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서

☞ 링크 중 한문에 링크가 걸린 것은 위키피디아 일본판으로 점프합니다.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에 관한 이야기는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편찬사료들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부의 공식기록이라는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를 위시한 여러 사료들뿐만 아니라 ‘유영부녀전계[柳営婦女伝系]’, ‘옥녀기[玉輿記]’와 같이 토쿠가와 가문에 시집온 여인들에 대한 기록서에서 볼 수 있는 키요야스의 부인 케요우인[華陽院] 항목에서도 키요야스가 죽게 되는 모리야마의 변을 텐분[天文] 4년 즉 1535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와 개정 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따르면 키요야스의 미카와 군세는 당시 오와리[尾張]의 키요스[각주:1]에 있는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키요스가 노부히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1535년 당시 키요스는 노부히데의 영향력 밖에 있었기 때문입죠.

키요스

키요스는 당시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오다 야마토노카미 타츠카츠[織田 大和守 達勝]의 거성이었습니다.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텐분 원년(1532년)까지 키요스의 서쪽 쇼우바타[勝幡]에 있던 부하격인 단죠우츄우 노부히데[弾正忠 信秀]와 전쟁을 벌일 정도였습죠.

이후에는 소강상태가 이어집니다만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틈만나면 노부히데를 노렸으며 결국 오와리 제일의 실력자라는 노부히데가 1551년에 죽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사이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좋을 리가 없었겠죠. 당시는 하극상의 시대. 야마토노카미 가문에서 보기에 치고 올라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예전 가신을 좋게 볼 리는 없을 터이며, 단죠우츄우 가문 쪽 역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으니까요. 노부히데의 입장에서는 미카와의 키요야스가 키요스를 공략해 준다면 그 틈에 떨어진 떡고물을 취하려 할 지언정 도우러 갈 이유는 희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쇼바타 성[勝幡城]과 키요스 성[清洲城],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위치

어쨌든 이 키요스가 단죠우츄우 가문[弾正忠家]의 영지가 되는 것은 1555년 노부나가와 노부나가의 숙부이자 노부히데의 동생인 노부미츠가 손을 잡고 모략으로 키요스를 손에 넣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각주:2]

그렇다면 모리야마는?

자 그럼 모리야마는 누구의 영지였을까요?
위에 언급한 에도 막부의 기록들에는 노부히데의 동생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성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이 모리야마도 노부미츠의 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영지냐 하면, 바로 키요야스와 사이가 나뻤던 숙부 마츠다이라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의 영지였던 듯 합니다.

적어도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기 9년 전인 1526년에 렌가사[連歌師] 소우쵸우[宗長]의 일기에 모리야마에 있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저택에서 렌가회가 열려 거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또한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는 1535년까지도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각주:3]

이 모리야마가 언제부터 노부미츠의 영지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노부히데가 모리야마의 근방 나고야[那古野]를 손에 넣고 그곳에 있는 텐노우보우[天王坊][각주:4]라는 절의 토지 영유를 인정한 1538년 이후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난 1535년 당시에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였지 노부미츠의 거성이 아니었단 말입죠.

썰렁한 결말

즉 이 모리야마의 변에서 오다 가문이 낄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마츠다이라 종가[松平宗家]의 키요야스[清康]와 그 종가에 개기는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 간의 싸움이었습죠. 미카와∙마츠다이라 일족[三河∙松平一族]라는 책을 쓴 히라노 아키오[平野 明夫]라는 분은 마츠다이라 가문 종가와 분가의 다툼에 더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와 아시카가 요시츠나[足利義維] 다툼과도 관련이 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마츠다이라 가문 내부의 싸움이었을 뿐입니다.

또 하나 수상한 점.

◀왼편에 있는 그림은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 기록된 모리야마 변에 관해 기록된 곳입니다. 모리야마에 진을 친 키요야스에게 나이젠 노부사다가 노부히데와 내통하여 키요야스의 거성을 노리고 종가를 빼앗으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키요야스가 군사를 되돌리려 할 때 사카이[酒井], 오오쿠보[大久保]의 말에 따라 우선 군사를 되돌리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라고만 나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에 관해선 토쿠가와실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오른편의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그들이 누구인지 나와 있습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 가문의 면면들이 보이는군요.

사카이 사에몬노죠우 타다츠구[酒井 左衛門尉 忠次]와 오오쿠보 가문의 유명인인 오오쿠보 시치로우에몬 타다요[大久保 七郎右衛門 忠世], 오오쿠보 지에몬 타다스케[大久保 治右衛門 忠佐] 등이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이상한가 하면...

사카이 타다츠구 1527년생. 오오쿠보 타다요 1532년생 오오쿠보 타다스케 1537년생입죠. 그리고 모리야마 변이 일어난 해는 1535년.

그러니까 모리야마 변이 일어날 당시, 사카이 타다츠구는 9살. 오오쿠보 타다요는 4살, 타다스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입죠. 여담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개정미카와후풍토기의 저본인 미카와후풍토기에는 이시카와 카즈마사까지 등장한다고 합니다. 역시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모리야마의 변 당시 3살이옵죠.

이런 이유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영무자설[徳川家康の影武者説]을 발표하며 모리야마의 변이 1535년 키요야스 때의 일이 아니고 1561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키요스에 있던 것은 노부나가이며, 뒤에서 획책했던 것은 나이젠 노부사다가 아니라 당시엔 이에야스와 적대적이었던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水野 信元]라고 합니다.

1561년 이에야스가 죽어 영무자가 교체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기를 바꾸려다 보니 노부나가가 아닌 노부나가의 아비 노부히데가 된 것이며, 역시 미즈노 노부모토가 아닌 나이젠 노부사다가 된 것이라고요. 그리고 죽은 이는 키요야스가 아닌 이에야스였으며 이때 세라타 지로우사부로우[世良田 二郎三郎]라는 이가 역사상의 이에야스로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무라오카의 주장대로 1561년이라면 위에 사카이나 오오쿠보의 나이도 해결이 됩지요. 사카이 타다츠구 35세. 오오쿠보 타다요는 30세. 타다스케는 25세. 확실히 이정도 나이라면 옆에서 진언할 나이는 되겠지요.

뭐 저도 무라오카 씨의 주장에는 납득을 못합니다만 그가 이에야스 영무자설을 주장하기 위해 언급한 몇몇 것에는 흥미로운 점이 몇 군데가 있긴 합죠...뭐 이건 언젠가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기로 합죠.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의 이후

의심도 받았고 또한 자기 아들이 주군까지 살해하였다.
보통 이랬다면 바로 사형이고 실제로 현지 분위기도 그러했으며 아베 오오쿠라 자신도 대역무도의 죄를 지었다며 죽으려 했으나, 야시치로우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전편에서 언급했던 결백서가 발견되었고, 거기에 키요야스의 아들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용서를 얻어 이후 그에게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이후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가 종가의 히로타다를 죽이려고 할 때도 히로타다를 탈출시켰고 히로타다의 복귀를 의해서 힘을 써 실현. 히로타다가 죽은 이후 히로타다의 아들인 이에야스[家康]가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보호를 받을 때는 마츠다이라 가문을 대신해서 오카자키 행정관[岡崎奉行人] 중 한명으로 오카자키 주변을 다스리다 죽습니다(생몰년 불명[각주:5]).

아베 오오쿠라는 주군을 죽인 대역무도의 핏줄이라며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그의 측실이 아베 오오쿠라의 씨를 임신한 채로 시나노[信濃]에서 미카와에 와 있던 이노우에 키요무네[井上 清宗]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후에 이노우에 키요히데[井上 清秀]라는 사람이 되며, 키요히데의 자식들은 대대로 에도 막부의 요직에 취하여 후다이[普代] 명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는 清洲,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는 清須 [본문으로]
  2.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 織田喜六郎殿御生害の事. [본문으로]
  3.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오와리∙오다 일족[尾張∙織田一族]”(新人物往来社),p82 [본문으로]
  4. 사족으로 이곳은 노부나가가 어렸을 적에 공부한 절이라고 함. [본문으로]
  5. 위키에는 1549년 죽었다고 하나 1553년에도 오카자키 행정관 중 하나인 사카이 키요히데[酒井 清秀]와 함께 미카와 절들에 대한 문서가 남아있기에 1549년 사망설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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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kyup 2011.03.07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흥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이정도 사건이면 아무리 용서를 받더라도 자결을 했을것 같은데요 - 조금 아이러니 하네요. 좀처럼 찾아볼수 없는 글을 올려주셔서 항상 갑사합니다.

 1535년 12월 초순.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

 13살에 가독을 이은 뒤 파죽지세로 마츠다이라 종가[松平 宗家]의 세력을 넓히고, 종가에 개기던 서가(庶家)를 가신단으로 편입시켰으며, 후다이 가신단[譜代家臣団]을 조직화하고, 직할지 농민 지배기구의 정비, 성 밑 마을[城下町]을 만드는 등 착착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길을 걷던 미카와[三河]의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각주:1]는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각주:2]를 공격하기 위해 오와리의 모리야마[守山/森山][각주:3]란 곳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분열된 마츠다이라 종가와 서가와의 사이를 이간질해 미카와에 진출하려는 오다 가문[織田家]을 정벌하기 위해서 였습죠. 그렇습니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종가와 서가간에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어련하면 ‘열 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라고 할 정도로 많은 그리고 독립적인 서가가 있었으며 그런 서가 중 실력자로 나이젠 노부사다(wike_jp)[松平 内膳 信定]가 있었습니다. 족보 상으로는 키요야스 아비의 동생 즉 키요야스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됩죠.

 노부사다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척들을 구성하는 외교에도 뛰어나, 자신의 부인은 오다 노부히데의 여동생이었으며, 노부사다의 딸들은 오와리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성주인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부인을 시작으로 카리야[刈谷]의 미즈노[水野], 마츠다이라 서가인 오오규우[大給], 나가사와[長沢] 가문에도 시집을 보내어 거대세력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 노부사다에게 종가라고는 하나 날뛰는 25살의 애송이 조카 녀석이 꼴보기 싫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오와리 원정에는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려서 못 나갑니다~ 하고 꾀병을 부렸습죠. 키요야스가 이끄는 미카와 군세가 이겨보았자 그 공은 전부 키요야스가 차지하게 되고 또한 그렇게 키요야스는 더 커질테니까요. 그래서 원정 참가를 하지 않는 대신 방해를 합니다. 내부의 적은 항상 있는 법입죠.

 키요야스를 지탱하는 유력한 가로 중에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각주:4]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내정 수완을 보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키요야스가 저렇게 매년 전쟁을 하는 것도 다 자기가 후방에서 지원을 잘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노부사다는 저 아베 오오쿠라와 키요야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여러 소문을 퍼뜨립니다. 아베가 오다 가문과 내통하고 있다건가, 아베가 잘난 척을 많이 한다던가 하는…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키요야스도 평소부터 아베에게 거리낌이 있었는지 그 소문을 곧바로 믿고 아베 오오쿠라와 자주 다투게 됩니다.

 그런 소문과 키요야스의 행동 때문에 상처 입은 아베 오오쿠라는 모리야마의 본진에서 아들 아베 야시치로우[阿部 弥七郎]에게 말합니다.
 “만약 뜬소문 때문에 내가 죄를 받으면 후대까지 오명을 입게 된다.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내 무죄를 신께 맹세하는 기청문(起請文)을 쓰니 니가 가지고 있으렴”
 아비의 투덜거림과 기청문을 받은 야시치로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뜬소문만 믿고 공이 많은 자신의 아비를 핍박하는 주군 키요야스가 너무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12월 4일.
 키요야스의 본진을 둔 절에서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나 말이 놀라 날뛰는 헤프닝이 일어났습니다.
 말이 도망가지 못하게 병사들이 소리질렀습니다.
 “도망 못 가게 해~ 문을 어서 닫아~”

 이 ‘도망 못 가게 해, 문을 닫아’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야시치로우는 하필 아비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있었기에 병사들의 저 외침은 날뛰는 말이 아니라 아비를 지칭한다고 오해하였습니다. 아비를 도망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취했습니다. 아비를 구하러 찾아다니다가 시간낭비를 하느니, 어디에 있는지 뻔한 키요야스를 찾아 죽이는 것입니다. 말잡이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지휘를 하고 있던 키요야스 곁에는 부하들도 말 잡으러 갔기에 혼란스러웠고 사람도 적었습니다. 아무 제지 없이 키요야스의 뒤로 다가간 야시치로우는 칼을 뽑아 “도망치게 하지 마라”고 외치는 키요야스의 등 오른 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베었습니다. 키요야스는 그 자리에서 사망. 아베 야시치로우도 키요야스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검의 명수 우에무라 데와노카미[植村 出羽守]에게 죽습니다.

 이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서 무명을 떨치던 키요야스가 죽어, 그의 아들이며 이에야스의 아비인 히로타다는 불과 10살의 나이에 가독을 이엇고, 종가를 쓰러뜨리려는 나이젠 노부사다에게 미카와에서 쫓겨나 이세[伊勢], 스루가[駿河]를 전전하게 됩니다.

 이상이 모리야마의 변에 대한 통설입니다.

 ...하지만 말입죠.

미야시타 히데키[宮下 英樹]의 오케하자마 전기 2권. 나카무라 촌[中村村]의 킨스케[均介]

제가 나카무라 촌[中村村]의 킨스케[均介]처럼 현장에 직접 가서 의문을 느끼진 못 했지만, 알려진 통설에는 의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죠.

계속~ (두둥~)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할애비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애비 [본문으로]
  3. 오다 측 기록에선 守山, 토쿠가와 측 기록에선 森山. 둘다 발음은 동일. [본문으로]
  4. 위키에는 아베 사다요시[阿部 定吉]라는 휘(諱)가 있으나, 당시 기록은 그냥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라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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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10.12.13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글이 기대가 되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12.13 18: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법학도 그렇지만 사실 통설은 별로 재미가 없죠...(아닛!) 아무래도 뭐든 그렇듯 판례에 입각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 보다는 좀 더 신선한 설을 바라는것이 인간의 심리가 아닌 것이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오덥니다(ㄷㄷ...)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2.16 0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고 있다보니까 신선미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렇게 이해하기 쉬운 구성이다 보니 기억하기 좋은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역전이 흥미롭고 다이나믹하긴 하지만(역전재판!!) 개인적으로 판결은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ckyup 2010.12.13 2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이거정말 눈물나게 감사합니다. 단편도 아닌, 미니시리즈로 올려주시다니..., 한 2년 동안 계속 블로그를 방문해온 보람이 있는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아베가문은 멸문을 당했을것 같군요. 다음편 왕 기댐니다.

  4. shiroyume 2010.12.20 1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그래도 제 블로그에 이름 찍힌거 보고 들어왔더니 활동하고 계시네요 ^^

    그 생각나네요. 노부나가의 야망 창천록에서 기요야스로 플레이하면 도중에 암살당해서 무능력쟁이 히로다다로 플레이해야 되서 뒷골땡기던 기억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2.31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이 바쁘기도 하고, 집에 가면 역시 잠자기 바뻐서 거의 활동정지 중입죠.

      천도PK-노부나가 탄생 시나리오 편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로 플레이하면 모리야마의 변 이벤트 덕분에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공짜로 얻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5. Favicon of http://panzerbear.blogspot.com BlogIcon 길 잃은 어린양 2011.02.17 2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다음주 토요일(26일)에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들께 책도 나눠드리고 간단한 술자리도 마련할 까 하는데 시간이 어찌 되시는지 궁금해서 댓글을 남깁니다.

    작년에는 평일에 바쁘신데도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다음주에는 일정이 어찌 되시는지요? 바쁘지 않으시다면 한 번 뵙고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2.18 1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참석하겠습니다.

      양대인같은 분 만나는 자리를 어찌 마다할 수 있겠사옵니까.
      더구나 이 무명소졸에게 친히 왕림하시어 불러주시는데야 애인과의 약속이 있다해도 취소하고 가야합죠.

  6.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11.02.22 1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뵙습니다 ^^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겨 놀러왔네요.
    그동안 못 본 글들을 천천히 여유있게 읽어야겠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8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유가 생기신 것 같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도 요 몇년 간 블로그를 좀 버려둔 것 같아서 이제부터 조금이나마 부지런히 포스팅하려 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196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두 명이었다는 놀랄만한 이설(異說)을 발표한 사람이 있다. 사의(史疑)라는 책을 저술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이다. 토우카이 지방[東海地方]의 지방관리로 근무하던 중 미카와[三河]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후년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세라타 모토노부[世良田 元信]라는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고 한다. 그는 진짜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의 부하가 되어 불시에 진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이런 이설이 나올 정도이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선조 역시 확실치 않다. 닛타 겐지[新田源治][각주:1]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지만 이는 나중에 날조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토쿠가와 가문의 시작은 코우즈케[上野] 닛타 군[新田郡]에 살던 토쿠아미[徳阿弥]라는 행각승()으로, 이 스님은 떠돌던 중 미카와에 와서 서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의 호족 타로우사에몬[太郎左衛門]의 사위가 되어 환속, 이름을 마츠다이라 타로우사에몬 치카우지[松平 太郎左衛門 親氏]라고 했다 한다.[각주:2]
 후년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었을 때 아시카가 겐지[足利源氏][각주:3]의 명문 키라 씨[吉良氏][각주:4] [각주:5]의 족보를 물려 받은 것[각주:6]도 이런 애매한 선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족보사칭이다.

 

화제를 돌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는 두견이[ほととぎす]에 비유하여,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가 노부나가[信長], ‘울게 만들겠다’가 히데요시[秀吉],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식으로 정권의 자리를 획득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江戸時代] 후기 턴포우[天保] 연간[각주:7]에 그려진 풍속도에는 갑주를 입은 남자들이 떡을 만들고 있는 장면이 있어, 절구공이를 들고 막 찧으려고 하는 것이 노부나가, 그 옆에서 떡을 만들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 그리고 최상석에 가만히 앉아서 떡을 먹는 것이 이에야스이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를 비꼰 그림으로 그 때문에 만든이인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 芳虎]는 막부(幕府)에 체포되어 60일간 수갑이라는 형(刑)과 절판이라는 벌에 처해졌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이라 알려진[각주:8] 이 말은 그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참을 인(忍)이라는 글자가 그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보다 8살, 히데요시보다는 5살 어리다. 조부 키요야스[清康]의 시대부터 미카와 오카자키[岡崎] 성주가 되었지만, 동쪽의 이마가와[今川], 서쪽의 오다[織田]라는 강력한 세력에 끼어 약소세력의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조부 키요야스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부터 마츠다이라 가문은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보호를 받기 위해 어린 이에야스는 인질로 바쳤고, 그로 인해 이에야스와 마츠다이라 가문은 인종의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12년간 마츠다이라 주종(主從)은 고난 속에서 허덕이지만, 이 시기에 이에야스의 참을성 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

 1560년 5월 19일.
 오다 노부나가의 전격작전으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어, 덕분에 이에야스도 인질생활에서 해방된다. 이에야스는 19살이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관계를 끊고 오다와 동맹을 맺어 미카와 통일을 이룬다. 1563년, 그때까지 모토야스[元康]에서 이에야스[家康]로 개명한다.

 막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나 본거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 봉기한다. 영내에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9]가 봉기한 것이다. 미카와에 있던 이마가와 잔당에 더해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섬기던 미카와의 무사들까지도 반기를 들었다.
 이를 반년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는데, 강화 조건의 실시에서 이에야스는 일찌감치 후년의 뻔뻔한 정치성을 발휘한다. 잇코우 종[一向宗][각주:10] 사원의 안전을 보장했으면서도 막상 반란이 진정되자 잇코우의 절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약자와 맺은 약속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지만, 강자에게는 어디까지나 의리를 지키는 정책이 일찍이도 이때부터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즈음 강자 노부나가에게는 자신의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에게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시켜 충성의 뜻을 나타내었고, 나중에는 그 노부나가가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 노부야스를 죽이기까지 한다.(이 부분은 졸역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처자식을 죽였다?"를 참조 삼아 보시길.)

 이에야스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서면 그의 호방함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1572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2만 군세와 싸운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그런 모습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는 센고쿠 최강인 코우슈우[甲州]의 군세가 상대. 더구나 상경(京)하려는 대군이었다. 이에야스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서 싸워 실제로 참패하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해 온 이에야스는 일부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안팎으로 화톳불을 대낮같이 밝히게 하였다. 적에게 공격해 볼 테면 하라는 대담한 전술이었다. 뒤를 쫓아 온 코우슈우의 병사들은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공격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은 뜨슨 물에 밥을 말아 세 그릇을 비우고는 코를 크게 골며 잤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후 타케다의 맹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는, “토쿠가와 군의 전사자는 모두 우리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죽었다”고 신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야스는 패하기는 했지만, 토우카이 No.1 무장[각주:11]이라고 일컬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전쟁터에서 이에야스가 지휘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처음엔 지휘봉을 휘두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먹을 쥐고 말 안장 앞부분을 두드리며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너무도 세게 두드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였다고 한다.

 천하에 대한 야망이 이에야스의 마음 속에서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각주:12] 때부터 일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태두로 그 꿈은 잠시 접어 둔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대놓고 정권획득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바친 서약서를 어기고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그들의 자식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 보냈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여러 다이묘우의 영지를 가증시켜 많은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에게 보낸 편지는 실로 179통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을 격파하였고,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확인 사살하여 토쿠가와 정권을 반석에 올려 놓은 것이다.

 말년의 이에야스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50세 전후부터 비만 체형이 되었고 아랫배가 나와 혼자서 훈도시를 조이지 못하여 시녀(侍女)에게 조이게 할 정도였다. 신장은 5척 1~2촌(약 155~158)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굉장히 건강을 생각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매사냥이 이에야스 건강의 원천인 듯 죽을 때까지 매사냥을 행한 횟수는 천 번을 넘는다.

 이에야스의 측실은 10명 이상 있는데 다이묘우 등 고귀한 집안의 딸들을 동경했던 히데요시와는 반대로 이에야스의 측실에는 하층계급의 딸이나 미망인이 많았다. 말년까지 정력은 절륜했던 듯 소위 토쿠가와 어삼가(御三家)[각주:13]의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9남 요시나오[義直]는 59살 때, 키이 가문[紀伊家]의 10남 요리노부[頼宣]는 61살 때, 미토 가문[水戸家]의 11남 요리후사[頼房]는 62살 때의 아들이다. 

 건강을 소중히 한 이에야스는 의사 이상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화제국방(和剤局方)[각주:14]’이라는 의학서를 항상 옆에 끼고서 스스로 진단하고 약을 조제할 정도였다. ‘만병원(万病圓)’이라 이름 지은 약을 특히 잘 만들었다고 한다.[각주:15]

 1616년 4월. 죽음을 앞둔 이에야스는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와 측근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할 일을 세세히 지시하였다. 유체나 위패의 위치는 물론 닛코우[日光]에 작은 묘소를 세우는 것까지 지시하였다. 죽기 이틀 전에는 죄인(罪人)을 시험 삼아 베게 한 명도(名刀) 미이케덴타[三池典太]를 베갯머리에 가지고 오게 한 뒤, 이불에서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허공을 내리쳤다. 그리고 당장 죽을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확실한 말투로, “나는 이 칼을 가지고 자자손손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그 다음 날, 신류우인 본슌[神流院 梵舜]을 불러 “쿠노우[久能山]의 내 묘소에, 내 몸을 서쪽으로 향하게 해서 안치하라”고 했다고 한다. 즉 서방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6] 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대로(大老)를 불러, “히데요리[秀頼]를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고 유언한 안쓰러운 모습에 비하면, 실로 냉정한 최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2년생.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적자. 아명 타케치요[竹千代], 이름이 처음엔 모토노부[元信], 다음엔 모토야스[元康]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전사를 기회로 독립하자, 1568년 즈음 미카와[三河]를 평정.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후 미카와,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남반부를 영유. 히데요시[秀吉]와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결전을 피해 화해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7] 후인 1590년 칸토우[関東] 6개 지역에 242만석을 하사 받아 에도 성[江戸城]를 거성(居城)으로 하였다. 1603년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1616년 4월 7일 죽었다. 75세.

  1. 오우슈우[奥州]를 무대로 펼쳐진 전구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삼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 대활약한 미나모토노 하치만타로우 요시이에[源 八幡太郎 義家]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義国]의 첫째가 코우즈케[上野]의 닛타[新田]라는 곳을 영유하면서 닛타라는 성을 썼다. [본문으로]
  2. ...는 에도막부가 편찬한 책(朝野旧聞褒藁)에 따른 말이고, 후세 아직까지 권위를 인정 받는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라는 사람의 논문에 따르면 - 토쿠아미에게 조상을 묻자, 토쿠아미는 "뭐 우리네라고 하는 것들은 동서남북을 떠돌며 여행하는 사람들로, 어디건 상관없이 유랑하는 자이기에 그런 것을 물으면 창피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무사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떠돌이라는 것이 창피하다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닛타 겐지와 마찬가지로 요시쿠니[義国]가 아시카가 장[足利庄]을 영유하며 그의 둘째 아들 요시야스[義康]가 영유하며 이후 아시카가 씨가 된다. 사족으로 닛타와 아시카가 양 쪽의 선조인 요시쿠니는 아시카가 시키부다이후[足利式部大夫]라고 칭한 것을 보면, 닛타와 아시카가 중 적류는 아시카가 인 듯. [본문으로]
  4. 아시카가 씨 3대 당주 요시우지[義氏]가 카마쿠라 중기 미카와의 키라 장[吉良荘]을 하사 받아, 아시카가의 땅을 물려 준 적남 야스우지[足利 泰氏]를 제외한 서장자 나가우지[吉良 長氏 - 사족으로 이 나가우지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선조이다], 셋째 요시츠구[吉良 義継]에게 부터 시작하는 가계. 키라 장은 야하기가와 강[矢作川]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형인 나가우지는 서쪽을 영유하여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를 칭했다. (동생 요시츠구는 처음엔 동쪽인 토우죠우 키라시[東条吉良氏]가 되나 후에 오우슈우[奥州]의 남조 측을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로 가 오우슈우 키라 씨[奥州吉良氏]의 선조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 초기 잠깐 활약하나 몰락). [본문으로]
  5. 후에 나가우지의 손자 미츠요시[吉良 満義] 때 미츠요시와 그의 적남 미츠사다[吉良 満貞]가 무로마치 막부 초반 혼란기에 각지를 전전하여 비운 사이 본거지인 키라의 동쪽을 미츠사다의 동생 타카요시[吉良 尊義]가 횡령하여 토우죠우 키라 씨[東条吉良氏]가 성립. 후에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이 토우죠우 키라 씨의 5대 당주 키라 요시후지[吉良 義藤]가 동족이며 예전 종가집인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와 싸우다 전사. 그 뒤를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5대 당주 나가치카[松平 長親 - 이에야스의 고조부가 된다]의 셋째 아들 마츠다이라 요시하루[松平 義春]가 잇고 이때부터 토우죠우 마츠다이라 씨[東条松平氏]가 된다. [본문으로]
  6. 센고쿠 시대 키라 씨는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양 가문은 키라 요시야스[吉良 義安] 때 합병. 요시야스의 부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 또한 요시야스는 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포로가 되어 있던 시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만나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7. 1830~1844년 사이. [본문으로]
  8. 이 말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가 한 말을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어떤 놈(이케다 마츠노스케[池田 松之介])가 이에야스의 글을 흉내 낸 것을 또 딴 놈(타카하시 테이슈우[高橋 泥舟])가 각지의 이에야스 사당[東照宮]에 바친 것이라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9.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10. 혼간지[本願寺]의 종파인 쟁토진종(浄土真宗)의 별칭. [본문으로]
  11. 海道一の弓取り. [본문으로]
  12.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살해한 사건. [본문으로]
  13.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본문으로]
  14. 중국 북송(北宋) 휘종 대에 만들어진 중국의 의약서.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죽기 전 이에야스는 이 만병원에 굉장히 의지하였다. 이에야스의 전의(典醫)인 카타야마 소우테츠[片山 宗哲]가 말리자 신경질내며 그를 시나노[信濃]의 타카시마[高島]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까지는 토쿠가와의 부하가 아니었던 가문. [본문으로]
  17.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한 1590년의 전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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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19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왠만큼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승려가 마쓰다이라가의 선조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정설이 아니라 그냥 추측 중에 하나라는 것과 50세부터 비만이라는건 원래부터 비만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인 듯.
    이 양반도 보면 만만찮은 간웅인데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생애가 격렬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뭍히는 듯 그러고 보면 불같다고 생각하는 노부나가도 여자(네네에게 보낸 편지) 자상한 면이 있는 한편 느긋하다고 생각하는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당시 제장들에게 열라게 편지써보낸 것과 같은 것이겠죠. 소하찌씨는 저런 이에야스를 어떻게 그럴듯 하게 미화를 잘 시켰을까나. -_-;
    떡에 관한 일화는 아는데 저 그림을 본건 처음입니다. 어째 우리나라의 솥단지 얘기가 생각나는건......

    즐거운 한주 되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야마오카 선생의 소설의 영향이 큰 듯 합니다. 그런 인물은 다시 찾기도 힘들 정도로 성인군자로 나왔을 정도다 보니.

      개인적으로 그 소설 초반의 노부나가는 정말 멋진 듯 합니다.

      우리나라의 솥단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비슷한 이야기 인가요?

      흰꿈님도 좋은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2. 나라 2009.10.19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궁금한게 생겼는데... 저 일본식으로 중간에 머리 깎는 습관은 언제 생긴 건가요?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마가와[山川] 출판사의 일본사 사전에 따르면 중세(카마쿠라 시대~센고쿠 시대) 귀족부터 시작되었다고 나오며, 일본 위키 해당항목[さかやき]를 보면 1176년에 그 기록이 보인다고 하네요.(즉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날뛰기 몇 십년 전부터 나왔다는 말입죠)

      생성 초반엔 전쟁터에서 투구를 쓸 때 후끈거리고 답답한 것을 막기 위해서 했는가 봅니다만, 나중엔 무가의 일상 생활에서도 하게 되어, 특히 무가에서는 성인식 때 이발역[理髪役]을 맡은 사람이 머리를 밀고나 잘라 줌으로써 아이에서 성인이 되었음을 외견 상으로도 알 수 있게 됩죠.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19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떡 치는 (...이라고 하니 어감이 요상하군요;;) 얘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림에 미츠히데도 들어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처음 보기도 하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론 꽤 유명한 그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어쩐지 그래서 미디어위키에도 없었군요.(즉 저 그림은 와세다 전자 도서관에서 무단으로 다운 받은 것! 우하하하)

      그러고 보니 몇 달전에 떡집 사장이 수 십명의 여성들을 농락했다고 자극적인 제목을 달던 몇몇이 떠오르는군요.
      (떡집사장이 떡은 안치고 떡을...이라는 식으로 ^^)

  4. 나라 2009.10.20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소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5. ckyup 2009.10.20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대망에서의 너구리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상식이 되었나 봅니다 - 무조건 대의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성인군자..... 좋은글 또 감사합니다, 몰랐던걸 알게되었군요. 떡반죽하는 히데요시 그림이 참 재밌네요. 물론 또 대망 이야기지만..., 삼국지와 비교해보면 삼국지의 주군들은 거의 모사나 군사들의 머리에 의지하는면이 많지만, 대망에서보면 가장 똑똑한 군사도 주군들의 머리를 따르지 못하더군요, 특히 히데요시. 그리고 대망이 뻥이 덜 심해요 - 군사숫자에서 비교해보면 확실하죠, 삼국지는 갑자기 급하게 정찰나가도 한 5천 끌고 나가죠.

    암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연재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이미지가 가장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동물도 태어나서 처음 본 생물을 어미로 여긴다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망과 삼국지의 차이는 작자의 인식 차이라 생각합니다. 재미를 느끼게 하는 곳을 대규모 군사 움직임에서 찾느냐 인물의 심리에 중저을 두느냐의 차이 아닐까요?

      정찰나가도 오천...^^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순간 박장대소하였습니다.

  6. 맹꽁이서당 2009.10.21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너구리 영감이군요. [삼국지 연의]가 수많은 독자들에게 촉한정통론을 심었듯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위나 오에도 관심이 가긴 하지만, 맘 깊은 곳에서는 역시..) [대망]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노부나가나 히데요시가 평화를 정착시켰으면 이에야스는 역사속에서 다테 마사무네 정도의 위상이 아니었을까, 아님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정도 나이(세키가하라 직전?)에 죽었다면 전국시대가 더 이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나이 먹으면서 조조 쪽으로 옮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제갈량에 대한 동경은 지워지질 않더군요(유비는 많이 인식이 변했지만요)

      노부나가가 살아서 천하통일 했을 시에는...음... 개인적으로는 오다 가문 휘하의 무장들이 너무 쟁쟁해서 이에야스가 나올 자리나 있었을지...뭐 IF의 이야기는 각자 다들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이거다..라고 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야스가 죽더라도 그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마에다 토시이에 혹은 모우리 테루모토 정도가 이에야스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7.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0.21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천하인이 있는가 하면, 저런 천하인도 있고.
    천하를 얻기 위한 사람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뭐 천하만 손에 넣으면 조상 바꾸기야 쉬울테니까요. 사람들이 믿건 안 믿건 대놓고 반론을 하지는 못할테니까요.

  8. Favicon of http://liquer.tistory.com BlogIcon 2009.10.21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사이언스 채널에서 [전사]란 제목으로 이에야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주더군요. 이에야스가 딱히 나쁘진 않게 나오는데 결말이 좀 씁쓸했던것도 같습니다. '미츠나리는 죽고 히데요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죽고 이에야스의 가문은 250년간 일본을 지배했다.' 식으로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 사이언스 채널에서도 그런 것을 하나 보군요. 뜬금없겠지만 히스토리 채널 없애버린 중앙일보에게 갑자기 분노가 이는군요. ^^;

      이에야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겠지!!..하고 말하고 싶군요. ^^ 뭐 일본 사람들도 쇼우군 가문[将軍家]와 섭정가문[摂家]의 상하구별을 못하는 사람들 많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듯.

  9. shotokanfist 2009.10.25 15: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전사라는 프로그램을 문장으로 정리해서 동명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누가 책을 줘서 읽어봤습니다만, 번역상의 오류가 많았는지 (설마 원저자가...) 기본적인 연도나 인명, 사실관계에 오류가 많아서 읽으면서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프로그램 자체는 호평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못봤는데, 평이 좋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6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검색해 보니....
      전사들(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전사들의'이기는 기술') Heroes and villains

      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것인가 보군요.... 설명에 인문경영서다...라는 부분이, 좀 슬프게 느껴지는 군요. 그냥 인문서라고 해도 될 것을 꼭 경영서라는 부분을 붙여야 한다는 점이 조금 아쉽군요.

      이야~ 어쩌면 윌리엄 아담스의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숨기진 역사를 쓴 것일 수도...(물론 그럴리 없겠지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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