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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코쿠(四) 전역을 정복한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이지만 시작은 토사(土佐) 오코우(岡豊) 3000관의 호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군소호족이 한때는 츄우고쿠(中)의 모우리(毛利),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島津)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일본 삼대세력 중 하나로 커졌는데 그 원동력이 된 것은 토사(土佐)의 독특한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 불리는 민병조직에 있었다.

 [이치료우구소쿠]는 평소엔 농업에 종사하는 지역 무사(士)의 무리들이다. 그들은 밭이나 논으로 나갈 때 창 끄트머리에 짚신이나 갑옷, 식량을 매달고 나가 그것을 한 켠에 놓았다가 전투 참가의 군령을 받으면 낫이나 괭이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서 창을 메고 모여들었다. 즉 갑옷(具足) 한 벌(一領), 말 한 마리로 집합했기에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6000~9000평의 토지를 소유한 묘우슈(名主 – 부유한 농민) 계급으로 몇 명 정도 부하를 데리고 있었다. 이것이 우수한 쵸우소카베 군단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쵸우소카베 씨의 선조는 시나노(信濃)의 하타 씨(秦氏)로 백제에서 온 도래인(渡[각주:1])이었다. 처음엔 '소카베(宗我部)'라고 하였지만 토사에 또 다른 소카베 씨가 있었기에 앞에 '쵸우(長)'를 붙였다고 한다.[각주:2]
처음엔 시코쿠 탄다이(
探題)인 '호소카와 씨(細川氏)'의 중신이었다. 그 호소카와 씨가 미요시(三好) 일족에게 멸망 당하자 차츰 자력으로 세력을 키웠지만, 1508년 당주 카네츠구(兼序)가 모토야마 씨(本山氏)등에게 공격받아 살해당하자 아직 꼬꼬마였던 센유우마루(千雄丸[각주:3])는 토사(土佐)의 코쿠시([각주:4]) 이치죠우 후사이에( 房家)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센유우마루'가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이다. 쿠니치카는 후사이에의 보호 속에 오코우 성(岡豊城)으로 돌아오자 옛 영지(領地)를 회복하여 토사 제패를 목표로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야기를 바꾸어 보자. 어렸을 적 쵸우소카베 모토치카의 외모를 전해주는 사료에 따르면, [키가 크고 흰 피부에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가신들은 '어린 아씨(若子)'라 부르며 뒤따마를 깠다]고 한다. 후년 시코쿠의 패왕이라는 이미지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내성적인 청년이 데뷔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모토치카의 데뷔전은 1560년 5월 22살 때였다.
 쿠니치카 부친(즉 모토치카의 할아버지)의 원수인 모토야마 시게토키(
本山 茂辰)와의 전투에서 모토야마의 거성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점령한 후 도망친 시게토키를 우라토 성(), 아사쿠라 성(朝倉城)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가 한창 행해지던 도중 부친 쿠니치카가 급사하는 바람[각주:5]에 가독을 이은 22살 모토치카의 양 어깨에 쵸우소카베 가문의 운명을 달리게 된 것이다. 평소 가신에게 경시 받던 선이 가는 젊은이가 이 순간부터 당당한 무장으로 변신을 이루게 된다.

 쿠니치카의 죽음이 알려지자 역시 모토야마 세력은 역습으로 나섰다. 2천여의 대군이었다. 쵸우소카베는 500여[각주:6]. 중과부적으로 무너지려는 찰나에 모토치카가 용감히 나서,
 "물러서지 마라!"
 라며 창을 직접 휘둘러 곧바로 적 두 명을 죽였다. 그 모습에 쵸우소카베의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해서 기세에 탄 쵸우소카베는 단번에 모토야마의 군사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전투에서의 모습으로 모토치카의 평가가 180도 변한다.
 [지모용(
智謀勇) 겸비]
 라며 가신들의 신뢰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 후 상승기류를 탄 모토치카는 각지를 전전하여 1570년 즈음에는 이치죠우 가문(
)의 하타(幡多), 타카오카(高岡) 2 군()을 제외한 토사 전역을 손에 넣었다.

 이치죠우 가문은 선조에 칸파쿠() 노리후사([각주:7])가 있을 정도인 토사 제일의 명문가였다. 더군다나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는 이치죠우 가문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쵸우소카베 가문에게 있어 큰 은인인 가문이었다. 모토치카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였지만 그러던 중 평소 소행에 문제가 많던 당주 카네사다(兼定)가 가중에서 가장 인망 높던 가로(家老)[각주:8]를 직접 베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토치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이치죠우 가문의 가신들을 소집하여 카네사다를 은거시키고 적자에게 당주자리를 물려주도록 꾀하였다. 라기보다 그 자리에 드센 가신들을 대기시켜두었기에 오히려 쿠데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토치카는 이렇게 카네사다를 이요(伊予)로 추방하고 카네사다의 적자 킷포우시(吉房子)[각주:9]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이치죠우 가문의 당주로 앉혔다. 이로써 토사 전역은 모토치카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각주:10]

 다음 목표는 시코쿠() 전역의 정복이었다. 이 즈음 모토치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교류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가신 사이토우 토시미츠( 利三)의 딸이 모토치카의 부인이었던 것이다.[각주:11]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 우호관계도 무너진다. 모토치카가 아와(
阿波)를 시작으로 차츰 지배영역을 넓혀가자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에게 있어 방해물이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라는 이대 거물이 죽어 후방이 안정되자 곧이어 노부나가는 시코쿠 정벌을 진행시키려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원정군이 배를 타고 떠나려 하는 때[각주:12]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각주:13]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모토치카는 지금이야말로 시코쿠 제패의 호기라 보고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아와를 침공한 사누키()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각주:14])를 공격하여 쇼우즈이 성(勝瑞城)을 함락하고 이와쿠라 성(岩倉城)을 손에 넣어 아와를 통일한 후 사누키의 소고우 성(十河城)까지 하락하였다. 도망칠 곳을 잃은 소고우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로 도망쳐 원조를 청했다.

 당시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쳐 주군 노부나가의 원한을 갚았고 시즈가타케 전쟁(い)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쳐 천하인(天下人)으로 향하는 길을 파죽지세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과 싸우고 있던 중이라 소고우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 틈에 모토츠카는 시코쿠 전역을 자신의 세력하에 둔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군이 출진한 것은 1585년 6월이었다. 이에야스, 노부카츠와 평화협정을 맺고 키이(紀伊)를 평정한 지금 그 여력을 몰아 시코쿠로 달려든 것이다. 총 12만 3천이라는 대군이었다.
 아무리 모토치카라도 이런 대군에는 개길 수 없어 인질로 셋째 아들인 치카타다(
親忠)를 바치고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 아와(阿波), 사누키(), 이요(伊予)의 반환을 명령 받았지만 토사(土佐)만은 안도받았다. 히데요시는 반항했던 모토치카에게 관대했다. 모토치카가 본령 안도의 인사를 올리러 상경하자 큰 환대와 함께 비젠나가미츠(備前長光)의 이름난 칼, 황금 100매, 말 한 마리, 화려한 장식의 안장과 일본식 등자()를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 다음 해.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종군하여 붕고(豊後) 방면의 적을 – 예전에는 적이었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와 함께 공격하였다. 시코쿠의 군세는 이요의 이마바리(今治)를 출발하여 붕고에 상륙하자마자 시마즈(島津)의 성들을 계속해서 낙성시켜 나가다가 헤츠키가와 강(戸次川)에서 시마즈 군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파견지휘관(
軍目付)인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는 막무가내였다. 곧바로 결전을 벌이자고 나댔다. 그러나 모토치카와 나가야스는 신중했다. 시마즈가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치카는 주력군을 기다린 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지만 센고쿠 히사히데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2월 12일 결전을 벌인다. 시마즈 군은 일부러 지는 척하고 퇴각하였다. 센고쿠 히사히데는 여기에 낚였다. 참담한 패배였다. 소고우 나가야스는 전사하였으며, 모토치카의 적자 노부치카(信親)도 죽었다.

 노부치카는 당시 22살로 한번에 여덟 명을 상대하여 더구나 그들을 이길 정도로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모토치카는 이 노부치카의 죽음에 너무 낙담한 나머지 자신도 적진에 돌격하여 죽으려 하였지만 말리는 가신들과 애마 '나이키구로()'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쵸우소카베 가문은 7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 전사자의 위패는 지금도 코우치 시(
高知市)의 하다 신사(秦神社)에 모셔져 있다.

 이 패전이 모토치카의 말년을 꼬이게 만들어 둘째 치카카즈(親和), 셋째 치카타다(親忠)를 제쳐두고 넷째 모리치카(盛親)를 세자로 정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가신과 친족들까지 죽이고 병으로 누워있는 둘째 치카카즈의 병간호도 하지 못하게 한 채 유폐시켜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후에 모리치카는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에 섰기에 영지(領地)를 몰수당하였고 낭인이 된 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이 끝난 후에 잡혀 죽었다. 명문 쵸우소카베 가문의 멸망이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
1538년생. 1560년에 가독을 이어 토사(
土佐)의 여러 호족들을 거느리고 1583년에 시코쿠() 전역을 평정하지만 히데요시(秀吉)의 시코쿠 정벌군에 항복하여 토사만 허락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였고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 1599년 5월 19일 죽었다. 60세.

  1. (일본으로 바다) 건너(渡) 온(来) 사람(人)이란 뜻. 보통 중국계나 한국계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나가오카 군('長'岡郡)에 있었기에 쵸우(長)를 붙였으며, 또 다른 소카베 씨는 카미 군('香'美郡)에 있었기에 코우소카베 씨('香'宗我部氏)가 되었다. 후에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치카야스(親泰)를 양자로 들여보내 가문을 탈취. 치카야스는 형인 모토치카의 시코쿠 제패를 도왔다. [본문으로]
  3. '치오우마루'라고도 읽는 듯 하다. [본문으로]
  4. 조정의 관직. 그 지역(国)의 행정과 사법 등 모든 것을 관장. 보통 '***노카미'라 불리는 직책. [본문으로]
  5. 실은 전투가 끝난 후에 사망. 전투는 1560년 5월 28일. 쿠니치카의 사망은 6월 15일. [본문으로]
  6. 1000이라고도 2500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닌의 난(應仁の亂) 때 토사로 피신하였다. [본문으로]
  8. 도이 소우산(土居 宗珊)을 말한다. 사족으로 신장의 야망-혁신 PK의 튜더리얼에서 나오는 그분이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만치요(万千代)'라고 한다.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 [본문으로]
  10. 사족으로 [신장공기]나 [타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 따르면 수도권 근방(上方)에서 보는 모토치카의 인식은 이치죠우 정권(大津御所 - 킷포우시 즉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가 있던 곳 '오오츠'를 따서)의 보좌역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실제로 모토치카가 노부나가와 연락을 할 때는 자신이 부하가 아닌 이치죠우 가문의 부하 '카쿠미 이나바노카미(加久見 因幡守)'를 통해서 였을 정도였다. [본문으로]
  11. 토시미츠의 형이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친위군사조직인 호우코우슈우(奉公衆) 멤버인 이시가이 미츠마사(石谷 光政)씨의 사위로 들어갔고(이시가이 요리토키(石谷 頼辰)), 그 이시가이 미츠마사에게 또 딸이 하나 있어 그녀가 모토치카의 부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토시미츠와 피가 이어져 있지는 않다. [본문으로]
  12. 예정은 6월 3일. [본문으로]
  13. 6월 2일. [본문으로]
  14. 이 즈음은 미요시 나가야스로 불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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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7.18 0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모토치카가 2년만 더 살았다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들더군요. 아니, 1년 반만 더 살았더라도 어떻게든 세키가하라 전후처리때 능숙히 토사 정도는 안도받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아.. 그렇다면 료마는 없게 되는거려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동군쪽으로 서긴 했을 것 같긴 합니다.

      그쵸 아마 료우마라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은 나오지 않았겠죠. 토사 향사의 차별도 없었을 테니 돈 많은 집 도련님으로 탱자탱자 지냈을 것이고 또한 인물이기에 토사 계급사회의 시스템을 극복하려 했던 타케치 한페이타(武市 半平太)나, 그 타케치를 통해서 만난 료우마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지는 삿쵸우 동맹의 고안자 중 한 명인 나카오카 신타로우(長岡 慎太郎)도 만나지 못했을테니요.

  2. 나라 2009.07.18 1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사람 인생도 정말...ㅠ_ㅠ 때를 잘못 타고 나면 망한다는 전형 같습니다그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욕심이 과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노부나가가 힘들 때 인심 넉넉한 말(시코쿠 땅 중 니가 점령한 거는 다 니꺼) 좀 했다고 그걸 내세워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는데도(노부나가는 모우리 가문 공략 시 시코쿠 방면에서 압박을 줄 카드로 사용할 생각을 처음에 가졌다고 하더군요) 그런 시세도 못 읽었고, 노부나가가 제시한 토사 1국과 아와 반국의 카드를 지 손으로 내쳐 한때 멸문의 위기까지 빠지게 됩죠(노부나가 삼남 노부타카의 시코쿠 정벌). 운 좋게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숨을 돌리지만 또 히데요시에게 개기다가 토사 일국으로 삭감.

      때를 잘못 타고 난 것은 노부나가랑 동시대에 태어난 모든 군웅들에게 적용될 것 같습니다. 몇 백년 이어져 오던 전란의 시대(개인적으로 무로마치 바쿠후도 평온한 시기가 적었던 듯 해서요)를 불과 십 수년 만에 통일정권 수립 일보 직전까지 가져갔으니까요.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7.18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치카가 저 때 죽었군요.
    위키를 찾아 읽어보니 모토치카 아들들은 죄다 원치않게 죽은듯...(줄을 잘못 선것도 있겠지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케다 가문의 예(카츠요리勝頼)에서 볼 수 있듯이 타가문 후계자로 보낸 이를 다시 종가집에서 받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 같더군요.

      모토치카도 타케다 신겐과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호족의 연합정권이라는 불안한 내부구조와 더불어 후계자로 키워왔던 장남이 없어짐으로 인해서 급히 자신의 권력을 이을 후계자를 만들려다 보니 무리가 많이 따랐던 듯 합니다.

  4. 나라 2009.07.19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전국시대는 군웅할거지만 고만고만한 애들이 여기저기 부딪힌 기분... 입니다.
    천하인 3인을 제외하면 그닥 뛰어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5: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그런가요? ^^

      뛰어나다 아니다는 것은 동시대 동지역에 있던 사람들끼리의 비교우위문제 인지라...
      가령 노부나가가 오우슈우 끄트머리에 있었음 우리가 아는 노부나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노부나가도 좇병진이었겠고 그 노부나가가 끌어 올려준 히데요시도 병진이 채였을 것이고 그 노부나가를 평생 따라다니고 그가 죽자 히데요시의 안색 살피다 히데요시 삽질 & 죽음 덕분에 천하인이 된 이에야스도 별 볼일 없었겠죠.

      뭐...천지인...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천시와 지리와 인사를 다 잡아야만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요.

  5. 맹꽁이서당 2009.07.19 22: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서쪽에 치우친 지리적 요건이 오히려 이점이 되었다던데, 이 동네는 또 경우가 달랐군요. 하긴 동서남북 다 트인 광활한 대륙과 길쭉한 섬나라가 같을 리가 없겠지만요.

    센고쿠 히데히사 녀석 삽질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는 점이 안타깝네요. 과연 만화에서는 그 장면이 어떻게 진행 될지... (요새 센고쿠 천정기 원서라도 사 볼까 생각중인데, 높은 환율이 발목을 잡습니다 --a)

    아참, 지난번에 가르쳐주신 [규슈 영지 랭킹]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생각보다 규슈 석고가 많았더군요(TOP 5가 235만석이니 전체는 300만 쯤 되려나?) 혹시 일본 다른 지역, 혹은 전역을 대상으로 한 순위는 없을까요? 참고할만한 사이트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쿄우토만 제압하면 일본을 지배할 수 있는 빠르고 편한 길이 있었는지라... 오와리(尾張)라는 가장 적당한 위치에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사보고 싶은데...환율이 역시...서울역 북오프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죠.
      참~ 원서 가능하시면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 강추입니다!

      그렇잖아도 자료 정리도 할 겸 구글 문서도구 스프레드쉬트로 만드려고 했었는데 말씀하시길레...
      '아이 참~ 생각났을 때 만들어 두었음 이럴 때 떡 하니 내놓으면 참 멋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드네요... --;

      어디선가 석고 정리해 둔 사이트를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이버 낭풍까페가서 겨우 찾았습니다.

      http://homepage3.nifty.com/ksatake/fkunu1.html

      이곳 함 가보시길.

  6. ckyup 2009.07.20 22: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하나의 재미있는글 감사합니다. 몰랐던 것을 또 알게되었네요.

    지금 막 대망 한번 끝네고, 두번째 연달아 읽고 있는데요, 역시 방대한 분량이라서 그런지 기억이 새롭네요.... 오늘 아침에 신겐이 피리소리 듣다가 총맞고 가버렸습니다.

    근데 읽으면서 궁금한점은, 소설 앞부분에 나오는 인물들의 나중 얘기가 전혀나오지 않는데요, 예를들어 이에야스 큰딸이라던지, 이에야스 큰며느리인 노부나가 딸이라던지...., 그리고 뭐 다른 중신들의 세키카하라 이후의 얘기라던지... 등등 (특히 소설초반의 재미를 톡톡히 해주는 헤이하치로와 사쿠자에몬).

    암튼 좋은 정보 감사드리고요, 연재물 번역, 뼈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점 알아두시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1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똥싸개 이에야스 사건 다음인 피리 소리가 들리는 노다성...부근이군요. 총 맞아 온 몸에 마비가 와 침 질질 흘리면서도 (제 딴에는 정신으로) 근습들을 질타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에...그러니까 제 블로그에 이에야스의 큰 딸이나 노부나가 딸, 혹은 이에야스 부하들의 말년...이 안 나온다는 말씀? 아니면 소설 상에서?

      헉~ 혀...협박이 것입니까? 직접 제 앞에서 협박하신다면 무릎꿇고 용서를 빌겠습니다만, 온라인 상에서 전 그래도 강직한 편에 속합니다. 그런 위협으로는 fss를 그리는 나가노 마모루, GM이나 삼국전투기를 그리시는 최훈 님의 연재속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하는 절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7.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쪽도 줄 잘못 섰다가 가문이 박살났군요.

    아, 전부터 질문해야지 하면서도 잊고 있다가 신장의 야망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났는데요.
    시마즈 타카히사의 4남이 이에히사 맞죠? 능력치도 그렇고 열전에도 보니 꽤나 용맹한 장수였던 것 같은데,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에 나섰을 때 히데요시-시마즈 회견 후 급사했다고 열전에 나와있더군요. 병으로 죽은건지, 아니면 시마즈 세력을 두려워한 히데요시 측에서 뭔가 손을 쓴건지 그게 궁금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4: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통 암살설이 흘러나오면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이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는데...

      어쨌든 시마즈 가문의 기록(島津国史)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가 독살했다는 듯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만 주변 정황을 보아선 토요토미 측이 독살해서 득을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마즈 가문의 당주 요시히사와 둘째 동생 요시히로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마즈를 분열시키려면 땅을 각 형제나 중신들에게 나누어 다이묘우로(그러니까 시마즈 가문의 신하에서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로 만들어) 버리면 될 것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으니까요(또한 이에히사 역시 그리 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에히사는 젊었을 적에 쿄우토에 올라가 노부나가의 힘(즉 천하인의 힘)을 보았던 인물에, 뛰어난 전술가인 만큼 직접 싸워서 패한 만큼 상대의 힘을 인정하는 무장이었다 생각합니다.

      너무도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서 암살설이 흘러 나오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인가요...

      신장의 야망 - 혁신을 하다보면 '신겐신의 야망'이라 불릴 정도로 나가오, 다케다 두 가문이 제일 쉽지만, 시마즈 가문도 클리어하기가 수월하더군요. 확실한 철포 기술이 있는데다 유능한 일문이 많으니까요 ㅎㅎ

      그 일문들을 이용해서 큐슈만 통일을 하면 오오토모 소린, 다치바나 도세츠, 나베시마 나오시게 같은 좋은 장수들을 부하로 삼을 수 있으니 군단 만들어서 돌리면 알아서 천하가 손안에 들어오네요 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거기서 시작하면 편할 듯. 무엇보다 나갈 쪽이 정해진대다 거기에 주변은 약한 놈들 뿐. 그 약한 놈들만 처리하면 정말 오오토모나 류우조우지 녀석들을 쉽게 먹을 수 있겠군요. 더구나 오오토모 놈은 제 기억 상으론 무작정 무기들만 키우는 녀석들인지라.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82 6 13일 패사(敗死) 55?

1528? ~ 1582.

미노(美濃)의 명족(名族) 토키(土岐)()의 후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동반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긴다. 후에 노부나가와 사이가틀어져, 혼노우(本能)()의 변()을 일으키지만, 직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 중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어긋난 시나리오


 1582 6 13일 밤.

 아케치 미츠히데는 쇼우류우지(勝龍寺)() 안에 있었다.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전이라며 싸움을 걸어온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맞서 싸워 이김으로 쿄우토(京都) 지배의 토대를 다져놓을 수 있었던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지금 막 도망쳐 온 것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토우 쿠라노스케(内蔵(=토시미츠(利三))의 말을 들어, 오늘의 전투를 피하여 사카모토(坂本)에서 농성(籠城)을 하였다면……]

 [평소 모아두었던 군세를 (나누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면……] (太閤記)

 라는 등의 제 3자의 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적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성을 나가 본거지인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에서 진용을 재구축해야 하겠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급격히 불리해진 국면(局面)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우(本能)()에서 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궁정에 들어가 전승(戰勝)을 보고했던 것이 불과 10일전의 일은 아니었는가? [아케치의 삼일천하[각주:1]]라고 후대에 걸쳐 비웃음을 받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도 예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큰 것에 당혹하여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일까?

 직접적인 패인(敗因)은 히데요시가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츄우고쿠 대반전(大返し)]을 감행한 것과 더불어 동원한 병력이 총 4[太閤記]이라는 이 또한 예상외의 대군(大軍)으로 이 대군에는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라이벌 히데요시가 그렇게 대군을 모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인척[각주:2]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타다오키(忠興) 부자의 협력 거부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죽인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문제인 것은 누구보다도 미츠히데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호소카와 부자에 재고(再考)를 촉구한 9일자 편지의 말미에도 이번 쿠데타의 의도는 타다오키, 오키모토(興元[각주:3]) 등을 위한 것으로, 따라서 쿄우토(京都) 주변을 평정한 후에는 곧바로 타다오키 등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소카와 부자는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당초 미츠히데에게 가세(加勢)했었던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9일에는 태도를 바꾸고 곧이어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모반(謀反)]


 확실히 미츠히데의 반역의 배후에는 바쿠후(幕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와 기맥상통(氣脈相通)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세 사다오키(伊勢 貞興), 스와 히다노카미(諏訪 飛), 미마키 카게시게(御牧 景重) 등 쇼우군()의 부하들이 아케치 측에서 전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체제의 재건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나름대로 대의명분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미츠히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오다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거절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9일자 편지에서 혼노우(本能)()에서의 일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不慮)”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세울 정도의 대의명분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반격의 준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 성()으로 귀환을 하려 하였고 미조오 시게토모(溝尾 茂朝) 등 근신(近臣) 수 명과 함께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쇼우류우지(勝龍寺)()을 탈출했다. 그러나 후시미(伏見) 방면에서 야마시나(山科)에 이르렀을 때 잇키(一揆)에 습격 당하여 샛길로 피했지만 여기서 살해당하고 백성이 목을 주웠다[아사노 가문 문서(野家文書)].
 
일설에는 야마시나의 오구루수(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풀 숲에 숨어있던
노부시(野武士)의 창에 찔려 약 330m쯤 간 곳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 있던 신하가 목을 베어, 그 목이나 몸통을 덤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豊鑑].


 이 말로에 대해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학려(學侶)인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등은, “노부나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출세를 하였으면서도, 그 큰 은혜를 잊고 괘씸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단정지었다.

  1. 노부나가를 죽인 후 쿄우토(京都)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다오키의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 [본문으로]
  3. 후지타카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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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1.30 0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위야 어찌되었건 무로마치 바쿠후 멸망에 일조하게 된 미츠히데로서는 바쿠후 재건의 임무는 온당치 않았던 걸까요.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 330 mol/L는 아니겠지요??? (mol/L를 줄여서 M이라고 쓰기에…)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0 0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히데의 목적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설과 배후설이 워낙 많은 관계로.... 모르겠습니다. ^^;
    바쿠후 설도 그 중에 하나이겠지만... 확실히 신사본론님 말씀대로 일조한 녀석이 다시 재건한다고 하여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특히나 호소카와 유우사이같은 경우는 쇼우군 가문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설이 있는데도 바쿠후 재흥이라는 것에 별 흥미를 못 느낀 것을 보면 어쩌면 바쿠후 배후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전국자위대'라는 소설에서는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외치더군요
    '적은 묘심사에 있다!!')

    원문에선 '3町'로 되어있는데, 1町는 109.9미터라고 하더군요.... 길이는 소문자로 써야 하나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1.30 1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m는 길이의 단위고, M는 - 좀 황당하시겠지만 - 농도의 단위입니다. 굳이 해석하자면 6.023×10^23개/L…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0 1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그랬군요.. 좋은 거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태까지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30 1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다오키에게 오다노부나가는 거의 '영웅'급의 인물이었는데.. 협력 할리가 있겠습니까..

    P.S. 그래도 가라샤 안 죽인게 용합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0 1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글에서인가... 노부나가의 와키자시(脇差)의 칼자루에 있던 구요(九曜)를 보고 맘에 들어, 다음에 구요가 찍힌 옷을 입고 나갔다가 노부나가에게 멋진 문양이라며 칭찬을 듣고 자신의 가문(家紋)으로 해달라고 했다가 인정받았을 때는 얼마나 기뻐했을지 눈에 선하더군요.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sagaman1981 BlogIcon 나그네 2008.02.03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번째문단 5번째줄에 '타다오키의 딸은 미츠히데의 딸' 이라고 되어 있는데 타다오키의 부인이 아닌지? 발해지랑님의 글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04 0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문 & 언제나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얼렁 바꾸었습니다. --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09 2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지광수.. 자기보다 37살이나 어린 란마루에게 부채로 맞았다는 소리가 있던데;;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0 2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도 시대에 한 백년 지난 다음에 나온 군기물에는 그리 쓰여 있다고 합니다만, 노부나가가 그리 막 되먹은 인물은 아닌지라 저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여담으로...노부나가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질 않아서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는 술 쳐먹고 행패 부리는 모습이 그려지더군요)

  11. Favicon of http://doctorguy.tistory.com BlogIcon Jishaq 2008.05.16 17: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지광수.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운 인물이죠.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 미츠히데는 비웃음을 받고 있지만 그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요. 궁금하네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6 1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덕분에 일본의 조선 침략은 10년 정도 늦추어진 것 같긴 합니다만...^^
    과거의 인물이라 문서상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밖에 추측할 수 없으니 정확한 실제 모습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마음 속에 그려진 인물상이 그것이 될 수 있겠지요.
    제가 생각하는 아케치 미츠히데는 빈틈없는 완벽주의자... 인 것 같습니다. '무엇'을 시키건 '반드시' 완수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16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16: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15. 써니데이 2009.12.08 0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요즘에 철지난 공명의 갈림길을 열심히 보다보니까..
    한참전에 봤던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미츠히데가 굉장히 무뚝뚝,철저하고 냉혈한같이 그려지는데 반해서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인간미 넘치고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고뇌를 많이 하는 인간적으로 좋은 인물로 그려지더군요.
    솔직히 미츠히데를 나쁘게 생각하는 편은 아닌지라 공명의 갈림길에서의 미츠히데가 실제 존재했던 미츠히데였으면..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8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땠을까요...^^

      당시 유럽의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가(...그러니까 정치적인 호불호를 제외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 미츠히데를 평하길...

      - 배신이나 밀회를 좋아한다 -> 이는 상대방을 계략으로 빼내오는데 능숙...하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 형벌을 집행할 때는 잔혹 -> 미츠히데도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참혹한 짓을 좀 한 듯.
      - 인내력이 강하다.
      - 계략과 책략의 달인

      라고 하더군요.

      성격은.... 뭐 동시대에 직접 만나고 + 만난 사람의 주관적 시선에 따라 변하는 법일테니까요.

      가령 제 친구들은 저에 대해...
      싸가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말을 돌리지 않고 직접 말하는 편이라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놈이라고도 하더군요.

      만약 제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친구가 기록가로서 후세에 글을 남긴다면...
      역사상 제 개인적 평은...
      싸가지 없는 인물....
      이 되겠죠. ^^

      과거의 역사적 인물 성격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16. 써니데이 2009.12.08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사를 관심있게 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전국시대를 논함에 있어서 프로이스가 자주 언급되더군요.
    프로이스에 관한 책중에 국내 시중에 나와있는 추천 해주실만한 책 소개 부탁드립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9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내에서 루이스 프로이스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제가 알기로 이 책 밖에 없을 듯..

      http://valhae.tistory.com/493

      에 나오는 '임진란의 기록'이란 책입니다. 분량도 많지 않기에 두세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습죠.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한 '일본사'에서 임진왜란 부분만 발췌한 글입니다....글은 나쁘지 않지만 주석 달아 놓은 부분이 좀 그렇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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