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미츠(秀)가 역사의 표면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1582년 6월 13일 한밤 중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오구루스(小栗栖)에서 그 지역 백성의 손에 살해당한 시점에서이다.

 히데미츠와 미츠히데는 유랑시절부터 함께 고생한 사이로 같은 아케치의 일족이었다.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로 그녀는 처음에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아들 무라야스(村安)에게 시집갔었지만 무라시게가 노부나가에게 반역하였기에 친정으로 돌아와 히데미츠와 재혼하였다.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는 그녀의 동생이다.
 히데미츠는 아케치 가문의 중신 No.1이라 할 수 있는 지위로 미츠히데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
山城)에 봉해졌을 때는 후쿠치야마 성(福知山城)의 성주가 되었다.

 히데미츠가 미츠히데 패사 소식을 들은 것은 미츠히데를 구원하고자 아즈치(安土)에서 쿄우토(京都)를 향해 달려가던 도중이었다. 히데미츠는 급거 말을 돌려 아케치의 수비병력이 지키는 사카모토 성(坂本城)으로 향했다.
말에 채찍질하며 가도를 내달리는 히데미츠의 뇌리에 악몽과 같이 개전 전날 밤이 떠올랐다.

 카메야마 성에서 처음으로 미츠히데가 본심을 밝힌 것이다.
 노부나가에 대한 모반 -.
 희미하게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미츠히데의 입으로 그것을 직접 듣자 전율하였다. 이미 다섯 명의 중신들에게 그 본심을 밝힌 상태라고 한다. 이제는 일각의 여유도 없었다. 히데미츠는 미츠히데에게 서둘러 결단을 굳히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혼자서 가슴에 묻어두고 있어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사람이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구나 다섯 명에게 말한 이상 곧바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이제는 오로지 결단만 있을 뿐"
 - 미츠히데는 아와즈(粟津)에서 오오츠(大津)로 향해서 말을 달리게 하였다. 사카모토는 오오츠의 건너편 비와고(琵琶湖) 호수의 서안에 있었다.

 하지만 벌써 히데요시(秀吉)의 군세가 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시바 군(羽柴軍)의 선봉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였다. 소수의 히데미츠 군세는 호리의 대군에게 대항하다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사카모토로 향하는 육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히데미츠는 어떻게라도 사카모토 성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츠히데에게 부탁 받은 책무가 있었다.

 그의 눈 앞에 가득 찬 비와고(琵琶湖)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를 건너면 사카모토에 갈 수 있다'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착상이었다. 이것이 히데미츠의 이름을 역사에 새기게 되는 '호수 건너기(湖水渡り)'가 된다.

 이때 히데요시의 군세는 호숫가에 늘어서서 그 폭거에 "멍청한 짓이군. 빠져 뒤질 뿐이지"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호숫가에 선 히데미츠의 모습은 - 흰 바탕에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가 구름과 용을 그려놓은 화려한 겉옷(羽織)에 큰 U자형 장식물을 붙인 투구를 쓰고서 타고 있는 말은 덩치가 크고 몸통은 다갈색에 갈기와 꼬리, 네 굽이 검은 색으로, 명마로 이름이 높았다.

 과거 사카모토에 있었던 히데미츠는 오오츠에서 카라사키(唐崎)에 이르기까지 깊고 얕음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건널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히데요시 군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히데미츠는 멋지게 비와고(琵琶湖) 호수를 건넌 것이다. 카라사키의 모래사장에 올라 사카모토의 바로 앞인 쥬오우 당(十王堂)에 도착하자 말을 그 당에 매놓고는 '아케치 사마노스케를 호수에서 건널 수 있게 한 말'이라는 팻말을 써서는 모가지에 걸쳐두었다고 한다.

 사카모토 성에 들어선 히데미츠는 이제는 여기까지라고 각오하여 쿠니유키(行)의 칼, 요시미츠(吉光)의 작은 칼(脇差), 키도우(虛堂[각주:1])의 글들을 이불에 감싸서는 포위한 적에게 던져버렸다. 천하의 이름있는 보물을 재로 만들기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주성(天守)에 올라 미츠히데의 가족과 자신의 가족을 찔러 죽이는 책무를 다하고 화약에 불을 붙인 후 배를 열 십자로 갈라 죽었다.

[아케치 히데미츠(明智 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가로(家老). 처음엔 미야케 야헤이지(三宅 弥平次)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마노스케 미츠하루(左馬助 光春)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582년 사카모토 성(坂本城)에서 자인.

  1. 1185~1269. 중국 남송시대의 승려. 일본에 중국식 차제구(茶諸具)를 도입한 '난포우 쇼우묘우(南浦 紹明)'가 송나라에 유학했을 시의 스승. 그래서인지 그의 글들은 다회(茶會)의 자리를 장식할 때 인기를 끌었다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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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다충승 2009.02.05 02: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의 금성무... 히데미츠와 뭔 상관이지? 생각 중에 떠오르는 그 게임... 유명한 퇴깽이 갑옷의 주인 되시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5 1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사옵니다. 바로 그것을 노린 것입죠...
      설사 따로 그림이 있더라도(찾아 볼 생각도 안 했지만 말입죠) 금성무로 할 생각이었습죠.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에는 아마도 그의 성격적인 면이 하나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노부나가(信長)는 그의 중후한 체하는 얼굴이 들지 않았다. 이마에 새겨진 듯한 교양이 눈에 거슬렸다. 히데요시(秀吉)처럼 자신의 몸을 낮추어 귀여움 받으려는 재주가 없었다.

 노부나가와 미츠히데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한 이야기가 있다.
 술 자리에서 노부나가가 엄청나게 거대한 큰 잔을 내와 여기에 술을 가득 붓고는 미츠히데에게 마시라고 하였다. 미츠히데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자 노부나가는 갑자기 칼을 번득이며 "술을 마실 수 없다면 이거를 목에 처넣어주마"하고 미츠히데의 얼굴 앞으로 겨누었다. 어쩔 수 없이 미츠히데가 큰 잔을 비우자 노부나가는 "역시 목숨은 아쉬운가 보군"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코우슈우(甲州) 정벌 때였다.
 시나노(信濃) 스와 군(諏訪郡)에 있는 어느 절에 본진을 두었을 때 미츠히데가, "정말로 경사스러운 일이옵니다. 우리들의 뼈를 깎는 듯한 오랜 노력이 이제야 결실을 맺어 스와 군에 있는 모두가 우리 편이 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하고 노부나가에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그 뽐내는 듯한 얼굴이 노부나가의 역린을 건드렸다. "메야? 네 놈의 어디 뼈가 깎였고 무슨 공을 세웠다고 하는게냐? 자기 혼자서만 분골쇄신한 것처럼 말하는 그 말투가 맘에 안 든다" 라고 외치며 아랫자리에 있는 미츠히데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돌연 미츠히데의 머리를 난간에 뭉개며 "이 대머리녀석!"하고 심하게 팼던 것이다. 미츠히데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의 굴욕에 실로 분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고 한다.[각주:1]

 성격적으로는 맞지 않았지만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미츠히데에게는 우선 오다 가문(織田家)의 다른 무장들에게는 없는 외교관적인 특질이 있었다. 장수로서의 기량도 뛰어나 전략, 포술, 행정, 축성 등 그 재능은 다방면에 걸쳐 넘칠 듯하였다. 노부나가는 신참자인 미츠히데를 예가 볼 수 없을 정도로 중용하여 출세시켰다. 1571년 히에이잔 섬멸(比叡山討) 후 오우미(近江) 남부의 시가 군(滋賀郡)을 하사하고 사카모토 성(坂本城)의 성주로 임명한 것이다. 거의 10만석에 달하는 봉록이었다. 이 시기 아직 히데요시조차 영지(領地)가 없는 야전부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성격적으로는 맘에 들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우수한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츠히데의 마음은 서서히 노부나가에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쓸모가 없어지면 냉혹히 버리는 그런 노부나가의 방식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1578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미츠히데의 동료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돌연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한 무라시게는 홀로 츄우고쿠(中
)로 도망쳤는데 그 일족에 대한 노부나가의 처리가 너무도 잔혹했다. 122명의 여성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가신 512명을 해안가에 있는 집 네 곳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노부나가의 이런 가혹함을 미츠히데 자신도 맛보았다.
 1578년 탄바(丹波) 야카미 성(八上城) 하타노 히데하루(波多野 秀治)를 설득하기 위해 미츠히데는 자신의 모친을 인질로 보내어 항복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런 고심에 찬 미츠히데의 인질작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뭉갰다. 아즈치(安土)로 데려간 하타노 형제를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 것이다.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한 야카미 성은 보복으로 인질인 미츠히데의 모친을 죽였다.[각주:2]

 그리고 천하를 진동시킨 1582년이 왔다.
 미츠히데는 이 해의 5월 15일 아즈치 성을 방문한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를 접대하는 직책에 임명 받았다. 당시 미츠히데는 전투에 종사하지 않고 휴가 중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오다 가문은 5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그리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각각의 사령관이었다. 미츠히데는 15일~17일까지 이에야스의 접대에 임했지만 17일에 빗츄우(備中)에 있던 히데요시에게서 원군을 요청하는 소식이 노부나가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한창 수공으로 밀어붙이던 중에 모우리(毛利)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몰려들었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지금이야말로 모우리와 자웅을 정할 때라 여기고 직접 출진하고자 하였다. 여러 장수들에게 동원령이 내려졌다. 미츠히데는 그 구원군의 선봉이었다. 지휘하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들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심경은 복잡했다. 츄우고쿠 공략은 말하자면 히데요시가 메인이며 나중에 달려가는 자신은 그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히데요시의 명성만 높여주기만 할 뿐이 아닌가?

 그런 마음의 동요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 노부나가의 명령이었다. 빗츄우 출진을 명령 받은 직후에 노부나가의 사자가 와,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를 새로이 하사하시며 대신 탄바(丹波), 오우미(近江)의 영지(領地)를 거두신다고 하십니다"
 고 전한 것이다. 지금 가진 영지(領地)를 몰수하고 대신 적국의 영지를 준다는 것이다. 영지 몰수나 마찬가지인 명령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뇌리에 예전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오다 가문의 중신 하야시 미치카츠(林 通勝)나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줄은……"

 5월 26일.
 거성(居城) 탄바 카메야마 성(
山城)에 입성한 미츠히데는 다음 날인 27일 아타고야마(愛宕山) 산에 올라 기도를 하고 신전 앞에서 2~3번 제비를 뽑으며 길흉을 쟀다고 한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때 대체적으로 그가 모반 결의를 굳혔다고 보고 있다.

 날이 밝아 28일.
 아타고야마 산에서 렌가(連歌) 모임이 개최되었다. 당대 렌가계 제일인자인 사토무라 쇼우하(里村
紹巴), 사토무라 쇼우시츠(里村 昌叱)가 열석하였다. 곧이어 모임이 시작되어 발구(發口)를 미츠히데가 읊었다.

때는 지금 하늘이 내리는 5월 비려나
時はいま、天が下しる五月かな

 쇼우하는 깜짝 놀랐다.
 '때는 지금'은 결의를 의미하며, '때(토키)'에는 또한 미츠히데의 출신인 미노(美濃)의 '토키' 씨(土岐氏)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내리는(天が下しる)'은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토키(아케치)가 천하를 통치할 때가 온 것이다' – 쇼우하는 이렇게 해석하여 전율한 것이다.
 렌가 모임은 이틀간에 걸쳐 행해졌는데 미츠히데는 자리에서 간식으로 나온 대나무 잎에 싸서 찐 떡인 쫑즈(粽)를 잎도 벗기지 않고 그냥 입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카메야마 성으로 돌아온 미츠히데는 가장 신뢰하는 아케치 사마노스케 히데미츠(明智 左馬助 秀)를 침실로 불러 모기장 안으로 불러들여서는 모반할 뜻을 밝혔다.

 미츠히데가 츄우고쿠 공략을 위해 전군을 지휘하여 카메야마 성을 출발한 것은 6월 1일 오후 6시였다.
 전군 쿄우토(京都)로 향했다. 이 시점에서 미츠히데는 아직 장병들에게 본심을 밝히지 않았다. 쿄우토에서 노부나가 앞에서 열병식을 치른다고 속였다. 전군이 쿄우토 근교 카츠라가와(桂川) 강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전투준비의 명령이 전군에게 하달되었다.
 "말의 재갈을 풀고 보병인 자는 새로운 짚신으로 갈아 신으라. 철포를 소지한 자는 화승을 1척5촌으로 자른 다섯 줄에 불을 붙여 꺼지지 않게 꺼꾸로 들고 있으라"
 이렇게 세부적인 명령은 전쟁터에서만 행해지는 것이었다. 전군은 처음으로 미츠히데의 결의를 알게 되었다.

 쿄우토(京都)에 돌입한 아케치 군세가 혼노우(本能)사(寺)에 있던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러나 모반으로 세워진 아케치의 천하는 이어지는 일 없이 10일 후의 야마자키 전투(山崎合)에서 상경한 히데요시에게 패함으로써 무너졌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28년 생. 미노(美濃) 토키 씨(土岐氏)의 지족이라고 한다. 전반생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를 섬겼다는 말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이 된 것은 중년이 지나서인 것 같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
)와 함께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노부나가에게 알선하여 공적을 인정받았다. 1570년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 성주가 되어 탄바(丹波) 경영을 일임 받았다. 1575년 코레토우(惟任)라는 성(姓)과 휴우가노카미(日向守)를 제수 받았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를 죽였지만 야마자키(山崎)에서 히데요시(秀吉)에게 패하여 도주 중 오구루스(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이전 번역글.

2008/01/29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아케치 미츠히데

  1. 이때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루이스 프로이스는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발길질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적고 있다. [본문으로]
  2. 회본태공기(絵本太功記)의 창작이라 여겨지고 있다. 야카미 성은 긴 포위에 지친 성 수비병들이 성주인 하타노 형제를 잡아다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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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1.28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아케치의 차례가 왔네요. (다들 그렇겠지만 소설 [대망]으로) 처음 전국시대 관련 이야기를 접했을 때 너무 어이없이 패사한 것을 아쉬워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좀더 분전했으면... --a
    만화 [센고쿠]에서 묘사되는 아케치는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런 역사 관련 글에서 보이는 '소심' 이미지와는 꽤나 동떨어진 것 같아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북박스가 만화사업을 접는다는 말이 있던데, 안그래도 센고쿠 후속 단행본이 나오지 않아 불안하기도 하군요..
    아참, 발해지랑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1.28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의명분에 이은 대세는 그래서 무서운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 고심하는 것이겠고.

      특히나 미츠히데같은 경우 노부나가가 그렇게나 키워주었는데 배신했다는 점이 忠이란 개념이 희박했던 동시대 사람들의 눈에도 마땅치 않게 보였나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쿠도우 카즈야 & 이케가미 료우이치의 "信長"에 나오는 미츠히데의 이미지가 제 머리 속에 있는 이미지입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일본사"에서 그를 평한...
      '배신이나 밀회를 좋아한다', '인내력이 풍부', '계략과 책략의 달인'...이라는 점을 그 만화에서는 잘 살렸더군요.

      센고쿠 한국 발매 정지라...
      참 그건 아쉽군요. 괜찮은 만화였는데 말입죠.
      한국 발매된 것은 다 모았는데, 그 이후 것은 일본판을 구해야되겠군요.(뭐 그건 그거대로 노모(?? ^^;)인지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2. 뻘군 2010.07.19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한창 늦은 뒷북 덧글이네요^^
    생뚱맞지만 미쓰히데가 노부나가가 아니라 이에야스의 휘하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적어도 기질상으로 계속 충돌하는것으로 보이는 노부나가보다 이에야스는 나름 죽이 잘 맞지 않았을까..
    이에야스도 만만치 않은 너구리지만요^^(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하지만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보다 한단계 아래인 히데요시 밑에서의 출정에 반발해(+그외 잡다한 이유들)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있다는걸 보면 노부나가보다 아래인(겉으로는 동맹자이긴 하지만) 이에야스에게 가지 않았을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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