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불행은 재능도 없으면서 히데요시(秀吉)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칸파쿠(関白)까지 출세한 것에 있다.
 히데츠구는 오와리(
尾張)의 성()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친이 히데요시의 누나[각주:1]였다. 그런 관계로 출세하기 시작하여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의 양자가 됨에 따라 예가 없을 정도의 승진을 이룬 것이다.

 18살에 종사위하(四位下)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에 임명되었으며, 21살 때는 정삼위(正三位)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하였다. 24살 때,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죽자 칸파쿠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바랄 수 없다고 본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쥬라쿠테이(楽第[각주:2])를 히데츠구에게 주고 히데요시 자신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가 이후 타이코우(太閤[각주:3])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2년 후인 1593년 히데요시에게 오히로이(おい – 후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난 것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에게 칸파쿠를 물려준 것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그런 감정을 히데츠구도 느낄 수 있었다.
  히데츠구가 여기서 깨끗하게 '칸파쿠'라는 직책을 히데요시에게 반환하였다면 비극의 인물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맛본 권력의 맛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때 일본 전국을 5분할하여 그 중 4/5는 히데츠구에게, 1/5을 히데요리로 나누는 계획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장래 히데요리의 부인으로 히데츠구의 딸을 맞이하여 토요토미 가문(
豊臣家)을 잇게 하는 방안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데츠구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오히려 자포자기와 같은 행위를 거듭하게 된다. 히데요시가 칸파쿠의 직책을 거두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강박관념이 그를 난행으로 몰고 갔다.
 철포(
鐵砲) 연습을 핑계로 쿄우토(京都) 교외 키타노(北野) 근방에 가서 밭일을 하던 농부를 표적으로 쏘아 죽였고, 또한 활의 표적으로 지나가던 사람을 멈추게 한 후 맞추어 죽였다. 나중에는 살인에 맛을 들여 밤중 시내에 나가 돌아다니다 마주친 사람을 계속해서 칼로 죽였다. 자신의 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 – 그 손맛이 죽였다. 히데츠구는 이렇게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 수백 명을 죽였다고 한다.

 히데츠구의 난행은 끝이 없었다. 오오기마치 죠우코우(正親町上皇)가 죽었다[각주:4]고 하는데도 사슴사냥을 하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다.

죽은 상황에게 공양하기 위해서 사냥을 하니, 이것을 살생관백이라고 한다
御所のたむけのためのなれば、これをせっしょう関白という[각주:5]
 는 낙서마저 나왔다.

 히데츠구는 그 다음으로 성지(聖地)라 일컬어지는 히에이잔(比叡山)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금녀의 구역인 히에이잔에 여성들까지 함께 데리고 올라가 사슴사냥을 한 것이다. 히에이잔은 물론 살생이 금지된 땅이었다. 스님들이 멈추어달라고 사정을 하자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원숭이, 너구리까지 잡아 그렇게 사냥해 온 것들을 본당() 네모토 중당(根本中堂)으로 가지고 들어와 대놓고 요리해 먹은 것이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승려들이 쓰고 있던 소금이나 식초통에 사냥한 개나 사슴의 시체를 던져 넣었다.[각주:6]

 이런 난폭한 행위들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저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히데요시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 있으니 히데츠구가 조정에 막대한 헌금을 한 행동이었다[각주:7]. 1595년의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것을 모반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판단하였다. 파견된 힐문사(詰問使)에게 히데츠구는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칸파쿠, 사다이진(左大臣)이라는 요직()을 박탈당했다. 히데요시와의 면담도 거부당하여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당한 뒤 그곳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다.

 히데츠구의 가족들에 대한 히데요시의 처치는 잔혹의 극을 달했다. 처첩과 자식들 모두 쿄우토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으로 끌려가 히데츠구의 목 앞에서 사형당했다. 2~3세의 아이까지 모친의 면전에서 살해되었으며 그 모친도 곧바로 목이 베어져 죽음을 당했다.

[도요토미노 히데쓰구]
1568년생. 처음엔 '미요시 야스나가(
三好 康長)'의 양자가 되어[각주:8] '미요시 마고시치로우(三好 孫七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585년 오우미(近江), 야마토(大和)에서 43만석[각주:9]. 1591년 칸파쿠(関白)가 되었다. 1595년 추방당하여 자살. 28세.

  1. 즈이류우인 닛슈우(瑞龍院日秀). [본문으로]
  2. 히데요시가 자신이 세운 정권의 권위와 상징을 위해 쿄우토에 세운 정청(政廳)겸 주거지. [본문으로]
  3. 은퇴한 칸파쿠에게 붙여주는 경칭. [본문으로]
  4. 1593년. 1586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 양위한 상태였다. 여담으로 히데요시는 이 오오기마치가 양위하고 살 집(센토우고쇼(仙洞御所))을 마련한 공로로 칸파쿠(関白)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원어로는 'せつせう'라고 되어 있는 듯... 살생(殺生)과 섭정(摂政)의 발음은 둘 다 셋쇼우(せっしょう). 그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 섭정관백을 살생관백으로 말장난한 것. [본문으로]
  6. 히에이잔 측의 기록에는 없는 말이라고 한다. 야마시타 토키츠네(山科 言経)의 일기인 [토키츠네 경기(言経卿記)]에 따르면 히데츠구는 당일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뭐 이 헤이케모노가타리 듣는 것도 향락에 속하는지라 상황 붕어의 자숙하는 분위기에서 해선 안 될 행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이 뿐만 아니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이른 것에 따르면, 뭔 일이 있을 시에는 관백인 자신(히데츠구)을 따른다는 서약서를 비밀리에 제출하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그전(3살 즈음)에 '미야베 케이쥰(宮部 継潤)의 양자가 된 적이 있다. 양자가 되었을 당시 미야베는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의 유력 무장이었는데, 히데요시는 미야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며 안전보장 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조카를 양자라는 이름의 인질로 보냈다. 아자이 가문이 멸문되자 반환되었다. [본문으로]
  9. 그 후 오와리와 이세 등에 100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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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08.01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저 히데츠구의 고뇌라는것도 납득이 갈만도 합니다. 칸파쿠직을 다시 내어준들, 잠재적 경쟁자일 조카를 갓난아기인 친자식이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둘리도 없잖겠습니까..랄까, 애시당초 신뢰로 형성된 관계라면 모를까 저 센고쿠에 그런관계따위 있을리가 없죠.

    히데요시가 1592년 전에 죽었다면 어땠을까 싶긴 하군요. 뭐 느슨한 연합체이긴 하겠지만 도요토미 정권 비슷한게 에도바쿠후를 대신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2 1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군상 56, 센고쿠 무심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항목을 쓴 오오노 노부나가(大野信長)씨는 마지막에 흥미로운 해석을 해 놓았더군요.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이며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인인 고우히메(豪姫)를 히데요시가 평하며 한 말인...
      "남자였다면 칸파쿠를 물려줄 텐데..."라는 것을 들어, 히데요시는 가장 사랑하고 평가하는 인물에게 주는 칭호였다고(...문제는 저는 아직 히데요시가 고우히메에게 한 저 '칸파쿠 운운'하면서 천하를 준다는 말을은 고우히메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했는지 본 적이 없어서...뭐..임진왜란에서 대성공해서 히데요시가 중화황제가 되었을 시 일본 칸파쿠(즉 일본총독)으로 임명할 생각을 가졌다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은 있지만요)

      흥미롭군요. 1592년 히데요시 사망이라...
      아마... 히데츠구의 정권이 주욱 이어졌다고 쳤을 때... 히데츠구 인생의 유일한 패전이었다는 코마키-나가쿠테는 아마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처럼 말타고 달려드는 이에야스와 젊은 나이지만 중후한 히데츠구가 그것을 맞받아 치는 이야기도 생겼을 것이고...

      히데요시의 갖은 성공 뒤에는 어린 나이의 천재 군략가 히데츠구가 활약했다고 나온다던가..

      이에야스의 신격화가 진행되지 않았을 테니 이에야스를 똥싸개로 만든 타케다 신겐도 그냥 지방군벌 찌질이 레벨, 그에 이은 우에스기 켄신도 신경질 졸 부리는 약탈방화범...정도로 인식될지도요.

      (저런 것으로 IF전기를 써도 재미있겠군요 ^^ )

  2. 나라 2009.08.02 2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는 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3 0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운이 없는 편이라 생각합니다.

      코마키-나가쿠테에서 본전만 찾았더라도 이에야스는 코너로 몰렸겠고, 그랬다면 히데요시의 위상도 더 높아짐과 동시에 동국의 방파제로서의 히데츠구의 가치도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츠루마츠의 죽음도 어쩌면 운이 없다고 볼 수 있죠. 츠루마츠가 살았다면 적당한 위치에서 적당한 보호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겠지만, 츠루마츠의 죽음으로 준비도 없이 단번에 No.2 이후는 뭐...

      가장 운에서 버려진 것은 역시 히데요리의 탄생. 속 좁아져 자기 아들밖에 안 보이는 권력자의 눈에 No.2는 단순한 방해물밖에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뭐 머든 결과론이지만 말입죠.

  3. 나라 2009.08.03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는 히데요리가 탄생했을 때에 관백을 반납하고 머리를 낮췄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아니면 오슈의 제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_-;;)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들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그것땜시 나중의 비극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우선 절대로 없었을 것 같군요.
      오우슈우에서 조선까지 가는 동안(즉 일본 내에서의 이동 만으로) 어마어마하게 드는 쌀과 돈을 생각하면...
      거기다가 오우슈우의 무장들은 카사이-오오사키의 난, 쿠노헤의 난에서 이미 병역을 치루었기에 임진왜란 때는 면제가 된 것 같더군요. 굳이 갈 필요 없는데 간 다테 마사무네가 특이하다면 특이 케이스....하긴 임진년 초기에는 우에스기 패거리들도 건너가서는 금방 돌아온 애들이고.

  4.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8.03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게 다 히데요시 때문이다 랄까(...)
    물론 살생관백이라 불려질만큼 히데츠구가 저지른 일은 옹호할수 없지만... 히데요리에 정신이 팔려서 마무리가 흐지부지한것이...
    그냥 조용히 불러서 히데츠구 너님 다음 칸파쿠로 히데요리는 어떻냐 나중에 물려주면 안되겠냐 하고 좋게좋게 협상해서 끝났으면 나중에 이에야스 러쉬가 와도 토요토미씨 멸망까진 안갔을텐데 싶네요.

    그나저나 구레나룻이 뭔가 인상적이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살생관백으로 유명한 여러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소스를 시작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려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의 [태합님 군기에 대해서(太閤さま軍記のうち)]...것도 '그랬다!'가 아닌...'~라고 하더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며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이럴 때마다 느끼는 비애.. 원본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죠. '누가 그러더군요'는 식으로 쓸 수 밖에 없어 안타깝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히데츠구가 악행을 저질렀을지 어땠을지...개인적으로 청개구리파인지라 남들이 대세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비틀어 보는 경향이 있는지라 전 히데츠구 무실설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 히데요리도 히데츠구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눈치는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히데츠구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구렛나루 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도 한 구렛나루 합죠.... 그러고 보니 우지사토는 엄청 미남이라고 하며 히데츠구도 잘 생겼다는 이야기도 보이더군요...그렇담 센고쿠 미남의 조건 중 하나는 구렛나루?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는지요 ^^

    여기 오면서 <역사군상>이란 책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어떤 책인가 싶으면서도 머릿 속에 대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제가 생각했던게 그거였네요. 꼭 사고 싶지만 일본어와 비용의 압박이 심하군요 -ㅅ-;;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 잘 지내시죠? 전 덕분에 (돈 없는 거, 애인 없는 거, 집 나간 고양이 생각하는 거 빼 놓고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진 편입죠. 예전엔 고문을 그대로 쓰고 해석도 안 해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요즘엔 그래도 해석도 써 주고 루비(한자 위에 발음 써 주는 거)도 달려서 읽기는 많이 편해졌습니다....만 그 대신이랄지.. 가끔 황당한 주장을 실어서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황당한 주장이라면 학설같은건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6: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제가 또 말을 실수했네요. 그냥 잊어주시길. ^^; 료우마에 관한 것에서 료우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었다는 글이 워낙 인상에 남아서 실수를 저질렀네요.

  6. shiroyume 2009.08.08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양반... 전에는 히데요시한테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대망의 영향인지...)

    역시 생각해봐도 설사 히데요리가 안태어나도 붙잡혀 죽었을 듯. 어째 우리의 고려의 막장군주 충혜왕과 겹쳐지는건 -_-;

    그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양자가 되었을라나.

    저는 팩트를 중요시하는편이라 시바료타로를 재밌게 읽긴 하지만 링크걸어놓은걸 보니 확실히 뭐라고 해야하나...가독성은 떨어지는군요. 한국에서 인기가 없었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일본은 문화적성향상 디테일도 중요시 여기지만 한국은 가독성이 있고 흐름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최악의 사서로 평가받는 이문열 삼국지가 잘 읽히는건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주 무능하거나 알려진대로 좆병진이었다면 내버려 두어도 인심은 알아서 떠날 것이며 또한 자멸할 터이니 죽일 필요까진 없었겠죠. 아주 뛰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능력과 인덕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자신이 일군 업적을 빼앗길까 두려워 한 것이고 그렇게 참혹히 관련된 사람들을 죽인 거 아닐까요?

      츠루마츠 죽은 시점에서라면 히데아키처럼 처의 친족보다는 히데츠구의 친동생이며 역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히데카츠(秀勝)가 되었을지도...무엇보다 히데요시의 친아들 히데카츠의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이니까요.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야 제가 번역해서 그런 거고요. ^^;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역사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제대로 번역작업하시는 분이 하셨다면 정말 좋은 글이 나왔을 듯.

  7. 1 2009.08.10 0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료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라는 글 굉장히 구미가 땅기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블로그에 소개해주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그런 글을 올렸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분들이 있을까봐 피하고 싶군요.

      우리나라에 들어온 료우마의 인식이야 시바 선생의 '료마가 간다' 정도일텐데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유포시킬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불가능합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덧붙이자면 음모론은 거의 대부분이 구라입니다. 있는 사실을 빼놓고 주장하고픈 사실들만 나열해서는 독자를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료우마의 프리메이슨 꼬붕설은 그런 류의 하나입니다.

      일본어 아신다면 '신 역사군상 시리즈④ - 유신창세 사카모토 료우마' 150~152페이지를 참조해 주십시오.(몇 일전 들린 교보문고에 저 책은 아직 몇 권 더 있더군요)

  8. agger 2009.10.08 0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츠구의 여타 능력은 솔직히 잘 모르겠으나 정치적인 식견이 없었기에 죽음을 자초한것이라고 생각..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졌을때 알아서 기었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드는군요
    아니면 아예 요도도노에게 굽신굽신 하면서 히데요리의 후견인 비슷하게 가겠다는 정치적 움직임을 보여주거나..하튼 히데요시에게 안심을 주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어야 했는데..그런 부분이 안타까움..

    개인적으로는 히데요시를 참 좋아하고 그런 모습을 닮고 싶은데(말년빼구요 ㅋㅋ) 히데츠구가 죽은 시점이 도요토미가의 몰락?을 예견한 분수령이 된거같아서 아쉽게 느껴지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8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히데츠구에게는 히데요시를 안심케 할 만한 뭔가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런 일을 했는데도 히데요시가 부족했다고 느겼을 수도 있고요)

      히데요시가 히데츠구에게 붙여준 가신단의 면면들을 보면 확실히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단지 역시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이 토요토미 가문 그리고 히데츠구에게는 마이너스였던 것 같습니다.

 미요시 쵸우케이는 당시의 쇼우군() 부자를 쿄우()에서 추방하는 등 킨키(近畿) No.1의 실력자로 올라섰지만 음모가(陰謀家)라기 보다는 오히려 섬세한 문화인(文化人)이었다.


 고전(古典)을 즐기고 와카(和歌)렌가(連歌)를 읊으며, 다인(茶人)들과 함께하는 풍아(風雅)한 면이 있었다. ()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다이린소우토우(大林宗套) 화상(和尙)에게 지도를 받았다. 특히 사카이()의 호상(豪商)들과는 다도(茶道)와 선()을 매개로 하여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에도 깊은 이해를 가졌다고 한다.


 렌가의 자리에서는 마치 신이 들린 듯이 굉장히 신비로운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쥘부채(扇子)를 이용하거나 할 때도 예법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왼손으로 거들어 오른손으로 조용히 펼치고 접어서 놓을 때는 원래 있던 곳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놓았다고 한다. 범상치 않을 정도로 세세한 신경의 소유자였다.


 당시 가톨릭 포교자의 눈에는 일본의 지배층이 다음과 같이 비쳐졌다고 한다.

수도의 통치는 삼 인이 행한다.

1의 사람은 쿤보우사마(=쿠보우(公方),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전국의 왕.

2의 사람은 미요신도노(=미요시 쵸우케이)’라고 하는 쿤보우사마의 신하.

3의 사람은 마스만가(=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라고 하는 미요신도노의 신하이다….

 이런 정도의 실력자이면서 쵸우케이는 관위(官位)를 바라지 않고 종사위(從四位) 슈리노다이부(修理大夫)에 머물렀으며 바쿠후(幕府)에서의 역직(役職)도 쇼우반슈우(相伴衆 바쿠후의 중신)에 만족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의 가계(家系)는 원래 아와(阿波) 슈고(守護) 호소카와 씨(細川)의 지배하에 있는 일개 토호(土豪)에 지나지 않았다. 증조부 유키나가(之長)의 대()부터 일약 쿄우토(京都)의 중앙 정계에 등장하는데, 이후 피로 점철된 3대의 역사였다. 3대는 전부 이불 위에서 죽지 못했다.


 부친 모토나가(元長)의 마지막은 무시무시하다.

 모토나가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각주:1])를 받들고 있던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 高)에 대항하여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와 함께 요시하루의 배다른 형제인 요시츠나(義維[각주:2])를 내세워 싸움을 계속하였지만 후에 하루모토에게 버림받아 사카이의 켄폰(本)사(寺)에서 자살을 강요 당했다. 이 때 모토나가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자기 손으로 장()을 끄집어 내어 천장에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 때 쵸우케이 불과 10. 은밀히 복수의 칼날을 가며 성인이 되었다.


 1542.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온다.
시코쿠()에 내려가 아와지(淡路), 아와(阿波)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다시 되돌아 와서는 키자와 나가마사( 長政)카와치()에서 죽이고 이어서 하루모토의 부하이며 같은 일족인 미요시 마사나가(三好 政長)셋츠()에서 전사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초코벌레님의 이 곳을 함 가보시길……

호소카와 미요시의 싸움(http://blog.naver.com/chocoworm/30006940287))


 쵸우케이의 무위(武威)는 이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각지의 토호가 앞다투어 쵸우케이 밑으로 모여들었다. 쵸우케이의 킨키(近畿) 제압에 맞추어 시코쿠()에서는 동생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미요시 유키야스(之康[각주:3]),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각주:4]), 아다카(아타기) 후유야스(安宅 冬康)의 세 명이다.


 이 일족은 아와(阿波), 사누키()세토 내해(瀬戸内)에 세력을 확대했다.

 이리하여 미요시 가문의 하인이나 하인이라 할지라도 팔꿈치를 펴고 어깨를 흔들거리며 쿄우()의 대로를거들먹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쵸우케이에게는 권력자로써의 비정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용서하는 등 문화인적인 허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허술함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파고든다.

 1562. 적자 요시오키(義興)가 급사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독살이라고들 한다. 이 적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쵸우케이는 갑자기 소극적이 되어 히사히데의 참언(讒言)을 믿고 동생 후유야스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쵸우케이도 죽었다.


 그 장례식 광경을 쿄우토(京都) 쇼우코쿠()사(寺)의 중 사이쇼우 쇼우(죠우)타이(西笑 承兌)가 그의 일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목메어 울었고 한탄하며 슬퍼했다. 쵸우케이가 생전에 베푼 은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1522년생.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센쿠마마루(千熊丸-'치쿠마마루'라고도 읽는다), 후에 노리나가(範長). 칸레이(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집사(執事)가 되어, 이즈미(和泉), 카와치()를 대관(代官)이라는 형식으로 지배. 쿄우토(京都)의 병권을 잡자 그 세력은 킨키(近畿), 시코쿠() 8개국에 이르렀다. 1564년 죽었다. 43.


Ps; 長慶나가요시로 읽으나, 이 책은 존중해서 이름을 읽어주는 유우소쿠요미(有職)’쵸우케이로 쓰여있기에 계속 쵸우케이로 하였다.

  1. 검호 쇼우군 13대 요시테루의 부친. [본문으로]
  2. 그의 아들인 요시히데(義栄)는, 검호 13대 쇼우군 요시테루가 죽자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옹립되어 14대 쇼우군이 된다. [본문으로]
  3. 요시카타(義賢)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카즈’나가’는 카즈’마사’라고도 읽는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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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7.04 0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름을 읽는 방법에도 종류가 있나보죠?

    일본어 한자는 이래서 늘 어렵네요.

  2.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7.04 0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어 잘 하시는거 보면 항상 부러워요.

    일본어를 언제부터 어떻게 배우셨는지 제 블로그 방명록에 간단히 좀 남겨주세요. 부탁드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4 15: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틀린 이야기겠지만...

    일본에선 명함 받을 때, 반드시 상대방 이름 읽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럴 때 이름 묻는 거 실례가 되지 않습니다.)
    읽을 수 있는 방법이야 X꼴리는 데로라서...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다 &quot;海&quot;자를 이름으로 쓰고, 읽을 때는 &quot;マリン(마린)&quot;이라고 읽더군요)

    저렇게 읽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경우라 그냥 무시하셔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05 0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가 비정한 면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않으면
    결국 누군가에게 먹혀버리는 것 같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5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배가른 오오우치 요시타카보다야 나은 죽음 아니겠습니까마는.. 생각해보면 나가요시 본인도 이른 죽음이라 볼 수 있는데 독살설이 없는게 참 신기하더군요.

    P.S. 3년동안 나가요시의 죽음을 숨겼다는 얘기가 있는데 장례식도 했다니.. 우키다 나오이에때와는 좀 다른 모습이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6 2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선생님//그래서 창업보다는 수성이 어렵다는 말이 생겼나 봅니다.

    다메엣찌님//히사히데의 독살설도 있는 듯 하던데요. ^^
    3년 동안 숨겼다던가요?... 제삼자의 일기에 쓰일 정도인 것을 보면 숨겼다고는 볼 수 없을 것도 같은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7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위키에 나왔군요. ^^; 상을 숨긴 후 3년 뒤에 행해졌다고.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8 1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게요. 그런데 위키란게 영 근거로 삼기엔 아리송한지라.. 정보 찾기엔 편하지만 저도 긴가민갑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8 19: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찾아보니 [細川&amp;#20001;家記]에 그리 실렸다고 하네요.[역사군상-전국합전대전, 상권, 48페이지]
    세상에 잡설을 돌 것 같아서 3개년(즉 2년)뒤인 永&amp;#31108;9년에 카와치에서 장례식이 치루어 졌다고.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9 0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고 보면 요시테루가 나가요시의 죽음을 알고 오토모나 우에스기에 분주하게 추파를 던진건 또.. 음.. 어렵군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0 0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정확하게 보낸 편지들이 1564년부터 요시테루가 죽는 1565년 사이인지는 모르겠군요.
    (그 전부터 빈번히 보냈다고 하니까요)

  12. 노부나가의야망 2018.09.13 14: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요시 쵸우케이가 아니라 나가요시입니다...일본 자료 찾아보셔도 나가요시라고 훈독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一.


 오와리(尾張), 치타(知多) 반도의 뿌리 부근에 오오타카(大高)라는 적적한 곳이 있다.

 예전엔 나루미 개펄을 끼고 있던 어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센고쿠(戰國) 중기 즈음, 오다(織田)가문이 계속해서 이 근방을 간척(干拓)했기 때문에 바닷바람에서 상당히 멀어진 농촌이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마을에서 높은 곳에 오르면 소나무 가지 사이로 푸른 이세(伊勢)의 바다가 넘실대는 것이 보인다.

 아무 특징 없는 그런 마을이다. 마을의 사당이 이외로 엔기식(延喜式)[각주:1]에 실려 있을 정도로 오랜 사당인 것을 보면 굉장히 옛날부터 마을이 생겼던 것 같다. 사당의 이름을  [히카미아네코(火上姉子)신사(神社)]라고 한다.

 [아네코[각주:2]]

라는 사당의 이름이 나타내고 있듯이 모시는 신은 상고(上古)시대 이 근방에 살고 있던 여인이다.

 미야즈히메(美夜受比賣)라고 한다.

 아주 옛날 이 지역의 추장이었던 이나타네(稲種)라는 사람의 여동생으로, 야마토(大和)에서 동쪽 오랑캐 정벌하러 온 야마토 타케루(日本 武尊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 여러 밤 같이 보냈을 것이다. 단지 고대 영웅과 그 정도의 연(緣)을 맺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여인의 이름은 고사기(古事記[각주:3])에 기록되어 이 지방에서는 숲에 사당을 짓고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숭배해 왔다.


 인간이란 단지 하나의 개체로 존재할 때는 단순히 동물과 다르지 않다.

 연(緣)으로 존재한다.

 연(緣)이라는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면서 처음으로 인간으로 성립한다고 불가(佛家)는 말한다. 이 미야즈히메(美夜受比賣)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말하려는 이야기와 상징적인 관계가 있는 것 같다.


*******************************************************************************************************


 센고쿠 시대(戰國 時代).

 이 오오타카 마을에 빼빼마른 농부가 있었다.

 야스케(弥助)가 그의 이름이었으며 손바닥만한 밭과 소작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능력도 없고 용모도 추했다. 마누라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새 마누라를 찾고 있었다.

 이런 마을과 마을들 사이에 행상인(行商人)들이 오고 간다. 이런 상인들이 마치 바람이 꽃씨를 옮기는 것과 같이 남자와 여자를 중매한다.

 나카무라(中村) 마을에 - 하고 그런 행상인 중에 하나가 말했다.

 알맞은 여자가 있다.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운 좋게 애도 없지. 어때? 하고 다리를 놓는다는 사람이 있어 혼담이 맺어졌다.

 여자는 ‘오토모’라고 한다. 추녀였다. 야스케는 실망했지만, 이 여자가 후에 즈이류우인 닛슈유(瑞龍院 日秀)라는 일본에서 아주 이름 있는 귀부인이 될 것이라고는, 물론 야스케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이 계층의 사람들에게 결혼식이라는 것은 없다.

 문 앞에 모닥불 좀 피워 밝히고 친척이나 이웃사람들에게 식초 같은 술을 먹이면 그걸로 끝난다.

 초대한 사람들이 돌아간 뒤에 오토모는 마루바닥에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돌아갈 곳이 없사옵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귀여워 해 주세요.”

 

 하고 겉모습과는 달리 애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괜찮을 지도’

 하고 야스케가 생각한 것은 이 목소리와 순진함 때문이었다.

 그랬다. 오토모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친아비는 자신과 동생을 어머니에게 낳게 한 뒤 죽었다. 어머니는 옆집의 치쿠아미(竹阿弥)라는 남자를 집에 들여 재혼하여 이 치쿠아미의 자식을 이번에 낳았다. 의붓아비인 치쿠아미는 성격이 뭐 같은 남자로, 이 때문에 오토모와 같은 아비의 자식인 동생은 집을 나가버렸다. 자신도 자기가 태어난 집이면서도 친정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고맙다”


고 야스케는 말했다. 

 언제까지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누라와 함께 산다는 것은 남편에게도 불행일 것이다. 어서 빨리 뿌리를 내려 이 마을을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생각하길…….

 

 “뭐든 연(緣)이니까”


 라고 야스케는 말했다.


 “뭐든 연(緣)이니까”


 고 야스케는 말한다.

 그런데 기묘한 연(緣)이 이 세상 한 구석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것도 야스케 부부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싹트고 자라 쭉쭉 커가고 있었다.

 원숭이 - 라는 것이 이 마누라 동생의 어릴 적 이름이다.

 참고로 타이코우수세이키(太閤素生記)라는 책이 있다. 술자는 이나쿠마 스케에몬(稲熊 助右衛門)이란 나카무라 촌의 대관(代官[각주:4]) 의 딸로, 어렸을 때 이 누나하고도 동생하고도 놀았다. 그녀는 늙어서 양자인 츠치야 토모사다(土屋 智貞)에게 자신의 고향에서 나온 희대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그것을 기록시켰다. 거기에 말하길 [아명을 원숭이,  고쳐서 토우키치로우(藤吉郞). 후에, 치쿠젠노카미(筑前守[각주:5])] 이것이 오토모의 동생을 기록한 글의 첫머리이다.

 계속해서 이 책은 말한다, [노부나가공에게서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받았다. 그렇기에 하시바 치쿠젠노카미라고 불리운다. 후에 칸파쿠(関白[각주:6])에 임명받아 토요토미(豊臣) 성을 받다. ...(중략)..타이코우(太閤[각주:7])의 누나, 같은 곳(오와리 나카무라)에 태어나다. 즈이류우인(瑞龍院)이라 불리다. 위 두 사람은 같은 배에서 태어나다].


 이 처남 히데요시의 영달이 오오타카 마을의 야스케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운명을 걷게 하였다.

 야스케는 이름까지 바뀌어졌다. 그 이름이라는 것도,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각주:8]

 이다. 자신의 신분의 변화에 놀랄 틈도 없이,

 

 “매형 다이묘우(大名)가 되세요.”

 

 하고 처남인 히데요시가 말하며 오와리 이누야마(犬山)에 10만석의 제후로 봉했다. 아무리 그래도 야스케는 다이묘우가 될 자신이 없어 봉지에 가지는 않고 히데요시의 직할령으로 하여 녹봉만 얻어서 오오사카(大坂)에서 사는 형식을 취했다. 

 ‘이제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군.’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미요시라는 성을 얻은 이유도 하나의 술책과 같은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비천한 신분에서 올라온 만큼 일족을 -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화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아와(阿 波)의 명족 미요시씨는 한 때 쿄우(京)도 지배한 적이 있는 거족이었지만 지금은 몰락하여 간신히 쇼우간 뉴우도(笑巌 入道)라는 노인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전성기 때는 미요시 야마시로노카미 야스나가(三好 山城守 康長)라는 이름으로 셋츠(摂津), 카와치(河内), 이즈미(和泉) 3주(州)에서 무위를 떨쳤었지만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쫓겨났다. 지금은 나이 먹은 몸을 히데요시에게 의지하고 있었고,히데요시도 이 사람을 제후 격으로 예우하며 오토기슈우(御伽衆[각주:9])로 삼았다. 이 쇼우간 뉴우도에게,

 

“뉴우도. 자네의 성(姓)을 나한테 빌려주게”

 

 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요시의 명령이라면 거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야스케 부부를 양자로 삼았다. 부부뿐만 아니라 부부가 낳은 자식들도 손자로 삼아 그 중에서 키베에(次兵衛)라는 인간을 미요시 가문의 후계자로 삼아, 미요시가의 후계자가 받는 이름인 마고시치로우(孫七郞)이라는 이름을 칭하게 하였다.

 - 미요시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三好 孫七郞 秀次)

라는 것이 후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이다. 


 그러니까 그의 부모인 야스케 부부는 자신의 운명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한 것이 아니었으며 무엇이든 '연(緣)'으로 인해 귀족이 되었다.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도 이 행운의 은혜를 받았다. 받기는 했지만 마고시치로우는 그의 부모와는 달리 다소의 노력은 했다. 아니 다소정도가 아니었다.


=================================================================================================

이 글은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선생의 토요토미가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를

번역한 것입니다.

시바 선생은 워낙 유명해서 어느 출판사인가가 판권 가지고 있겠지만,

상용이 아니니까 용서해 줄지도.. (용서 안해주면 대략 난감 --;)

원래는 타올라라 검(燃えよ剣)하고 싶었지만, 이거야 시중에서 팔리고 있으니까 안 하지만,

이건 없는 것 같으니...

매주 월요일 업데이트할 예정...(예정이란 어긋나기 위해 존재한다!!)

  1. 967년에 작성된 율령제 시행 세칙. 종교에 관련된 신기관(神祇官) 제 9,10에 각 지역(国)마다 일본 조정에서 중요시하여 지원한 신사들이 실려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누나'라는 의미 [본문으로]
  3. 일본 신화 모음집. 여담으로 고사기에 등장하는 야마토타케루는 이 미야즈히메에게 쿠사나기 검(草薙剣)을 놓고서 이부키야마(伊吹山)의 악신을 정벌하러 갔다가 죽는다. 미야즈히메가 야마토타케루를 그리워 하며 검을 봉납시킨 신사가 후에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공격을 나가기 전에 들린 아츠타 신궁(熱田 神宮)이다. [본문으로]
  4. 그 땅의 주인을 대신해서 관리하는 사람. [본문으로]
  5.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처음 받은 관도명 [본문으로]
  6. 옛 일본 텐노우(天皇)를 대신하며 정무를 처리한 직책. [본문으로]
  7. 칸파쿠를 그만 둔 사람의 존칭. [본문으로]
  8. 카즈미치(一路)는 호이기에 '이치로우'라고 읽어야 할 듯. 그의 이름(諱)는 미요시 요시후사(三好 吉房)이다. [본문으로]
  9. 히데요시와 말상대를 하는 무리. 히데요시는 이런 사람들과 대화하며 자식의 지식을 늘려나갔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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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6.04 18: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간만에 전국시대 이야기군요^^

  2. BlogIcon 블루 2016.03.28 0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선생님 팬입니다 잘보겠습니다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

1564 74일 병사 43

1522~1564.

칸레이[각주:1](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의 집사(執事) 이즈미(和泉), 카와치(河内), 셋츠(摂津)를 지배. 이어서 쿄우토(京都)에 들어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추방. 또한 주군 하루모토(晴元)도 추방하여 킨키(近畿[각주:2]) 8개국을 영유하며 전성기를 누리지만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절정기의 나가요시


 전성기의 미요시 나가요시는 야마시로(山城), 야마토(大和), 카와치(河内), 이즈미(和泉), 셋츠(摂津) 등 킨키 지역에 더해 탄바(丹波)의 대부분과 하리마(播磨)의 일부 그리고 시고쿠(四石) 지역의 아와(阿波), 사누키(讃岐), 아와지(淡路), 이요(伊予)의 일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정(朝廷)에게서 종사위하(従四位下) 슈리노다이부(修理大夫)에 임명받았고, 바쿠후의 직책으로는 쇼우반슈우(相伴衆[각주:3]) 중 하나로 임명된 나가요시는, 1561 3 30 자신의 저택으로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방문을 실현시켰으며 또한 옻칠한 가마(輿[각주:4])오동나무의 문장(桐紋[각주:5]) 사용도 텐노우(天皇)에게 허가 받는 등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적자(嫡子) 요시오키(義興)나 동생인 요시카타(義賢)도 쇼우반슈우(相伴衆)에 이름을 올렸다. 그야말로 이 1561년 즈음은 미요시씨()의 절정기였다.


 나가요시의 절정에 달한 모습은 오동나무의 문장을 새긴 히타타레(直垂[각주:6])모습의 그림(다이토쿠(大徳)() 쥬코(聚光)()에 있다)에서도 알 수 있다.


운이 쇠퇴한 말년


 그러나 킨키와 시고쿠(四石) 지역에 위세를 떨치던 나가요시의 말년은 불행했다.

 영화(榮華)에서 곧바로 나락의 길로 떨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선 [오니소고우(鬼十河[각주:7]]라는 이명(異名)으로 아와(阿波)의 배후인 사누키(讃岐)를 휘어잡고 있던 막내 동생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 1561 4월 즈음에 병사했다. 사이가 좋지 않던 마츠나가 히사히데에 의한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다음으로 나가요시의 한 팔이기도 하며 본국 아와를 확실히 지배하고 있던 미요시 요시카타(호는 짓큐우())가 다음 해인 1562 3 5 [쿄우토(京都) 주변에서는 비할 바 없는 큰 싸움(近国無双大合戦)][속응인후기(続応仁後記)]이라 일컬어진 이즈미 쿠메다(久米田)의 싸움에서 하타케야마 타카마사(畠山 高政)에게 패하여 한창 일할 나이인 37살에 전사해 버렸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어가는 시기에 미요시 내부에도 커다란 불씨가 존재하였다.

 그 불씨란 나가요시의 비서관(右筆)으로 시작하여 출세한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말한다. 히사히데가 얼마나 권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1561년 즈음에 루이스 프로이스[각주:8]가, [히사히데는 미요시의 부하이지만 나가요시에게서 재판권과 통치권을 빼앗아 천하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日本史)]'등에서 평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정(朝廷)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첨하는 히사히데는 미요시 내부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터질 폭탄이 되어있었다.


 한편 주변도 하타케야마 씨()나 네고로 사(根来)의 중도(衆徒)를 시작으로 한 반() 미요시 세력이 물밑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다. 쇼우군 요시테루도 겉으로는 미요시 씨()의 보호 아래 있는 척을 하면서도 반 미요시세력을 응원하고 있었다. 조정 내부에서도 미요시마츠나가를 불쾌히 여기는 귀족(公家)도 많았다.


불행이 이어진 마지막


 이렇게 힘든 시기에 나가요시에게 있어 인생 최대의 불행이 찾아왔다.

 적남 요시오키의 죽음이었다. 1563 8월 병에 걸려 같은 달 25일에 아쿠다가와 성(芥川)에서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소문으로는 히사히데가 [조부나 부친에 버금가는 기량(父祖らず器量勝)][続応仁後記]이라 일컬어지는 요시오키의 뛰어난 재능을 두려워 하여 먼저 손을 써 독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1564 5 9일.
 요시나가는 자기 손으로 수군을 이끌고 있던 아와지(淡路)의 동생 아타기 후유야스(安宅 冬康)를 이이모리(飯盛)()에서 죽여버린 것이다. 가인(歌人)임과 동시에(茶道)에도 뛰어난 문화인(文化人). 거기에 의리와 인정이 두터운 자비심 깊은 인물이기도 하였으며 나가요시의 오만함이나 남을 경시하는 것을 보고, 방울벌레를 보내 '여름 벌레라도 자애로운 마음으로 기르면 겨울까지 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더욱 그러합니다'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후유야스의 인망(人望)은 카즈나가(一存), 요시카타(義賢), 요시오키(義興)의 계속된 죽음으로 인해 더욱 높아만 갔다. 모반(謀叛)의 야망이 있다던가, 반역의 기운이 있다는 풍설을 전하는 히사히데의 참언(讒言)을 믿고 나가요시는 후유야스를 죽였다.


 확실히 미요시 가문에서 유일하게 남은 실력자를 히사히데가 없애려 한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후계자로 선택하여 맞아들인 요시츠구(義継 =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의 아들)가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앞길을 생각하여 나가요시가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불과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적남 요시오키 그리고 소고우 카즈나가, 미요시 요시카타, 아타기 후유야스라는 자신을 지탱해 온 유능한 동생들을 전부 잃어버린 불행이 이어진 것이다.


 후유야스가 불운한 죽음을 당한 불과 40여일 후인 1564 6 22일.
 요시츠구는 가문 상속에 관한 허가를 내려준데에 대한 답례를 하기 위하여 4000여의 무리를 이끌고 쿄우토(京都)에 갔다. 요시츠구는 이이모리 성()으로 곧바로 돌아왔는데 10일 후인 7 4 나가요시는 성 아래의 저택에서 병사했다. 43세였다.

 나가요시는 1561년 즈음부터 자주 병에 걸렸다고도 하는데 적남 요시오키의 죽음에 많이 낙담한 나가요시는 후유야스의 죽음 이후 병이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또한 말년은 렌가(連歌)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확실히 어지럽게 변하는 정치세계에서의 생활이 나가요시의 마음을 황폐화 시켰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역직으로 굳이 따지자면 '정승'이라고 할 수 있음. [본문으로]
  2. 쿄우토(京都) 주변. 즉 수도권. [본문으로]
  3. 쇼우군이 궁궐에 입궐하거나 여러 곳을 방문할 때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을 지칭. 칸레이(管領) 다음 가는 권위를 가졌다. [본문으로]
  4. '누리고시'라 읽는다. 상자에 옻칠을 한 가마로 쇼우군이나 몬제키(門跡 – 황족이나 높은 쿠게(公家)가 출가한 특별한 절)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원래는 황가의 문장으로, 텐노우(天皇)에게서 공이 있는 사람에게 하사되었다. [본문으로]
  6. 무가(武家)의 예복. [본문으로]
  7. 악마와 같은 소고우. 즉 악마라 불릴 정도로 맹장임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8. 포루투갈의 선교사로 당시 일본에 대하여 쓴 日本史가 당시의 여러 사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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