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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25 모우리 테루모토 - 은거 후 전심전력을 기울여 모우리[毛利] 안태에 힘쓰다. (6)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625 4 27일 병사(病死) 73.

 

1553 ~ 1625.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의 장남. 할아버지인 모토나리[元就]가 죽은 뒤 가독 상속. 츄우고쿠[国] 지방에 120여 만석을 영유(領有)하며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오대로(五大老)[각주:1] 중 한 명이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이 되지만 패하여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 국[]으로 감봉(滅封). 쵸우슈우 번[長州藩]번조(藩祖)가 되었다.

 

 




 


은거와 오오사카[大坂]의 전투

 

 테루모토는 1553 1 20일에 아키[安芸]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모우리 타카모토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타카모토의 급사(急死)로 인하여 할아버지인 모토나리의 후견(後見)을 받아 11살에 성인식을 치렀다.

 젊어서부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등을 상대하며 성장했다.

 

 히데요시의 말년에는 오대로(五大老)라는 중직에 임명되어 츄우고쿠[国] 지방 9개국() 1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군림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의 총사령관이면서도 중요한 때 움직이지 않았다.

 

 테루모토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지자마자 머리를 깎고 '겐안소우즈이[幻庵宗瑞]'라는 호를 칭하였다.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 되어, 번(藩)의 수도를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북쪽 해변의 땅 하기[萩]로 하는 이봉(移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테루모토의 말년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쉬기에는 일렀다.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는 토쿠가와 씨[徳川氏]에 대한 충성과 히데요시가 죽을 때 말한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라는 유언 사이에서 고심한 끝에 토요토미 가문[徳川家]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의미로 극비리에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 秀頼]에게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을 파겼하였다.

 사실 사노 도우카라는 것은 위명(僞名)으로 정체는 필두(筆頭) 노신(老臣)인 시시도 모토츠구[宍戸 続]의 동생인 나이토우 모토모리[藤 元盛]였다.

 테루모토는 도우카에게 병량(兵糧) 1만석()[각주:2]을 대신한 황금(黃金) 500매를 주고서는 그의 가족과 자손은 확실히 뒤를 돌보아 줄 테니 걱정 말라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입성시켰다.

 , '만약 토요토미 쪽이 이겼을 때는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10개국()을 줄 것'이란 약속을 히데요리와 맺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측이 패배하여 오오사카 성이 낙성(落城)되고,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도 도우카가 살아 남았기에 문제였다. 이에야스는 도우카가 모우리의 가신(家臣)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테루모토는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쿄우토[京都]에 숨어있던 도우카를 잡아서는 할복(割腹)시키고, 목을 이에야스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또한 테루모토가 뒤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도우카의 장남인 모토요시[元珍]와 둘째인 아와야 모토토요[粟屋 元豊]도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는 두 아들까지 죄를 주고 싶지 않다며 귀국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테루모토는 둘 다 아비 도우카와 마찬가지로 배를 가르게 하여 막부(幕府)에게 자신은 무죄라는 것을 주장했다.

 충신을 죽여서 가문을 지킨다.

 모우리의 그런 전통으로 이후에도 바쿠후에게 카이에키[改易][각주:3]당하는 일 없이 메이지 시대[明治時代]를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테루모토도 그다지 위기감 느끼는 일 없이 - 은거생활은 주로 모우리 종가(宗家)안태(安泰)를 위해 힘썼다.

 

 우선은 1616.

 테루모토의 딸과 킷카와 히로마사[吉川 正][각주:4]와의 결혼이었다. 킷카와 가문[吉川家]에 시집 보내기에 앞서 테루모토는 제멋대로이고 성질이 급한 딸에게,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가문과의 강한 유대를 위해서이니 불만이 있더라도 뭐든 참아야 하느니라 

 라고 아비답게 간절히 타이르고 거기에 결혼 지참금[化粧料]으로 5천석을 주어서 시집 보냈다. 

 결혼으로 인해 이와쿠니 령[領] 킷카와 가문과의 결속이 두터워지자, 1617년에는 둘째 아들인 나리타카[就隆]에게 스오우[周防] 토쿠야마[山] 3만석을 나누어 주어 '토쿠야마 번[徳山藩]'을 만들었다.

 

 1600년에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의 '쵸우후 번[長府]' 3 6천석을 창설.

 나중의 일이지만 1653년에 히데모토의 둘째 아들 모토토모[元知]의 '키요스에 번[藩]' 1만석이 세워져, 종가(宗家) 보좌를 맡는 모우리 삼가(三家)가 만드는 등 영국(領國) 경영을 강화해 갔다.

 

 1617년에는 쵸우후의 모우리 히데모토의 딸 쇼우키쿠코[松菊子]를 토쿠야마의 나리타카와 결혼시켜 쵸우후 번[長府藩]과 토쿠야마 번[徳山]의 결속도 강화시켰다.

 

 1619.

 2대 쇼우군[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川 秀忠]의 상락(上洛)[각주:5]이 있었다.

 테루모토는 히데타다와 만나기 위해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락.

 간신히 히데타다의 숙소인 니죠우 성[城]에 입성했다. 테루모토의 몸을 걱정한 히데타다의 배려로 가마를 타고 현관까지 왔고,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 카미오 모리요[神尾 守世], 전의(典醫)[각주:6]인 마나세 마사츠구[曲直瀨 正紹] 등의 도움으로 입장하여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손에 이끌려 겨우 히데타다와 대면할 수 있었다. 

 전 병이 들어 약해졌습니다. 앞으로 모우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뜻을 전한 후 영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테루모토의 큰 아들로 초대 하기 번주(藩主)인 모우리 히데나리[秀就]에게 가문의 번영과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서 타이르고 20개조에 이르는 유훈(遺訓)을 남겨 히데나리에게 반성과 자숙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쇠약한 몸을 쉬는 일 없이 1625 4 27일.

 향년 73세로 하기 성[萩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옛 텐쥬 원[天樹院]에 있는 테루모토 부부의 묘 - 하기 시[萩市]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2. 1석은 어른 한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약 150Kg. 즉 1만석이면 쌀 1500톤. [본문으로]
  3.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 때 서군이던 모우리 가문을 혼란에 빠뜨려 전후 감봉으로 몰아 넣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의 아들. [본문으로]
  5.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궁중 의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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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8.26 1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료마가 간다>를 읽다보니, 모리가에서는 이후 200여 년간 신년이 될때마다 신하가 한슈에게 '도쿠가와를 칠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보고하고, 한슈는 '아직 시기가 적철치 못하다'고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는 군비가 바쿠후에 상대가 안 되지만, 그런 관습이 있을만큼 바쿠후에 대한 감정이 최악이었나 봅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26 1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하던데, 그 전통을 만든 것이 테루모토라고들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대놓고 했다간, 바쿠후의 밀정에게 걸릴 위험이 큰 만큼, 비밀리에 모여,
    필두 가로가 "올 해는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면 번주는 "아직 이르지 않나?"라는 짧은 문답이었다고 하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9.25 14: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길래 줄을 잘서지..(-_-..) 라고는 해도, 테루모토도 할만큼 했으니 뭐라 말은 못하겠군요(;;)

    혁신을 하면서 정치는 좀 더 올려줘도 나쁘지 않을까 싶었던 사람.. 모리가에는 세키가하라때는 도무지 사람이 없어서..(-_-)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5 1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우리에게 있어서는 히로이에가 죽일 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키가하라에서 모우리 군 선봉으로 있으면서 후속의 아군들을 못 움직이기 한 점이나, 오오사카 성에서 재기를 도모하려던 서군 세력을 - 총지휘관을 빠져나가게 하는 수법으로 와해시키는 등. 히로이에가 아닌 안코쿠지 에케이 하나만을 창구로 서군에 온 힘을 몰아 넣었음 역사도 달라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9.26 1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로이에야 부친과 형이 히데요시때문에 제명에 못죽었으니..(자연사라고는 하나..-_-) 분노할 구석이 없잖아 있었겠지만서도;; 덕분에 대국을 망쳐놨으니 아주..??-_-='
    모우리가가 세키가하라때 3만을 이끌고 왔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정도로라면 세키가하라때 버벅댔더라도 오사카성 퇴거 안하고 버텼으면 재밌는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군요.. -동군 맹주 도쿠가와에 서군 맹주 모우리 정도..-;

    -그러면 다시 전란의 시대로...? 이번 혁신 pk의 1603년 같은 시나리오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긴 해도..-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6 15: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 버티고 있었으면 상당히 복잡해 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큐우슈우(九州)에서는 카토우 키요마사가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지만 쿠로다 칸베에의 세력과 동북지방의 타테나 우에스기가 할거하여 4~5개 정도의 세력으로 나뉘어지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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