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가장 비밀스런 모의를 할 때 상담을 나누던 모신(謀臣)이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아예 친구와 같이 대했다 한다.

 “백성의 재산을 남지도 않게 부족하지도 않게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로 유명한 [본좌록[本佐[각주:1]]은 마사노부가 썼다고 한다.[각주:2]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각주:3]]가 부친 요시히로[義弘]에게 보낸 편지에,
“이에야스 님은 정치에 관해 사슈우[佐州=마사노부]하고만 상담을 나누는 것 같이 보입니다”
라고 쓴 것을 보아도 마사노부가 이에야스 정권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이에야스가 살아있을 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한다.
 “카리 님, 사도 님, 오로쿠 님[雁殿、佐渡殿、お六殿]”라는 말로, 카리 님은 매사냥을 말하며[각주:4], 오로쿠 님은 측실 중 한 명[각주:5] 그리고 사도 님은 마사노부를 이른다.
 이렇게 이에야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노부는 불과 2만2천석의 영지를 받는 것에 만족하였다. 미움 받기 쉬운 자신의 존재를 잘 이해하고 있어 많은 영지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사서에 따르면 마사노부의 용모는 매독으로 인하여 피부가 떨어져 나가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심했다 한다.

 마사노부는 하급무사로 매조련사[ 출신이라고 한다. 1563년 미카와[三河]에서 봉기한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6]는 이에야스에게 처음으로 찾아 온 시련이었는데, 마사노부는 이 잇코우잇키 군의 참모가 되어 이에야스에게 반항하였다.
 반란군 측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의 사이에 화의가 맺어지자 마사노부는 쿄우토[京都]로 탈출, 일시적으로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弾正 久秀] 밑에서 지냈다.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살해한 이 효웅도 마사노부를 보고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며 기량을 인정했다 한다. 그 후 마사노부는 카가[加賀], 에치고[越後]를 유랑한 후 유명한 오오쿠보 히코자에몬[大久保 彦左衛門[각주:7]]의 형이며,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의 추천으로 다시 토쿠가와 가문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각주:8]

 전쟁터에서의 활약 같은 것은 마사노부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사노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다 가문[武田家]이 멸망하면서 부터로, 당시는 외교관적인 자리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기 전날 밤부터 오오사카 농성전[大坂の陣]에 걸쳐 마사노부의 모략적인 재능은 풀가동하게 된다.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시기였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자, 그때까지 히데요시의 측근 행정관으로서 권세를 떨쳐왔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미워하고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등 무공파의 면면들이 결국 미츠나리를 없애기 위하여 움직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미츠나리를 구했다. 이것도 마사노부의 헌책이었다.
 “미츠나리를 살려두면 타이코우[太閤[각주:9]]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는 다이묘우[大名]도 미츠나리를 너무 원망하는 나머지 언젠가 토쿠가와 편을 들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하였다.

 오오사카 농성전에서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으로 이끄는 스토리는 거의 마사노부 혼자서 쓴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에 일어난 농성전[大坂冬の陣] 강화 조건으로써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외측 해자를 메우게 되었는데, 토쿠가와 측은 세 번째 성곽[三の丸]뿐만 아니라 내측인 두 번째 성곽[二の丸]까지 마구 메워버린 것이다. 토요토미 측이 몇 번이나 항의하였지만 공사 책임자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마사노부의 아들]의 답변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회피하여 전혀 진전이 없었다. 참다 못한 요도도노[淀殿]가 쿄우토의 마사노부에게 사자를 파견하자, 마사노부는 오오고쇼[大御所[각주:10]]가 감기에 걸려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답변을 회피하였다. 더구나 그 후에는 자신이 감기 걸렸다며 역시 답변을 회피하였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오사카 성의 내측 해자도 전부 메워 버렸다. 마사노부는 적당한 때를 살펴 오오사카 성으로 향했다.
 이때 마사노부의 말이 기발했다. 메워진 내측 해자를 보고,
 “이런 기괴한 일이 다 있나”
 고 말하며 공사 책임자인 자기 아들 마사즈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화를 낸 것이다. 철저한 오리발 작전으로 오오사카 측을 가지고 논 것이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1538년생. 1590년 사가미[相模] 타마나와[玉縄] 2만2천석.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노중(老中)이 된다.[각주:11] 1616년 6월 죽다. 59세.

  1. 마사노부의 성 혼다[本多]의 앞 글자 本과 관도명 사도노카미[佐渡守]의 佐를 따서 만든 것으로, 이렇게 앞 글자씩을 따와 두글자로 상대를 부르는 것을 카타묘우지[片名字 혹은 片苗字]라 부르며 상대에게 경의를 표할 때 쓴다고 한다. [본문으로]
  2.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물음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정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관해 7개조로 쓴 책이라 한다. 혼다 마사노부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 유명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가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가명성리(仮名性理)라는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 손을 댄 후 마사노부의 이름을 사칭해서 나온 책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사츠마 번[薩摩藩] 초대 번주이자 요시히로[義弘]의 아들인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를 말한다. 처음엔 타다츠네 였으나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 받아 이에히사[家久]로 개명. [본문으로]
  4. 사냥을 뜻 하는 狩り와 기러기를 의미하는 雁는 둘 다 발음이 '카리'이다. 이에야스는 매사냥의 장점으로 하루 종일 사냥하느라 뛰어다니면 배가 고파져 식사도 더 맛있어 지고 밤에는 피곤하기에 일찍 잘 수 있어 자연스레 빠구리도 안 할 수 있기에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5. 이에야스 측실 중 가장 똑똑했다는 에이쇼우인[英勝院 - 여담으로 만화 '영무자 이에야스'의 여주인공 같은 역으로 나왔다]의 하녀 같은 존재였으나, 이에야스의 눈에 들어 그의 측실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에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한 갈래인 오유미 쿠보우[小弓 公方]의 피를 잇는 아시카가 요시치카[足利 義親]에게 시집간다. 29살에 닛코우에 있는 이에야스의 묘소[日光東照宮]에 참배하여 분향하였을 때 향로가 터져 파편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에도 쇼우군 가문의 여성들을 다룬 '막부조윤전[幕府祚胤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당시로서는 당연시 되던 남편 죽은 뒤 머리 밀고 비구니가 되는 일 없이 미모를 너무 뽐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쓰여 있다. [본문으로]
  6.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종교 반란. [본문으로]
  7. 오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 忠教]. 토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손에 넣는데 큰 공적을 세운 무공파들보다 신참이며 주판알 잘 굴리는 문치파들을 중용하는 체제를 비판하며 토쿠가와 가문이 걸어온 길과 자기 오오쿠보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설파한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를 써서, 당시 문치파에 밀려 불만 많던 무공파 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 [본문으로]
  8. 관정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따르면 7년 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 따르면 19년 뒤에 토쿠가와 가문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타이코우란 칸파쿠[関白]자리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 사람에 대한 경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10. 에도 시대에는 살아서 쇼우군[将軍] 자리에서 은퇴한 전 쇼우군을 지칭. 즉 여기서는 이에야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11. 아들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이에야스의 곁에 있었기에 이에야스의 의향을 히데타다에게 전하는(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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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10.29 1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오 저 이에야스 바둑친구가 원래 이에야스에 반기를 들었던 자라니... 역사란 참 재밌네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같은 침대를 썼다거나 연예 편지를 보낸 것 같지는 않지만 굉장히 친했던 것 같습니다.

      오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 長安]에서 보듯이 이에야스도 쓸 모가 있다고 생각하면 마구 이용하지만 쓸 모가 없다고 판단되면(여기서는 나가야스의 죽음) 씨를 말리는 것을 보면 마사노부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우정이라고도 생각합니다.

  2. 나라 2009.10.29 1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언제나 포스팅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0.29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람도 쿠로다 칸베에처럼 매독의 희생자(-_-..)였군요, 어금니가 보인다니 이거 뭐 할로윈 특집도 아니고(...;) (오늘 영어 수업에 할로윈 동영상을 보여주는데 딱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측이 됩니다 ㅎ;)

    여담이지만 카리라기에 문득 사냥狩り를 생각했는데 그 한자가 아니었군요. 그러고보니 결과적으론 뜻이 비슷한 센스..

    아.. 영무자 이에야스에서의 그 처자..는 아니고 그 처자의 여종이라지만; 아무튼 죽은 이에야스 폴터 가이스트 따위에 맞아 죽다니..(;;) 아쉬운 일이에요. 아니, 미인 박명이기에 어쩌면 더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결국 그것도 복이려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 전 칸베에 매독설을 부정합죠 ^^

      저 어금니 보인다는 것은 그의 정적 중 하나가 일기인지 뭔지에 마사노부가 그 꼴이 되었다고 낄낄대며 쓴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어디서 읽었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참고로 주석에도 썼던 막부조윤전이란 책에는 급사(頓死)라고만 나옵죠[日光御宮に参詣、神前に於て頓死す]. 일본 웹에서 파편에 죽었다고 해서 썼는데, 지금 보니 확인되지 않은 것을 쓴 쓸데없는 사족인 것 같군요...(개인적으로는 믿을 만한 사이트이긴 합니다만)

  4. ckyup 2009.10.30 0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하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마사노부는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을때쯤 서서히 드러나다가, 세키카하라 전후로는 거의 견줄만한 상대가 없을정도의 너구리 그림자가 되더군요.... 그러고보면 이에야스는 역시 현명한 정치를 펼친것 같습니다 - 혼란시에는 무관을 중용하고, 그 이후에는 문치중심으로 나가는..... 어쩌면 박대통령이 그점에서 인간경영에 실패한것 같군요 - 혁명과 정권안정때에 중용하던 군출신들을 끝까지 측근에 두었다가, 그 측근들이 술과 여자 바치는 아첨배로 점점바뀌며 저희들끼리 힘과 신임의 암투를 벌이는 가운데 암살당하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란의 시대때는 무공파를, 패권이 확립된 뒤로는 문치파를...한 고조 유방이나, 왕자의 난을 제패한 태종 이방원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 사후 무공파와 문치파의 싸움이 일어난 것(세키가하라 전쟁)도 그로 인해서 입죠. 히데요시가 더 살아 강력한 중앙집권(즉 문치파 득세)이 실현되었다면 세키가하라는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생각합니다.

      전혀 딴소리가 되겠지만 그만큼 외로웠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하가 그렇게 해 쳐먹는 것을 알면서도 왠간해선 곁에 두어야 할 정도로 대화상대가 필요하지 않았을지...권력자의 자리는 외롭다고들 하니까요.(참고로 외로워도 좋으니 전 그 자리를 꼭 맛보고 싶군요.)

  5. Favicon of http://strasbourg.egloos.com/ BlogIcon Orca 2009.10.30 0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사노부가 죽은 뒤, 마사즈미 대에서도 계속 쇼군 가의 측군으로 활약해, 나중에는 시모츠케 우츠노미야 15만석에 이르지만, 결국 히데타다 시대 때 한방에 몰락. 그냥, 나중에 그걸 알게 되니까 씁쓸하더라구요.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사노부는 죽으면서 마사즈미에게,
      "많이 바라지 마라, 3만석까지는 좋다. 그 이상은 바라지 마라"
      고 했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한방에 훅~ 갈 정도로 정적이 많은 것도 원인인 듯 싶습니다. 같은 편이 많았음 그렇게까지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역시 빽과 끈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6. 골룸 2009.11.05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한 사람의 성격과 기질이 태어나면서 완전히 정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타고난 기질이 중요하겠지만 살면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것도 달라지는 것 같네요
    잇꼬잇끼와 패배, 유랑, 복귀... 뭐 이런 걸 거치면서 혼다 마사노부라는 인간이 만들어 진 것 같습니다
    이거 절대 딴지는 아닌데 위에 마사노부 1583년생은 아닌거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5 17: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살아온 환경이나 경험에 따라 사람의 인성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예. 1538년을 오기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얼릉 고치겠습니다. ^^ 제가 워낙 오타가 많으니 보이시면 꼭 알려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립니다.

  7. seeker 2017.10.05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잘봤는데요. 혼다 마사노부는 59세가 아닌 79세 죽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정부탁드립니다.

 196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두 명이었다는 놀랄만한 이설(異說)을 발표한 사람이 있다. 사의(史疑)라는 책을 저술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이다. 토우카이 지방[東海地方]의 지방관리로 근무하던 중 미카와[三河]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후년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세라타 모토노부[世良田 元信]라는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고 한다. 그는 진짜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의 부하가 되어 불시에 진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이런 이설이 나올 정도이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선조 역시 확실치 않다. 닛타 겐지[新田源治][각주:1]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지만 이는 나중에 날조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토쿠가와 가문의 시작은 코우즈케[上野] 닛타 군[新田郡]에 살던 토쿠아미[徳阿弥]라는 행각승()으로, 이 스님은 떠돌던 중 미카와에 와서 서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의 호족 타로우사에몬[太郎左衛門]의 사위가 되어 환속, 이름을 마츠다이라 타로우사에몬 치카우지[松平 太郎左衛門 親氏]라고 했다 한다.[각주:2]
 후년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었을 때 아시카가 겐지[足利源氏][각주:3]의 명문 키라 씨[吉良氏][각주:4] [각주:5]의 족보를 물려 받은 것[각주:6]도 이런 애매한 선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족보사칭이다.

 

화제를 돌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는 두견이[ほととぎす]에 비유하여,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가 노부나가[信長], ‘울게 만들겠다’가 히데요시[秀吉],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식으로 정권의 자리를 획득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江戸時代] 후기 턴포우[天保] 연간[각주:7]에 그려진 풍속도에는 갑주를 입은 남자들이 떡을 만들고 있는 장면이 있어, 절구공이를 들고 막 찧으려고 하는 것이 노부나가, 그 옆에서 떡을 만들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 그리고 최상석에 가만히 앉아서 떡을 먹는 것이 이에야스이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를 비꼰 그림으로 그 때문에 만든이인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 芳虎]는 막부(幕府)에 체포되어 60일간 수갑이라는 형(刑)과 절판이라는 벌에 처해졌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이라 알려진[각주:8] 이 말은 그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참을 인(忍)이라는 글자가 그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보다 8살, 히데요시보다는 5살 어리다. 조부 키요야스[清康]의 시대부터 미카와 오카자키[岡崎] 성주가 되었지만, 동쪽의 이마가와[今川], 서쪽의 오다[織田]라는 강력한 세력에 끼어 약소세력의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조부 키요야스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부터 마츠다이라 가문은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보호를 받기 위해 어린 이에야스는 인질로 바쳤고, 그로 인해 이에야스와 마츠다이라 가문은 인종의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12년간 마츠다이라 주종(主從)은 고난 속에서 허덕이지만, 이 시기에 이에야스의 참을성 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

 1560년 5월 19일.
 오다 노부나가의 전격작전으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어, 덕분에 이에야스도 인질생활에서 해방된다. 이에야스는 19살이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관계를 끊고 오다와 동맹을 맺어 미카와 통일을 이룬다. 1563년, 그때까지 모토야스[元康]에서 이에야스[家康]로 개명한다.

 막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나 본거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 봉기한다. 영내에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9]가 봉기한 것이다. 미카와에 있던 이마가와 잔당에 더해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섬기던 미카와의 무사들까지도 반기를 들었다.
 이를 반년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는데, 강화 조건의 실시에서 이에야스는 일찌감치 후년의 뻔뻔한 정치성을 발휘한다. 잇코우 종[一向宗][각주:10] 사원의 안전을 보장했으면서도 막상 반란이 진정되자 잇코우의 절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약자와 맺은 약속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지만, 강자에게는 어디까지나 의리를 지키는 정책이 일찍이도 이때부터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즈음 강자 노부나가에게는 자신의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에게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시켜 충성의 뜻을 나타내었고, 나중에는 그 노부나가가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 노부야스를 죽이기까지 한다.(이 부분은 졸역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처자식을 죽였다?"를 참조 삼아 보시길.)

 이에야스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서면 그의 호방함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1572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2만 군세와 싸운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그런 모습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는 센고쿠 최강인 코우슈우[甲州]의 군세가 상대. 더구나 상경(京)하려는 대군이었다. 이에야스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서 싸워 실제로 참패하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해 온 이에야스는 일부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안팎으로 화톳불을 대낮같이 밝히게 하였다. 적에게 공격해 볼 테면 하라는 대담한 전술이었다. 뒤를 쫓아 온 코우슈우의 병사들은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공격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은 뜨슨 물에 밥을 말아 세 그릇을 비우고는 코를 크게 골며 잤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후 타케다의 맹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는, “토쿠가와 군의 전사자는 모두 우리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죽었다”고 신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야스는 패하기는 했지만, 토우카이 No.1 무장[각주:11]이라고 일컬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전쟁터에서 이에야스가 지휘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처음엔 지휘봉을 휘두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먹을 쥐고 말 안장 앞부분을 두드리며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너무도 세게 두드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였다고 한다.

 천하에 대한 야망이 이에야스의 마음 속에서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각주:12] 때부터 일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태두로 그 꿈은 잠시 접어 둔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대놓고 정권획득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바친 서약서를 어기고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그들의 자식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 보냈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여러 다이묘우의 영지를 가증시켜 많은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에게 보낸 편지는 실로 179통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을 격파하였고,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확인 사살하여 토쿠가와 정권을 반석에 올려 놓은 것이다.

 말년의 이에야스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50세 전후부터 비만 체형이 되었고 아랫배가 나와 혼자서 훈도시를 조이지 못하여 시녀(侍女)에게 조이게 할 정도였다. 신장은 5척 1~2촌(약 155~158)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굉장히 건강을 생각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매사냥이 이에야스 건강의 원천인 듯 죽을 때까지 매사냥을 행한 횟수는 천 번을 넘는다.

 이에야스의 측실은 10명 이상 있는데 다이묘우 등 고귀한 집안의 딸들을 동경했던 히데요시와는 반대로 이에야스의 측실에는 하층계급의 딸이나 미망인이 많았다. 말년까지 정력은 절륜했던 듯 소위 토쿠가와 어삼가(御三家)[각주:13]의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9남 요시나오[義直]는 59살 때, 키이 가문[紀伊家]의 10남 요리노부[頼宣]는 61살 때, 미토 가문[水戸家]의 11남 요리후사[頼房]는 62살 때의 아들이다. 

 건강을 소중히 한 이에야스는 의사 이상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화제국방(和剤局方)[각주:14]’이라는 의학서를 항상 옆에 끼고서 스스로 진단하고 약을 조제할 정도였다. ‘만병원(万病圓)’이라 이름 지은 약을 특히 잘 만들었다고 한다.[각주:15]

 1616년 4월. 죽음을 앞둔 이에야스는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와 측근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할 일을 세세히 지시하였다. 유체나 위패의 위치는 물론 닛코우[日光]에 작은 묘소를 세우는 것까지 지시하였다. 죽기 이틀 전에는 죄인(罪人)을 시험 삼아 베게 한 명도(名刀) 미이케덴타[三池典太]를 베갯머리에 가지고 오게 한 뒤, 이불에서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허공을 내리쳤다. 그리고 당장 죽을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확실한 말투로, “나는 이 칼을 가지고 자자손손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그 다음 날, 신류우인 본슌[神流院 梵舜]을 불러 “쿠노우[久能山]의 내 묘소에, 내 몸을 서쪽으로 향하게 해서 안치하라”고 했다고 한다. 즉 서방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6] 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대로(大老)를 불러, “히데요리[秀頼]를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고 유언한 안쓰러운 모습에 비하면, 실로 냉정한 최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2년생.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적자. 아명 타케치요[竹千代], 이름이 처음엔 모토노부[元信], 다음엔 모토야스[元康]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전사를 기회로 독립하자, 1568년 즈음 미카와[三河]를 평정.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후 미카와,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남반부를 영유. 히데요시[秀吉]와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결전을 피해 화해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7] 후인 1590년 칸토우[関東] 6개 지역에 242만석을 하사 받아 에도 성[江戸城]를 거성(居城)으로 하였다. 1603년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1616년 4월 7일 죽었다. 75세.

  1. 오우슈우[奥州]를 무대로 펼쳐진 전구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삼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 대활약한 미나모토노 하치만타로우 요시이에[源 八幡太郎 義家]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義国]의 첫째가 코우즈케[上野]의 닛타[新田]라는 곳을 영유하면서 닛타라는 성을 썼다. [본문으로]
  2. ...는 에도막부가 편찬한 책(朝野旧聞褒藁)에 따른 말이고, 후세 아직까지 권위를 인정 받는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라는 사람의 논문에 따르면 - 토쿠아미에게 조상을 묻자, 토쿠아미는 "뭐 우리네라고 하는 것들은 동서남북을 떠돌며 여행하는 사람들로, 어디건 상관없이 유랑하는 자이기에 그런 것을 물으면 창피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무사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떠돌이라는 것이 창피하다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닛타 겐지와 마찬가지로 요시쿠니[義国]가 아시카가 장[足利庄]을 영유하며 그의 둘째 아들 요시야스[義康]가 영유하며 이후 아시카가 씨가 된다. 사족으로 닛타와 아시카가 양 쪽의 선조인 요시쿠니는 아시카가 시키부다이후[足利式部大夫]라고 칭한 것을 보면, 닛타와 아시카가 중 적류는 아시카가 인 듯. [본문으로]
  4. 아시카가 씨 3대 당주 요시우지[義氏]가 카마쿠라 중기 미카와의 키라 장[吉良荘]을 하사 받아, 아시카가의 땅을 물려 준 적남 야스우지[足利 泰氏]를 제외한 서장자 나가우지[吉良 長氏 - 사족으로 이 나가우지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선조이다], 셋째 요시츠구[吉良 義継]에게 부터 시작하는 가계. 키라 장은 야하기가와 강[矢作川]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형인 나가우지는 서쪽을 영유하여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를 칭했다. (동생 요시츠구는 처음엔 동쪽인 토우죠우 키라시[東条吉良氏]가 되나 후에 오우슈우[奥州]의 남조 측을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로 가 오우슈우 키라 씨[奥州吉良氏]의 선조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 초기 잠깐 활약하나 몰락). [본문으로]
  5. 후에 나가우지의 손자 미츠요시[吉良 満義] 때 미츠요시와 그의 적남 미츠사다[吉良 満貞]가 무로마치 막부 초반 혼란기에 각지를 전전하여 비운 사이 본거지인 키라의 동쪽을 미츠사다의 동생 타카요시[吉良 尊義]가 횡령하여 토우죠우 키라 씨[東条吉良氏]가 성립. 후에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이 토우죠우 키라 씨의 5대 당주 키라 요시후지[吉良 義藤]가 동족이며 예전 종가집인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와 싸우다 전사. 그 뒤를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5대 당주 나가치카[松平 長親 - 이에야스의 고조부가 된다]의 셋째 아들 마츠다이라 요시하루[松平 義春]가 잇고 이때부터 토우죠우 마츠다이라 씨[東条松平氏]가 된다. [본문으로]
  6. 센고쿠 시대 키라 씨는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양 가문은 키라 요시야스[吉良 義安] 때 합병. 요시야스의 부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 또한 요시야스는 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포로가 되어 있던 시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만나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7. 1830~1844년 사이. [본문으로]
  8. 이 말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가 한 말을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어떤 놈(이케다 마츠노스케[池田 松之介])가 이에야스의 글을 흉내 낸 것을 또 딴 놈(타카하시 테이슈우[高橋 泥舟])가 각지의 이에야스 사당[東照宮]에 바친 것이라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9.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10. 혼간지[本願寺]의 종파인 쟁토진종(浄土真宗)의 별칭. [본문으로]
  11. 海道一の弓取り. [본문으로]
  12.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살해한 사건. [본문으로]
  13.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본문으로]
  14. 중국 북송(北宋) 휘종 대에 만들어진 중국의 의약서.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죽기 전 이에야스는 이 만병원에 굉장히 의지하였다. 이에야스의 전의(典醫)인 카타야마 소우테츠[片山 宗哲]가 말리자 신경질내며 그를 시나노[信濃]의 타카시마[高島]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까지는 토쿠가와의 부하가 아니었던 가문. [본문으로]
  17.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한 1590년의 전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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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19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왠만큼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승려가 마쓰다이라가의 선조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정설이 아니라 그냥 추측 중에 하나라는 것과 50세부터 비만이라는건 원래부터 비만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인 듯.
    이 양반도 보면 만만찮은 간웅인데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생애가 격렬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뭍히는 듯 그러고 보면 불같다고 생각하는 노부나가도 여자(네네에게 보낸 편지) 자상한 면이 있는 한편 느긋하다고 생각하는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당시 제장들에게 열라게 편지써보낸 것과 같은 것이겠죠. 소하찌씨는 저런 이에야스를 어떻게 그럴듯 하게 미화를 잘 시켰을까나. -_-;
    떡에 관한 일화는 아는데 저 그림을 본건 처음입니다. 어째 우리나라의 솥단지 얘기가 생각나는건......

    즐거운 한주 되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야마오카 선생의 소설의 영향이 큰 듯 합니다. 그런 인물은 다시 찾기도 힘들 정도로 성인군자로 나왔을 정도다 보니.

      개인적으로 그 소설 초반의 노부나가는 정말 멋진 듯 합니다.

      우리나라의 솥단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비슷한 이야기 인가요?

      흰꿈님도 좋은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2. 나라 2009.10.19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궁금한게 생겼는데... 저 일본식으로 중간에 머리 깎는 습관은 언제 생긴 건가요?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마가와[山川] 출판사의 일본사 사전에 따르면 중세(카마쿠라 시대~센고쿠 시대) 귀족부터 시작되었다고 나오며, 일본 위키 해당항목[さかやき]를 보면 1176년에 그 기록이 보인다고 하네요.(즉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날뛰기 몇 십년 전부터 나왔다는 말입죠)

      생성 초반엔 전쟁터에서 투구를 쓸 때 후끈거리고 답답한 것을 막기 위해서 했는가 봅니다만, 나중엔 무가의 일상 생활에서도 하게 되어, 특히 무가에서는 성인식 때 이발역[理髪役]을 맡은 사람이 머리를 밀고나 잘라 줌으로써 아이에서 성인이 되었음을 외견 상으로도 알 수 있게 됩죠.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19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떡 치는 (...이라고 하니 어감이 요상하군요;;) 얘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림에 미츠히데도 들어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처음 보기도 하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론 꽤 유명한 그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어쩐지 그래서 미디어위키에도 없었군요.(즉 저 그림은 와세다 전자 도서관에서 무단으로 다운 받은 것! 우하하하)

      그러고 보니 몇 달전에 떡집 사장이 수 십명의 여성들을 농락했다고 자극적인 제목을 달던 몇몇이 떠오르는군요.
      (떡집사장이 떡은 안치고 떡을...이라는 식으로 ^^)

  4. 나라 2009.10.20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소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5. ckyup 2009.10.20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대망에서의 너구리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상식이 되었나 봅니다 - 무조건 대의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성인군자..... 좋은글 또 감사합니다, 몰랐던걸 알게되었군요. 떡반죽하는 히데요시 그림이 참 재밌네요. 물론 또 대망 이야기지만..., 삼국지와 비교해보면 삼국지의 주군들은 거의 모사나 군사들의 머리에 의지하는면이 많지만, 대망에서보면 가장 똑똑한 군사도 주군들의 머리를 따르지 못하더군요, 특히 히데요시. 그리고 대망이 뻥이 덜 심해요 - 군사숫자에서 비교해보면 확실하죠, 삼국지는 갑자기 급하게 정찰나가도 한 5천 끌고 나가죠.

    암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연재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이미지가 가장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동물도 태어나서 처음 본 생물을 어미로 여긴다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망과 삼국지의 차이는 작자의 인식 차이라 생각합니다. 재미를 느끼게 하는 곳을 대규모 군사 움직임에서 찾느냐 인물의 심리에 중저을 두느냐의 차이 아닐까요?

      정찰나가도 오천...^^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순간 박장대소하였습니다.

  6. 맹꽁이서당 2009.10.21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너구리 영감이군요. [삼국지 연의]가 수많은 독자들에게 촉한정통론을 심었듯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위나 오에도 관심이 가긴 하지만, 맘 깊은 곳에서는 역시..) [대망]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노부나가나 히데요시가 평화를 정착시켰으면 이에야스는 역사속에서 다테 마사무네 정도의 위상이 아니었을까, 아님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정도 나이(세키가하라 직전?)에 죽었다면 전국시대가 더 이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나이 먹으면서 조조 쪽으로 옮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제갈량에 대한 동경은 지워지질 않더군요(유비는 많이 인식이 변했지만요)

      노부나가가 살아서 천하통일 했을 시에는...음... 개인적으로는 오다 가문 휘하의 무장들이 너무 쟁쟁해서 이에야스가 나올 자리나 있었을지...뭐 IF의 이야기는 각자 다들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이거다..라고 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야스가 죽더라도 그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마에다 토시이에 혹은 모우리 테루모토 정도가 이에야스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7.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0.21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천하인이 있는가 하면, 저런 천하인도 있고.
    천하를 얻기 위한 사람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뭐 천하만 손에 넣으면 조상 바꾸기야 쉬울테니까요. 사람들이 믿건 안 믿건 대놓고 반론을 하지는 못할테니까요.

  8. Favicon of http://liquer.tistory.com BlogIcon 2009.10.21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사이언스 채널에서 [전사]란 제목으로 이에야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주더군요. 이에야스가 딱히 나쁘진 않게 나오는데 결말이 좀 씁쓸했던것도 같습니다. '미츠나리는 죽고 히데요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죽고 이에야스의 가문은 250년간 일본을 지배했다.' 식으로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 사이언스 채널에서도 그런 것을 하나 보군요. 뜬금없겠지만 히스토리 채널 없애버린 중앙일보에게 갑자기 분노가 이는군요. ^^;

      이에야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겠지!!..하고 말하고 싶군요. ^^ 뭐 일본 사람들도 쇼우군 가문[将軍家]와 섭정가문[摂家]의 상하구별을 못하는 사람들 많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듯.

  9. shotokanfist 2009.10.25 15: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전사라는 프로그램을 문장으로 정리해서 동명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누가 책을 줘서 읽어봤습니다만, 번역상의 오류가 많았는지 (설마 원저자가...) 기본적인 연도나 인명, 사실관계에 오류가 많아서 읽으면서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프로그램 자체는 호평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못봤는데, 평이 좋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6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검색해 보니....
      전사들(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전사들의'이기는 기술') Heroes and villains

      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것인가 보군요.... 설명에 인문경영서다...라는 부분이, 좀 슬프게 느껴지는 군요. 그냥 인문서라고 해도 될 것을 꼭 경영서라는 부분을 붙여야 한다는 점이 조금 아쉽군요.

      이야~ 어쩌면 윌리엄 아담스의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숨기진 역사를 쓴 것일 수도...(물론 그럴리 없겠지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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