서 훈도시를 조이지 못하여 시녀(侍女)에게 조이게 할 정도였다. 신장은 5척 1~2촌(약 155~158)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굉장히 건강을 생각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매사냥이 이에야스 건강의 원천인 듯 죽을 때까지 매사냥을 행한 횟수는 천 번을 넘는다.

 이에야스의 측실은 10명 이상 있는데 다이묘우 등 고귀한 집안의 딸들을 동경했던 히데요시와는 반대로 이에야스의 측실에는 하층계급의 딸이나 미망인이 많았다. 말년까지 정력은 절륜했던 듯 소위 토쿠가와 어삼가(御三家)[각주:13]의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9남 요시나오[義直]는 59살 때, 키이 가문[紀伊家]의 10남 요리노부[頼宣]는 61살 때, 미토 가문[水戸家]의 11남 요리후사[頼房]는 62살 때의 아들이다. 

 건강을 소중히 한 이에야스는 의사 이상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화제국방(和剤局方)[각주:14]’이라는 의학서를 항상 옆에 끼고서 스스로 진단하고 약을 조제할 정도였다. ‘만병원(万病圓)’이라 이름 지은 약을 특히 잘 만들었다고 한다.[각주:15]

 1616년 4월. 죽음을 앞둔 이에야스는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와 측근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할 일을 세세히 지시하였다. 유체나 위패의 위치는 물론 닛코우[日光]에 작은 묘소를 세우는 것까지 지시하였다. 죽기 이틀 전에는 죄인(罪人)을 시험 삼아 베게 한 명도(名刀) 미이케덴타[三池典太]를 베갯머리에 가지고 오게 한 뒤, 이불에서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허공을 내리쳤다. 그리고 당장 죽을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확실한 말투로, “나는 이 칼을 가지고 자자손손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그 다음 날, 신류우인 본슌[神流院 梵舜]을 불러 “쿠노우[久能山]의 내 묘소에, 내 몸을 서쪽으로 향하게 해서 안치하라”고 했다고 한다. 즉 서방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6] 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대로(大老)를 불러, “히데요리[秀頼]를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고 유언한 안쓰러운 모습에 비하면, 실로 냉정한 최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2년생.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적자. 아명 타케치요[竹千代], 이름이 처음엔 모토노부[元信], 다음엔 모토야스[元康]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전사를 기회로 독립하자, 1568년 즈음 미카와[三河]를 평정.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후 미카와,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남반부를 영유. 히데요시[秀吉]와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결전을 피해 화해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7] 후인 1590년 칸토우[関東] 6개 지역에 242만석을 하사 받아 에도 성[江戸城]를 거성(居城)으로 하였다. 1603년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1616년 4월 7일 죽었다. 75세.

  1. 오우슈우[奥州]를 무대로 펼쳐진 전구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삼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 대활약한 미나모토노 하치만타로우 요시이에[源 八幡太郎 義家]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義国]의 첫째가 코우즈케[上野]의 닛타[新田]라는 곳을 영유하면서 닛타라는 성을 썼다. [본문으로]
  2. ...는 에도막부가 편찬한 책(朝野旧聞褒藁)에 따른 말이고, 후세 아직까지 권위를 인정 받는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라는 사람의 논문에 따르면 - 토쿠아미에게 조상을 묻자, 토쿠아미는 "뭐 우리네라고 하는 것들은 동서남북을 떠돌며 여행하는 사람들로, 어디건 상관없이 유랑하는 자이기에 그런 것을 물으면 창피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무사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떠돌이라는 것이 창피하다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닛타 겐지와 마찬가지로 요시쿠니[義国]가 아시카가 장[足利庄]을 영유하며 그의 둘째 아들 요시야스[義康]가 영유하며 이후 아시카가 씨가 된다. 사족으로 닛타와 아시카가 양 쪽의 선조인 요시쿠니는 아시카가 시키부다이후[足利式部大夫]라고 칭한 것을 보면, 닛타와 아시카가 중 적류는 아시카가 인 듯. [본문으로]
  4. 아시카가 씨 3대 당주 요시우지[義氏]가 카마쿠라 중기 미카와의 키라 장[吉良荘]을 하사 받아, 아시카가의 땅을 물려 준 적남 야스우지[足利 泰氏]를 제외한 서장자 나가우지[吉良 長氏 - 사족으로 이 나가우지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선조이다], 셋째 요시츠구[吉良 義継]에게 부터 시작하는 가계. 키라 장은 야하기가와 강[矢作川]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형인 나가우지는 서쪽을 영유하여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를 칭했다. (동생 요시츠구는 처음엔 동쪽인 토우죠우 키라시[東条吉良氏]가 되나 후에 오우슈우[奥州]의 남조 측을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로 가 오우슈우 키라 씨[奥州吉良氏]의 선조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 초기 잠깐 활약하나 몰락). [본문으로]
  5. 후에 나가우지의 손자 미츠요시[吉良 満義] 때 미츠요시와 그의 적남 미츠사다[吉良 満貞]가 무로마치 막부 초반 혼란기에 각지를 전전하여 비운 사이 본거지인 키라의 동쪽을 미츠사다의 동생 타카요시[吉良 尊義]가 횡령하여 토우죠우 키라 씨[東条吉良氏]가 성립. 후에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이 토우죠우 키라 씨의 5대 당주 키라 요시후지[吉良 義藤]가 동족이며 예전 종가집인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와 싸우다 전사. 그 뒤를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5대 당주 나가치카[松平 長親 - 이에야스의 고조부가 된다]의 셋째 아들 마츠다이라 요시하루[松平 義春]가 잇고 이때부터 토우죠우 마츠다이라 씨[東条松平氏]가 된다. [본문으로]
  6. 센고쿠 시대 키라 씨는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양 가문은 키라 요시야스[吉良 義安] 때 합병. 요시야스의 부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 또한 요시야스는 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포로가 되어 있던 시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만나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7. 1830~1844년 사이. [본문으로]
  8. 이 말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가 한 말을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어떤 놈(이케다 마츠노스케[池田 松之介])가 이에야스의 글을 흉내 낸 것을 또 딴 놈(타카하시 테이슈우[高橋 泥舟])가 각지의 이에야스 사당[東照宮]에 바친 것이라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9.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10. 혼간지[本願寺]의 종파인 쟁토진종(浄土真宗)의 별칭. [본문으로]
  11. 海道一の弓取り. [본문으로]
  12.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살해한 사건. [본문으로]
  13.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본문으로]
  14. 중국 북송(北宋) 휘종 대에 만들어진 중국의 의약서.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죽기 전 이에야스는 이 만병원에 굉장히 의지하였다. 이에야스의 전의(典醫)인 카타야마 소우테츠[片山 宗哲]가 말리자 신경질내며 그를 시나노[信濃]의 타카시마[高島]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까지는 토쿠가와의 부하가 아니었던 가문. [본문으로]
  17.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한 1590년의 전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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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19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왠만큼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승려가 마쓰다이라가의 선조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정설이 아니라 그냥 추측 중에 하나라는 것과 50세부터 비만이라는건 원래부터 비만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인 듯.
    이 양반도 보면 만만찮은 간웅인데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생애가 격렬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뭍히는 듯 그러고 보면 불같다고 생각하는 노부나가도 여자(네네에게 보낸 편지) 자상한 면이 있는 한편 느긋하다고 생각하는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당시 제장들에게 열라게 편지써보낸 것과 같은 것이겠죠. 소하찌씨는 저런 이에야스를 어떻게 그럴듯 하게 미화를 잘 시켰을까나. -_-;
    떡에 관한 일화는 아는데 저 그림을 본건 처음입니다. 어째 우리나라의 솥단지 얘기가 생각나는건......

    즐거운 한주 되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야마오카 선생의 소설의 영향이 큰 듯 합니다. 그런 인물은 다시 찾기도 힘들 정도로 성인군자로 나왔을 정도다 보니.

      개인적으로 그 소설 초반의 노부나가는 정말 멋진 듯 합니다.

      우리나라의 솥단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비슷한 이야기 인가요?

      흰꿈님도 좋은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2. 나라 2009.10.19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궁금한게 생겼는데... 저 일본식으로 중간에 머리 깎는 습관은 언제 생긴 건가요?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마가와[山川] 출판사의 일본사 사전에 따르면 중세(카마쿠라 시대~센고쿠 시대) 귀족부터 시작되었다고 나오며, 일본 위키 해당항목[さかやき]를 보면 1176년에 그 기록이 보인다고 하네요.(즉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날뛰기 몇 십년 전부터 나왔다는 말입죠)

      생성 초반엔 전쟁터에서 투구를 쓸 때 후끈거리고 답답한 것을 막기 위해서 했는가 봅니다만, 나중엔 무가의 일상 생활에서도 하게 되어, 특히 무가에서는 성인식 때 이발역[理髪役]을 맡은 사람이 머리를 밀고나 잘라 줌으로써 아이에서 성인이 되었음을 외견 상으로도 알 수 있게 됩죠.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19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떡 치는 (...이라고 하니 어감이 요상하군요;;) 얘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림에 미츠히데도 들어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처음 보기도 하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론 꽤 유명한 그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어쩐지 그래서 미디어위키에도 없었군요.(즉 저 그림은 와세다 전자 도서관에서 무단으로 다운 받은 것! 우하하하)

      그러고 보니 몇 달전에 떡집 사장이 수 십명의 여성들을 농락했다고 자극적인 제목을 달던 몇몇이 떠오르는군요.
      (떡집사장이 떡은 안치고 떡을...이라는 식으로 ^^)

  4. 나라 2009.10.20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소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5. ckyup 2009.10.20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대망에서의 너구리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상식이 되었나 봅니다 - 무조건 대의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성인군자..... 좋은글 또 감사합니다, 몰랐던걸 알게되었군요. 떡반죽하는 히데요시 그림이 참 재밌네요. 물론 또 대망 이야기지만..., 삼국지와 비교해보면 삼국지의 주군들은 거의 모사나 군사들의 머리에 의지하는면이 많지만, 대망에서보면 가장 똑똑한 군사도 주군들의 머리를 따르지 못하더군요, 특히 히데요시. 그리고 대망이 뻥이 덜 심해요 - 군사숫자에서 비교해보면 확실하죠, 삼국지는 갑자기 급하게 정찰나가도 한 5천 끌고 나가죠.

    암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연재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이미지가 가장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동물도 태어나서 처음 본 생물을 어미로 여긴다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망과 삼국지의 차이는 작자의 인식 차이라 생각합니다. 재미를 느끼게 하는 곳을 대규모 군사 움직임에서 찾느냐 인물의 심리에 중저을 두느냐의 차이 아닐까요?

      정찰나가도 오천...^^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순간 박장대소하였습니다.

  6. 맹꽁이서당 2009.10.21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너구리 영감이군요. [삼국지 연의]가 수많은 독자들에게 촉한정통론을 심었듯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위나 오에도 관심이 가긴 하지만, 맘 깊은 곳에서는 역시..) [대망]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노부나가나 히데요시가 평화를 정착시켰으면 이에야스는 역사속에서 다테 마사무네 정도의 위상이 아니었을까, 아님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정도 나이(세키가하라 직전?)에 죽었다면 전국시대가 더 이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나이 먹으면서 조조 쪽으로 옮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제갈량에 대한 동경은 지워지질 않더군요(유비는 많이 인식이 변했지만요)

      노부나가가 살아서 천하통일 했을 시에는...음... 개인적으로는 오다 가문 휘하의 무장들이 너무 쟁쟁해서 이에야스가 나올 자리나 있었을지...뭐 IF의 이야기는 각자 다들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이거다..라고 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야스가 죽더라도 그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마에다 토시이에 혹은 모우리 테루모토 정도가 이에야스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7.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0.21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천하인이 있는가 하면, 저런 천하인도 있고.
    천하를 얻기 위한 사람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뭐 천하만 손에 넣으면 조상 바꾸기야 쉬울테니까요. 사람들이 믿건 안 믿건 대놓고 반론을 하지는 못할테니까요.

  8. Favicon of http://liquer.tistory.com BlogIcon 2009.10.21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사이언스 채널에서 [전사]란 제목으로 이에야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주더군요. 이에야스가 딱히 나쁘진 않게 나오는데 결말이 좀 씁쓸했던것도 같습니다. '미츠나리는 죽고 히데요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죽고 이에야스의 가문은 250년간 일본을 지배했다.' 식으로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 사이언스 채널에서도 그런 것을 하나 보군요. 뜬금없겠지만 히스토리 채널 없애버린 중앙일보에게 갑자기 분노가 이는군요. ^^;

      이에야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겠지!!..하고 말하고 싶군요. ^^ 뭐 일본 사람들도 쇼우군 가문[将軍家]와 섭정가문[摂家]의 상하구별을 못하는 사람들 많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듯.

  9. shotokanfist 2009.10.25 15: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전사라는 프로그램을 문장으로 정리해서 동명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누가 책을 줘서 읽어봤습니다만, 번역상의 오류가 많았는지 (설마 원저자가...) 기본적인 연도나 인명, 사실관계에 오류가 많아서 읽으면서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프로그램 자체는 호평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못봤는데, 평이 좋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6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검색해 보니....
      전사들(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전사들의'이기는 기술') Heroes and villains

      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것인가 보군요.... 설명에 인문경영서다...라는 부분이, 좀 슬프게 느껴지는 군요. 그냥 인문서라고 해도 될 것을 꼭 경영서라는 부분을 붙여야 한다는 점이 조금 아쉽군요.

      이야~ 어쩌면 윌리엄 아담스의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숨기진 역사를 쓴 것일 수도...(물론 그럴리 없겠지만요 ^^ )

十.

 이에야스(家康)도 요도도노(淀殿)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그녀가 성질이라도 부려 히데요리(秀)를 내세워서는 또다시 옛 토요토미(豊臣)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규합이라도 한다면 곧바로 천하에 난이 일어나 이에야스가 어렵사리 손에 넣은 천하가 주먹에서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ヶ原)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일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등은 이에야스에게 각각 50만석 전후의 봉토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히데요리의 가신이기도 하다는 이중적인 입장을 지키며 틈만 나면 오오사카성(大坂城 )에 가 히데요리를 배알하고 인사를 올렸다. 만약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가혹하게 대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에도(江)에 있으면서도 토요토미 가문의 필두 대로라는 자격으로 천하에 임했다. 세키가하라부터 2년 뒤인 1602년 2월 14일에 재차 오오사카에 나타났고, 다음 해 3월 14일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평소 문안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이제서야 신년인사를 올리옵니다"

 라고 말하였다. 3월 중순이 되어서야 신년인사를 하는 것도 묘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가신으로써의 예를 취하였고 취함에 따라 카토우 키요마사 등 옛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감정을 진정시켰다. 다음 해 1603년의 배알을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오오사카에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제서야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한때 일본을 지배한 강성했던 이름을 잊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오오사카 성 밑도 쇠퇴하였고 대신해서 에도가 번창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도 에도에 저택을 세워서는 자신들의 처자식을 자발적으로 에도에서 살게 하는 식으로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바쳤다. 카토우 키요마사 조차 – 라기보다 오히려 키요마사가 앞장서 미야케자카(三宅坂) 고개 위에 집터[각주:1]를 달라고 해서는 황금을 여기저기 처바른 저택을 만들어 처와 자식을 살게 하였다. 이제 에도 정권에 거역하지 않겠다는 증거를 이에야스와 천하에 공언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키요마사를 따라 다른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들도 그리하였다. 이에야스는,
 - 이제 오오사카에 새해 인사할 필요가 없겠군
 하고 생각하여 오오사카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히데요리는 힘을 상실했다.
 하지만 관위만큼은 남다르게 승진했다. 승진하는 것이 당연했다. 토요토미 가문이 가진 봉토의 규모야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다이묘우와 다른 점은 부친 히데요시나 히데요리에게는 형 뻘인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츠구(秀次)가 칸파쿠(
白)에 임명 받은 것처럼 귀족(公家)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런 점은 다섯 셋케(五家-섭정, 칸파쿠가 될 수 있는 문벌)인 코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쿠죠우(九), 니죠우(二), 이치죠우(一条)와 다를 바 없었다. 히데요리는 소년이었지만 1601년에 종이위(從二位) 다이나곤(大納言)에 임명 받았으며, 1603년에 나이다이진(内大臣)이 되었다. 10살의 어린 나이다이진은 과거를 찾아보아도 드물 것이다.
 나이다이진 정도 되면 조정 백관의 총수라고 말해도 좋았다. 이 때문에 쿄우토(京都) 조정은 오오사카에 마땅한 예를 치렀다. 신년이라도 되면 친왕(親王), 상급귀족(公卿) 등이 오오사카로 대거 내려와, 성내에 있는 건물에서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이 토요토미 성(姓) 2대째인 귀인(貴人)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런 점에서만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만이 신년인사 하러 오는 것을 그만둔 이유, 더불어 상기와 같은 이유가 있음에도 그만 둔 더 큰 이유는 - 이 해에 이에야스가 조정에 주청하여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에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은 아주 옛날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
[각주: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각주:3]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겐지(源氏)가 아니면 임명 받지 못한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각주:4]도 겐지였기에 임명되었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도 토키 겐지(土岐 源氏)를 칭하였기에 임명 받았다[각주:5].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 시대에 본성(本姓)을 공개적으로 칭하지 않았으며 한때 헤이시(平氏)를 칭했기 때문에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주청하여 조정이 만들어 준 성(姓)을 받는(朝臣) 형식으로 토요토미(豊臣)를 하사 받아서는 귀족(公家)이 되었고 칸파쿠()라는 자격으로 일본을 통치하였다. 이에야스도 처음엔 겐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信長)와 동맹을 맺고 있던 시절에 조정에 청하여 겐지 공칭을 허락 받았다[각주:6]. 다행스럽게도 이로 인해 쇼우군 가문(軍家)에 임명되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의 최대 특전은 바쿠후(幕府)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쟁 후 이어지고 있던 에도의 비합법적 정부를 바쿠후 창설로 인해 정당화 할 수 있었으며 그런 합법성을 갖고 다이묘우를 거느리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형식상이나마 머리를 굽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지 이미 3년이 지난 상태였다.

 이 소식은 곧바로 오오사카에 전해져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을 놀라게 하였다.

 "가신 주제에 바쿠후를 연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바쿠후를 연 이상 이젠 정권을 토요토미 가문에게 반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아닌가?
 이때도 요도도노는 카타기리 카츠모토(
片桐 且元)를 불러 마치 카츠모토가 이에야스인 마냥 힐문했다.

 "자네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하고 요도도노는 숨을 거칠게 하며 책망하였다. 카츠모토는 즉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후 자기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남몰래 바라고 있던 것을 흡사 이에야스의 머리 속 생각인양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쇼우군() 직은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그 후에는 히데요리님께 물려주실 생각이옵니다"

 이 시기 에도에서 자기 영지(領地)인 히로시마(広島)로 돌아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오오사카에 들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배알하여 비슷한 말을 하였다.

 "잠시 동안만 참으시면 되옵니다"

 라는 것이었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는 1543년 호랑이띠로 이미 노령이다. 그와 반대로 나이다이진(内大事=히데요리)님은 어린 나무가 쭉쭉 자라듯이 커가며, 커갈수록 이에야스가 죽음에 가까워진다. 이에야스가 죽으면 졸자(拙者)를 시작으로 한 천하의 제후들은 더 이상 토쿠가와 가문에 세울 의리가 없어진다. 토쿠가와 가문 자체도 이에야스를 잃으면 지금과 같은 강한 전투력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옵니다. 초조해하지 말고 난을 일으킬 생각하는 일 없이 일단 에도의 지시를 따르시길. 언젠가 때가 오면 아무리 토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반환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활과 칼을 들고 토요토미 가문으로 되찾아 오겠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그리 하겠사옵니다"

 하고 마사노리는 힘주어 말했다.

 이 너무도 듬직한 말에는 안심이 되는 한편 아무리 요도도노라도 걱정도 되었다.

 "사에몬다유우(左衛門太夫=마사노리)님. 그러한 말씀하셔서 행여라도 에도(江戸)로 그 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하고 이 귀부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남을 걱정하였다. 마사노리는 그것만으로도 감동하여 눈물을 머금고,

 "고맙사옵니다"

 라며 목소리를 적셨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쳐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듣더라도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원래 에도님(江戸殿=이에야스)에게 있어 저는 은인이옵니다. 저 세키가하라 때 제가 미츠나리(三成)를 미워한 나머지 에도님에게 가담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제후들은 앞다투어 에도님을 따른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했다. 선대 히데요시와 친척인 자[각주:7]로, 그 때문에 토요토미 다이묘우 중에서는 키요마사와 더불어 후다이(譜代)[각주:8] 필두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세키가하라 즈음에는 그런 마사노리조차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였기에 다른 다이묘우들도 거리낌없이 오오사카 측을 물리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시기의 이에야스에게 있어 마사노리의 정략적 가치는 그만큼 거대한 것으로 그러한 자신의 가치를 마사노리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마사노리는 이에야스 측의 선봉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서 용맹한 활약을 벌여 서군을 무너뜨렸다. 어쨌든 마사노리가 이에야스에게 기여한 것은 누구보다도 컸다. 거기에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이전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에야스 편에 서라고 권유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에게 마사노리는,

 "에도님을 돕기는 하겠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츠나리(三成)에 대한 원한 때문일세. 이 전투에서 에도님이 이긴 후 결코 히데요리님의 신상에 지장이 없도록 에도님의 입으로 확약을 듣고 싶네"

 라고 말하여 이에야스는 나가마사를 통하여,

 "그러한 일은 없다"

 라는 뜻의 말을 받았다. 그런 후쿠시마 사에몬다유우이기에 가령 이 말이 칸토우(関東)에 전해지더라도 이에야스는 퉁퉁거리지도 못할 터이다 – 라고 말하였다. 요도도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러나 에도의 이에야스는 마사노리 정도의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가볍게 쇼우군 직을 사퇴한 것이다. 취임한지 2년 후인 1605년의 4월이었다. 그런데 그 사임한 그날 조정에 주청하여 쇼우군 직을 적자 히데타다(
秀忠)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지배권을 세습시켰다. 이 소식만큼이나 오오사카를 낙담시키고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단을 분개시킨 것은 없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쇼우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줌으로써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이때 히데요리는 13살로 관위는 우다이진(右大臣)에 임명된 상태였다. 앞으로 승진한다면 칸파쿠밖에 없었으며 칸파쿠가 되면 죽은 아비 히데요시의 선례를 따라 한편으론 백관을 거느리고 조정의 중심에 서며 한편으론 이백여 제후들을 이끌며 천하의 정치를 총괄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 이래 무가(武家)의 통솔자로 여겨지는 세이이타이쇼우군과 당연하게도 충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 현재 일본의 헌정기념관. '미야케자카 고개(三宅坂)'라는 이름은 시간이 흘러 17세기 중반에 미야케 가문(三宅家) 참근교대시에 이용하는 에도저택이 생기면서부터 생긴 이름으로 당시는 ...뭐라고 불렸는지 모르겠음. 데헤~ [본문으로]
  2. 미나모노토 요리토모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5.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미츠히데가 지원을 호소하며 호소카와 유우사이에게 보낸 편지(明智光秀公家譜覚書)에 나타나는 말로 종삼위(従三位)와 쇼우군에 임명받았다고 주장했다. 혼노우지의 변에 있어서의 조정흑막설의 증거로 많이 사용되는 떡밥이지만 개인적으로 당시까지 미츠히데의 관위인 종오위(従五位) 휴우가노카미(日向守)에서 무가로써는 하나의 허들인 사위(四位)를 뛰어넘어 단번에 종삼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빙성은 없다고 생각한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본문으로]
  6. 1566년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그때까지 쓰던 마츠다이라(松平)를 토쿠가와(徳川)로 바꾸면서. 마츠다이라 자체의 본성은 가모(賀茂)인 듯 싶지만 이때부터 본성은 미나모토(源)라고 우겼다. [본문으로]
  7. 마사노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숙모. [본문으로]
  8. 대대로 그 가문을 섬기는 가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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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13 18: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이번에도 시달리는군요(...)뭐 아무리 쪼고 볶은들 뭐 히데요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다이진 위로는 못올라가겠습니다만(ㅎㅎ;)


    히데요리에 대해 또 이글을 읽어 관심이 생겨 위키를 찾아보니, 히데요리의 남자아이들 중에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당한 쿠니마츠 말고도, 求猒上人라는 사람이 겐로쿠 초두에 80세로 죽었을때 낙성시에 3세였던 차남이었다는 설이 있다고 하더군요. 뭐 위키에도 이 대목 말고는 안나오는이니 누구인지는 잘 알수는 없지만;


    P.S. 전혀 관계 없는 사족입니다만 네이버블로그의 머리에 요구르트 핼멧을 쓴 쥐X이가 아주 인상깊었습니다(허허헛)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 보는 이름인지라 검색해 보니...

      [일본의 슬기로운 중들(浄土本朝高僧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

      태어날 때부터 현명하고 설법에도 뛰어난 '큐우엔(求猒)'이라는 고승(上人)이 말년에 후시미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겐로쿠 초반 80세의 나이로 죽었다.

      임종의 자리에서 제자에게 자신은 히데요리의 둘째 아들로 낙성시 3살이었다는 것, 에도에 숨어산 후 조우죠우 사(増上寺 - 에도에 있는 절)에서 학승이 되었다고 고백.

      중년이 되어서 간 오오사카 성의 거대함과 후시미 성터 쓸쓸함을 보고 세태의 흐름에 개탄도 하였지만 말년에는 '천하는 한 사람만의 천하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니들도 망념과 집착을 버리고 세태에 구애 받는 일 없도록 하라'

      ps;일본에 관한 것을 검색하실 때는 야후저팬에서도 꼭 검색해 보시길...일본에 관해서만이라면 구글보단 오히려 더 좋은 검색엔진입죠.

  2. 맹꽁이서당 2009.03.13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쿠시마도 말은 저렇게 했겠지만.. 결국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 측으로 참전한 다이묘는 없었겠죠?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 후쿠시마 편을 찾아보니 1619년까지 살아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신경쓰이는 다이묘우들는 에도성을 지키게 했습니다(에도성을 공격당할 일은 없으니 이름만 다른 억류). 그 중에는 물론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있었고, 그는 오오사카로 와 달라는 히데요리의 친서도 펼쳐 보지 않았고 사자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뭐 설사 억류당하지 않았더라도 오오사카 측에 서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만)

      여담으로...
      에도성에 남겨진 인물 중 가장 이외였던 인물은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라고 합니다. 본문에도 잠깐 언급되듯이 세키가하라에서는 거의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으며 실질 뒤에서 가장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결과가 되었으니까요. 뭐 결국 여름의 전투에는 참가하게 되지만요.

  3.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4 0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제부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이 이것과 비교적 겹치는 부분이 있군요. 언제 한 번 시바 료타로에 대해 알려주시길 부탁드려요 ^^ 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4 0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동시대의 이야기를 그리는 같은 작가의 것이다 보니 비슷할지도...참 저는 아직 그것을 읽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연이 닿으면 읽어 보고 싶군요.

      에...저같은 경우 시바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위키에 실린 거 읽는 정도? 그분의 책도 완독한 것이라곤 '타올라라 검'과 '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 "역사의 교차점에서" 뿐입죠.

  4. 카즈토요 2009.03.20 16: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시바 선생의 작품중에서도 그 방대한 사료의 토대위에 과감한 취사를 통해 극적인 내용들을 빠른 속도로 써내려가고 있어서 정말 빨리 읽히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근대를 결정짓는 극적인 사건의 원인과 전개, 연계된 인물들의 심리, 다양한 성격들의 조화와 갈등이 마치 큰 강이 흐르는 듯 속도감있게 읽혀졌습니다.
    대세앞에서 처세하는 군상들의 세세한 묘사와 여러 유명한 사건들이 주는 재미들도 솔솔하구요.

    다만... 시바 료타로 식의 역사 다루기가 조금 위험해 보일때도 있습니다. 마치 NHK사극을 보듯이 인물과 사건의 묘사가 너무나도 주관적으로 디테일하고 생생한데 이것은 독자가 해당역사에 대해 중도적 관점을 냉정하게 유지하고 있지 않다면 작가의 주관적 픽션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오류의 위험이 크다고 느끼곤 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미있는 책인가 보군요. 시바 선생의 세키가하라.
      틈나면 꼭 읽어 보겠습니다.

      그쵸...
      소설은 소설일 뿐입죠.
      이 10편을 쓰다가 이상한 것이 있어 따로 포스팅하려다 ....귀찮아서요~..못하고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20 19: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 하고 말했는데 불과 2년후에 히데타다가 넘겨 받았으니...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헐 님아...좀..." 싶겠군요(...)
    ...암튼 이번화도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선수끼리인데요..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인지...신경이 쓰이는 인물입니다. 카츠모토는..

  6. 본다충승 2009.05.06 1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구리 니 본성 가모 라며? ㄴㄴ 미나모토임... 우기면 장떙..... -_-;; 몇달 못봤더니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다시 읽고 있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4: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賀茂...는 이에야스의 선조 토쿠아미(徳阿弥)..가 오기 전의 마츠다이라(松平)의 본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이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마츠다이라고우(松平郷)라는 지역의 호족으로 마츠다이라 씨가 있었고 그곳에 떠돌이 중(遊行僧)을 하던 徳阿弥가 마츠다이라 씨의 사위로 들어가서 마츠다이라 치카우지(松平 親氏)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이옵죠.

      본문의 주석을 달 때만 해도 저는 미카와 통일 후 겐지(源氏)를 칭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요즘 새로 읽은 책(신 역사군상 12. 토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토쿠가와(徳川)란 성을 처음 칭했을 때만 해도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썼고, 후년 쇼우군(将軍)이 되고 나서야 그때부터 겐지(源氏)를 칭했다고 하는군요.

.

 

 이 날을 계기로 미야[]의 신상에 변화가 일어나려 하였다.

 그날 저녁. 미야가 있는 카쥬우지 가문[修寺家]에 우다이진[右大臣] 이마데가와(키쿠테이) 하루스에[今出川(菊亭) 晴季]가 부산을 떨며 방문해 온 것이다. 하루스에는 후지와라[藤原] 상급귀족[公卿]의 가문 중에서는 최상급의 명사(名士)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와 친교가 있었기에, 지금은 히데요시의 궁정정치를 위한 개인 고문과 같은 역할을 하며 큰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카쥬우지 가문에서는 당주인 하루토요[晴豊]가 응접했다. 미야의 외숙부이다.

 

 로쿠노미야()에 관해서요

 

 하고 하루스에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쿠노미야라는 것은 미야의 통칭이었다[각주:1].

 

 칸파쿠[=히데요시] 전하가 바라시길, 미야를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양자로 들이고 싶어 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야는 황족이 아닌가? 신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혈통도 수상한 히데요시 같은 놈에게……’

 그리 생각하여 침묵을 지켰다 참고로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미야의 생모 신죠우토우몬인 하루코[新上東門院 晴子]의 친동생이며, 또한 미야의 메노토[傅人]를 겸하고 있었다. 메노토는 신하이면서 부친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 이 양자에 대한 건은 이미 텐노우[天皇]의 내락을 얻은 상태다. 단지 카쥬우지 가문의 의향을 듣게 - 라는 말씀이외다, 라고 하였다.

 

 “……”

 

 하루토요는 생각했다. 세간이 모두 아는 것처럼 히데요시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 때문에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들인다는 소문도 하루토요는 들었었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의 성격이 경솔한 것 때문에 히데요시는 주저하고 있다고도 들었다. 그것은 그걸로 좋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 내의 사정이며,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일로 치부하고 있었다.

 

 우선 들어보시길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히데요시 공()은 이번에 칙명에 따라 토요토미 씨[豊臣]를 창설하였다. 그렇다면 토요토미 씨는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각주:2]라는 사성(四姓)과 더불어 일본 가문의 명문가가 되어 앞으로도 번영할 것이다. 그 명성을 이을만한 자는 히데요시 공에게 자식이 없는 이상 역시 존귀한 피를 가진 인물이 바람직하다. 그렇기에 로쿠노미야야말로 최적이오. 장래 천하의 권세는 이 로쿠노미야가 물려받게 되실 것이외다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하는 것이었다.

 

 어떠하시오?”

 

 잠시만!”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당황했다. 잠시…… 이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생각해 보자. 로쿠노미야는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며, 친왕(親王)에 임명 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버젓한 황족이다. 더구나 미야는 부친인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 , 형인 이치노미야[(카네히토(周仁)][각주:3]에 이은 세번째 황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어, 상기의 두 분에게 만약의 일이라도 있을 시에는 텐노우[天皇]가 되실 분이다. 그런 분께서 씨()도 없고 혈통도 수상한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에서 밭 메던 백성의 자식을 부친으로 받드시고, 그의 양자가 되어도 괜찮을 것일까? 그러한 예가 일본이 만들어진 이후 있었던 적이 없다. 귀족이란 피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생명인 것이다.

 

 전례(典例), 고사(故事)가 없습니다

 

 고 하루토요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였고, 거기에 그것을 말하려고 하자,

 

 알고 있소이다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앞질러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시대이다. 전례 같은 것을 지금과 같은 시기에 말하여도 소용이 없다. 실제로 현재 토요토미 씨()라는 성()이 창립되었다. 칙명에 따라 성씨가 창립된 것은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가 시작된 이래 천 년간 없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전부 신례(新例)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을 미래의 옛 것으로 만든다. 전례 같은 것보다 그것을 잘 생각하시길 하고 하루스에는 말했다.

 

 어떠하신지? 저는 그리 생각하오만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반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안 하시는 것인지?”

 

 이 남자에게는 못 당하겠군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생각했다. 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히데요시가 쿄우토(京都)를 제압한 이래, 그를 위해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관위승진은 모두 이 하루스에가 알선해 왔다는 것을 하루토요도 알고 있었다. 막대기와 같이 가는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굉장한 책사(策士)였다.

 

 그 시기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히데요시는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를 필요로 했다. 히데요시에게는 약점이 있어 그 약점이란 당연하게도 출신의 비천함이었다. 히데요시는 처음에 막부(幕府)를 열고자 하였다. 바쿠후를 열기 위해서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代軍]이 아니면 안 되었다. 하지만 겐지[源氏]가 아니면 세이이타이쇼우군에 임명 받지 못하였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朝]는 겐지의 종손이며,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도 그러했다. 이것이 궁정의 고사(故事)이며, 고사는 궁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법률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겐지가 아니었다.[각주:4]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겐지의 성()을 얻고자 하여, 아키[安芸]유우(流寓)하고 있던 전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게 청하여 그 양자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겐지의 종손인 요시아키는 혈통이 비천한 피로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아 받아들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당혹했다. 그 히데요시를 구하여 준 것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였다.

 - 쇼우군[軍]이 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칸파쿠[白]가 되시길.

 하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칸파쿠는 신하 중 최고의 직책이며, 그 자격으로 천하의 권세를 쥐면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어 바쿠후를 열 필요가 없었다. 칸파쿠로 충분하다, 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단지 칸파쿠는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것이 천 년의 고사(故事)이며, 다른 성() – 미나모토[源]도 타이라[平]도 타치바나[橘]도 칸파쿠가 되지 못하였고, 된 예도 없었다.

 더구나 씨()도 성()도 가지지 못한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는 옛 주인 노부나가[信長]를 흉내 내어 지금까지 헤이시[氏]라고 사칭한 적은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그것에 임명 받을 자격이 없었다.

 - 아니오이다. 간단한 일이외다. 코노에 가문[近衛家]의 양자가 되시길. 그걸로 이제 자네는 후지와라 씨[藤原氏]일세.

 하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하루스에는 후지와라 씨의 장손인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승낙을 처음부터 얻고 있었다. 그것을 말하자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여 바로 그날로 코노에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그날 중으로 하루스에를 통하여,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 秀吉]

 라는 이름으로 칸파쿠에 임명 받을 수 있도록 주청하였다. 현 텐노우[天皇]인 오오기마치[正親町]는 역시 난색을 표했다.

 히데요시가 후지와라 씨가 아님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속이 뻔히 보이는 속임수는 바람직하지 않다 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가진 현재의 실력이 조정의 뜻을 눌러 결국 주청대로 칸파쿠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 후에 후지와라 씨의 적()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성()인 토요토미 씨를 공칭했다. 상기는 작년 1585 9 13일이다. 히데요시가 귀족이 되는 단계도, 궁정이었기에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상급귀족[公卿]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내막을 물론 들어 알고 있었다. 모두 남일이라 생각하여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과 관련이 되었다. 이로운 일은 무엇이고 해로운 일은 무엇일까?

 로쿠노미야를 양자로 하고 싶다는 일건. 필시 히데요시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가 불어넣은 생각일 것이다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하루스에를 노려보았다. 이 하루스에는 히데요시를 칸파쿠로 만든 공으로 작년 종일위(從一位) 우다이진[右大臣]까지 승진해있었다.

 

 자네도 출세에 신경을 쓰시게

 

 라는 의미의 말을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로쿠노미야가 토요토미 가문에 들어가 장래 천하의 지배자가 된다면 조정에서 당신의 출세는 뜻대로이며, 카쥬우지 가문의 명예를 크게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책모가는 말하는 것이었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일단 방을 벗어나, 미야[宮]의 모친인 하루코[晴子]와도 상담했다. 하루코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카쥬우지 가문에게 있어 바라 마지않던 일이 아니옵니까?”

 

 하고 즉좌에서 말했다. 하루토요는 그로 인해 결심을 굳히고, 의관을 정갈히 한 후 다시 객관(書院)에 입실했다.

  

 이미

 

 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주상께서 그런 의향이 있다고 하시는 이상, 메노토[傅人]로서 올릴 말씀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야[]에게 있어서도 행복한 일로 축하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고 하루토요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칸파쿠 전하는 로쿠노미야를 아시고는 계십니까?

 

 이런~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 없소

 

 하고 하루스에는 손을 흔들었다.

 

 이미 오늘 대면이 있었소이다

 

 하고 약간 득의만만하게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이도 이 책사가 차려놓은 밥상 같았다. 오늘 히데요시는 코고쇼(小御所)황금다실을 가져왔었다. 그때 텐노우[天皇]가 코고쇼로 발길을 옮겼는데 수행한 사람 중에 하나로, 아이의 헤어스타일(童形)인 채로 로쿠노미야가 함께 했었다.

 

 칸파쿠 전하는 미야를 보시고 후에 굉장히 기쁘신 것 같았소

 

 이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일이군요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끄덕였다. 히데요시의 만족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로쿠노미야의 수려한 용모는 궁정에서도 비할 데 없었다. 거기에 자질에 보통이 아니어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 등은 주제넘은 말입니다만 신동(神童)이십니다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미야는 한학(漢學)보다 일본학(和學)을 좋아하여, 이미 열살 때 옛 시집(古今集) 전부를 읽었으며, 또한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를 해석하고 비평할 정도의 영역에 달해있었다. 하루토요가 생각하기에, 히데요시가 어디서 무엇을 해서 찾더라도 이 정도로 존귀하고 이 정도로 풍부한 자질을 가진 양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1. 하치죠우노미야가 황자 중 여섯(六)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일본역사 속에서 번영했던 네 개의 씨(氏). 각각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3. 다음 대의 텐노우[天皇]인 고요우제이(後陽成]. [본문으로]
  4. 겐지[源氏]만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헤이시[平氏]를 칭하던 노부나가의 경우 조정에서 칸파쿠[関白],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중 아무 거나 하나 되라는 말을 들었다.(三職推任問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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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9.05 06: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인물의 인생은 또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5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일찍일찍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울러 너무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07 1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유우사이가 빈말할 사람은 아니니... (뭐 직전신장전에서는 시류에 영합하는 인물 비슷하게 그려놨습니다마는-_-;) 상당히 실력이 있는 사람이겠군요.

    마침 후지와라씨가 나와서 생각난 말인데, 고셋케 밑의 세이가케(淸華家)의 하나인 사이온지가의 긴모치씨의 증손에 대해 어제 가쿠슈인 담당자와 얘기하다가 알게 됐다죠. 자신이 가쿠슈인 다닐때 1년 선배였다면서 이래저래 알게 된걸 얘기하던데 왠지 역사의 흔적과 간접적이나마 맞닿는 느낌이었던지라 느낌이 참..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12 0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우사이는 당시 그 계통의 짱이라고들 하니... 여담이지만 만능의 무장 우지사토도 유우사이에게 핀잔을 먹고 오히려 나중에 그 핀잔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유우사이를 한 층 더 존경하여 풍류의 세계를 배웠다고 하더군요.

    과연... 근데 학습원에 유학가시는 것입니까!? 나중에 잘 되시면 저 알죠? 데헤~ ^^

    제가 만난 역사적 인물 자손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은... 다테 마사무네의 후손...이 가장 높군요. 18대 당주를 자칭하였는데...이게 또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정식으로 인정을 못 받는 것이라 뭐라고 말할 수 없더군요.


 그야말로 이색의 쇼우군[軍]이었다.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게 비기 [히토츠노타치(太刀)]를 전수받았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전란 다발하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자기단련이었다. 1546년에 쇼우군[軍]이 되면서부터 요시테루에게는 하루라도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요시테루 치세인 1546년부터 1565년에 이르는 20년간은 중세의 암흑기에서 근세의 여명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였다. 일본에 온 하비에르[각주:1]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노부나가[信長]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쓰러뜨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격동기의 고뇌를 요시테루는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친 요시하루[義晴]와 함께 전란의 쿄우[京]에서 피신하여 오우미[近江]에 있었던 요시테루는, 쇼우군[軍]이 되어 쿄우[]로 돌아와서도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의 다툼에 휘말려, 부평초[浮萍草]처럼 양 세력 사이를 떠도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오우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 그러나 결국 미요시 쵸우케이의 실력에 굴복하여 미요시 체제에 옹립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때가 1558 11.

 쿄우()로 돌아온 요시테루는 이것이 정말로 기뻤던 듯, 어소[御所][각주:2]의 마당에 서서는 밤하늘을 향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이 즈음, 그제서야 칸파쿠[白]였던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친인 케이쥬인[寿院]이 오랫동안 권해왔던 이야기였다. 요시테루의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 준다.[각주:3]


 미요시 쵸우케이가 죽자, 요시테루는 지금이야말로 막부(幕府)의 실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붕고[豊後]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나,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등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쇼우군의 의도는 죽은 쵸우케이의 모신(謀臣)이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義栄][각주:4]를 새로이 쇼우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간파하기에 이른다. 히사히데는 같은 쵸우케이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과 상담한 후 선수를 쳐 요시테루의 어소(御所)를 습격하기로 한다.

 

 1565 5 19.

 때는 장마의 계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마츠나가, 미요시 군세는 갓과 우비를 입고서, 키요미즈 사[寺]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쿄우[京]로 올라가고 있었다.

 히사히데는 밤이 되기 직전에 일부러 어느 소송(訴訟)에 대한 서장을 어소에 제출했다. 응답에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노림수였다. 그 사이에 히사히데의 무리들은 어둠에 섞여 어소 안으로 잠입하여 마루나 복도 밑에 몸을 숨겼다.

 

 갑자기 함성이 울려 퍼졌다. 궐기의 신호였다. 어소에는 사무를 보는 몇몇 외에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명확해지자, 검호 쇼우군답게 각오를 정하여 금생의 이별 주연(酒宴)을 열었다. 호소카와 타카요시[細川 隆是]가 여관(女官)코소데[小袖]를 뒤집어 쓰고 춤을 추었다.

 이때 요시테루는, 그 코소데 위에 사세구(辭世)의 시를 적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내 이름을 알려라 구름 위에까지

五月雨は露かかほととぎす

わが名をあげて雲の上まで

 그때부터 요시테루의 활약은 눈부셔 몇 자루나 되는 칼을 마루에 꼽고서는 날이 무뎌지면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달려드는 적을 마구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다. 한 적병이 문틈에서 창으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 요시테루는 넘어졌다. 거기에 적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장지문으로 몸을 누르고는 그 위에서 창으로 내리 찔렀다. 그때 불길이 한꺼번에 번져 요시테루의 목을 베지 못한 채, 건물은 화재로 무너져버렸다고 한다.(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

1536년생. 첫 이름은 요시후지[義藤].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아들. 1546년 아시카가 제 13대 쇼우군이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를 칸레이[管領=쇼우군의 보좌역]로 임명 하였지만,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 氏綱],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등이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미요시 측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바쿠후의 실권은 쵸우케이가 쥐게 된다. 쵸우케이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서 정권탈환을 기도하지만 히사히데 등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1565년 당시 아직 30살이었다.
  1. 일본에서는 ‘자비에르[ザビエル]’ 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높은 귀인의 거처 겸 정무소.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요시테루의 모친 ‘케이쥬인’은 장인인 ‘코노에 타네이에’의 여동생이다. 즉 요시테루는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본문으로]
  4. 아시카가 바쿠후 14대 쇼우군, 요시테루와는 할아버지가 같은 사촌지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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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6.24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생각하는 사나다 노부시게와 더불어 사나이의 로망 중에 한사람이라고 취급받는 그 사람이네요. 원래 단기필마로 다수와 맞짱뜨기는 영원 불멸의 로망이랄까요 (먼산-_-)
    그러고 보니 고노에 가문이 어떻게 된지 궁금하군요. 아마 1600년대 당시 얼마 못가 단절 된걸로 아는데 찾아봐야겠네요. 마법선생 네기마보는 중에 코노에 코노카 보다가 이거 보니 갑자기 떠오른 물음 ^^
    요즘 전기공사실기 땜에 죽겠네요. 완전 삽질 ㅠㅠ 더운 여름입니다. 잘 보내세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플레쉬 오버덕분에 추한꼴을 면했군요(;; 노부나가도 그 덕을 봤더랬던;;;) 뭐 생각해보면 하늘에도 눈이 있어 히사히데 어르신도 염상에서 녹아나버리지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정말 막말의 간지쇼군(ㅋㅋㅋ) 어느 막부의 말에도 이런 쇼군은 없었다(!)랄까요.. 그런데 서른에 죽은 사람치고는 너무 삭아보이는군요(;;젊을적 고생이 심해서 그런겐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세구를 읽다보니 호토토기스를 번역을 빠뜨리신 듯 하네요. 위키에는不如&amp;#24112;라 적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촉의 망제의 설화를 떠올리게 하려 하지 않았으려나 싶네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로유메님//저도 갑자기 궁금해 져서 찾아보니 지금도 코노에 가는 있는 것 같습니다. http://ja.wikipedia.org/wiki/%E8%BF%91%E8%A1%9B%E5%AE%B6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5 1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로유메님//노부타다도 꽤나 멋있었다고 하더군요.
    제일 앞에 서서 정면 돌격하여 몰려드는 아케치의 잡병을 단번에 20명 가까이 벤 노부타다의 옆에 있던 근시에게 한 말...
    [용감하도다! 이번 생에서는 은상을 줄 수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은상을 내리마]... 라는 말이 있더군요.
    코노에 가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죠. 예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amp;#29013;)의 외갓집이 코노에 가문이죠.
    전기 공사 실기. 무운을 빌겠습니다.

    다메엣찌님//플레쉬 오버?? 뭐죠 그건?? ^^; 저는 노부나가도 나름 멋지게 싸웠다고 생각하지만요 ^^.
    네덜란드의 로번(로벤)이라던가, 맨유의 전설 바비 찰튼의 10대 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젊은 편...
    참... 전 시쪽은 딸려서 그러는데, 그 호토토기스...는 번역할 때 집어 넣어야 하는 것인가요?
    형식의 하나다 보니 빼도 될 것 같아서 뺐습니다만...

    고사천사님//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 워낙 명문가다보니 단절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6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토토기스는 불여귀(두견새)를 의미하는 말인데 여기서 그냥 제 생각에 두견새전설(촉 망제가 부하에게 쫓겨나서 피를 토하며 죽었더라..)을 떠올리고 요시테루가 읊은게 아니었나 싶어서요.

    그나저나 그 난국에서도 살아 도망간 사람이 있었으니 저런 멋진 사세구가 남았지.. 그런 의미에서 혁신 켜서 한번 참수시켜봐야겠습니다(쿨럭;)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6 09: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플레쉬 오버는 제가 이쪽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론으로 설명하긴 힘든데.. 공장 화재 때 현장에서 한번 봤는데 잘 타던 건물이 한쪽 격벽 부서지니까 엄청난 불길이 바로 그쪽 격벽의 연소 가능한 산소를 태우러 몰려가더(..;)군요.

    불 났을때 엘리베이터 타지 말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엘리베이터에는 불이 좋아하는 맛있는(;) 산소가 가득 차 있는 상태기 때문에.. 신나게 내려가다 화재층에서 멈춰서 문 틈이 열리기라도 하면 그 사이로 엄청난 불길이 화르르르..들어와 버리거나 하는 일 때문에(;;)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6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군요.(좋은 거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근데 [鳴かぬなら殺してしまえ、ホトトギス]라는 말과 같이 왠지 형식적으로 집어 넣은 듯 해서 두견새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플레쉬 오버란 것이 그런 것이었군요!!! 이 또한 좋은 지식 감사드립니다.
    (전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기법 중의 하나를 말씀하시나 해서 착각했습니다. ^^; 그래서 노부나가 운운해 버렸구요...그러고보니 비오는 날의 혼노지도 그렇게 불타오른 것을 보면 거기도 비슷했나 봅니다)

. 

 하지만 20년이 지났다.
 
마치 하늘나라에 사는 것처럼 모든 환경도, 운명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을 계승하여 천하의 중앙부를 얻고, 쿄우[]를 발 밑에 두었으며, 오오사카[大坂]에 본거지를 두어 오나카[仲]는 그 성에서 수많은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치쿠아미[竹阿弥]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은 사지 휴우가노카미[佐治 日向守]라는 하시바 정권[羽柴政権]의 조그만 다이묘우[大名]의 부인이 되었고, 코이치로우 히데나가[小一 秀長]는 종오위하(從五位下) 하시바 미노노카미[羽柴 美濃守]라 칭하며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의 2개국 영주로써 히메지 성[城]을 거성(居城)으로 하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군
 
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단 오나카가 갑자기 이런 귀족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1년 전,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20만석의 다이묘우[大名]에 봉해졌을 때, 오나카는 기후[岐阜]의 저택에서 나가하마 성[長浜城]으로 옮겨와, 그 호반(湖畔)의 성()에서 처음으로 기와집(御殿)에 살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11년이었다.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올해 즈음부터 공가(公家)가 되고자 하는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거주구역[奥]을 공가(公家) 풍으로 바꾸기 위해서 쿄우[京]에서 공가(公家)의 딸들을 다수 여관(女官)으로 들여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화장실의 관례까지 바뀌어 버렸다.

 할멈은 혼자 갈 테다

 고 오나카가 말해도 시녀들은 허용치 않고 몇 명인가가 따라 붙어서는 입구에서 공가의 관례에 따라 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을 본 것의 떨어지는 장소는 항아리가 아니라 모래상자였다. 모래 위에 그것이 떨어지면 어떤 사람이 와서 그것을 가지고 가 버렸다.

 저건 거름으로 쓰려는 것인가?”

 하고 오나카는 어느 날 쿄우[]의 궁궐에서 온 여관에게 물었다. 백성으로 살아온 오나카는 저것을 채소밭에 뿌리는 건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요 하고 여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이치쿠사이가 살펴 봅니다

 하고 말했다. ‘수이치쿠사이라는 것은 뭘까? 일본말로 쿠사이는 냄새가 난다는 것을 뜻하기에, 웃기게도 오나카는 왠지 냄새 나는 것을 담당하는 관리를 그렇게 말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쿄우[京]의 궁정시의(宮廷侍醫)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라는 사람이 요즘 오오사카로 내려와 히데요시 일족의 시의(侍醫)가 되어 있었다. 그 호() '수이치쿠사이[雖知苦]'라고 하였다. ()기는 하지만() 답답하다()는 의미로 붙인 호일 것이다.[각주:1]

 갑작스런 영달이 오나카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또 있었다. 어느 날,

 마님께선 옛날에 궁중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여관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오와리[尾張] 고키소[御器所] 마을에서 가진 땅도 없이 소작이나 부쳐먹던 백성의 자식으로 태어나, 나카무라[中村]에 사는 야에몬[弥右衛門]의 배필이 되어, 다음 남편으로 치쿠아미를 들였다. 그랬을 뿐인 전반생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자, 이런히데요시가 말하고 있다고 했다.
 
저 녀석이?’
 
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녀석도 환경이 갑자기 변했기 때문에 미친 것은 아니겠지? 더 캐묻자 이야기는 정말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야기에서
 
오나카는 옛날 궁중에서 물을 담당하는 하녀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텐노우[天皇]인 고나라텐노우[後奈良天皇]가 오나카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오나카의 소매를 잡아 끄셨다. ‘갑자기 옥체(玉體)에 다가가 받든 적도 있다고 히데요시는 말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 오나카는 텐노우의 씨를 품고 태어난 고향 오와리로 돌아와서 낳은 것이 이 히데요시다 고 말하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것을 히데요시가 입 밖으로 낸 것은 쿄우토[京都]의 세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의 저택에 있을 때였다. 히데요시는 입궐할 때, 이 저택을 옷 갈아입는 장소로 빌리고 있었다. 들은 사람은 마츠나가 테이토쿠(松永 貞)였다.

 마츠나가 테이토쿠는 왕년에 쿄우()에서 위세를 떨쳤던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아들로[각주:2], 히사히데 멸망 후에는 무사(武士)를 버리고 쿄우[京]에서 렌가[連歌], 하이카이[俳諧]에 전념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공가(公家) 사회에 섞여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이 테이토쿠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둠으로 인해 공가(公家)의 소식도 알고, 조정의 정보도 알 수가 있었기에 쓰임이 좋았다. 이 날도 테이토쿠를 근시(近侍)시키고 있었다. 이날 옷을 갈아입고 기둥에 기대어 휴식을 하고 있던 중에,

 나의 모친 젊었을 적에……”

 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테이토쿠는 그것이 믿기건 믿기지 않건 제쳐두고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우선 그 이야기대로 필기하는 한편 사람들에게도 퍼트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오나카는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 후 히데요시가 키슈우[紀州] 정벌을 끝내고 오오사카 성으로 귀환했다. 이 효자(孝子)는 귀환해서 반드시 제일 먼저 오나카와 대면하여 모친의 건강을 묻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때 오나카는 일부러 사람들을 물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너는 감히 궁궐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구나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목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말을 퍼트렸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 일을? 허영심 때문이냐?”

 고 물었다. 아무리 오나카라도 이 자신이 낳은 자식놈의 심사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노부나가)님을 보시길

 하고 히데요시는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은 옛 주인의 예를 들었다. 노부나가의 선조도 가계(家系)가 애매했다. 오다 가문의 선조는 에치젠[越前] 니부 군[丹生郡] 오다 신사[織田(神社]의 신관(神官)으로, 노부나가부터 거슬러 올라가길 백 수십 년 전에 오와리로 흘러와 호족이 되었고 차츰 세력을 길렸다. 족성(族姓)은 후지와라 씨[藤原氏]라고 한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는 처음엔 후지와라 씨[藤原氏]를 칭하고 있었지만, 천하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을 즈음 갑자기,
 
-
우리 집안은 헤이시[平氏]이다. 타이라노 스케모리[平 資盛]의 후손이다[각주:3].

 라며 그 선조를 변경하였다. 이유는 겐지[源氏]인 아시카가 씨[足利氏]를 멸망시키고 그 천하를 잇기 위해서는 헤이시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당시 호족들은 [겐페이 교대사상(源平 交代思想)]이라는 것[각주:4]을 믿고 있었기에, 노부나가는 그 설을 이용하여 천하에 오다 대세론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노부나가는 유우히츠[祐筆]에게 명령하여 족보를 만들게 하였지만, 어째서 오다 가문이 헤이시[平氏]인 것이냐는 점에서 힘들었다. 그래서 타이라노 치카자네[平 親実]라는 가공의 인물을 창조하였다.

 치카자네를 단노우라[浦][각주:5]에서 죽은 타이라노 스케모리의 둘째 아들로, 헤이케[平家]가 멸망할 때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은 아기였지만, 그 어미가 품에 안고 오우미[近江]도망쳐 츠다[津田] 아무개의 부인이 되었다. 그 후, 에치젠[越前] 오다 신사의 신관 오다 씨[織田氏]가 치카자네의 운명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후사로 삼았다 는 것이 노부나가가 만들게 한 오다 가문의 헤이시 전설이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경우는 그러한 전설도 만들지 못할 정도로 비천한 출신이었다. 이럴 경우 히데요시는 겐지[源氏]를 칭하고 싶었을 것이다. 헤이시[平氏]인 노부나가 다음은 겐지인 히데요시여야 했다. 겐지라면 궁정의 전례에 따라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軍]에 임명 받아 막부(幕府)를 열 수가 있었다.[각주:6] 미카와[三河]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는 노부나가의 개성(改姓)과 비슷한 시기에 개성[각주:7]하여 족보를 창작해서는 겐지를 칭하고 있었지만 히데요시의 경우는 이제 와서 그것이 불가능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될 수 없는 이상, 히데요시는 아예 공가(公家)가 되어 칸파쿠()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각주:8] 칸파쿠는 셋케[家]의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 점이라면 편법을 써 누군가 친한 공가(公家)의 양자(養子) – 결국 키쿠테이 다이나곤(菊亭 大納言)의 유자(猶子)[각주:9]가 되었지만[각주:10]가 되어 버리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로 명문가에 들어간다고 하여도 자신의 출신이 지금과 같아서는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자신이 텐노우[天皇]의 씨라는 풍설을 유포시켰다.

 물론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래도 좋았다. 히데요시 자기도 그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묻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크게 한번 웃고 그 자리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치부할 생각이었다. 즉 후지와라 공가(公家)의 양자가 될 때까지의 시간 동안,
 
-
세간에서는 그렇다고도 한다.
 
라는 정도의 풍설만 만들어 퍼트려 두면, 형식 중시인 궁정은 히데요시라는 남자를 받아들이기 쉽게 될 것이다. 이 텐노우의 씨라는 설은 그것만을 위해 쓰려고 창작한 것으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모친이 트집을 부려오면 오히려 히데요시 자신이 곤란했다.

 너에게는 누나가 있지 않느냐

 라고 오나카는 말했다. 그 누나가 죽었다면 모를까, 지금 남편과 함께 아와[阿波]의 명족 미요시 씨[三好氏]의 성()을 잇고 있으며, 현재 그 아들 히데츠구[秀次]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오나카가 앳된 소녀일 즈음에 텐노우[天皇]의 씨를 품고 오와리[尾張]로 돌아왔다면, 이 누나의 존재가 이상해지지 않느냐? 아이가 있는 앳된 소녀라면 이야기의 설정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하하~”

 히데요시는 웃었다. 어떻든 상관 없는 것이다. 형식적인 것을 좋아하는 궁정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만들었을 뿐인 동화 같은 이야기에 딱 들어맞는 설정붕괴건 뭐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니 동생 코이치로우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건 치쿠아미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너만이 텐노우(天皇)의 아드님이신가?”

 오나카는 자못 무서운 말이라도 들을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가 낳은 아이이면서 이 야에몬의 씨로 낳은 자식은 꼬꼬마일 때 가출해버렸던 만큼 예상도 할 수 없는 인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치쿠아미의 씨인 코이치로우 히데나가는 성인이 될 때까지 오나카가 직접 키웠으며, 저런 형과 비교해 보면 어쩜 이렇게 솔직하고 귀염성이 있는 남자란 말인가……

  1. 斎라는 글자의 의미에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호에 많이 쓰였다. [본문으로]
  2. 사실 손자라고 한다.(이것조차 추측) [본문으로]
  3. 타이라노 스케모리는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서 무사의 모범이라고 하는 타이라노 시게모리[平 重盛]의 둘째 아들. 여담으로 시게모리는 무가(武家)로서는 처음으로 다이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첫째아들. 즉 스케모리는 키요모리의 손자. [본문으로]
  4.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교대로 천하를 쥔다는 사상. 카마쿠라 막부 쇼우군 가문[鎌倉幕府将軍家](겐지) -> 카마쿠라 막부 싯켄 호우죠우 가문[鎌倉幕府執権 北条家](헤이시) -> 무로마치 막부 쇼우군 아시카가 가문[室町幕府将軍家 足利家](겐지). [본문으로]
  5. 겐페이 쟁란 최후의 전투. 해전(海戰). [본문으로]
  6. 겐지[源氏]만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노부나가의 경우 조정에서 칸파쿠[関白],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중 아무 거나 하나 되라는 말을 들었다.(三職推任問題) [본문으로]
  7. 후지와라[藤原]에서 겐지[源氏]로. [본문으로]
  8. 실제로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보다 칸파쿠[関白] 되는 것이 훨~~~~씬 어렵다. [본문으로]
  9. 성이 바뀌지 않는 등 계약에 따른 양자 관계. [본문으로]
  10.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키쿠테이 가문[菊亭家]은 칸파쿠가 될 수 없는 세이가케[清華家]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히데요시는 셋케[摂家] 필두인 코노에 가문[近衛家]에 유자로 들어갔다. 키쿠테이는 그 코노에 가문과 히데요시를 연결해 주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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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27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 이번 편에서는 히데나가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7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 끝에 솔직하고 귀염성 있는 남자라고...^^;
    다음 편은 본격 히데나가 이야기입니다(원래 이번 편 자체가 히데나가긴 하지만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28 2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혁신 플레이 하다보면 키쿠테이공이 자꾸 헌납하라고 시쯔코이하게 불러대서 초반에 귀찮았던(이라고 말하고 힘들었던 이라 읽는다) 기억이..

    아무튼 고노에가의 유자로 히데요시가 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일제 강점기 때의..(뭐 실권은 없었다지만) 먼 후손(..이라고 말하면 비약일테지만)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떠오르네요. 나름대로 선조의 유지를 이은건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30 0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熙)라는 수상까지 만들었으니, 그걸로도 코노에 가문은 성공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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