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츠구[吉継]라는 이름이 아닌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갑옷을 입지 않고 지팡이 같은 것을 잡고 있는 인물이 요시타카(=요시츠구)

 오오타니 교우부쇼유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省 吉継]는 천하의 분수령이 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할 것을 알면서도 우정을 위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편에 서 장렬히 싸우다  그 병든 몸을 산화시킨 비창(悲槍)의 무장으로 유명하다.

 1600년 6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를 동원하여 아이즈[会津]로 향했다. 이때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이에야스의 동원령에 응하여 7월에 츠루가를 출발하였다.
 이날이 되기 전까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이름은 역사의 표면에 눈에 띄게 등장한 적도 없었으며, 이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의 시점에서도 극히 평범한 다이묘우로,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인인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자 하였다.

 도중, 요시츠구는 미노[美濃] 타루이[垂井]에서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요시츠구와 함께 아이즈로 향하게 된 미츠나리의 아들 하야토노쇼우[隼人正][각주:1]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이 즈음 사와야마에 은거하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첫째 아들 하야토노쇼우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아이즈에 보내겠다고 신청한 상태였다.

 요시츠구는 사자의 구두로 미츠나리도 함께 아이즈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미츠나리가 무공파 장수들에게 습격 받았을 때, 이에야스에게 도망쳐 보호를 받게 되지만[각주:2] 그로 인해 은퇴를 강요당한 미츠나리가, 반(反)이에야스의 태도를 버리기는커녕 여전히 이에야스 토벌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은 천하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츠나리가 아이즈로 함께 가준다면 요시츠구 자신이 이에야스와 화해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이에 대하여 미츠나리는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사와야마로 와 주길 바란다고 사자를 보내온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시점에도 무슨 일인가?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사와야마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요시츠구와의 만남을 대단히 기뻐하며 잠시 옛정을 떠올린 뒤, 중대한 계획을 밝혔다.

 “이에야스의 행태를 보자니, 돌아가신 태합(太閤)님의 유훈(遺訓) 정치를 위반할 뿐만 아니라 히데요리 님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네. 우리처럼 태합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일.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향하는 지금이야말로 이에야스 토벌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세. 거병하여 이에야스를 쓰러뜨리려 하오.”

 듣고 있던 요시츠구는 놀랐다. 너무 무모하다 – 요시츠구는 잠시 틈을 준 뒤 입을 열었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는 300만석에 달하는 거대 다이묘우일세. 군사수도 많으며 더구나 지금에 와서는 그의 명망에 비견되는 이조차 없네. 돌아가신 태합도 항상 ‘이에야스 님은 지용을 겸비하신 분,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고 말씀하신 인물이네…”

 요시츠구는 불과 19만석의 미츠나리가 그러한 이에야스와 싸운다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열심히 미츠나리의 뜻을 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미츠나리는 이 계획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공모한 것이기에, 이제는 취소할래야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며, 요시츠구도 부디 참가해 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요시츠구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요시츠구는 사와야마 성에서 나와 본진이 있는 타루이로 되돌아와 심사숙고 하였다.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와의 우정과 그런 자신을 믿고 미츠나리가 밀모를 털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것을 무시한 채 아이즈[会津]로 향할 수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히데요시[秀吉]가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 히메지[姫路]에 있을 때, 16살의 자신이 먼 분고[豊後][각주:3]에서 와서 섬길 수 있었던 것도 미츠나리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아래서 150석으로 시작해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임명되어,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으로 승진했을 때는 미츠나리와 함께 제대부(諸大夫)의 한 사람[각주:4]으로도 선정되었다. 요시츠구의 이런 출세에는 미츠나리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각주:5]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의 그런 우정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요시츠구와 미츠나리 사이에 속설이지만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가 다회(茶会)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 즈음 요시츠구는 불치의 업병(業病)을 앓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요시츠구가 입댄 찻종을 꺼려했다.[각주:6] 그때 미츠나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요시츠구에게 찻종을 받아 깨끗이 원샷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며 미츠나리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한편 요시츠구는 이에야스[家康]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자주 이에야스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단지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집안싸움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와 함께 양측의 화해조정에 힘쓰고 있을 때, 야스마사가 이에야스에게 크게 질책을 당하였기 때문에 요시츠구도 또한 이에야스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을 관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야스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요시츠구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응하려 했던 것이다.

 타루이의 본진에서 요시츠구는 심사숙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츠나리에게 승산은 없었다. 때문에 또다시 사자를 보내어 미츠나리에게 결심을 바꾸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결심에 변함이 없었다.
 7월 11일.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타루이에서 전군을 이끌고 사와야마 성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를 위해서 죽자고 결심한 것이다. 
미츠나리를 만면에 기쁨을 표하며 요시츠구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타도의 준비계획은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타니 요시츠구 그리고 역시 미츠나리의 요청에 응하여 사와야마 성에 온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의 협의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에야스 타도에 임하기 전에 요시츠구가 미츠나리에게 전한 유명한 충고가 있다. 이하는 그 내용이다.
 “귀공(미츠나리)에게는 방자하고 거만한 점이 있다 – 고 다이묘우를 시작으로 말단 병사들까지 날마다 떠들고 있는 듯 하네. 다른 사람의 위에 서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되네. 이것을 잘 판단하여 이번 큰일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님과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님을 위에 세우고, 귀공은 그 아래서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네. 거기에 남들이 보기에 귀공은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천하무쌍이지만 그에 비해 용기는 부족하다고들 여기고 있소. 이에야스 타도계획에는 모우리, 우키타 님 외 다른 다이묘우들도 참가할걸세. 이 계획을 처음부터 짠 것은 귀공이니, 계획이 진행될 때는 남들보다 먼저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를 임하길 바라네.”
 그야말로 미츠나리의 결점에 대한 충고였다. 미츠나리도 당장은 친구 요시츠구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 20만의 대군이 격돌하였다.
 이날 요시츠구[각주:7]는 토다 카츠시게[戸田 勝成],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 為広][각주:8], 오오타니 요시하루[大谷 吉治][각주:9], 키노시타 요리츠구[木下 頼継][각주:10] [각주:11]의 부대를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두고, 자신은 그 후방에 본진을 두었다. 오오타니 부대의 우익에는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각주:12],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각주:13],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각주:14] 등을 배치하였다[각주:15]. 이 포진은 더 오른편에 있던 마츠오야마[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 대비한 것이었다. 요시츠구는 처음부터 히데아키에게 딴마음이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주변의 배치도. 빨간색은 동군. 파란색은 서군. 노란색은 도중 배신하는 무장들이다.

 오전 8시. 결전이 시작되었다. 오오타니 부대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쿄우고쿠 타카토모[京極 高知]의 부대를 상대로 격전을 펼쳐 압도하고 있었다. 요시츠구는 병든 몸이었다. 뚜껑이 없는 가마에 타고서는 지휘하였다. 뭉개진 얼굴을 흰 포로 감싸 눈 만을 내 놓고 있었다. 그 눈도 거의 실명에 가까웠다.

 전황은 서군이 조금이지만 유리. 그러나 일진일퇴. 곧이어 정오가 되었다. 이때였다. 마츠오야마 산에서 형세를 관망하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갑자기 산을 내려와 오오타니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침착하게 맞아 싸웠다. 하지만 요시츠구의 오산이 생겼다. 이 배반에 대비하여 배치한 아사자 나오마사 등의 부대까지도 함께 배신하여 오오타니 부대를 향해서 공격한 것이다.[각주:16] 오오타니 부대는 세 방향의 적과 싸우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다 카츠나리, 히라츠카 타메히로 두 무장이 전사를 하였다. 요시츠구는 두 무장의 죽음을 보고 받고 각오를 정했다. 옆에 있던 유아사 고스케[湯浅 五助]를 가까이 불러,
 “내 목을 적에게 넘기지 마라”[각주:17]
 고 명한 뒤 배를 갈랐다. 고스케는 배 가르는 요시츠구의 목을 베어 준 뒤 그 목을 전포[羽織]에 싸서 땅에 묻은 다음 토우도우 부대를 향해 돌격하였다.[각주:18]

오타니 요시쓰구[大谷 吉継]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을 섬겼던 오오타니 씨[大谷氏]의 출신이라고 한다[각주:19]. 처음엔 키노스케[紀之介] 나중엔 요시타카[吉隆][각주:20]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측근시동[小姓]부터 시작하여 1585년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가 되어[각주:21]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서임, 관백 히데요시의 제대부(諸大夫) 중 한 명이 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신뢰를 받았기에 그에 대한 의리로 서군에 참가하였다. 사나다 유키무라[真田 幸村]의 부인은 요시츠구의 딸[각주:22]이다. 묘는 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의 옛 전쟁터[古戦場],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있다. 격전을 펼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이 요시츠구의 분전에 감명받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요시츠구가 나온 그림으로 이런 것도 있습죠.


  1. 이시다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이시다 시게이에[石田 重成] [본문으로]
  2. 미츠나리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3. 근래엔 오우미[近江] 출신이라고는 하나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오오타니 촌[小谷] 출신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요시츠구의 성과 같은 오오타니[大谷]라고 ‘큰 大’자를 썼으나,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의 수장의 고향인지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 발음은 같지만 ‘작을 小’를 써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5. 미츠나리의 도움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나 요시츠구의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마누라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집사격인 모친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요시츠구가 콧물을 떨어뜨렸다고도 하며, 얼굴의 고름이 찻종에 떨어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병사는 6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8. 둘이 합쳐 900명. [본문으로]
  9. 요시츠구의 첫째 아들. [본문으로]
  10. 요시츠구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11. 둘이 합쳐 3500명. [본문으로]
  12. 에치젠[越前] 이마죠우[今庄] 2만석의 다이묘우[大名]. 600명 동원. [본문으로]
  13.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 7만석의 다이묘우. 2000을 동원. [본문으로]
  14.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 2만석의 다이묘우. 600을 동원.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아와지[淡路] 수모토[洲本] 3.3만석의 다이묘우로 1000명을 동원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배치되어 있었지만, 일본에서 와키자카는 듣보잡 중의 듣보잡이라 이 책에선 4명 중 3이 나오면서도 기술에서 빠져있다. 정말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이런 듣보잡 중의 듣보잡을 감히 이순신 장군의 라이벌 포지션에 배치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제작진은 평생 좆잡고 반성해야 한다. [본문으로]
  16. 여담으로 이 배신자들은 전후,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배신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며 아카자 나오야스, 오가와 스케타다는 영지 몰수, 쿠츠키 모토츠나는 반토막(2만석에서 9590석)이 되며, 와카시카 야스하루만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배신한다는 뜻을 알렸다며 영지를 보전받았다. [본문으로]
  17. 병들어 추해진 얼굴을 적에게 보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유아사 고스케는 이때 묻는 모습을 토우도우 타카토라의 조카인 토우도우 타카노리[藤堂 高刑]에게 걸려, 타카노리에게 자신의 목을 줄테니 대신 주군의 목이 여기에 묻혀 있는 것을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에야스가 타카노리에게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목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알기는 하지만 유아사 고스케와 약속을 하여 말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자, 오히려 감심한 이에야스에게 상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위에도 언급했지만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가신 출신이 아니라고 한다. 여담으로 유명한 '내적인 일은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외적인 일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에게'라고 가신에게 편지를 보낸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그 편지에 요시츠구의 애미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쎄다는 것도 썼지만, 만약 요시츠구의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의 가신뻘이었다면 특별히 언급하였을 텐데도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오오토모 가문과 오오타니 가문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본문으로]
  20. 한때 킨키[近畿]를 지배했던 미요시 가문[三好家] 마지막 당주의 이름 미요시 요시츠구[三好 義継]의 이름과 같아서 불길하다며 서군에 가담하기 직전에 바꾸었다고 한다. 위에 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세키가하라 병풍에는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본문으로]
  21. 츠루가 성주가 된 것은 1589년의 일 [본문으로]
  22.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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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ele-mann.tistory.com BlogIcon telemann 2011.09.06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좋은 글 감사드려요. 좋은 하루 되시길....

  2. Gyuphy IV 2011.09.06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헣헣허헣. 요시츠구의 악령이군요. 재밌게 봤습니다.
    그럭보면 세키가하라 고전장에 갔을적에 요시츠구의 묘에도 들렀었던 기억입니다만 참 산새우는소리만 들리는 산기슭이라, 그 처절한 전장터가 지금은 이런 촌구석(정말 학생들도 잘 안다니는 촌..;;)이라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듭니다.

  3. Favicon of http://tele-mann.tistory.com BlogIcon telemann 2011.09.06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어 공부를 하다가 일본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발해지랑님 블로그를 알게되었습니다.

    실시간으로 못 보고 복습하다 보니,, 댓글이 늦었네요.

    글 올라오면 종종 댓글 달아드리겠습니다. ^^

  4.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9.07 0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은 참 가혹한 것이 돋보이는 미남자였던 요시쓰구에게는 나병을 내렸고, 통일을 눈앞에 둔 노부나가에게는 직전의 죽음을 선사했으며, 자식을 그리도 사랑하던 히데요시에게는 자식의 끔찍한 죽음을 내려주었으니 말입니다. 핀트가 엇나간 듯 합니다만, 요시쓰구란 인물은 곱씹을 수록 새로운 맛이 나는 사람입니다.

    군사적 재능은 킨고를 상대로 보여준 분전을 생각해 보았을 때 더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으며(히데요시가 요시쓰구에게 병사 십만을 주어보고싶다고 했던가요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군요.)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이자, 뛰어난 재사였으니 모든 면에서 준수한 팔방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을 등록하기에 생각난 것입니다만, 어쩌면 요시쓰구는 패배를 알고서도 미쓰나리의 편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병이란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이었을테니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7 0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구가 미남이었다는 것은 후세의 창작이 아닐지... 보통 뛰어난 활약을 한 사람은 어느새 미남이 되는 경우가 있나 보더군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도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 등장했을 때만해도 그다지 미남은 아니었나 본데 이후 절세의 미남이 되었듯이요.

      확실히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엄청난 활약을 했습지요. 머리 하나로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의 마에다 군 1만 5천을 되돌리게 하였으며, 사나다 부자를 끌어들여 토쿠가와 주력군 3만 이상을 시나노에 묶어 놓았으니까요. 아마 요시츠구가 없었음 서군은 아예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났을 가능성도 있었습지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병들어 죽느니 전쟁터에서 죽길 바랬을지도.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7 1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네가 미남이 아니었다는 것을 전 튀어나온 이빨을 근거로 한 말이었는데, 당시는 그것이 추남이 아닌 용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자세히는 耿君님의 블로그를 참조해 주시길.
      http://hyunk02.egloos.com/4126094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9.07 2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고가는군요. 요시쓰네는 토끼상이었단 것인가(..)

      사나다 유키무라가 받아온 미화를 생각해본다면, 발해지랑님의 말씀이 사실일 듯합니다. 요시쓰구 본인은 지하에서 이 얘기를 알게된다면 웃고 있겠군요.

      쓸데없는 소리입니다만 어언 100명을 다 채워가는 듯 한데, 요시쓰구는 몇번째인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8 0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구가 84번째 였습니다.
      어서 빨리 이 책을 끝내고 신장공기 해야 하는데 말입죠..--;

  5. Favicon of http://pray4abyss.egloos.com/ BlogIcon 로날드럭 2011.09.14 19: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임 전국바사라3에서는 좀 다크하게 나오더군요.
    분고 오토모 씨와 연줄이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만,
    발해지랑님도 여기에 그닥 동의하시지는 않는 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14 2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에 주석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만약 오오토모[大友] 가신 출신이라면 오오토모 소우린[大友宗麟]이 그런 것을 언급했을 것 같은데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오오타니 씨[大谷氏]가 큐우슈우[九州] 출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9.15 2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이랑 같이 흰두건이 아이콘이 된 것 같은 요시츠구랄까;;
    요시츠구 얼굴 그림은 요괴나 악령 뺨치게 그려놨군요(...) 히데아키가 생각보다 일찍 죽어서 그런지 요시츠구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연관 스토리도 나름 임팩트가 강한거 같네요.

    각주 2번에 히데이에 한자가 나오이에로 써져있네요.

  7. 권지용 2011.09.17 2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에이 일러 탓에 첫인상은 타이의대모험의 미스트번 코스프레인줄 알았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18 1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비슷한가 보죠? 어떤가 해서 찾아보려고 해도 어떤 것인지 모르겠군요. 검색해도 전국바사라의 것만 나와서요
      (전국바사라는 마치 떠돌이 검심의 시시오 같은 이미지군요. ^^)

번역 중인 센고쿠 무장 100에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이 다 등장했군요.
그걸 기념하여, macho를 그리라면 동양권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힐 것 같은 북두의 권 작가 하라 테츠오(wiki_jp)[原 哲夫]의 센고쿠 바이올렌스 만화 '꽃의 케이지(wiki_jp)[花の慶次]'에 등장하는 토쿠가와 사천왕입죠.


왼쪽부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순 입니다.

장면 설명을 좀 하자면 '혼노우 지의 변[本能寺の変]' 후 이에야스 일행이 '이가 도피행[伊賀越え]' 중 지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찌질대면서 배를 가르려 하자 안타까워 하는 사천왕 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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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otokan 2009.11.25 14: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꽃의 케이지... 해적판으로 봤던 기억이 있네요.

    말 그대로 마초심을 관통한 작품이었죠. ㅎㅎ



    아마 일몽암풍류기라는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습니다. 혹, 이 소설이 원작일지도 모르겠군요.(확실치는 않습니다)

    만화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만, 조선과 관계된 내용이 담겨있어서 읽으면서 기분이 나빠져서 책을 놓아버렸습니다. 여주인공이 가야히메였던가... 가라히메였던가 뭐 그랬던 것 같은데요.

    가격에 비해서 볼륨이 두터운 문고본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0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화에서도 원작이 타카 케이이치로우[隆 慶一郎]라고 하니 맞는 것 같습니다.

      만화는 확실히 북두의 권 켄시로우가 장난기를 장착하고 센고쿠로 이동한 듯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읽어 본지 오래 되어서 저도 기억이 잘 안나지만..
      만화는 그런 부분 때문에 조선으로 가는 부분을 제외하고 오키나와로 가는 것으로 떼웠다고 하는군요.

      伽姫...라고 나오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かひめ??

      언제 샀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있는 것은
      세금 제외하고 667엔.
      교보 가격으로 9190원 주고 샀습니다...
      무려 560페이지.... 확실히 가격에 비해 말씀대로 볼륨감이 있습니다.

      만화는 문고판으로 4권까지 가지고 있습죠. 이것도 있을 때마다 모으고 있는데...옛날 책이어서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1.25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클론 장수 넷이 죄다 말리려 들진않고 X마려운 표정으로 그냥 보고만 있군요(오오오..-_-..)

    그래도 여기에서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제일 쳐지는(무려 뒷줄)건 코에이 겜이나 별 다를바 없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0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실제론 저들이 토쿠가와 사천왕이라고 나오진 않습니다. ^^;

      무엇보다... 꽃의 케이지 자체에서 토쿠가와 사천왕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다보니...

      단지 이가 도피행에 토쿠가와 사천왕 모두 참여했다고 하며, 우연찮게 만화에서 저렇게 네 명이 한꺼번에 그려져 있길레 제가 그냥 토쿠가와 사천왕이라고 우기는 것 입니다.

      그래도 실제 초상화와 제일 닮은 것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인 듯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f/Sakakibara_Yasumasa.jpg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9.11.27 14: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엇 제 모습이 있군요 ㄲㄹㄲㄹ

 

 에도 시대[江戸時代], 오우미[近江] 히코네 번[彦根藩] 이이 가문[井伊家]은 대대로 대로(大老[각주:1])를 배출하는 후다이 다이묘우[譜代大名[각주:2]] 필두의 가격(家格)으로 유명했다. 막말(幕末) 즈음,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각주:3]]과 사쿠라다 문밖의 변[桜田門外の変[각주:4]]으로 잘 알려진 이이 카몬노카미 나오스케[井伊 掃部頭 直弼]가 이 가문 출신이다.

 센고쿠[戦国] 시대, 이이 가문은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라는 호칭으로 용명을 떨친 용맹무쌍한 전투집단이었다.  이이 가문의 깃발, 표식, 장병의 갑주는 물론 마갑(馬甲)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 그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무리가 전쟁터를 질주한 것이다. 이 집단을 처음으로 이이 가문에 도입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였다.

 적비대는 원래 타케다 가문[武田家]의 것으로 나오마사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즉 1582년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죽은 뒤, 이에야스[家康]는 타케다의 유신(遺臣)들을 나오마사의 가신단에 편입시켰다. 나오마사는 새로 타케다의 유신들을 포함한 가신단을 편성하면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군단이 적비대였다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그간의 사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코우슈우 군[甲州[각주:5]軍]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었다. 누구나가 이 타케다의 유신들을 원했다. 그런 타케다의 유신들이 이이 가문에 배속되게 된 데에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가, “젊고 신참인 나오마사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그의 휘하로 배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 정도는 자신에게 배속해 달라고 부탁하며, 만약 들어주지 않을 경우엔 나오마사와 결투를 벌이겠다고까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타다츠구는 가당치 않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다.
 “원래 주군께서 나에게 배속시켜 주신다는 것을 내 멋대로 나오마사에게 배속시킨 것이다. 만약 자꾸 네놈이 툴툴거리면 네놈 일족을 모두 꼬챙이에 꿰어버릴 테다”
 이 완고한 타다츠구의 태도로 인해 타케다 유신단은 이이 가문 배속이 결정된 것이다.

 나오마사는 토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인 무공파(武功派)이지만 사천왕의 다른 멤버들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들 처럼 조상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것이 아니라 나오마사의 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토쿠가와를 섬긴 신참이었다.
 이에야스를 섬기기 전까지 이이 가문은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이이노야[井伊谷]라는 곳에서 살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속해 있었지만, 부친 히고노카미 나오치카[肥後守 直親]가 누명을 쓰고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에게 살해당하자 나오마사는 도망쳐 친족의 손에 키워지던 중 이에야스가 나오마사를 발견하여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이 이례적인 발탁과 그 후 이에야스의 지나친 총애로 인하여 나오마사는 이에야스 남색(男色) 상대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신참이었지만 나오마사에 대한 이에야스의 신뢰는 두터워 토쿠가와 가문에서의 지위를 높여 갔으며, 나오마사도 또한 충실한 가신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며 자신 스스로도 후다이[譜代[각주:6]]라 여기고 있었다.

 후년 히데요시[秀吉]와 만나러 이에야스가 상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7]]를 이에야스의 성에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야스가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오오만도코로의 인질 역할은 끝나 그녀를 반환하게 되었다. 이때 나오마사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아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히데요시는 나오마사의 빈틈없는 호위에 기뻐하며 공을 치하. 다음 날 나오마사를 위한 향응의 자리를 만들어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에게, “자네는 요전까지만 해도 나오마사와 동료였으니 함께 참석하게”라며 동석시켰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의 고굉지신이었지만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인물이었다. 카즈마사를 본 나오마사는 참석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 카즈마사는 우리 주군인 토쿠가와를 조상 대대로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군을 배신하고 전하(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겁쟁이이기에 졸자는 동석하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나오마사의 후다이[譜代] 의식을 강조한 일화이다.

 이어서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の役[각주:8]] 때의 일이다. 장기전으로 인해 장병들의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이 없도록,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나 사카이[堺]의 상인들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여 장병들이 술잔치나 춤, 노래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활발한 진중 위안을 행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까지 쿄우토에서 불러들였고, 여러 다이묘우에게도 그들의 처첩을 부르도록 권했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축제와 같은 떠들썩함이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오마사는 한 가지 꾀함이 있었다. 빠질대로 빠진 히데요시는 불과 14~15명의 호위만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나오마사는 슬며시 이에야스에게로 가서,
 “주군.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히데요시의 목을 취하기는 아주 쉽사옵니다”
 야심만만한 나오마사의 헌책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천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으켜선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에 따라야 한다. 이것을 명심하도록”
 하고 엄격하게 나오마사를 꾸짖으며, 어떤 일이건 성취될 때에는 때의 추세라는 것이 있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나오마사는 동군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9월 15일 결전 당일 새벽. 나오마사는 흰 갑옷을 입고 짙은 안개 속에 말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정찰을 나가 낌새를 엿보다 전투가 시작되자, 말 재갈을 쥐고 있던 부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싸우다 전사하면 운명일 뿐”
 이라며 적진으로 돌입했다고 한다.
 또한 아군인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하 장수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가 막아 서자[각주:9], 정찰을 나간다고 속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고도 한다.

 이 결전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배반케 한 동군이 서군을 총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그때 패잔병 500여기를 이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동군 진영을 스치며 쏜살같이 질주하여 퇴각하였다.
 나오마사의 이이 군은 곧바로 이를 추격, 시마즈의 후군[殿]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를 전사시켰지만, 난전 속에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던 나오마사는 시마즈 군의 저격에 오른 팔을 맞아 부상 당해 낙마하였다.[각주:10] [각주:11] [각주:12]

 이때의 상처로 나오마사의 오른 팔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세키가하라 전쟁 다다음 해인 1602년 7월 나오마사는 거성(居城)인 사와야마[佐和山]에서 죽었다.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561년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만치요[万千代]. 이에야스[家康]를 섬겼으며 1582년 이에야스코우슈우[甲州] 경영에 공적을 세웠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에 종군. 1588년 텐노우[天皇]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때 히데요시[秀吉]의 알선으로 종오위하(従五位下) 지쥬우[侍従]가 되었다[각주:13]. 배신(陪臣[각주:14])으로서는 파격의 대우였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으로 인해 코우즈케[上野] 미노와 성[箕輪城] 12만석에 봉해졌고, 후에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8만석으로 가증되었다. 1602년 42세에 죽었다.

  1. 중요 정책 결정을 할 때, 혹은 다대한 공이 있는 원로 대신을 위한 비상임 막부 최고위직...여담으로 채널 J에서 방영 중인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篤姫]에서는 '특별 정무대신'으로 번역되어 나온다. [본문으로]
  2.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부터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를 섬겼던 가문이나, 쇼우군[将軍]이 새로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 준 가문. 막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안세이[安政]는 당시 일본의 연호. 1858(안세이 5년[安政五年])~1860년 나오스케가 살해당할 때 까지 일어난 옥사. 당시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쿄우토[京都]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무단 조인하고, 나오스케 주도로 14대 쇼우군[将軍]이 키슈우[紀州]의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로 결정되자,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압한 사건. 덕분에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적들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 [본문으로]
  4. 안세이의 대옥에서 나오스케의 정적 중 중심적 존재인 미토 번은 번주의 은거, 전 번주의 장기 칩거, 가로들의 할복 등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에 불만을 품은 미토 번사 17인과 사츠마 번사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 次左衛門]이 에도 성[江戸城] 사쿠라다 문[桜田門] 앞에서 등성 중이던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여 살해한 사건. 여담으로 나오스케의 목을 자른 것은 주도한 미토 번사가 아니라 사츠마에서 혼자서 참가한 아리무라였다 . [본문으로]
  5. 카이[甲斐]를 달리 이리 부른다. [본문으로]
  6. 주가(主家)를 조상대대로 섬기는 가문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애미 [본문으로]
  8. 히데요시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9. 선봉은 무가의 명예였기에 함부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0. 시마즈 요시히로의 전투기인 [유신공관원합전기(惟新公関原御合戦記)]에는 이리 쓰여 있다 한다. [본문으로]
  11.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시마즈 가문의 병사 쵸우사 히코사에몬[帖佐 彦左衛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나오마사는 서군이 패주한 후 아직 움직이기 전의 시마즈 군에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큰소리로, “무엇들을 하고 있나? 요시히로를 죽여라!”라고 외쳤을 때 카와카미 타다에[川上 忠兄] 휘하의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앞으로 나아가 철포를 쏘아 나오마사를 맞추자 나오마사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맞은 것에 놀라 동요하는 동안 시마즈 군은 퇴각을 시작했다고 한다.[旧記雑録後編 三] [본문으로]
  12. 덧붙여 이이 가문의 사료 [井伊家慶長記]에 따르면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쏜 총탄은 갑옷 오른 쪽 옆구리에 맞았지만 갑옷이 튼튼했기에 튕겨서 오른 팔에 맞았다고 한다. 나오마사는 이 충격에 창을 떨군 후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효우부쇼우유우[兵部少輔] 겸임. 이때 혼다 타다카츠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무가(武家)가 관직을 얻었다는 의미인 쇼다이부[諸大夫]인데 비해, 나오마사는 지쥬우[侍従]가 되어 쿠게[公家]가 되었다. 이는 당시부터 나오마사가 토쿠가와 가문 필두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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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11.18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아닌지..^^;

    나오마사가 신참이라니. 꽤 놀라운 걸요?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쿠게가 되는 기준이 뭔가요? 아무리 살펴봐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8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고쳤습니다. 꼼꼼히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참치고는 후세의 영향이 막강 & 유명한 것 같습니다.

      당상가(堂上家)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쥬우[侍従]라는 관직이 종오위하(従五位下) 임에도 불구하고 궁정[内裏]에 입궐이 가능하였으며, 그런 궁정 입궐 가능한 자격을 당상(堂上)이라 하였고, 궁궐 입궐 자격이 없던 사람이 생긴 것을 쿠게나리[公家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12시부터 티스토리가 점검 들어간다고 급하게 쓰는군요. 내일 다시 정리하여 쓰겠습니다.

  2. 나라 2009.11.19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뭘요! 좋은 글 올려주시는 발해지랑님께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발해지랑님께서 자주 틀리는 맞춤법을 지적해서 올릴까 생각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저는 일본어 실력이 바닥이라, 듣는 것과 말하는 건 그럭저럭 하는데 그외엔 전혀.

    당상가가 된다는 듯이었군요.. 종오위하 관직 중 시중이 입궐 가능한진 몰랐습니다.
    승전 가능한 지위는 어느 정도인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웃!! 미리미리 말씀해주세요~ 있었음. ^^;

      원칙적으로는 종삼위[従三位]이상은 입궐이 가능했던 듯 싶습니다.(산기[参議]의 경우 사위[四位]라도 의정관이라는 위치 상 입궐이 가능했다 합니다).

      나중에 원정(院政)가 확립되면서 좀 복잡해 진 것 같습니다....이런 쪽은 아직 제 안에서 정리되지 않아서 뭐라 말씀 드릴 수 없군요.

      지쥬우[侍従]는 역할 자체가 텐노우 곁에서 시중드는 것이다 보니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일본은 환관이 없다보니 그런 조선이나 중국의 환관들이 하는 일 중 일부를 지쥬우가 했던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9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이 나오마사가 당대에 손꼽힐만한 미남이었던 건 사실인 듯 하나, 당대에 손꼽힐만한 잔인성을 지녔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야스의 명령을 너무 '외골수'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낯부끄럽지만 (?) 나오마사가 너구리의 남색 상대라는 말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듯 합니다. 워낙 초고속 승진을 한데다가 요지 중의 요지인 히코네에 둘 정도였으면 나오마사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듯 합니다. ( 에헴 ) 원래 사랑하는 사이일 수록 더 믿음이 돈독해지는 법이니깐 말입니다 ㅎㅎ

    다만, 나오마사나 사위인 다다요시가 세키가하라 이후 너무 급하게 죽은 감이 없지 않네요. 이 쪽 관련 음모론은 없으려나요?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쵸... 이이 가문 휘하에 있던 사람들은 아침에 나올 때 미리 조상들에게 인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신참에게 그렇게까지 우대를 한 이유를 댄다면 굉장히 유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후장파기는... 다만 다른 예가 없다는 것이 저에게는 쪼금 이해가 안가긴 합니다.

      이이 가문은 쿄우토 슈고[京都守護]였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래서 이이 가문 하급 가신이라도 말을 키워야 했었다 합니다. 쿄우토에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시는 즉시 이동할 수 있도록...그러나 사쿠라다 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살해 당하면서 막의 눈 밖에 나, 그 대신해서 설치된 것이 신선조의 상위 조직으로 유명한 쿄우토 슈고쇼쿠[京都守護職]라고 합니다.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타다요시와 나오마사는 친번(親藩)과 후다이[譜代]에서 각각 워낙 막중한 임무를 띈 중요 인물들이라 오히려 그들이 죽은 것이 막부에게 큰 손해였다고 생각합니다.

  4. shiroyume 2009.11.19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손이 그 유명한 막말의 이이 나오스케지요. 어찌보면 어울리는 최후. 거기다 이 이이 가문은 메이지 정부 이후에도 시장까지 하는 인물이 나오죠. 역시 중간보스 가문?
    말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자기는 죽도록 싸워봐야 20만석 가량이었는데 철부지 어린애들한테 자기 아들이라고 50만석 얹어줬는걸 보면 화가 끌어오르지 않았을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년엔 젊었을 때의 날카로움이 빠져 뭐든 허허~ 하고 미소짓는 중년이었다고 합니다.

      말년의 에피소드로, 자기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코쇼우[小姓]가 나오마사의 과자를 몰래 집어 먹었는데, 그걸 문 틈으로 보면서도 "어찌할고~어찌할고~"하면서 웃었다고 하더군요.

      어떤 기분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오와리 번[尾張藩] 자체가 나오마사의 사위 타다요시[松平 忠吉]가 죽으면서 생긴 중요한 빈 공간을 급격히 메워야 했기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1.20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뻘플이지만....
    천도에서 토라마사, 마사카게, 나오마사만 적비를 갖고 있던가... 암튼 맞으면 무섭더군요;;;

  6. 맹꽁이서당 2009.11.20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이 인물이 어디서 공을 많이 세웠길래 도쿠가와가 가신 중 거의 으뜸 자리를 차지했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대망에서도 그렇고 이 글 요약에서도 사실상의 첫 출전은 코마키-나가쿠테 전쟁 같은데, 그 이후 세키가하라까지 도쿠가와 가문이 전력으로 응한 전쟁은 거의 없지 않나요? 호죠가 정벌도 전투 보다는 병력 수로 압도한 경우라고 생각하구요.

    대망에서는 나오마사 첫 등장 씬에서 이에야스 첫사랑 여인의 친척 아이라고 묘사했던데, 남색설은 별로 반기지 않기에 차라리 그런 소설적 구성을 믿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4 0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노부나가 사후 공백지가 된 시나노[信濃], 카이[甲斐]를 두고 호우죠우 가문[北条家]과 싸울 때 전권대사가 되어 휴전 & 동맹을 성립시킨 공이 무지 큰 듯 합니다. 요다 노부시게[依田 信蕃]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의 후방 교란이 있었다 하나 총체적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호우죠우와의 교섭에서 이에야스가 바라던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공이 큰 듯 합니다.

      첫 출진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토오토우미[遠江] 시바하라[芝原]에서 일어난 전투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 패하여 이에야스와 몇 명들과 도망치던 중 허술한 식사를 하던 중 혼자서 먹지 않는 나오마사를 반찬투정 부린다고 생각한 이에야스가, '니도 먹어라'...라고 하자, 나오마사는 '남들이 식사하는 동안 보초를 서겠습니다. 행여 적이 오면 모두 도망가는 동안 목숨을 바쳐 모두 피할 시간을 벌겠습니다'...라고 하여 이에야스를 감동시켰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에야스-나오마사 그렇고 그런 관계는 좀 믿기 힘들더군요. ^^

  7. 보통사람 2009.11.26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시마즈가문이 역전의 용사들을 많이 잡았네요...

    오오토모 소린 - 규슈전체의 60%를 영유하던 군웅.
    시마즈가문의 침공을 받은 이토가문을 구원하러 8만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계략에 빠져 대패하고 겨우 도망침. 많은 인재들이 전사했고 패배가 알려지자
    오오토모가문의 많은 가신들이 류조지, 아키츠키 등과 내통하며 반란을 꾀하는등
    적지않은 후유증...

    류조지 타카노부 - 히젠의 곰이라 불린 군웅. 아리마 가문을 치기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아리마 가문을 구원하러 온 시마즈군의 계략에 걸려 대패하고 전사.
    류조지가문의 많은 맹장들이 타카노부를 지키다 같이 전사.

    다카하시 쇼운 - 오오토모의 가신으로 5만의 시마즈군에 7백명은 군사를 이끌고 농성 끝에 전사

    초소카베 노부치카 - 아버지 모토치카, 소고 가문과 함께 규슈정벌에 참여했다가 대패. 아버지를
    먼저 후퇴시킨뒤 후위를 막다가 전사.

    이순신 - 노량에서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하던 중 시마즈군의 철포사격에 전사.

    이이 나오마사 - 세키가하라에서 후퇴하는 시마즈군을 추격하다가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토모 이하의 사람들은 노부나가가 살해 당하지 않았음 그냥저냥 살았을지도...(노부치카는 미묘)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중재로 오오토모-시마즈 간에 화평이 성립되었다고 하더군요.

      임진왜란 같은 노부나가의 조선 침략이 있었겠지만...역사의 if가 어떻게 흘러갈지...

  8. 2009.12.01 0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2009.12.02 0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죽고 나서 100년 뒤,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의 학자 겸 정치가 아리이 하쿠세키[新井 白石]는 야스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役] 이후 소극적이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이에야스[家康]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막정(幕政)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였기에 그런 마사노부와 대립하면 주가(主家)인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그 마음 속을 헤아리며, 
 ‘그 당시의 무장으로서는 특별한 일이었다’
 고 야스마사라는 인물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성실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미카와[三河] 무사로, 같은 나이의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쿠가와 군단의 으뜸가는 맹장(猛將)이었다.

 야스마사는 미카와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에 16살의 나이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때 무공을 세운 덕분에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어 이에야스의 이름글자 중 ‘야스[康]’를 하사 받았다. 이후 이에야스가 출진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직속군[旗本] 선봉을 맡았으며, 1566년에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직속군 선봉부대 부대장[御旗本先手侍大将]'이 되어 토쿠가와 군단을 지휘하여 그 용장()을 전쟁터에 드러내게 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秀吉]와 싸운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 때 야스마사는 적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서 격문(檄文)을 만들어 히데요시에게 욕설을 선사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덕분에 출세한 가신[家臣] 주제에 지금은 그 주군의 아들을 상대로 활을 쏘고 있다. 이야말로 팔역의 죄[각주:2]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도(非道)한 히데요시와 같은 편에 서는 자에게는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군의 아들’이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로, 이에야스는 노부카츠를 맹주로 하여 히데요시와 싸웠던 것이다.
 야스마사의 격문을 본 히데요시는 분노하였다.
 “코헤이타[小平太]를 산 채로 잡아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은상은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
라고 사졸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히데요시의 분노도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이유 중 하나는 이에야스에 대한 야스마사의 충성스런 성격이 히데요시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1586년의 일이다. 코마키-나가쿠테가 끝난 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강화를 맺었다. 히데요시는 토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냈다. 그때 함을 가지고 온 사자로 온 것이 야스마사였다. 히데요시에게 알현하였을 때 히데요시는,
 “여어 야스마사 왔는가. 코마키 전투 때는 자네의 잘린 목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네의 충성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네”
 하고 가볍게 언급하였을 뿐이었으며, 거기에 함을 가지고 온 중요한 사자가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같은 해 11월 9일에 종오위하(従五位下) 시키부노타이후[式部大輔]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날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로 불리는 동료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도 서임되었다. 토쿠가와 가신 서임의 시초였다.

 세키가하라 결전 시에 야스마사는 히데타다[秀忠 – 후에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에 속해 있었다
 히데타다 군은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간 이에야스의 본군과 다른 길을 취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서상(西上)하였다. 야스마사 외에 혼다 마사노부,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 등이 속해있었다. 양군은 미노[美濃]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행군 도중 강적이 나타나 히데타다 군의 서상을 막았다.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부자였다.

 기략을 연발하는 사나다 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히데타다 군은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굉장히 불쾌해 했다. 히데타다가 겨우 오우미[近江] 쿠사츠[草津]에 도착했을 때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3일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히데타다는 안절부절 못했다. 히데타다 진중은 침묵이 지배하였다. 이때 결심한 야스마사가 밤에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야스마사는 우선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사죄한 뒤 이어서 소신을 당당히 말하였다.
 “주군의 분노가 만약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 맞추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라면 주군에게도 잘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자가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물리치고자 했으면 어째서 사자를 보내 빈번히 연락을 취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고 이에야스에게 따지며,
 “언젠가는 천하인(天下人)이 되실 히데타다 공이 무공 부족으로 인하여 부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무시한다면 이는 히데타다 공만의 치욕이 아니라 주군 자신에게도 그 비웃음이 쏟아질 것입니다”
 고 논리 정연히 설득하였다. 야스마사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분노를 풀고 다음 날에는 히데타다와 대면하고 격려하였다.
 히데타다의 한없이 기뻐하였다. 자신의 가문이 있는 한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야스마사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야스마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미담과 같은 이야기 외에 야스마사에게는 이에야스에 대한 반골심을 나타내는 일화도 전해진다.
 1606년 4월, 야스마사의 병이 중하여 이에야스, 히데타다의 병문안 사자로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가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다. 사자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이불 안에서,
 “저도 장(臟)이 썩어 이렇게 추해졌습니다”
 고 빈정대며 말했다. 예전 작전회의에서 혼다 마사노부가 발언하였을 때 마사노부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된장이나 소금이 늘고 주는지만 신경쓰는 장이 썩은 사람이 전투에 관해서 무엇을 안다고 말을 하는가?”
하고 매도한 적이 있었다.
 병상에서의 말은 마사노부 등을 중용하는 이에야스를 비난하는 것이고 하였으며, 평화로운 시대에 들어와 잊혀져 가는 존재인 예전 전쟁터 용사의 자조(自嘲)이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 중 한 명. 1581년 토오토우미[遠江] 타카텐진 성[高天神城]를 공격하였을 때 적의 수급 40을 취했다 한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 – 후에 칸파쿠[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군을 물리쳤다. 1590년 토쿠가와 에야스[徳川 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 10만석에 봉해졌다. 1606년 악성 종양을 앓아 5월에 죽었다. 59세.

  1. 잇코우 종[一向宗 - 정확히는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 반란. 미카와 잇코우잇키[三河一向一揆]는 세금을 내지 않던 미카와의 혼간지 계열의 절에 세금 징수하려 하다가 그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 [본문으로]
  2. '八虐'라고도 쓴다. 율령제 시대에 가장 무거운 죄. 기본 사형이며 감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텐노우[天皇]에 살해에 관한 모반(謀反), 황거나 황릉에 관한 불경인 모대역(謀大逆), 일본 국가에 관한 반란획책인 모반(謀叛), 신사에 관한 불경인 대불경(大不敬), 존속살해인 악역(悪逆), 대량 살인죄인 부도(不道), , 존속살인 이외에 존속에 관한 죄인 불효(不孝), 주군에 관한 배신인 불의(不義)...인 여덟가지 죄. 여담으로 이중 존손에 관한 악역, 부도, 불효의 경우 당시 일본에 유교논리가 없었기에 사법(死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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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1.10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쌍류의 게임에서는 언제나 클론장수(..;)의 안습함에 사실 신장의야망류에서도 전용 전법도 없고 참 어정쩡하다 싶었는데.. 에, 역시 게임은 게임이니까요. 실제론 역시 4천왕 다운 대인배스러움을...

    여담이지만 암이란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수년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아.. 역시 문제는 세키가하라였으려나(..;)

    그나저나 그저께 하마마츠도 지나갔었는데 왜 이에야스가 떠오르지 않았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천왕 중 하나가 클론이란 말입니까!!!
      ...하긴 사천왕 중 No.1격인 사카이는 나이도 나이니 만큼 별개로 치고, 톤보키리라는 전용무기를 장착한 혼다 타다카츠나, 적비대[赤備え]를 둔 나오마사와 비교하면 좀 임팩트가 딸리긴 하는 편인 듯.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니...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개연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타다 군의 실질 No.1 참모 격(경험이나 명성에 더해 동원한 군사도 히데타다 직속군 15000을 제외하곤 토쿠가와 가문에서는 최다인 3000)이었을텐데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없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존경하지만 아산 지날 때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괘의치 마시길...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0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휘관들을 많이 보유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면에서 항우나 유비, 제갈량이 결국 천하를 못 잡은 것은 그런 인재의 폭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요.

    ( 아, 물론 촉나라는 인재가 넘쳐도 국력이 부족해서 졌겠지만 )

    대망팬들에게는 야스마사보다도 고헤이타가 더 익숙하다는 점에서 대망은 획기적 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인재도 인재지만 그것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보급, 행정, 의사결정에 필요한 소통 등등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달리(그러니까 대망이 나왔던 시대) 요즘 소설류는 통칭보다는 이미나[諱]를 주로 쓰는 것 같더군요. 제가 읽은 같잖은 소설만 그렇게 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개인적으로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보다는 시바타 곤로쿠[柴田 権六]가 아직은 더 익숙하더군요. ^^...저도 대망이 첫 일본 소설이거든요.

  3. 골룸 2009.11.10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다다카츠와 더불어 전란의 시기에 용감히 싸운 무사였죠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도도다카토라 처럼 변화무쌍한 사람도 있는데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주석 단 거 다 날라가고, 나름 교정했던 것도 그대로군요... 초벌 올려서 실례했습니다....그럼에도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이에야스 탓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타다카츠나 야스마사가 전쟁터만의 인물로 인식되긴 하지만...

      후년 에스파니아의 돈 로드리고가 오오타키 성의 거대한 모습에 타다카츠의 둘째 아들 타다마사가 왕인 줄 알았다는 것이나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여러 장수들에게 수 많은 편지를 보내며 동군 측으로 끌어 들인 것을 보면 타다카츠의 정치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야스마사도 또한 이에야스가 행한 칸토우 다이묘우 배치의 틀을 제시한 인물인 것을 보면 그 역시도 야전공성만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정치력과 실적있는 인물들에게 아무런 상이나 영지 가증도 없이, 거기에 정치 중추에서 쫓아낸 이에야스를 아무리 주군이라곤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유교의 '충'이란 논리가 도입 이전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 있었을 것 같구요.

    • 골룸 2009.11.12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찌 보면 매정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2대째로 넘어가는데 좀 부담이 될만한 인물들을 사전에 정리 한 것도 같고
      아무튼 그런 와중에도 도쿠가와 가문내에 큰 문제 없이
      혼다나 사카키바라 가문이 계속 됐던 걸 보면
      가문내의 결집이나 충성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뭐 이에야쓰 입장에서야 쓸만큼 다 쓰고 어느 정도 포상도 한거니까요
      계속해서 느끼는거지만 이에야쓰는 참 짠 사람인거 같아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 사극 용의 눈물....인가에서 태종 이방원이 공신들을 내치면서 하는 말이....
      "저들이 기세등등하여 세자를 업신여길 것이 두렵소이다"....비슷하진 않지만 저런 뉘앙스였을 것입니다.

      공신들을 토사구팽하는 제왕들의 맘은 저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련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이에야스는 천하인의 그릇이 아니라며...
      "그는 가신들에게 영지를 아낌없이 나눠줄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를 잡진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짠 사람이긴 했나 봅니다.(...무엇보다 우지사토가 실제로 저런 말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4. 나라 2009.11.11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의 최대의 잘못은 히데타다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야스의 중뿔난 마음도 이해할만 합니다. 결과적으론 세키가하라 결전에 승리했지만, 히데타다군이 제대로 오지 못한 것은 확실히 불안 요인이었으니까요. 히데타다군이 제 시간이 왔으면 완승을 쉽게 보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2 0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다만 잘 나가는 부잣집 도련님, 말 좀 듣게 하기는 엄청 힘들 듯 싶습니다.

      사족으로....세키가하라 때 토쿠가와 가문의 실질적 전투집단은 이에야스 휘하에 있던 토우산도우[東山道] 방면군이 아니라, 히데타다가 이끌던 나카센도우[中仙道] 방면군이라 하더군요. 전투에 적합한 토쿠가와 가문 내의 만석 이상을 가진 무장들은 타다카츠와 나오마사를 제외하곤 히데타다 휘하에 속했다고 합니다.

      만약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히데타다 군이 있던 전쟁터에 있던 상태였다면 후쿠시마 마사노리, 쿠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토쿠가와 군만으로 승부를 결정지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또한 나중에 후쿠시마, 쿠로다 등에게 전공에 따른 막대한 영지를 줄 필요도 없었을 테고요.

  5. 나라 2009.11.12 1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나중에 후쿠시마에겐 제대로 엿을 먹이지 않습니까;;;
    히데타다가 제 시간에 오고 서군이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항상 그게 궁금하더군요. 만약 미츠나리가 이겼으면 가마쿠라 시대의 싯켄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이에키[改易]라는 손이 한번 더 가면 그 만큼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에도가 아닌 자기 영지에 있을 때 카이에키 영이 떨어졌다면 과연 역사처럼 순순히 응했을지는 궁금합니다만...

      뭐 그래서 참근교대라던가 일국일성령이라는 보험이 있었긴 합니다만, 이외로 히데요시 은고 다이묘우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면 서국에 몰려 있었던 만큼 다시 전화의 시대로 돌아갈 확률이 0%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불씨를 세키가하라에서 히데타다가 늦음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이라...개인적으로는 서군이 승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미 서군은 높은 곳을 전부 제압하여 동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포위하고 있었고, 동군은 전부 그 아래 혹은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던 입장인지라...
      (포진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ja/0/05/Sekigahara.png )

      장기전으로 가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군사들이 동군 후방 보급을 끊을 수 있는 반면 서군은 바로 뒤편이 이시다 미츠나라의 영지인지라 보급면에서는 서군이 비교적 자유롭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는 어땠을까요...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나중에 정쟁에 패하여 한때의 인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6. dsfsd 2012.03.23 04: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 - 서군 - 시마즈 모리 - 임진왜란의 주역들일 뿐 아니라 나중에 도쿠가와 막부 전복하고 메이지유신으로 조선을 다시 쳤던 그 뿌리 아닙니까 과거의 일이지만 고소하다는 얘기밖에 안나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

      ...근데 본문글과 리플은 좀 매치가 안 되는군요. 단지 이름이 거론되어서인가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알기 힘들군요. 인과응보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인가요?

.

 

 그랬다. 이에야스[家康]에게 측실은 다수 있었지만, 정실이었던 츠키야마도노[築山殿] 5년 전의 어느 안 좋은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한 후 아무도 정실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츠키야마도노와의 부부싸움에 질려있었던 만큼 홀아비 생활의 자유로움을 즐기는 듯한 상태이기도 하였다. 요약하면 독신이기는 했다.

 나이는 44. 신부가 되는 아사히히메는 43세이며, 원래부터 미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밭에서 일하였기에 피부가 쭈글쭈글했고, 햇볕에 탄 잔주름이 깊어 화장으로는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거기에 출신의 미천함은 유명했으며, 지금까지 관위도 없는 무사의 마누라였다. 그런 여성을 이에야스가 받아들일지 어떨지……

 

-가부가 어떻든, 우선 지금은 해보자.

 그 중매를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서는 형식으로 하여, 사자(使者)로 노부카츠의 중신으로 지금은 하시바 가문[羽柴家]의 직속 신하[参]가 되어 있는 히지카타 칸베에[土方 勘兵衛], 토미타 사콘[富田 左近]들을 하마마츠[浜松]로 내려 보냈다. 히지카타 칸베에는 언변이 뛰어난 남자였다. 이에야스 앞에서 천하와 양 가문의 안태(安泰)를 위해서 이토록 경사스런 일은 없다 고 열변을 토했다. 이에야스는 단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침묵을 지켰다. 마지막에 입을 열어,

 

 하룻밤 생각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자네들의 면목을 잃게 하지는 않겠다

 

 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가 중신들을 모아 상의를 하고자 할 즈음에는 이미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중신들 대부분이 안색을 바뀌고 혐오감을 드러내며 반대하였다. 주가(主家)에 어디의 개뼈다귀인지도 모르는 미천한 피를 섞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종삼위(從三位) 곤다이나곤[大納言]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닥쳐라

 

 이에야스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감정론을 백날 밤 들어보았자 아무 소용없었다. 실제로 그 미천한 출신의 43세 노파와 살을 맞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이 이에야스 자신이며 좋고 싫다는 감정을 먼저 내세운다고 하면 자기부터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 점을 꾹 참고 일은 어디까지나 정치 문제로써 결론을 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신랑 후보자는 굉장한 참을성을 갖추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이웃나라의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이마가와 일족에서 연상의 여성을 부인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부인인 츠키야마도노를 이십 수 년 뒤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강요로 인해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와 함께 죽였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 산하에 있던 토쿠가와 가문은 하루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며, 모든 것은 상기(上記)와 같이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 히데요시의 여동생이라는 막 이혼한 초로(初老)의 노파와 결혼하는 것도, 자신의 감정으로만 이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하시바 가문은 그 출신이 어떻든, 예전 이마가와 씨나 오다 씨[織田] 이상의 권세와 위세를 가지고 있고 또한 커져가는 중이었다. 정세가 그러한 이상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게

 

 이에야스는 다른 이유를 대서 가신들에게, 토쿠가와 가문 가신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워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사히히메는 그럴듯한 인질이라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히데요시는 천하의 반 이상을 손에 넣었지만 그러나 먼저 자기 쪽을 낮추어 여동생을 토우카이에 있는 자신에게 인질로 바치려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한번은 가신에게 시집 보냈던 사람을 되돌려 받아서까지 이런 일을 한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괴로움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정세를 보건대 - 하고 이에야스는 말을 이었다. 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시바 가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하(隸下)에 속할 수 밖에 없다. 이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안 이상, 될 수 있는 한 좋은 형태로 속하는 것을 생각하는 편이 득이다. 이 정도의 일로 그와 다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 정도의 일 이라는 것은 아사히히메와의 결혼문제였다.

 이에야스는 승낙하여, 그 뜻을 사자에게 전하는 한편, 가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에게 함을 들게 하여서는(納幣) 서둘러 오오사카[大坂]로 향하게 하였다.

 

 성공했구나~ 이런 경사스런 일이~”

 

 히데요시는 손뼉을 치며 굉장히 기쁜듯한 모습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내심 이 건을 이리도 쉽게 받아들인 이에야스라는 남자에게, 여태까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두려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재빠른 응답의 경쾌함도 저 뚱뚱한 사나이의 무략(武略)일 것이다.

 

 일이 진행되어 결혼 행사는 성대히 행해졌다. 아사히히메는 단지 몸을 그 진행에 맡기고 맡긴 채 멍하니 있는 것 외에는 없었다.

 몸이 오오사카 성[大坂城] 안에 있는 건물에서 가마에 태워졌다. 곧이어 텐마[満]에서 배에 옮겨졌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 쿄우[京]의 쥬라쿠테이[第]로 들여보내졌다. 이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이 그녀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다. 그녀는 식사를 하고 볼일을 보는 것 이외에는 단지 숨만 쉬고 있을 뿐으로, 모든 것이 알아서 진행되었다.

 

 결혼 성립 후 석 달이 지난 초여름.
 
그녀의 몸은 가마 위에 태워져 쿄우[]를 출발하였다. 그 결혼 행사의 담당관은 일족인 아사노 단죠우쇼우히츠 나가마사[
正少弼 長政], 오다 가문 일족인 츠다 하야토노쇼우 노부카츠[津田 隼人正 信勝], 타키가와 기다유우[ 儀太夫] 등으로 그들이 1000기 정도를 이끌고 앞뒤를 경호, 아사히히메 직속의 시녀와 호종의 무사 만으로 150여명, 부인용의 가마가 11, 끈으로 어깨에 매는 가마가 15채라는 마치 화려한 그림 속에 있는 듯한 행렬이 이어졌다.

 

 5 15일 하마마츠에 도착.

 그 날 곧바로 성 안에서 혼례가 치러졌고 끝나자마자 이 경사스런 행사가 무사히 마쳤음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토쿠가와 가문의 노신(老臣)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가 하마마츠를 출발했다.

 이에야스는 그날 밤, 당연하게도 아사히히메와 같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이에야스는 총애하는 측실이 많았다. 니시고오리노츠보네[西郡局][각주:1], 오만노카타[方][각주:2], 오아이노카타[方][각주:3], 오츠마노카타[都摩方][각주:4], 오차아노카타[茶阿方][각주:5], 오카메노카타[方][각주:6], 오카지노카타[お梶の方][각주:7] , 그 후궁들은 하나하나가 눈부신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기에, 이제 와서 이 노파 같은 아줌마와 같은 이불 속에서 즐기는 것에 색다른 맛을 추구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 인물의 놀라운 점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열심히 남들만큼이긴 했지만 첫날밤을 보낸 것이었다. 신부와 접하는 방식도 상냥하여, 피곤에 쩔어 있을 그 정신을 편안하게 하고자 필요한 위로의 말을 부족함 없이 사용하였다.

 아사히는 그에 대해 때때로 조그맣게 끄덕일 뿐으로 여전히 둔한 반응밖에 나타내지 않았지만 그러나 내심 신선한 충격에 놀라고 있었다.

 이에야스라고 하면 토우카이 제일의 무사[東海一弓取り]로 노부나가님조차 조심했다고 하는 대장(大將)이라 듣고 있었는데, 이 상냥함이란……  첫 남편인 소작농도, 다음 남편인 오와리[尾張]의 작은 호족 출신인 진베에[甚兵衛], 이만큼의 상냥함으로 아사히를 다뤄준 적이 없었다.

 그 감동이 아사히의 시선에 어리기 시작했을 때, 이에야스는 그것을 재빨리 눈치채고 이 다소 어려웠던 작업이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아 가벼운 안도감을 느꼈다.

 

 이에야스로서는 아사히를 상냥히 다루어야만 했다. 그 이불에 들어갈 때도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되었고, 오히려 총애하는 측실들과 접할 때 이상으로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사히에게 붙어 온 노녀(老女)가 다음날 아사히에게 그것을 들을 것이다. 들으면 곧바로 장문의 편지를 히데요시의 밑에 있는 노녀에게 보낼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아사히히메를 대하는 태도를 알고 싶어하여, 그 편지가 언제 오나 하고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이에야스에게 있어 이처럼 이불을 함께 덮는 것은 정치였으며, 아사히의 탄력 잃은 몸을 애무하는 것이 다소 인내를 필요로 했지만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있어 히데요시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중요한 기대는 이 결혼에 의해 이에야스가 상락(上洛)해 올 것이라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아사히를 그 집에 담아두기만 하고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으며, 토우카이의 경영에 열중하며 히데요시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식의 행동을 계속 견지했다.

 히데요시의 초조함이 커졌다. 이렇게 된 이상 이 혼례 이상의 희생을 치른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에야스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중요한 결심을 히데요시에게 하게 만들었다. 모친을 인질로 하마마츠로 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이에야스 상락에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보장을 하고자 하였다. 상락을 하여도 이에야스를 죽이는 일은 없다, 그 보증으로써 내 모친을 그 쪽으로 보낸다는 것이었으며, 이에야스에게 만에 하나라도 있을 시에는 이 모친을 죽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기도 했다.

 

 코이치로우, 그것을 어머니에게 말해봐 

 

 고 히데요시는 동생에게 명령하였다. 코이치로우 히데나가[小一 秀長]는 놀랐다. 칸파쿠[白] 히데요시라고 하면 이미 천하의 주인이다. 그런 분이 기껏해야 토우카이 수개 국의 지방 다이묘우[大名]를 상락시키기 위해서 여동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친을 인질로 받치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무문의 치욕이 아닌가? 하고 히데나가는 반대하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하마마츠님(이에야스)에게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상락을 재촉하고 따르지 않으면 싸워서 멸하면 될 뿐입니다.”

 

 고 말했다. 이것이 정론일 것이다. 필시 죽은 오다 노부나가라면 그렇게 했을 터이다. 이미 히데요시는 칸파쿠의 자리에 올라 그 판도에는 키슈우[紀州], 시코쿠[国]가 더해져 있었다. 이에야스를 복종시키기에 아무리 보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요시의 감각으로서는, 그러니까 무문의 치욕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의 강자(强者)가 시골의 약소한 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겸손이라는 것이지 치욕은 아니며, 세상도 당연히 그렇게 느껴 오히려 아름다운 일로 볼 것이다. 내 통일 방침은 쉽게 가는 것을 방침으로 하여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아끼고, 무력을 피하며,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한다. 방침은 그것 하나뿐이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현재 큐우슈우[九州] 정벌을 이미 휘하의 군단에게 명령을 내려, 스스로도 원정군을 이끌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동방의 위협을 없애고 천하를 안정시켜 두고 싶다. 히데요시는 계속 말했다. – 하마마츠님은 돌아가신 노부나가님의 동맹자이며, 그 위세와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하마마츠에서 달려 나와 내 막하에 들어온다고 하면, 그 순간 천하의 인심은 안정되고, 토요토미의 천하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목적은 거기에 있다. 얻는 것은 이에야스를 공격하여 멸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는 것이었다.

 

 모친인 오나카[仲]는 작년, 히데요시가 칸파쿠에 취임됨과 동시에 오오만도코로[大政所]라는 호칭을 궁정과 세간에서 얻고 있었다.

 - 알겠다.

 고 이 오오만도코로는 이외로 순순히 승낙하였다. 히데나가가 이 늙은 어미에게 정치 정세로 설득한다고 하여도 그녀를 당혹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기 때문에,

 

 어떻겠습니까? 오래간만에 아사히를 만나러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라는 것만을 그녀에게 말했을 뿐이다. 오나카에게 불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세간에도 그것을 이유로 공표하였다. 오오만도코로가 아사히히메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내려가신다 - 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의 이 제의에는 굴복하여 상락한다는 뜻을 전하고 그 준비를 하였다.

 곧이어 오오만도코로는 오오사카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이에야스는 오카자키[岡崎]까지 나와 마중하여, 손수 하마마츠에 안내할 예정을 세워두고 있었지만, 막료 중 한 사람이 굉장히 촌스러운 의견을 올렸다.

 

 가짜일지도 모릅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억측이었다. 그가 말하길, 저렇게 늙은 여자는 쿄우[]의 궁궐에 있는 여관(女官) 중에 넘칠 정도로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속이기 위해 어딘가에서 끌고 온 늙은이를 오오만도코로라고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 그건 그렇겠군.

 하고 이에야스도 수긍하여, 이미 그는 오카자키 성에 도착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계책을 짜 예정을 바꾸었다. 서둘러 하마마츠에서 아사히히메를 불러들였다. 그 꿍꿍이는 아사히히메가 오오만도코로와 대면하였을 때의 모습이나 행동을 가지고 판단하고자 한 것으로, 이에야스와 막료들은 전부 이 꿍꿍이를 맘 속에 숨겼다.

 하지만 저 부인은 기색을 확실히 읽을 수 없기에, 잘 될지…’

 라는 걱정도 있었다. 반사가 둔했고, 무표정이기에 마음 속을 알기 힘들었다.

 

 아사히히메가 예정 변경으로 인하여 황망히 하마마츠를 출발한 것은 10 17일이었다. 오카자키로는 이틀간의 여정이다. 그녀의 행렬이 오카자키의 성 밑 마을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인 18일 저녁 즈음이었다.

 그때 마침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오오만도코로의 행렬이 서쪽에서 오카자키로 들어와, 두 행렬이 성의 대문 앞에 있는 사거리에서 마주쳤다.

 

 저건 오오만도코로의 행렬이 아닌가?”

 

 아사히히메는 가마의 창문을 오려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녀로서는 신기하게도 빠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오만도코로도 눈치챘다. 서로가 동물 같은 후각과 반응이었다. 오오만도코로도 가마를 멈추게 하여 창문을 올렸다. 회색 머리를 가진 목이 창에서 나왔다.

 

 ~!”

 

 하고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른 것은 아사히히메 쪽이었다. 가마에서 굴러 나와 치마를 밟으며 내달렸고 그 때문에 넘어졌다. 아사히히메가 일어나는 것과 오오만도코로가 서둘러 가마에서 굴러 나온 것이 동시였다. 그 기세로 모녀가 길 위에서 서로 부둥켜 안았다. 아사히히메는 치마를 흙투성이로 만들면서 꼬꼬마 여자애와 같이 몸부림치며 울었다.

 - 틀림 없군.

 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실험실의 늙은 학자와 같이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은 이에야스의 막료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였다. 현명한 실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반면에 있는 잔인함은 나중에까지 이어지는 토쿠가와 가문 특유의 가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에 안심하여, 다다음날 쿄우[京]를 향해 출발했다.
 
이에야스 상락 중인 25일간, 오오만도코로와 아사히히메는 오카자키 성안에 있는 건물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그러는 동안 토쿠가와 가문의 장수들인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와 상기의 혼다 시게츠구가 수하들을 이끌고 그 건물을 감시했다. 혼다 시게츠구는 오오만도코로의 건물 주변에 산과 같이 마른 풀과 장작을 쌓아놓고 사졸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켜보게 하며, 쿄우[]에서 이에야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불을 붙여 모녀 함께 태워 죽인다는 자세를 보였다.

 - 너는 이런 집에 시집을 온 것이냐?

 하고 오오만도코로도 놀라, 이 막내딸의 불행을 지옥에서라도 발견한 듯한 생각이 들어 25일간 모녀가 함께 울며 보냈다. 이 오카자키에서 8[각주:8] 서쪽에, 그녀들이 나고 자라며 생활했던 오와리 나카무라[中村]가 있다. 그 땅에서 가난한 소작농일 즈음 지냈던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웠던 가를 번갈아 가며 질리지도 않은 듯 말을 서로 주고 받았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무사히 상락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오오만도코로는 오카자키를 떠났다. 이 직후, 이에야스는 그 거성(居城)을 하마마츠에서 순푸[駿府]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아사히도 그에 따라 이후 순푸 [駿府城]에서 살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스루가 고젠[駿河御前]

 

 이라 불렸다. 하지만 그 기간도 오래는 못 갔다.

 3년 후인 1589 7. 쿄우[]에 있던 오오만도코로가 병들었을 때, 병간호를 위해서 상락하였고, 다행스럽게도 오오만도코로는 완쾌하였지만 아사히히메는 정신이 병들어 그대로 쿄우에서 요양을 하였다. 실상은 순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정신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차츰 쇠약해져, 다음 해인 1590 1 14. 쥬라쿠테이[第]에서 죽었다.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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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는 그녀의 유골을, 그녀의 정신에 병이 들 정도로 계속 가기 꺼려했던 토쿠가와 가문에 보내지 않고, 쿄우[]의 교외 토바[鳥羽] 가도 옆에 있는 토우후쿠 사[東福寺]에 안장하여, [남명원전광실총욱자(南明院殿光室旭姉)]이라는 시호를 주고, 곧이어 칸토우[東]의 호우죠우 정벌[条征伐]을 위해 출발하였다.

 그 동정(東征)의 도중 순푸를 지날 때, 아사히히메가 생전에 아베 군[安倍郡] 즈이류우 사[竜寺]에 자주 참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박복함에 애처로움을 느껴 명복을 빌기 위해 절 안에 공양탑 한 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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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히메의 기묘함은 이 세상에 한 편의 와카[和歌] 조차 남기지 않은 것에 있다. 와카뿐만 아니다.

 이 시대, 토요토미와 토쿠가와 내외에는 다수의 기록자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기록을 후세에 남겼지만, 그녀의 말이라는 것을 어떤 기록도 전해주질 않는다. 굉장히 말이 없었던 것인지아니면 사람과 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인지

 어쨌든 역사 속에서 영원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駿河御前==================
  1.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의 부인 토쿠히메[督姫]의 모친. [본문으로]
  2.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의 모친. [본문으로]
  3. 보통 '사이고우노츠보네[西郷局]'로 알려져 있다,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모친. [본문으로]
  4. 이에야스 5남 타케다 노부요시[武田 信吉]의 모친. [본문으로]
  5. 이에야스 6남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 忠輝]의 모친 [본문으로]
  6. 후에 어삼가(御三家) 필두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 義直]를 낳지만, 사실 이 당시는 아직 이에야스와 만나기 전. [본문으로]
  7. 이 당시 8살. 13살에 이에야스와 만났다고 하니 아직 측실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8. 1리는 약 4km(3927.2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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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12 2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은 유우키 히데야스군요. 기대가 되네요.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그에 상응하니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귀무자에서도 나오는 유우키 히데야스군요. 많이 기대되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6.12 2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아사히 히메는 참 불쌍하네요. 그리고 이에야스의 자식들이 모두 모친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갑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그러니까~~~ 기대하지 마시라니까요!! ^^; (헤에~ 그렇군요. 귀무자 씨리즈는 일편 말고는 본 적이 없어서...)

    본다충승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그리고 이에야스의 자식 모친이 전부 다른 것은 아닙니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와 세키가하라 전투의 시작을 알린 철포 사격을 한 4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의 모친은 같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일본판 위키 토쿠가와 이에야스 항목의 하단 부분을 참조해 주시길...
    http://ja.wikipedia.org/wiki/%E5%BE%B3%E5%B7%9D%E5%AE%B6%E5%BA%B7#.E7.B3.BB.E8.AD.9C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14 0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의 이부제들은 전부 고생만 하다 가는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14 2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여성의 운명이란...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들 고생하거나 정략의 도구로 이용되네요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도 줄을 잘 서야(일평생의 줄)된다는 걸 새삼느끼고 갑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6 1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아들 빼앗기고 남편 귀양 간 친누나도 뭐... 그리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박선생님//힘이 모든 것을 우선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은 힘의 유무에 관계 없이...남녀에 관계없이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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