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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7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 고독한 모반인 (8)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모반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하지만 다인(茶人)으로서도 일류인 인물이었다.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챠완(井茶碗)은 '아라키 코우라이(荒木高麗)'라 불리며 명물을 기록한 여러 장부에 실린 천하의 명물이었다. 무라시게에게서 이에야스(家康)의 손으로 옮겨졌고 그 후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川家)[각주:1]에 전해져 지금도 토쿠가와 미술관(川美術館)에 보존되어있다.

 소년시대의 무라시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소년 무라시게는 힘이 대단히 셌다고 한다. 부친 요시무라(義村)를 태운 바둑판의 양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서는 방을 세 바퀴 돌았다고 한다. 겨우 12살 때의 일이다[각주:2].

 처음엔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가신[각주:3]이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幽))와 함께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가 뛰어난 활약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등의 다이묘우(大名)도 무라시게에게 배속되어 있었다.

 무라시게의 모반은 1578년에 뜬금없이 일어났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츄우고쿠(中)의 모우리 씨(毛利氏)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당시 무라시게는 셋츠(津)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무라시게의 뜬금없는 모반에 노부나가는 "무엇이 부족하여 그러는가?"라고 놀랐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하면서 "반역하려는 뜻을 버리고 인질로 모친을 바치도록"하고 설득의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로 보내진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각주:4], 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각주:5],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각주:6]였다. 히데요시도 이타미(伊丹)에 있는 무라시게의 거성(居城)으로 가서 뜻을 거두도록 재촉했다.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가 설득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모반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라키 가문의 가신이 노부나가의 적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 쌀을 밀매한 것[각주:7]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필시 진짜 원인은 노부나가의 잔인하고 폭군적인 성격을 무라시게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모반에 대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부나가에게 가려고 했지만 가노(家老)[각주:8]들이 "잠깐 동안은 용서하시겠지만 의심 많은 분이기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충고를 들은 것도 있어, 무라시게는 더 이상 오다 가문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청자(靑磁)로 된 꽃병(花甁)이 모반의 원인이라고 한다. 노부나가가 꼭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을 무라시게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삐졌다고 한다.

 승산이 있던 모반이 아니었다. 무라시게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무라시게의 휘하인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를 등돌리게 해서는 양도(糧道)를 끊자 무라시게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각주:9]. 이런 사정을 "처자식, 형제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처자식과 일족을 이타미 성(伊丹城)에 남겨둔 채 종자(從者) 5~6명만을 데리고 탈출한 것이다. 일단 아마가사키 성(尼ヶ崎城)으로 피신[각주:10]한 무라시게는 이후 하나쿠마 성(花城)[각주:11]에 갔다가 여기서 빙고(備後)로 가서 모우리 씨에게 보호를 청했다.

 무라시게에 대한 노부나가의 증오는 지독했다.
 그에 대한 보복은 이타미 성에 남겨진 무라시게의 처자에게 향해졌다. 21살의 미녀로 와카(和歌)가 뛰어났다는 무라시게의 부인을 시작으로 여관(女官) 등 122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때의 비명소리는 '하늘에도 소리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또한 여자 하인, 무라시게 부하의 어린 자식(
若党) 등 510여명을 네 채의 작은 집에 가두어서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고 한다.

 후에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친교가 있던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아 다인(茶人)으로 섬기며 일생을 마쳤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셋츠(摂津) 출신.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를 섬기며 셋츠 이타미 성(伊丹城) 성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에 임하고 있었지만 모우리(毛利)-혼간지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 후에 머리를 밀고 뉴우도우 도우훈(入道道糞)이라 자칭하였다. 1586년 죽었다. 52세.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쇼우군(将軍)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만들 수 있는 가문인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단 에도 시대를 통해서 쇼우군을 배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본문으로]
  2. 밥 많이 처먹는 아들에게 아비가 한 마디 하자 "무사는 힘이 쎄야 합니다"라 말하곤 그 증거랍시며로 저렇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정확히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셋츠슈고(摂津守護)인 이케다 카츠마사(池田 勝正)의 가신. [본문으로]
  4. 그의 딸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부인이었다. 참고로 이 부인은 이때 이혼하여 미츠히데의 중신 히데미츠(明智 秀満)와 재혼. [본문으로]
  5. 마츠이 유우칸은 사카이(堺)에서 노부나가의 대리인이었으며 또한 당시 노부나가의 차제구 수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다도에 밝은 무라시게와는 친분이 깊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6. 당시 노부나가 최측근 시동.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노부타다(信忠)에게도 신뢰 받고 있었다. 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포지션을 이어받은 것이 모리 란마루. [본문으로]
  7. 정확히는 무라시게 휘하에 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가신이 그랬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말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이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1년 가까이 버텼지만 무라시게를 궁지로 몰아 넣은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돌아섰기에 성을 버리게 된다. 참고로 상기의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는 이타미 성을 공격하다 전사. [본문으로]
  10. 이 성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거성. 참고로 이때 마지막으로 노부나가는 무라시게에게 아마가사키와 하나쿠마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이때도 싸우기는 하였다. 성을 공략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활약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 쓴 노부나가의 서장에도 언급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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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8 0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콘은 지가 용서비는걸 말려놓고 반란일으키니까 나중에 배신때리네요...

  2. 맹꽁이서당 2009.03.29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턴오버 님 말씀대로 우콘 황당하군요. 근데 노부나가 성격을 생각해보면 맞긴 맞는 말 같습니다.
    최소한 처자들에 대한 안전판은 마련해 놓고 거사를 일으킬 것이지.. 딸 뻘 (역산해보니 무라시게는 반란시 44세군요) 미녀 아내도 버리고 갈 정도면 알수없는 속사정이 급했나 보네요.

    이름은 모릅니다만, 노부나가 말년에 배신한 중신들이 몇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노부나가의 '광기'가 모두의 눈에 비쳤나 보네요. --a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9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나가의 성격은 결과론...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라시게의 배반은 노부나가에게 가신들에 대한 불신감 생성 버튼을 누르는 결과가 아니었나 하고도 생각하고요. 우콘이 도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저런 말을 했는지 아직까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모친을 인질로 받치고..."..를 보면 당시까지는 노부나나가 무라시게의 인질을 받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자마인 인물에게 셋츠를 맡기면서도 당시로는 당연시 되던 '인질'을 받지 않았던 것만 해도 노부나가가 무라시게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옅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만큼 충격도 컸겠고요. 일본에는...可愛さ余ってにくさ百倍...라는 말이 있습죠. 사랑했던 만큼 미움도 크다는 말인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이타미 성에서의 도주는....
      이런 설도 있습니다.
      이타미 성은 주변 강들과 절벽의 천연의 요새에, 성 안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総構え(호우죠우 오다와라 성의 유명한 구조...이지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総構え는 이 이타미 성이라고 합니다)...로 인해서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합니다. 따라서 도망이라기 보다는 아들 무라츠구의 아마가사키 성으로 가서 육지로는 오다 가문에게 포위된 것을 피해 배편(간척된 지금과는 달리 당시는 바다에 면한 성이었다고 하네요)으로 모우리(毛利)나 혼간지(本願寺)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다고도 합니다. 이타미 성이 워낙 튼실하니 자기가 없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노부나가를 배신한 중신은 미츠히데가 유일하지 않나요?

      전 아직까지는 이 무라시게의 배신부터 노부나가가 가신들에게 불심감을 품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3.29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다른 글에서 어느 중신이 (미츠히데 이전에)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야기를 봤었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다 보니 그가 바로 '아라이 마사시게'인줄 몰랐네요. 중복으로 생각한 셈이지요. --a 도자마 가신들에게는 인질이 당연시 되었군요. 덕분에 새로운 사실 하나 알아갑니다. ^^

    그러고보니 센고쿠 15권 말미에서 '외부 적들'과 '내부 적들'을 따로 작성하여 X를 긋는 노부나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군요. (물론 창작이겠습니다만...) 그땐 1574년이라 아라이의 반란 이전인 셈이네요.

    PS. 요새 이 블로그의 외부 링크를 타고 다른 블로거 분들의 역사 관련 포스팅을 훝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혹시 역사 쪽으로 추천해 주실만한 곳은 없으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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