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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02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 일생을 권모술수로 보낸 효장(驍將) (14)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데와[出羽] 전역에서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군세와 싸운 하세도우 전투[長谷堂合戦]를 그린 '하세도우 전투 병풍[長谷堂合戦図屛風]에 그려져 있는 요시아키[義光]

 야마가타[山形] 성주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이웃나라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모친 요시히메[義姫]의 오빠이다. 혈통 자체가 우월한 몸매에 뛰어난 용모를 가졌던 듯 하다.[각주:1] 후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의 용색에 반하여 오우슈우[奥州] 원정 때 쿄우토[京都]로 데려가 측실로 삼았다.

 각설하고, 요시아키의 활약은 16살 때 강도퇴치의 일화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부친 요시모리[
義守]와 타카유[高湯] 온천[각주:2]에 휴식을 취하려 갔는데, 그날 밤 강도가 습격해 온 것이다. 이때 요시미츠는 '형형한 눈빛을 하고 마치 화살이 쏘아지듯이 뛰쳐나가 날카로운 칼질로' 단번에 강도 2명을 베어 부상을 입혔고, 이어서 그 중 가장 거대한 사나이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려 제압한 후 두 번 찔러 상대가 힘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목을 베어 칼끝에 꿰어서 높이 쳐들고는 우렁차게 함성을 질렀다 한다.

 부친 요시모리는 옆 나라 다테[伊達]의 비호(庇護) 하에 있었기에 젊은 날의 요시아키가 너무나 뛰어나고 용맹한 것에 불안을 느껴 요시아키의 폐적(廢嫡)하기로 결심하고 유폐시킨다. 물론 이는 다테 가문[伊達家]의 의사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모가미 가문의 자립을 목표로 하는 요시아키를 위험하다 여겨 부친인 요시모리에게 아들 요시아키 살해를 명령한 것이다. 유폐 중의 요시아키는 이런 다테 가문에서 독립을 기원하며 주변에 있던 절 릿샤쿠 사[立石寺]에서 소원성취를 빌었다. 요시아키 23~25살 즈음의 시기였다. 요시아키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부친 요시모리를 강제로 은거시킨 후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공격하여 자살하도록 만들었다[각주:3]. 이어서 1577년에는 다테 측에 붙어있던 텐도우 성[天童城]의 텐도우 요리사다[天童 頼貞]를 공격하였다[각주:4]. 다음 해에는 남쪽으로 공세의 방향을 돌려 카미노야마[] 성을 낙성시켰으며, 또다시 북쪽의 신죠우[新庄]로 향해 마무로[] 성을 점령하여 마침내 모가미 군[最上郡] 전체를 판도에 넣었다. 1582년에는 숙원이던 쇼우나이[]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다다음 해인 1584년, 요시아키는 야치 성[谷地城]의 성주 시라토리 나가히사[白鳥 長久]를 모략을 이용해 야마가타 성으로 불러서는 살해하였다. 모략이야말로 요시아키의 진면목으로, 그는 힘으로 몰아 붙이는 타입의 무장이 아니었다.

 1587년,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하는데 이로 인해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와 험악한 관계에 빠진다. 마사무네가 쇼우나이 지방의 무토우 씨[武藤氏]의 부탁을 받아 중재(仲裁)에 나서자, 겉으로는 마사무네의 중재를 받는 척하며 방심시킨 후 불시에 대군을 이끌고 쇼우나이 지방으로 침공한 것이다.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에게 있어서는 모친 요시히메의 오빠이기에 외삼촌이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이 배신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체면이 깎였다. 이 원한을 붓으로 다 적기도 힘들다'고 말하며 마사무네는 격노하였다. 모가미와 다테 사이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사태로 번졌다. 그때 요시히메가 양국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곳에 가마를 타고 들어가 80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결국 양자의 충돌을 회피시켰다고 한다. 이때의 반감은 나중에까지 이어져, 후에 요시아키와 요시히메는 손을 잡고 마사무네 독살 미수사건으로 이어진다(다테 마사무네 항 참조)

한편 쇼우나이 지방은 강적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세력이 손을 뻗쳐왔다. 1587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전국에 영()을 내려 다이묘우[大名]들간의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였기에[각주:5], 다음 해 5월에는 모가미-우에스기 간의 항쟁을 멈추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에 우에스기 측의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가 이를 무시하고 쇼우나이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하 역자 가필================================================

 1587년. 다테 가문의 종속하에 있던 오오사키 가문[大崎家]에서 내분이 일어나, 친 다테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던 오오사키 가문의 가신 우지이에 요시츠구[氏家 吉継]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구원을 요청. 마침 다테 가문에게서 독립을 바라고 있던 오오사키 요시타카[大崎 義隆]는 분가 격[각주:6]인 모가미 가문의 요시아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비슷한 시기 요시아키는 쇼우나이를 지배하고 있던 무토우 씨[武藤氏][각주:7]의 당주인 무토우 요시우지[武藤 義氏]를 모략으로 요시우지의 부하를 이용해서 살해. 요시우지의 뒤를 이은 요시오키[武藤 義興]는 우에스기 가문의 맹장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의 아들인 요시카츠[武藤 義勝]를 양자로 받아 들임과 동시에 혼죠우와 그의 주군인 우에스기 가문의 힘을 빌어 영내를 안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쇼우나이 지방의 친 모가미 파의 호족들의 불안을 부채질하여 호족들은 일제히 봉기한다. 이를 호기로 본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 요시오키를 살해하고 요시카츠를 에치고[越後]로 쫓아 보내어 일단 쇼우나이 지방을 손에 넣는다. 이때 오오사키 가문의 구원 요청이 도착한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오사키 령으로 진격하나, 마사무네는 나카니이다 성[中新田城]를 공격 중 대패하여 중신 이즈미다 시게미츠[泉田 重光]를 인질로 바치고 겨우 궁지를 벗어나지만, 오오사키 령에 원군으로 온 모가미 요시아키의 군세와 나카야마[中山]란 곳에서 대치하게 된다. 또한 이 패배는 오우슈우 전역에 소문이 퍼져 반 마사무네 파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일제히 마사무네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위기에 빠진다.

 한편 오오사키 령에 도착하여 마사무네의 군세와 대치하고 있던 요시아키에게도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에치고로 도망쳤던 무토우 요시카츠가 지 애비인 혼죠우 시게나가와 함께, 요시아키가 마사무네와 싸우는 틈을 타 쇼우나이로 진격. 쇼우나이의 모가미 측 호족들을 물리치고 쇼우나이를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모가미 령으로 침공한다.

 서로 적들에게 침공 당하였지만 대치하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던 마사무네와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모친이며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이 대치하는 곳에 가마를 타고 와 화해를 종용. 서로 다방면에 적들을 두고 있던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된다.

======================================이상 역자 가필====================================================

 요시아키는 분노하여 히데요시에게 호소하였으나[각주:8],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는 이미 히데요시와 면식을 튼 사이였으며 더구나 히데요시 측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도 친한 사이였다. 소송은 우에스기 측이 월등히 유리했다. 요시아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통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소송에 졌다[각주:9]. 이후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서 이에야스를 통해 매[] 등을 헌상했지만, 히데요시의 태도는 냉담하여 요시아키가 쿄우토로 인사를 올리러 간다고 하여도 '그럴 필요는 없소'하며 거부하였다.

 요시아키는 더욱더 이에야스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요시아키는, 히데요시가 "조금 더 늦었다면 여기가 위험했을 것이야"라고 하며 목을 툭툭 친 다테 마사무네보다도 더 늦게 오다와라에 당도하였지만[각주:10], 이때도 이에야스가 중간에서 잘 주선해 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어 이에야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크게 갖게 되었다.

 이후 요시아키는 자기 가문의 안전을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였다.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측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에게 편지를 보내, "히데요시님을 섬기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습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였고, 오다와라 정벌을 끝낸 후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온 히데요시의 처소에 처자식을 몽땅 데리고 출사하여 히데요시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1591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 15만의 대군이 난부[南部]의 쿠노헤 마사자네[ ]를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奥州]로 왔을 때도 요시아키는 중앙의 실력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이에야스에게는 둘째 이에치카[家親][각주:11]를 가신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일종의 인질제공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다이묘우[大名]의 자식을 가신으로 한 최초의 사례였기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히데츠구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에게 눈독을 들인 것도 이때이다. 쿠노헤 정벌을 마치고 쿄우토로 돌아가던 도중 야마가타 성에 들린 히데츠구를 요시아키는 성대히 영접하며, 그 시중으로 아직 12살인 딸 코마히메를 내보냈다. 히데츠구는 그녀의 미모에 빠져 요시아키에게 청하여 쿄우토로 데려가 시첩으로 만든 것이다. 마사무네의 숙부 다테 시게자네[伊達 ]는 이를 '만천하의 비웃음거리'라고 자신의 일기에서 비난하였다.

 히데츠구의 측실이 된 코마히메는 이름도 '오이마노츠보네[お]'로 불리게 되지만, 히데츠구의 실각사건 때 산죠우 강변[河原]에서 참수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더구나 요시아키에게도 히데츠구 모반사건의 불똥이 튀어 한때는 쥬라쿠테이[楽第]에 감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히데요시 사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당연히 이에야스 측에 서 야마가타로 진군하는 우에스기의 지장(智將)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의 군세와 싸웠다. 정강을 자랑하는 나오에 군단이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지만,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전보가 전해져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너무나도 자기 가문 안전을 위해 머리를 굴린 결과가 반대의 결과로 나온다.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어있던 둘째 이에치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장남 요시야스[義康]를 살해하게 되는데, 요시아키가 죽은 뒤 이로인해 가문이 흔들려 이에치카의 아들 요시토시[義俊]의 대[각주:12]에 모가미 가문의 야마가타 번은 소멸하게 된다[각주:13].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546년생. 데와[
出羽] 야마가타[山形] 성주. 아시카가 씨[足利氏]의 일족 시바 카네요리[斯波 兼頼][각주:14]의 후손으로 요시아키는 11대째. 임진왜란 때는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이에야스[家康]와 함께 주둔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야마가타 57만석이 된다. 1614년 1월 18일 죽었다. 69세.

  1. 요시히메도 한 미모로 유명했다 한다. [본문으로]
  2. 현재는 자오우 온천[蔵王温泉]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동시대의 군기물 혹은 다테 가문의 기록에도 요시아키의 동생 요시토키의 기록이 없기에(요시토키의 이름이 처음으로 거론되는 것은 18세기 들어서라고 한다) 요시아키가 동생을 공격하여 자살하게 만든 것은 의문시 되고 있다. [본문으로]
  4. 점령은 못하고 요리사다의 딸을 요시아키의 측실로 삼는 것으로 화해. 그러나 1582년 요시아키의 삼남 이에치카[清水 義親 - 모가미 씨의 일족 시미즈[清水] 가문을 상속]를 낳고 죽어 텐도우 가문과의 동맹이 끊기게 된다. [본문으로]
  5. 이 전인 1585년에 큐우슈우[九州]지방을, 1587년에는 칸토우[関東]와 오우슈우[奥州]에 각각 선포하였다. 이것을 선포함으로써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본문으로]
  6. 오오사키와 모가미 가문의 선조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오우슈우 칸레이[奥州管領] 시바 이에카네[斯波 家兼]이다. 이에카네의 큰아들인 타다모치[大崎 直持]가 오오사키[大崎] 지방을 영유하며 '오우슈우 탄다이[奥州探題]'가 되었으며, 둘째아들인 카네요리[最上 兼頼]를 데와[出羽] 모가미 군[最上郡]에 파견하여 '우슈우 탄다이[羽州探題]'로 만들었다. [본문으로]
  7. 코에이[光栄]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다이호우지 씨[大宝寺氏]로 표현된다. [본문으로]
  8. 히데요시의 사투금지령은 1587년 12월. 혼죠우 시게나가가 침공한 것은 1588년에 들어서이기에. [본문으로]
  9.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이때 얻은 쇼우나이 지방과 나중에 이봉된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가문의 영지로 인해 분단된 상황이었기에, 세키가하라 전쟁 때 모가미 영토를 침공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그에 따른 실패로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줄어들게 된다. [본문으로]
  10. 부친 요시모리[最上 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당시 이에치카의 나이 10살로, 성인식 후 이에야스[家康]의 이름글자 중 뒷글자 '야스[康]'가 아닌 앞글자 '이에[家]'를 받은 것을 보면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았던 듯. 후에 2대 야마가타[山形] 번주가 되지만 3년만에 죽어 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본문으로]
  12. 요시아키의 넷째 아들 야마노베 요시타다[山野辺 義忠]와의 다툼 끝에. 요시토시의 그릇이나 능력에 의문을 품은 가로들이 야마노베 요시타다 옹립을 꾀하였다. [본문으로]
  13. 그후 모가미 가문은 오우미[近江]에 1만석으로 멸봉 당하나 9년 뒤 요시토시가 병으로 죽자 남겨진 아이(요시토모[義智])가 너무 어려(당시 2살) 영지는 반인 5000석으로 줄어,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다이묘우 급 직신[交代寄合]이 된다. 사족으로 에도 시대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일족을 제외하곤 최대급(57만석)의 삭탈관직[改易]. [본문으로]
  14. 모가미 카네요리[最上 兼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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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05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마히메가 히데츠구 첩인건 알았지만 이에치카를 가신으로 바쳤던건 처음알았던 사실. 자신이 행했던 업보는 결국은 자신에게나 친한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교훈을 주는 인물...... 정말 이런꼴 보고 있으면 조선이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어요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치카와 비슷한 케이스로,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바쳐졌던 구마모토 호소카와[熊本細川藩]의 2대 번주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 忠利]도 비슷한 케이스입죠. 세째이면서도 이에야스와 안면을 튼 덕분에 둘째 오키아키[興秋]를 제쳐두고 번주가 될 수 있었습죠(장남인 타다타카[忠隆]는 세키가하라 때 부인이 시어머니(가라샤)를 버리고 튄 것 땜시 폐세자)

      조선도 뭐 왕자의 난이나 영조-사도세자를 보면 비슷하지 않나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건 흑역사는 있습니다.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05 1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도를 때려잡는걸 보면 깡 있어 보이는데 반대로 가문 보전 때문에 열심히 뛰어다녔군요;;;

    뻘플로....혁신에서 요시아키 나오기전 모가미로 플레이하면 카키자키 이상으로 빡세던 기억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6척짜리 철로된 봉을 들고 다녔다고 하네요.
      위에 있는 그림 전체 화면(신역사군상17. '나오에 카네츠구' 실려있습죠)을 보면 저런 표정으로 도망치는 어떤 놈을 그 6척짜리 철봉으로 떼리고 있는 장면입죠.

      혁신에서 카키자키도 다이묘우로 등장하던가요?..라고 한자 변환하고 있으니 홋카이도우[北海道]의 그 분이셨군요. ^^

  3. 나라 2009.10.05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 친구는 정말 인생무상이더군요..(멍)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런데 시게자네가 마사무네의 숙부였나요? 사촌으로 알고 있었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리 오랫동안 비워서 죄송했습니다. ^^

      깊이 들어가면 워낙 사람 좋던 요시아키가 이놈저놈에게 땅도 많이 떼어준 것이 화근이 된 듯하더군요. 그렇게 기득권이 된 세력이 강성한 탓에 어린 주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듯 합니다.

      다테 시게자네는 마사무네 할아버지 타네무네[稙宗]의 자식 사네모토[実元]의 아들이기에 우리나라로 하면 5촌 당숙이 됩죠.

  4. 이거참 2009.10.05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이런거 보면 일본인들이 참 독종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조상들이 이런 시대를 살아와 이렇게 잔인하고 독한 인종들만 살아남는 시대가 있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의 일본인들이니 말입니다. 지금도 무의식 한켠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안 가린다는 의식이 그들의 역사적 체험과 기억으로 남아있을거라 생각하니 소름끼치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렇지도 않기는요. 부하들의 주도권 다툼에 아들 잃었다고 슬퍼했다고 하더군요.
      이 글은 요약입니다. 한 인물에 관한 것을 쓰는데 천 몇 백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덧붙여..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가히 좋지 않은 시각이십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자기 오줌으로 갈증을 풀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데도 결국 죽였던 영조가 있는 우리는 역시 그렇게 잔인한 족속인가요?

      국가존망의 위기 때 자신의 영달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충무공을 모함하고 충무공의 참모부 건물을 하렘으로 만든 원균과 같은 민족인 우리는 역시 수단방법 안 가리는 막장인가요?

      편견과 우월감은 백해무익한 감정입니다. 부디 그런 감정에서 헤어나오셨으면 하는 마음에 건방진 소리를 하였습니다. 기분 나쁘셨겠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그네 2012.11.10 0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래전 포스트의 댓글이지만 몇가지 주제넘은 첨언을 해봅니다.
      영조의 경우도 비교적 최근인 몇년전에 비밀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죠.
      몰래 음식물의 반입도 지시하였으나 모두 차단되고 심지어는 건강상태의 보고도 거짓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죽고난뒤 무척 애통해하며 힘없는 자신을 원망했다는데..
      편지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실제 역사적 사건은 인과관계가 명확치않은 복잡한 사연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벌어지는것이므로 영조 자신의 의지만이었다고 보긴 어렵겠죠.
      일본의 경우 전쟁 + 인접한 여러 쿠니와의 혈연,정치적관계가 워낙 복잡한데 가신들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도 무시못하니.. 다테의 경우도 그렇고 그런 비극이 많을 수 밖에 없겠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은 어느나라나 비슷할것같습니다. ^ ^

      발해님 포스트 즐겁게 읽고 갑니다. 'ㅇ'¥

  5. 나라 2009.10.06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전국시대의 일본들인은 조선인들보다 잔인하기야 하겠습니다만. 에도 막부 시절이 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돈이 없어 칼을 팔고 타케미츠를 들고 다니는 30석 사무라이 모습을 그린 야마다 쇼지 감독 영화가 생각나네요.
    권력투쟁에 있어 잔인하게 끝나지 않은 예가 얼마나 될까요? 일본인들이 특별나게 잔인한 게 아니라, 그런 예가 드물 것 같은 걸요. 조선시대 당파 싸움도 끔찍한 결과를 낳았었습니다. 몽고나 중세 유럽, 혹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의 잔인함은요? 남아공의 샤카, 아메리카 제국끼리의 전쟁, 심지어 뉴기니나 에스키모인들은 규범에 맞지 않으면 그냥 죽여버리는 걸요. 굳이 오래 내려가지 않더라도 한국전쟁 시기의 한국인들은 아귀인가요? 일본을 구석기 시대로 돌릴 뻔한 미국은요? 영국과 독일의 2차 대전은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가시는 것 자체가 그렇게 싫어하시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악독한 일본인의 모습을 닮아가시는 것 같네요.

  6. 맹꽁이서당 2009.10.06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몰랐던 다이묘 한 명 또 알고 갑니다. ^^ 57만석이라는 거대한 번이 소멸한 것이 안타깝네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우에스기와 싸웠던 가문이었군요. 저는 아직도 세키가하라 전투의 방아쇠를 당겼으면서도 도쿠가와 가문과 한판 제대로 붙지 않은 우에스기 가케카쓰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에서는 모가미나 다테 가의 배후 습격이 두려웠다... 고 했는데, 그럴거면 아예 시작하지를 말던지.. --a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늦었지만 추석 잘 쇠셨길 바랍니다 ^^ 그러고보니 2016 올림픽은 리오데자네이루가 되었더군요. 남미 첫번째라는 상징성이 있으니 명분에서는 네 도시 중 가장 컸지만, 실제로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a

    아, 새 블로그는 무기한 연기하고 있습니다. 번역이란게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세키가하라 때의 우에스기 군의 행태는...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결전이 하루만에 끝난 것이 아니고 더 길어질 것이라 예상한 것이라고.

      모가미 가문으로 인해 분단된 영토를 하루 속히 연결하여 다시 침공해 올 이에야스에 대한 대비하던지,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졌다면 그 길로 칸토우로 침공했을 때를 위한 후방 안전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몰라도 불온한 시기에 쇼우나이[庄内]와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영토로 분단되어 있는 우에스기는 필연적으로 모가미 령을 침공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 다테 마사무네도 장기간 펼쳐질 것을 대비하여 오우슈우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같은 동군 계열인 난부 가문에 반란(와카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이용. 후에 이에야스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 한 마사무네가 암살)을 일으키기도 했습죠.

      조금 씩이라도 미리 해 놓는 편이 오히려 빨라지더군요.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

  7. ulanfu 2012.11.10 0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모술수와 암살,이간으로 점철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간악하고 비정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실제 가독을 물려받았을땐 무력을 사용할수도 없는 처지였고(친다테파들이 워낙 많은 상태여서)
    본인이 전쟁에 의한 피해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저런 간악한 인물에게 내통하거나 자기 주군을 배신하는 행동을 하진 못할겁니다 여하튼 배신이건,이간책이건 자기위하의 가신들에겐 굉장히 후한 군주여서 일개 항장에게도
    몇만석씩 녹봉을 줄정도로 관대한 군주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결과 지나치게 새력이 큰 가신들의
    모반으로 개역당하게 됩니다만... 실제 야마가타현은 현재에도 일본제일의 곡창지대고
    전국시대때도 사카이와 비견할정도로 사카다 지방의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가미직속 50만석포함 가신들의 녹봉을 다 합치면 50만석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요시아키가 죽기전엔 모가미계 무사들의 녹봉은 총 100만석을 넘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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