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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모반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하지만 다인(茶人)으로서도 일류인 인물이었다.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챠완(井茶碗)은 '아라키 코우라이(荒木高麗)'라 불리며 명물을 기록한 여러 장부에 실린 천하의 명물이었다. 무라시게에게서 이에야스(家康)의 손으로 옮겨졌고 그 후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川家)[각주:1]에 전해져 지금도 토쿠가와 미술관(川美術館)에 보존되어있다.

 소년시대의 무라시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소년 무라시게는 힘이 대단히 셌다고 한다. 부친 요시무라(義村)를 태운 바둑판의 양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서는 방을 세 바퀴 돌았다고 한다. 겨우 12살 때의 일이다[각주:2].

 처음엔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가신[각주:3]이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幽))와 함께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가 뛰어난 활약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등의 다이묘우(大名)도 무라시게에게 배속되어 있었다.

 무라시게의 모반은 1578년에 뜬금없이 일어났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츄우고쿠(中)의 모우리 씨(毛利氏)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당시 무라시게는 셋츠(津)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무라시게의 뜬금없는 모반에 노부나가는 "무엇이 부족하여 그러는가?"라고 놀랐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하면서 "반역하려는 뜻을 버리고 인질로 모친을 바치도록"하고 설득의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로 보내진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각주:4], 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각주:5],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각주:6]였다. 히데요시도 이타미(伊丹)에 있는 무라시게의 거성(居城)으로 가서 뜻을 거두도록 재촉했다.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가 설득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모반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라키 가문의 가신이 노부나가의 적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 쌀을 밀매한 것[각주:7]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필시 진짜 원인은 노부나가의 잔인하고 폭군적인 성격을 무라시게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모반에 대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부나가에게 가려고 했지만 가노(家老)[각주:8]들이 "잠깐 동안은 용서하시겠지만 의심 많은 분이기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충고를 들은 것도 있어, 무라시게는 더 이상 오다 가문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청자(靑磁)로 된 꽃병(花甁)이 모반의 원인이라고 한다. 노부나가가 꼭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을 무라시게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삐졌다고 한다.

 승산이 있던 모반이 아니었다. 무라시게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무라시게의 휘하인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를 등돌리게 해서는 양도(糧道)를 끊자 무라시게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각주:9]. 이런 사정을 "처자식, 형제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처자식과 일족을 이타미 성(伊丹城)에 남겨둔 채 종자(從者) 5~6명만을 데리고 탈출한 것이다. 일단 아마가사키 성(尼ヶ崎城)으로 피신[각주:10]한 무라시게는 이후 하나쿠마 성(花城)[각주:11]에 갔다가 여기서 빙고(備後)로 가서 모우리 씨에게 보호를 청했다.

 무라시게에 대한 노부나가의 증오는 지독했다.
 그에 대한 보복은 이타미 성에 남겨진 무라시게의 처자에게 향해졌다. 21살의 미녀로 와카(和歌)가 뛰어났다는 무라시게의 부인을 시작으로 여관(女官) 등 122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때의 비명소리는 '하늘에도 소리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또한 여자 하인, 무라시게 부하의 어린 자식(
若党) 등 510여명을 네 채의 작은 집에 가두어서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고 한다.

 후에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친교가 있던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아 다인(茶人)으로 섬기며 일생을 마쳤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셋츠(摂津) 출신.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를 섬기며 셋츠 이타미 성(伊丹城) 성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에 임하고 있었지만 모우리(毛利)-혼간지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 후에 머리를 밀고 뉴우도우 도우훈(入道道糞)이라 자칭하였다. 1586년 죽었다. 52세.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쇼우군(将軍)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만들 수 있는 가문인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단 에도 시대를 통해서 쇼우군을 배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본문으로]
  2. 밥 많이 처먹는 아들에게 아비가 한 마디 하자 "무사는 힘이 쎄야 합니다"라 말하곤 그 증거랍시며로 저렇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정확히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셋츠슈고(摂津守護)인 이케다 카츠마사(池田 勝正)의 가신. [본문으로]
  4. 그의 딸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부인이었다. 참고로 이 부인은 이때 이혼하여 미츠히데의 중신 히데미츠(明智 秀満)와 재혼. [본문으로]
  5. 마츠이 유우칸은 사카이(堺)에서 노부나가의 대리인이었으며 또한 당시 노부나가의 차제구 수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다도에 밝은 무라시게와는 친분이 깊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6. 당시 노부나가 최측근 시동.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노부타다(信忠)에게도 신뢰 받고 있었다. 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포지션을 이어받은 것이 모리 란마루. [본문으로]
  7. 정확히는 무라시게 휘하에 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가신이 그랬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말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이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1년 가까이 버텼지만 무라시게를 궁지로 몰아 넣은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돌아섰기에 성을 버리게 된다. 참고로 상기의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는 이타미 성을 공격하다 전사. [본문으로]
  10. 이 성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거성. 참고로 이때 마지막으로 노부나가는 무라시게에게 아마가사키와 하나쿠마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이때도 싸우기는 하였다. 성을 공략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활약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 쓴 노부나가의 서장에도 언급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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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8 0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콘은 지가 용서비는걸 말려놓고 반란일으키니까 나중에 배신때리네요...

  2. 맹꽁이서당 2009.03.29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턴오버 님 말씀대로 우콘 황당하군요. 근데 노부나가 성격을 생각해보면 맞긴 맞는 말 같습니다.
    최소한 처자들에 대한 안전판은 마련해 놓고 거사를 일으킬 것이지.. 딸 뻘 (역산해보니 무라시게는 반란시 44세군요) 미녀 아내도 버리고 갈 정도면 알수없는 속사정이 급했나 보네요.

    이름은 모릅니다만, 노부나가 말년에 배신한 중신들이 몇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노부나가의 '광기'가 모두의 눈에 비쳤나 보네요. --a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9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나가의 성격은 결과론...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라시게의 배반은 노부나가에게 가신들에 대한 불신감 생성 버튼을 누르는 결과가 아니었나 하고도 생각하고요. 우콘이 도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저런 말을 했는지 아직까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모친을 인질로 받치고..."..를 보면 당시까지는 노부나나가 무라시게의 인질을 받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자마인 인물에게 셋츠를 맡기면서도 당시로는 당연시 되던 '인질'을 받지 않았던 것만 해도 노부나가가 무라시게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옅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만큼 충격도 컸겠고요. 일본에는...可愛さ余ってにくさ百倍...라는 말이 있습죠. 사랑했던 만큼 미움도 크다는 말인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이타미 성에서의 도주는....
      이런 설도 있습니다.
      이타미 성은 주변 강들과 절벽의 천연의 요새에, 성 안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総構え(호우죠우 오다와라 성의 유명한 구조...이지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総構え는 이 이타미 성이라고 합니다)...로 인해서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합니다. 따라서 도망이라기 보다는 아들 무라츠구의 아마가사키 성으로 가서 육지로는 오다 가문에게 포위된 것을 피해 배편(간척된 지금과는 달리 당시는 바다에 면한 성이었다고 하네요)으로 모우리(毛利)나 혼간지(本願寺)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다고도 합니다. 이타미 성이 워낙 튼실하니 자기가 없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노부나가를 배신한 중신은 미츠히데가 유일하지 않나요?

      전 아직까지는 이 무라시게의 배신부터 노부나가가 가신들에게 불심감을 품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3.29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다른 글에서 어느 중신이 (미츠히데 이전에)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야기를 봤었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다 보니 그가 바로 '아라이 마사시게'인줄 몰랐네요. 중복으로 생각한 셈이지요. --a 도자마 가신들에게는 인질이 당연시 되었군요. 덕분에 새로운 사실 하나 알아갑니다. ^^

    그러고보니 센고쿠 15권 말미에서 '외부 적들'과 '내부 적들'을 따로 작성하여 X를 긋는 노부나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군요. (물론 창작이겠습니다만...) 그땐 1574년이라 아라이의 반란 이전인 셈이네요.

    PS. 요새 이 블로그의 외부 링크를 타고 다른 블로거 분들의 역사 관련 포스팅을 훝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혹시 역사 쪽으로 추천해 주실만한 곳은 없으신지요? ^^

 천하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직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인 칸파쿠(白) 다이죠우다이진(太政大臣)까지 되었지만 그 출신이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의 성(姓)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렸을 적에 도적 하치스카 고로쿠(蜂須賀 小六)의 밑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유명하지만 스루가(駿河) 이마가와 가문(今川)에 속해있던 마츠시타 카헤이(松下 嘉兵衛)를 섬겼을 때의 이야기도 소년시대의 히데요시의 풍모를 전해주고 있어 흥미롭다.
 마츠시타 카헤에가 하마마츠(浜松)의 마을 밖의 히쿠마가와(曳馬川) 강 근처에서 얼굴이 특이한 아이를 주웠다.
 [원숭이인가? 하면 사람. 사람인가? 하면 원숭이]
 어느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는데 그것이 히데요시였다. 이때 카헤이는 하마마츠의 영주 이이오 부젠(飯尾 豊前)을 방문하여 "특이하게 생긴 꼬마를 주웠다네"하며 이 히데요시를 구경거리로 데리고 간 것이다. 이이오 부젠의 부인이나 딸들이 신기해하며 밤을 던져주자 히데요시는 마치 원숭이처럼 입으로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녀들은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후세에 만들어진 위의 이야기처럼 사서로 전해지는 것에서도 히데요시의 용모는 원숭이와 닮았던 듯 하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원숭이(猿=사루)'라고 불렀던 것은 너무도 유명한데[각주:1] 히데요시를 보았던 모우리(毛利)의 신하 타마키 요시야스(玉木 吉保)는 [붉은 수염을 기르고 원숭이 눈과 같이 정신 없이 움직인다.[각주:2]]하고 쓰여 있으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
)도 조선 침공 계획을 듣고 "원숭이놈 죽을 자리를 못 찾아서 미쳤나?"라 욕하고 있다.

 이쯤에서 히데요시가 출세할 수 있었던 비결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본다.
 우선 돈을 쓰는 방법이 절묘했다.
 전투를 할 때도 공을 세운 병사에게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상금을 주었다. 톳토리 성(鳥取城) 공략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가 성을 정찰하러 갔다가 적을 만나 물리치고서는 보고를 하였는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곧바로 황금 한 웅큼과 100석을 가증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
츄우고쿠(中
)에서 급히 아케치(明智)를 물리치기 위해 쿄우토(京都)로 향했을 때 돈을 뿌린 방식이 굉장했다. 히메지 성(路城)에 있던 금은과 쌀을 하나도 남김없이 부하들에게 준 것이다. 즉 이때 히데요시는 무일푼이 되었던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로 히데요시는 천하를 얻은 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돈이라고 하면 천하를 얻은 후 쥬라쿠테이(聚
第) 문 밖에서 돈을 나누어 준 것은 고금에 예를 볼 수 없었던 쇼였다. 금은 합계 36만 5천냥을 친족부터 시작해서 고급 귀족(公卿)이나 다이묘우(大名)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분배하였다.

 또 하나 히데요시 출세의 비결은 어떤 일이건 철저히 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철저히 봉사를 함으로써 주군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았다. 짚신을 따스하게 덥혔다는 에피소드에서 상징되듯이 오로지 주군만을 생각하였으며 자그마한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어떠한 공을 세우더라도 영지(領地)에 대한 야심은 병아리 눈곱만큼도 보이질 않았다. 츄우고쿠 정벌 때 노부나가가 하리마(播磨)를 준다고 하였지만 사퇴하면서 그보다도 조선(朝鮮)을 공략하게 되면 그 나라를 받겠습니다 – 라며 꿈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열석해 있던 다른 무장들은 코웃음 쳤지만 노부나가는 그 무욕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581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오우미(近江),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 등 70여만석이라는 영지(領地)를 하사 받았는데 이 때 고마움을 나타내고자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냈다. 타치(太刀) 한 자루, 은자(銀子) 6000매, 옷(小袖) 백 벌, 가죽 200매, 종이 200다발, 말린 도미 1000마리, 그 외에 도자기 등이 끝없는 행렬을 만들며 아즈치 성(安土城)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도 히데요시는 뛰어났다.
 천성적으로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인정미가 넘쳤고 미천한 신분 시대에 얻은 거짓말 안하기, 남을 속이지 않기가 다른 사람의 신용을 얻는 것이라는 '생활의 지혜'가 그 기본이 되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을 섬겼으며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시모츠케(下野)에 3만석을 하사 받은 사노 후사츠나(佐野 房綱)는 "신겐공이나 켄신공을 만날 때는 분위기가 엄격하여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히데요시공은 '여어~ 텐토쿠지(天
寺=후사츠네의 호). 잘 오셨네'며 굉장히 친근하면서도 정중한 말투를 쓰셨기에 감개무량하였다"고 히데요시의 거드름 피우지 않는 성격을 전해주고 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도,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등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산하의 다이묘우(大名)가 인질을 받쳐 충성을 맹세하고자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그럴 필요 없소"하며 인질을 받지 않았다.

 또한 히데요시는 남을 직접 돌봐줄 때도 마치 자기 친형제에게 하는 듯이 애정 넘쳤다. 나가쿠테 전투(長久手合)에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모토스케(助)가 전사하였을 때, 츠네오키의 부인을 위로하고 남겨진 차남 테루마사(輝政)를 친자식처럼 키웠으며, 비젠(備前)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노부나가에게 미움 받았을 때는 노부나가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감쌌다.
 속이지 않으며 약속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저 나오이에에게 약속한대로 아들인 히데이에를 후에 오대로(
五大老)의 한 명으로 만들 정도로 크게 중용하였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경우 그의 주인 요시카게(義景)를 배반한 요시아키라의 행위에 노부나가는 혐오하며 용서치 않으려고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끝까지 노부나가를 설득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다.

 조선의 기록에 파격적인 히데요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있다.
 1590년 11월 조선의 사자(使者)를 접견했을 때였다. 술을 내어 접대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는 잠깐 나갔다가 갓난아이(장남 츠루마츠(鶴松))를 안고 들어왔다. 안고서 실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조선의 악사(樂師)들에게 연주를 시키게 하던 중 그 갓난아이가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히데요시의 옷도 다 젖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웃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고 한다. 조선의 사신은 이를 '방약무인'이라고 평하였다.[각주:3]

 무엇이든 스케일이 다른 히데요시는 호색도 남달라 수 많은 측실을 데리고 있었지만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에 대한 배려만은 허술히 하지 않았으며 세세했다. [신신당부하네만 대변이 나올 수 있게 쓰셨으면 하는 마음에…]하고 설사약에 대한 것까지 편지에 적고 있다.
 후계자를 낳은 요도도노(
淀殿)에 대한 애정은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20일 즈음에 반드시 네게로 가 도련님(츠루마츠)을 안고 싶구나. 밤에는 너와 함께 자고 싶다…]고 쪽팔리지도 않은 듯이 편지를 쓰고 있다. 한편으론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진영에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어서는 '당신 말고는 요도가 맘에 들더군' 라는 등 서열을 확실히 정하여 그녀의 우월감을 만족시켰다. 또한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에 대한 효심도 깊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이던 1592년에 오오만도코로가 죽자 히데요시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기절했다고 한다.

 센고쿠(戦国) 시대는 사람 좋은 것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다. 히데요시도 또한 센고쿠 무장이다. 천하인(天下人)이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무장이 아니면 안 된다. 히데요시가 천재적인 무략가라는 예를 들어보자.
 1582년 6월. 히데요시 46살 때였다. 빗츄우(
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수공(水攻)하고 있던 6월 3일 한밤중의 히데요시 본진에 혼노우(本能)사()의 변보가 전해졌다.
 이 순간부터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일개 부장에서 천하인으로의 길을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군을 질타하여 폭풍우 속의 타카마츠를 출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였다. 히메지(
)까지 100km를 불과 하루 만에 돌파라는 엄청난 스피드였다. 이것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순식간에 물리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후 시즈가타케()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격파한 것도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오로지 히데요리()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져 더 이상 천하를 취한 영웅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는 그냥 평범한 노인으로 변모하였다. 3살의 히데요리에게 보낸 편지에 '곧 너를 보러 갈 테니 그 때까지 엄마의 젖을 많이 빨고 있으렴' 등을 쓰며 요도도노의 모유 상태까지 걱정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히데요리의 장래가 걱정되었는지 죽음이 가까운 1598년 8월 5일 병상에서 이에야스(家康)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등 오대로(五大老)에게 '히데요리가 다 클 때까지…'하고 불안하다는 듯이 유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13일 뒤인 18일 미명. 63세의 나이로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년 오와리(尾張)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다 가문(織田家)의 아시가루() 키노시타 야에몽(木下 弥右衛門). 최초의 이름은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1574년에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가 되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멸망시켰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후 화해. 1585년 49살 때 칸파쿠()가 된다. 다음 해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되어 성을 토요토미(豊臣)로 바꾸었다. 1587년 쥬라쿠테이() 완성. 1598년 8월 제2차 조선역(朝鮮役)[각주:4]이 한창이던 중에 죽었다.

2007/03/23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1. 노부나가가 그를 '원숭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노부나가는 그를 대머리생쥐(禿げ鼠)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것도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만 보이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2. 원문의 猿まなこをぎょろつかせ・・・猿まなこ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낸다는 뜻이지 원숭이와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즉 이 책의 저자는 예시를 잘못 들은 듯. [본문으로]
  3. 有頃, 秀吉 入內, 在席者不動。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小兒遺溺衣上, 秀吉 笑呼侍者, 一女 倭 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3번째 기사. [본문으로]
  4. 정유재란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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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2.26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
    그러고보니 궁금한 것이.. [헤이케 모노가타리]에서 성과 이름 사이에 '노'를 붙인 것을 많이 봤지요. 보통 전국시대 무장들 이름엔 '노'가 없던데 번역하신 책에서 풍신수길에게만 '노'를 붙인 특정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7 2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게 또 별로 안 복잡하면서 설명하기는 쪼큼 힘든 것이라...

      우선 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 수가와라(菅原) 등등등...그냥 텐노우가 하사하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 본성의 아래에 있는 개념(??)으로, 어느 곳의 땅을 얻어서 그 땅의 지명을 성으로 이용한 것이 묘우지(苗字)... 오다 가문의 경우 후지와라의 후손 중 하나가 오다장(織田庄)의 영주가 되면서부터 사용한 것이 오다씨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오다(織田)는 묘우지(苗字 - 성의 발상지)이며, 그의 본성(本姓)는 전성기때는 타이라(平), 초창기는 후지와라(藤原), 그 오다 가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베(忌部)라고 하지만...어쨌든... 오다 노부나가도 타이라의 성을 이용할 경우는 타라이노 노부나가(平 信長)가 되옵죠..

      히데요시의 경우 텐노우에게 토요토미(豊臣)라는 본성을 하사받은 다음 부터는 그것만을 사용했다고 하기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하시바(羽柴)나 키노시타(木下)라는 묘우지를 사용할 경우는 그냥 하시바 히데요시, 키노시타 토우키치로...로 하고 있습죠.

      보통 본성은 궁정에서 활동할 때 주로 쓰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냥 본성일 경우 '**노 **'..라고 쓰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과 토요토미 성을 하사 받은 이후 히데요시는 본성만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2.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6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만화방에 갔는데 '센고쿠'라는 만화책이 있더군요. 전국시대를 사는 무사 이야기를 다뤄서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거기서도 히데요시의 '대머리 생쥐' 별명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3. 히히후 2011.08.15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통일하고 천하인이라니 허세가 하늘을 찌를듯하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15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일본에서 '천하'라는 개념이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거기에 히히후님이 천하를 어떤 개념으로 아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한 문명의 권력면에서 정점에 다다른 자라면 천하인이란 단어를 못 쓸 것도 없습지요.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1586 5 4일 병사(病死) 52.

생년불명[각주:1] ~ 1586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겨 셋츠() 아리오카(有岡)()의 성주(城主)가 되었다. 후에 모우리(毛利)(),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고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여 도망쳤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시대가 되자,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다도(茶道)를 배워, [利休七哲[각주:2]]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의 다인(茶人)이 되었다. (그림은 KOEI의 태합입지전V)






풍류의 자리에 있던 이외의 인물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난 지 1 3개월 정도 지난 1583 9 16.

 아라키 무라시게는 죽은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쿄우토(京都)와 킨키(近畿)의 새로운 패자(覇者)가 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처음으로 개최한 [차 도구 전시회 = 御道具揃]에 참가하였다.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道薰(도우쿤)]이라는 호를 칭하고 있었다. 참가한 면면(面面)을 보면,

구우나이쿄우(宮内卿) 호우인(法印[각주:3])[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

소우에키(센노 리큐우 = 千 利休)

모즈야 소우안(万代屋 宗安)

텐노우지야(天王寺屋[츠다(津田)]소우규우(宗及)

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전부 노부나가의 풍류 취미와 관련된 스키샤(数奇者[각주:4])이며 사도우(茶頭[각주:5])였다.


더구나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케다 쇼우뉴우(勝入)[츠네오키(恒興)],

의사인 토쿠운켄(德雲軒)[야쿠인 젠소우(院 全宗)]

가 있었다. 츠네오키는 노부나가의 유형제(乳兄弟[각주:6])였으며, 토쿠운켄은 산몬(山門[각주:7])이나 조정에 연줄이 있는 승의(僧醫)였기에 둘 다 히데요시의 권력장악에 불가결한 사람들이었다.


 소우규우나 소우에키라는 당대 풍류의 세계를 둘로 나뉘고 있던 다도(茶道)의 거장들과 섞여 무라시게가 내 놓은 것은 [모모지리(桃尻)의 하나이레(花入[각주:8])], 못케이(牧溪)가 그린 걸개 그림인 [범귀회(帰絵)], [효우고(兵庫)의 오오츠보(大壷)] 어느 것이나 이름있는 명물이었다.


 주군(主君)의 복수전이 된 야마사키(山崎)의 싸움에서 이기고, 자기 입으로 일본 통치는 이제부터라고 한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싸움 및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싸움을 이겨 정청(政廳)으로 오오사카(大坂)()과 쿄우토(京都)에 저택을 짓기 시작한 히데요시의 면목을 살리기에 충분한 전시회가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이상한 것은 이러한 장소에 어째서 무라시게가 있을 수 있었냐는 점이었다.


 무라시게라고 하면 1578 10월.

 혼간지(本願寺)에 딸을 인질로 보내어 법주(法主)인 켄뇨 코우사( 光佐)와 맹약을 맺고서는 주군인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한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거성(居城)에서 쫓겨나 영지(領地)도 잃고 방랑의 몸이 되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런 무라시게가 하필이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히데요시 밑에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확실히 무라시게는 셋츠의 이케다(池田)()의 부하에서 올라 온 토자마(外様[각주:9])의 신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셋츠의 국주(国主)로 발탁시켜 준 노부나가를 가장 중대한 국면에 배반하여 숙적인 혼간지(本願寺)와 모우리(毛利)()의 연합세력으로 달려간 반역자였기에 오다(織田)쪽에게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었을 터였다.


다인(茶人)으로 여생을 보내다.


 당초 여러 방법으로 무라시게의 뜻을 돌릴 방법을 시도했던 노부나가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공격에 전념하였다.

 우선 무라시게에게 가담하고 있던 셋츠 타카츠키(高槻)()의 성주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이바라키(茨木)()의 성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등을 귀순시킨 후에 무라시게의 거성(居城) 아리오카(有岡)를 포위하였다. 1578 11월부터 10개월간에 걸친 장기 포위전을 전개 하여 다음 해 1579 9 2 무라시게가 처자식을버려둔 채 아리오카성()을 탈출하여 아마가사키(尼崎)()으로 도망치자, 노부나가 군세는 아리오카성을 함락시켜 무라시게의 처자식과 친척 36명을 쿄우토(京都)의 로쿠죠(六条) 강변(河原)에서 처형하였고, 가신(家臣)의 처자식 120여명을 성 아래서 십자가 같은 곳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510여명을 역시 성 아래 4개의 집에 쳐 넣고 불을 질러 죽였다.[立入左京亮入道隆佐記].

 그 비참함엔 구경하던 사람도 눈물을 흘렸고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여서 부처가 이 세상을 창조한 이래로 이러한 일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한다.


 이런 학살이 일어날 즈음. 무라시게는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하나구마(華熊)()으로 피난하였지만 여기도 1580 7월 초 즈음에 오다 세력에게 공격받아 낙성(落城)되자 모우리(毛利)()의 영토로 도망쳤다.자신의 처자식뿐만 아니라 친척, 가신의 처자식마저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와중에 거성(居城)이나 일족(一族), 가신을 계속해서 버려가며 도망친 무라시게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라시게가 주가(主家)인 이케다(池田)()를 쓰러뜨리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일으킨 것은 참언(讒言)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시야마(石山)()[本願寺]을 포위하고 있던 아라키 무라시게의 부대에서 매일 밤마다 작은 배를 이용하여 성()안으로 쌀을 팔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노부나가에게 변명을 하려 했던 무라시게를 측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만류하여 어쩔 수 없이 반역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을 안 노부나가의 적남(嫡男) 노부타다(信忠)나 히데요시들이 무라시게를 굉장히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寬政重修諸家譜]


 이 때문인지 혼노우(本能)()의 변 후 머물던 빙고(備後) 오노미치(尾道)에서 다인(茶人)인 츠다 소우규우(津田 宗及)에게 사람을 보내는 등 해서 히데요시에 대한 알선을 의뢰한 듯하다. 히데요시에게서 셋츠인지 이즈미(和泉)에 조그만 영지(領地)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주로 다도(茶道)를 통해 섬겼던 듯하다. 모우리(毛利)()와 관계 개선을 꾀하려 하던 히데요시에게 무라시게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1586년에 사카이()에서 죽었다.

 후반생은 하극상으로 몸을 일으켰던 효웅(梟雄)의 이미지와는 먼 일개의 스키샤(数奇者)와 같은 최후였다.

  1. 위키피디아와 KOEI 태합입지전 평전에는 1535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리큐우(=宗易)에게 배운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아라키 무라시게의 경우 오다 우라쿠사이(織田 有楽斎),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3. 승정의 최고위. [본문으로]
  4. 풍류인(風流人)을 말하나 주로 다인(茶人)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5. 다도(茶道)의 자리에서 리드하던 사람. [본문으로]
  6. 같은 여성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모의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보통은 '절'을 뜻하나 여기서는 히에이산(比叡山) 엔략쿠(延暦)사(寺)를 말함. [본문으로]
  8. 다도할 때 꽃을 꽃아 놓는 도자기. [본문으로]
  9. 대대로 섬긴 가문 아닌 새로 부하가 된 가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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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6.19 13: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고 혼자 빠져나온 아라키 무라시게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6.19 16: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처음 중이 되었을 때는 "道糞(즉 길 가의 똥)"이었지만, 히데요시가 발음이 비슷한 "道薰(도우쿤)"으로 바꾸라 했다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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