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 이에야스[家康]로 이어지는 소위 겐키[元亀][각주:1] - 텐쇼우[天正][각주:2]의 천하 통일기에 저 3명과 가까이 하며 백만석의 기초를 쌓아 올린, 센고쿠[戦国] 역사에서도 특필할 만한 무장이었다.

 토시이에는 14살 때 당시 나고야[那古野] 성주였던 4살 연상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각주:3], 같은 해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섰다[각주:4]. 19살 때 노부나가가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信行]를 공격한 이노우 전투[稲生の合戦]에서 노부유키의 청년 친위대장[小姓頭] 미야이 칸베에[宮井 勘兵衛]라는 강적을 쓰러뜨리는 공적을 세웠다.[각주:5]

 이 즈음 토시이에는 카부키모노[かぶき者]로 성질이 급하여 자주 남과 싸웠다.
 ‘카부키모노’라는 것은 기발하고 특이한 복장이나 행동을 해서 남을 놀라게 하고는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기풍이었다. 예를 들어 토시이에는 굉장히 화려한 장식을 한 창을 들고 다녔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창의 마타사에몬[槍の又左衛門][각주:6]’이란 이명(異名)을 붙었기에 이를 들은 토시이에는 기뻐하였다.
 그런 토시이에였기에 늙어서도 특이한 젊은이를 사랑하였으며, 또한 말하길,
 “젊은이에게는 큰소리 치도록 만드는 편이 좋다. 그러면 자신이 했던 말들을 거짓으로 만들 수 없다며 분투하게 되니까”
 라고 하였다.

 카부키모노였던 22살의 1559년, 토시이에는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노부나가의 도우보우[同朋][각주:7] 쥬우아미[十阿弥]가 토시이에의 남성용 비녀[笄][각주:8]를 훔쳤다. 토시이에는 곧바로 노부나가에게 쥬우아미를 처벌할 테니 허락을 내려달라고 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토시이에는 주군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이런 토시이에를 보고 쥬아미 등이 ‘용기도 없는 놈’ , ‘무사라는 자가 한번 벤다고 했으면 베어야지 주군의 명령이라고 베지도 못하다니’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깠다.[각주:9]
토시이에는 이를 듣고 불문곡직하고 쥬우아미를 베어 죽였다. 더구나 일부러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을 골라서 죽여버린 것이다. 평소부터 카부키모노라는 점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토시이에로서는 당연한 행위였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토시이에를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노(宿老)들의 중재 덕분에 목숨만은 건져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낭인(浪人)이 된 토시이에가 취한 방도는 슬며시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세워 복귀를 허락 받는 것이었다.[각주:10] 그런 기회가 그 다음 해인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가 되어 찾아왔다. 토시이에는 오다 군[織田軍]에 참가하여 이마가와[今川] 측의 목을 세 개를 가져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시이에가 그 목을 노부나가의 앞으로 가져왔지만 노부나가가 무시했기에 그 목들을 버리고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결국 노부나가의 용서는 없었다.

 그 2년 뒤, 노부나가가 미노[美濃]를 침공하였을 때 토시이에는 또 참가하여 모리베 전투[森部の合戦]에서 ‘목 사냥꾼 아다치[首取り足立]’라는 이명(異名)을 가진 강한 무사를 죽이는 수훈을 세우자 노부나가도 용서를 하여, 다시 오다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복귀하게 되었다.[각주:11]

 그 후 토시이에는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함께 호쿠리쿠 방면[北陸方面]에서 활약하며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자,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곧이어 이 둘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토시이에의 입장은 복잡했다. 토시이에에게 있어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에서 쫓겨나 낭인으로 보내던 시대에 몇 번이나 도와주었던 은인이며, 오랜 기간 전쟁터를 함께 해 온 의리가 있었다. 한편 히데요시와도 젊었을 적부터 친교가 있어, 딸 중 하나인 ‘고우[豪]’[각주:12]는 태어나자마자 히데요시에게 양녀로 주었을 정도였다. 토시이에는 어느 쪽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 는 것이 본심이었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영지가 이웃인 시바타 측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1583년 4월 21일부터 다음 날 아침에 걸친 시즈가타케의 전투[賤ヶ岳の戦い]는 히데요시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지만, 이때 마에다 군[前田軍]은 그다지 전투에 참가하는 일 없이 영지(領地)인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로 철퇴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가 이 전투에 대한 기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히데요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토시이에가 농성하고 있는 후츄우의 성은 단숨에 낙성시킬 수 있었다. 이때가 토시이에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각주:13]

 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포위망을 친 히데요시는 혼자 말 타고 후츄우의 성문 앞에 와서는 “마타사[又左]~ 마타사~”하고 토시이에의 통칭을 불렀고, 성안에 들어 온 히데요시는, 서로 원한이 없으니 앞으로도 사이 좋게 지내자며 토시이에에게 말하였다. 이런 것은 히데요시의 특기인 남의 마을을 끌어들이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미움 받지 않는 토시이에의 인덕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리하여 토시이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멸망 당하여 죽은 뒤 히데요시의 둘도 없는 한 팔이 되어 신뢰를 받았고, 나중에는 여러 장수들에게서도 신뢰를 받아 히데요시 정권에서 무게감을 더해 갔다.

 토시이에가 여러 장수의 인망을 모았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병들었을 때, 토시이에는 당시 명의로서 명성을 떨치던 의사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에게 직접 의뢰하여 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며, 우지사토가 죽자 그 아들 츠루치요[鶴千代 = 후에 히데유키[秀行]]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즈[会津]라는 중요한 곳을 지키기 힘들다는 의견이 높았지만, 부인 호우슌인[芳春院]과 함께 히데요시 부부를 설득하여 가모우 가문[蒲生家]의 영지 상속을 실현시켜 주었다.[각주:14]
 
 또한 이해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 사건이 일어나 평소 히데츠구와 친밀했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가 연좌의 혐의를 받자, 토시이에는 온갖 수단을 다해 변호하여 아사노 부자에게 쏠린 혐의를 벗게 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조선에서의 행동 때문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근신 당하고 있다가 ‘지진 카토우[地震加藤]’[각주:15]라는 이명(異名)을 얻을 때의 활약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풀었는데, 이것도 토시이에의 중재에 의한 것이 컸던 듯 나중에까지 키요마사는 토시이에의 중재를 고마워하였다.

 이렇듯 토시이에가 장수들의 위기를 구했기에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신뢰할만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토시이에는 말년이 되어 적자 토시나가[利長]에게 여러 다이묘우들의 차용증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죽은 뒤 마에다 가문의 편에 선 다이묘우의 차용증은 돌려주라고 하며, 그렇게 되면 한층 더 아군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는 단순히 ‘좋은 인간성’만의 무장이 아니라 상당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시이에는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그것도 센고쿠 무장[戦国武将]로는 드물게 경제감각의 소유자로 수치에 밝아 항상 주판을 가지고 다니며 병사의 수를 세거나 금전 출납, 곡물을 계량할 때도 주판을 튕겼다. 그랬기에 토시이에는,
 “돈이 많으면 남에게도 세상에게도 겁먹을 일이 없지만, 가난해지면 세상이 무서운 법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1598년 8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가 죽었다. 정치와 어린 히데요리[秀頼]의 안전은 오대로(五大老)[각주:16], 오봉행(五奉行)[각주:17]의 손에 맡겨지게 되어, 토시이에는 주로 히데요리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대로의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우들과 사돈관계를 맺으려 하는 등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기 시작하기에 이르자, 토시이에는 긴박한 정치의 장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이에야스를 가장 적대시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봉행이었다. 그리고 이 미츠나리는 무공파(武功派)라 일컬어지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의 격한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리 되자 천하는 이에야스-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등 반 이에야스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에야스의 다음가는 실력자 마에다 토시이에는 미츠나리 등과 함께 이에야스에게 힐문장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변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답변으로 응대하였다. 오오사카의 토시이에와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간에 불온한 공기가 흘렀다.
 이 사태에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8]와 토시이에에게 은혜를 입은 카토우 키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 여러 장수들이 열심히 양자간의 사이를 중재하여 겨우 화해하였다고 한다.
 그때 토시이에는 이미 병상이 깊어 마에다 가문의 의지는 적자 토시나가가 결정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인망이 두터웠던 토시이에였기에 여러 장수들도 중재에 힘썼던 것이며, 이에야스 역시 예부터 알고 지낸 그런 토시이에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는 죽었다.
 그 임종의 자리에서 토시이에는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이빨을 간 뒤 베갯머리에 있던 ‘신도우고 쿠니유키[新藤吾 国行]’의 작은 칼[脇差]을 뽑지도 못해 칼집 채 가슴에 누르고는 무언가 크게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9]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83년
오와리[尾張] 출신. 통칭 이누치요[犬千代]. 오다 가문[織田家]를 섬겼고, 형 토시히사[利久]를 대신하여 본가를 이었다[각주:20].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공적을 세워 에치젠[越前] 후츄우 성[府中城]의 성주가 되었고[각주:21], 이어서 노토[能登] 나나오 성[七尾城]의 성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후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카가[加賀] 오야마 성[尾山城][각주:22] 성주가 된다. 1585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각주:23]의 칭호를 하사 받았고, 1590년에는 토요토미 성[豊臣姓]을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 죽은 지 8개월 후인 1599년 죽었다. 62세.[각주:24]

  1. 1570~1573년. [본문으로]
  2. 1573~1592년 [본문으로]
  3. 봉록은 50관.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이며 키요스[清須]의 성주인 오다 노부토모[織田 信友]와의 카야즈 전투[萱津の戦い]. [본문으로]
  5. 오와리 통일전에 참가하며 봉록은 100관으로 증가. [본문으로]
  6. 토시이에의 통칭이 마타사에몬[又左衛門]이었기에. [본문으로]
  7. 다이묘우[大名] 곁에서 잡무를 맡거나 다도[茶道]에 관련된 일을 하던 스님. [본문으로]
  8. 일본 시대극을 자주 보시는 분이라면, 주인공이 도망치는 적이나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표창 대신 젓가락 비슷한 것을 던지는 장면을 보셨을 것이다. 그것이 코우가이[笄]. 이것으로 머리를 긁거나 머리를 다듬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가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10. 이런 행위를 '진가리[陣借り]'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복귀하면서 얻은 봉록 300관. [본문으로]
  12. 토시이에의 4째 딸. 나중에 오대로 중 한 명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에게 시집간다. [본문으로]
  13. 도망치던 시바타 카츠이에는 토시이에의 후츄우 성[府中城]에 들러, 무단 퇴각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오랜 기간 자신을 잘 도와 주웠다는 것에 감사한 뒤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여기에는 토시이에의 2남 토시마사[利政]의 부인이 우지사토의 딸인 점이 컸을 듯. 즉 서로 사돈지간. [본문으로]
  15. 596년 9월 5일 킨키[近畿]에 지진이 일어나 후시미[伏見]가 혼란에 빠졌을 때 키요마사는 근신의 몸임에도 군사들을 이끌고 후시미 성[伏見城]에 가 히데요시를 수비하였기에 붙은 이명. [본문으로]
  16. 이 당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7.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18.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는 타다오키의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 즉 토시이에와 타다오키는 사돈지간. [본문으로]
  19. 일설에는 복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신도우고 쿠니유키의 작은 칼로 스스로 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토시이에는 4남이어서 원래 자격은 없으나, 1569년 토시히사가 병약해서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토시이에가 당주가 되도록 명령. [본문으로]
  21. 나가시노의 공적보다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감시역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2. 후에 카나자와 성[金沢城]으로 이름을 바꾼다. [본문으로]
  23. 히데요시가 한참 동안 쓰던 성과 관직명. [본문으로]
  24. 가보나 계보도에는 62세라고 하나, [케타신사 문서[気多神社文書]]나 [토시이에 야화[利家夜話]] 등에서 63세로 하는 사료도 많아 63세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노부나가 가신단 연구가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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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12 0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시대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지녔던 오다계열의 필두가신들 중에서 센고쿠 시대의 끝자락까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란 점에서 도시이에란 인물의 역량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니와나 삿사는 히데요시 손에 의해 숙청되었고 시바타, 다키가와, 아케치들은 히데요시에게 칼을 겨누는걸 택하고 패망했으니 말이죠. 예외라면 장렬히 죽으면서 아들 데루마사와 가문을 지킨 이케다 쇼뉴 정도일까요.

    결과론적으론 가모 히데유키를 아이즈에 놔두게 되면서 가모 가문이 쇠퇴하게 된 셈이네요. 차라리 가모 가문을 아이즈보다 중요도가 덜한 곳으로 전봉했으면 어떻게 되었을런지. 전국에 이러한 우호 가문들을 만들어놓은 것이 에도가 훗날에도 가가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동맹의 울타리에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2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1588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가 쥬라쿠다이[聚楽第]에 행재하여 다이묘우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문서를 쓸 때, 노부나가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히데요시 일족과 이에야스, 모토나리 등과 함께 오다 가문 계열 무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것만 보아선 히데요시의 신뢰와 더불어 역량도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시바타, 아케치, 타키가와 등은 아무래도 히데요시 보다 서열이 위거나 동등하다 보니 천하를 노리는 히데요시로서는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가모우 가문[蒲生家] 자체가 우지사토[氏郷]를 중심으로 급격히 커져 신규 가신들을 다수 받아들이다 보니 가모우 가문 자체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계자라고 하여도 히데유키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졌나 봅니다. 이건 아무래도 일찍 죽은 잘못이 있는 우지사토 때문인 듯 합니다.

      좀 벗어난 이야기 입니다만, 에도 시대 때 혼슈우[本州]에 있는 마에다 가문을 시코쿠[四国]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습죠. 막부도 나름 마에다 가문에는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습죠.

      마에다 가문도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자식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를 자신의 가문으로 초빙하여, 가신으로서는 파격인 7만석을 안겨주며 막부와의 절충에 힘쓸 정도로 에도시대 초기에는 카가 번[加賀藩]과 막부는 나름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었던 듯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06.03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즈카타케에서의 무단 이탈 + 딸 2명중 한명은 히데요시의 양녀로, 또다른 한명은 히데요시의 측실로... 갠적으로 이 두가지로 인해 평소 좋게 생각했던 마타자의 환상이 팍 깨져 버렸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가타케 전투 때 토시이에의 마에다군은 마지막까지 후군에서 달려드는 히데요시를 막았고, 토시이에는 직접 창을 쥐고 싸웠다고 하는 기록도 있더군요.

      히데요시도 니와 나가히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시이에를 살린 것은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방파제로 남긴 것으로 에치젠에 있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임. 토시이에에게 마음을 열지 마시길'
      이라고 보낼 정도로 시즈가타케 전투 직후에는 토시이에와 히데요시가 알려진 만큼 친하진 않았던 것 같더군요.

      더더군다나 딸 2명 중 하나(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 간 고우히메[豪姫])는 태어나자 마자 간 양녀이고, 마아히메[摩阿姫=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는 원래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바쳐진 인질을 히데요시가 인수했던 것이라, 당시 인식으로 보아서 토시이에를 욕하기는 좀 부족하지 않을지...

  3. 지나다가 오타지적 2011.11.06 04: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바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4문단 6번째 줄

  4. 한남충 2018.06.24 0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아무리 의리가있고 인덕이 있어도
    시바타와의 의리를 지키기위해 수많은 식솔들과 가신들의 목숨을 뒤바꾸기는 힘들었을겁니다.
    저는 토시이에의 상황이 이해가는군요..
    참 의외인게 이에야스가 히데타다의 딸 타마히메를 마에다가문에 시집보낸것인데..
    토시이에 사후라 카가정벌까지 결정할뻔했던걸 혼인동맹을 맺어주며 포용한것이..
    포상할 땅을 엄청 필요로해서 카가를 먹기는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듯한데..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말하는데 있어 그의 부인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를 빼놓을 수 없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셋째 딸로 이름은 타마[玉], 절세의 미녀였다. 타다오키는 이 가라샤에 관계된 일이라면 질투심이 특히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정원사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가라샤에게 계절이 어떠네 날씨가 어떠네하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는데도 타다오키는 이 정원사를 직접 칼을 뽑아 죽였다.

 부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에게 물려받은 재능으로 각종 예도[藝道]에도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트 디자이너적인 재능이 풍부하였던 듯 자기 부인의 옷도 스스로 옷감을 고르고, 색이나 모양까지 디자인했다고 한다. 갑주(甲胄)나 갑옷에 걸쳐 입는 동의(胴衣), 큰칼[太刀]의 디자인 등도 직접 고안하였고,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서도 의뢰 받아 투구 등을 만들었다.
 어느 날 의뢰 받아 제작한 투구의 뿔을 진짜 물소의 뿔이 아닌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적이 있었다. 의뢰한 다이묘우가 완성품을 보고 이래서는 부러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자, 타다오키는 “투구의 뿔이 부러질 정도로 활약하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본분일 것이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

 질투 심한 격정(激情)인 성격이 플러스로 작용하여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활약을 하였다.
 1577년 10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장남 노부타다[信忠]를 따라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속성 카타오카 성[片岡城]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15세에 선두에 서서 분전하여 수급을 베었지만, 이때 돌에 머리를 맞아 상처가 나 늙어서도 그 상처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는 노부나가에게서 자필 표창장[感状][각주:1] 를 받았다.[각주:2]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전인 같은 해 3월의 사이가 정벌[雑賀征伐] 때는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혈기에 날뛰어 명성이 자자하던 사이가의 철포대에게 돌격하려 한 것이다. 적들이 총을 쏘고 난 간격에 맞추어 돌진하려다 부하가 막은 덕분에 탄환의 먹이가 되는 것을 피했다. 이때의 경험이 머리에 새겨졌는지 노년(老年)에 들어서도 자주 입에 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구요]

그런 용맹한 활약들이 노부나가를 흡족하게 하여 노부나가는 타다오키를 시동[小姓]으로 삼았다. 유명한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문장(家紋)이 구여(九曜)로 정해진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노부나가의 칼을 받들고 있던 타다오키가 그 칼의 칼자루에 새겨져 있던
구요의 장식에 반하여 곧바로 이를 자신이 입는 옷에 새겨 입자 이를 본 노부나가가 “멋진 문양이구나”고 칭찬한 것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부친 유우사이[幽斎]까지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은 오동나무[桐] 혹은 ‘원 안에 두 줄[二つ引両]'였지만 타다오키의 대가 되어 구요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타마(후의 가라샤)와 결혼한 것은 1578년의 일로 타다오키 16세였다.
 그러나 이 결혼이 1582년 호소카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기를 가져다 주게 된다. 이해의 6월 부인 가라샤의 부친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우 사[本能寺]에 머물던 주군 노부나가를 죽이고, 호소카와 부자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야말로 호소카와 가문은 운명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타다오키의 부친 유우사이는 노부나가를 죽인 미츠히데의 천하가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때까지 친구였던 미츠히데의 권유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타다오키와 함께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하였다[각주:3].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아케치 토벌전인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가 시작되자, 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영지인 탄바[丹波]에 침공, 성 2개를 공략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더구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를 탄고[丹後]의 미토노[味土野]의 산속에 유폐하여 미츠히데와 연을 끊었다는 것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렇게 노력한 것이 효과를 보아 호소카와 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탄고 영유를 그대로 인정받는 서장을 얻었고 가라샤 부인의 유폐도 풀리게 되었다[각주:4].

 그 후 타다오키는 히데요시의 천하평정 전쟁에 참가하여 유우사이와 함께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확고한 지위를 쌓아가지만 1595년에 큰 재난에 휩싸이게 된다. 관백(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실각사건이 그것이다.
 히데츠구는 잔혹한 행동 때문에 할복을 명령 받고 그의 처첩, 가신들까지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였는데, 그 중에 타다오키의 인척이 있었다. 타지마[但馬] 이즈시[出石]의 영주 마에노 나가야스[前野 長康]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부인이 타다오키의 장녀였던 것이다. 더구나 운 나쁘게도 타다오키는 히데츠구에게서 황금 100매를 빌리고 있었다. [각주:5] 그러한 일로 타다오키 역시 히데츠구의 일당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받게 된 것이다.

 타다오키는 곧바로 근신을 명령 받았다. 히데요시 측근의 말에 따르면, 오봉행(五奉行)[각주:6]의 의향은 타다오키를 할복시키려는 의향이라고 하였다.
 타다오키는 분노했다. 이는 평소부터 사이가 나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讒言)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호락호락 누명을 쓰고 죽을 바에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후시미[伏見][각주:7]에 불을 질러 화려하게 끝을 장식하겠다”
 고까지 생각하였다. 아예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려고 여러 준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열심히 변명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는 딸을 인질로 바칠 것, 히데츠구에게 빌린 황금 100매를 반납할 것을 조건으로 타다오키의 결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타다츠구에게는 당장 황금 100매라는 거금이 없었다. 온갖 방법을 쓴 끝에 겨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빌려 반납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은의(恩義)로 인해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맺기 시작하여 히데요시가 죽은 뒤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차츰 토쿠가와 측이라는 자세를 확실히 나타내게 된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정한 법도를 계속해서 어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시다 미츠나리 등 사대로(四大老), 오봉행(五奉行)들과 험악한 대립관계에 들어갔다.
 타다오키는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인척관계였다.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이 토시이에의 딸이었던 것이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 대한 은의와 토시이에와의 인척관계 사이에 끼어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다오키와 친한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利長]가 타다오키에게 놀랄만한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이에야스 암살계획이었다. 타다오키는 기겁했다. 그것은 마에다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시나가를 설득하여 함께 토시이에를 만나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권고하자, 토시이에는 오히려 바닥을 내려치고 격노하면서 이에야스의 약속위반을 하나하나씩 거론하였다. “이래서는 히데요리[秀頼]공에게 해가 될 뿐.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에야스를 죽이고 말겠다!”고 외쳤다.
 타다오키는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겨우 토시이에가 재고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토시이에는 타다오키에게 이에야스와 화해하는데 중개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그 후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에야스도 깜짝 놀라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타다오키의 노력으로 인하여 양자는 화해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가 죽자 타다오키를 포함한 무공파 장수들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계획하여 미츠나리는 자신을 구해준 이에야스에게 은퇴 당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이번엔 타다오키가 새빨간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마에다 토시나가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공모하여 이에야스의 암살계획을 세웠고, 타다오키도 토시나가와 인척관계인 만큼 여기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였다.
 놀란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곧바로 부친 유우사이와 타다오키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맹약서를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고, 이에야스의 요구대로 마에다 가문과의 인척관계를 끊고 에도[江戸]에 셋째 아들인 타다토시[忠利]를 인질로 보냈다[각주:8]. 즉 호소카와 가문은 이걸로 완전히 이에야스에게 복종을 맹세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9]에 참가하는데, 그가 출진한 사이 오오사카[大坂]의 저택에서 가라샤 부인이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은 거병하자 오오사카에 있던 동군(東軍) 무장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잡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라샤 부인은 용감히 이를 거부하고 가노(家老)에게 자신을 찌르게 하여 마지막을 장식하고 화약에 불을 붙여 저택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였던 가라샤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기에 그러한 수단을 취한 것이다.

 타다오키는 부친 유우사이에 뒤지지 않는 굴지의 다인(茶人)으로 또한 그런 방면의 서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1563년 나가오카 후지타카[長岡 藤孝=유우사이[幽斎]]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칭 요우이치로우[与一郎]. 호는 산사이[三斎]. 탄고[丹後] 미야즈[宮津] 성주. 임진왜란 때는 2년 동안 재진하였고, 진주성(晋州城)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豊前] 코쿠라[小倉]에 봉해졌다. 1632년 아들 타다토시[忠利] 때 히고[肥後] 55만석으로 전봉되었다. 센노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0]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1645년 12월 2일 죽었다. 83세.

  1.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노부나가의 거의 유일한 자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었는지 전해준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도 ‘이 표창장은 노부나가님이 직접 쓰신 거임’이라고 첨부한 편지에 쓸 정도였다. [본문으로]
  2. 표창장을 받은 이유는, 타다오키가 그의 동생 호소카와 오키모토[細川 興元]와 함께 카타오카 성을 가장 먼저 침입해 들어갔다[一番乗り]. [본문으로]
  3. 타다오키의 경우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었던 듯, 죽을 때까지 매달(!) 노부나가의 제삿날을 잊지 않고 챙겼다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그녀는 이때 받은 타다오키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당시에는 이렇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빌린 사람을 자기 부하로 만들거나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한다.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도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어 형인 히데요시를 화나게 한 적도 있다 한다. 즉 현대의 감각처럼 단지 돈을 빌려주고 빌렸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타다오키가 히데츠구와 주종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6.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7. 히데요시가 쥬라쿠다이[聚楽第]를 히데츠구에게 물려주고 은거해 있던 곳. [본문으로]
  8. 타다토시는 인질로 에도[江戸]에 가서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은 덕분에 후에 폐적된 첫째 형과 둘째 형을 제치고 타다오키의 세자가 된다. [본문으로]
  9.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상경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복하고 그렇게 꼬우면 현피뜨자는 편지까지 받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려 감. [본문으로]
  10.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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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10.10.07 1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사에서 이래 저래 요리 조리 잘 빠져 나가서 성공한 인물 중 하나죠
    다다오끼는 전공도 많이 세우고, 큰 영지로 얻고, 오래 살기도 하고 재주도 많고
    암튼 여러가지로 다재 다능 했던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다오끼의 성공은 대부분 그 아버지(후지타카)의 은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다오끼야 말년에 뭐 지가 전국의 난세을 헤쳐 나온 불세출의 인물이라고 생각 했겠지만
    그래도 쇼군 업고 이찌노다니에서 빠져나와 노부나가를 의지하게 한 후지타카에 비할까 싶습니다
    이른바 양조택목(良鳥擇木)이 전국시대에서는 제 일의 덕목이라 생각하는데
    후지타카가 그걸 참 잘 했죠(그닥 비굴하지 않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정동희님. ^^

      제가 가진 이미지도 비슷합니다.

      다만 세키가하라 즈음부터는 타다오키의 의견이 아비의 그것보다 더 중했던 듯 싶습니다.

      확실히 타다오키가 아비만 못한 듯 합니다만, 이런 무장의 일화를 소개하는 책들에 부자(父子) 이대가 한 꺼번에 실린 것을 보면 타다오키도 부친의 그늘에 가려지기만 할 정도는 아닌 듯 합니다.

      참 타다오키에 관해서 이 글도 함 보시길.

      http://blog.naver.com/nagoomo/140056207097

      타다오키의 성격을 잘 나타낸 것 같더군요.

  2. 정동희 2010.10.07 1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가 히데쓰꾸 실각에 얽혀서 그렇게 고생한 줄은 저도 처음 알았네요
    이에야스 암살 건은 이에야쓰가 충성 맹세 하라고 얽은 느낌이 드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땐 그렇게 돈을 빌려 준 뒤 고리로 매달 이자를 받았다고 하더군요(예나 지금이나 돈으로 묶이면 아무래도 따를 수 밖에 없는지라). 히데츠구 실각에는 그런 고리대금에 관한 문제도 있었던 듯 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와 토시나가, 타다츠구는 말씀하신대로 이에야스의 책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표는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었다곤 해도 여전히 No.2였던 마에다 가문으로 흔들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10.08 0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사노나 마에다는 도요토미에 정말 큰 은혜를 입은
      가문인데요...
      그럼에도 그렇게 쉽게 이에야쓰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솔직히 나머지 도요토미계 다이묘들이 이에야쓰에게 붙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네요
      결국 미쓰나리만 동분서주...
      요시쓰구는 친구 따라 저승 갔고
      모리, 우에스키는 나름 야심을 품다 망했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대세'란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한번 휩쓸리면 다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3. 정동희 2010.10.07 1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다나베성 건은 저도 전에 읽어 봤는데요
    그걸 읽으면서도 역시 다다오끼는 좀 과격하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뭐 조선 가서 고생도 하고 나름 집안의 우두머리가 되긴 했지만
    여러가지로 후지타카의 노련함에는 못 미치는 인물이 아닌가...
    그래도 뭐 결국 이에야쓰한테 고개 숙이고 잘 살았으니 성공한 인생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라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가 주인공인 만화에서 타다오키는 후지타카의 1/10에도 못 미치는 인물로 그려지더군요. 뜬금없는 짓을 벌이다 아비에게 뒷목을 맞고 기절하여 끌려가는 역으로 나옵죠. ^^
      (참고로 후지타카는 그의 후손인 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煕]의 얼굴로 그려져 있습죠)

    • 정동희 2010.10.08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소카와 가문이 막말까지 아주 잘 살았죠
      사실 호소카와번은 무로마치 시대의 간레이 호소카와 하고는 상당히 먼~~~ 호소카와인데... 어쨌든 전국난세를 거쳐 명문 호소카와의 대표 주자가 됐으니 참...
      호소카와 총리가 기자 출신인데 특종을 그렇게 잘 잡았답니다 이유인 즉슨... 당시 경시총감인가 암튼 경찰 고위직이 호소카와 가문의 하급 무사 집안이었다네요
      (새 모이 주는 무사...)
      암튼 그래서 옛 주군가를 섬기는 마음으로 모리히로에게 특종을 많이 줬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리히로 총리의 기자시절 에피소드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

      요즘 한국에 그런 일이 있었음..
      '막부가 없어졌는데도 아직도 주종 운운하는 더러운 세상~'....했을지도.

  4. jane 2010.10.08 0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다오키 저 친구 그래도 전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 다재다능하고 성격도 불 같고 의외로 순정-_-파고...

  5. Gyuiphi IV 2010.10.08 1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센덕후 열이 좀 식은 지금에 와서 다시 보자면 공과를 떠나서 이사람 성격 자체는 센고쿠에서나 먹힐만한 성격이지 지금 생각하면 막장에 다름아니다 싶긴 하더군요.

    뭐 교양인에 용맹했고 대세를 파악하는 눈도 뛰어났던건 재능이긴 합니다만 그 외의 부분에서(-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시대가 다르다 보니.. ^^

      사족으로 시이나 타카시[椎名 高志]의 만화 "미스터 지팡구"에서 노부나가는 어느 상인을 베어 죽인 후 히데요시에게,
      "지금은 봉건시대고 나는 전제군주다. 틀렸음 '아~ 미안'하면 될 일이야"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을 듯)

      뭐 비슷한 일들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랫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지금과 비교하면 막장이지만 당시는 그것이 당연시 되던 시대였으니까요.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부하들은 수틀리면 칼 뽑아 칼질하는 나오마사[별명:人斬り兵部!!] 때문에 출사하기 전에 조상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설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비단 타다오키만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十二.  

 이 챠챠 부인(茶御料人), 요도도노(淀殿), 다이구인(大虞院)이라고 불리는 여성이 자기 자식 히데요리(秀)의 이름으로 이 땅에 남긴 업적이라면 신사나 절을 다시 부흥시킨 정도였는데 그 광신적인 종교에 대한 투자가 이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쿄우(京)의 키타노 신사(北野社), 이즈모(出雲)의 타이샤(大社), 쿠라마(鞍馬)의 비사문당(毘沙門堂), 카와치(河)의 혼다 하치만 궁(田八幡宮), 쿄우(京)의 토우지(東寺) 남대문, 에이잔(叡山)의 요카와(川) 중당(中堂), 산죠우(三) 돈게 원(曇華院), 셋츠(津)의 카츠오 사(勝尾寺), 오오사카(大坂)의 시텐노우 사(四天王寺), 타이고(醍醐)의 산보우 원(三院) 인왕문(仁王門), 쿄우(京)의 난젠 사(南寺) 법당(法堂), 야마시로(山城)의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岩水八幡宮), 오오사카(大坂)의 이쿠쿠니타마 신사(生魂社), 카미다이고(上醍醐)의 미에이 당(御影堂)과 오대당(五大堂), 여의륜당(如意輪堂), 사쿠라 문(門) 등이다. 킨키(近畿) 및 그 주변에서 [우다이진 히데요리 건립(右大臣秀建立)] 혹은 수축했다는 현판(懸板[각주:1])이나 기록이 보이지 않는 옛 신사나 절 오히려 드물다고 해도 될 정도로 엄청났다. 절이나 사원의 건립이나 수리는 하나의 절, 하나의 사원에도 많은 돈이 든다고 하기에 이런 것들에게 든 돈은 기절할 정도의 금액이었으며, 요도도노가 히데요리의 앞날을 비는 성심에는 칸토우(東)에 있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어이구~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야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故) 타이코우(太閤)의 남겨진 재산은 엄청나지 않습니까?"

 하며 마사노부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 세상에 히데요시(秀吉)만큼이나 돈에 관해서 도가 튼 사람도 드물 것이다.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즈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직할령은 불과 200만여 석에 지나지 않았다. 그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칸토우(東) 250만여 석에 봉하였으니 석고로 따지자면 신종(臣從)하는 이에야스(家康) 쪽이 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미곡중심의 경제에서 자시의 두뇌를 빼내었다. 그는 사도 금산(佐渡金山[각주:2]) 등을 개발하여 광업이익을 독점하였으며, 사카이(堺[각주:3])나 하카타(博多[각주:4])의 무역을 진흥하여 관세를 받았고, 비와고(琵琶湖) 호수 교통의 거점인 오오츠(大津)를 도시화하여 국내 무역의 이윤을 얻거나 하는 식의 수익으로 정권과 토요토미 가문의 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실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축적되어 히데요리에게 상속되었다.

 "오오사카의 어리석은 아줌마와 아이는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하고 혼다 마사노부는 입버릇같이 말했다. 사실 에도(江戸) 정권이 이미 여러 다이묘우(大名)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히데요리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에도 정권에 금이 가는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두 가지 점에 있어서 불안했다. 서쪽의 다이묘우(大名)가 야심을 품으며 히데요리를 내세우려고 할 지도 모른다는 점과 토요토미 가문이 가진 재산이었다. 히데요시는 금화를 주조하여 유통경제 체제를 확립하였는데 그 때문에 쌀이 없어도 돈만 있다면 단번에 10만의 낭인을 고용하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었다. 그 돈을 줄이기 위해서 마사노부는 여러 사람을 거치는 방식으로 요도도노와 그녀의 유모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에게 원령(怨靈)의 공포를 불어넣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들은 칸토우(関東)의 모략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유산은 말이 연못의 물을 마신 정도 밖에도 줄이지 못한 듯했다. 그 정도로는.

 "쿄우()의 대불(大佛)을 재건시키면 어떨까?"

 하고 이에야스는 마사노부에게 말했다. 오오~, 하고 마사노부는 외치며, 과연 묘안이지 않습니까? 하고 무릎을 쳤다. 쿄우의 대불이라는 것은 히가시야마(東山)의 호우코우 사()의 불상으로 히데요시가 그것을 건립했다. 히데요시는 나라(奈良)의 대불[각주:5]보다도 거대한 것을 만들고자 하였고 실제로 그것을 만들었다. 단 이 시대는 주조기술에 있어 가장 퇴보한 시기였기에 목조 회반죽으로 하였다. 건물의 높이는 약 60.6미터, 대불의 높이는 약 48.48미터로 이를 위해 소비한 일수는 이천일, 총인원 1천만 명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대불은 1596년의 후시미(伏見)-쿄우토(京都) 지진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없었다.

 "필시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도 미련이 남으셨을 걸세. 유지를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토요토미 가문의 가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불러 직접 이에야스가 말했다. 카츠모토는 넙죽 엎드려 절해 그 말을 받들고는 서둘러 오오사카 성으로 돌아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에게 그 뜻을 보고하자 그들은 –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 크게 기뻐하였다. 항상 배석해 있는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 등은 미칠 듯이 기뻐하여 카츠모토의 이야기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곧이어 요도도노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이는 모두 타이코우 전하가 저 세상에서까지 가문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시작하시옵소서"

 라고 말했다. 감격에 몸을 떨고 있었다.
 요도도노도 떨고 있었다. 그녀들의 기쁨은 이에야스의 마음에 악마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로써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 타이코우의 유지를 받들라는 식의 말이 이에야스의 입에서 나올 줄은, 세키가하라(
) 후의 저 영감탱이의 태도로 보았을 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의 안녕을 빌기 위해 신불에게 수없이 투자했던 보람도 이걸로 보답 받은 듯 했으며, 하늘도 이에야스의 마음에 따스한 바람을 불어 넣는 듯했다. 요도도노는 히데요시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금동불상을 주조하기로 하였다. 기술상 조금 작게 만들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약 19미터라는 웅대함이었다.

 대불 건립은 예전 쇼우무 텐노우(聖武天皇) 때도 알 수 있듯이[각주:6] 국가적 규모의 사업이지 아무리 히데요시의 유산이 많다고는 해도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70만석이 될까 말까 한 일개 다이묘우(大名)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도도노는 그것을 했다. 곧이어 주조가 중반쯤 진행되고 안치하는 건물도 거의 다 되었을 무렵 주물사(鑄物師)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그렇게 공들인 대불도 녹고 건물도 재로 변했다.

 하지만 요도도노와 그녀의 유모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굴하지 않았다. 새로이 시작하려 하였다. 단지 그 많다던 토요토미 가문의 재산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가 남긴 황금 중 다이훈도우킨(大法馬金)이라는 대형 주괴(鑄塊)를 녹이기로 하였다. 이 덩어리 하나로 오오반(大判)이라는 금화 천 닢을 만들 수 있다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부터 천수각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지만 결국 그것에 손댔다[각주:7]. 그러나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기에 부족한 분은 에도 바쿠후(幕府)에게 원조받고자 하였다. 요도도노는 그녀의 친동생인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부인 오고우(お)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히데타다를 설득시켰다. 참고로 히데타다는 오오사카(大坂)에 대한 밀모에 대해서 부친 이에야스에게 조금도 전해 듣지 못한 상태였다. 히데타다는 곧바로 사자를 순푸(駿府)의 이에야스에게 보내어 그 뜻을 상담하게 하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하고 이에야스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때처럼 떫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히데타다의 사람 좋음에도 화가 났다. 더불어 또한 이에야스에게 있어 적 –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인 토요토미 가문 여성들의 사람 좋음, 어리석음, 순진함도 이렇게까지 한도 끝도 없으면 불유쾌했다. 예를 들면 이에야스 정도나 되는 인물이 토요토미 가문의 기껏해야 여성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서 장기를 두고 있는데 상대는 그렇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순진하게 한 수 물려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에야스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며 현 쇼우군 히데타다라고 하여도, 실은 이 대불 재건을 권한 나에게 타이코우의 명복 어쩌고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으며 토요토미 가문의 재산을 없애기 위해 서란다 – 는 마음 속의 것을 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타다 놈은 알아서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또 화가 나,

 "처먹을 만큼 처먹은 나이로 그런 말밖에 못하나?"

 하며 입술을 여덟 팔자로 만들었다. [스루가 토산(駿河土産)[각주:8]]이라는 옛 서적에는 이에야스의 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히데요리는 어린아이, 요도도노는 여성이기에 철없는 소리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매사에 숙련된 사나이들이다. 그런데도 어린아이인 히데요리나 부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더구나 그것을 나한테까지 상담해 오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당초부터 호우코우 사()의 대불건립이라는 것은 고 타이코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지 천하를 위한 사업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히데요리의 재건도 자기네 가문의 사사로운 일에 지나지 않으니 그렇기에 쇼우군 가문에 있는 자가 관련할 문제도 아니다"

 고 이에야스는 내뱉듯이 말하고는 자리를 떠버렸다.
 그 보고는 오오사카(
大坂)로 전해졌다.

 "그렇게 말했나?"

 하고 요도도노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일단 달리 생각했던 이에야스에 대한 생각을 제자리로 원위치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전히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차가웠다.
 요도도노는 토요토미 가문만의 돈으로 하기로 하여 카타기리 카츠모토에게 그렇게 명령하였다. 금고가 그로 인해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을 카츠모토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이에야스의 본심을 이 노인은 알고 있었던 만큼 애써 요도도노의 낭비에 목숨 걸고 '아니되옵니다'를 할 마음도 일지 않았으며 또한 의견을 낸다고 해서 들을 요도도노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재정담당관에게 그렇게 전했다.

 대불공사는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 쿄우토(
京都)에서는 여러가지 소문이나 유언비어가 난무하며 요도도노의 귀에도 들어왔다. 난무했던 만큼 소문 중에는 이에야스의 책모를 정말로 제대로 눈치챈 듯한 것도 있어, '이에야스는 대불건립을 이용하여 히데요리를 서서히 궁핍하게 하여 무일푼으로 만든 뒤 공격하여 죽이려는 생각인 듯하다'는 것이었다. 요도도노는 그것을 듣고 놀람과 공포와 분노로 인하여 갑자기 다리가 얼음과 같이 차가워지고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결국 쓰러졌다. 복도 여기저기서 의사를 부르고 물을 준비하는 여관들로 떠들썩했지만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핏덩이일 때부터 요도도노를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이 자리는 우선 요도도노가 안심할 만한 말을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씨. 걱정할 것은 없사옵니다. 카가(加賀)의 마에다(前田)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됩니다. 명령하여 이에야스를 물리치게 하는 것입니다"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카가(
加賀)의 마에다 가문(前田家)은 창업자인 다이나곤(大納言) 토시이에(利家)가 히데요시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참고로 토시이에는 히데요시가 젊었을 적부터의 친구로 히데요시는 병상에서 자신의 죽음을 깨닫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 토시이에는 내 죽마고우이며 또한 다시 없는 의리의 사나이이니,
 라는 말을 눈물 섞인 목소리로 거듭했다. 토시이에야말로 자신이 죽은 뒤의 히데요리를 지켜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히데요시는 한창 잘 나갈 때도 이에야스의 대항자로서 항상 토시이에를 키웠다. 이에야스의 관위를 승진시킬 때는 반드시 토시이에의 관위도 승진시켰다. 이에야스의 관위 쪽이 항상 한 단계 위였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평소 잡담을 나눌 때는 '다이나곤(토시이에), 나이후(
=이에야스)'라고 순위를 반드시 반대로 하여 토시이에의 이름을 먼저 말하는 식으로 배려를 함으로써 토시이에의 마음을 잡고자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 토시이에를 자신의 사후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만든 것인데, 다행히도 토시이에의 의리는 그에 응했으며 또한 토시이에만큼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사후의 다음 해 뒤를 쫓듯이 죽었다.
 때문에 마에다 가문은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
利長)가 당주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부친 토시이에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 계속 품어왔던 감상이 전혀 없었다. 토시나가는 앞으로의 천하가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것이라 내다보고 이에야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친을 에도로 보내어 인질로 삼게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도 이에야스 편으로 호쿠리쿠(北陸)에서 싸웠으며 싸움 후 영지가 증가되었다. 카가(加賀) 백만석이라고들 하지만 히데요시 시대의 마에다 가문은 80여만석에 지나지 않았으며,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노토(能登) 1개국과 그 외의 지역을 하사 받아 100만석이 되었다[각주:9]. 이후 히데요리의 후견인이 되어야만 할 가문이면서도 토시나가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눈길을 보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런 토시나가인데도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그에게 이에야스를 물리치게 하시옵소서"

 라고 요도도노에게 말한 것이다. 그랬다. 마에다 가문은 현재 다이묘우(大名)로서는 가장 컸으며 거기에 히데요시의 유언도 있었기에 토시나가가 히데요리를 옹립하여 다이묘우들을 규합하면 에도 정권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물론 어디까지 꿈 속에서의 이야기지만.
 단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에게 있어서는 이것만큼 현실감 넘치는 착상(
着想)도 없었다. 그녀의 두뇌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엄격한 자기중심 논리가 섞였을 때 현실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요도도노도 다를 바 없다. 요도도노는 이 한마디에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곧바로, 서둘러 오늘 안으로 카가(加賀)에 사자를 보내라, 토시나가에게 충성심을 보이게 하라, 고 떠들어댔다.

 사자가 카가(加賀)로 달려갔다.
 이때가 1610년 가을이었다. 이 즈음 세간에서는 마에다 토시나가를 '카가 재상(
加賀宰相)'이라고 불렀다. 나이는 이제 50에 가까웠으며 매일 생각하는 것이라곤 자기 가문을 후세까지 보전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랬던 만큼 과거의 망령과 같이 오오사카의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서 온 밀사(密使)만큼이나 이 소심한 재상님을 놀라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오오사카의 여성들이 그렇게까지 마에다 가문에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에다 가문에 있어 몰락을 의미했다. 한편으로 마에다 가문은 토쿠가와에게 있어 눈 위의 혹이기에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뭉개질지도 몰랐다. 때문에 토시나가는 친모인 호우슌인(芳春院)을 에도에 인질로 보냈으며 또한 그걸로도 부족한 듯하여 토시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아첨을 떨어 토쿠가와 가문의 직신 중 하나를 마에다 가문 필두가로로 보내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혼다 아와노카미(本多 安房守)[각주:10]가 바로 그로, 가로는 명색일 뿐 마에다 가문에 대한 감시자였다.
 토시나가는 어중간한 태도가 반대로 해를 불러온다고 생각하였다. 오오사카의 여성들에게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 타이코우의 은혜는 크게 느끼고 있소. 그러나 그 은혜를 갚으라고 하는데, 망부 토시이에가 오오사카 성에 머물며 히데요리님에게 진력을 다하여 그 때문도 있어 병환으로 돌아가셨소. 그것으로 은혜는 전부 다 갚은 셈이 될 것이오. 졸자(拙者) 같은 경우 망부와는 또 입장이 다르오. 졸자는 망부와는 달리 새로 에도에 은혜를 입어 그 새로운 은혜덕분에 카가(加賀), 엣츄우(越中), 노토(能登) 3국의 태수가 될 수 있었소. 이 큰 은혜는 칸토우()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다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한 일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소. 그러하니 졸자에게 기대를 품고자 하는 것은 큰 착각이며 이쪽에게 이보다 더 큰 폐는 없을 것이오."

 라는 것이었다.
 이 답변을 요도도노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가 오오사카에서 받았을 때, 잠시 동안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침묵이 이어졌지만 곧이어 꿈에서라도 깨어난 듯이 달린 입들마다 떠들며 토시나가의 배은망덕을 공격했다.

 한편 마에다 토시나가는 그래도 불안했다. 이로 인해 토쿠가와 가문이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토시나가는 은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예전에 토요토미 가문에 들락날락한 자신이 당주로 있는 한 오오사카는 이루어지지도 않는 원조를 계속 기대할 것이라 생각하여 이것을 계기로 막냇동생인 토시츠네(利常)를 양자로 삼아 당주자리를 물려주기로 하고 순푸(駿府)에 급사를 보내어 그 뜻을 전하며 이에야스의 의향을 살피게 하였다. 물론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서 밀사가 왔다는 것도 이에야스에게 알렸다.

 "카가 재상(토시나가)님이 하신 처치는 정말로 맘에 드는구려"

 하고 이에야스는 크게 칭찬하였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오오사카가 칸토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이 거기까지 끓기 시작한 이상 서둘러 오오사카를 멸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멸하기 위해서는 천하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이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생기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지'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적당한 이유가 성장하여 숙성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금까지 이에야스가 해 온 사고방식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기다리기에는 이에야스가 너무 늙었다. 지금 오오사카에 있는 후환의 뿌리를 남긴 채 죽어버리면 이에야스의 사후 천하는 히데요리에게 빼앗겨 이에야스가 살아 생전에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여생 얼마 안 남았으니 지금은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오오사카를 도발해서 저 모자를 화나게 하여 그쪽에서 먼저 칼을 뽑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야스가 그 결의를 품고 상경한 것은 1611년 3월이었다. 숙소를 니죠우 성()로 정했다. 이 성은 이에야스가 쿄우토에 토쿠가와 가문의 성으로 전년에 세운 것으로, 쿄우토 조정의 감시와 이에야스-히데타다 상경시의 숙소라는 두 가지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곧바로 오오사카(
大坂)에게,

 "상경하여 나에게 인사하러 오라"

 고 사자를 보냈다. 사자는 토쿠가와 가문에 있어서도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도 옛 주인 격에 해당하는 오다 우라쿠(織田 )가 선정되었다. 다인(茶人)이며 웅변가로 또한 무엇보다도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있어 친족[각주:11]이었기에 사자로서는 최적이었을 것이다.
 - 만약 히데요리가 상경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인식하여 힘에 의지할 생각이다. 겸해서 또한 이것이 히데요리에 대한 최후통첩임을 명심하도록.
 이라는 결의를 사자에게 전했다. 오다 우라쿠도 긴장하였고 쿄우토(
京都)의 시민들까지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거라며 떠들어댔다. 이에야스는 이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는 김에 확실히 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패도 꺼냈다. 코우다이인 네네(高台院 )였다. 이 히데요시의 미망인 –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는 세키가하라 승리의 배후 공로자이지만 – 은 이에야스의 두터운 신뢰 속에서 쿄우() 히가시야마(東山)의 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이야말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설득시키기에는 가장 알맞은 인물일 것이다.

 코우다이인도 이에야스의 결의를 듣고 긴장하여 곧바로 자신이 손수 키웠다 할 수 있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와 자기 친정의 당주인 아사노 요시나가( 幸長) 거기에 오오사카(大坂)의 가로인 카타기리 카츠모토를 불러 요도도노에게 세상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시키도록 의뢰했다. 코우다이인이 생각하기에 이미 이에야스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오오사카(大坂)도 과거의 권위에만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이에야스를 따를 것이며, 그 성을 건네라고 하면 성을 건네고, 5만석 정도의 신분으로 참으라고 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토요토미 가문의 장래와 히데요리를 위함이다 - 는 것이었다. 그러니 상경하라는 말을 들으면 얌전히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요도도노가 그런 당연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토요토미 가문을 망치는 사람은 요도도노라는 것을 키요마사, 요시나가, 카츠모토에게 말했다. 그들도 그 뜻에 이의(異意)가 없었다.

늦었다고요?

  1. 지금으로 말하면 머리돌 같은 것. [본문으로]
  2. 참고로 사도 금산의 금맥이 발견된 것은 1601년. 히데요시가 죽은 해는 1598년. [본문으로]
  3. 현 오오사카(大阪) [본문으로]
  4. 현 후쿠오카(福岡) [본문으로]
  5. 약 15미터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나라(奈良)의 대불은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본문으로]
  7. 이것을 특히 다이부츠 오오반(大仏大判), 즉 '대불을 만들기 위해 만든 돈'이라고 하여 1608년부터 1612년까지 주조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1720년 전후에 '다이도우지 유우잔(大道寺 友山)'이라는 인물이 세키가하라 이후부터 이에야스가 죽을 때까지의 일화를 기록. 이에야스가 은거하면서 에도 바쿠후(江戸幕府)를 조종하는 모습이 잘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노토(能登)는 토시이에의 차남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政)의 영지였다(약 21만석). 즉 마에다 가문 전체의 석고는 이때 이미 100만석을 넘어있었다. 세키가하라 때 토시마사는 중립을 견지하였기에 이에야스는 그의 노토를 빼앗아 형인 토시나가에게 주었다. 본문의 80여 만석은 토시이에-토시나가만을 뜻함. [본문으로]
  10.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 본편에서 자주 언급되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차남이다. 여담으로 본문에 언급되는 것은 두 번째로, 첫 번째는 1604년까지 섬기다가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세키가하라 때 이에야스에게 반항하여 바쿠후에게 위험시 되고 있던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안정에 조력하고 있었다. 1611년 마에다 가문 복귀. [본문으로]
  11. 요도도노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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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4.07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뜻밖의 애교인가요? ㅋㅋ

  2. 朴先生 2009.04.08 0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찌나 기다렸던지... 화가 나려다(저 따위가;) 마지막 한 마디에 풀려버렸습니다ㅋㅋ^^
    말씀하시던대로 역시 요도도노 편이 제일 기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8 11: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약속 못 지킨 것은 저이니 화 내셔도 괜찮습니다. 때리지만 않으신다면 어떠한 것도 달게 받겠습니다.(그러니까 때리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한..15~17까지는 가지 않을지..
      (지금이 12니까....oTL)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4.08 0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네네 조언대로 고분고분 따른다고 해도 결국 무슨 꼬투리를 잡힐 것은 뻔한 일이고...
    히데요리 모자가 목숨을 부지하려면 해외 도피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a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8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힘만 버렸다면 명맥은 유지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일개 쿠게(公家)로 남아 있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인식하기에는 변화가 너무 급격했던 것 같고요. 천하인이었던 1600부터 본문이 언급하는 1610년 즈음까지 불과 10년사이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듯한 느낌을 받았을테니까요.

  4. dameh 2009.04.09 2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늦었습니다만 잘 보고 갑니다. 일본이란덴 인터넷 되는데가 참 적어서..ㅡㅡ;

    여담이지만 도무지 사람의 한심함엔 끝이 없는것 같군요. 요도도노편은 볼때마다 참 가슴이 답답해지는 편이라..ㅡㅡ;

    토시츠네가 이때 이 이유로 가독을 물려받은것이었군요. 또 하나 지식을 알아 가는 것 같아서 즐겁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12 1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을 늦었습니다.
      (요즘 감기 걸려서 몸과 머리가 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요도도노는...그쵸...
      뭐 이건 애초부터 게임이 안 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많은 센고쿠 경험(약소국 출신, 인질, 하극상, 지 아들 죽이기, 대패로 인해 똥싸기, 대승을 거두었지만 추녀와 빠구리 뛰기 등등)을 가진 불세출의 인물과 온실에서 지 하고 싶은대로 하고만 자란 아가씨가 센고쿠에서 살아 남기에 대한 머리 싸움을 하는 것이다 보니..

      실제로는 1605년 6월 즈음...본문에서 언급('1610년 가을'이라고 언급)되는 것 보다 약 5년 정도 이른 시기에 아들이 없던 토시마사의 양자가 되어 3대번주에 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司馬史観을 그냥 믿으면 위험합니다~

    • dameh 2009.04.22 14: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긴 시바선생글을 100%믿을수야.. 그 사도금산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ㅎㅎㅎ; 그런데 추녀와 성관계라니 히데요시 여동생을 이야기 하시는 건가요?ㄷㄷ;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2 16: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지기라도 했음 그럴 일 없었을 텐데 말입죠.

 하지만 히데요시[秀吉]의 그녀에 대한 태도는 이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당신은 특별에서도 특별하니까

 라고 히데요시는 말버릇처럼 말했다. 수 많은 측실을 거느리고 있지만 네네 당신과 그녀들은 다르다. 각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당신이 사랑스럽다는 애정의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한 지위를 지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네는 토요토미 가문의 유일한 정실(正室)이며 토요토미 가문 그 자체였다. 많은 측실들은 법제상 고용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히데요시가 주군(主君)인 것과 마찬가지로 네네 역시 주군이었다. 때문에 '특별에서도 특별하다'는 것이다.

 사실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인 네네의 지위는 어떤 시대의 어느 귀부인(貴婦人)보다 더욱 화려했다.
 
히데요시가 나이다이진[大臣]이 되었을 때[각주:1] 동시에 그녀는 종삼위(從三位)가 되었고, 더욱 지위가 높아져 1587년에는 종이위(從二位)가 되었다. 계속해서 이 해의 9 12, 그녀는 시어머니인 오오만도코로[大政所]와 함께 오오사카[大坂]에서 쿄우()의 쥬라쿠테이[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히데요시의 취향대로 꾸며진 행렬, 행장(行裝)은 과거에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수행하는 여관(女官) 만으로도 500명 이상에 달했을 것이다. 네 명 이상이 메는 화려하게 치장한 가마가 2백정, 두 명이 메는 평범한 가마가 100, 짐을 멘 상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에 따르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경호 무사들은 전부 타는 듯이 붉은 색의 복장을 하고 있어, 그야말로 이 나라 최고 귀부인(貴婦人)의 상경 행렬을 장식하는데 어울렸다.

 더구나 길가에서 남성은 구경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라고 하더라도 구경꾼 속에 섞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유는 그들이 젊은 여관(女官)들의 미모를 보고 저속한 마음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배려 때문이었다. 속으로 품는 마음조차 키타노만도코로에 대해서 불경(不敬)이라고 하였다. 이 행렬은 굉장한 평판을 불러 천하에 선전되었다. 키타노만도코로야 말로 일본국 넘버 원 귀부인이라는 인상을 60여주()에 전해진 것은 히데요시가 연출한 이 행렬의 성공에 의한 것이 컸다.

 다음해인 1588 4 19.
 
즉 키요마사가 히고[肥後] 책봉되기 1개월 전, '토오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는 종일위(從一位)로 승진하였다. 이미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위계였다.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의 다세대 주택에서 조악한 결혼식을 올린 옛날을 생각해보면 그녀 자신조차 믿기 힘든 영달(榮達)이었다.

 그러나 제가 저 자신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요

 라고 네네는 항상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녀의 굉장한 점은 그 영달보다도 오히려 그 영달로 인해 조금도 그 인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그녀는 종일위(從一位)가 되었어도 절대 쿄우[京] 말투나 궁중 말씨를 사용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건 듣기 힘들 정도로 빠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썼다. 평소 히데요시에게도 그러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의 마누라라고 불렸던 아주 옛날 화장도 못하던 맨얼굴일 때랑 조금도 변함이 없어,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떠들썩하게 말싸움을 펼쳤으며, 또한 시녀들을 상대로 항상 큰소리로 웃었고, 밤에 이야기라도 할 때에는 옛날 가난한 시대의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말하여 모두를 웃겼다. 또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부인인 오마츠[松]와는 기후 성[岐阜城] 밑의 오다 가문[織田家]의 무사들이 사는 곳에서 이웃사촌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그 당시 담을 사이에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네네의 태도는 오마츠에 대해서도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다시는 없을 분이시다

 고 오마츠는 자주 말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님은 타이코우(太閤)님 이상 일지도 모른다

 오마츠는 예전부터 그 적자(嫡子)인 토시나가[利長], 둘째인 토시마사[利政]에게 말했다.
 
이 오마츠라는 마에다 토시이에의 조강지처 자체가 토시이에의 창업(創業)을 도우며 왔던 만큼 보통의 여성은 아니었다. 토시이에가 죽은 후에는,
 
'
호우슌인[芳春院]'
 
이라는 요염한 법명(法名)으로 불리며[각주:2], 마에다 가문에서는 '비구니 쇼우군[尼将軍]'[각주:3]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의 권세가 있었다.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만 토시이에가 죽은 뒤 그녀는 마에다 가문의 앞날에 대해서 하나하나 네네와 상담하였고, 하나하나 네네의 의향에 따랐다. 그 적자(嫡子) 토시나가에게도,

 모든 것을 키타노만도코로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따르렴

 이라 훈계하였다. 이럴 정도로 네네가 가진 소탈함과 총명함은 그녀의 인기를 만들었고, 그것이 토요토미 다이묘우[大名]들 속에서 은연 중에 정치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네네가 가진 위엄과 덕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네네에 대한 과대할 정도의 애정과 존경이 세상에 투영되어 있었다. 세상의 누구나 히데요시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 중 넘버 원은 키타만도코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보게, 이보게

 하고 히데요시는 쿠게(公家) 말투로 네네를 불렀다. 편지에도 그렇게 썼다.

 이보게 밥을 많이 취하시게

 라는 단지 그렇게만 써서는 성을 지키고 있는 네네에게 보냈다. 밥을 많이 먹고 있는가? 라는 정도의 것만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농담도 잘 하셔
 
라고 그럴 때마다 네네는 생각했다. 그녀는 남다른 정도로 건강하였으며 평소 식욕이 왕성하였고, 그렇지 않아도 살집도 넉넉한데 이 이상 먹는 것에 격려 받는다고 하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만 앙상한 히데요시는 풍만한 여성을 좋아하는 부분도 있었으며, 시대도 그러한 여성을 미인이라고 하였기에 미용 상의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식욕이 어떻든 이러한 히데요시의 극진함이 토요토미 가문에서 그녀의 위치에 한층 더 무게를 실려 준 것은 확실했다. 예를 들면 1587년의 큐우슈우[九州] 공략전에서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서 수백 리 떨어진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의 진영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오오사카[大坂]의 네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투 상황이나 큐우슈우(九州)의 정세 등을 알린 후 그 말미에

아니~ 나도 이번 싸움에서는 나이를 먹은 게 느껴지더군. 나도 모르는 새에 흰머리가 많아진 것이 아닌가? 이래서는 하나하나 뽑는 것도 힘들 정도야. 이제는 그쪽과 만나는 것도 창피할 정도네
마치 연인에게 보내는 듯한 내용이었다. 더구나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네네를 기쁘게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리 흰머리가 늘었다고 해도 다른 여자라면 모를까 그쪽이라면 거리낄 것도 없지. 그쪽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이렇게 흰머리가 늘어난 것이니까

 여전히 아부는 천하제일이시군
 
라고 네네는 반은 어처구니 없이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본심은 기쁘지 않을 턱이 없다. 그 증거로 이 편지를,

 모두 보세요. 칸파쿠(関白) 전하의 웃긴 편지를

 라고 말하면서 시녀들에게도 읽게 해 주었다.
 
히데요시의 육체는 이 즈음부터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큐우슈우[九州]에서 개선한 즈음부터 밤에 네네의 침실을 찾아 오는 것이 드물어 졌다. 오더라도,

 여어~ 건강하신가? 오늘도 밥은 취했나? 그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지

 라고 여전히 시끄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더욱더 네네에 대해서 친밀한 태도를 보이기만 할 뿐으로, 그런 주제에 남편으로써의 의무인 침실의 일까지는 기력이 미치질 못했다. 과연…… 히데요시는 늙었다. 먼 큐우슈우의 진중에서 보내왔던 늙음을 한탄한 편지의 내용대로 몸이 쇠약해졌을 것이다. 다른 측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칸파쿠님이 너무 오시질 않사옵니다

 라고 그녀들은 규원(閨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쓸쓸함을 네네에게 호소했다. 네네는 허물없이 그것을 들어 주었다. 그 때문인지 네네는 그런 그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어, 특히 카가노츠보네[加賀ノ局], 산죠우도노[三条殿], 마츠노마루도노[松ノ丸殿]등은 네네를 마치 언니와 같이 따랐다. 이 때문에 그녀들의 친정에서도 네네를 우러르는 곳이 많았다. 카가노츠보네는 마에다 토시이에와 그 부인인 위에서 언급한 오마츠를 양친으로 하는 딸이었으며, 산죠우도노는 카모우 가문[蒲生家] 출신이었고, 마츠노마루도노는 쿄우고쿠 가문[京極家] 출신이었다. 그녀들의 친정은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다이묘우(大名)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으며, 그런 가문들이 히데요시의 측실들을 통해서 네네와 엮여, 그것을 연줄로 삼고 있었다. 네네의 강한 정치력은 그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는 하여도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토요토미 가문 내의 세력에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이 남을 배려하는데 세심했던 남자이기에 여태까지 그랬던 적이 없었지만, 단 한 여성의 침실에만 완전히 빠져 살게 되었다. 아자이 가문[浅井家] 출신으로 어렸을 때의 이름을 챠챠[々], 토요토미 가문에 들어와서 처음엔 니노마루도노[丸殿]라 불리며, 결국에는 요도도노[淀殿]라 불리게 된 여성이었다. 그 미모는 물론이거니와 요도도노의 혈통만큼은 히데요시가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네네는 깨닫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비천한 몸에서 출세를 했기 때문인지 귀한 가문에서 자란 여성에 이상할 정도로 동경을 품고 있었으며, 그것은 지금의 신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아직 낮은 신분이었을 때, 당시의 위치로써는 오다 가문의 하급 무사를 양갓집으로 하고 있는 네네가 그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자의 동경이라는 것은 나이를 먹어도 성장하지 않는 듯하군
 
하고 네네는 오히려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귀족을 좋아한다고 하여도 무가(武家) 귀족 만으로 상급귀족[公卿]이나 친왕(親王)의 딸 등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상급귀족이나 친왕의 딸들을 후궁에 데려오려고 하지도 않는 것은 그런 귀족들을 히데요시가 아직 젊었을 적에는 본 적도 없었기에, 현실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의 성적인 동경은 젊은 시절 눈으로 스친 범위 안을 한계로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히데요시의 가까운 무가 귀족은 오다 가문[織田家]이었다. 그 즈음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지금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노부나가[信長]의 일족만이 최고의 귀족이었으며, 그 피를 잇는 여성이야 말로 히데요시에게는 공주님이라 불리기에 어울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 즈음 오다 가문에는 오이치[市]라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이 있었다. 미모를 따지면 가까운 지역에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의 용색을 가지고 있어기에, 히데요시도 맘 속으로는 높은 곳의 꽃이라도 쳐다보는 듯이 사모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오이치는 오다 가문에서 북() 오우미[近江]의 다이묘우[大名]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 정세가 변하여 아자이 씨는 오다 가문에 멸망 당하여고, 오이치는 딸들을 데리고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재혼하였다. 그 카츠이에를 히데요시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에 몰아넣고 멸망시켰을 때 오이치도 자살했다. 남겨진 딸들은 '우다이진[右大臣=오다 노부나가']님의 조카분들 이다'고 하며 소중히 다루고 교육시켰다. 그 세 명의 딸 중 장녀가 요도도노였다. 그녀를 오오사카 성[大坂城] 두 번째 성곽에서 살게 하였기 때문에 '니노마루도노[丸殿]'라 통칭되었는데, 그 즈음에 요도도노가 히데요시를 받아들였는지 어땠는지는 네네에게도 알 수 없었다. 네네가 추측하기에 요도도노가 히데요시를 그 침실에 받아들인 것은 큐우슈우[九州]에서 개선 후인 1588년 가을 즈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증거로 이 해 즉 1589 1월 히데요시는 갑자기,

 요도()에 성을 만들겠다

 라고 말을 꺼내 그 건축을 동생인 야마토 다이나곤 히데나가[大和 大納言 秀長]에게 명하였다. 요도는 야마시로[山城]에 있으며, 오오사카[大坂]에서 쿄우[京]에 올라갈 때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거기에 요도도노를 살게 하겠다고 하였다. 측실을 위해서 성 하나를 세운 예는 지금까지 히데요시에게 없었던 것으로, 그만큼 이 여성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굉장한 일이군요

 라고 네네는 그것을 들었을 때,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히데요시는 목을 움츠리며 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들었는가?”

 마치 남일을 딴사람이 들을까 두렵다는 듯한 그런 말투였지만, 얼굴만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이 애교로 가득 찬, 악의를 완전히 없애버린 웃는 얼굴에 네네는 몇 번이나 속아 넘어왔던 것일까? 어쩌면 반평생을 웃는 얼굴에 낚여서 보내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건 주인댁이시다

 라고 히데요시는 힘을 실어 말했다. 보통의 측실이나 여관(女官)들이 아니라 노부나가의 조카인 이상 주인댁이다. 주인댁이기 때문에 각별한 대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의리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주인댁인 것입니까?”

 노부나가에게서 보면 여동생의 딸이었다. 여동생의 딸까지 주인댁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주인댁이다

 히데요시는 근거를 들었다. 1583 4 23.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서의 옛 동료 시바타 카츠이에를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로 몰아넣었을 때, 카츠이에는 결국 싸움을 포기하고 자살하겠다는 뜻을 히데요시에게 통고하였다. 그때 토미나가 신로쿠로우[富永 新六郎]라는 가신을 히데요시의 진영에 파견하여,

 여기 세 명의 딸이 있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들이다. 귀하도 알고 있겠지만 3명은 돌아가신 주군과 같은 피를 잇고 있으니, 귀하에게 있어서도 주군의 혈통에 해당한다. 필시 귀하라면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귀하의 진영으로 보낸다.”

 고 입으로 전해왔다. 히데요시는 당연히 카츠이에의 희망을 받아들였다. 이 때 [주군의 혈통]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요도도노와 두 명의 여동생이 히데요시 주군의 혈통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 이미 공시되었고 공인되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네네에게 그 전말을 이야기하며, 그에 따라 요도도노에게 행하는 각별한 대우에 이유를 붙이고자 하였다.

 그건 당연히...

 죽은 노부나가인 것이었다.

 알겠습니다만

 하고 네네는 말하며 턱을 끌어서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이상 이 호색한을 몰아넣어보았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힘이 빠져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의 핑계로는 그녀의 이성도 감정도 납득은 할 수 없었다.
 
주군의 혈통이기에, 즉 그렇기에 밤마다 그 여성의 침실에서만 보내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라는 점을 언제나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죠우도노나 카가노츠보네도 그 점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들은 네네의 방에 놀러 올 때마다 자란 환경에 비하면 이외라 할 정도로 노골적이게 험담을 하였다. 물론 히데요시에 대한 험담이 아니었다. 요도도노에 대해서였다.
 
요도도노는 자신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다거나, 콧대가 높아서 히데요시님에게 대해서도 거만하다거나, 요도도노 소속 시녀(侍女)의 수는 밥짓는 여자까지 포함하면 500명은 될 거라는 거나, 또 요도도노는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卿局]나 쇼우에이니() , 예전 아자이 가문을 섬겼던 여자 낭인(浪人)들을 너무 모으고 계십니다 등, 그러 종류의 험담이었다.

 저런~저런~”

 네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안색도 바꾸지 않고 끈기 있게 잘 들어주고 있었다.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녀들에게 동조했다가는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이라는 자신의 입장과 체면을 손상시킬 것이다.

 우선은 화를 푸시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켜 보아 주세요.”

 라고 네네는 때때로 그녀들을, 그녀들의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달랠 수 밖에 없었다.
  1. 1583년. 정이위(正二位). [본문으로]
  2. 방춘(호우슌=芳春)에는 ‘아름다운 여성의 젊은 시절’이란 뜻이 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막부[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죽자 비구니가 된 그의 부인 호우죠우 마사코[北条 政子]가 아직 어린 쇼우군[将軍]의 정무를 대행했던 예가 있어, 이후 성주 혹은 다이묘우[大名]였던 남편이 죽고 후계자가 어려 미망인이 권세를 가졌을 때 ‘비구니 쇼우군’이라 일컬어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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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eomin61 BlogIcon 푸른하늘 2008.03.16 13: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너무 좋은 글이라 불펌해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 같네요. ㅎㅎㅎㅎ
    그런데... 이런 좋은 콘텐츠가지고 계시면서 네이버 블로그에 남아있을 필요가... 있나요?
    티스토리 같은데로 독립해 보지 그러세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6 15: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른하늘님 오셨군요 ^^
    방문 감사드립니다. 네이버에도 좋은 분들은 많으셔서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16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역시나 요도도노는 참 인기가 없으시군요(-_-;;) 뭐 제가 봐도 아버지의 원수에게 잠자리를 허락하면서 썩 건실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긴 힘드리라 생각은 했지만서도.. 아무래도 요도도노 그 개인의 자질의 문제이려나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6 2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싹싹했더라도 역시 미움받지 않았을까요? 이건 행동의 문제라기 보다는 질투라는 정신적인 문제이다 보니 그 때가서는 또 다른 것을 가지고 꼬투리잡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3.17 0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총애 측면에서는 마츠노마루나 카가씨가 더 뛰어났는데도 요도기미만 유독 두번이나 수태한걸 보면 역시 의심스럽지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7 2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治長)랑 칙폭해서 나은 거 같기는 하지만....
    히데요시는 그 전에도 (실존은 불분명하지만) 1남1녀를 가진 적도 있은 만큼 단정은 지을 수는 없는 것 같더군요.
    요도도노만 임신한 것도 그녀가 난자를 많이 배란할 수 있는 몸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현재도 임신 유도제 같은 것을 먹을 경우 쌍동이 낳을 확률이 높다고 하니까요).

  7. 이노센스 2010.02.13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도시이에의 아내인 마츠의 법명은 일본어로 호슌인이라 읽습니다. 난코보 덴카이처럼 승려의 이름이나 은거 이후의 자호는 대개 음독으로 읽는다는 이 점 참고하시면 더욱 매끄러운 번역이 되시리라봅니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 秀家]

1655 11 20일 병사 84.

1572~1655.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적자(嫡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섬기며 천하통일에 공헌. 분로쿠의 역[文禄の役][각주:1] 케이쵸우의 역[慶長の役][각주:2] 공을 세워 오대로(五大老)[각주:3]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의 주력이었다. 그러나 패하여 사츠마[薩摩] 도망 가지만 후에 잡혀서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 유배당했다.









영광에서 좌절로


 우키타 나오이에는 센고쿠[戦国] 효웅(梟雄)으로 공포의 대상이었 우키타 나오이에의 세자(世子), 1572년에 비젠[備前]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태어났다.
 시대는
신흥세력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선봉으로 하리마[播磨]로 진출해 온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세력과 츄우고쿠[中国]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패권을 놓고 싸우던 시기였기에, 그 사이에 낀 우키타 씨()는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 하던 때였다. 결과적으론 히데요시 쪽에 붙게 되어 히데이에는 불과 10살의 나이로 히데요시를 후견인 삼아 가독(家督)을 상속하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얻어서 지은 '히데이에[秀家]'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그의 일생은 토요토미 씨()의 번영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연표(年表)처럼 그의 영달 과정을 적어보면,

  1. 1585(13). 시코쿠[国]의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와의 전쟁에서 데뷔 전을 장식했다.

  2. 1587(15).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씨[島津氏]와의 전쟁에 종군하였고 그 싸움이 끝난 후에는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에 서임(敍任).

  3. 1589년(17세). 카가[加賀] 카나자와 성[金沢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어 있던 고우히메[豪姫]와 결혼.

  4. 1594(22). 분로쿠의 침공[각주:4] 때. 6군의 주장(主將)으로 바다를 건너 벽제관의 싸움에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등과 함께 명나라의 장수 이 여송군을 대파하였다. 이 때의 공적으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서임.

 식으로 항상 토요토미 정권을 지탱하는 중신으로 활약하여, 히데요시에게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을 때는 아직 26세의 청년 다이묘우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히데이에의 영광은 지속되지 않았다.


 1600 9월.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히데이에는 당연히 서군(西軍)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 6천 여라는 최대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방관을 하던 장수들이 많은 서군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서군이 패배함에 따라 히데이에는 명예나 지위를 모두 잃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히데이에는 미노[美濃] 카스카와[粕川] 골짜기에서 이틀간 떠돈 끝에 패잔병을 노리는 노부시[野武士][각주:5] 무리에게 포위 당하지만, 두목인 야노 고로우자에몬[矢野 左衛門]은 히데이에의 인품에 반하여 반대로 히데이에 일행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우키타 가의 가보(家寶)이며 히데이에가 차고 다니던 쿠니츠구[次]의 긴 칼[太刀]을 고로우자에몬이 토쿠가와 쪽에 바쳐서 히데이에가 죽었다고 위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엄중한 탐색을 피하면서 시간을 번 일행은 고난의 도피행 끝에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저택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처()인 고우히메와의 재회를 기뻐할 틈도 없이 히데이에 일행은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의지하여 도망쳤다.


종언의 땅,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


 히데이에 주종(主從) 오오스미[大隈] 키모츠키 군[肝属郡] 타루미[垂水]의 호족인 히라노 씨[平野氏]의 집에 숨겨졌다.


 그 후 1603 9월.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각주:6]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각주:7]의 조명탄원(助命嘆願) 덕분에 사형을 면한 히데이에는 스루가[駿河] 쿠노우 산[久能山]에 유폐(幽閉)되었, 그 후 3년 뒤인 1606 4 적자(嫡子)인 히데타카[秀高], 가신(家臣) 12명과 함께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히데이에 34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큐우후쿠[休福]'란 호()를 칭하고 있었는데 이 때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때 50만석 넘게 영유[각주:8]하고 있던 비젠[備前] 태수(太守)였기에 섬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섬의 대관[代官][각주:9]인 키쿠치 사콘[菊池 左近]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처() 고우히메의 친정 마에다 가문에서는 1614 이후 1년 터울로 생활물자가 보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여 섬사람들에게 보리 빌리지 못하면 생활할 없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패군의 장수가 되었을 죽음을 선택했다면 이러한 고생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이에가 유배생활을 50년이나 계속할 있었던 것은, 산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고 담담히 살고자 하는 인생철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655
11 24일. 84세로 사거(死去)했다.

하치죠우지마 섬[八丈島]에 있는 히데이에의 묘.

  1. 임진왜란. [본문으로]
  2. 정유재란.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5. 무장 농민집단. [본문으로]
  6.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사츠마번[薩摩藩]의 초대 번주(藩主). [본문으로]
  7. 토시이에[利家]의 첫째 아들로 히데이에의 부인 고우히메[豪姫]의 오빠. 카가 번[加賀藩] 초대 번주. [본문으로]
  8. 약 54만 7천석. [본문으로]
  9. 섬의 지방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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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espylaco BlogIcon 하루노부 2007.12.16 16: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 담아갑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7 0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신다고 하여도...링크만 가능케 한지라...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6.29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운의 무장이죠;
    오.. 그런데 꽤 미남상이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2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도 초상화만 본다면 가장 미남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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