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 이에야스[家康]로 이어지는 소위 겐키[元亀][각주:1] - 텐쇼우[天正][각주:2]의 천하 통일기에 저 3명과 가까이 하며 백만석의 기초를 쌓아 올린, 센고쿠[戦国] 역사에서도 특필할 만한 무장이었다.

 토시이에는 14살 때 당시 나고야[那古野] 성주였던 4살 연상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각주:3], 같은 해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섰다[각주:4]. 19살 때 노부나가가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信行]를 공격한 이노우 전투[稲生の合戦]에서 노부유키의 청년 친위대장[小姓頭] 미야이 칸베에[宮井 勘兵衛]라는 강적을 쓰러뜨리는 공적을 세웠다.[각주:5]

 이 즈음 토시이에는 카부키모노[かぶき者]로 성질이 급하여 자주 남과 싸웠다.
 ‘카부키모노’라는 것은 기발하고 특이한 복장이나 행동을 해서 남을 놀라게 하고는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기풍이었다. 예를 들어 토시이에는 굉장히 화려한 장식을 한 창을 들고 다녔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창의 마타사에몬[槍の又左衛門][각주:6]’이란 이명(異名)을 붙었기에 이를 들은 토시이에는 기뻐하였다.
 그런 토시이에였기에 늙어서도 특이한 젊은이를 사랑하였으며, 또한 말하길,
 “젊은이에게는 큰소리 치도록 만드는 편이 좋다. 그러면 자신이 했던 말들을 거짓으로 만들 수 없다며 분투하게 되니까”
 라고 하였다.

 카부키모노였던 22살의 1559년, 토시이에는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노부나가의 도우보우[同朋][각주:7] 쥬우아미[十阿弥]가 토시이에의 남성용 비녀[笄][각주:8]를 훔쳤다. 토시이에는 곧바로 노부나가에게 쥬우아미를 처벌할 테니 허락을 내려달라고 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토시이에는 주군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이런 토시이에를 보고 쥬아미 등이 ‘용기도 없는 놈’ , ‘무사라는 자가 한번 벤다고 했으면 베어야지 주군의 명령이라고 베지도 못하다니’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깠다.[각주:9]
토시이에는 이를 듣고 불문곡직하고 쥬우아미를 베어 죽였다. 더구나 일부러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을 골라서 죽여버린 것이다. 평소부터 카부키모노라는 점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토시이에로서는 당연한 행위였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토시이에를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노(宿老)들의 중재 덕분에 목숨만은 건져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낭인(浪人)이 된 토시이에가 취한 방도는 슬며시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세워 복귀를 허락 받는 것이었다.[각주:10] 그런 기회가 그 다음 해인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가 되어 찾아왔다. 토시이에는 오다 군[織田軍]에 참가하여 이마가와[今川] 측의 목을 세 개를 가져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시이에가 그 목을 노부나가의 앞으로 가져왔지만 노부나가가 무시했기에 그 목들을 버리고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결국 노부나가의 용서는 없었다.

 그 2년 뒤, 노부나가가 미노[美濃]를 침공하였을 때 토시이에는 또 참가하여 모리베 전투[森部の合戦]에서 ‘목 사냥꾼 아다치[首取り足立]’라는 이명(異名)을 가진 강한 무사를 죽이는 수훈을 세우자 노부나가도 용서를 하여, 다시 오다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복귀하게 되었다.[각주:11]

 그 후 토시이에는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함께 호쿠리쿠 방면[北陸方面]에서 활약하며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자,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곧이어 이 둘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토시이에의 입장은 복잡했다. 토시이에에게 있어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에서 쫓겨나 낭인으로 보내던 시대에 몇 번이나 도와주었던 은인이며, 오랜 기간 전쟁터를 함께 해 온 의리가 있었다. 한편 히데요시와도 젊었을 적부터 친교가 있어, 딸 중 하나인 ‘고우[豪]’[각주:12]는 태어나자마자 히데요시에게 양녀로 주었을 정도였다. 토시이에는 어느 쪽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 는 것이 본심이었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영지가 이웃인 시바타 측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1583년 4월 21일부터 다음 날 아침에 걸친 시즈가타케의 전투[賤ヶ岳の戦い]는 히데요시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지만, 이때 마에다 군[前田軍]은 그다지 전투에 참가하는 일 없이 영지(領地)인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로 철퇴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가 이 전투에 대한 기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히데요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토시이에가 농성하고 있는 후츄우의 성은 단숨에 낙성시킬 수 있었다. 이때가 토시이에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각주:13]

 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포위망을 친 히데요시는 혼자 말 타고 후츄우의 성문 앞에 와서는 “마타사[又左]~ 마타사~”하고 토시이에의 통칭을 불렀고, 성안에 들어 온 히데요시는, 서로 원한이 없으니 앞으로도 사이 좋게 지내자며 토시이에에게 말하였다. 이런 것은 히데요시의 특기인 남의 마을을 끌어들이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미움 받지 않는 토시이에의 인덕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리하여 토시이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멸망 당하여 죽은 뒤 히데요시의 둘도 없는 한 팔이 되어 신뢰를 받았고, 나중에는 여러 장수들에게서도 신뢰를 받아 히데요시 정권에서 무게감을 더해 갔다.

 토시이에가 여러 장수의 인망을 모았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병들었을 때, 토시이에는 당시 명의로서 명성을 떨치던 의사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에게 직접 의뢰하여 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며, 우지사토가 죽자 그 아들 츠루치요[鶴千代 = 후에 히데유키[秀行]]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즈[会津]라는 중요한 곳을 지키기 힘들다는 의견이 높았지만, 부인 호우슌인[芳春院]과 함께 히데요시 부부를 설득하여 가모우 가문[蒲生家]의 영지 상속을 실현시켜 주었다.[각주:14]
 
 또한 이해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 사건이 일어나 평소 히데츠구와 친밀했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가 연좌의 혐의를 받자, 토시이에는 온갖 수단을 다해 변호하여 아사노 부자에게 쏠린 혐의를 벗게 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조선에서의 행동 때문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근신 당하고 있다가 ‘지진 카토우[地震加藤]’[각주:15]라는 이명(異名)을 얻을 때의 활약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풀었는데, 이것도 토시이에의 중재에 의한 것이 컸던 듯 나중에까지 키요마사는 토시이에의 중재를 고마워하였다.

 이렇듯 토시이에가 장수들의 위기를 구했기에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신뢰할만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토시이에는 말년이 되어 적자 토시나가[利長]에게 여러 다이묘우들의 차용증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죽은 뒤 마에다 가문의 편에 선 다이묘우의 차용증은 돌려주라고 하며, 그렇게 되면 한층 더 아군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는 단순히 ‘좋은 인간성’만의 무장이 아니라 상당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시이에는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그것도 센고쿠 무장[戦国武将]로는 드물게 경제감각의 소유자로 수치에 밝아 항상 주판을 가지고 다니며 병사의 수를 세거나 금전 출납, 곡물을 계량할 때도 주판을 튕겼다. 그랬기에 토시이에는,
 “돈이 많으면 남에게도 세상에게도 겁먹을 일이 없지만, 가난해지면 세상이 무서운 법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1598년 8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가 죽었다. 정치와 어린 히데요리[秀頼]의 안전은 오대로(五大老)[각주:16], 오봉행(五奉行)[각주:17]의 손에 맡겨지게 되어, 토시이에는 주로 히데요리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대로의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우들과 사돈관계를 맺으려 하는 등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기 시작하기에 이르자, 토시이에는 긴박한 정치의 장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이에야스를 가장 적대시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봉행이었다. 그리고 이 미츠나리는 무공파(武功派)라 일컬어지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의 격한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리 되자 천하는 이에야스-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등 반 이에야스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에야스의 다음가는 실력자 마에다 토시이에는 미츠나리 등과 함께 이에야스에게 힐문장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변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답변으로 응대하였다. 오오사카의 토시이에와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간에 불온한 공기가 흘렀다.
 이 사태에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8]와 토시이에에게 은혜를 입은 카토우 키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 여러 장수들이 열심히 양자간의 사이를 중재하여 겨우 화해하였다고 한다.
 그때 토시이에는 이미 병상이 깊어 마에다 가문의 의지는 적자 토시나가가 결정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인망이 두터웠던 토시이에였기에 여러 장수들도 중재에 힘썼던 것이며, 이에야스 역시 예부터 알고 지낸 그런 토시이에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는 죽었다.
 그 임종의 자리에서 토시이에는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이빨을 간 뒤 베갯머리에 있던 ‘신도우고 쿠니유키[新藤吾 国行]’의 작은 칼[脇差]을 뽑지도 못해 칼집 채 가슴에 누르고는 무언가 크게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9]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83년
오와리[尾張] 출신. 통칭 이누치요[犬千代]. 오다 가문[織田家]를 섬겼고, 형 토시히사[利久]를 대신하여 본가를 이었다[각주:20].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공적을 세워 에치젠[越前] 후츄우 성[府中城]의 성주가 되었고[각주:21], 이어서 노토[能登] 나나오 성[七尾城]의 성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후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카가[加賀] 오야마 성[尾山城][각주:22] 성주가 된다. 1585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각주:23]의 칭호를 하사 받았고, 1590년에는 토요토미 성[豊臣姓]을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 죽은 지 8개월 후인 1599년 죽었다. 62세.[각주:24]

  1. 1570~1573년. [본문으로]
  2. 1573~1592년 [본문으로]
  3. 봉록은 50관.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이며 키요스[清須]의 성주인 오다 노부토모[織田 信友]와의 카야즈 전투[萱津の戦い]. [본문으로]
  5. 오와리 통일전에 참가하며 봉록은 100관으로 증가. [본문으로]
  6. 토시이에의 통칭이 마타사에몬[又左衛門]이었기에. [본문으로]
  7. 다이묘우[大名] 곁에서 잡무를 맡거나 다도[茶道]에 관련된 일을 하던 스님. [본문으로]
  8. 일본 시대극을 자주 보시는 분이라면, 주인공이 도망치는 적이나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표창 대신 젓가락 비슷한 것을 던지는 장면을 보셨을 것이다. 그것이 코우가이[笄]. 이것으로 머리를 긁거나 머리를 다듬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가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10. 이런 행위를 '진가리[陣借り]'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복귀하면서 얻은 봉록 300관. [본문으로]
  12. 토시이에의 4째 딸. 나중에 오대로 중 한 명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에게 시집간다. [본문으로]
  13. 도망치던 시바타 카츠이에는 토시이에의 후츄우 성[府中城]에 들러, 무단 퇴각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오랜 기간 자신을 잘 도와 주웠다는 것에 감사한 뒤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여기에는 토시이에의 2남 토시마사[利政]의 부인이 우지사토의 딸인 점이 컸을 듯. 즉 서로 사돈지간. [본문으로]
  15. 596년 9월 5일 킨키[近畿]에 지진이 일어나 후시미[伏見]가 혼란에 빠졌을 때 키요마사는 근신의 몸임에도 군사들을 이끌고 후시미 성[伏見城]에 가 히데요시를 수비하였기에 붙은 이명. [본문으로]
  16. 이 당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7.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18.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는 타다오키의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 즉 토시이에와 타다오키는 사돈지간. [본문으로]
  19. 일설에는 복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신도우고 쿠니유키의 작은 칼로 스스로 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토시이에는 4남이어서 원래 자격은 없으나, 1569년 토시히사가 병약해서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토시이에가 당주가 되도록 명령. [본문으로]
  21. 나가시노의 공적보다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감시역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2. 후에 카나자와 성[金沢城]으로 이름을 바꾼다. [본문으로]
  23. 히데요시가 한참 동안 쓰던 성과 관직명. [본문으로]
  24. 가보나 계보도에는 62세라고 하나, [케타신사 문서[気多神社文書]]나 [토시이에 야화[利家夜話]] 등에서 63세로 하는 사료도 많아 63세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노부나가 가신단 연구가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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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12 0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시대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지녔던 오다계열의 필두가신들 중에서 센고쿠 시대의 끝자락까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란 점에서 도시이에란 인물의 역량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니와나 삿사는 히데요시 손에 의해 숙청되었고 시바타, 다키가와, 아케치들은 히데요시에게 칼을 겨누는걸 택하고 패망했으니 말이죠. 예외라면 장렬히 죽으면서 아들 데루마사와 가문을 지킨 이케다 쇼뉴 정도일까요.

    결과론적으론 가모 히데유키를 아이즈에 놔두게 되면서 가모 가문이 쇠퇴하게 된 셈이네요. 차라리 가모 가문을 아이즈보다 중요도가 덜한 곳으로 전봉했으면 어떻게 되었을런지. 전국에 이러한 우호 가문들을 만들어놓은 것이 에도가 훗날에도 가가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동맹의 울타리에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2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1588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가 쥬라쿠다이[聚楽第]에 행재하여 다이묘우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문서를 쓸 때, 노부나가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히데요시 일족과 이에야스, 모토나리 등과 함께 오다 가문 계열 무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것만 보아선 히데요시의 신뢰와 더불어 역량도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시바타, 아케치, 타키가와 등은 아무래도 히데요시 보다 서열이 위거나 동등하다 보니 천하를 노리는 히데요시로서는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가모우 가문[蒲生家] 자체가 우지사토[氏郷]를 중심으로 급격히 커져 신규 가신들을 다수 받아들이다 보니 가모우 가문 자체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계자라고 하여도 히데유키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졌나 봅니다. 이건 아무래도 일찍 죽은 잘못이 있는 우지사토 때문인 듯 합니다.

      좀 벗어난 이야기 입니다만, 에도 시대 때 혼슈우[本州]에 있는 마에다 가문을 시코쿠[四国]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습죠. 막부도 나름 마에다 가문에는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습죠.

      마에다 가문도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자식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를 자신의 가문으로 초빙하여, 가신으로서는 파격인 7만석을 안겨주며 막부와의 절충에 힘쓸 정도로 에도시대 초기에는 카가 번[加賀藩]과 막부는 나름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었던 듯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06.03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즈카타케에서의 무단 이탈 + 딸 2명중 한명은 히데요시의 양녀로, 또다른 한명은 히데요시의 측실로... 갠적으로 이 두가지로 인해 평소 좋게 생각했던 마타자의 환상이 팍 깨져 버렸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가타케 전투 때 토시이에의 마에다군은 마지막까지 후군에서 달려드는 히데요시를 막았고, 토시이에는 직접 창을 쥐고 싸웠다고 하는 기록도 있더군요.

      히데요시도 니와 나가히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시이에를 살린 것은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방파제로 남긴 것으로 에치젠에 있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임. 토시이에에게 마음을 열지 마시길'
      이라고 보낼 정도로 시즈가타케 전투 직후에는 토시이에와 히데요시가 알려진 만큼 친하진 않았던 것 같더군요.

      더더군다나 딸 2명 중 하나(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 간 고우히메[豪姫])는 태어나자 마자 간 양녀이고, 마아히메[摩阿姫=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는 원래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바쳐진 인질을 히데요시가 인수했던 것이라, 당시 인식으로 보아서 토시이에를 욕하기는 좀 부족하지 않을지...

  3. 지나다가 오타지적 2011.11.06 04: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바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4문단 6번째 줄

六.

 즈질적이고 너저분한 서술을 조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면 바로 그 점이 - 요도도노(淀殿)와의 이불 속에서의 일이 – 그 후의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豊臣白) 정권의 질을 바꾸어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秀吉)는 운(運)의 신자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강렬한 합리주의와 왕성한 계산력을 동시에 가진 인물로, 운의 신자이면서 반대로 운을 믿지 않았고 만사를 마지막까지 계산하였다. 하지만 계산의 마지막 바로 전 즈음에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천운(天運)을 믿었다.
- 나는 운 좋은 사람이다.
 라는 자기신앙(自己信仰)을 히데요시는 가졌으며, 사실 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시기인 전반생은 호운(好運)에서 호운으로 이어졌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영향 받은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만큼 명쾌한 무신론자이지는 않았지만 신과 부처를 인간생활의 장식물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신앙했다. 자기자신 중에서도 자신에게 붙어있는 천운을 믿었다.

 그 밝고 긍정정인 성격과 관련이 있는지 그의 여성취향은 살집이 두껍고 생명력이 뚜렷하며 투명한 수액(水滴)을 끊임없이 흘리는 듯한 여성을 좋아했다.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네네(寧)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이만큼이나 쌕을 좋아하는 남자가 마지막까지 네네를 계속 사랑하였던 것은 네네의 외모가 히데요시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취향이라기 보다 더욱 심오한 히데요시가 가진 자기신앙에 걸맞았기 때문에 틀림이 없었다.
- 네네는 내 행운의 여신이다.
 라고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았을까? 네네를 얻으면서부터 히데요시는 운이 트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운이 트여, 운이 히데요시의 뒤를 헐레벌떡하며 뒤쫓아 오던 시기가 이어졌다. 만약 소심한 사람이었다면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는 행운의 근원은 – 바로 네네가 아닐까?
하고 히데요시는 생각했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가진 조강지처에 대한 경애의 방식, 깊음은 동시대인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부자리에서 네네와의 관계가 끊긴 다음에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단순한 애정이라기 보다 히데요시에게는 네네의 존재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네네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 하고 계속 혼자서 생각했다. 소중히 함으로써 하늘의 은혜가 이어지며 막 대하면 그 은혜가 도망간다고 까지 - 히데요시는 남몰래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오다와라 공략전(小田原の陣) 때, 오오사카(大坂)의 네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요도에 있는 아이(淀の者)를 이곳으로 부르고 싶다"

 고 정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 편지라는 것이,

 "요도에 있는 아이를 부르려고 한다. 자네도 부디 (요도도노에게) 명령하여 떠날 준비 같은 것을 시켜주길 바라네. 자네 다음으로 요도에 있는 아이가 내 맘에 든다"

 고 써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네네가 제일이며 요도도노가 2번째라고 말을 돌려 네네에 대한 미묘한 마음씀씀이를 보여주었다. 더해서 요도도노만을 원정 중인 곳으로 부르는 것에 다소 신경이 쓰였는지 네네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이렇게 가필했다.

 "나는 이미 나이를 먹어버렸다. 올해 안에 자네에게 가 쌓인 이야기도 하고 싶다. 오오만도코로(모친)나 도련님(츠루마츠(鶴松))의 얼굴도 보고 싶다"

 - 히데요시는 천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권세를 가진 사람이 여전히 미천한 신분일 즈음부터의 처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씀씀이를 보이는 것은 애정 말고도 네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남몰래 일종의 신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요도도노를 얻으면서부터는,
 '이 여자도 그렇지 않을까?'
 라는 재수 좋음을, 아니 요도도노 그 자체가 재수를 불러들이는 듯한, 더 말하면 그녀는 운(運)의 신이 보낸 천사라고 식의, 그러한 실감 – 신앙이라고 말해도 좋다 – 을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전혀 별개의 것이 되는데 여성의 성기를 행운의 대상으로 하는 미신이 히데요시와 동시대인 센고쿠 무사들 사이에 습관화되어 있었다. 여음(女陰)의 그림이나 남녀가 교접하고 있는 그림을 화가에게 그리게 하여 그것을 대나무 통에 넣어서 어깨에 짊어지고는 그런 모습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그 공력에 의해 화살이나 총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어졌으며 생각하지 못했던 무운과 만나 – 예를 들면 이름 있는 적의 목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서양 기사의 경우에서 말하는 mascot 신앙일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그렇게 보았다.
 요도도노를 이후에도 즉 조전침략 때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도 데려갔는데 이때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한 다른 측실들에 대하 변명으로,

 "그 아이(요도도노)는 오다와라에도 데려가 바라던 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전쟁터의 길례(吉例)이다. 이번에도 데려간다."

 라고 말하였다. 주위에 대한 변명이라곤 하지만 그녀를 길례로 보는 것은 히데요시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실 엄청 큰 운을 가져다 주었다. 히젠 나고야 성에서 그녀는 두 번째 임신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뻐했다.

"이 나이가 되어 또다시!"

 하고 히데요시는 주치의인 마나세 도우산(曲直 道三)의 손을 잡고 잡은 손을 몇 번이나 흔들었다. 아비가 된 히데요시는 56살이었다.
 곧바로 요도도노를 그녀의 성으로 돌려보냈다. 1593년 8월 3일 요도도노는 요도 성(淀城)에서 히데요리(秀
)를 낳았다. 히데요시도 서둘러 치쿠젠(筑前) 본영에서 돌아왔다. 이제는 조선 침공이란 안중에 없었다.

 요도 성으로 가 오히로이(히데요리의 아명)와 만나,

 "너는 주어왔다. 주운 것이다. 내 자식이 아니다"

 고 흐물흐물하게 웃으며 얼굴을 아기의 코 앞으로 내밀었다. 주워 온 자식은 튼튼하게 자란다고 한다. 친자식이더라도 일단 버린 뒤 남에게 주워오게 하는 형식을 취한다. 주워 오는 역할에 임명된 것은 요도도노를 시종하며 요도 성에 올라와 있던 마츠우라 사누키노카미 시게마사(松浦 岐守 重政)였다.

 요도도노는 이미 산후의 쇠약에서 회복해 있었다. 이런 점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말랐나?"

 히데요시는 그날 밤 요도도노를 옆에 누이고 침상 안에서 그 몸을 쓰다듬었다. 예전 츠루마츠가 살아있을 적에 히데요시는 진중에서 자신이 키워 온 마음의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20일 즈음에는 반드시 돌아가마.
도련님(츠루마츠)를 안고 싶구나
그날 밤 너도 옆에서 재우고 싶구나. 모처럼이니 기다릴 것.

 이번에도 요도 성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저런 종류의 편지를 보내어 요도도노의 마음을 계속 자신에게 쏠리게 했다. 때문에 요도도노는 자신이 항상 히데요시와 함께 이부자리에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도 이젠 새삼 부끄러워 할 필요 없이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로 하나가 되었고 그 환락 속에 몸을 열었다.
 '이거야'
 하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요시의 감동은 무엇보다 요도도노의 여성으로서의 그 부분이었다.

 "너를 얻으면서 토요토미 가문도 변하였다"

 예전엔 네네의 거기를 신앙했다. 앞으로는 그 이상으로 거대한 행운을 이 요도도노가 가져다 줄 것이다.

 "바로 이거지"

 하고 히데요시는 그 젖은 부분의 명칭을 오와리(尾張) 사투리로 몇 번이나 외쳤다.

 "오히로이(お拾い)에게도 선물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겠군"

 히데요시는 자신이 가진 것 중 제일 비싼 것을 이 갓난아기에게 주려고 생각하였다.
 오오사카 성(
大坂城)였다.

 "그 성을 오히로이에게 주마. 내 성으로써 따로 성을 만들겠다"

 라고 말하였다. 토요토미 가문의 적자(嫡子)인 이상, 이제 막 태어났다고 하여도 천하제일인 성의 주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후들에 대한 존엄과 무위를 가지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군.
 이것이 실행에 옮겨졌을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는 그 측근에게 중얼거렸다. 오오사카 성을 오히로이에게 물려주고 히데요시는 새로이 자신의 거성(居城)으로써 후시미 성(伏見)를 만든다는 뜻 – 을 행정관(奉行)을 통해서 제후들에게 발표한 것이었다. 그 후시미 성 조영에 관해서는 오오사카 성을 기점으로 동 일본의 제후들에게 명해졌다.

 "이 또한 돈과 쌀의 낭비지"

 라는 목소리가 그런 제후들 사이에서 소곤거려졌다. 참고로 그 동 일본의 제후들은 바다를 건너가지 않았다. 조선으로 출정을 명령 받은 것은 서 일본의 제후들이었기에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평등하게 돈을 쓰게 하기 위해서 동일본 제후들에게 공사의 분담을 명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피폐함을 알고 있던 제후들에게 있어서는 민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 쓸데없이……
 라고 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생각을 이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천성이 자그마한 땅 주인과 같이 검소한 이에야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지(領地)인 칸토우(
) 경영을 위해 에도(江戸)에 새로이 수도를 세웠지만, 성곽은 극히 소박하여 성은 이시가키(石垣)도 세우지 않았고 해자를 팔 때 푼 흙으로 담을 쌓았으며, 성과 건물의 현관 같은 것도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 때부터의 초가지붕을 사용하였으며, 마루도 배의 밑바닥 나무를 이용한 조악한 것이었다. 자신은 그렇게까지 아끼고 있는데 히데요시의 없어도 괜찮은 별장 같은 성곽을 위해서 막대한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갓 태어난 핏덩이에게 성 같은 게 필요하냔 말이다.
 이에야스에게는 히데요시의 광기의 징조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미친 사람 아닌가? 이에야스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자신의 측근에게,

 "오오사카 성은 오히로이의 장난감이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오사카 성은 서양 신부들이 말하길 콘스탄티노플보다 동쪽으로는 최고로 큰 성이라고 한다. 갓난아기의 장난감으로 그런 것을 주고 자신은 후시미에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이 피폐한 것을 모른다. 미쳤나? 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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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20년이 지났다.
 
마치 하늘나라에 사는 것처럼 모든 환경도, 운명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을 계승하여 천하의 중앙부를 얻고, 쿄우[]를 발 밑에 두었으며, 오오사카[大坂]에 본거지를 두어 오나카[仲]는 그 성에서 수많은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치쿠아미[竹阿弥]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은 사지 휴우가노카미[佐治 日向守]라는 하시바 정권[羽柴政権]의 조그만 다이묘우[大名]의 부인이 되었고, 코이치로우 히데나가[小一 秀長]는 종오위하(從五位下) 하시바 미노노카미[羽柴 美濃守]라 칭하며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의 2개국 영주로써 히메지 성[城]을 거성(居城)으로 하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군
 
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단 오나카가 갑자기 이런 귀족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1년 전,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20만석의 다이묘우[大名]에 봉해졌을 때, 오나카는 기후[岐阜]의 저택에서 나가하마 성[長浜城]으로 옮겨와, 그 호반(湖畔)의 성()에서 처음으로 기와집(御殿)에 살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11년이었다.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올해 즈음부터 공가(公家)가 되고자 하는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거주구역[奥]을 공가(公家) 풍으로 바꾸기 위해서 쿄우[京]에서 공가(公家)의 딸들을 다수 여관(女官)으로 들여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화장실의 관례까지 바뀌어 버렸다.

 할멈은 혼자 갈 테다

 고 오나카가 말해도 시녀들은 허용치 않고 몇 명인가가 따라 붙어서는 입구에서 공가의 관례에 따라 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을 본 것의 떨어지는 장소는 항아리가 아니라 모래상자였다. 모래 위에 그것이 떨어지면 어떤 사람이 와서 그것을 가지고 가 버렸다.

 저건 거름으로 쓰려는 것인가?”

 하고 오나카는 어느 날 쿄우[]의 궁궐에서 온 여관에게 물었다. 백성으로 살아온 오나카는 저것을 채소밭에 뿌리는 건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요 하고 여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이치쿠사이가 살펴 봅니다

 하고 말했다. ‘수이치쿠사이라는 것은 뭘까? 일본말로 쿠사이는 냄새가 난다는 것을 뜻하기에, 웃기게도 오나카는 왠지 냄새 나는 것을 담당하는 관리를 그렇게 말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쿄우[京]의 궁정시의(宮廷侍醫)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라는 사람이 요즘 오오사카로 내려와 히데요시 일족의 시의(侍醫)가 되어 있었다. 그 호() '수이치쿠사이[雖知苦]'라고 하였다. ()기는 하지만() 답답하다()는 의미로 붙인 호일 것이다.[각주:1]

 갑작스런 영달이 오나카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또 있었다. 어느 날,

 마님께선 옛날에 궁중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여관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오와리[尾張] 고키소[御器所] 마을에서 가진 땅도 없이 소작이나 부쳐먹던 백성의 자식으로 태어나, 나카무라[中村]에 사는 야에몬[弥右衛門]의 배필이 되어, 다음 남편으로 치쿠아미를 들였다. 그랬을 뿐인 전반생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자, 이런히데요시가 말하고 있다고 했다.
 
저 녀석이?’
 
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녀석도 환경이 갑자기 변했기 때문에 미친 것은 아니겠지? 더 캐묻자 이야기는 정말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야기에서
 
오나카는 옛날 궁중에서 물을 담당하는 하녀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텐노우[天皇]인 고나라텐노우[後奈良天皇]가 오나카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오나카의 소매를 잡아 끄셨다. ‘갑자기 옥체(玉體)에 다가가 받든 적도 있다고 히데요시는 말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 오나카는 텐노우의 씨를 품고 태어난 고향 오와리로 돌아와서 낳은 것이 이 히데요시다 고 말하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것을 히데요시가 입 밖으로 낸 것은 쿄우토[京都]의 세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의 저택에 있을 때였다. 히데요시는 입궐할 때, 이 저택을 옷 갈아입는 장소로 빌리고 있었다. 들은 사람은 마츠나가 테이토쿠(松永 貞)였다.

 마츠나가 테이토쿠는 왕년에 쿄우()에서 위세를 떨쳤던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아들로[각주:2], 히사히데 멸망 후에는 무사(武士)를 버리고 쿄우[京]에서 렌가[連歌], 하이카이[俳諧]에 전념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공가(公家) 사회에 섞여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이 테이토쿠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둠으로 인해 공가(公家)의 소식도 알고, 조정의 정보도 알 수가 있었기에 쓰임이 좋았다. 이 날도 테이토쿠를 근시(近侍)시키고 있었다. 이날 옷을 갈아입고 기둥에 기대어 휴식을 하고 있던 중에,

 나의 모친 젊었을 적에……”

 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테이토쿠는 그것이 믿기건 믿기지 않건 제쳐두고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우선 그 이야기대로 필기하는 한편 사람들에게도 퍼트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오나카는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 후 히데요시가 키슈우[紀州] 정벌을 끝내고 오오사카 성으로 귀환했다. 이 효자(孝子)는 귀환해서 반드시 제일 먼저 오나카와 대면하여 모친의 건강을 묻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때 오나카는 일부러 사람들을 물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너는 감히 궁궐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구나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목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말을 퍼트렸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 일을? 허영심 때문이냐?”

 고 물었다. 아무리 오나카라도 이 자신이 낳은 자식놈의 심사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노부나가)님을 보시길

 하고 히데요시는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은 옛 주인의 예를 들었다. 노부나가의 선조도 가계(家系)가 애매했다. 오다 가문의 선조는 에치젠[越前] 니부 군[丹生郡] 오다 신사[織田(神社]의 신관(神官)으로, 노부나가부터 거슬러 올라가길 백 수십 년 전에 오와리로 흘러와 호족이 되었고 차츰 세력을 길렸다. 족성(族姓)은 후지와라 씨[藤原氏]라고 한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는 처음엔 후지와라 씨[藤原氏]를 칭하고 있었지만, 천하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을 즈음 갑자기,
 
-
우리 집안은 헤이시[平氏]이다. 타이라노 스케모리[平 資盛]의 후손이다[각주:3].

 라며 그 선조를 변경하였다. 이유는 겐지[源氏]인 아시카가 씨[足利氏]를 멸망시키고 그 천하를 잇기 위해서는 헤이시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당시 호족들은 [겐페이 교대사상(源平 交代思想)]이라는 것[각주:4]을 믿고 있었기에, 노부나가는 그 설을 이용하여 천하에 오다 대세론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노부나가는 유우히츠[祐筆]에게 명령하여 족보를 만들게 하였지만, 어째서 오다 가문이 헤이시[平氏]인 것이냐는 점에서 힘들었다. 그래서 타이라노 치카자네[平 親実]라는 가공의 인물을 창조하였다.

 치카자네를 단노우라[浦][각주:5]에서 죽은 타이라노 스케모리의 둘째 아들로, 헤이케[平家]가 멸망할 때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은 아기였지만, 그 어미가 품에 안고 오우미[近江]도망쳐 츠다[津田] 아무개의 부인이 되었다. 그 후, 에치젠[越前] 오다 신사의 신관 오다 씨[織田氏]가 치카자네의 운명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후사로 삼았다 는 것이 노부나가가 만들게 한 오다 가문의 헤이시 전설이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경우는 그러한 전설도 만들지 못할 정도로 비천한 출신이었다. 이럴 경우 히데요시는 겐지[源氏]를 칭하고 싶었을 것이다. 헤이시[平氏]인 노부나가 다음은 겐지인 히데요시여야 했다. 겐지라면 궁정의 전례에 따라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軍]에 임명 받아 막부(幕府)를 열 수가 있었다.[각주:6] 미카와[三河]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는 노부나가의 개성(改姓)과 비슷한 시기에 개성[각주:7]하여 족보를 창작해서는 겐지를 칭하고 있었지만 히데요시의 경우는 이제 와서 그것이 불가능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될 수 없는 이상, 히데요시는 아예 공가(公家)가 되어 칸파쿠()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각주:8] 칸파쿠는 셋케[家]의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 점이라면 편법을 써 누군가 친한 공가(公家)의 양자(養子) – 결국 키쿠테이 다이나곤(菊亭 大納言)의 유자(猶子)[각주:9]가 되었지만[각주:10]가 되어 버리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로 명문가에 들어간다고 하여도 자신의 출신이 지금과 같아서는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자신이 텐노우[天皇]의 씨라는 풍설을 유포시켰다.

 물론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래도 좋았다. 히데요시 자기도 그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묻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크게 한번 웃고 그 자리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치부할 생각이었다. 즉 후지와라 공가(公家)의 양자가 될 때까지의 시간 동안,
 
-
세간에서는 그렇다고도 한다.
 
라는 정도의 풍설만 만들어 퍼트려 두면, 형식 중시인 궁정은 히데요시라는 남자를 받아들이기 쉽게 될 것이다. 이 텐노우의 씨라는 설은 그것만을 위해 쓰려고 창작한 것으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모친이 트집을 부려오면 오히려 히데요시 자신이 곤란했다.

 너에게는 누나가 있지 않느냐

 라고 오나카는 말했다. 그 누나가 죽었다면 모를까, 지금 남편과 함께 아와[阿波]의 명족 미요시 씨[三好氏]의 성()을 잇고 있으며, 현재 그 아들 히데츠구[秀次]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오나카가 앳된 소녀일 즈음에 텐노우[天皇]의 씨를 품고 오와리[尾張]로 돌아왔다면, 이 누나의 존재가 이상해지지 않느냐? 아이가 있는 앳된 소녀라면 이야기의 설정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하하~”

 히데요시는 웃었다. 어떻든 상관 없는 것이다. 형식적인 것을 좋아하는 궁정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만들었을 뿐인 동화 같은 이야기에 딱 들어맞는 설정붕괴건 뭐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니 동생 코이치로우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건 치쿠아미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너만이 텐노우(天皇)의 아드님이신가?”

 오나카는 자못 무서운 말이라도 들을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가 낳은 아이이면서 이 야에몬의 씨로 낳은 자식은 꼬꼬마일 때 가출해버렸던 만큼 예상도 할 수 없는 인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치쿠아미의 씨인 코이치로우 히데나가는 성인이 될 때까지 오나카가 직접 키웠으며, 저런 형과 비교해 보면 어쩜 이렇게 솔직하고 귀염성이 있는 남자란 말인가……

  1. 斎라는 글자의 의미에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호에 많이 쓰였다. [본문으로]
  2. 사실 손자라고 한다.(이것조차 추측) [본문으로]
  3. 타이라노 스케모리는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서 무사의 모범이라고 하는 타이라노 시게모리[平 重盛]의 둘째 아들. 여담으로 시게모리는 무가(武家)로서는 처음으로 다이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첫째아들. 즉 스케모리는 키요모리의 손자. [본문으로]
  4.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교대로 천하를 쥔다는 사상. 카마쿠라 막부 쇼우군 가문[鎌倉幕府将軍家](겐지) -> 카마쿠라 막부 싯켄 호우죠우 가문[鎌倉幕府執権 北条家](헤이시) -> 무로마치 막부 쇼우군 아시카가 가문[室町幕府将軍家 足利家](겐지). [본문으로]
  5. 겐페이 쟁란 최후의 전투. 해전(海戰). [본문으로]
  6. 겐지[源氏]만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노부나가의 경우 조정에서 칸파쿠[関白],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중 아무 거나 하나 되라는 말을 들었다.(三職推任問題) [본문으로]
  7. 후지와라[藤原]에서 겐지[源氏]로. [본문으로]
  8. 실제로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보다 칸파쿠[関白] 되는 것이 훨~~~~씬 어렵다. [본문으로]
  9. 성이 바뀌지 않는 등 계약에 따른 양자 관계. [본문으로]
  10.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키쿠테이 가문[菊亭家]은 칸파쿠가 될 수 없는 세이가케[清華家]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히데요시는 셋케[摂家] 필두인 코노에 가문[近衛家]에 유자로 들어갔다. 키쿠테이는 그 코노에 가문과 히데요시를 연결해 주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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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27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 이번 편에서는 히데나가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7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 끝에 솔직하고 귀염성 있는 남자라고...^^;
    다음 편은 본격 히데나가 이야기입니다(원래 이번 편 자체가 히데나가긴 하지만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28 2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혁신 플레이 하다보면 키쿠테이공이 자꾸 헌납하라고 시쯔코이하게 불러대서 초반에 귀찮았던(이라고 말하고 힘들었던 이라 읽는다) 기억이..

    아무튼 고노에가의 유자로 히데요시가 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일제 강점기 때의..(뭐 실권은 없었다지만) 먼 후손(..이라고 말하면 비약일테지만)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떠오르네요. 나름대로 선조의 유지를 이은건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30 0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熙)라는 수상까지 만들었으니, 그걸로도 코노에 가문은 성공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 후 히데요시[秀吉]는 히데이에[秀家]를 어떤 경우라도 곁에서 떨어뜨리질 않았다. 전쟁터에는 반드시 데려갔으며, 여러 장수들을 만날 때도 자신의 곁에 있게 하였다. 자연히 무장들은 히데이에에게 공손한 예()를 취했다.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는 이 소년을 유자(猶子)에서 양자로 삼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일족으로 하였다. 그 이전이건 그 이후건 히데요시는 어떠한 경우라도 히데이에에게 언짢은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히데이에가 똑똑한 대답이라도 하면,

 

 허허~ 하치로우[각주:1]가 제법이구나~”

 

 하며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였다. 히데요시는 핏줄이 닿는 다른 양자들 보다 이 핏줄이 닿지 않은 양자 우키타 히데이에를 사랑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친자식 같군

 

 라고 사람들은 뒤에서 쑤군거렸다. 히데요시 자신하치로우 모친의 몸을 알고 있던 만큼 어렴풋이 그렇게 착각할 법한 정념(情念)을 이 소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이라는 것은 원래 출산의 고통이라는 동물적인 체험이 없이, 단순히 그 아이의 모친의 몸을 알고 있을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히데요시는 히데이에 부친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운이 좋은 도련님이지

 

 라고 토요토미 가문에서는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는 고(故)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자식을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친 덕분일 것이다

 

 라는 사람도 있었다.

 

 오후쿠(ふく = 히데이에의 모친)는 오오사카[大坂]에 와 있었다. 오오사카 성 밑 비젠지마[備前島]에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저택이 있었다. 그러나 오후쿠는 이 저택에서 살지 않고 오오사카 성내(城內)에 거처를 얻고 있었다. 그렇다고 측실(側室)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후궁(後宮)에는 많은 명문가 출신의 귀부인들이 이었다.

 죽은 주인 노부나가의 딸 중 다섯째인 산노마루도노[丸殿][각주:2], 역시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信包]의 딸인 히메지도노[姫路殿][각주:3] , 오우미[近江] 아자이 씨[氏] 출신인 니노마루도도[丸殿=요도도노[淀殿]][각주:4],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셋째 딸 카가노츠보네[加賀局][각주:5], 오우미[近江] 쿄고쿠 씨[京極氏] 출신인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6],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여동생으로 재녀(才女)라 소문난 산죠우노츠보네[局] 등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다. 오쿠후는 이 화려한 꽃밭에 속해있지 않았다. 그녀는,

 '비젠 님[備前殿]'

 이라 불리며 법체(法體)가 되어있었다.

 나오이에가 죽은 다음 해. 장례식이 공표된 후 관례에 따라 머리를 밀고 흰 옷을 입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법체인 몸을 측실로 삼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성 안에 암자를 짓게하여 거기에 살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때때로 이 암자에 들려,

 

 법체가 되어서 더욱더 아름다워지셨구먼. 나는 여전히 그대가 사랑스럽네

 

 라고 큰 목소리로 말하거나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다시 밤자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구니 모습의 과부에게 밤 시중을 들게 할 정도로 히데요시는 변태가 아니었다. 단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할 뿐이었었고, 그것조차도 이 히데요시라는 남을 기쁘게 하는데 천재적인 인물은 멀리 원정을 나가있을 때조차 정실이나 다른 측실들에게도 그러했듯이 이 오후쿠에게도 자신이나 히데이에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거나 했다. 또한 항상 오후쿠에게,

 

 하치로우만큼 귀여운 녀석은 없지

 

 라고 말하거나 하였다. 그렇다고 이 히데요시의 애정은 꼭 오후쿠에 대한 애정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하치로우 히데이에 자신도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을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듯 하였다. 성격이 시원시원했으며, 말하는 것에도 막힘이 없었고, 행동거지에도 봄바람이 이는 듯 상쾌함에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기 친인척의 아이들이 볼품이 없었으며, 표정이 둔하였고, 언동도 또한 어리석었기에 더욱더 히데이에를 사랑하였다.


 그러면서도 히데요시는 히데이에가 조금 가엾다고도 생각하였. 양자라고는 하여도 일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히데이에에게는 토요토미 가의 상속권이 없었다. 이 점 누나의 아들인 히데츠구[秀次],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인 히데아키[秀秋]에 비해 히데이에라는 양자의 존재에게는 약간의 허전함이 있었다. 그 허전함을 당사자는 물론 느끼지 못했고, 단지 양아비인 히데요시만이 느끼고 있어 느낄 때마다,

 하치로우에게 잘 해주어야지……’

 라고 생각하여 다른 양자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미소도 히데이에에게는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위에 서는 자로서의 교육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히데이에가 13살이 되자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코노에츄우죠우[左近衛中将]에 임관시켜 시코쿠 정벌[征伐][각주:7]에 데려가 아와([阿波]의 키즈 성[木津城] 공격에 참가시켰으며, 2년 뒤에는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8]에 종군시켜 개선(凱旋)한 종삼위(從三位) 산기[議]에 임명해 주었다. ‘산기를 중국에서는 재상(宰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비전재상(備前宰相)]

 이라 불렸다. 15살 때였다.

 이어서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는 불과 18살의 나이로 해군 총사령관을 맡으면서도 대과(大過)가 없었다. 다만 히데요시 자신이 직접 지휘하듯 하였고 또한 가로(家老)들의 보좌도 있었기에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 즈음 히데이에게는 벌써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히데요시의 양녀(養女) 고우히메[姫]였다.

 

 고우히메를 히데이에에게 시집 보내겠다

 

 라고 히데요시가 말하였을 때 히데이에의 행운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고우히메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딸이었다. 토시이에의 딸이라고 하면, 처음엔 마아[摩阿]'[각주:10]라는 셋째 딸이 14살에 양녀가 되었고 이어서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마아의 동생 고우히메를 히데요시가 아직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일 때 양녀로 삼아 손수 길렀다. 히데요시의 고우히메에 대한 애정은 친부모라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가 오다 가문의 부하 장수로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 있었을 즈음에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던 이 꼬마 숙녀에게 전쟁터에서 편지를 보냈다.

 

자가 들어가는 아가씨에게

 

~ 정말로 보고 싶구나. 장난 같은 거 하다가 다치지 마라(날뛰다가 다치면 안돼요~). 또한 건강을 위해서 뜸을 받아라. 이것은 유모에게도 말해 두마. 너는 기특한 아이다. 밥도 많이 먹고 있는지 궁금하구나(언제 함께 먹자꾸나). 어쨌든 니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겠구나. 꼭 이 히메지 성[城]에 부를 테니 맘 편히 먹고 있으렴. 그 때 꽃가마가 필요하다면 준비해 둘 테니 필요하면 말하거라.

 

                                                                                                                                             진중(陣中)에서 

                                                                                                                                                         아빠가

 

 라는 편지였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고우히메가 자랐어도 언니인 마아처럼 손대지 않았고, 그녀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아빠]로 있으려고 하였던 듯했다.

 

 고우히메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남편을 골라주마

 

 라고 말은 했지만, 맘속으로는 일찌감치 히데이에로 정하고 있었다. 양자에게 양녀를 줌으로 해서 토요토미 가에서 히데이에의 위치를 한층 더 강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히데이에는 두 번의 조선 침공[각주:11]에도 참전하였다.

 그 사이 곤츄우나곤[中納言]에 승진하였고 이에 따라,

 '비전중납언[備前中納言]'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1화에 언급했던 다섯 다이묘우[大名]의 도()를 맞추었다 하는 것도 이 즈음일 것이다.

 

 이 즈음부터 히데요시의 육체건 정신이건 눈에 띄게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적통(嫡統) 히데요리[頼]가 태어나 있는 상태였고, 그로인해 히데요시의 모든 관심은 이 갓난아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히데요리 장래의 지장이 될 것 같았던 칸파쿠[白] 히데츠구는 주살(誅殺)되었으며, 히데츠구의 다음가는 지위에 있던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주었다. 남은 것은 히데이에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상속권이 없었던 만큼 히데요시의 사랑은 여전하였고,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히데요시 쪽이 양자 히데이에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모습조차 보였다.

 

 어느 날.

 히데이에를 불러,

 

 히데요리가 15살이 되기까지 나는 어떻게든 살아 있었으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것 같구나. 내 몸에 만일의 경우라도 생긴다면 예전에 내가 고아인 너를 지키며 키워왔던 것처럼 니 동생인 히데요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라고 히데이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히데이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반응이 빠른 젊은이가 평소와는 달리 기분 나쁜 듯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어째서 아무 말 없는 게냐?”

 

 라고 캐묻자 히데이에가 말하길, 그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새삼스레 당부를 하심은 내 마음을 애매하다고 여기셔서 일 것이다. 사나이로서 불유쾌하다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

 그것을 듣고 히데요시는 안심하여,

 역시 하치로우밖에 없구먼

 이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교육자의 입장으로 돌아왔다.

 

 너의 진실함은 알지만 지금의 태도는 좋지 않구나. 오해를 살만하다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다이묘우[大名]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하나 모두가 정치여야만 한다. 정치라는 것은 권모술수의 길이 아닌 자신의 진실함을 남에게 전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하여라. 너에게는 그것이 없다. 지금은 나조차도 너의 진실함에 대해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예전부터 너의 그러한 결함에 대해 걱정이 들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 하나뿐이다.”

 

 라고 말했다.

 

 집은 잘 다스리고 있는가?”

 

 라고 히데요시는 물었다. 우키타 가문[宇喜多家]가로들 간에 서로 반목하여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들썩했다. 히데요시조차 다소는 듣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히데이에는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의 곁에서만 있었던 히데이에는, 오랫동안 토요토미 가문에서만 생활하였기 때문에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나 영지(領地)를 다스림에 어두워, 57만여 석의 처리는 필두(筆頭)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에게 전부 맡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기 가문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무 일도 없습니다

 

 라고 정직히 대답했다. 사실 히데이에는 그렇게 믿고 있었으며, 그 이외에 대답할 것이 없었다.

 이 젊은이는 생각했던 만큼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히데이에가 전쟁터에서는 꽤 용감하였으며 사졸의 통제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내정(內政)에 서투른 듯했다.
 
귀족으로써의 교양은 있었다. 시가(詩歌)에도 능했으며
츠즈미[]도 치고 노우[]도 연기하는 등 궁중 사교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능했다. 그러나 이런 교양이 궁중에서는 도움 되겠지만 우키타 가문을 통솔함에 있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 하치로우를 궁중에서만 머물게 한 내가 잘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교육에 잠깐 후회를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상 우키타 가문 내부 문제에 대해 참견할 정도의 체력도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 여름(1598)에 들어서면서부터 원인불명의 설사가 계속되어 식욕도 잃고 있었다. 다시 올 여름을 히데요시는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오오사카(大坂)의 그 가혹한 열기를 피하기 위해, 그 즈음은 후시미[伏見]의 높다란 곳에 세운 궁궐로 옮겨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웠다. 이 가냘퍼진 체력으로 여름을 지낼 수 있는가 하는 불안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그 불안을 주치의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에게만 은밀히 전했다. 불안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토요토미 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히데요시의 건강만이 토요토미 정권의 영광이었으며 유일한 정치적 근거였고 동력이었다. 그 건강의 몰락과 함께 이 정권도 망할 것이라는 것은 다소 냉정한 눈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의 머리로건 이해할 수 있었다.



 전 시대인 오다 정권의 멸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16
년 전, 노부나가[信長]의 죽음과 함께 망했다.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을 소멸시킴으로써 죽은 주군 노부나가의 권력을 계승해서 토요토미 정권을 성립시켰다. 어떤 사람보다도 당사자인 히데요시가 이 원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이 원리에 의해 히데요시는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고, 그 생명이 꺼져가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반대로 이 원리에 계속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빌었다. 이 원리를 극복하여 아직 갓난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싶었다. 무리라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던 만큼이나 바둥거리듯이 그것을 빌었다. 그런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꽉 차있었다. 히데이에의 가문에 대한 충고를 오랫동안 머리에 둘 정도의 끈기도 관심도 지금의 히데요시에게는 없었다.

 

ps; 많이 늦어졌네요 ^^; 핑계를 대자면 원인불명의 두통으로 금요일부터 오늘 낮까지 고생했습죠..

  1. 히데이에의 아명. [본문으로]
  2.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세 번째 성곽[三の丸]에 거처가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3. 히메지 성에 살고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거처가 두 번째 성곽에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5. 토시이에의 영지(領地)인 카가[加賀]에서 왔기 때문에. [본문으로]
  6. 거처가 후시미 성[伏見城] 마츠노마루[松ノ丸]라는 이름의 성곽에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7. 1585년 시코쿠[四国] 쵸우소카베 가문[長宗我部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8. 큐우슈우[九州]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9. 1590년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10. 상기의 카가노츠보네[加賀ノ局] [본문으로]
  1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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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03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고있었습니다.(ㅎㅎ)

    역시 제일 밑의 문장이라던가, 문장이 꼬여서 길어지면 어렵더군요.. 히데이에 표정에 관한 에피소드도 어설프게 의역해서 읽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많이 달랐었네요(ㅎㅎ;)

    五자가 들어가는 아가씨에게였었군요(에휴... 이 돌머리;;)

    히데요시의 원인불명의 설사는 지속성의 독을 먹어서 그렇게 됐다는 음모론이 끊이질 않았는데.. 실상은 뭐 노환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건 그렇고.. 히데요시는 양자 포함해서 자식교육이란 능력에서는 낙제점이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04 0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우'가 아니라 '고'로 바꾸어야 겠군요.
    그리고... 그 ~もじ라는 것은 의역입니다. 궁궐 나인들의 말(끝에 접미어로 もじ라고 붙는 것)이 후세에 퍼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히데요시는 획수가 많은 한자는 간단한 동음으로 바꾸는 버릇이 있다고 하니까요.
    ごう(豪) -> ご(五)

    그 히데요시의 독살설은 명의 사자 심유경 계략이었다고 하던거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저도 노환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살이라는 것이 쉬운 것(특히나 단발성이 아닌 지속성이라면 더더욱)이 아닐테니까요.

    천재의 단점이라고들 하죠.
    자기가 해냈으니 남들도 쉽게 해낼 것이라 생각한다는...
    (여담이지만 신선조의 오키타 소우지(沖田 総司)도 남들 가르치는 것은 정말 못했다고 하더군요. 평소 미소를 달고 다니던 사람이 훈련때만 되면 온갖 신경질은 다 냈다고.. 왜 이걸 못해!! 라면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2.08 2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 히데이에.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를 쌓았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09 07: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 방문 감사드립니다. 못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2.10 1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뭘요... 언제나 여기서 좋은 글을 많이 읽고 가네요...저야 말로 감사하죠 ^-^;;

  6.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1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에서 히데이에 지력 정치가 엉망인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

  어느 날 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히데요시소소(小小)한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생각난 듯이,

 킨고[金吾]님에게도 좋은 양갓집이 생긴다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만만세겠군요.”

 하고 히데요시를 찔러보았다. 양자(養子)로 보낼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죠스이가 뭔가를 꾸미기 시작한 것을 알아채었다. 거기에 동참해 주고자, 짐짓 시치미를 떼며,

 뭐 그렇췌~!”

 하고 큰 소리로 말하고선 곧바로 말을 딴 데로 돌렸다. 그 한마디만으로 죠스이는 족했다. 나머지는 양갓집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모우리 가문[毛利]이 좋겠군
 이라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천하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인 것이다. 전성기를 구축한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등장한 이후 그 영지(領地)산인[山陰], 산요우[山陽] 10개 지역[]에 이르며, 노부나가[信長]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오다 가문[織田家] 최대의 적이었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자, 히데요시의 교묘한 외교 정책으로 인해 모우리 가문은 무릎을 꿇고 토요토미 가문의 종속 다이묘우가 되었다. 마침 당주(當主) 츄우나곤[中納言] 테루모토[輝元]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킨고를 거기로 보내자
 서쪽의 거대 제후와 끈을 이어두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의 토요토미 가문도 든든할 것이고 또한 모우리가문 자신들에게도 든든하니 쌍방에게 득인 것이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小早川 隆景]를 꼬시자
 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참고로 모우리 가문가정(家政)은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항설(巷說)에 말하는 [세 대의 화살]이며 죠스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모토나리가 죽기 직전에 세 명의 아들을 불러, 세 대의 화살을 건네주고는 꺾어 보라고 하였다. 한 대씩 꺾을 때는 간단히 부러졌지만 세 대를 한꺼번에 꺾고자 하니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모든 일이건 협력하라는 교훈이며 그것이 가법이 되어 있다. 이때의 삼형제가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며, 이후 모우리 씨[毛利氏]를 중심으로 킷카와-코바야카와 양 가문은 하나의 연합국가처럼 되어 있었다.

 지금은 장남 타카모토가 죽어 본가(本家)는 그의 아들 테루모토가 잇고 있다. 킷카와 모토하루도 죽어 지금 삼형제 중에서 생존해 있는 것은 종삼위(從三位) 츄우나곤[中納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뿐으로, 이 타카카게 스스로도 큰 영토를 가진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동시에 본가인 모우리 가문의 최고 고문을 겸하고 있다.
 설득하고자 한다면 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일 것이다.

 죠스이건 타카카게건 둘 다 후시미[伏見]에 집이 있다. 죠스이의 집은 이와야마 산[岩山] 기슭에 있으며, 여기서 산을 넘은 다음 동쪽으로 가면 성 밑에서는 가장 광대한 코바야카와 저택이 있다.
 
죠스이는 집을 나섰다. 만약을 위해 이코마 치카마사[生駒 親正]라는 노인과 동행했다.
 
치카마사는 히데요시가 직접 키워낸 다이묘우[大名] 중 한 사람으로, 260석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사누키[岐] 타카마츠[高松] 17만여 석의 신분이 되어 있다.

 둘이서 산을 넘었다. 왼편에 아키야마[秋山]의 언덕에 자라고 있는 거먕옻나무의 단풍이 눈에 아플 정도로 선명했다.

Rhus succedanea L.
Rhus succedanea L. by kodamatic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거먕옻나무]

 일이 있을 때는 둘이서 가는 것이 일본인의 풍습이다. 나중에 서로가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카게는 이미 환갑을 넘기고 있었다. 온후한 인품이지만 센고쿠[戦国] 한창일 때둘째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모우리 가문을 끝까지 지켜낸 그의 능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우선 둘을 별실로 인도한 후 그 사이 다실(茶室)을 준비하고 곧이어 거기로 옮겨서 ()에 둘러 앉아 잡담을 하였다.

 건께~ 딴게 아니고 말이지

 라고 죠스이는 고향인 하리마[播磨] 사투리가 혀에 남은 말투로 히데아키 양자 건에 대해서 말했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과 각별한 관계가 된다는 것은 모우리 가문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이 이상 좋을 것이 없지요

 라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과연~ 이는 정말 좋은 이야기군요

 라고 타카카게는 차를 끓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지만 속마음은 반대였다.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모우리 가문 최대의 위기다'
 하고 생각하였다.

 모우리 가문이라고 하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선조(先祖)도 모르는 벼락치기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다. 타카카게의 망부(亡父) 모토나리가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1000관에 불과한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고는 하여도, 모우리 가문 그 자체는 옛부터 명족(名族)으로 카마쿠라 막부[(鎌倉 幕府]의 만도코로[政所][각주:1]의 최고책임자인 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 ] 이래의 역력(歷歷)한 가계(家系)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가문에 어디서 주워왔는지도 모르는 히데요시의 친척을 들인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성스러운 신전(神殿)에 똥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타카카게는 생각했다. 역대의 선조들은 둘째치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남보다 더 신경 쓴 죽은 모토나리가 저 세상에서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이는 내가 어떻게 되건 막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타카카게는 결심했지만, 그러나 얼굴엔 미소를 계속 지으며,

 말씀하신 대로 모우리 본가에게 있어서 이 정도로 축하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주 테루모토가 들으면 굉장히 기뻐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둘은 돌아갔다.

 이 후 타카카게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슬며시 집을 나와 후시미 [伏見城]해자(垓子) 근처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세야쿠인 젠소우[ 全宗]를 방문했다.

 세야쿠인 젠소우는 무로마치[室町] 말기의 명의(名醫)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의 제자로 그 능력이 뛰어나 처음엔 궁정의(宮廷醫)였지만 지금은 히데요시의 시의(侍醫)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늙고 병든 몸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히데요시의 그림자처럼 곁을 떠나질 않고 있었기 때문에 전제군주(專制君主)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 세야쿠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자연히 여러 다이묘우들도 세야쿠인을 정중히 대했다. 타카카게도 이 시의장(侍醫長)에게 예물(禮物)을 보내어 히데요시 근처에서 일어나는 정치 쪽 정보를 얻거나 하였다.

 세야쿠인에게 물어보면 죠스이가 말한 것이 히데요시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허허~ 저는 처음 듣는 소리군요.”

 세야쿠인 젠소우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히데아키를 양자로 보낸다는 듯한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보낼지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심……’
 타카카게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히데요시의 생각이 아니라면 아직 손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 좌담(座談)에서라도 "모우리"라고 한마디라도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음 날, 타카카게는 후시미 성의 대문을 지나 성 안에 있는 -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저택이 있어서 이름 붙여진 이시다 성곽[石田廓]에 있는 미츠나리의 집을 방문하였다.

 미츠나리를 선택한 것은 그가 죠스이와는 다르게 공식적인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執政官)이며 또한 히데요시의 비서 역할도 겸하고 있기에, 때로는 히데요시의 의사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권세가(權勢家)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미츠나리를 통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이미 출근하여 집에 없었다. 타카카게는 실망했다.
 
아니지.. 그렇다면……'
 하고 타카카게는 다시 생각했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미츠나리에게 부탁하는 것 보다 오히려 히데요시 곁에서 하루 종일 떨어지지 않는 세야쿠인 젠소우의 입에서 타이코우[太閤]의 귀에 사적인 말로 흘려 보내는 것이 빠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여 곧바로 세야쿠인 저택으로 길을 서둘렀다. 타카카게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로서는 이 이야기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
모우리 본가'라는 계획이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혼자 생각하고 있다고는 하여도, 이미 이코마 치카마사가 옆에 있던 자리에서 입술을 통해 나온 말이었다. 생각이 아닌 현실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곧바로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가 그대로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타카카게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었다. 이쪽에서 선수를 친다.
 
-
부디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님을 저희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양자로 얻고자 합니다. 이를 허락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하고 타이코우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가로 향해진 총구를 분가(分家)인 자기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소리를 치는 것과 같았다.
 
죠스이가 생각해주는 척 하는 계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것밖에 없다
 타카카게는 전쟁터에서 머리를 쓰는 듯한 심경이었다. 죠스이와는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의 모우리 공격군 사령관일 즈음, 빗츄우[備中]의 전쟁터에서 서로의 지략으로 무기로 불꽃튀기며 싸웠다. 그때의 인연(因緣)이 쌓이고 쌓여 좋은 마음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 억울한 것은,
 
저 킨고 좇병신 때문에
 라는 것 때문이었다.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인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도 분가이긴 하지만 타카카게에게 있어선 명문가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대대로 아키[安芸] 타케하라[竹原]지토우[地頭]였던 가문으로, 카마쿠라 막부의 가문 목록[御家人帳]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전통 있는 가문이었다. 그런 명문가를 모토나리가 책략을 써 3남 타카카게가 그 가문을 이었다. 타카카게에게는 양갓집이라고는 하여도 이 명문가의 피에 히데아키의 피가 섞여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타카카게의 감정은 그에게만 있는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토요토미 정권의 다이묘우에는 카마쿠라 때부터 이어지는 명문가가 몇몇 있다.
 북쪽에서부터 말하면 사타케 씨[佐竹氏], 모가미 씨[最上氏], 모우리 씨, 코바야카와 씨, 시마즈 씨[島津氏] 등이 그런 명문가이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토요토미 가문의 위세에 굴복하였다고 하여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 비천한 피를 경멸하고 있었다. 만약 토요토미 가문이 그들에게 사위를 보내준다고 하면 전부가 타카카게처럼 전율(戰慄)할 것이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서자(庶子)가 있었다. 그런 자기 자식을 제쳐두고 자신의 가문에 히데아키를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그 감정을 죽였다.

 다행히 세야쿠인 젠소우는 아직 집에 있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자신이 히데아키를 굉장히 원하고 있는 것처럼 히데요시에게 그 말을 전해달라고 이 늙은 의사에게 부탁했다.

 졸자는 타이코우 전하의 깊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라고 우선 말했다.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쓰러진 직후 전선(前線)에 있던 히데요시는 정면의 적인 모우리 씨와 급히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 화친 교섭에 히데요시의 군사 쿠로다 죠스이가 활약하였다. 타카카게의 둘째 형 킷카와 모토하루는 적극 반대하였지만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인물을 꿰뚫어보고 히데요시와 싸우는 것 보다 오히려 그에게 천하를 잡게 하고 그 세력하에서 모우리 가의 안태(安泰)를 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하여 결국 그렇게 되었다.

 만약 그 때 화친하지 않고 모우리 쪽이 결전에 임했다면 히데요시는 쿄우[]의 미츠히데를 물리치지 못하고 어쩌면 천하를 놓쳤을 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후에 이 사실을 알고 타카카게를 두텁게 대했다.
 모우리 가문의 분가임에도 독립된 거대 다이묘우로 만들어 치쿠젠[筑前] 1[]이라는 광대한 땅과 치쿠고[筑後], 히젠[肥前]의 각각 두 군() 4개 군()을 잘라 주었고, 관위(官位)도 종삼위(從三位) 츄우나곤[中納言]으로 하여 본가의 모우리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하였다. '깊은 은혜'라는 것은 그걸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늙고 앞으로도 얼마나 살지 몰라 이제는 타이코우 전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하사 받은 이 땅들을 전하의 양자이신 킨고님에게 물려드리고 싶습니다

 세야쿠인도 이 미련 없는 태도에는 놀랐다. 다이묘우라는 자가 그 봉토(封土)를 버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츄우나곤 미치신건가? 그렇지 않음 어지간히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으신건가?’
 하고 세야쿠인은 오랫동안 침묵하며 그 진짜 뜻을 살피기 위해서 타카카게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타카카게에서는 무엇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구 세야쿠인도 고개를 숙여,

 잘 알겠사옵니다

 하고 말한 후 고개를 들어,

 그 후 츄우나곤님은 어쩔 생각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많이는 바라지 않습니다. 산요우도[山陽道] 어딘가에 조그맣게 은거할 자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은거할 곳이라면 보통 기껏해야 3000석 정도이다. 세야쿠인은 말을 잃었다.

 세야쿠인은 서둘러 성으로 등성하여 히데요시에게 전했다. 히데요시는 아이같이 기뻐했다. 이 인물의 천재성은 그런 것 즉 지금보다 나이를 덜 먹었을 때는 뭐든 다 꿰뚫어 본 상태에서 누가 보아도 아이같이 행동하여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굉장함 에 있었지만 말년의 이 시기가 되자 노쇠가 뚜렷하여, 그런 천진난만함은 단순히 소박함으로 끝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코바야카와 가문이 명문가라고 기뻐하는 것에, 보는 세야쿠인이 창피할 정도로 기뻐하며,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는다는 것은 히데아키 녀석에게도 명예다.

 타카카게 안도감에 빠졌다. 그러나 이후 바빠졌다.
 문제가 된 본가의 후계자 자리를 서둘러 메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타카카게는 무리를 하였다. 모우리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타네다 모토키요[種田 元[각주:2]]라는 사람이 있다. 모토나리 말년[각주:3]에 얻은 서자로, 타카카게에게 있어선 배다른 동생이 되지만 생모의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가신의 자리에 있었다. 그의 아들로 미야마츠마루[宮松丸[각주:4]]라는 소년이 있어, 그를 모우리 가문에 양자로 들였다.

 종삼위(三位) 츄우나곤[中納言] 킨고 히데아키로 보면 - 피의 존비(尊卑)라는 점에서 모우리 가문 가신의 자식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무사히 낙착(落着)되었다.
  1. 카마쿠라 막부의 정무와 재정을 담당. [본문으로]
  2. 모토나리의 넷째 아들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 元清]'를 말한다. [본문으로]
  3. 모토나리 54세 때. 당시 평균 수명은 50세 근처라고 한다. [본문으로]
  4. 후에 정유재란 때 일본군 우군(右軍) 총사령관이 되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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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25 16: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듯 37만석의 주인이 되는거군요... 도무지 히데아키 녀석도 살생관백처럼 '재능'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녀석인듯;; 모든건 주변인들이 힘써준 결과라(..)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25 17: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면 휘둘렸다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 책 자체가 히데요시라는 거대 소용돌이에 빨려 든 인물들의 이야기 이지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7.12.28 1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아키의 초임관위가 사에몬노카미인줄 알았는데, 발해지랑님 글을 보니 우에몬노카미로 나오는군요. 제가 잘못알고 있었던듯 하네요. 뭐 어차피 그관직이 그관직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29 15: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의 말씀이 맞을 것입니다.
    시바 선생이 일부러인지 착각인지 몇몇 부분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른 부분이 있더군요.
    ...그쵸...어차피 그 관직이 그 관직 ^^

  5.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죠스이와 다카카게간의 공방전이 정말 재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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