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세상이 된 다음의 일이다. 
 어느 날,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거성 치쿠젠[筑前] 후쿠오카 성[福岡城]에서 무사들이 모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무사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시마 사콘[島 左近]은 정말 무서웠지. 지금도 눈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니까”고 몸서리치며 말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도 그러하다며 수긍하였다. 
 그러나 그 시마 사콘이 당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기억들이 달라 서로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침 쿠로다 가문에 있던 미츠나리의 옛 가신(家臣)이었던 사람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그 가신의 말에 따르면 투구의 앞장식[立物]은 삼 척(尺)[각주:1] 정도 되는 텐츠키[天衝]를 붙이고, 갑옷은 옻칠을 한 가죽 몸통갑옷[溜塗り桶革胴], 연황색 목면의 전포[陣羽織]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링크:당시 시마 사콘이 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갑옷 - 위에서 두 번째 것이 시마 사콘의 갑옷
 이것을 듣고 모여있던 쿠로다 가문의 무사들은, “보통 그렇게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잊지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우리 쿠로다 가문은 이시다 가문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잖아. 정말 그렇게 가까이서 사콘을 보았으면서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우리는 정말 당황했었나 보군, 정말 쪽 팔린 일이로세”하고 개탄하였다. 그래도 그 중 하나가, “아니지. 그렇게 온몸의 털이 다 설 정도로 공포에 떨었으며, 자칫하면 우리들 목도 사콘의 창에 꿰였을 수도 있을 터인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마 사콘 –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개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의 성[佐和山城]’이라 일컬었을 정도의 무장이지만, 그의 이력은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엔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의 성주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를 섬기었으며, 쥰케이의 가신 마츠쿠라 우콘[松倉 右近]과 쌍벽을 이루며 ‘우콘-사콘’이라 칭해진 전술가(戰術家)였다. 후에 낭인이 되어 오우미[近江] 타카미야[高宮]에 은거하고 있을 때, 사콘의 장재(將材)를 높이 산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듭된 부탁에 꺾여 미츠나리를 섬겼다. 그때 미츠나리는 4만석의 소령(所領) 중 반분 가까운 1만5천석을 사콘에게 주었다고 한다.[각주: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이런 사콘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빠지자, 검술사범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를 사콘에게 파견하여 사콘의 뱃속을 살피게 하였다. 무네노리와 사콘은 동향 출신이었으며, 또한 무네노리 역시 츠츠이 가문[筒井家]을 섬긴 적이 있어 사콘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각주:3] 
 잠시 잡담을 나눈 후 무네노리는 사콘에게 천하의 향방이 어찌될 것 같은지에 대해 물었다. 사콘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처럼 지모와 결단력 있는 인물이 없기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주군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모는 있어도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사실 사콘은 몇 번이나 미츠나리에게 중대한 결단을 촉구했으며, 그럴 때마다 각하 당했다.

 미츠나리가 무공파 칠장[각주:4]에게 공격받아 이에야스의 중재로 사와야마에 은퇴하게 되었을 때, 사콘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며 이런 작전을 세웠다. “사와야마를 1천의 병사로 수비하고, 2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시미[伏見]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이에야스를 죽여버립시다.”고 진언하였다. 미츠나리는 때가 아니라며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또한 이 이후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에 향하던 도중 오우미[近江] 미나구치[水口]에 머문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도 사콘은 야습을 진언했지만 미츠나리는, “그에 대해서는 미나구치 성주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맡겨두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0년 9월 14일 세키가하라 결전의 하루 전. 아이즈 정벌군을 회군한 동군(東軍)의 총수 이에야스가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에 도착하자, 오오가키[大垣]에 있던 서군(西軍)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때 사콘은 아군의 사기를 여기서 높이지 않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이라 보고, 500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오오가키와 아카사카 사이에 흐르는 쿠이세 강[杭瀬川]까지 진출하여 동군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아리마 토요우지[有馬 豊氏]의 군을 유인해서는 쳐부수어 서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어서 그날 밤 작전회의에서 야습을 진언했지만 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콘은 자신의 진소(陣所)에 돌아가서는 가신들을 모아, 가신들의 목숨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전했다 한다.

시마 사콘[島 左近]
이름은 키요오키[清興]. 일반적으로 카츠타케[勝猛]가 유명하다. 츠츠이 가문[筒井家] 다음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의 아들[각주:5] 히데야스[秀保]도 섬긴 적이 있다고 한다.

  1. 약 91cm. [본문으로]
  2.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이러했다고는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거기에 더해 사콘의 딸은 무네노리의 조카이며 후에 오와리 야규우[尾張柳生]의 시조인 야규우 토시토시[柳生 利厳]의 부인이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5. 양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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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2.02.19 2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머리에 시마사콘이 밟고있는 꼬리를 보니 여우인지 모를 사이클롭스(..)는 뭘까 궁금하네요. 시마사콘의 오니 퇴치 전설같은거라도 따로 있는거려나요.

    그러고보면 시마 사콘이 진언한 야습내지 기습을 족족 각하시켰다는건 이시다 미츠나리로서는 정공법으로 승부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라고 해석할수 있는 여지가 있으려나요. 만약 그랬다면 요즘 신나게 주가를 띄우고있는 캡콤겜이라거나 코에이겜에서의 미츠나리도 좀 평가절하되야겠습니다만(허헣;)

    사족이지만 올려주신 링크페이지를 내려 구족들 훑어보니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수리부분에 빗자루를 달아놓은듯한 투구와 예의 그 쿠로다 나가마사 태양전지판 투구(..)가 굉장히 눈에 띄는군요. 그밑으로도 토도 타카토라는 무슨 프로펠러같은걸 투구에 붙여놓은거라더가(;;)

    타치바나 무네시게도 꽤 기이한 투구를 쓴듯 싶은데 이거 전국무쌍3에서의 성기사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터라 실제로 이런걸 보면 갭이 크군요. (어이쿠;;)


    아 로또당첨 축하드립니다. 저는 왕회장님과 영광스럽게도 악수하는 꿈을꾸고 한장인가 사봤는데 5등(..)나왔던게 제일 잘나온것이더군요. 도대체 누구와 만나야 1등을 받을수 있는걸련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0 1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글로 써진 부분에 그런 것이라도 있나? 해서 읽어보아도 그런 것은 없더군요.

      근데 그 야습설이라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미츠나리 까기 위해서 쓰인 글들이라...예를들어, 시마즈 요시히로나 토요히사가 야습을 진언했을 때 물리친 것은 시마 사콘인데, 이때 사콘은 "내일 작전대로 정면 승부한다면 필시 이에야스의 갑옷 뒷모습을 보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토요히사가 "당신은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기는 한가?"라고 하자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을 때 미카타가하라에서 도망치는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소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죠.(여담으로 이 일화를 가지고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던 적이 있네 없네 하죠..--; ). 기본적으로 야습이란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필연적으로 소인수 밖에 움직일 수 없으니 성공한다고 쳐도 그 성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상대도 병신이 아니니 대비가 되어있을테니까요.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기본적으로 야습을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국지연의 등의 소설이 유포된 뒤에 군담작가들이 생각해 낸 것이 각종 야습설이라 생각합니다.

      타카토라 투구의 저것은 중국 관리들이 쓰는 모자(冠帽)를 흉내낸 것인데..좀 大袈裟인듯요.

      고맙습니다. ^^ 당첨금으로 담배나 좀 쟁여놔야 겠습니다.

  2. ㅇㅇ 2015.07.05 07: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 3병법이라는 명성에 비해 나오에랑 활약이 적군요. 아니면 모셨던 주군들이 변변치 못했다던지.

 쿄우토[京都]의 산쥬우산켄 당[三十三間堂] 앞에 요우겐 원[養源院]이라는 절이 있다. 사람들은 요우겐 원 본당의 천장을 일컬어, ‘혈천정[血天井]’이라고 하다. 기분 나쁜 흑색으로 천장에 늘러 붙은 혈흔 – 그것이 장렬한 낙성을 보여준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와 그의 사졸들이 흘린 피였던 것이다.

 절의 역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절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가 망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였지만 나중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각주:1] 요도도노의 동생이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수우겐인[崇源院][각주:2]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각주:3] 재건할 때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이 세웠던 절을 재건시킬 수 없다고 하자, 후시미 성에서 전사한 토리이 모토타다 들의 혈흔이 새겨진 후시미 성의 마루바닥을 요우겐 원의 천장으로 하여 모토타다 들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세웠다고 한다.[각주:4]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의 전초전 격으로 치러지고 낙성된 후시미 공방전이야 말로 미카와 무사[三河武士]의 본질을 잘 알려주는 전투였다. 의리 있고 완고하며 주군을 위해서는 온 몸을 바친다. 그러한 미카와 무사의 전형을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가 농성전에서 보여준 것이다.

 토리이 모토타다는 부친 이가노카미 타다요시[伊賀守 忠吉][각주:5]의 아들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당시엔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을 대대로 섬겼다는 가문[普代]에서 태어났다. 모토다다는 13살 때부터 3살 연하인 이에야스[家康]를 근시(近侍)하였다.

 미카와 무사 모토타다의 충섬심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땐가 이에야스가 모토타다에게 몇 번 모토타다의 공적을 상찬하는 표창장[感状]을 주려고 하자 모토타다는,
 “표창장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다른 가문에 취직할 때 이력서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토쿠가와 가문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가진 적이 없기에 그러한 표창장은 저에겐 휴지쪼가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고 거절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히데요시[秀吉]가 모토타다에게 조정의 관직을 주력 하자 모토타다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뭘 하건 서투르기에 이군(二君)에게 충성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거기에 미카와에서 자란 시골뜨기라 역시 뭘 하건 투박하여 도저히 관위를 얻어 전하(=히데요시)의 앞에서 어떤 실수를 할 지 모르옵니다. 부디 관위에 관해서는 생각을 거두어 주시길.”
 하고 완고히 사퇴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정중하면서도 히데요시에 대한 접근을 거부한 것이다.

 모토타다의 경우 이러한 의리 있는 모습, 완고함은 자신의 주군 이에야스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1580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 측의 타카텐진 성[高天神城]을 공격하였을 때, 격전을 치른 뒤 모토타다의 부대는 험한 산길에 본진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급부대가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계속 된 격전에 피로와 굶주림으로 지쳐갔다. 그러던 중 모토타다에게 한 병사가 밥을 한 상 차려왔다. 부근의 민가를 돌아다니며 조달해 온 것이었다. 모토타다는 병사의 얼굴을 보고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으나 행여라도 싶어 보급대가 도착하였는지, 병사들은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역시 아니라고 하였다. 모토타다는 말했다.
 “장수인 자가 병사들과 함께 고생도 하지 않고 무슨 전공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식량이 없다면 너희 병사들과 함께 굶어 죽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고 말하며 차려온 밥상을 눈 앞의 절벽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1600년 5월 17일. 이에야스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기 전날이었다. 중간에 후시미 성에 들른 이에야스는 이미 62세가 된 모토타다를 불러, 자신이 부재 중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로 임명하였다.
 이미 이에야스는 자신이 동쪽으로 떠나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거병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여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이 후시미 성은 사방에서 이시다 측에게 포위되어 고성(孤城)이 될 것이다. 그런 희생양을 부탁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토리이 모토타다 말고는 없다고 이에야스는 생각한 것이다.
 모토타다는 이에야스에게 수비장수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이시다 측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있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수비장수의 역할은 힘들 것이네. 수비병도 많이 남기지 못하여 고생할 테이지만…”
 하고 말을 꺼내자,
 “지금은 아이즈로 출병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한 부대라도 많이 데려가시길”
 하고 답하며 모토타다와 함께 후시미 성의 수비역할을 맡게 된 나이토우 이에나가[内藤 家長],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 家忠]들도 아이즈로 데려가길 바란다며 반대로 이에야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이것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날 밤. 이에야스와 모토타다는 술을 마시며 어렸을 적 추억 등[각주:6]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모토타다가,
 “만약 이시다의 거병 등이 있다면 오늘 밤이 이번 생의 마지막이옵니다.”
 고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모토타다의 뒷모습을 보며 이에야스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예상대로 한 달이 지나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거병하여 곧바로 후시미 성 공격에 나섰다. 공성군 총세 4만에 수비하는 병사는 2000미만[각주:7]이었다. 누가 보아도 낙성은 시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성 수비병의 사기가 높아 10일간의 포위공격이 이어져도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공격군 속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가 휘하의 코우가[甲賀] 출신자를 이용하여 그의 일족으로 성안에서 수비를 하고 있던 자에게 내응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고향에 있는 너의 부인이나 아들을 전부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응자가 지른 불로 성안에 불이 나 혼란에 빠지자 공격군이 단번에 성 안으로 진입했다. 세 번째 성관[三の丸]의 수비장인 마츠다이라 이에타다, 서측 성관[西の丸]의 수비장인 나이토우 이에나가도 연달아 전사하여 남은 것은 본성[本丸]의 토리이 모토타다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모토타다는 마지막까지 할복을 거부, 적병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죽이기 위해 계속 분전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62세의 노구에 피로가 쌓였다. 지친 모토타다는 나기나타[薙刀]를 지팡이 삼아 계단에 앉아있을 때 적 사이카 마고이치[雑賀 孫一][각주:8]가 그 목을 베었다고 한다.

도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1539년 생. 토쿠가와[徳川]를 대대로 섬긴 집안 출신.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공을 세웠고,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때 발에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한다.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뒤 카이[甲斐]에서 호우죠우 우지카츠[北条 氏勝][각주:9]의 부대를 격파[각주:10]하여 카이 군[甲斐郡] 안에 영지를 하사[각주:11]받았으며, 이에야스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 됨에 따라 시모우사[下総] 야하기[矢作] 4만석에 봉해졌다.[각주:12]

  1. 1619년. [본문으로]
  2. 2011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 오고우[お江]. [본문으로]
  3. 1621년. [본문으로]
  4. 요우겐 원 뿐만이 아니라 후시미 성의 혈천정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본문으로]
  5. 소설 ‘대망’에서, 인질시대의 이에야스가 조상의 성묘를 핑계로 오카자키에 잠깐 들렸을 때, 타다요시는 자신의 집 창고에 이마가와 가문 파견 무장들의 눈을 피해 쌀과 돈, 무구 등을 축적하여 보여주며 다시 이 성의 주군이 되었을 때 쓰라며 미카와 무사들의 와신상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에 나오는 그 인물. [본문으로]
  6. 모토타다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인질로 잡혀있을 때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었다. 또한 이에야스는 같이 놀다 맘에 안 들어 모토타다를 발로 찼다는 일화도 있다. [본문으로]
  7. 처음엔 약 1800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이에야스의 정무소였던 오오사카 성[大坂城] 서측성곽[西の丸]를 지키던 사노우 츠나마사[佐野 綱正]와 휘하 600명이 모우리 가문[毛利家]에 쫓겨 후시미로 왔고, 이에야스의 오우미의 영지 코우가 군[甲賀郡]의 호족 - 이 들중 하나가 나중에 서군과 내통 - 들이 입성하여 후시미 성의 수비군은 총 2500~3000 사이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사이카 마고이치는 스즈키 시게토모[鈴木 重朝]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미토 토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에 임관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의 맹장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손자. [본문으로]
  10. 호우죠우 1만에 대하여 미즈노 카츠나리[水野 勝成]와 함께 2000여를 이끌고 기습하여 승리. 이에야스는 “이 땅은 자네가 무용으로 취한 땅이니 앞으로도 이 땅을 다스려라” [본문으로]
  11. 사족으로 이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에야스가 타케다[武田]의 명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의 딸을 찾아서 데려오라고 하자 모토타다는 찾을 수 없다며 보고했다. 나중에 어떤 이가 이에야스에게 노부후사의 딸이 있는 곳을 보고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모토타다가 데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모토타다 녀석 빈틈이 없구만”이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모토타다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3남1녀를 낳았다.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삼걸인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2만석,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10만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0만석에 이어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와 같은 4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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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kyup 2011.03.30 0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전형적인 이에야스 가신이지요. 이 친구 아들이 이에야스 큰칼잡이 시동이었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30 09: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토리이 모토타다는 항상 덧붙여지는 말이 "미카와 무사의 거울"이더군요.

      큰칼잡이 시동이라...죄송하지만 거까지는 모르겠군요. ^^;
      대충 언제 쯤의 큰칼잡이[太刀持ち]면 모토타다의 몇 번째 아들정도는 추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그런 일을 맡았는지는 제 지식이 부족하여 모르겠습니다.

    • ckyup 2011.04.01 0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는 잘 기억이 않나지만요, 이름은 아마 '신타로'로 기억하네요. 그때가 아마 히데요시가 한참 정권잡고 잘나갈때 였던가...?, 암튼 그랬던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2 1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밑에 소슈님의 말씀을 듣고 대망에서 찾아 보았더니... 있군요. 이에야스가 상락하여 히데요시의 군문에 들어가는 자리에서 칼을 들고 있던 토리이 신타로[鳥居 新太郎]우 나중에 토리이 타다마사[鳥居 忠政]가 되는 인물이군요.

      대망에선 확실히 몇 시간 동안 칼을 들고서 조금도 흩으러지지 않아 그것을 맘에 들어한 히데요시가 이부제 히데나가의 딸(양녀)과 신타로우를 결혼시키려고까지 하는 것으로 나오는군요(어이가 안드로메다로~)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서는 그의 아비인 토리이 모토타다가 확실히 이에야스를 따라 상락하는 인물 중에 한 명으로 나오긴 하는데, 역시 (대망에 따르면)당시엔 코쇼우[小姓]라는 미관말직에 있었던 지라 신타로우의 이름을 찾아 볼 수는 없군요.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02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분의 기억이 맞습니다.

    대망에서는 도리이 신타로가 큰 칼을 하도 잘 잡고 있어서 히데요시에게 무쇠팔뚝이란 이름을 하사받는다는 챕터가 있지요.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의 결혼 동맹을 체결하기 직전 쿄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이야기는 잠시 각설하고, 후시미 성의 방어는 아마 세키가하라의 승부에서 동군에게 큰 이득을 안겨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일설에는 시마즈가 동군쪽을 편들고 싶었던 것을 거부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서군의 진행을 늦추면서 이에야스에게 많은 시간을 벌어준 셈이니까요.

    아마 그 이후로도 도리이 가문은 다이묘의 위치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막부와 함께 운명을 다했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2 1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대망의 해당 부분을 찾아보았는데, 이에야스의 코쇼우[小姓]따위에게 무려 종사위하(従四位下) 산기[参議]의 양녀와 맺어주려고 하는군요. 제가 가진 지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후시미 성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입성은....
      우선 요시히로의 편지를 보면 이에야스의 입으로 직접 부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근데 그걸 문서화 해서 달라는 요시히로에게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에 바쁜 이에야스는 깜빡 잊고 그냥 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몇 번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요시히로를 토리이 모토타다 등이 거부했다고 하는군요.

      당시 요시히로는 휘하에 군사가 적어서 (약 1000 미만이었다고 하네요 - 것도 대부분 조카 토요히사[豊久]의 군사였다고 하네요. 요시히로 직속은 대략 200~300정도) 주도적으로 자신의 거취를 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던 듯 합니다. 사츠마[薩摩]로 편지를 보내서는 계속 '군사 좀 보내주세요 징징~'댄 거 보면 한탕 노리려고는 했는지 몰라도 동군 편에 설려고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이에야스하고는 굉장히 친했다고는 합니다...만 주위가 온통 서군인지라...)

      토리이 가문은..
      신타로우 즉 토리이 타다마사[鳥居 忠政] 때 아비 모토타다가 후시미 성에서 죽은 덕분에 차츰차츰 가증되어 모가미 가문[最上家] 카이에키[改易] 뒤 빈땅이 되어 있던 야마가타[山形]에 최대 24만석의 영주가 되었습니다만....모토타다의 손자(타다츠네[忠恒] 때 병크(남아있는 배 다른 동생을 양자로 세우면 되는데 다른 가문에 양자로 보낸 친동생을 다시 데려와 죽기 바로 직전에 양자로 세우려다 막부에게 인정 못 받음)로 3만 여석(최저일 때는 1만석) 정도로 떨어지는 식으로 부침이 있었지만 이후 모토타다의 핏줄은 끊기는 일 없이 6대 타다테루[忠英] 이후는 대대로 막부의 요직(소우샤반[奏者番] 겸 지샤부교우[寺社奉行] -> 와카토시요리[若年寄])을 거쳤고 그 중 한명(8대 타다오키[忠意])은 막부의 수상인 '로우쥬우[老中]'가 될 정도로 중용 받습니다.

      막말유신기 때는 에도[江戸]에 가까운 미부 번[壬生藩]에 있으면서도 좌막이 아닌 근왕으로 신정부 측에 서 번을 유지할 수 있었고(12대 타다토미[忠宝]), 폐번치현 이후 신정부의 거물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의 구미사절단[岩倉使節団] 때 꼽사리 껴 미국에 사비유학한 뒤 자작(子爵) 위를 받았다(13대 타다후미[忠文])고 합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02 2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도리이 가문이 그렇게 존속이 되는군요. 시대의 흐름을 나름대로 참 잘 읽은 셈이네요. 미부라는 단어를 보니 생각나는건 미부로시가 생각나는군요. 역사란 배우고 배워도 여기서 튀어나오고 저기서 튀어나오고.

      그나저나 제가 언제나 이 곳에서 가르침을 받아가서 너무 이문(?)이 많이 남는군요. 감사함을 어떻게 표시해야할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3 08: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부로시[壬生浪士] 즉 신센구미[新選組]는 쿄우토[京都]의 미부[壬生]라는 곳에 있는 곳이고, 토리이의 미부 번[壬生藩]은 칸토우[関東] 시모츠케[下野] 즉 지금의 토치키 현[栃木県]에 있던 곳입죠.

      미부[壬生]의 어원의 저습지..라고 하더군요. 칸토우에 있는 미부건 쿄우토의 미부건 그런 이유로 같은 이름이 붙지 않았을지..

      이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그저 우연히 관련 자료가 있었을 뿐입니다.

  3. Gyuphy IV 2011.04.03 0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PS3에 쩔어살다보니 이래저래 답방이 늦습니다(__) 그러고보면 플3계 게임 전국무쌍3에서 토리이 모토타다 지키는 후시미성을 불바다로 만드는 미션이 있긴 했었는데 큐슈에서 텔레포트 해오신겐지 긴치요님이 낙성 시킨다는 황당무계한 설정이더군요(허어..)

    그러고보면 이야기가 좀 삼천포로 가버리긴 합니다만 이와쿠라 토모미 구미사절단이 미국에 내려놓고(;)간 사람들이 꽤 되는군요. 이를테면 오오쿠보 토시미치의 차남 마키노 백작이라거나.. 시대는 좀 다르지만 카네코 후작이라거나 니토베 이나조라거나 미국유학파출신이 메이지후기에 큰 영향을 주는걸 보면 참 메이지때의 이나라 사람들의 선견지명은 좀 놀라운데가 있습니다(ㄷㄷ..)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3 0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 그 부인은 왜 후시미 성에... 남편 따라 이세[伊勢] 오오츠 성[大津城]에나 가시지...아....사이 안 좋으시지..

      과연 규피 님!! 그쪽에 먼저 눈이 가시는군요. ^^
      근데 전 메이지 신정부 이후는 문외한에 가까운지라...

      다만 그런 것 같습니다.
      바로 전까지 양이(攘夷)를 외치던 인간들이 그것이 허황됨을 깨닫자 마자 순식간에 몰려가 배우려는 자세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물론 이것도 요즘엔 '다이죠우이[大攘夷]'라 해서 외국문물을 배우는 것도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펼쳐 서양에 대항하기에 '죠우이 '라는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지만 말입죠)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라고 하면 부인의 내조를 받은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즈토요가 아직 이에몬[猪右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던 하급무사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에 동국(東國)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馬)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오다 가문의 무사들은 누구나가 그 말을 보고 경탄하였지만 그런 만큼 비쌌기에 아무도 사질 못하였다. 카즈토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기는커녕 자신과 부인 둘의 생활조차 근근한 처지였다.
 카즈토요는 한숨을 쉬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노부나가님의 열병식 때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이를 곁에서 부인 치요[千代]가 듣고
있었다. 치요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그 말의 가격이 황금 10냥[각주:1]라는 것을 카즈토요에게 듣고서는,
 “그렇다면 이 돈으로 그 말을 사십시오”
 라고 말하며 화장대 밑에서 황금 10냥를 꺼내 카즈토요에게 주었다.
 카즈토요는 놀랐다. 지금껏 빈곤했는데 이런 큰 돈이 어디서 생긴 것이냐고 묻자 치요는,
 “이 돈은 제가 시집올 때 아버님에게 ‘평소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너의 남편에게 아주 큰일이 생겼을 때만 사용하거라’하면서 주신 돈입니다. 열병식이라면 주군 노부나가님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의 눈에 띌 좋은 기회겠지요. 어서 그 명마를 사시옵소서”
 라고 말하였다. 카즈토요는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그 말을 사러 갔다.
 
얼마 후 쿄우토[京都]에서 열병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그리고 카즈토요의 말은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노부나가도 경탄을 하여[각주:2], 이를 계기로 카즈토요는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각주:3]

 이 에피소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기술된 몇몇 사료에 실려 있기에 시대성에서 본다면 ‘좋은 부인의 모범’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여성을 이러한 유교론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치요는 센고쿠의 여성이 보여주는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정신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덧붙여 치요의 내조에 대해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카즈토요가 결혼하였을 때 카즈토요는
오우미[近江] 카라쿠니[唐国]에 400석[각주:4]영지를 얻었지만 빈곤하여 집에 도마조차 없어 치요는 되를 뒤집어 대신 사용하였다.[각주:5]
 또한 당시 카즈토요가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되어 히데요시에게 축성의 감독을 명령 받았지만, 가난하여 인부들의 야식도 대접하지 못하자 치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사 와서 카즈토요의 면목을 세웠다고 한다.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각지를 전전하였지만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용맹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1573년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토벌전 때 패주하는 아사쿠라의 군세를 추격하여 오다 군[織田軍]이 에치젠과 오우미[近江]의 국경에 있는 토네자카[刀根坂]에 이르렀다. 이때 아사쿠라 군의 후군[殿]에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이라는 활을 잘 쏘는 무장이 있어, 오다 군은 그 활 때문에 쉽사리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즈토요가 창을 꼬나쥐고 단숨에 돌격하였다.
 진에몬은 자랑하는 활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즈토요의 볼을 꿰뚫어 어금니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그대로 진에몬에게 달려들어 뒤엉켰고 아군의 도움으로 진에몬을 죽였다.

 어쨌든 카즈토요는 히데요시 아래서 순조롭게 출세하여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의 공으로 카케가와 성[掛川城] 5만석의 성주로 봉해졌다. 카즈토요가 카케가와에 봉해진 것은 칸토우[関東]에 봉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감시하며 만일의 경우가 있을 때는 이에야스를 방비하려는 히데요시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자신이 배속되어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난행을 이유로 할복을 명령 받은 다음부터는, 오히려 이에야스의 수완에 장래를 맡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카즈토요는 히데츠구 사건의 전말을 보고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을 느끼게 된 것이다.

 1600년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을 위한 이에야스의 군세 속에 카즈토요의 모습이 있었다.
 7월 24일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 이르렀을 때, 카즈토요에게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치요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오오사카 측의 봉행[奉行]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의 이름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과 자기들 편에 참가를 요청하는 편지 한 통, 거기에 카즈토요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해 주십시오, 제 몸은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이 두 통의 들어간 상자의 봉인을 뜯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다.
 사실 카즈토요는 이것과는 따로 또 한 통의 밀서를 치요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령인 타나카 마고로쿠[田中 孫六]의 삿갓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치요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카즈토요는 다 읽은 뒤 곧바로 불살랐지만, 추측하건대 편지가 담긴 상자의 봉인을 풀지 말고 그대로 이에야스에게 제출을 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려, 이미 넘어가버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한 마디[각주:6]로 ‘미츠나리 타도’가 결정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카즈토요는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상경하는 군세를 위해서 도중에 있는 제 카케가와 성을 군량과 함께 전부 바치겠습니다. 거기에 인질도 바쳐 저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각주:7]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 성을 가지고 있던 무장들도 전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카즈토요의 공은 단번에 여러 무장들 중 눈에 띄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결전 때 카즈토요는 그다지 전공이 없었음[각주:8] 에도 이에야스는,
 “카즈토요가 오야마에서 한 말이 세키가하라 승리의 초석이 되었다”
 며, 영지배분 때 일약 토사[土佐] 전부인 24만석[각주:9][각주:10]을 주었던 것이다.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1545년 오와리[尾張] 출생. 1560년 미노[美濃] 마키무라 성[牧村城]의 성주 마키무라 마사토모[牧村 政倫], 이어서 오우미[近江] 세타 성[勢多城]의 성주인 야마오카 카게타카[山岡 景隆]를 섬겼다고 한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종군하여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5000석에 봉해지고 1년 후 2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카케가와[掛川] 5만석에서 토사[土佐] 24만석이 주어졌다. 1605년 61세로 죽었다.

  1. 당시 보통 말은 1냥, 좋은 말은 5냥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노부나가가 경탄한 것은 말 때문이 아니다. 노부나가는 카즈토요가 치요가 건네 준 돈으로 말을 산 것을 듣고 말하길 “동국 제일(東国第一)이라는 말을 상인이, 천하에 오다 가문만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도 먼 내 영지까지 끌고 와서 팔려 했는데도 아무도 사지 않았다면 안타까운 일이며 이는 노부나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그러던 때 오랫동안 낭인이었다는 카즈토요가 가난했음에도 말을 샀다. 무사의 마음가짐은 이래야 함이다.”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당시 열병식이 열린 시기는 서력 1581년. 당시 카즈토요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나 츄우고쿠[中国] 등에서의 활약으로 최대 2700석의 신분이었다. 당시 황금 10냥으로 대략 쌀을 140석 정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치요하고 카즈토요가 과소비하지 않는 한 살 수 있었단 이야기. 무엇보다 1581년 열병식 때 히데요시와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 즉 카즈토요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에 바빠 참가를 아예 못하였고, 노부나가 역시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4. 1573년 아사쿠라 침공전[朝倉攻め] 때 에치젠[越前]의 호걸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을 부상 당하면서도 쓰러뜨린 공적으로. [본문으로]
  5. 링크는 당시의 것이 아니다. 링크의 것은 1806년 후지나미 신사[藤並神社]에 봉납된 모조품.실물은 2차대전 때의 공습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크기는 종횡17cm * 17cm에 높이 8cm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대충 '나이 어린 히데요리가 이에야스 토벌을 명령 할리 없다. 이는 미츠나리가 사사로이 거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도용 당한 타다우지는 카즈토요에게 “평소 성실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면서 웃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당시 카즈토요의 부대는 난구우 산[南宮山]에 진을 친 모리 가문[毛利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선 후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모우리 가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즈토요의 부대도 피 흘리지 않았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9만 8000석. 나중엔 1605년 카즈토요가 제출한 영지 목록에 20만 2600석으로 이후 이것이 막부 공인이 됨. [본문으로]
  10. 24만석이 나온 숫자는, ‘쵸우소카베 영지조사장부[長宗我部地検帳]’에 토사[土佐]의 농작면적이 2만 4000정(町)으로 나와있는데 단순히 1반(反=1/10정(町))을 1석(石)으로 하여 24만석이 속설로 된 것으로, 1705년 번(藩)이나 다이묘우[大名], 하타모토[旗本] 등을 다룬 백과사전격인 '무감(武鑑)'부터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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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21 18: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칠 전 텐쇼대지진에 관해서 이도저도 아닌 글을 쓴 적이 있습지요.

    포커스는 우치가시마 가문에 맞추었지만 카즈토요도 만만치 않은 슬픔을 간직한 인물이라서 언제나 이 인물의 이름을 볼때마다 마음이 찡합니다.

    전혀 개연성없는 이야기지만 실용적인 카즈토요와 치요의 사고방식이 메이지를 이끈 도사번사들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나저나 야마노우치와 야마우치는 일본에서 모두 맞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이 맞습니까? '노'의 사용이 너무나도 말이 많아서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21 1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커헉...크롬은 역시 제 블로그와 상성이 안 맞는군요. 댓글 썼더니 이상한 글자나 나오고....--;

      사가미님의 블로그는 rss로 구독하고 있는데 1월달 이후로 없으시던데...딴 곳에 쓰신 것인가요??

      그쵸..단 하나 뿐인 딸이 죽었다고 하니...

      카즈토요가 쵸우소카베[長宗我部]의 토박이 가신들은 郷士, 외부에서 데리고 온 가신들을 上士로 나누어 에도시대 내내 차별했기에 그 불만이 쌓여서 도막(討幕)과 근황[勤皇] 사상으로 치달았다고 하더군요. 카즈토요도 화합의 정치(...어라 어느 나라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군요)를 하였다면 사카모토 료우마[坂本龍馬]라던가 타케이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 같은 이는 안 나왔을 지도 모릅죠.

      저도 그게 좀 그렇더군요.
      위키에는 '야마우치 카츠토요'라 되어 있더군요.

      에도시대 막부의 명으로 각 가문의 족보를 제출하게 해서 만든 寛政重修諸家譜에는 山内를 '야마우치'라고 쓰여 있다고 하네요.

      一豊도 여러 정황 증거로 보건데 '카츠토요'라고 합니다.

      다만 제가 가진 책들은 대부분이 '야마우치 카즈토요'로 되어 있으며, 공명의 갈림길 제작 시 NHK가 '一豊'를 야마우치 가문에 어떻게 불러야 하냐고 묻자, 널리 알려진 대로 해 주세요...라고 했다고 하니, 그냥 무난하게 '야마우치 카즈토요'로 괜찮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21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곳에는 쓴다는걸 까먹었었군요. 졸작이지만 한번만 읽어주신다면 황공하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21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 읽었습니다.

      사가미님처럼 직접 센고쿠 시대의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四.

 

 삼 년이 지났다.

 챠챠(茶々)는 20살이 되었다.

 “아자이 님(浅井殿)의 아씨를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하고 어느 날 밤에 히데요시에게 물은 것은 놀랍게도 그의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였다.

 “이미 시집갈 곳은 정하셨겠죠?”

 “아직이다”

 히데요시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아직이요?”

 “그렇다”

 “알고 계십니까? 벌써 스무 살이옵니다”

 말할 것까지도 없사옵니다만 -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거듭 말했다.

 “보통 15살이면 시집을 갑니다. 20살이면 좋은 날이 다 가 정실이 먼저 죽은 곳이라도 찾을 수 밖에 없는 나이라고 할 수 있죠. 소중한 분을 맡고 계시면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하고 그녀가 끈질기게 말한 것은 성안의 소문을 하루 종일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존귀한 핏줄이며 저렇게 미인인데도 – 하고 소문은 말한다. 어디로 갈 것이라는 결혼 소식을 전혀 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하는 뭐랄까 그 거시기 한 마음이 있으신 것은 아닐까? 필시 그럴 것이다 - 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호색은 천하에 유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시대는 남자건 여자건 모이면은 그런 종류의 이야깃거리로 쑤군거렸다. 예를 들어 성안의 소문에 따르면 –

히데요시님은 옛날부터 챠챠 님의 모친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을 짝사랑하고 계셨었다. 아자이 씨(氏) 멸망 후 오이치 마님께서 오다 가문(織田家)으로 돌아오셨을 때도, 제발~제발~하면서 돌아가신 노부나가 님께 매달려서는, 제 부인으로 받아 들이고 싶습니다고 부탁하였지만 정작 오이치 님께선 그 분을 싫어하여 우연히 정실이 돌아가셔 홀몸이셨던 시바타(柴田)님께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시바타 공격은 사랑의 복수이죠. 그 증거로 히데요시님은 좀처럼 적을 죽이시지 않던 분이셨는데 시바타 님만은 용서하지 않고 텐슈각(天守閣)을 아예 재로 만드셨잖아요.

 라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았다. 오이치가 아직 결혼하기 전엔 짝사랑하고자 하여도 아예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또한 오이치가 과부가 되었을 때 히데요시가 그녀를 부인으로 하고 싶다며 울며 매달렸다고 하지만 히데요시에게는 비루한 신분일 때부터 처 네네(寧々) –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엄청난 호색한이었으면서도 이 조강지처를 유난히도 존중하며 둘도 없는 상담 상대로 하였고 겸해서 조심하는데 있어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처를 버리고 오이치를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우선 이 남자에 한해서 있을 수 없었다. 참고로 호쿠리쿠(北陸)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공격하여 죽였을 때는,

 “카츠이에를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하고 몇 번이나 부하들에게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카츠이에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가 안정 되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다 - 고 말하였다. 히데요시에게 놓여진 조건이 카츠이에를 죽여버렸다. 오다 정권의 필두가로를 이 세상에 살려두면 히데요시 정권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 놀음이 아니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원한을 몸 안에 저장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원한, 복수라는 에너지가 이 인물의 성정에서는 절대 끓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소문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처음으로 성숙해진 챠챠를 보았을 때 이렇게 오이치님과 똑 빼 닮을 수 있을까? 하고 틀림없이 피가 끓었다. 오이치를 짝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과거는 없었다고 하여도, 오이치를 이 세상에서 미모가 제일인 사람이라고 마음 속으로 깊이 동경했었던 적은 틀림없이 있었으며 이는 히데요시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오다 가문의 가신들 중에서 수 없이 많이 있었을 터이며 오이치는 그런 존재였다. 오이치는 하늘나라 사람이었다. 히데요시는 거기까지 손을 뻗으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것이 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현실인식 감각이 너무 예리했던 그 당시의 히데요시는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할 정도 별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치젠 이치죠우다니의 단계에서 달랐다.

 ‘이 아이는 내 날개 품 속에 있다’

 라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이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녀와 쏙 빼 닮은 소녀가 하늘나라에서 떨어져 자신의 날개 품에서 보호받는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품어주마 하고 몰래 결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히데요시의 기분을 집요하게 윤색하고 왜곡하면 소문과 같은 이야기처럼 될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 삼 년 챠챠를 조용히 그 생활 속에서 살게 해 두었다.

 - 조용히……

 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챠챠에 대한 방침이며 머지않아 챠챠를 얻는 길이라고도 믿고 있었다. 그것은 공성전과도 닮아있었다.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도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도 히데요시는 결코 무리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장기 포위전 형태를 취하며 적의 보급선을 끊고 수로를 끊어 때로는 수공을 하여, 어쨌든 농성하는 병사들의 전의를 잃게 하는 전술에 주안점을 두어왔다. 그런 감각으로 챠챠라는 존재를 보고 있었다. 무턱대고 챠챠의 침실에 함부로 뛰어드는 식의 어리석음을 이 남자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챠챠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긴 시간이 챠챠가 가지고 있는 옛 상처를 아물게 할 것이다. 그 동안 빈번한… 그러나 담백하고 온정에 넘치는 접촉이 히데요시에 대한 챠챠의 마음을 조금씩 바꾸어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요 삼 년 궁중의례를 위해서 쿄우(京)에 올라와서 전쟁 때문에 몇 번이나 스즈카토우게(鈴鹿峠) 고개를 넘어[각주:1] 동쪽으로 정벌하러 떠나면서, 그렇게 간 곳곳마다 반드시 챠챠에게 진귀한 선물들을 보내며 근황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 자연스레 챠챠도 예의상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챠챠에게 있어서 요 삼 년은 일분일초가 히데요시의 온정 속에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네네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거동을 그렇게 볼 수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시녀들에게서도 여러가지 소문을 듣고 있었다. 편지 왕복 등도 챠챠의 시녀가 남들에게 흘렸기 때문에 네네의 귀까지 들어왔다.

 불길한 생각을 계속 하던 차에 몇 일전 오다 우라쿠(織田 有楽)가 차(茶)의 자리에서,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열심이더군요”

 라는 것을 네네에게 뜬금없이 말한 것이다. 우라쿠는 많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네의 현명함은 그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오우미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주력인 오와리 파벌(尾張衆)에 대항하기 위해 열심일 것이다. 오와리 파벌은 이 네네에게 옹호 받고 있다고 세간에서는 보고 있었다. 오와리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나 무장이 히데요시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하면 반드시 네네에게 울며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 대한 중재를 부탁했다. 네네는 언제나 기분 좋게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네에게 그 이상의 야망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성안의 소문은 달랐다. 오와리 파벌이라는 이 오오사카 성에서 가장 큰 관료, 무신 세력의 중심에 네네가 있다고 보고 있어, 네네의 존재는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선명하게 정치적 자력(磁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네도 시녀의 입으로 그러한 풍문은 듣고 있었다.

 “오우미의 사람들이 자기들도 오와리에 태어나고 싶었다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네네에게 있어서는 이외였다. 오우미 파벌의 대다수는 이 네네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으며 부탁하러도 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극소수의 오우미 사람만이 네네와 접촉하고 있었다. 서 오우미 출신인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나 비와고(琵琶湖) 호수 동쪽 중부 출신인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이 그들로, 그들은 오히려 같은 지역인 오우미 사람들과는 소원하며 오와리 파벌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참고로 오와리 파벌의 대표적 인물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일 것이다. 그 외에 젊은 축으로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다소 나이가 있는 자로는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등이 있으며, 모두 초창기의 히데요시와 함께 전쟁터의 먼지를 뒤집어 쓰며 성장한 역전의 무장들이었다. 오와리 파벌의 특색은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라는 것에 있었다.

 이 점 오우미 파벌은 관리에 뛰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나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는 거의 ‘희대의’라고 붙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경제 관료로, 미츠나리 등은 거대하게 성장한 히데요시의 재산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각종 장부를 발명했다. 천하 재정을 위한 장부부터 부엌의 자잘한 출납장에 이르기까지 장부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하위 관료들을 지휘하였고 관리하였다. 그들 오우미 파벌의 관료가 없으면 히데요시는 병사를 일으킬 수 없었고, 직할지를 다스릴 수 없어 하루라도 편안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미 이 신정권의 중추에는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의 걱정은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만약 결속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라쿠는 네네에게 말로 하지 않았을 뿐, 조심하시길, 만약 그들이 옛 주인격인 아자이 님(浅井殿=챠챠(茶々))을 옹립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라기보다 좀더 대놓고 말하면,

- 그들은 아자이 님께서 측실이 되신다면……

 라고 그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아예 까놓고 말하면 그들 오우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었다.

  1. 교통의 요지로 스즈카 산맥 중 가장 낮은 위치에 있어 이로부터 동쪽을 東国이라 일컬었다. 쿄우토에서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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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얼마 안가 츠루마츠[鶴松]가 죽었기에, 히데요시는 그 비탄(悲歎) 속에서 외정(外征)의 지령을 내렸다.

 -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서 미쳤나!?

 토자마[様][각주:1]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등은 어떠한 필연성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대규모 외정에 대해 뒤에서 그렇게 욕을 퍼부었다.

 대다수 다이묘우[大名]의 마음 속도 비슷했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뿐만 아닌 거의 대부분의 다이묘우는 봉토(封土)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영민(領民)과는 아직 친숙하지 않았고, 또한 전란(戰亂)이나 검지(地)[각주:2]로 인해 받은 상처에서 백성들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막대한 외정의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라는 것인가?

 '봉행(奉行) 녀석들이 부추기고 있다.'

 라는 소문이 네네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봉행들이 히데요시라는 노망난 독재자에게 슬픔을 외정으로 달래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 네네는 생각했지만,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라는 곳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은 미츠나리, 나가모리[長盛], 마사이에[正家]라는 오우미[近江] 사투리를 사용하는 재간꾼들이 히데요시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 그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 내의 대소사, 인사, 천하의 형법(刑法)과 같은 것들을 집행하고 있었다. 이 현상을 네네 주위에 있는 여관(女官)들의 여자의 눈으로 보면,

 - 요도도노[淀殿]는 요즘 권세(權勢)가 있으시다.

 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근래 토요토미 가문은 오우미[近江] 사람들에게 독차지 당해 있었다. 네네가 돌봐주고 있는 오와리[尾張] 계열의 다이묘우들은 중앙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질 못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政所]가 아닌 요도도노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이 가문 내에서 자주 화제(話題)가 되었다. 매일 네네가 듣는 화제는 모두 이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우미 파벌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여러 다이묘우,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 거기에 측실이나 여관들까지도 네네에게 와서는 울분이나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은 네네에게 매달리는 것 이외에 기댈 만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도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 측실의 험담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네네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도도노는 그 특출한 미모를 제외하면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자질을 가진 여성이며, 단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권세욕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나서서 정치 세력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만약 나쁘다고 한다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옛 아자이 가문[浅井家]에서 온 늙은 시녀들이었다. 이 무리들이 요도도노가 츠루마츠의 [생모]가 된 것을 기회로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대항하고자 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시작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봉행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미츠나리 등도 요도도노를 추대함으로써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토요토미 가문의 중추에 계속 자리잡고자 하고 있었다. 그런 소위 주변 인물들이 요도도노를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가고자 함에 틀림이 없었다. 네네는 그렇게 보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나쁜 것은 그들이었다.

 

 네네는 마음속 깊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무리들은 히데요시님이 돌아가신 다음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츠루마츠와 요도도노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미츠나리 이하 오우미 파벌의 다이묘우를 측근으로 거느린다.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는 후퇴하고 그녀를 의지하고 있던 창업(創業)의 공신들은 힘을 잃어 갈 수밖에 없다. 네네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오와리 출신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꿈에서도 신음 소리를 낼만한 미래상일 것이다. 물론 일이 일인만큼 모두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 누구도 이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1592 4.

 외정군은 조선에 상륙하였다.

 제1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2군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선봉으로 하여 각지의 성을 함락, 앞을 다투며 북상하였다.

 당초는 파죽지세라 할만 했지만, ()나라의 대군이 정면의 적이 됨에 따라 진공(進攻)은 정체되고 각지에서 부대가 고립되어 때로는 고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유키나가와 키요마사는 사이가 나빠 서로 돕기는커녕 무엇이건 서로 으르렁거렸기에,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거기에 파고들어서는 반격하였고, 이 때문에 아군의 작전에도 자주 차질을 빚었다.

 

 이런 종류의 사태를 조절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관으로 히데요시는 군감(軍監)이라는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 直高], 오오타 카즈요시[大田 一吉] 등 작은 영지(領地)의 다이묘우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오우미 파벌이었으며, 그런 군감의 총책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미츠나리는 조선에 상주(常駐)하지는 않고 전선을 시찰하고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곁에서 현지의 군감들이 보내오는 보고서를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이런 군감단(軍監)의 면면들은 이시다 당()이었기 때문에 유키나가에게는 좋고 키요마사에게는 냉엄했다. 때로는 키요마사의 언동을 무뇌아처럼 보고하였다.

 예를 들면 평화 교섭 단계에 들어갔을 때, 키요마사는 토요토미의 성()을 하사 받지 않았음에도 명나라 사자에게 보낸 공문서에 '토요토미노 키요마사[豊臣 ]'라고 서명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또한 명나라 사자에게

 

 "당신들 대명인(大明人)은 코니시 유키나가라는 자를 일본국의 무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저것은 무사의 무자도 모르는 사카이[堺]의 상인(商人)이다. 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키요마사의 언동이 조선에 있는 군사들을 혼란 시키며,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히데요시는 준공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받았다.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키요마사라면 그럴 것이다, 곧바로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급사(急使)가 조선으로 건너가 키요마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다.

 키요마사는 자신의 군단을 전선에 남겨두고 장교 50, 일반 병사 300명이라는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서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세토 내해[瀬戸海]를 거쳐 오오사카[大坂]에 직행한 후 후시미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라도 내알(內謁)할까 생각하였지만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몸이기에 그것도 불가능하였다. 키요마사는 여장(旅裝)도 풀지 않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사람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저택을 방문하여 성안의 사정을 듣고자 하였다.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놈이 꾸민 참언(讒言), 덫일 것이다. 필시 그럼에 틀림이 없다

 

 고 키요마사는 굉장히 화가 났는지, 나가모리가 한마디의 설명을 하기도 전부터 고개를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군감(軍監)의 면면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후쿠하라 나오타카는 미츠나리의 친척[각주:3]이며, 오오타 카즈요시, 쿠마가이 나오모리[能谷 直盛], 카키미 카즈나오[垣見 一直] 등은 모두 미츠나리에게 알랑거린 덕분에 출세해 온 오우미[近江] 파벌 사람들로 당연 자신들의 파벌인 유키나가를 옹호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지부쇼우놈의 목을 뽑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가모리는 서둘러 진정시킨 후,

 

 지금에 와서는 지부쇼우의 권세에 견줄 만한 자가 없네. 그러한데 무슨 말을 하시는 겐가? 그와 화해를 하시게. 하지 않으시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일세. 우선 그 화를 가라앉히게. 졸자가 자리를 주선할 테니 내일이라도 지부쇼우와 만나시게

 

 라고 말하자, 키요마사는 무가의 신이시여!! 라고 갑자기 방바닥을 치며 노성(怒聲)을 터뜨리고는,

 

 신불(神佛)도 굽어살피소서.

 그자와는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졸자는 조선팔도에 쳐들어가 수십 번 싸워 대명(大明)도 물리치고 추위와 더위를 참았으며, 때로는 굶주림도 겪었소이다. 그에 비해 지부쇼우놈은 편안하게 성안에 있으면서 더구나 히데요시 전하의 총애를 내세워 우리처럼 전쟁터에서 일하는 자들을 멸하려 한다. 그렇게 좆 같은 녀석들하고 우리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소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모처럼 둘의 사이를 좋게 하고자 했던 나가모리도 발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가 1596 1월이었다. 그대로 아무런 추가조사도 없이 키요마사는 근신을 명령 받아 후시미[伏見]의 자택에 유폐 당했다. 이후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이보다 1년 반 전에 요도도노의 배에서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 때문에 이때까지 토요토미 가문 후계자였던 히데츠구[秀次]의 영향력은 저하되었다. 히데츠구는 앞날에 불안을 느끼고 난행(亂行)을 계속 저질렀기에 토요토미 가문은 그 정권이 성립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미 왕년의 똑똑한 인물이 아니어서 사람이 변한 듯 노망이 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히데요리의 앞날에 대한 것뿐이었고, 그 설계를 미츠나리 등에게 연구시켰으며, 미츠나리 등도 이 토요토미의 천하가 무사히 히데요리에게 상속되는 것만을 연구하여 히데요시에게 헌책하였다. 곧이어 히데츠구는 죽음에 이르지만, 이 키요마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히데츠구는 살아 있었다.

 

 사실 미츠나리는 키요마사에 관한 놀랄만한 풍문이 조선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군감(軍監)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 쪽에서 키요마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그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593 5.

 키요마사가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장군 유정(劉綎)을 통하여 키요마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때 유정이 보낸 사자(使者)의 입으로,

 

 "히데요시가 지금 일본 60여주를 다스리고는 있지만, 영걸(英傑)이라고 하여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죽은 후 일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그는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고 말하게 한 후, 유정의 자필 편지를 키요마사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신은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지만 일개 지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때가 되어 우리에게 온다면, 나는 맹세코 대명 황제 폐하에게 말씀을 올려 당신이 대관(大官)에 봉해지도록 보증을 서겠다. 어째서 이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가?
 라고 되어 있었으며, 또다시 사자의 입으로 넌지시 명나라와 힘을 합쳐 히데요시에게 반격을 하자고 암시하였다. 단 키요마사는 종군승에게 글을 쓰게 하여 이것을 거부하였다. 그 편지 속에서,

물론 당신이 말하고 있는 대로 나는 한가한 무리들에게 무고를 받고 있다[각주:4]. 그러나 나는 태합(太閤=히데요시)의 충신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덧붙여 보냈다.

 

 어쨌든 이렇게 명나라와 키요마사가 주고받은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츠나리의 손에 들어와 있어,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리 미츠나리라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것을 주저케 하여 자신의 선에서 뭉갰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다른 측면에서 이것을 처리하였다. 키요마사가 이 이상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은 다음 세대인 히데요리에게 있어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외정(外征)을 하러 나간 장군이 무훈(武勳)을 세워 거기서 강대한 세력을 얻을 경우, 반대로 그 무력이 중앙 정권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멀리 당()나라의 현종(玄宗) 황제를 배신한 안록산(安祿山)의 예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가까이에 히데요시라는 예가 있었다.

 

 오다 가문[織田家]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었던 히데요시가 거기서 노부나가[信長]의 급사를 듣고 병사를 되돌려 미츠히데[光秀]를 물리치고는, 그 무력으로 오다 가문의 남겨진 자식들을 압도하여 토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키요마사에게 그 정도의 야심이나 정치력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무훈을 더욱 키워줄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 전쟁터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네네는 거기까지 이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네네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미츠나리는 네네를 보호자로 하는 오와리[尾張] 파벌의 무장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네네의 날개를 꺾어 요도도노 모자(母子)의 권세를 강화해 가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다

 네네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키요마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시간만 보내었다. 키요마사는 반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 여기서는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거나 군문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를 지칭.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양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불만이 많았다. [본문으로]
  3. 미츠나리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 예기(禮記)의 태학(大學)에 이르길 ‘소인은 한가하면(할 일이 없으면) 좋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한다(小人間居爲不善)’는 부문에서 따 온 것 같다…. 아마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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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08 12: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침묵'에서도 나와있는 내용이더군요.. 기가막힌 천재지변이 구해주지 않았다면야(-_-...좀 네타려나..,)

    아무튼 키요마사는 상당히 인물은 인물이었던듯.. 이모저모에서 두려워했던걸 보면.. 혁신에서는 좀 과소평가된 느낌이 없잖아 들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8 1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센구미(新撰組)의 콘도우 이사미(近藤 勇)도 가장 좋아했던 인물이라니까요.
    코에이의 게임에서라면... 확실히 내정치가 너무 낮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내정에 관한 것은 더 주어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3. 이노센스 2010.02.13 23: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요마사가 외친 신의 이름은 다시 원문을 확인해봐야하지만 무가의 수호신인 '하치방 대보살'일 겁니다. 시바 료타로의 다른 소설 [세키가하라]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가마쿠라 이래의 무사들은 궁시의 신인 하치방 대보살에게 승전을 기원하거나 맹세를 걸고는 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비사몬텐'이나 '마리지텐'일 수도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은
      "神仏も照覧あれ"...로 시작합지요.

      글쎄요... 어느 신에게 빌었을지... 소설에서 나오는 글 가지고 너무 단정지어서 말씀하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키요마사는 법화종의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이라 쓰인 깃발을 애용했다고 합니다. 만약 하치만대보살이나 비사문천, 마리지천을 믿었다면 그 쪽 깃발을 애용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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