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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10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 키타노쇼우(北ノ庄)에서 죽은 강직한 무장 (10)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는 대조적으로 강직하고 우직한 장수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죽은 뒤 노부나가의 후계자리를 둘러싸고 히데요시와 격렬한 주도권다툼을 벌이다 패했다.

 전해지는 카츠이에의 목상을 보면 눈꼬리가 치켜 올려진 염라대왕과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 내에서도 그의 부대 표식(馬印)인 금색 고헤이(御幣)가 [귀신 시바타의 고헤이]라 칭송 받을 정도로 맹장이었던 것이다.(이곳(링크)에 가보면 중간 즈음에 좌상과 금색 고헤이(御幣)를 볼 수 있다)

 맹장이라는 이미지와 반대로 카츠이에게는 뛰어난 민정가로서의 일면도 있었다.
 농민 반란군(一向一揆)을 멸하고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성주가 된 카츠이에는 칼 단속령(刀狩)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무기를 전부 몰수한 후 그것을 다시 농기구로 만들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은 것은 쇠사슬로 만들어 쿠주류우가와 강(九頭龍川)에 가교(架橋)를 세웠다. 영지(領地)에서 48척의 배를 모아 떠내려가지 않게 쇠사슬로 엮고 그 위에 널빤지를 이어 다리로 만든 것이다. '후나바시(舟橋)'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키타노쇼우를 종단하는 아스와가와 강(足羽川)에 반은 돌, 반은 나무로 평판이 자자한 '오오하시(大橋)'도 만들었다.

 시바타 씨(柴田氏)는 대대로 오다 가문의 가로(家老)를 역임하는 가격(家格)을 가지고 있으며 카츠이에는 중신 필두로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때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각주:1]의 모반에 가담하여 노부나가에게 반항하였다. 당시 캐찌질이(大うつけ)라고 불리고 있던 노부나가를 오다 가문 번영을 위해 없애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것에 실패하자 곧바로 머리를 밀고 용서를 구하였다. 보통 노부나가는 한번 자신에게 모반을 일으킨 자는 절대로 용서하는 일 없이 곧바로 죽였지만[각주:2] 카츠이에의 경우 그의 우직과 성실함이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카츠이에의 무공을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독 깨기 시바타(かめ割り柴田)]라는 에피소드이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가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를 공격하였을 때 갑작스런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했던 시기였다. 오우미(近江) 방어를 위해 카츠이에는 쵸우코우지(長光寺)성()을 소수의 병사와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남 오우미의 옛 주인인 롯카쿠 죠우테이(六角 承禎)가 8000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 온 것이다. 농성전이 시작되었다. 성의 용수지(用水池)를 빼앗겼기에 이내 성 안에 마실 물이 바닥을 드러냈다. 적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항복을 권고해 왔다. 갈증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카츠이에는 성 안의 모든 병사를 모아 결의를 다졌다.
 "이대로 간다면 자멸할 뿐.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오늘 밤 출격하여 최후의 꽃을 피워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성 안에 남은 물을 큰 독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잔씩 마시게 한 후 손수 나기나타(薙刀)로 독을 깬 것이다. 그리하여 시바타의 군세는 전원 결사의 돌격을 감행하여 몇 배나 되는 적을 물리친 것이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은 시점이 카츠이에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인이 되는 것은 필두 중신은 자신이다. – 그렇게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 光秀) 토벌을 히데요시가 먼저 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간에 주도권 다툼이 펼쳐지게 된다.

 오다 가문의 후계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議)가 그 결정적인 장면이 되었다. 카츠이에는 노부나가의 셋째 노부타카(信孝)를 내세웠으며 히데요시는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적자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산포우시(三法師=후에 히데노부(秀信))를 내세웠고,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를 자기 측에 끌어들인 히데요시가 결국 적통이라는 명분을 이유로 산포우시 추대에 성공한 것이다.

 주도권 다툼에서는 패했지만 카츠이에는 그 대신 당시 절세의 미녀라 칭송 받던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당시 카츠이에 61세.
 오이치노카타는 박복한 운명에 휘둘린 여성이었다. 처음엔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시집가 2남3녀를 낳았지만 오빠 노부나가에게 남편 나가마사는 멸망 당하고 장남까지 살해당하였다.

 히데요시도 오이치노카타를 남몰래 동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데요시와 카츠이에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
)는 오이치노카타를 빼앗긴 히데요시가 카츠이에에게 실연당한 복수를 한 것이라는 설이다. 히데요시는 싸움에 패하여 키타노쇼우에서 농성하는 카츠이에에게 목숨은 살려줄 테니 코우야산 산(高野山)으로 물러나라며 3만석의 땅까지 약속했다고 한다. 그 본심은 오이치노카타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믿기 힘든 이야기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데 있어 최대의 강적은 카츠이에였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도 보고서에 '히데요시는 카츠이에만을 두려워한다'고 적었다. 에도 시대 초기 바쿠후(幕府)의 유학자인 하야시 가호우( 鵞峰[각주:3])도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의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는 부하에게, 카츠이에가 살아서는 내 야망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기록하였다.

 1583년 3월 시즈가타케 전투가 카츠이에의 운명을 정하였다.
 1개월간에 걸친 지구전이 펼쳐지던 중에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타카 공격에 나선 히데요시의 빈자리를 노려 카츠이에의 부하장수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가 기습을 감행했다. 이 사쿠마의 기습은 성공하여 히데요시 측의 무장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를 전사시키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을 패주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거만해진 사쿠마는 예정대로 철수하지 않았고 카츠이에의 세 번에 걸친 명령도 승리에 취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 패전의 소식을 듣자마자 예전 츄우고쿠 대반전(中大返し)를 방불케 하는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52km를 불과 5시간 만에 주파한 초인적인 속도였다.
 시즈가타케에 나타난 히데요시군을 보고 그 경이적인 신속함에 시바타군은 동요했다. 4월 20일 미명부터 시작된 시즈가타케의 결전은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키요마사(
正)), 후쿠시마 이치마츠(福島 市松=마사노리(正則)) 등 소위 칠본창의 무공 등에 힘입어 히데요시의 승리가 결정되었지만, 이미 개전하기 전부터 카츠이에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즉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와 카츠미츠(不破 勝光),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 長近) 등 시바타 휘하의 여러 무장이 히데요시에게 내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바타군은 붕괴되어 에치젠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카츠이에도 불과 100여기의 수하들에게 보호받으며 토치노키토우게 고개(木峠)를 넘어 에치젠(越前)에 들어섰고, 그 후 마에다 토시이에의 거성 후츄우(府中)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8기로 줄어있었다. 이때 카츠이에는 후츄우 성의 마에다 토시이에를 방문하였다. 배신한 토시이에를 원망하는 마음이 카츠이에에게 없었다. 토시이에가 내온 식사를 다 먹은 후 지금까지 토시이에가 자신에게 해 준 것에 감사를 한 후, "자네와 치쿠젠(筑前=히데요시)은 굉장히 친한 사이. 나와의 약속은 버리고 히데요시와 같은 편이 되어 영지(領地)를 지키시게"라고 권했다 한다. 더군다나 카츠이에는 키타노쇼우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토시이에에게 인질인 딸[각주:4]을 돌려보내었다.

 키타노쇼우의 최후가 왔다.
 이제 성의 병사는 3000도 안 되었다. 이미 밖에는 노도와 같이 에치젠으로 진격해 온 히데요시의 대군이 성(
)을 포위하고 있었다. 카츠이에는 고굉지신이라 부를 수 있는 80여명의 부하를 텐슈(天守)로 불러들여 석별의 주연을 벌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술을 따라주며 돌아다녔고 부하들의 부인과 시녀들, 그녀들의 말상대인 비구니에게까지 시중을 들었고, 가무음곡을 즐기며 취했다고 한다.

 주연이 끝나자 카츠이에와 오이치노카타는 거실로 옮겨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츠이에는 이때 몇 번이나 오이치노카타에게 성에서 나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오이치노카타는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였다. 오이치노카타는,

그렇지 않아도 졸린 여름 밤에
꿈길로 유혹하는 두견새려나
さらぬだに
ぬる
夢路をさそうほととぎすかな

 카츠이에는,

여름 밤 꿈길이라는 허무한 흔적의 이름을
저 하늘까지 가져가다오 두견새여
夢路はかなき
雲井にあげよほととぎす

 라고 각각 사세구를 읊었다.

 다음 날 1583년 4월 24일 미명부터 히데요시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정오에 이르러 이제는 각오를 정해야 할 때라고 본 카츠이에는 텐슈(天守)에 올라 화약에 불을 붙여 일족들과 함께 자인하고 성과 운명을 함께하였다.

[시바타 가쓰이에(柴田 勝家)]
1522년 태생. 통칭 곤로쿠(
). 슈리노스케(修理亮). 오다 가문(織田家)의 필두중신으로 1575년 9월 노부나가(信長)의 에치젠(越前) 농민반란군(一向一揆) 토벌 후 에치젠 국주()가 되었다. 혼노우(本能)사()의 변 때는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싸우고 있었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하여 거성 키타노쇼우()에서 자해하였을 때는 62세로 부인인 오이치노카타(お)는 37세였다.

  1. 보통 노부유키(信行)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내가 알기로는 이런 적 없다. 곧바로 죽인 사례를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 [본문으로]
  3.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초기에 활약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의 아들. [본문으로]
  4. 후에 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가 되는 마아히메(麻阿姫).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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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1 0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주3에서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여러 번 배신때렸을 때도 세번째만에 치러가지 않았었나요. 여기서 읽었던 것 같네요. 아자이 나가마사 역시 곧바로 죽였다고 하기에는 배신당했을 때와 시간 간격이 너무 긴 것 같고요.

    2. 오이치가 미녀라는 말은 정말 많이 들었는데, 대하드라마에 나오는 오이치는 다 아줌마들 뿐이네요... <토시이에와 마츠>, <공명의 갈림길> 모두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1 2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일본에서도 노부나가는 그런 이미지다...라는 것입죠. 성질 더럽고 지 맘에 안 드면 당장 칼부터 드는 식의 이미지.

      오이치는...그러네요. 왜 그럴까요? ^^
      일본 NHK대하드라마도 결국 라인(즉 누구누구 라인, 어느 회사 라인 등등)을 타는 식이라고 하더군요. 따라서 비중 없는 조연일 경우 그 라인 논리에 따라서 적당한 인물이 된다고 하더군요. 특히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그것이 심해 오다 노부나가를 맡은 타치 히로시(舘 ひろし)의 라인(이시하라 군단...이라고 이도 쫌 복잡)이 많이 기용되었다고 하네요(뭐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본 것이다 보니 진짜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요)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3 04: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나가는 비중있어서 캐스팅을 세심하게 하지만, 같이 딸려 나오는 오이치는 대충 하는거였군요 ㅋ

      지금 하고 있는 NHK 대하드라마 <천지인>에서 오다 노부나가로 나오는 가수 겸 배우 킷카와 코지는 실제로 킷카와 모토하루의 자손이라더군요.

      (킷카와 코지 이름을 다음에서 검색했더니 발해지랑님 블로그가 나오더군요. 웬 소설에서 '킷카와'를 '키츠카와'라고 하질 않나, 심지어는 '요시카와'라고 하질 않나 하는 댓글이더군요 ㅋ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충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래도 조금은 덜 고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 저도 노아님에게 배웠습니다.
      제가 가진 일본 연예계 지식이라야 smap라던가 초기 모닝구 무스메...정도인지라 그런 쪽으로 빠삭한 노아님의 블로그는 도움이 많이 됩니다.

      예전 다메에찌님이 알려주신 것이군요.
      일본 사람들도 명함 주고 받으면서 이름 물어보는데 한국 사람이야 어쩔 수 없죠...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소설 번역이니 공부 좀 하시고 하시지...라는 생각도 한편으론 듭니다.

  2. 카즈토요 2009.03.11 0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큰 아들은 오이치의 친자식이 아니라 세 딸을 낳기 전 나가마사가 시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나오던데.. 어떤게 사실인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1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그 공명의 갈림길을 보지 못한 고로 어떤 내용으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첫째 아들인 만푸쿠마루(満福丸)의 경우 나가마사가 오이치와 결혼하기 전 첫번째 장가인 롯카쿠의 가신의 딸과 결혼했을 시에 생긴 아이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기록은 당시에는 없고 아주 후대(메이지 시대)에 아자이 씨의 후손이 기록한 족보에 기록된 것이라 현재는 이설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달리(한국도 솔직히 족보는 쪼큼 의문시 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만) 일본은 족보가 그리 신빙성있는 자료가 아닌 듯 합니다. 고급귀족(公卿)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에도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 많은지라 조상 뛰우기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네요.

      개인적으로는 이치와 나가마사의 결혼한 시기로 여겨지는 1567년에 당장 그 해에 아이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만푸쿠마루가 죽을 때(1573년) 10살이라고 하기에 만푸쿠마루가 태어난 해는 1563년 즉 3년의 차이가 생깁니다. 그렇기에 오이치의 아이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당시의 년도 기록이 정확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보니 '바로 이거다'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3. 맹꽁이서당 2009.03.12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타도 천하인을 노리고 있었군요.
    만약 시바타가 히데요시를 물리치고 대권을 잡았다면, 그가 내세운 노부타카와 결국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어땠을까요?
      전 왠지 충실히 따랐을 것만 같더군요. 근거라곤 노부타카가 그리 녹녹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뿐이지만요.

      노부타카는 동시대의 남만인과 일본인 등의 평이 엄청 좋더군요. 남만인들은 - 신중하며 예의 바른 위대한 용사, 일본인들도 '문무의 달인', '지용(知勇)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등... (덧붙여 외모가 노부나가와 가장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뭐 실제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요. 역시 역사의 IF는 재미있습니다.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12 23: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근현대 하이쿠에서도 종종 보이지만... (저는 시엔 잼병입니다만 본이 아니게 문창과 친구가 있어서 종종 읽게 됩니다만;)

    저 호토토기스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의미를 두고 읽어야 할지 의미를 두지 않고 읽어야할지) 모르겠던 경우가 상당하더군요; 읽기도 힘든데 저런걸 짓는 당대인의 교양을 생각하면 종종 숙연해질때가 있습니다..(뭐 사세구의 경우엔 내용 자체도 숙연합니다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1: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단어의 뜻을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요..
      이런 것을 해석할 때마다 문학적 소양이 너무 없구나...어렸을 때 무협지만 읽지 말고 시 도 좀 읽어 둘 걸...하는 생각이 절로 나더군요.

      그러게요...호토토기스...
      나중에 알게 되시면 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굽신굽신)

      죽기 전에 지은 시라 더욱 비장미를 더해 주는 것 같습니다. 사세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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