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일찍부터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라는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훌륭한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같이 뛰어난 인물에게 국정을 맡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대놓고 말하자면 나오시게가 있었기에 류우조우지 가문의 융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1584년 3월.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에게 패하여 대장 타카노부가 전사하자 류우조우지 가문의 운명은 나오시게의 양 어깨에 달리게 되었다. 타카노부의 뒤를 이은 마사이에(政家)는 대장으로서의 기량이 결여되어 있었다. 히데요시의 천하였던 1587년, 이 마사이에의 범용함으로 인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모반혐의를 받게 된다.

 이해, 히고(肥後)에 있던 삿사 나리마사의 영내(領內)에서 토착 영주(国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근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전부 출진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며 출진하지 않은 것이다.(관련링크[각주:1])
 당시 오오사카(大坂)에 있던 나오시게는 서둘러 귀국하여 어쨌든 자신만이라도 출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히고(肥後)에 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등의 감찰관(軍奉行)들과 만났다. 감찰관들은,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고 하지만 실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하였다. 나오시게는 열심히 그 사실을 부정했다. 곧바로 마사이에를 데리고 참전하겠습니다 – 하고 변명에 힘쓴 후 사가(
佐賀)로 돌아와 마사이에를 나무란 후 참전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마사이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와카미 다이묘우진(
河上大明神[각주:2]) 의 신탁이 이르길 참전은 쓸모 없는 일이라고 나왔으며, 요가 신사(与賀神社)에 있던 녹나무의 잎이 전부 떨어지는 불길한 일이 있었다. 또한 이이모리 촌(飯森村)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타카노부)의 혼령이 씌어 출전하면 전사한다고 외쳤다더군. 성안에서도 여자의 우는 소리가 나는 등 이변이 끊이질 않네"
 나오시게는 너무도 어리석은 답변에 격노하며, 녹나무가 늙어서 잎이 떨어지는 것에 뭔 이상한 점이 있소 – 라며 불길하다는 말을 입에 담은 자를 즉각 처형하고,
 "주군은 여우에게조차 좆병진 취급[각주:3]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 질타하곤 히고(肥後)의 전쟁터로 끌고 나간 것이다.

 이리하여 마사이에는 모반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이런 마사이에였기에 점점 희미한 존재가 되어갔고 반대로 나오시게의 존재감이 커져만 갔다.
 1590년 결국 마사이에는 아직 35세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병약함을 이유로 은거의 몸이 되었다.
 이때 일문과 숙노들이 모여 회의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마사이에의 친할머니인 케이긴니(
慶誾尼[각주:4])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오시게님 말고는 류우조우지 가문의 안태를 꾀할 수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마사이에 다음의 가독은 나오시게님이 하셔야만 합니다"
 라는 의견을 내놓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동의를 했다고 한다. 또한 나오시게가 가독을 이은 배후에는 히데요시의 뜻도 작용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나오시게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조선의 왕자 둘[각주:5]을 포로로 잡는 대공을 세웠다. 후에 키요마사가 나오시게를 평하길,
 "내 생애에서 조선에서 싸운 것만큼 편한 적은 없었다. 모두 나베시마 나오시게 덕분이다. 공을 다투는 일 없이 군율을 엄격히 지키며 나에게 협력해 주었다"
 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오시게는 일찍부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역량을 파악하여 세키가하라() 후엔 토쿠가와의 천하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 혜안덕분에 막말(幕末)까지 35만석의 나베시마 가문은 이어질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비참했다. 마사이에의 아들 타카후사(高房)는 영지(領地)를 나오시게에게 빼앗긴 것을 원망하여 1607년 19살의 자기 부인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꾀하여 실패. 결국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후년 이야기꾼(講談)들에 의해 유명해진 [나베시마 냥이 소동(鍋島猫騒動)[각주:6]]은 이 류우조우지 가문의 원한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라 한다.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
1583년생. 첫 이름은 노부나리(
信生). 류우조우지 가문(竜造寺家)의 가신이었지만 타카노부(隆信)의 죽음 후 실권을 장악하였고, 1590년 류우조우지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히젠(肥前) 사가 성(佐賀城)의 성주가 된다. 1618년 6월 죽었다. 81세[각주:7].

  1. 전국무장 말년과 최후. '삿사 나리마사'항목의 중간쯤 관련 사항이 나와 있습죠. [본문으로]
  2. '요도히메카미(與止日女神)'의 별칭. 바다의 신인 '와타츠미카미(大綿津見神)'의 딸 혹은 일본 판타지 주인공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여동생이라고도 한다. 히젠(肥前)에서는 가장 급수가 높은 신사(肥前一宮)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말로 "여우에 홀리다(狐憑き)"는 말이 있다. [본문으로]
  4. 류우조우지 가문을 위한다며 50가까운 나이에 나오시게의 부친을 강제로 취한 타카노부(隆信)의 모친. 즉 나오시게의 양엄마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함경도에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 그들이 잡았다기 보다는 반란을 일으킨 함경도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혀 넘겨졌다. [본문으로]
  6. 여러 버전이 있는데...대충 종합하면...나오시게의 아들 카츠시게(勝茂)가 사사로운 일로 가신을 죽였다. 그 가신에게는 늙은 모친이 있어 아들이 죽자 카츠시게를 저주하는 말을 기르던 고양이에게 하다가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한다. 고양이는 모친의 피를 핥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카츠시게는 병이 들거나 그의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또한 성안에 이변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수상히 여긴 가신들이 불침번을 서다가 새로 성에 들어온 카츠시게의 측실 '토요노카타(豊の方)'가 고양이괴물로 변해 일을 꾸미는 것을 퇴치한 이후로 카츠시게의 병도 낫고 이변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버전에서는 타카후사가 기르던 고양이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죽을 때 귀에 생긴 종양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죽었기에 이것이 류우조우지 타카후사의 저주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나베시마 냥이 소동'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조부(祖父) 때부터 삼대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는 로마로 [텐쇼우 소년 사절단(天正少年使節)]을 파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 등의 다이묘우(大名)와 공동으로 파견하였는데 이 소년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아리마의 히노에 성(日野江城)아래에 만든 일본 최초의 세미나리요(초등신학교[각주:1]) 출신들이었다.
 사절단을 파견한 1582년에 하루노부는 16살이었다. 이 해의 1월 28일 4명의 소년들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하기 위해 저 먼 이탈리아를 향해서 출발한 것이었다.

 하루노부는 이 사절단 파견의 3년 전에 세례를 받아 '동 프로타지우(Don Protasio)[각주:2]'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하루노부는 세미나리요에 이어 영내(領內)인 카즈사(加津佐)에 고등신학교라 할 수 있는 '콜레지오'를 세웠다. 이곳에는 후에 소년 사절단이 유럽에서 가지고 온 일본 최초의 인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미나리요에서는 교리(敎理) 외에도 국어(일본어), 라틴어, 문학, 음악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회화(繪畵)나 천에 수를 놓는 자수(刺繡)까지 과목에 들어갔다.

 아리마 가문의 시조는 해적대장군으로 유명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 純友)[각주:3]라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선조인 타이라노 나오즈미(平 直純)가 스미토모의 아들이라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그런 설이 내려온 것이라 한다.
 후에
큐우슈우(九州)의 다섯 개 지역(
)[각주:4]과 두 개의 섬(島)[각주:5]을 영유(領有)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조부 하루즈미(晴純)때부터의 숙적이었다. 하루즈미는 히젠(肥前) 내의 4개 군(郡)을 영유(領有)하며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각주:6]에 이름을 올렸지만, 1563년 타카노부와 싸워 대패한 이래 아리마 가문(有馬家)은 류우조우지 가문 아래서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1581년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씨(島津氏)가 류우조우지 공격군을 일으켜 히고(肥後)로 진격해 왔다. 하루노부는 이 소식을 듣자 드디어 때가 왔다며 곧바로 류우조우지와의 협정을 파기하고 시마즈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전선은 고착되어 1584년에 되자 하루노부는 시마즈에 원군을 요청. 한편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도 5만7천의 대군을 이끌고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로 진격을 개시했다. 류우조우지 군은 무기도 풍부하여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정공법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3월 24일. 모리타케 성(
森岳) 기슭에 포진한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적을 자군 진영 깊숙이 끌어들여 적의 전열을 늘어지게 만든 뒤 복병을 이용하여 기습, 분단된 류우조우지의 대군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류우조우지 타카노부까지도 죽인 것이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에서도 살아남았지만 토쿠가와(川)의 세상이 되자 하루노부는 불행한 사건에 휘말려 자해하게 된다.
 발단은 1609년 12월에 일어났다. 나가사키(長崎)에 정박 중인 포루투갈의 배 '마드레 데 제우스(Madre de Deus)' 호를 하루노부가 습격하여 침몰[각주:7]시킨 것이다. 2년 전 아리마 가문의 무역선 승무원이 마카오에서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서양선 습격 사건이 뜻밖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라는 사기꾼에 낚인 것이다. 오카모토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으로 하루노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였다.
 이 오카모토가 하루노부에게 서양선 습격에 대한 은상으로 이에야스가 땅을 하사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온 것이다. 하루노부는 이 거짓말에 속아넘어가 막대한 금품을 오카모토에게 바친다. 기다려도 땅을 주겠다는 말이 없음에 오카모토를 수상히 여긴 하루노부의 문의로 거짓이란 것이 들어나지만 감옥에 갇힌 오카모토는 하루노부가 나가사키의 행정관을 암살하려 했다
[각주:8]고 고발한 것이다. 어째서인지 하루노부는 변명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 카이(甲斐) 츠루 군(都留郡)으로 귀양가 거기서 자해하였다.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
1567년생. 1576년 형 요시즈미(義純)의 뒤를 이어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가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ヶ原) 전쟁 때 처음에는 서군에 속했지만 나중에 동군으로 돌아서 영지(領地)를 안도 받는다. 1612년 5월 자살. 46세.

참고: 아리마 하루노부의 목상()을 볼 수 있는 사이트(더 큰 이미지)

  1. 포르투갈 어. seminaryo. [본문으로]
  2. 사족으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이런 이름으로 나온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의 타이라노 마사카도(平 将門)와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기에 서쪽에서 난을 일으켰다.[죠우헤이-텐교우의 난(承平天慶の乱)] [본문으로]
  4.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5.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6. 바쿠후의 중신. [본문으로]
  7. 선원들을 탈출시킨 뒤 선장이 자침. [본문으로]
  8. 포르투갈 배를 처리할 때 제대로 못한다고 핀잔주는 나가사키 행정관에게 '이 일이 끝나면 저 놈도 죽여주마'라고 홧김에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시마바라(島原)의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싸워 패사(敗死)했을 당시의 모습을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하였다.
 [타카노부는 너무 뚱뚱해 말에도 타지 못하였기에 6명이 메는 가마에서 지휘하였다]
 주색에 빠진 말년의 타카노부를 생생히 전해주는 기록이다.

 처음에 타카노부는 절에서 생활하였다. 류우조우지 가문과 인연이 깊은 호우린 원(淋院)에 들어가 '엔게츠(円月)' 혹은 '츄우나곤(中納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승려답지 않게 호방하며 거칠고 난폭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엔게츠가 17살 때 류우조우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행이 찾아온다.
 1545년 1월에 조부 이에즈미(家純), 부친 치카이에(周家)를 시작으로 한 숙부 등 일족의 주요한 면면들이 아야베(綾部) 성주 바바 요리치카(馬場
周)의 모략으로 인해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이다. 그때 90세가 넘는 증조부 이에카네(家兼)가 바바 요리치카를 물리쳐 복수했지만 그 다음해의 봄,
 "츄우나곤(타카노부)는 남다른 기개와 그릇을 가지고 있다. 류우조우지 가문을 재흥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아이일 것이다. 츄우나곤을 환속시켜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류우조우지 가문은 사가 성(佐賀城)에 종가인 '무라나카 류우조우지(村中 造寺)'와 분가인 '미즈가에 류우조우지( 竜造寺)'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타카노부는 분가 출생이었다. 증조부의 유언에 따라 환속하여 타네노부(胤信)라는 이름을 칭한 타카노부는 종가의 당주 타네미츠(胤栄)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종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그 2년 뒤에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의 이름 글자 하나를 하사 받아 타카노부()로 이름을 고쳤다.

 1551년 그 오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타카후사( 隆房)에게 살해당하자 타카노부의 주변도 소란스러워 진다. 여러 호족들과의 항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이들을 전부 정복하였으며, 1559년에는 큐우슈우(九州)의 명문 쇼우니 토키히사(少弐 時尚[각주:1])를 물리쳐 무명을 높였다. 그 후인 1570년 8월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 대군을 이끌고 타카노부의 본거지 사가 성에 육박하는 큰 위기에 빠지지만 타카노부의 외사촌[각주:2]이며 동생이기도 한[각주:3] 모신(謀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활약으로 간신히 낙성은 면했다.[각주:4]

 그 전투에서의 일이다.
 오오토모 측에서 타카노부의 어떤 중신에게,
 "타카노부를 배신하고 우리 쪽으로 온다면 무엇을 바라건 다 해주겠다"
 는 편지가 화살에 엮여 날라왔다. 이 중신은 평소 타카노부와 사이가 안 좋았던 가신이었다. 그 편지가 타카노부에게 전해지자,
 "우리의 결속을 무너뜨리려는 오오토모의 책략이다"
 고 하며 그 편지를 펴 볼 생각도 안하고 버렸다고 한다.

 1580년 오오토모 휘하의 벳키 아키츠라(戸次 鑑連=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와 화의를 맺었을 때도 타카노부는 호방한 태도를 보여준다.
 벳키 측에서 큰칼(
太刀), 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온 사자(使者)가 오자 마침 식사 중이던 타카노부는,
 "마침 잘 되었군. 그 술을 이리 다오"
 라고 한 것이다. 측근은 예부터 적이 보내온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통례이며 어쩌면 독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지만 타카노부는,
 "아키츠라는 당대의 명장. 그런 더러운 수를 쓸 사나이가 아니다"
 고 말하며 밥그릇에 술을 세 번 따라 마신 뒤,
 "이 잔을 아키츠라에게 주마"
 하고는 사자의 발 앞으로 던졌다. 사자는 그 호쾌한 태도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1580년 가독을 적자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준 뒤부터 주색에 빠진 타카노부는 정신이 황폐해지기 시작하여 류우조우지 가문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딸의 남편을 속여서 죽이거나[각주:5]어린 인질을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이거나 하는[각주:6] 등의 행태에 휘하 장수들의 마음도 떠나기 시작한다.

 1584년 3월. 타카노부에게 최후의 시간이 온다. 시마바라 반도의 모리타케()에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 싸워 무턱대고 돌격만 하다가 패하여 죽은 것이다.
 시마즈의 용사 카와카미 사쿄우노스케(
川上 左京亮)에게 목이 잘렸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비참하게도 그 수급을 류우조우지 가문에 전해졌을 때,
 "재수없는 머리통은 우리도 필요 없다"
 며 아군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국경 부근의 간고우 사(
願行寺)로 보냈다고 한다.

[류조지 다카노부(竜造寺 隆信)]
1529년생. 히젠(
肥前) 사가(佐賀) 성주. 한때는 5개 지역()[각주:7]과 두 개의 섬(島)[각주:8]. 1584년 3월 시마즈(島津),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시마바라(島原)에서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56세.

  1. 후에 후유히사(冬尚) [본문으로]
  2. 나오시게의 모친은 타카노부의 숙모. [본문으로]
  3. 타카노부의 모친이 나베시마 가문과의 끈을 강화하기 위해서 48살의 나이로 홀아비가 된 나오시게의 아비에게 멋대로 시집갔다. [본문으로]
  4.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 오오토모 6만 vs 류우조우지 5000. 류우조우지 군은 사가 성(佐賀城)에서 농성. 오오토모 군의 허술한 틈을 눈치챈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야습하여 승리한 전투. 그러나 전술적인 작은 승리에 불과하여 이후 류우조우지는 오오토모에 화의를 청하여 그 휘하로 들어간다. [본문으로]
  5. 카마치 시게나미(蒲池 鎮漣). 증조부 이에카네와 함께 도망친 곳이었으며, 그 후에도 분가출신이기에 류우조우지 종가의 가신들에게 추방당했던 타카노부는 카마치 가문의 신세를 지며 그 군사를 빌려 다시 당주에 앉을 수 있었으나 카마치의 영지인 야나가와(柳川)가 너무 탐났고 시마즈로 접근하며 독립심 강한 사위를 놀러 오라고 꼬셔서 살해. [본문으로]
  6.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 統家)의 14살짜리 적자와 8살짜리 딸. 무네이에는 이때의 원한으로 타카노부가 패사하는 '오키타(沖田) 외길(畷)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시마즈 측의 선봉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본문으로]
  7.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8.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1587 4 17일 병사(病死) 55


스미타다의 사인[花押]

1533 ~ 1587.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城主) 아리마 하루즈미[有馬 晴純]의 아들.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서로 싸우던 양 가문의 화해(和解)를 위해서 오오무라 스미사키[大村 純前]의 양자가 된다. 또한 영내(領內)를 방문한 선교사(宣敎師)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가문[大村家] 18대 당주인 스미타다는 1563년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중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사실 스미타다는 히노에 성주인 아리마 하루즈미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伊][각주:1]의 딸이었다.

  17대 당주 스미사키에게는 타카아키[貴明]라는 서자(庶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타케오 성[武雄城]의 고토우 씨[後藤氏]를 잇게 하고,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일부러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하였다. 이 때문에 오오무라 가의 가신들은 분열되어 오오무라 가문 아래에 있던 열 여덟 가문이 타카아키를 따랐다.

 

 이 타카아키를 시작으로 스미타다의 정실(正室) 부인 오엔[おえん]의 친정이며 이사하야[諫早]에 본거지를 둔 사이고우 씨[西氏], 히라도[戸]의 마츠라 씨[松浦氏] 등 주변 영주(領主)에게 공격 받는 등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위협에서 영지(領地)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들을 인질로 받치는 등 말년에 이르러도 스미타다의 기반은 굉장히 약했다.

 

 이 약소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스미타다는 외국과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였고, 1569년 포르투갈의 배를 요코세[横瀬] 포구에 입항시켰다. 또한 다음 해 31살이 된 스미타다는 이 곳에서 선교사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세례를 받고 돈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주변 호족 연합은 이런 오오무라 씨의 이권을 뺏고자 요코세 포구를 공격하고 불을 질러 없애고, 스미타다도 일시적으로 거성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미타다는 예수회 선교사, 포르투갈 상인과 끊임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것이 영토 안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미타다가 세례를 결의한 배경에는 포르투갈에게 기대어 부와 무기를 얻고자 하는 흑심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차츰 기독교에 대해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다.

 

적은 인원으로 성을 지키다

 

 그러한 스미타다의 후반생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미타다에게는 4명의 측실(側室)이 있어 세자인 요시아키(善前)도 측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로 측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타다는 이를 무시하고 측실을 계속 두었다.

 한 편 정실 오엔은 남편이 측실을 두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처음엔 기독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은 지 7년 후에 기독교의 교리에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

 이 때 38살이 되어있던 스미타다는 오엔과 기독교의 서약에 따른 결혼식을 하였다. 이는 오엔의 희망에 따라, 처는 오엔 한 사람이며 측실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스미타다가 완전히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1573.

 스미타다는 주변 호족 연합에게 거성인 산죠우 성[三城城]까지 공격당하는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빠진다. 이때 선교사는 어떠한 때라도 자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미타다는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신의 목에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를 선교사와 교환하였다. 여기서도 신앙을 선택한 스미타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미타다는 과감히 성을 나와 돌격하는 등 적은 인원으로 성을 사수하여, '산죠우 칠기 농성[三城七騎籠もり]'[각주:2]이라 일컬어지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해, 스미타다는 6만의 오오무라 영민(領民)봉헌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1580년 오오무라를 방문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게 나가사키[長崎]와 모기[茂木]의 땅을 예수회에 기증했다. 나가사키는 이후 세계로 열린 항구로써 각광을 받게 된다.

 

하늘로 날려진 작은 새

 

 말년.

 스미타다는 사가[佐賀]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압박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세자인 요시아키를 사가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 요시아키가 인질이 된 2년 후, 동생 두 명도 인질로 보낼 수 밖에 없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강압적인 타카노부가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함으로 인해 스미타다가 겨우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이 51살 때이다.

 

 히데요[秀吉]가 시마즈 토벌의 군을 큐우슈우[九州]로 보낸 것은 15873월이었다. 오오무라 씨는 이 때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는데 스미타다는 종군(從軍)하지 않고 아들인 요시아키가 대신해서 출진했다. 왜냐면 이때 스미타다는 후두암폐결핵을 앓고 있어, 몸이 말라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신력은 신을 받아 들여 아름답게 빛났다고 기독교 사료는 말한다.

 

 스미타다는 의사가 하는 미신(迷信)에 바탕을 둔 치료를 원치 않았고, 신부에게 천당에 대해서 계속해서 들려주길 원했으며 그것을 들으면서 대단히 만족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카구치[坂口]의 은거 저택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스미타다는 영내(領內)구류(拘留)되어 있던 포로 200명을 석방했다. 마지막으로 새장에 있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4 17일. 반년에 걸친 투병 생활 끝에 5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1. 나중에 양아비가 되는 스미사키의 부친. [본문으로]
  2. 1500명을 상대로 7명의 무장과 70명의 여자들로 성을 지켰다고 한다. [본문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

1618 6 3일 병사(病死) 81

1538 ~ 1618

의형[각주:1]류우조우지 타카노부(龍造寺 隆信)를 섬기며 활약하지만 타카노부가 전사한 후 그의 아들 마사이에(政家) 휘하에서 히젠(肥前)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섬기면서 기반을 다져 후의 사가 번(佐賀)의 기초를 쌓았다.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류우조우지 가문의 가독(家督)을 가신인 나베시마 카츠시게(勝茂)가 상속하여 명실공히 [나베시마 사가 번()]이 성립된 것은 1607년이다.

 카츠시게의 아비인 나오시게는 이 해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자식이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70세였다. 그 후 81세까지 산다.


 그의 일생은 [기다림]의 인생이었다.
 무리해서 덜 익은 과일을 따지 않고 [익어서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천하의 권력자나 조직이 류우조우지 가의 상속을 나베시마 씨()가 이을 수 있게 인정하기까지 나오시게는 류우조우지 타카노부가 전사한 후에도 23년이란 시간 동안 기다렸다. 암묵적으로 타카노부의 후계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라고 대부분의 류우조우지 가신들이 인정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나오시게는 타카노부가 전사한 책임을 진다는 이유로 치쿠고(筑後) 야나가와(
柳川)에 틀어박혀 버렸다.

 류우조우지 일문(一門)이나 나베시마 가신단(家臣團)을 시작으로 히젠(肥前), 치쿠젠(筑前)등의 호족들이 복귀하라고 사정에 사정을 하고 나서야 사가 성(佐賀)에 가까운 카마치 성(蒲池)으로 돌아왔다.


 그는 과정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인간이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말이다.


오래 산다는 것


 은거 후의 일이다.

 나오시게가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부하 중 하나가,

이 마을에는 90살이 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오래 산 노인이니 만나서 축하해 주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하고 권했다.

 그러자 나오시게는 차갑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굉장히 불쌍한 인간이군. 오래 살았기 때문에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자식이나 손자, 친한 친구나 지인들과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 기분을 생각해 보게.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 노인에게 정말로 축하할 일인지를

 나이를 많이 먹는 것에 존귀함과 경하스러운 일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인생을 보냈는가가 더 가치가 있다 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자 [죽음]에 임하는 생각도 엄격해졌다.

 사가 성()개수(改修)가 끝날 즈음. 카츠시게(사가 초대 번주)가 부친인 나오시게에게 성 안내를 한 적이 있다. 안내를 받은 후 옆에 있던 측근에게 살짝 말했다.

 “카츠시게는 적이 공격해 왔을 경우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여차했을 경우 배를 가를 장소를 잊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할복을 무사의 미학으로써가 아닌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종언(終焉) 중에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늙은 무장의 유머러스한 경고였다.


나뭇잎 그늘의 꽃


 [나베시마 카가노카미 토요토미노 아손 나오시게(鍋島 加賀守 豊臣 朝臣 直茂)]

 나오시게가 살아 있을 때, 은거소에서 자기 자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석탑에 쓰인 문자이다.[각주:2]


 나오시게는 히데요시의 신뢰가 두터웠다. 나오시게의 주군이었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를 히데요시가 평했을 때,

 “확실히 타카노부라는 사람은 명장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면 나오시게에게 국정(國政)을 맡겼기 때문이다.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

 라는 의미의 말을 할 정도였다.

 류우조우지 사가 번()을 대신하는 나베시마 사가 번()으로 현실 상의 이행을 처음으로 공인한 것도 히데요시였다. 당시의 히데요시는 이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오오사카 성(大坂)을 쌓았고 칸파쿠()의 위치에 올랐으며 그의 거처인 쥬라쿠테이()로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天皇)를 초대하는 등 권세의 절정기였다. 히데요시가 54, 나오시게가 50세일 때이다.


 이해(1589) 1월에 나오시게는 종오위하(從五位下) 카가노카미(加賀守)에 임명받았다. 물론 히데요시의 주청(奏請)에 의한 영진(榮進)이다. 이때 그 때까지의 이름인 [노부나리(信生)]에서 [나오시게(直茂)]로 고쳤다. [나베시마 카가노카미 토요토미노 아손 나오시게(鍋島 加賀守 豊臣 朝臣 直茂)]의 유래인 것이다.


 이 문구를 돌에 새겨 남기려고 그가 결심한 때 - 천하는 토쿠가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다스릴 때였다. 은혜를 입은 고인(故人)에 대한 마음을 세키가하라(ヶ原) 때 실현시킬 수 없었지만 이제 나이라는 것이 그를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로 이끈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나뭇잎 그늘에 떨어져 있는 꽃을 발견했을 때, 마음속에 그리던 당신을 만난 듯한 기분이더이다

れに りとどまれる のみぞ びし 心地する

라는 [하가쿠레([각주:3])]라는 책 이름의 유래라고 알려진 사이교우(西行[각주:4])의 시구() 그 자체가 지장(智將) 나베시마 나오시게 일생의 좌우명이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1.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어머니가 나오시게의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본문으로]
  2. 여담으로...그가 죽은 후, 그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는 “鍋島加賀守'藤原'朝臣直茂”로 ‘토요토미(豊臣)’라는 본성대신 '후지와라(藤原)'라는 본성이 붙어있는데, 나베시마 씨(氏)는 본디 우다 겐지(宇多 源氏) 사사키(佐々木)씨(氏)의 후예이기에, 제대로 하려면 “鍋島加賀守'源'朝臣直茂”라 해야 한다. 이리 된 데에는 바쿠후의 눈을 의식한 결과이겠지만 뭔가 착오가 있었던 듯 하다. [본문으로]
  3. 무사도라는 것은 죽는 것을 깨닫는 것(武士道と云ふは死ぬ事と見つけたり)’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사가 번(藩)의 무사 교육서. [본문으로]
  4. 1118년 ~ 1190년. 승려, 시인(和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