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이에[秀家]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제일의 악모가(惡謀家)로 악명 높았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581년 나오이에가 죽기직전에 당시 오다 가문[織田家]의 쵸우고쿠[中国] 모우리 공략[毛利攻め]을 담당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히데이에(당시는 하치로우[八郎])의 후사를 부탁하여, 이에 응한 히데요시는 나중에 히데이에를 유자(猶子)[각주:1]로 삼게 된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름글자도 히데요시의 ‘히데[秀]’를 하사 받아 하치로우[八郎]에서 히데이에[秀家]로 바뀌었으며, 히데요시 덕분에 관위도 계속해서 승진하였다. 1594년 조선침략 중 공적을 세워 24살의 젊은 나이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 받아, ’비젠 츄우나곤[備前中納言]’으로 칭해질 정도였다.
 결혼 또한 히데요시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었다. 부인은 히데요시가 친자식처럼 기른 양녀 고우히메[豪姫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였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히데이에에 대한 애정은 친자식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도 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양자들 중 관백(関白) 히데츠구[秀次]는 자살을 언도 받았고, 히데아키[秀秋]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내졌지만, 이 히데이에만은 유자의 신분을 계속 보장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병상에 누워서 후사를 부탁한 오대로(五大老)[각주:2]의 면면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히데이에는 어렸을 적부터 내 손수 키웠던 사람이기에, 히데요리를 지켜는 것에 있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히데이에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첫 번째 신호는 집안싸움[御家騒動]이었다.
 히데이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은 꽤 있었지만, 영지(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 절반)를 다스리는 정치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과보호 상태에서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히데이에의 가신단 중 본거지에 있는 ‘본거지파[国許派]’와 수도권에 올라와 있던 ‘수도권파[上方派]’의 가로(家老)들 사이에 험악한 파벌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히데이에가 부인인 고우히메 휘하 가신으로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 파견된 나카무라 지로우베에[中村 治郎兵衛][각주:3]를 중용한 것이 본거지파를 자극했다.

 그래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공공연히 다툼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본거지파 가로들의 분노가 폭발, 나카무라를 주살해야 한다면 공공연히 병사를 일으켜 수도권으로 올라온 것이다. 필두가로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坂崎 出羽守]][각주:4], 토가와 히고노카미[戸川 肥後守][각주:5],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각주:6] 등이었다. 하지만 나카무라를 아낀 히데이에가 나카무라를 카가로 도망치게 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쿄우노스케 들은 이번엔 주군이 적이라며,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문 저택 앞에 바리케이트[逆茂木]를 치고 화톳불을 피워 전투준비를 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시가전으로 발전할 듯 하였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중재로 전투는 회피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커 우키타 가문의 본거지파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활약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히데이에는 서군의 부사령관 격으로 1만7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결전의 이틀 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군 제장들의 동요하는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그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있는 것이 든든하다’고 적었는데,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히데이에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초반의 활약은 훌륭했다.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7]가 이끈 우키타 군[宇喜多軍]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는 동군(東軍)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서군은 패했다. 히데이에는 전쟁터에서 후퇴, 해로(海路)를 타고 사츠마[薩摩]까지 잠행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끝까지 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당한다.

 이후 이 섬에서 살길 50년, 1655년 84세에 죽었다고 한다. 그 사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는 멸망하였고, 토쿠가와 쇼우군[徳川将軍]도 4대 이에츠구[家継]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1572년생. 히데요시[秀吉] 휘하로 시코쿠 정벌[四国征伐]
[각주:8],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조선의 역[朝鮮の役][각주:11]에 종군하였다. 전성기 때는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절반, 하리마[播磨] 일부를 합쳐 총 57만4천석을 영유했다.


  1. 양자와 같은 개념이나 양아비의 성(姓)과 재산을 상속받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3.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4와 5편에 등장하는 인물. [본문으로]
  4. 우키타 아키이에[宇喜多 詮家]. 히데이에와는 사촌지간(각각 아비가 형제) [본문으로]
  5. 토가와 타츠야스[戸川 達安]. [본문으로]
  6. 하나부사 마사나리[花房 正成] [본문으로]
  7.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5와 6편에 등장하는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을 말함. [본문으로]
  8. 1585년 행해진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羽柴秀長]의 시코쿠[四国] 침공.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합쳐 일본에선 이렇게도 부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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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7.18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의 글이시군요!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은 글에 첫 댓글을 남기는 것은 인터넷을 키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 감히 말하겠습니다.

    뭐랄까요, 어떠한 인물들의 삶에서 히데요시는 때론 냉혹하지만 때론 매우 따뜻한 사람의 양면성을 보이며 개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히데이에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을 떠나 정말로 히데이에를 사랑한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아마 히데이에의 착하고 순수한 성품이 순수한 일면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생각되네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에야스가 굳이 히데이에를 죽이지 않은 것은 마에다 가문과의 관계도 있지만 5대로 시절부터 그 역시 히데이에의 성품을 알고 있었던 것 역시 작용을 하지 않았나 감히 추측해봅니다. 물론 유배생활을 하게 된 히데이에는 자신이 50년을 더 살거라곤 생각을 못했겠지만 말입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시바 선생의 우키타 히데이에 #2에 이런 문장이 있습죠.
      " 히데요시 자신도 하치로우 모친의 몸을 알고 있던 만큼 어렴풋이 그렇게 착각할 법한 정념(情念)을 이 소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이라는 것은 원래 출산의 고통이라는 동물적인 체험이 없이, 단순히 그 아이의 모친의 몸을 알고 있을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히데요시는 히데이에 부친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 히데이에 모친 엔유우인[円融院]의 몸을 통해서 정말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을지도...

      저 개인적으로는 시바 선생의 평과 같습니다.
      이에야스가 생각하기에 히데이에가 주도적으로 큰 일을 벌일만한 그릇이 아니었기에(거기에 자신의 가문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도 있고), 그냥 유배로 끝나지 않았을지.
      (물론 성품이 뛰어난 것도 있었기에, 여러 다이묘우들의 조명탄원 운동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2. 맹꽁이서당 2011.07.18 18: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가의 사람들... 예전에 올리셨을 때 반갑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벌써 3년전이라니 세월 참 빠릅니다 ㅎㄷㄷ
    그나저나 우키다 가의 본거지파는 좀 어정쩡했겠네요. 아무리 도쿠가와를 위해 활약했더라도 세키가하라 이후 가문 자체가 날아간 상황이니.. 어디 다른 가문에 취직이라도 했을까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는 나름 자주 포스팅을 했었는데 말입죠.. 정말 세월 참 빠릅니다.

      주군의 가문 자체는 날아갔어도,

      사카자키(우키타 사쿄우)는 이와미[石見] 츠와노 번[津和野藩] 3만석(오오사카 공성전 후 가증 되어 약 4만 3000석).

      토가와 히고노카미(타츠야스)는 니와세 번[庭瀬藩] 3만석.

      하나부사 시마노카미(마사나리)는 5000석의 거물 하타모토[旗本]가 되었던 지라 나름 알아서들 출세했다고 보아야 합죠.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라고 하면 부인의 내조를 받은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즈토요가 아직 이에몬[猪右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던 하급무사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에 동국(東國)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馬)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오다 가문의 무사들은 누구나가 그 말을 보고 경탄하였지만 그런 만큼 비쌌기에 아무도 사질 못하였다. 카즈토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기는커녕 자신과 부인 둘의 생활조차 근근한 처지였다.
 카즈토요는 한숨을 쉬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노부나가님의 열병식 때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이를 곁에서 부인 치요[千代]가 듣고
있었다. 치요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그 말의 가격이 황금 10냥[각주:1]라는 것을 카즈토요에게 듣고서는,
 “그렇다면 이 돈으로 그 말을 사십시오”
 라고 말하며 화장대 밑에서 황금 10냥를 꺼내 카즈토요에게 주었다.
 카즈토요는 놀랐다. 지금껏 빈곤했는데 이런 큰 돈이 어디서 생긴 것이냐고 묻자 치요는,
 “이 돈은 제가 시집올 때 아버님에게 ‘평소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너의 남편에게 아주 큰일이 생겼을 때만 사용하거라’하면서 주신 돈입니다. 열병식이라면 주군 노부나가님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의 눈에 띌 좋은 기회겠지요. 어서 그 명마를 사시옵소서”
 라고 말하였다. 카즈토요는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그 말을 사러 갔다.
 
얼마 후 쿄우토[京都]에서 열병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그리고 카즈토요의 말은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노부나가도 경탄을 하여[각주:2], 이를 계기로 카즈토요는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각주:3]

 이 에피소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기술된 몇몇 사료에 실려 있기에 시대성에서 본다면 ‘좋은 부인의 모범’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여성을 이러한 유교론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치요는 센고쿠의 여성이 보여주는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정신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덧붙여 치요의 내조에 대해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카즈토요가 결혼하였을 때 카즈토요는
오우미[近江] 카라쿠니[唐国]에 400석[각주:4]영지를 얻었지만 빈곤하여 집에 도마조차 없어 치요는 되를 뒤집어 대신 사용하였다.[각주:5]
 또한 당시 카즈토요가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되어 히데요시에게 축성의 감독을 명령 받았지만, 가난하여 인부들의 야식도 대접하지 못하자 치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사 와서 카즈토요의 면목을 세웠다고 한다.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각지를 전전하였지만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용맹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1573년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토벌전 때 패주하는 아사쿠라의 군세를 추격하여 오다 군[織田軍]이 에치젠과 오우미[近江]의 국경에 있는 토네자카[刀根坂]에 이르렀다. 이때 아사쿠라 군의 후군[殿]에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이라는 활을 잘 쏘는 무장이 있어, 오다 군은 그 활 때문에 쉽사리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즈토요가 창을 꼬나쥐고 단숨에 돌격하였다.
 진에몬은 자랑하는 활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즈토요의 볼을 꿰뚫어 어금니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그대로 진에몬에게 달려들어 뒤엉켰고 아군의 도움으로 진에몬을 죽였다.

 어쨌든 카즈토요는 히데요시 아래서 순조롭게 출세하여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의 공으로 카케가와 성[掛川城] 5만석의 성주로 봉해졌다. 카즈토요가 카케가와에 봉해진 것은 칸토우[関東]에 봉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감시하며 만일의 경우가 있을 때는 이에야스를 방비하려는 히데요시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자신이 배속되어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난행을 이유로 할복을 명령 받은 다음부터는, 오히려 이에야스의 수완에 장래를 맡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카즈토요는 히데츠구 사건의 전말을 보고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을 느끼게 된 것이다.

 1600년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을 위한 이에야스의 군세 속에 카즈토요의 모습이 있었다.
 7월 24일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 이르렀을 때, 카즈토요에게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치요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오오사카 측의 봉행[奉行]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의 이름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과 자기들 편에 참가를 요청하는 편지 한 통, 거기에 카즈토요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해 주십시오, 제 몸은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이 두 통의 들어간 상자의 봉인을 뜯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다.
 사실 카즈토요는 이것과는 따로 또 한 통의 밀서를 치요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령인 타나카 마고로쿠[田中 孫六]의 삿갓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치요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카즈토요는 다 읽은 뒤 곧바로 불살랐지만, 추측하건대 편지가 담긴 상자의 봉인을 풀지 말고 그대로 이에야스에게 제출을 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려, 이미 넘어가버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한 마디[각주:6]로 ‘미츠나리 타도’가 결정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카즈토요는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상경하는 군세를 위해서 도중에 있는 제 카케가와 성을 군량과 함께 전부 바치겠습니다. 거기에 인질도 바쳐 저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각주:7]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 성을 가지고 있던 무장들도 전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카즈토요의 공은 단번에 여러 무장들 중 눈에 띄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결전 때 카즈토요는 그다지 전공이 없었음[각주:8] 에도 이에야스는,
 “카즈토요가 오야마에서 한 말이 세키가하라 승리의 초석이 되었다”
 며, 영지배분 때 일약 토사[土佐] 전부인 24만석[각주:9][각주:10]을 주었던 것이다.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1545년 오와리[尾張] 출생. 1560년 미노[美濃] 마키무라 성[牧村城]의 성주 마키무라 마사토모[牧村 政倫], 이어서 오우미[近江] 세타 성[勢多城]의 성주인 야마오카 카게타카[山岡 景隆]를 섬겼다고 한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종군하여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5000석에 봉해지고 1년 후 2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카케가와[掛川] 5만석에서 토사[土佐] 24만석이 주어졌다. 1605년 61세로 죽었다.

  1. 당시 보통 말은 1냥, 좋은 말은 5냥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노부나가가 경탄한 것은 말 때문이 아니다. 노부나가는 카즈토요가 치요가 건네 준 돈으로 말을 산 것을 듣고 말하길 “동국 제일(東国第一)이라는 말을 상인이, 천하에 오다 가문만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도 먼 내 영지까지 끌고 와서 팔려 했는데도 아무도 사지 않았다면 안타까운 일이며 이는 노부나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그러던 때 오랫동안 낭인이었다는 카즈토요가 가난했음에도 말을 샀다. 무사의 마음가짐은 이래야 함이다.”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당시 열병식이 열린 시기는 서력 1581년. 당시 카즈토요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나 츄우고쿠[中国] 등에서의 활약으로 최대 2700석의 신분이었다. 당시 황금 10냥으로 대략 쌀을 140석 정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치요하고 카즈토요가 과소비하지 않는 한 살 수 있었단 이야기. 무엇보다 1581년 열병식 때 히데요시와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 즉 카즈토요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에 바빠 참가를 아예 못하였고, 노부나가 역시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4. 1573년 아사쿠라 침공전[朝倉攻め] 때 에치젠[越前]의 호걸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을 부상 당하면서도 쓰러뜨린 공적으로. [본문으로]
  5. 링크는 당시의 것이 아니다. 링크의 것은 1806년 후지나미 신사[藤並神社]에 봉납된 모조품.실물은 2차대전 때의 공습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크기는 종횡17cm * 17cm에 높이 8cm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대충 '나이 어린 히데요리가 이에야스 토벌을 명령 할리 없다. 이는 미츠나리가 사사로이 거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도용 당한 타다우지는 카즈토요에게 “평소 성실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면서 웃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당시 카즈토요의 부대는 난구우 산[南宮山]에 진을 친 모리 가문[毛利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선 후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모우리 가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즈토요의 부대도 피 흘리지 않았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9만 8000석. 나중엔 1605년 카즈토요가 제출한 영지 목록에 20만 2600석으로 이후 이것이 막부 공인이 됨. [본문으로]
  10. 24만석이 나온 숫자는, ‘쵸우소카베 영지조사장부[長宗我部地検帳]’에 토사[土佐]의 농작면적이 2만 4000정(町)으로 나와있는데 단순히 1반(反=1/10정(町))을 1석(石)으로 하여 24만석이 속설로 된 것으로, 1705년 번(藩)이나 다이묘우[大名], 하타모토[旗本] 등을 다룬 백과사전격인 '무감(武鑑)'부터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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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21 18: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칠 전 텐쇼대지진에 관해서 이도저도 아닌 글을 쓴 적이 있습지요.

    포커스는 우치가시마 가문에 맞추었지만 카즈토요도 만만치 않은 슬픔을 간직한 인물이라서 언제나 이 인물의 이름을 볼때마다 마음이 찡합니다.

    전혀 개연성없는 이야기지만 실용적인 카즈토요와 치요의 사고방식이 메이지를 이끈 도사번사들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나저나 야마노우치와 야마우치는 일본에서 모두 맞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이 맞습니까? '노'의 사용이 너무나도 말이 많아서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21 1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커헉...크롬은 역시 제 블로그와 상성이 안 맞는군요. 댓글 썼더니 이상한 글자나 나오고....--;

      사가미님의 블로그는 rss로 구독하고 있는데 1월달 이후로 없으시던데...딴 곳에 쓰신 것인가요??

      그쵸..단 하나 뿐인 딸이 죽었다고 하니...

      카즈토요가 쵸우소카베[長宗我部]의 토박이 가신들은 郷士, 외부에서 데리고 온 가신들을 上士로 나누어 에도시대 내내 차별했기에 그 불만이 쌓여서 도막(討幕)과 근황[勤皇] 사상으로 치달았다고 하더군요. 카즈토요도 화합의 정치(...어라 어느 나라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군요)를 하였다면 사카모토 료우마[坂本龍馬]라던가 타케이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 같은 이는 안 나왔을 지도 모릅죠.

      저도 그게 좀 그렇더군요.
      위키에는 '야마우치 카츠토요'라 되어 있더군요.

      에도시대 막부의 명으로 각 가문의 족보를 제출하게 해서 만든 寛政重修諸家譜에는 山内를 '야마우치'라고 쓰여 있다고 하네요.

      一豊도 여러 정황 증거로 보건데 '카츠토요'라고 합니다.

      다만 제가 가진 책들은 대부분이 '야마우치 카즈토요'로 되어 있으며, 공명의 갈림길 제작 시 NHK가 '一豊'를 야마우치 가문에 어떻게 불러야 하냐고 묻자, 널리 알려진 대로 해 주세요...라고 했다고 하니, 그냥 무난하게 '야마우치 카즈토요'로 괜찮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21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곳에는 쓴다는걸 까먹었었군요. 졸작이지만 한번만 읽어주신다면 황공하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21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 읽었습니다.

      사가미님처럼 직접 센고쿠 시대의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가신들을 이끌고 말에 올라 에도[江戸]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히고[肥後] 54만석의 다이묘우[大名] 카토우 키요마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에도 시민들 사이에 화제를 되었다.
 키요마사는 신장이 6척[각주:1]을 가볍게 넘고[각주:2]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입이나 턱 주위에는 수염이 무성하게 덮인 대장부였다. 허리에는 1m7cm의 큰 칼[大刀]을 차고, 어깨높이가 180cm 넘는 괴물같이 거대한 말에 올라타 있었다 한다. 무엇보다 당시의 말은 어깨높이 120cm가 보통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키요마사에게서 고(故)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직속 장수, 무공이 뛰어나 ‘칠본창[각주:3]’이라는 이명을 얻은 무장, 임진왜란 시 일본의 맹장에 걸맞은 보습이라 보고 나중에는 유행가까지 만들었다.

에도 깡패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만은 피하시오
江戸の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에도 깡패 모가리[江戸のもがり]’는 당시 에도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공갈 깡패를 말하며, ‘밤색 제석[帝釈栗毛]’는 키요마사의 애마를 말한다. 안하무인인 깡패라도 키요마사가 타는 말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리라.

 키요마사는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도 일화가 많은 사람인데, 특히 조선에서 호랑이 퇴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십문자 창을 휘둘러 호랑이의 숨을 끊었는데 그때 호랑이는 창의 한쪽 날을 물어서 뜯었다는 이야기인데[각주:4], 이는 에도 시대 말기의 창작으로 처음 실린 책에서 키요마사는 철포를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키요마사의 통칭은 토라노스케[虎之助]로  범 호(虎)자가 들어간다.

 키요마사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 태생이라고 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키요마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모친(오오만도코로[大政所])과 사촌지간이라고 한다[각주:5]. 그런 연으로 키요마사는 어릴 적에 당시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였던 히데요시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가신으로서의 키요마사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데요시 자신도 노부나가[信長]가 아니었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정도로 미천하였기에, 친척이나 히데요시 가문을 대대로 섬긴 가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키요마사와 같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닿는 사람을 교육시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런 만큼 키요마사의 출세도 빨랐다.

 1576년 15살 성인식이 있던 해에 170석을 받았으며[각주:6], 1581년 6월 20살에 톳토리 성[鳥取城] 공성전에서 데뷔전[初陣]을 치르게 되는데 키요마사는 정찰 나갔다가 공을 세웠고,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각지를 전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칠본창(七本槍)라 일컬어지는 전공을 세워 일약 3000석[각주:7]이 주어진다. 지위도 철포 150정, 히데요시가 파견하는 무사[与力] 20명을 휘하에 둔 중급 장교[物頭]로 승진하였다. 이 정도되면 당당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례적인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덕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키요마사 자신이 무장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도 키요마사는 히데요시를 따라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등에 참전하여 1588년에는 일거에 히고[肥後] 절반이 주어져 드디어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나머지 반을 하사 받은 것이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1592년 조선 침략[각주:8]에서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선봉에 임명되어 서로 경쟁해 가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곧바로 의병(義兵)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하자 전황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쟁정책에 관해 대륙정복론자인 키요마사와 화평론자인 코니시 유키나가 사이에는 자연스레 반목이 생겨, 결국에는 작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둘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위 무공파와 문치파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키요마사의 신상에 위기가 생긴다.

 조선에 가 4년째인 1595년.
 갑자기 히데요시에게서 귀국을 명령 받은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국명령은 일본군의 감찰[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작성한 키요마사의 행동보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시다의 보고는 전부 키요마사의 방자한 말과 행동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명령에 따라 키요마사는 후시미[伏見]로 돌아왔지만, 히데요시는 면담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키요마사는 다섯 행정관[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히데요시의 화를 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나가모리는 미츠나리와 화해하기만을 권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키요마사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냐며,
“하치만[八幡][각주:9]도 굽어 살피소서, 지부[治部][각주:10]놈과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그 놈은 조선에서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주제[각주:11]에 남의 뒤따마만 까며 끌어내리려고만 하는 더러운 놈이다. 아무리 소인이 타이코우[太閤[각주:12]]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고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지부 놈과는 화해는 하지 않겠소.”
하며 분노하였다고 한다.

 키요마사의 근신생활은 반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던 1596년 7월. 킨키[近畿] 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 속설에 따르면 키요마사는 근신 중인 자신의 처지도 잊고 수하 200여를 이끌고 후시미 성에 와서 히데요시를 보호하며 성을 수비하였다. 이것을 안 히데요시도 노여움을 풀고 키요마사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각주:13] [각주:14]. 후세 연극 등에서 ‘지진 카토우[地震 加藤]'라 불리게 되는 명장면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1597년. 조선으로 재침공. 즉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키요마사는 또다시 출정하여 이 해의 막바지에 가장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유명한 울산성(蔚山城) 농성전이다.
 엄동의 12월[각주:15]. 4만4천이라는 명나라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키요마사는 철저항전 하였다. 성 안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명의 전법은 장기 포위전[兵糧攻め]이었다. 성 안에 있던 오오코우치 히데모토[大河内 秀元][각주:16]는,
 “매일 행전(行纏)[각주:17]이 흘러 내렸다. 처음엔 고쳐 맸지만 나중에 뭔가 이상하여 행전을 떼어 보자 다리에 살이 하나도 없이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 기록하였고, 명나라 기록에도 - 일본군은 종이를 먹고 오줌으로 갈증을 해소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듯이 성 안 일본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인해 동상에 걸리는 사람,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러한 지옥 속에서 키요마사도 죽음을 각오했는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등 여러 장수들에게 보낸 편지에,
 “만약 낙성된다면 이런 모습들을 타이코우[太閤] 님에게 보고해 주길 바란다”
 고 썼다. 모우리[毛利], 나베시마[鍋島], 쿠로다[黒田] 등 여러 장수의 구원이 제시간에 도착하여 조선과 명의 군사들은 포위를 풀고 철퇴하였다.

 고군(孤軍)이면서 항전을 계속한 키요마사에게 적인 명나라 측도,
 “오랑캐[酋] 중에서는 가장 사납고 굳세다”
 “재능은 유키나가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며 절찬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어 길었던 조선에서의 싸움도 끝났다. 키요마사에게 남겨진 것은 두 번에 걸친 전쟁 중에 한층 더 깊어진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 등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이런 키요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키요마사는 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 측에 서서 싸워, 코니시 유키나가의 거성 우토 성[宇土城]과 속성 야츠시로 성[八代城]을 공략. 전쟁 후 히고[肥後] 전부를 하사 받았다[각주:18]. 천하의 명성 쿠마모토 성[熊本城]의 축성에 임한 것은 다음 해인 1601년이었다.

 토쿠가와의 시대에 들어서도 키요마사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었던 듯, 토요토미 가문 존속을 위해, 1611년 히데요리[秀頼]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대면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쿠마모토로 돌아가던 도중 병에 걸려 귀성한 뒤 얼마 지나 죽었다. 그 죽음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기에 독살설도 유포되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
1562년 오와리[尾張] 에치 군[愛智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戦] 후
오우미[近江], 야마시로[山城], 카와치[河内]에 조금씩 3000석을 하사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여 히고[肥後]의 반인 25만석을 영유하였다[각주:19].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동군에 속하여 히고 54만석을 하사 받았다. 축성, 치수, 간척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1611년 6월 24일 죽었다. 51세.

  1. 6척3촌. 약 191cm. [본문으로]
  2. 5척3촌(161)이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때문에 키요마사의 동상에 있는 창은 십문자창이 아니라 "ㅓ"자형 창이다. [본문으로]
  5.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는 그렇게 실렸다 한다. [본문으로]
  6. 문서로 남아 있기로는, 1580년 히데요시에게서 하리마[播磨] 내에 120석을 받은 것이 초견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미[近江] 내에 1800석, 카와치[河内] 내에 1097석, 야마시로[山城]에 50석...으로 약 3000석. [본문으로]
  8. 임진왜란. [본문으로]
  9.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10. 지부쇼우유우[治部少輔]. 이시다 미츠나리의 관직명. [본문으로]
  11. 행주산성에 참전하여 부상당했다. [본문으로]
  12. 타이코우[太閤]는 칸파쿠[関白]직에서 물러난 사람을 이르는 경칭. 즉 히데요시. [본문으로]
  13. 당시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있기에(직접 지켰다면 안부 편지 같은 것은 안 쓸테니), 실제로 달려가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4. 실제 키요마사 근신이 풀리는 데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주선 덕분이라 여겨지고 있다. [본문으로]
  15. 음력. [본문으로]
  16. 일본측에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말을 기록한 "조선 이야기[朝鮮物語]"의 저자. [본문으로]
  17. 정강이에 차는 각반....(저는 행전보단 각반이 익숙합니다만 '행전'으로 쓰라고 하네요) [본문으로]
  18. 단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19만~25만석까지 다양. 개인적인 추측으로 19만석은 키요마사에게 주어진 것이며, 3만석은 키요마사 편제 하의 히고 지역 호족[国人], 거기에 히고[肥後] 안에 있던 히데요시 직할령[蔵入地] 3만석을 키요마사가 대관(代官)이 되어 관리한 것을 포함하여 25만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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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2.18 15: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이전에 쿄토 갔을적 니죠성에 들른적이 있었는데 이사람이 단검품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추워서(1월-_-..)였을지도 모르겠다 싶긴 했는데-_-.. 아무래도 히데요시 코붕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던 덕일지 모르겠다 싶네요.

    뭐 아무튼 숙적에서의 이미지는 정말이지 聖(;) 아우구스티노 유키나가(-_-..)의 반대역이어서 그런지 영 안 땡기던데 말이죠. 역시 창칼드는 캐러들이 제 취향은 아닌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8 2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죠우 성[二条城]하면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 대정봉환한 장소 - 더군요.

      이외로(??) 키요마사는 재정과 무역에 밝은 인물이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이름뿐이긴 해도 관직명이, 지금의 재무부 관료인 '카즈에노카미[主計頭]'. 창칼 뿐만이 아닌 듯 하더군요.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2.18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쿠가와나 오다의 사천왕 같은건 나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데
    칠본창은 왠지 창이 아니라 방패막이 7명 느낌이 들더군요. 히데요시 출신 때문인가...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8 2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스케일이 달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

      가령 오다나 토쿠가와의 사천왕은 그 가문 전체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이고, 칠본창 같은 경우 단지 일개 전투에서 공적을 세운 애들 뿐이니까요.

      히데요시의 칠본창은, 오다 가문의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 七本槍]'이나, 토쿠가와 가문의 '카니에 칠본창[蟹江 七本槍]'과 비교해야 할 듯 싶군요. 히데요시도 저 7이란 숫자에 맞추어 칠본창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요.

  3. 朴先生 2009.12.19 15: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에이 게임에서는 왠만한 무장들이 통솔, 무력이 90이상이면 지력이나 정치는 거의 40이하로 버리는 편이지만 키요마사는 70정도는 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태합에서는 스킬은 차지하고, 대략 용장형, 검호형, 책사형, 내정형, 먼치킨형, 그냥 병X...정도로 구분하지만 키요마사는 먼치킨급은 아니나 내정에도 그런대로 쓸만하니...

    그냥 '변태'같습니다.

    불현듯 두산 베어스의 변태 스탯 '고영민'선수가 떠오르네요.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9 1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컴퓨터 바꾸면서 태합 설치를 않해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키요마사는 꽤 쓸모가 있었던 듯한 기억이 나는군요.

      ps;요즘 야구를 안 봐서 고영민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거기다 좋아했던 팀이 LG인지라 두산하면...아이고 배 아퍼!!! 라는 느낌이 먼저 드는군요.

  4. 朴先生 2009.12.20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산의 2번 타자로 타율은 높지 않지만 출루율이랑 장타율은 높고 갖가지 허슬 플레이에 자기 위치도 아닌데 어느샌가 달려가 플라이 볼을 잡아내는 이상한 선수입니다.

    저도 LG팬입니다. 몇년째 하위권을 맴돌아 직접 보러갈 기분도 안나지만요. 가면 실망만 잔뜩하고;
    잠실 가본지도 오래됐네요..
    내년엔 가을에 야구장 갈 수 있게되면 좋겠습니다 제발 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엘지가 유지현 내칠 때 마음이 어느 정도 떠났습죠. 인위적인 세대교체가 얼마나 팀에 악영향을 끼치는지 좋은 견본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2.20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인 전국시대 3대 수수께끼라면 히데요리의 아버지(생물학적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 그리고 '기요마사의 키'가 아닐까 싶습니다. 투구로 만인을 속인 것인지 아니면 진짜 거인인 건지. (만약 191cm라면 야마가타와는 최대 70cm까지 차이나는군요!!)

    기요마사는 히데요시가 아껴서 키워낼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사노리, 미쓰나리, 요시쓰구, 요시아키라, 나가마사, 기요마사. 히데요시의 손을 거친 장수들은 본바탕도 좋았겠지만 히데요시의 능력이 십분 발휘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 능력이 어찌 후손을 보는 쪽으로는 없었는지.) 언급한 사람들 중 나가마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문이 박살나버렸지만. 그러고보니 다다히로의 정확한 가이에키 명분은 투서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인(당시 조선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위키디피아에서는 '쾌지나칭칭나네'가 기요마사 덕분에 탄생했다는 소개도 있구요.) 너무 작전수행을 열심히 한 덕분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인물이 되어버렸다는 점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_-

    수능도 지나갔는데 언젠가 시간이 되면 구마모토와 나고야를 가보고 싶습니다. 기요마사의 유품인 우아한 명성들은 저에게 무슨 얘기를 해줄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가미님의 미스터리에 대한 제 주관적인 시각은....

      - 히데요리의 애비는 히데요시가 맞다고 생각하며,

      - 미츠히데의 모반은 노부나가의 시코쿠[四国] 정책 변경에 따른 아케치의 부하장수 사이토우 토시미츠[斎藤 利三] 주도로 일어난 일(....심하게는 미츠히데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죠)

      - 키요마사는...음.... 어떨까요. 조선왕조실록을 다 살핀 것은 아니지만, 키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평범한 편은 아닐지...

      타다히로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무엇보다 키요마사가 가상의 적으로 막부군에 대비한 영내 경영을 펼친 것이 가장 크지 않을지...나중에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가 당시 최강이라 일컬어 지던 사츠마 군[薩摩軍]을 이끌고도 함락시키지 못한 쿠마모토 성은 물론, 정부군이 큐우슈우[九州]로 내려오자 그에 맞써 싸운 타하라자카 고개[田原坂]조차 키요마사가 히고 번주일 때, 토쿠가와 막부가 쳐들어 왔을 때를 대비해 인공적으로 만든 곳이라고 하니까요. 그런 모습들이 막부를 불안케 하지 않았을지...

      조선에서 미움 받는 것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술책인 듯 싶습니다.(황정욱 손자의 팔다리를 자른 막장짓도 있습니다만).
      거기에 일본군의 대명사로 유키나가, 키요마사로 지칭되며 코니시는 약간 선역, 키요마사는 악역으로 대표되지 않았나도 싶습니다.

      부럽군요. 여행 많이 다니면 좋습죠. 개인적으로 여행은 목적지로 가능 동안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아 싫어하는 편입니다만, 나이 먹고 보면 여행 많이 안 다닌 것이 좀 아쉽더군요.

  6. 정동희 2009.12.21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작년인가 구마모토성 보고 왔는데... 가이드 말이... 거의 대부분 조선 포로들이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전국 시대 3대 궁금증은 저도 참 궁금하네요...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자가 맞다면... 요도기미하고는 원숭이 아저씨가 유달리 궁합이 잘 맞었던 모양이군요
    미츠히데의 모반 건은... 정말 의문이에요... 계획적이라고 보기엔 그 뒤의 행동이 너무 허술하고
    충동적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큰 일을 저질렀고...
    여태까지 원한설, 조정음모설 등등은 들어 봤는데, 사이토 도시미츠에 의한 설은 처음 듣네요
    발해지랑님 가능하시면 좀 자세히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미츠히데 - 죠쇼카베, 히데요시 - 미요시, 소고 정도 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에 관해서는 무지에 가까운지라...
      근데 가이드하셨던 분은 일본분이셨나요?

      개인적으로 쿠마모토 성이 조선 포로로 만들었다는 말은, 모 방송에서 한국 여학생이 그런 식으로 말한 뒤에 한때 화제가 되긴 했습니다만, 아직 제가 책같은 매체로 접한 적은 없습니다.

      요도도노가 다산이 가문 특기인 오다 가문 출신인 점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컥~ 또 쓸데없는 말을 해서 독박쓰게 생겼네요 ^^;
      미츠히데-쵸우소카베, 히데요시-미요시까지 아시면 조금만 더 파고드시면 "아~ 이 자슥이 기껏해야 이런 걸로 저런 말을 하는구나"라는 것을 아시게 되지 않을지....댓글로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닌 것 같군요. 나중에 따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이건 용서를...

      ps;정동희님이시라... 혹시 전클 유키무라..님???

    • 정동희 2009.12.21 13: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전클 유키무라 맞습니다
      전클의 추억도 이젠 가물가물 하군요
      가이드는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본사에
      대한 지식이 많더라구요
      저도 근거는 없고 그냥 들은 얘기 입니다

      히데요리의 경우는 저도 히데요시 친자쪽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상하게 애비를 너무 안 닯은 것 같아서요

      미츠히데 모반건은 책이나 뭐 인터넷을 뒤져 봐야겠네요
      근데 전국사에 대한 흥미도 이젠 바쁜 생활에 파묻혀서...
      예전처럼 관심사 비슷한 사람들 만나서 얘기하면 재미 있겠지만

      그냥 이래 저래 먹고 사는 고민 만으로도 정신 없네요

      발해지랑님처럼 좋은 글 올려주시는 분들 덕분에 이 약간의 취미나마 이어가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2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전클의 나오이에[直家]였다는 것을 알면서 존댓말 쓰시는 겁니까? ....라고 해도 못 만난지 십 년 가까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긴 하겠군요.(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대학로 였던 듯 ^^ )

      가이드에 관해서 일본인이냐고 물었던 것은...
      요 몇 해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조선족 관광가이드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세종대왕이 한글을 화장실에서 일보다 창틀보면서 만들었네 어쩌네 하고, 뭐든 중국기원설을 펼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듯이 저 개인적으로는 관광가이드를 신뢰하기는 좀 그렇더군요.

      히데요리와 히데요시는....
      어렸을 적에 뭘 먹고 자랐느냐에 관한 차이 아닐까요? 어렸을 때 험하게 자란 히데요시와 그에 반해 온갖 산해진미를 먹고 자란 히데요리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마치 현대 미국의 비만인이 50%가 넘는 것 처럼요.

      미츠히데 모반건은 언젠가 시간이 되면요..^^;

      예전처럼 언젠가 함 봐요. ^^

    • 정동희 2009.12.22 1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클의 나오이에님...
      아아 솔직히 기억이 안나네요
      사실 요즘은 어제 일도 기억이 잘 안나기 때문에
      만나뵈면 저도 좋죠

      전 결혼해서 방배동에 살고 있습니다
      회사는 분당 정자동으로 다니고 있구요
      월급쟁이 하면서 마누라 눈치 보면서
      근근히 살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2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컥~ 설사 기억이 안나셔도 쫌 기억난다고 좀 해 주시지... 저렇게 친한 척했는데.

      하긴 10년 전에 두세번 보았을 뿐이니 기억 못하시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

      신년이 되면 함 보자구요!(솔직히 전 굉장히 반갑거든요 ^^ )
      만나는 곳은 저희 집과 동희님 집 사이인 영등포 근처로 해서요.

    • 정동희 2009.12.23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제 기억력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그간 장복한 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년 이맘때 결혼하고 하도 많은 일이 생겨서
      기억용량이 많이 오버된 모양입니다

      그래도 기억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신년에 한 번 뵙죠
      결혼하고 나니 제 스케줄이 맘대로 조정이 안되서요
      암튼 언제든 시간 날 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연락은 이 블로그에 댓글 다는 걸로 하겠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3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결혼하지 않았지만 저도 주체적인 스케줄 잡기가 어려우니 서로 협의해 나가자구요.

  7. 朴先生 2009.12.22 01: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꾀돌이 유지현.. 저 개인적으로 KBO 최고 유격수는 아니었지만 LG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재치있는 플레이에 훌륭한 작전수행능력, 신바람야구는 유지현 타석부터였지요. 저도 LG에서 가장 좋아했던 선수였드랬습니다. 뭐 요즘엔 주루코치로 가아끔 보이더라구요. 뜬금없지만 결론은 LG를 '순페이'가 말아먹었다는 겁니다... 뭐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선수의 은퇴나 트레이드가 이순철 감독 탓은 아니고 프런트에 의한 압박이란 말도 있지만요. 아무튼 인위적인 세대교체가 악영향을 끼쳤다는데는 저도 동감합니다. 2004년부터 막장으로 치달아 2006년엔 팀사상 처음으로 꼴찌.. 2008년에 또 꼴찌..

    어쩌다 화제가 키요마사에서 LG로... 아... 고영민... 변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2 1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병규가 와서 이제 아는 선수도 생겼으니 이번 년도는 함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한때 엘지는 유일하게 꼴찌 경험이 없던 팀이었는데, 진갑용 때 2차1순위 얻겠다고 두산이랑 꼴찌 다툼하며 팀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그러게요. ^^ 이제 야구 이야기는 여기서 끝!!!

五.


 얼마 안가 츠루마츠[鶴松]가 죽었기에, 히데요시는 그 비탄(悲歎) 속에서 외정(外征)의 지령을 내렸다.

 -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서 미쳤나!?

 토자마[様][각주:1]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등은 어떠한 필연성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대규모 외정에 대해 뒤에서 그렇게 욕을 퍼부었다.

 대다수 다이묘우[大名]의 마음 속도 비슷했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뿐만 아닌 거의 대부분의 다이묘우는 봉토(封土)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영민(領民)과는 아직 친숙하지 않았고, 또한 전란(戰亂)이나 검지(地)[각주:2]로 인해 받은 상처에서 백성들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막대한 외정의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라는 것인가?

 '봉행(奉行) 녀석들이 부추기고 있다.'

 라는 소문이 네네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봉행들이 히데요시라는 노망난 독재자에게 슬픔을 외정으로 달래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 네네는 생각했지만,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라는 곳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은 미츠나리, 나가모리[長盛], 마사이에[正家]라는 오우미[近江] 사투리를 사용하는 재간꾼들이 히데요시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 그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 내의 대소사, 인사, 천하의 형법(刑法)과 같은 것들을 집행하고 있었다. 이 현상을 네네 주위에 있는 여관(女官)들의 여자의 눈으로 보면,

 - 요도도노[淀殿]는 요즘 권세(權勢)가 있으시다.

 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근래 토요토미 가문은 오우미[近江] 사람들에게 독차지 당해 있었다. 네네가 돌봐주고 있는 오와리[尾張] 계열의 다이묘우들은 중앙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질 못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政所]가 아닌 요도도노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이 가문 내에서 자주 화제(話題)가 되었다. 매일 네네가 듣는 화제는 모두 이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우미 파벌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여러 다이묘우,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 거기에 측실이나 여관들까지도 네네에게 와서는 울분이나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은 네네에게 매달리는 것 이외에 기댈 만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도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 측실의 험담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네네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도도노는 그 특출한 미모를 제외하면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자질을 가진 여성이며, 단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권세욕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나서서 정치 세력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만약 나쁘다고 한다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옛 아자이 가문[浅井家]에서 온 늙은 시녀들이었다. 이 무리들이 요도도노가 츠루마츠의 [생모]가 된 것을 기회로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대항하고자 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시작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봉행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미츠나리 등도 요도도노를 추대함으로써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토요토미 가문의 중추에 계속 자리잡고자 하고 있었다. 그런 소위 주변 인물들이 요도도노를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가고자 함에 틀림이 없었다. 네네는 그렇게 보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나쁜 것은 그들이었다.

 

 네네는 마음속 깊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무리들은 히데요시님이 돌아가신 다음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츠루마츠와 요도도노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미츠나리 이하 오우미 파벌의 다이묘우를 측근으로 거느린다.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는 후퇴하고 그녀를 의지하고 있던 창업(創業)의 공신들은 힘을 잃어 갈 수밖에 없다. 네네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오와리 출신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꿈에서도 신음 소리를 낼만한 미래상일 것이다. 물론 일이 일인만큼 모두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 누구도 이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1592 4.

 외정군은 조선에 상륙하였다.

 제1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2군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선봉으로 하여 각지의 성을 함락, 앞을 다투며 북상하였다.

 당초는 파죽지세라 할만 했지만, ()나라의 대군이 정면의 적이 됨에 따라 진공(進攻)은 정체되고 각지에서 부대가 고립되어 때로는 고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유키나가와 키요마사는 사이가 나빠 서로 돕기는커녕 무엇이건 서로 으르렁거렸기에,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거기에 파고들어서는 반격하였고, 이 때문에 아군의 작전에도 자주 차질을 빚었다.

 

 이런 종류의 사태를 조절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관으로 히데요시는 군감(軍監)이라는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 直高], 오오타 카즈요시[大田 一吉] 등 작은 영지(領地)의 다이묘우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오우미 파벌이었으며, 그런 군감의 총책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미츠나리는 조선에 상주(常駐)하지는 않고 전선을 시찰하고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곁에서 현지의 군감들이 보내오는 보고서를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이런 군감단(軍監)의 면면들은 이시다 당()이었기 때문에 유키나가에게는 좋고 키요마사에게는 냉엄했다. 때로는 키요마사의 언동을 무뇌아처럼 보고하였다.

 예를 들면 평화 교섭 단계에 들어갔을 때, 키요마사는 토요토미의 성()을 하사 받지 않았음에도 명나라 사자에게 보낸 공문서에 '토요토미노 키요마사[豊臣 ]'라고 서명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또한 명나라 사자에게

 

 "당신들 대명인(大明人)은 코니시 유키나가라는 자를 일본국의 무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저것은 무사의 무자도 모르는 사카이[堺]의 상인(商人)이다. 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키요마사의 언동이 조선에 있는 군사들을 혼란 시키며,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히데요시는 준공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받았다.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키요마사라면 그럴 것이다, 곧바로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급사(急使)가 조선으로 건너가 키요마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다.

 키요마사는 자신의 군단을 전선에 남겨두고 장교 50, 일반 병사 300명이라는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서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세토 내해[瀬戸海]를 거쳐 오오사카[大坂]에 직행한 후 후시미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라도 내알(內謁)할까 생각하였지만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몸이기에 그것도 불가능하였다. 키요마사는 여장(旅裝)도 풀지 않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사람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저택을 방문하여 성안의 사정을 듣고자 하였다.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놈이 꾸민 참언(讒言), 덫일 것이다. 필시 그럼에 틀림이 없다

 

 고 키요마사는 굉장히 화가 났는지, 나가모리가 한마디의 설명을 하기도 전부터 고개를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군감(軍監)의 면면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후쿠하라 나오타카는 미츠나리의 친척[각주:3]이며, 오오타 카즈요시, 쿠마가이 나오모리[能谷 直盛], 카키미 카즈나오[垣見 一直] 등은 모두 미츠나리에게 알랑거린 덕분에 출세해 온 오우미[近江] 파벌 사람들로 당연 자신들의 파벌인 유키나가를 옹호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지부쇼우놈의 목을 뽑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가모리는 서둘러 진정시킨 후,

 

 지금에 와서는 지부쇼우의 권세에 견줄 만한 자가 없네. 그러한데 무슨 말을 하시는 겐가? 그와 화해를 하시게. 하지 않으시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일세. 우선 그 화를 가라앉히게. 졸자가 자리를 주선할 테니 내일이라도 지부쇼우와 만나시게

 

 라고 말하자, 키요마사는 무가의 신이시여!! 라고 갑자기 방바닥을 치며 노성(怒聲)을 터뜨리고는,

 

 신불(神佛)도 굽어살피소서.

 그자와는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졸자는 조선팔도에 쳐들어가 수십 번 싸워 대명(大明)도 물리치고 추위와 더위를 참았으며, 때로는 굶주림도 겪었소이다. 그에 비해 지부쇼우놈은 편안하게 성안에 있으면서 더구나 히데요시 전하의 총애를 내세워 우리처럼 전쟁터에서 일하는 자들을 멸하려 한다. 그렇게 좆 같은 녀석들하고 우리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소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모처럼 둘의 사이를 좋게 하고자 했던 나가모리도 발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가 1596 1월이었다. 그대로 아무런 추가조사도 없이 키요마사는 근신을 명령 받아 후시미[伏見]의 자택에 유폐 당했다. 이후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이보다 1년 반 전에 요도도노의 배에서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 때문에 이때까지 토요토미 가문 후계자였던 히데츠구[秀次]의 영향력은 저하되었다. 히데츠구는 앞날에 불안을 느끼고 난행(亂行)을 계속 저질렀기에 토요토미 가문은 그 정권이 성립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미 왕년의 똑똑한 인물이 아니어서 사람이 변한 듯 노망이 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히데요리의 앞날에 대한 것뿐이었고, 그 설계를 미츠나리 등에게 연구시켰으며, 미츠나리 등도 이 토요토미의 천하가 무사히 히데요리에게 상속되는 것만을 연구하여 히데요시에게 헌책하였다. 곧이어 히데츠구는 죽음에 이르지만, 이 키요마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히데츠구는 살아 있었다.

 

 사실 미츠나리는 키요마사에 관한 놀랄만한 풍문이 조선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군감(軍監)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 쪽에서 키요마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그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593 5.

 키요마사가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장군 유정(劉綎)을 통하여 키요마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때 유정이 보낸 사자(使者)의 입으로,

 

 "히데요시가 지금 일본 60여주를 다스리고는 있지만, 영걸(英傑)이라고 하여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죽은 후 일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그는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고 말하게 한 후, 유정의 자필 편지를 키요마사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신은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지만 일개 지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때가 되어 우리에게 온다면, 나는 맹세코 대명 황제 폐하에게 말씀을 올려 당신이 대관(大官)에 봉해지도록 보증을 서겠다. 어째서 이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가?
 라고 되어 있었으며, 또다시 사자의 입으로 넌지시 명나라와 힘을 합쳐 히데요시에게 반격을 하자고 암시하였다. 단 키요마사는 종군승에게 글을 쓰게 하여 이것을 거부하였다. 그 편지 속에서,

물론 당신이 말하고 있는 대로 나는 한가한 무리들에게 무고를 받고 있다[각주:4]. 그러나 나는 태합(太閤=히데요시)의 충신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덧붙여 보냈다.

 

 어쨌든 이렇게 명나라와 키요마사가 주고받은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츠나리의 손에 들어와 있어,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리 미츠나리라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것을 주저케 하여 자신의 선에서 뭉갰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다른 측면에서 이것을 처리하였다. 키요마사가 이 이상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은 다음 세대인 히데요리에게 있어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외정(外征)을 하러 나간 장군이 무훈(武勳)을 세워 거기서 강대한 세력을 얻을 경우, 반대로 그 무력이 중앙 정권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멀리 당()나라의 현종(玄宗) 황제를 배신한 안록산(安祿山)의 예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가까이에 히데요시라는 예가 있었다.

 

 오다 가문[織田家]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었던 히데요시가 거기서 노부나가[信長]의 급사를 듣고 병사를 되돌려 미츠히데[光秀]를 물리치고는, 그 무력으로 오다 가문의 남겨진 자식들을 압도하여 토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키요마사에게 그 정도의 야심이나 정치력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무훈을 더욱 키워줄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 전쟁터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네네는 거기까지 이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네네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미츠나리는 네네를 보호자로 하는 오와리[尾張] 파벌의 무장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네네의 날개를 꺾어 요도도노 모자(母子)의 권세를 강화해 가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다

 네네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키요마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시간만 보내었다. 키요마사는 반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 여기서는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거나 군문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를 지칭.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양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불만이 많았다. [본문으로]
  3. 미츠나리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 예기(禮記)의 태학(大學)에 이르길 ‘소인은 한가하면(할 일이 없으면) 좋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한다(小人間居爲不善)’는 부문에서 따 온 것 같다…. 아마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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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08 12: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침묵'에서도 나와있는 내용이더군요.. 기가막힌 천재지변이 구해주지 않았다면야(-_-...좀 네타려나..,)

    아무튼 키요마사는 상당히 인물은 인물이었던듯.. 이모저모에서 두려워했던걸 보면.. 혁신에서는 좀 과소평가된 느낌이 없잖아 들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8 1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센구미(新撰組)의 콘도우 이사미(近藤 勇)도 가장 좋아했던 인물이라니까요.
    코에이의 게임에서라면... 확실히 내정치가 너무 낮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내정에 관한 것은 더 주어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3. 이노센스 2010.02.13 23: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요마사가 외친 신의 이름은 다시 원문을 확인해봐야하지만 무가의 수호신인 '하치방 대보살'일 겁니다. 시바 료타로의 다른 소설 [세키가하라]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가마쿠라 이래의 무사들은 궁시의 신인 하치방 대보살에게 승전을 기원하거나 맹세를 걸고는 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비사몬텐'이나 '마리지텐'일 수도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은
      "神仏も照覧あれ"...로 시작합지요.

      글쎄요... 어느 신에게 빌었을지... 소설에서 나오는 글 가지고 너무 단정지어서 말씀하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키요마사는 법화종의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이라 쓰인 깃발을 애용했다고 합니다. 만약 하치만대보살이나 비사문천, 마리지천을 믿었다면 그 쪽 깃발을 애용했겠지요.

四.

 네네의 몸가짐은 예절 바르다고는 할 수 없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세운 무릎 쪽의 발을 바꾸었고 바꿀 때도 옷자락 안쪽까지 보여버리기도 하였다. 뺨을 긁거나, 가래를 뱉거나 하여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다.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을 배우질 못했다기 보다는 천성이 활달한 편이어서, 자기자신을 바른 예절이라는 틀에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네네가 요도도노의 어떤 소문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멈칫한 적이 있었다. 측실들이 말한 것은 아니고, 그것은 그녀의 여관장(女官長)인 코우조우스[主]가 이야기한 것이었다. 요도도노가 자신의 슬하에 오우미([近江]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고 하였다. 오우미[近江] ()의 다이묘우[大名]를 말이다. 그들 오우미 계의 역사는 히데요시[秀吉]나가하마[長浜]입성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信長) 휘하에서 처음으로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는데, 그때 하사 받은 영지(領地)가 오우미의 나가하마였다. 석고는 구 아자이 가문[井家]영토인 3() 20만석이며, 이때부터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에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로 불리게 되었다. 20만석에 상당하는 부하를 데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각주:1], 그 지역에서 이름난 가문이나, 많은 전투를 경험한 낭인(浪人), 승려가 못된 인텔리[각주:2] 등을 급히 대량으로 채용하였다. 그런 그들이 토요토미 가문의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되었으며, 그 출신상의 특징으로써 경리에 밝았다[각주:3]. 재무 감각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는 없는 장부(帳簿)의 기록 기술까지 이 지방의 출신자는 알고 있어, 그런 기능이 있었기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田 長盛]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오봉행(五奉行)에 발탁되어 재정과 여러 정무를 담당하며 오우미 파벌의 정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 오우미 사람들(엄밀히 말하면 북부(北部) 오우미 사람들이지만)은 그 대부분이 아자이 가문의 옛 신하 출신이었다. 직접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망한 옛 주가(主家)에 대한 감정적인 충성심은 당연히 가지고 있었는데, 요도도노의 등장과 함께 그 감정적인 마음은 대상을 얻었다. 히데요시가 예전에 섬기던 오다 가문의 오이치[市]에게 성스러운 고귀함을 느낀 것과 같이, 그들은 아자이 가문 핏줄인 요도도노에게 그것을 느꼈다. 요도도노야 말로 진정한 공주님에 걸맞은 존재였으며 더구나 주군의 직계 혈통으로, 이미 남자 계통이 노부나가에게 살해당하여 끊긴 지금, 혈통에서 끝나지 않고 옛 주인 그 자체라는 감정을 요도도노에게 가졌다. 자연히 그 슬하에 모였다.

 요도도노도 옛 신하라는 친근감을 가지고 그들과 접했다. 또한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 역시 오우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 오우미 계의 다이묘우들과는 친척이거나 몇 다리 건너면 친척이었고 또한 교류가 있어, 그 분위기 속에서 요도도노는 자연스레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요도도노가 나에게 대항하려 하고 있다

 라는 것을 코우조우스의 이야기에서 네네는 느꼈고 단순한 여관들의 뒷담화로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네네에게는 히고[肥後]에 관해서도 키요마사와 함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책봉되었다는 현상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요도도노가 미츠나리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졸라서 그 파벌에 속해있는 코니시 유키나가를 추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송구스럽습니다만 요도도노가 키타노만도코로님을 언젠가는 넘어서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라고 사물을 이해하는데 현명한 코우조우스는 말했다. 넘어선다고 하여도 정실(正室)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 아닌 실질적인 권세를 쥐고 싶어하는 것일 것이다. 네네에게 있어서는 이것만큼 가소로운 것이 없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여성 중에 인사(人事)에 끼어들 수 있는 존재는 이 가문을 만든 조강지처인 자신 이외에는 없었다. 이외에 있을 턱이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었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네는 히데요시에게 그런 것에 대한 불평 같은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주인댁인 요도도노에게 기울면 기울수록, 네네에게는 지금까지 이상으로 다정함과 배려를 잊지 않았으며, 그녀가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의 정실이라는 긍지를 더욱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요도 성[城]은 이외로 빨리 완공되었다.
 
1589
1월에 착공하여 3개월 후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그 건축의 빠름보다도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요도도노의 임신이었다. 요도 성()이 완공된지 2개월 후인 5 27일에 남자아이를 출산한 것이었다. 첫 아이인 츠루마츠[鶴松]였다.

 - 어쩌면……

 이라는 목소리가 성안에서 속삭여졌다. 태합(太閤)님의 씨 일리가 없다, 태합님은 속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들이 각 건물에 있는 측실들 주변에서 속삭여졌다. 히데요시에게 씨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은,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히데요시의 살을 접해왔던 측실들은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만약 히데요시의 기능이 온전하다면 과거에 누군가가 임신했을 터였다. 그것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의심스럽지
 
라고 네네야말로 히데요시와의 함께 덮은 이불의 역사가 길었던 만큼 누구보다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네네는 그런 이상함을 절대 입밖에 내는 일 없이, 츠루마츠의 탄생을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로서 크게 축하하였다. 정실로서만이 아닌 네네는 법적으로 모친이기도 했다.

 '어머님[お母さま=おかかさま]'
 
이라고 그녀는 불렸다. 츠루마츠의 모친은 둘이 있는 것이 되어, 요도도노도 '어머님'이라 불렸다. 히데요시나 츠루마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구별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때면 요도도노는 단순히 어머님’, 혹은 엄마[おふくろさま]이며 네네는,
 
'어마마마[まんおかかさま]'
 
라 칭해졌다. ‘[まん]이라는 것은 만도코로[政所]의 만을 지칭할 것이다. 츠루마츠에게 물건을 보낼 때도 네네 자신, -이것은 어마마마가 보내는 것입니다.
 
라는 식으로 말했다.

 츠루마츠의 출생은 오우미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개가(凱歌)였을 것이다. 요도도노가 토요토미 가문에서 자리잡고 있던 위치는 측실에서 생모(生母)으로 껑충 뛰어 오른 것이다. 토자마[様][각주:4] 다이묘우들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선물을 보내기 보다는 요도도노에게 더 정성 들여 선물을 보내게 되었기에,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에서 네네의 위세는 당연하게도 후퇴했다. 네네는,
 
-
요도도노가 큰 공을 세웠군요.
 
라고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코우조우스 이하 네네 휘하의 여관들에게 있어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 새로운 현상에 대하여 항상 가시 돋친듯한 태도를 취했다. 이대로 츠루마츠가 어른이 된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에 요도도노와 이 적자가 자리잡게 되며, 키타노만도코로의 위세 같은 것은 이미 과거의 이야깃거리나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츠루마츠가 출생한 다음 해인 1590 8.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가 칸토우[東]에서 패권을 쥐고 있던 호우죠우 씨[氏]를 그들의 거성(居城)오다와라[小田原]에 몰아 넣었다.
 
히데요시는 장기 포위 방침을 취하여, 성안을 천천히 말라 죽이는 한편 포위한하고 있는 심심해 하는 부하 사졸들을 위해서 유녀(娼女)들을 불러 모으거나, 사루가쿠[]판을 벌리거나 하였다. 또한 다이묘우[大名]들에게는 각자의 처첩(妻妾)들을 부르게 하였다.

 [그렇게 하였다]

 고 네네에게도 편지로 알려왔다. 그 편지라는 것은,

재빠르게 적을 새장 속에 집어 넣었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위험한 전투는 없을 것이기에 걱정 마시길.
도련님(츠루마츠)이 보고 싶지만, 그러나 이것도 장래를 위해서, 천하를 평온하게 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니 그립다고 생각하는 기분도 떨쳐버릴 수가 있다. 나도 여기서 뜸 같은 것을 받으며 몸에 신경 쓰고 있으니 아무쪼록 걱정하지 말길.

 어쨌든 이번 오다와라 싸움은 오래 걸릴 것이라고 지시하였다. 그 때문에 다이묘우[大名]들에게는 마누라를 이곳으로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래서~

 라고 히데요시는 본제에 들어갔다. 요컨대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말하지 않고, 그 점에 대해서 네네의 심정과 입장을 살피고 자질구레하게 이것저것 가져다 붙인 후 또한 거기에 그녀의 자존심에 주름이 가지 안도록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붓을 멈추지 않고 단번에 써내려 갔다.

우와같이(위와 같이)
싸움이 오래될 것이라고 말하였슨 즉
그 때문에
요도 녀석을 부르려고 하네
그쪽도
슬슬 요도에게 말하여 이쪽으로 오는 건에 대한 준비를 시키게
그쪽 다음은 요도도노가 나랑 마음이 맞는 것 같더군

 정실인 네네에게서 요도도노에게 오다와라로 내려가라고 명령해 주길 바란다, 준비를 시켜주게~하고 히데요시는 그녀의 지위와 체면을 그렇게 세워주고, 그녀가 가질 것 같은 불쾌함을, 그렇게 명령하게 함으로써 바꾸고자 하고 있었다.
 
여전하시군
 
하고 네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히데요시가 이렇게까지 하는 마음 밑바닥을 꿰뚫어보면서도 이래서는 화내기도 조금 그랬다. 더구나 편지에서,

그쪽 다음으로 요도도노가 나랑 마음이 맞는다.
 고 뻔뻔하게 네네를 우선시하는 것 같아서 이 편지 자체가 네네에 대한 사랑의 편지인지 하고 착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말미에는,
나도 늙었다.
 는 한 줄을 히데요시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곧이어 오다와라에서 행해질 터인 요도도노와의 사이의 뜨거운 이불 속에 대해서 네네의 상상이나 연상을, 이 한 줄로 막아버리고자 하는 배려이며 이것은 네네의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는 뭐 둘러대기에는 좋지만 그러한 상냥함의 표현으로 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늙었으니 네네는 조금만 질투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라고 네네는 코우조우스에게 보여주었다. 네네는 오다와라에 오라는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코우조우스에게 읽게 하여도 치욕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에서는 히데요시가 네네를 요도도노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네네의 지위를 요도도노에 대해서도 윗줄이며 명령권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오다와라에서 확인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네는 요도도노에 대해서 그리 가벼이 몸을 움직여 자신의 입으로 준비를 시킬 정도로 착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한 네네라면 오히려 히데요시도 편했을 것이다. 이번 경우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쓴 편지를 써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잘 하도록 힘써주세요

 라며 코우조우스에게 명령했을 뿐이었다. 코우조우스는 당혹했다. 요도도노에게 어떻게 힘쓰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하며 어느 정도로 요도도노의 준비를 도와야 하나?

 “…글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사옵니까?”

 라고 네네에게 되묻자,

 뭘 당혹해 할 것은 없습니다

 라고 처음으로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네네가 말하기를 자기에게도 이렇게까지 마음 쓴 편지를 보내는 히데요시이다. 당사자인 요도도노에 대해서도 편지를 보내어 충분한 것을 세세하게 지시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으니, 이쪽에서 뭔가를 해 줄 것도 없다. 있을 턱이 없다. 쓸데 없는 것을 하면 반대로 창피를 당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코우조우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히데요시의 편지에는 네네에게서 요도도노에게 말하라고 써있지 않은가?

 코우조우스도 융통성이 없으시군요

 네네는 한번 웃고는,

 그것은 즉, ‘이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히데요시의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 아부는 이미 네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것만으로 목적을 이루었다. 내용에 대해서 거기까지 꼼꼼히 할 필요는 없었다.

 당신이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에게 이번에 칸토우[東]로 가는 거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말 정도만 해 두면 그걸로 충분하겠죠

 라고 네네는 말했다.

  1. 노부나가는 부하들이 쓸데 없이 축재(蓄財)하는 것을 싫어했다. 영지(領地)를 하사하면 그 영지에 걸맞게 부하들을 등용하여 더 많은 활약을 하길 원했다. 그 예로 중신 서열 No.1인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같은 경우는 영지를 하사하여도 그것을 이용하여 부하들을 등용하기는커녕 자기 배만 불리자 쫓아버릴 정도였다(물론 이것 외에도 서열과 영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던 것도 있었다). [본문으로]
  2. 제대로 된 정식 승려가 되기에는 돈과 빽이 필요했다. [본문으로]
  3. 우리나라에 ‘개성상인’이라는 단어가 있듯이 일본에도 ‘오우미상인[오우미쇼우닌=近江商人)]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재가 뛰어났다. [본문으로]
  4. 여기서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이 아닌 나중에 항복한 다이묘우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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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4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곧 츠루마츠의 사망과 히로이의 탄생이 이어지겠군요(ㅎㄷㄷ..)

    최근에 이 시기와 관련이 있다면 있는 엔도 슈사쿠의 '숙적'을 읽고 있어서인지 한결 더 다가 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카톨릭 출판사답게 전문번역이라고 보기엔 좀;; 기타노만도코로를 북정소로 번역한 센스는;;; 히데요시의 어머니를 '대정소'로 번역 해 놓은것도 참..)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5 0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약 저도 돈 받고 일반 독자에게 읽혀야 하는 번역을 한다면, 북정소나 대정소로 번역했을 걸요 ^^
    거기다가 각 이름들도 국어 외래어 표기법에 맞추어...
    카토우 키요마사 -> 가토 기요마사... 라던가..
    이시다 미츠나리 -> 이시다 미쓰나리....
    라던가....
    .
    .
    저는 이글을 번역할 때, 당시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아는 분들을 기준으로 쓰는 것이고, 아마 카톨릭 출판사의 번역가 분은 당시 지식이 전혀 없는 독자분들도 생각해야 하기에 그러시지 않으셨을지..

    참... 근데 淀殿는 어떻게 표현했나요? ^^
    요거 번역의 차이도 제 나름대로 흥미가 일더군요.
    요도도노인지... 요도기미...인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5 1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도기미로 나왔던걸로... 음, 그런데 요시카와 모토하루는 좀 에러였던걸로(;;;) 쩝;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5 14: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도기미군요...^^
    (당시는 사용되지 않던 에도 시대 비속어다 보니 전 절대 사용하지 않으려 해서 어떻게 하셨나 궁금해서요)

    확실히 모토하루의 성은 에러군요... 하긴 센고쿠 덕후들이나 킷카와라고 읽지 보통은 요시카와로 읽겠죠^^(...그거 번역한 분은 조금 공부가 부족했나 보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5 16: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초반에는 키츠카와(킷카와를 한국 표기법으로 쓰면 키츠카와가 되는가요? 좀 다를법 하긴 하지만서도..) 모토하루로 적더니만 2권에서 근성이 떨어졌는데 요시카와 모토하루로 쓰는 센스...;;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분이 썼다던데 센고쿠 덕후분은 아니셨던듯(ㅁ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5 16: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떨어졌는데->떨어졌는지

    개인적으로 ctrl+V가 안되서 전부수정은 좀 버겁군요(쿨럭)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6 0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키츠카와는....(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책에 한자 위에 후리가나 붙여 있는 것(ルビ)이... 워낙 작다보니 'つ'하고'っ' 가 구분이 안 가셔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마 초반에는 독자를 위해서 きつかわ 라고 루비가 달려있었을 것입니다. (근데 센고쿠 덕후가 아니시다 보니 킷카와는 들어보지 못하셨겠고, 당연 키츠카와...) 하지만 책에서도 한번 나온 이후부터는 그냥 한자만 있었을 테고...
    그러다보니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새로운 모토하루의 등장인가!! 더구나 이 놈은 요시카와이고..."가 되지 않았을지...(즉 번역가분은 스토리를 이해 못하면서 번역하셨나 보네요..아쉽군요.)
    그리고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つ'와'っ'구분이 안되었는데, 21세기 들어와서는 그것도 구분이 될 수 있게 발전하더군요.

    ps;대사관이라고 하니 예전에 얼핏 흘려 본 것이 떠오르는군요... 한국 어느 외교관은 일본 주재(駐在)인 주제에 일본말은 못하고 영어만 써서, 어느 신문란에 가십 처리 된 것이 기억나는군요. 쓸데 없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지 일반지는 아니고 스포츠지 사회면에 조그맣게...(물론 일본 스포츠지도 막장이라 없는 사실 만든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한국 외교관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ps2;저도 오타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다보니 신경쓰지 마시길..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6 13: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도 슈사쿠 원서를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네요(ㅎㅎ)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3.27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도 깃카와씨는 있지 않나요? 요시카와씨가 더 흔해서 그렇지…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9 1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있겠죠...저는 갑자원 야구 중계 보면서 "노부나가(信長)"란는 성(姓)도 본 적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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