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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17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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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날로부터 11일째에 미츠히데[光秀]는 야마자키[山崎] 텐노우잔[天王山] 산의 산기슭과 요도가와[淀川] 천 사이에 있는 들판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결전을 벌였고, 북상해온 히데요시 군에게 전군(全軍)이 무너져 패배하였다. 미츠히데는 도주하던 중 오구루수[小栗栖]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루 만에 역사가 전환되었다.

 

 미야[宮]는 미츠히데의 패망을 듣고 승리자의 이름을 물었다.

 - 그 자를 히데요시라고 하는가?

 이 승자의 이름을 미야는 기억하고자 하였다. 그 이름이 사악(邪惡)을 쳐부수었다. 그 이름이 승자의 이름이라는 것 이상으로 소년의 감각 속에서는 그 어느 것보다 정의로운 울림을 가지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시세(時勢)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그 후 곧바로 전쟁터를 떠나지 않고 야마자키의 타카라데라[宝寺]라는 절에 본영을 설치하고 천하를 손에 넣을 계책을 진행시키는 한편, 사람을 파견하여 쿄우[]의 질서를 회복하였다. 히데요시는 10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입궐하여 종오위(從五位) 사콘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에 임명 받았다. 노부나가[信長]의 장례식을 다이토쿠 사[大徳寺]에서 치를 때는 그 관위로서 임했다. 여전히 히데요시는 그 경쟁자 오다 가문[織田家] 필두 가로(家老)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가 있기에 쿄우[京]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쿄우[京]는 요해(要害)가 아니다. 이 시기의 히데요시처럼 불안정한 정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머물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 후 히데요시의 지모는 천하를 진동케 하였다. 군세를 여기저기로 이동시켜, 다음 해인 1583 4월에는 오우미[近江]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격파하고 더욱 북진하여 에치젠[越前]에서 카츠이에를 멸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다시 쿄우()에 나타나 입궐하였다. 이때 종사위하(從四位下) 산기[参議]에 임명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히데요시의 천하는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여전히 몇 년간, 옛 오다계의 다이묘우[大名]로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토우카이[東海]에서 독립된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칸토우[東], 오우우[奥羽], 시코쿠[], 큐우슈우[九州]는 여전히 히데요시 정권 밖의 땅이었다.

 

 히데요시는 여전히 바뻤다. 이 병마(兵馬)의 분주함 속에서도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 성을 쌓고 있었다. 1583년이 저물 즈음이 되어서야 주성(本丸)이 막 완성되었음을 쿄우토[京都]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대한 성이라고들 하였다. 히데요시는 그 주성의 바로 옆에 '산골 성곽[山里廓]'이라는 이름의 성곽을 만들어, ()를 즐기는 장소로 하였다.

 

 산골 성곽.

 ..이라는 이름은 쿄우[]에서 화제가 되었다.

 산골 성곽은 - 그 이름이 나타내는 대로 성내에 있는 한 성곽 안에 산을 만들고 숲을 우거지게 하여 계곡을 일으키고 물을 흐르게 하여 사시사철 송운(松韻)을 울리게 할 정도로 큰 규모의 자연을 만들어서, 그 초목(草木)으로 파묻힌 곳에 한 채의 다실(茶室)을 만들어 거기에서 히데요시는 와비챠[わび茶]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상당히 차를 즐기는 사람[수키샤=数奇者]인 것 같군

 

 하고 궁정의 사람들도 들은 소문으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미야도 그러한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차()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몰랐다. 우선은 이해하기에 미야가 너무 어렸으며, 한편으로 공가(公家)라는 전통사회는 아직 차와 같은 그러한 막연한 신흥(新興) 미의식(美意識)이 이식되어 있지 않았다. 전시대의 노부나가는 차를 좋아하였지만, 차를 공가(公家)의 세계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자연히 차 등을 즐기는 것은 쿄우[京], 사카이[], 하카타[博多] 근방의 부유한 상인이나 스님 혹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무가(武家)의 일부 정도들만의 것이라고 궁정의 신하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취향을 대단히 잘 살려 흥미롭더군요

 

 하고 히데요시에게 초대받아 오오사카에 내려갔다 온 상급귀족[公卿]들이 산골 성곽에 갔다가 가지고 온 이야기를 카쥬우지 가문[勧修寺家]에 전하였다. 다실이라는 것은 굉장히 작아서, 불과 타타미[畳] 두 장 깔려 있을 정도의 크기[각주:1]라고 한다.

 불과 타타미 두 장 깔린 다실에…’

 미야는 그것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저 장대한 성곽 안에, 히데요시는 불과 타타미 두 장 정도 크기의 작은 다실을 만들고 몸을 집어 넣어 허리를 굽혀서는 시골 할배처럼 차를 마시고 있다고 한다. 그 그림을 미야는 우스꽝스러움과 호의를 담아 상상했다.

 어째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일까?’

 하고 미야는 소년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하였다.

 

 그것이 차에서 말하는 와비[び]라는 것이옵니다

 

 고 가르쳐 준 것은 탄고[丹後]의 다이묘우[大名]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였다. 유우사이는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이기 이전에는 오다 가문의 다이묘우였으며, 한때는 미츠히데의 지휘 하에 속해있었다. 거기에 그 전에는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軍]의 측근으로서 그 삼대의 변동기를 교묘한 살아가며, 항상 어느 시대의 권력자에게건 그 교양을 진중 받았다. 

 처세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우사이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각별한 사이로, 그의 적자(嫡子) 타다오키[忠興]의 부인이 미츠히데의 딸이기도 하여 엮어진 연()은 보통이 아니었지만, 미츠히데의 몰락을 예상하고 그의 모반에는 참가하는 일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요우도우[山陽道]를 거슬러 온 히데요시 측에 서서는 그 군단에 참가하였다. 앞을 내다보는 것에 있어서는 대단한 후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유우사이는 공가(公家)에서도 신망이 두터웠다. 뭐라 해도 유우사이는 옛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의 명문가 출신이며, 그렇기에 쿄우[京]의 무가귀족(武家貴族)다운 차분함과 공가(公家)와 같은 교양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 교양도 평범한 것이 아니어서 렌가[連歌]도 할 수 있으며, 다도도 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요리(料理)의 실력조차 달인의 영역에 달해 있었다. 그렇지만 유우사이를 쿄우[京]에서 더욱 무게감있게 만드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시가(詩歌)의 학문일 것이다. 그는 시가 학문의 최고권위라고 할 수 있는 고금전수(코킨덴쥬=古今)’를 산죠우니시 사네키[西 枝]에게 전수 받은 상태였다[각주:2]. 상급귀족들도 공가(公家)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가를 무인(武人)인 유우사이에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유우사이가 카쥬우지 가문에 출입하며 미야나 나중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가 되는 미야의 형에게 시가를 가르치고 있었다.

 

 다도라는 것도 그리 무시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 요즘 유행하는 미의식을 몸에 익히도록 미야에게 권하였다. 아직 소년인 미야에게 있어서는 차보다도 시가 쪽이 재미있었다.

 

 와비[び]라는 것은 어떠한 마음가짐인가?”

 

 하고 이때 미야는 질문했다. 어째서 히데요시는 산골 성곽 같은 것을 좋아하고 있나?

 

 와비의 마음은 시가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고 유우사이는 말하며, 단정하게 몸을 일으켜 부채를 무릎에 세우고는,

꽃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산골에

눈 사이의 풀이 봄을 보여주니

花をのみ待つらむ人に山里の

雪間の草の花を見せばや

 라고 읊었다. 후지와라노 카류우[藤原 家隆]의 시였다. 이것이 와비의 정신적 풍경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하고 유우사이는 말했다. 보잘것없는 초가집에 천하에 둘도 없는 명마(名馬)를 매단 풍경이야말로 와비이며, 차의 마음가짐이라고 하였다.

 

 천하에 둘도 없는 명마란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미야는 말했다. 미야는 너무 잘 깨달을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저 금은을 아로새긴 오오사카 성의 한 성곽에 자연을 만들고 타타미 두 장이 깔린 다실(茶室)을 둔 히데요시의 마음씀씀이를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1. 대략 타타미 한 장에 1m*2m 정도. 보통 직사각형의 타타미를 세로로 깔아 정사각형에 가깝게 만들어 2m*2m의 크기일 것이다. [본문으로]
  2. '북두의 권'과 같이 한 시대에 한 명만 전수 받는 일자전승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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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18 05: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이 기다렸습니다~ 하치죠우노미야는 별로 풍파에 휘말리지는 않은 듯 하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8.18 1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두의권이라..ㅎㄷㄷ 절묘한 비유이시군요.

    유우사이는 볼때마다 느끼는게 정말 중세의 르네상스인의 분위기를 풍긴다랄까.. 더군다나 거기에 정치센스까지 담았으니..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18 2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선생님//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시대가 황실의 인물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은 듯 합니다.

    다메엣찌님//아마...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熙) 총리가 좀 더 오랫동안 그 직에 머물러 인기를 끌었다면, 그의 선조이기에 NHK 대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예전에 생각해 본 적이 있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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