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1년 9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에치고[越後]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서 모우리 히데히로[毛利 秀広]라는 무장이 카게카츠의 측근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각주:1]와 야마자키 슈우센[山崎 秀仙]을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모우리 히데히로는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 둘을 원흉이라 생각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각주:2]  
 카게카츠는 켄신[謙信] 때부터 우에스기 가문[上杉家] 집사(執事)의 가문인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가 후계자도 없이 살해당했기에 나오에 가문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자신의 시동[小姓] 히구치 요로쿠[樋口 与六]에게 나오에 가문을 잇게 하였다. 이 히구치 요로쿠가 후에 우에스기 가문을 지탱하고 있다고 칭송 받는 명신(名臣)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카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이다. 카게카츠의 시대에 우에스기 가문의 군정(軍政), 민정(民政)은 모두 이 나오에 카네츠구가 담당하였다.

 카네츠구는 키가 크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말을 하는데 막힘이 없어 변설(辯舌)에도 능했다고 한다. 더구나 문학적인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초기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도, 문무 양쪽에 뛰어난 인물로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거론하였다.

 우에스기 가문이 임진왜란에 종군하였을 때, 카네츠구는 점령한 조선 성에 들어가면 반드시 서고(書庫)부터 찾았다고 한다. 지금 요네자와 시[米沢市]에 있는 일본의 국보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그때의 전리품이다.[각주:3]
또한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도 일반적으로 ‘나오에 판 문선[直江版文選]’이라 칭해지는 『오신주문선(五臣註文選)』을 출판. 성 밑에 있는 젠린 사[禅林寺=현재는 호우센 사[法泉寺]]’에 학문소 ‘젠린 문고[禅林文庫]’를 열었다.

 카네츠구는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봄 기러기가 날 닮았나. 내가 기러기와 닮았나. 낙양성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돌아가네
春雁我に似たり 我雁に似たり 洛陽城裏花に背いて帰る[각주:4]
 라는 한시가 유명하다.

 카네츠구는 이렇게 학문적인 인간이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일화도 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아이즈를 영유하고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산호우지 쇼우조우[三法寺 勝蔵][각주:5]라는 무사가 자신의 하인을 죽였다. 죽일 정도의 죄는 아니었던 듯 하인의 친척들이 화를 내며 죽은 하인을 살려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를 들은 카네츠구는 백은(白銀) 20매로 합의를 보도록 하였지만, 하인의 친척들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를 쳤기에 카네츠구가 아무리 조정을 하려고 노력해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고 할 뿐으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카네츠구는 결국 마음을 정해 판결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염라대왕에게 편지를 써 줄 테니 너희가 저승에 가서 그 하인을 데려오도록”
 라며 소동을 일으킨 자들[각주:6]을 저승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서는 염라대왕과 저승사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맞이하는 자를 보냈으니 부디 죽은 자를 살려서 돌려 보내 주십시오”
 라는 푯말을 세워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 일리 없고 원래 중국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지만 민정가로서 유명했던 카네츠구와 연관시킨 것이 흥미롭다.[각주:7]

 또한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히데요시[秀吉]가 아직 살아있을 때의 일로, 후시미 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모였을 때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품속에서 커다란 황금판을 꺼내어 모두에게 자랑하였다. 커다란 황금판이 신기했는지 다이묘우들은 모두 조심스레 손에 들고는 구경하였다. 그 말석에 카네츠구도 있었다. 카네츠구에게도 차례가 오자 카네츠구는 부채를 펴서는 그 황금판을 받고 마치 배드민턴 라켓으로 셔틀콕을 튕기듯이 통통 튀기며 살펴보았다.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배신(陪臣=다이묘우의 가신)이기에 다른 다이묘우들과는 달리 나름 겸손하게 행동하는 줄 알고,
 “직접 손으로 잡고 보아도 되네”
 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카네츠구는,
 “제 손은 켄신 공[謙信公] 때부터 선봉장의 지휘봉을 쥔 손이외다.[각주:8] 저런 천한 물건을 손에 쥐면 손이 더러워지니 이렇게 부채에 올려서 보는 것이올시다.”
 라고 말하고는 부채로 탁 쳐서는 황금판을 마사무네 앞으로 보냈다고 한다.[각주:9]
 이 역시 사실이 아니지만, 카네츠구의 호방함을 말해줌과 동시에, 카네츠구가 배신이면서 다이묘우들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꿀림이 없는 위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카네츠구가 섬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켄신[謙信]이라는 영걸이 있었으며, 그의 자식[각주:10] 카게카츠[景勝]는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그 카게카츠의 중신인 카네츠구는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라 평가 받았고[각주:12] [각주:13], 그렇기에 카게카츠가 아이즈[会津] 120만 석을 영유했을 때 히데요시의 특명으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 석을 하사 받았다.[각주:14] 당시 30만 석 이상 영유하는 다이묘우[大名]는 이에야스[家康] 이하 11명,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무장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25만석,[각주:15]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20만 석[각주:16]이었다.
 이렇듯 카네츠구는 배신(陪臣)의 신분이면서도 보통의 다이묘우가 가지지 못한 기량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다른 다이묘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진면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휘된다.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죽음으로부터 1년 동안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에 대한 야심을 명확히 드러냈고,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나오에 카네츠구는 차례로 아이즈로 귀국하였다. 아이즈 120만 석으로 이봉되어 아직 1년 반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동안 히데요시의 조문을 위해 상경하거나 하여 아이즈 경영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게카츠가 영내에 도로나 다리의 정비, 성의 수축과 낭인을 새로이 등용하고 있다. 거기에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의 교외인 코우자시하라 평원[神指原]에 새로이 성을 쌓고, 본성인 와카마츠 성[若松城]의 해자를 깊게 파는 등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모반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의심했다.

 1600년 4월.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을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 동시에 나오에 카네츠구에게는 카네츠구와 친분이 있던 쇼우코쿠 사[相国寺]의 승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에게 명령하여 카게카츠의 상경을 권하라고 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다.
 카네츠구는 죠우타이에게 답서를 썼다. 카게카츠에게는 이미 허락을 맡은 상태였다. 이것이 후세에 ‘나오에 장[直江状]’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에야스에 대한 통렬한 도전장이다. 내용은 죠우타이[承兌]가 의심하며 거론한 항목 하나하나씩 반론한 것이기에 굉장히 장문이지만 요점을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상경 재촉에 대해서는, 신영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나마 여러 사정으로 영지 경영할 시간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착수해야만 한다는 뜻을 밝힌 후 ‘이번에 또 다시 상경하라면 영지를 다스릴 틈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며, 서약서를 제출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썼으며 또다시 같은 것을 쓰더라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튕겼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쿄우토 근방의 무사들은 차제구(茶諸具)를 모으겠지만 우리들 시골뜨기 무사들은 창이나 철포, 활과 화살을 모은다. 이는 그 지역의 풍속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소”라 하였다. 이는 반쯤 약올리는 생각으로 답했던 것이리라. 계속해서 말했다. “도로나 다리를 만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당연한 일. 만약 역심을 품었다면 다른 나라와의 국경에 해자를 파고 길을 끊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굉장히 도발적인 어구를 이어갔다.
 “역심이 없으면 상경하라니 이건 마치 아이들의 말투외다. 무엇보다 역심을 품었던 자가 실패해서 도망쳐 상경해서는 새로이 땅을 하사 받고 권세가(여기서는 이에야스를 지칭)와 인척관계를 맺으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러한 현 세태는 카게카츠의 마음과 맞지 않는다”고 한 뒤,
 “나이후 님[内府様=이에야스], 츄우나곤 님[中納言様=히데타다]께서 아이즈를 공격하러 오신다고 하는데 모든 것은 그때 해결합시다”고 끝을 맺었던 것이다.

 5월3일. 이 서장은 오오사카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는데, 이를 본 이에야스는, 
 “63살 내 평생 지금까지 이렇게 무례한 서장은 본 적이 없다”
 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의 군을 일으켰는데, 이후의 경과는 지금까지 몇 번 언급했기에 생략하지만,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 소식을 듣고 오야마의 진[小山の陣]에서 병을 되돌리자, 카네츠구는 언젠가 다시 이에야스와 싸우게 될 것이라며 그 전에 배후를 든든히 하기 위해 모가미 령[最上領]을 침공하지만 그러던 중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서군(西軍)의 패전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560년생.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고굉지신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도 인정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 후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카네츠구의 영지였던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되는데, 카네츠구는 계속해서 성과 성 밑 마을 조영을 담당했다. 1619년 12월 19일 에도[江戸]에서 죽었다. 60세.

  1. 나중에 카네츠구의 부인이 되는 오센노카타[お船の方]의 남편이었다. 나오에 가문에는 데릴사위로 들어와 나오에 카게츠나[直江 景綱]의 딸 오센노카타와 결혼하여 남자자식이 없었던 나오에 가문을 이었다. [본문으로]
  2. 모우리 히데히로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사망 후 후계자 다툼인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처음엔 카게카츠의 반대편인 카게토라[景虎] 측이었으나 그를 배신하고 카게카츠 측으로 넘어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동맹을 맺을 때는 카츠요리에게 사자로 파견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야마자키 슈우센은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배신자인 히데히로에게 약속된 은상을 못 받게 하였다. 이에 분노한 히데히로는 야마자키 슈우센과 말다툼하다 살해하였고 그 옆에서 말리던 나오에 노부츠나도 함께 살해하였다. [본문으로]
  3.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원래 일본에 있었던 것으로, 소유주였던 일본의 승려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조선에서 가져간 것은 『송신언행록(宋臣言行錄)』 65권 20책,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90권, 『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 221권, 『부석음주례주소(附釈音周礼註疏)』 42권,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4권, 『산곡시집(山谷詩集)』, 『오조명신언행록 전집(五朝名臣言行録前集)』 등이라 한다. [본문으로]
  4.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나, 일반적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수도였던 후시미[伏見]를 뒤로하고 아이즈[会津]로 향할 때 지어진 것이라 한다. 낙양성과 후시미를 엮은 것. [본문으로]
  5. 쇼우조우는 ‘카츠조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죽은 하인의 형, 큰아비, 조카. [본문으로]
  7. 이 일화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간행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권15[巻之十五]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 편에 실린 것으로, 원문에 따르면 푯말에는 케이쵸우 2년(慶長二年=1597년) 2월 7일이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즉 본문대로 카게카츠[景勝]가 아이즈[会津]를 영유하던 때가 아닌 아직 에치고[越後]에 머물 때이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되는 것은 1598년의 일 [본문으로]
  8. 에피소드 같은 일화 상이 아닌 실제로 카네츠구와 켄신이 만났을 가능성은 낮다. 더구나 켄신이 죽은 1578년 당시 카네츠구는 아직 19살. 지휘봉을 쥐기에는 너무도 어리 나이이다. [본문으로]
  9. 역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일화. [본문으로]
  10. 양자. 켄신 누나의 아들.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메이지 시대에 간행 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배신(陪臣)으로 나오에 카네츠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호리 나오마사[堀直政]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들이라며 절찬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한편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만들어진 사가 나베시마번[佐賀鍋島藩]의 번사(藩士)가 간행한 하가쿠레[葉隠]의 10권 145편에서 히데요시는 천하를 취하기 위해서는 대기(大氣), 용기(勇氣), 지혜(知慧)를 겸비해야 하는데, 현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배신(陪臣) 중에는 삼요소 중 두 개씩 가진 자가 세 명이 있다. 다만 나오에 카네츠구는 대기, 용기는 있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대기와 지혜는 있지만 용기가 부족,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용기와 지혜가 있지만 대기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14.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할 때, 히데요시가 카네츠구에게 30만석을 주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카네츠구가 카게카츠에게 하사 받은 것은 6만석(위키에 따르면 카네츠구 휘하 무장[与力]까지 포함하면 30만석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5. 카토우 키요마사는 히고[肥後]의 절반. 사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한 1598년 당시에는 19만 5천 석. [본문으로]
  16.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를 중심으로. 24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2.03.22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루리루리 2012.05.02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근 아이카와씨의 나오에 카네츠구의 책을 읽었는데,,
    말년에 카게가츠에게 버려졌다는 설이 있네요,,,
    드라마에서의 이미지로 최고의 군신관계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설마~라는 생각이 들지만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5.06 0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요즘 정신이 없다 보니 글을 써 주신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정말 죄송.

      아이카와라는 분의 견해는 흥미롭군요.
      괜찮으시다면 간단하게나마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이라는 느낌이군요.
      이후에도 카네츠구의 파벌인 요이타구미与板組와 그의 부인 오센お船가 내정과 부인들 사교에서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 수장인 카네츠구를 버릴 수 있을 거라고는 우선 생각하기 힘들군요.

      거기에 카네츠구는 죽자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까지 돈을 부쳐줄 정도로 에도 막부에도 파이프가 있는 사람인데 카게카츠가 무시할 순 없다고 역시 생각합니다.

  3. 루리루리 2012.05.09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과 카네츠구의 대우는 요네자와번으로 옮겨지고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센은 카네츠구의 사후 나오에가가 단절된 후에도 3000석의 화장료?(아마도 은거료라고 생각됩니다)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다카츠로 바뀐후에도 이 화장료는 유지가 되어서
    센이 카게카츠의 측실 문제와 후사인 사다카츠 결정등 우에스기 집안사 문제를 진두지휘하였다는게 아닐까라는 가설도 있군요,,
    아마도 키쿠히메가 죽은뒤 센이 집안의 큰어른과 같은 존재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입니다.
    반면 카네츠구는 나오에가를 상속등 단시간의 출세와
    미츠나리와 같은 문공파와 무공파의 갈등이 우에스기 집안에도 잠재적으로 존재하다가
    요네자와 이봉후 그간의 갈등이 폭발하지 않았는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간에 스스로 나오에가를 단절시켰다는 것도 후대에 미화된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추측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5.10 1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 아이카와라는 분의 글 만으로는 카네츠구가 백안시되었다고 말해주는 아무 것도 없네요.

      카네츠구는 죽기 5년전에 행해진 오오사카 농성전에서도 우에스기 가문의 총참모 적인 위치로 우에스기 군을 지휘했습니다. 물론 이때는 요네자와로 옮긴지도 꽤 된 상태였구요.

      후대에 미화된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추측도 그에 상응..아니 정설화 된 것을 뒤집기 위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 보다 2~3배나 많은 확고한 증거가 필요하니까요.

  4. 루리루리 2012.05.09 13: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네츠구가 문헌상으로 등장하는 것도 정확히는 오타테의 난 이후이여서
    그전의 기록은 대부분 추측성 소설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죠죠 마사시게와 권력 다툼후 승리한 카네츠구가 그간의 대내외적 사건을 전부 해결하였다는 가정아래 그의 공으로 돌린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다른쪽으로 흐르지만..
    책에서는 카게카츠도 역사상의 승리자여서 당연스럽게 우에스기 카게카츠라고 부르지만
    켄신은 카케토라를 관동관령으로 나가오계의 수장으로는 카게카츠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예로 켄신 사후부터 카게카츠가 우에스기성을 사용합니다..
    호죠,도쿠가와도 카게카츠를 나가오라고 부르구요,,
    히데요시와의 동맹후 자연스럽게 우에스기성을 인정받은 것 같습니다.
    카스가야마성의 혼마루를 사용하는 것도 카게토라구요 카게카츠는 외곽에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본 책이 100% 옳은건 아니지만 다른 입장으로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5.10 1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네츠구가 오타테의 난에서 거의 활약이 없었던 것은 압니다만, 말씀해 주신 것들은 에도시대에 간행된 군기물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군요.

      예를들어 카게토라를 우에스기 가문과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카게카츠를 나가오 가문과 에치고의 슈고守護...
      오타테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켄신이나 주변 다이묘우의 서장 등 1차사료에서는 카게카츠만을 후계자로 여겼지, 카게토라를 후계자로 생각한 듯한 증거는 전무하다고 합니다.

      또한 호우죠우北条가 카게카츠를 우에스기로 칭하지 않은 것은 우에스기 가문=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라는 정치적 이유였다고 합니다. 호우죠우의 주영향력이 칸토우인데 다른 이를 칸토우칸레이라 부를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여담으로 엣소우 동맹越相同盟때 호우죠우 가문이 켄신을 칸토우칸레이로 인정한다는 구절이 들어갈 정도로 양 측에서는 예민한 문제엿으니까요.(이에야스도 그러했다면 이도 역시 오다 가문 휘하였던 토쿠가와 가문이, 오다와 싸우던 카게카츠를 낮추어 보려는 역시 정치적 의도가 있었고요. 이는 켄신과 대립한 가문이 자주 쓰던 행위였습니다. 타케다 가문 역시 그랬고요.).

      카스가야마 성에서 카게토라와 카게카츠의 사는 곳은 착각하신 듯. 카게카츠는 御中城様라 불릴 정도로 성의 중심부에 있었고, 카게토라는 정확하진 않지만 오히려 성 밖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오타테의 난과 그것을 둘러싼 배경에 관해서는 작년(2011년)에 나온 이마후쿠 타다시今福匡의 「우에스기 카게토라-켄신의 후계자 자리를 노린 반주류파의 맹주上杉景虎―謙信後継を狙った反主流派の盟主」를 추천드립니다. 당시 1차사료를 중심으로 기술된 굉장히 좋은 책이더군요.

      다시 한번 장문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5. 소설이 열리는 나무 2012.07.02 14: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까지 이에야스를 분노케 했는데도 어떻게 감봉정도로 끝날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했던일만 살펴보면 세키가하라 이후 처형당한 이시다,안코쿠지,고니시에 전혀 뒤지지않아 보이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20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굉장히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우선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이 굉장한 명문이라는 점. -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특성 상 명문가란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거병 소식을 들은 뒤 세키가하라로 향한 이에야스의 뒤따마 내지는 빈집털기를 하지 않은 점.

      또하나 들자면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종전 직후에는 자기 맘에 안 든다고 한 가문을 뽀갤 수 있을 정도의 위세는 아직 갖추지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시츠구[吉継]라는 이름이 아닌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갑옷을 입지 않고 지팡이 같은 것을 잡고 있는 인물이 요시타카(=요시츠구)

 오오타니 교우부쇼유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省 吉継]는 천하의 분수령이 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할 것을 알면서도 우정을 위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편에 서 장렬히 싸우다  그 병든 몸을 산화시킨 비창(悲槍)의 무장으로 유명하다.

 1600년 6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를 동원하여 아이즈[会津]로 향했다. 이때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이에야스의 동원령에 응하여 7월에 츠루가를 출발하였다.
 이날이 되기 전까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이름은 역사의 표면에 눈에 띄게 등장한 적도 없었으며, 이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의 시점에서도 극히 평범한 다이묘우로,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인인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자 하였다.

 도중, 요시츠구는 미노[美濃] 타루이[垂井]에서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요시츠구와 함께 아이즈로 향하게 된 미츠나리의 아들 하야토노쇼우[隼人正][각주:1]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이 즈음 사와야마에 은거하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첫째 아들 하야토노쇼우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아이즈에 보내겠다고 신청한 상태였다.

 요시츠구는 사자의 구두로 미츠나리도 함께 아이즈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미츠나리가 무공파 장수들에게 습격 받았을 때, 이에야스에게 도망쳐 보호를 받게 되지만[각주:2] 그로 인해 은퇴를 강요당한 미츠나리가, 반(反)이에야스의 태도를 버리기는커녕 여전히 이에야스 토벌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은 천하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츠나리가 아이즈로 함께 가준다면 요시츠구 자신이 이에야스와 화해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이에 대하여 미츠나리는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사와야마로 와 주길 바란다고 사자를 보내온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시점에도 무슨 일인가?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사와야마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요시츠구와의 만남을 대단히 기뻐하며 잠시 옛정을 떠올린 뒤, 중대한 계획을 밝혔다.

 “이에야스의 행태를 보자니, 돌아가신 태합(太閤)님의 유훈(遺訓) 정치를 위반할 뿐만 아니라 히데요리 님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네. 우리처럼 태합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일.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향하는 지금이야말로 이에야스 토벌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세. 거병하여 이에야스를 쓰러뜨리려 하오.”

 듣고 있던 요시츠구는 놀랐다. 너무 무모하다 – 요시츠구는 잠시 틈을 준 뒤 입을 열었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는 300만석에 달하는 거대 다이묘우일세. 군사수도 많으며 더구나 지금에 와서는 그의 명망에 비견되는 이조차 없네. 돌아가신 태합도 항상 ‘이에야스 님은 지용을 겸비하신 분,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고 말씀하신 인물이네…”

 요시츠구는 불과 19만석의 미츠나리가 그러한 이에야스와 싸운다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열심히 미츠나리의 뜻을 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미츠나리는 이 계획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공모한 것이기에, 이제는 취소할래야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며, 요시츠구도 부디 참가해 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요시츠구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요시츠구는 사와야마 성에서 나와 본진이 있는 타루이로 되돌아와 심사숙고 하였다.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와의 우정과 그런 자신을 믿고 미츠나리가 밀모를 털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것을 무시한 채 아이즈[会津]로 향할 수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히데요시[秀吉]가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 히메지[姫路]에 있을 때, 16살의 자신이 먼 분고[豊後][각주:3]에서 와서 섬길 수 있었던 것도 미츠나리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아래서 150석으로 시작해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임명되어,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으로 승진했을 때는 미츠나리와 함께 제대부(諸大夫)의 한 사람[각주:4]으로도 선정되었다. 요시츠구의 이런 출세에는 미츠나리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각주:5]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의 그런 우정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요시츠구와 미츠나리 사이에 속설이지만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가 다회(茶会)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 즈음 요시츠구는 불치의 업병(業病)을 앓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요시츠구가 입댄 찻종을 꺼려했다.[각주:6] 그때 미츠나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요시츠구에게 찻종을 받아 깨끗이 원샷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며 미츠나리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한편 요시츠구는 이에야스[家康]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자주 이에야스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단지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집안싸움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와 함께 양측의 화해조정에 힘쓰고 있을 때, 야스마사가 이에야스에게 크게 질책을 당하였기 때문에 요시츠구도 또한 이에야스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을 관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야스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요시츠구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응하려 했던 것이다.

 타루이의 본진에서 요시츠구는 심사숙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츠나리에게 승산은 없었다. 때문에 또다시 사자를 보내어 미츠나리에게 결심을 바꾸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결심에 변함이 없었다.
 7월 11일.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타루이에서 전군을 이끌고 사와야마 성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를 위해서 죽자고 결심한 것이다. 
미츠나리를 만면에 기쁨을 표하며 요시츠구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타도의 준비계획은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타니 요시츠구 그리고 역시 미츠나리의 요청에 응하여 사와야마 성에 온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의 협의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에야스 타도에 임하기 전에 요시츠구가 미츠나리에게 전한 유명한 충고가 있다. 이하는 그 내용이다.
 “귀공(미츠나리)에게는 방자하고 거만한 점이 있다 – 고 다이묘우를 시작으로 말단 병사들까지 날마다 떠들고 있는 듯 하네. 다른 사람의 위에 서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되네. 이것을 잘 판단하여 이번 큰일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님과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님을 위에 세우고, 귀공은 그 아래서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네. 거기에 남들이 보기에 귀공은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천하무쌍이지만 그에 비해 용기는 부족하다고들 여기고 있소. 이에야스 타도계획에는 모우리, 우키타 님 외 다른 다이묘우들도 참가할걸세. 이 계획을 처음부터 짠 것은 귀공이니, 계획이 진행될 때는 남들보다 먼저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를 임하길 바라네.”
 그야말로 미츠나리의 결점에 대한 충고였다. 미츠나리도 당장은 친구 요시츠구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 20만의 대군이 격돌하였다.
 이날 요시츠구[각주:7]는 토다 카츠시게[戸田 勝成],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 為広][각주:8], 오오타니 요시하루[大谷 吉治][각주:9], 키노시타 요리츠구[木下 頼継][각주:10] [각주:11]의 부대를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두고, 자신은 그 후방에 본진을 두었다. 오오타니 부대의 우익에는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각주:12],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각주:13],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각주:14] 등을 배치하였다[각주:15]. 이 포진은 더 오른편에 있던 마츠오야마[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 대비한 것이었다. 요시츠구는 처음부터 히데아키에게 딴마음이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주변의 배치도. 빨간색은 동군. 파란색은 서군. 노란색은 도중 배신하는 무장들이다.

 오전 8시. 결전이 시작되었다. 오오타니 부대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쿄우고쿠 타카토모[京極 高知]의 부대를 상대로 격전을 펼쳐 압도하고 있었다. 요시츠구는 병든 몸이었다. 뚜껑이 없는 가마에 타고서는 지휘하였다. 뭉개진 얼굴을 흰 포로 감싸 눈 만을 내 놓고 있었다. 그 눈도 거의 실명에 가까웠다.

 전황은 서군이 조금이지만 유리. 그러나 일진일퇴. 곧이어 정오가 되었다. 이때였다. 마츠오야마 산에서 형세를 관망하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갑자기 산을 내려와 오오타니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침착하게 맞아 싸웠다. 하지만 요시츠구의 오산이 생겼다. 이 배반에 대비하여 배치한 아사자 나오마사 등의 부대까지도 함께 배신하여 오오타니 부대를 향해서 공격한 것이다.[각주:16] 오오타니 부대는 세 방향의 적과 싸우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다 카츠나리, 히라츠카 타메히로 두 무장이 전사를 하였다. 요시츠구는 두 무장의 죽음을 보고 받고 각오를 정했다. 옆에 있던 유아사 고스케[湯浅 五助]를 가까이 불러,
 “내 목을 적에게 넘기지 마라”[각주:17]
 고 명한 뒤 배를 갈랐다. 고스케는 배 가르는 요시츠구의 목을 베어 준 뒤 그 목을 전포[羽織]에 싸서 땅에 묻은 다음 토우도우 부대를 향해 돌격하였다.[각주:18]

오타니 요시쓰구[大谷 吉継]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을 섬겼던 오오타니 씨[大谷氏]의 출신이라고 한다[각주:19]. 처음엔 키노스케[紀之介] 나중엔 요시타카[吉隆][각주:20]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측근시동[小姓]부터 시작하여 1585년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가 되어[각주:21]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서임, 관백 히데요시의 제대부(諸大夫) 중 한 명이 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신뢰를 받았기에 그에 대한 의리로 서군에 참가하였다. 사나다 유키무라[真田 幸村]의 부인은 요시츠구의 딸[각주:22]이다. 묘는 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의 옛 전쟁터[古戦場],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있다. 격전을 펼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이 요시츠구의 분전에 감명받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요시츠구가 나온 그림으로 이런 것도 있습죠.


  1. 이시다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이시다 시게이에[石田 重成] [본문으로]
  2. 미츠나리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3. 근래엔 오우미[近江] 출신이라고는 하나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오오타니 촌[小谷] 출신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요시츠구의 성과 같은 오오타니[大谷]라고 ‘큰 大’자를 썼으나,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의 수장의 고향인지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 발음은 같지만 ‘작을 小’를 써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5. 미츠나리의 도움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나 요시츠구의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마누라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집사격인 모친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요시츠구가 콧물을 떨어뜨렸다고도 하며, 얼굴의 고름이 찻종에 떨어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병사는 6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8. 둘이 합쳐 900명. [본문으로]
  9. 요시츠구의 첫째 아들. [본문으로]
  10. 요시츠구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11. 둘이 합쳐 3500명. [본문으로]
  12. 에치젠[越前] 이마죠우[今庄] 2만석의 다이묘우[大名]. 600명 동원. [본문으로]
  13.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 7만석의 다이묘우. 2000을 동원. [본문으로]
  14.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 2만석의 다이묘우. 600을 동원.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아와지[淡路] 수모토[洲本] 3.3만석의 다이묘우로 1000명을 동원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배치되어 있었지만, 일본에서 와키자카는 듣보잡 중의 듣보잡이라 이 책에선 4명 중 3이 나오면서도 기술에서 빠져있다. 정말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이런 듣보잡 중의 듣보잡을 감히 이순신 장군의 라이벌 포지션에 배치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제작진은 평생 좆잡고 반성해야 한다. [본문으로]
  16. 여담으로 이 배신자들은 전후,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배신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며 아카자 나오야스, 오가와 스케타다는 영지 몰수, 쿠츠키 모토츠나는 반토막(2만석에서 9590석)이 되며, 와카시카 야스하루만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배신한다는 뜻을 알렸다며 영지를 보전받았다. [본문으로]
  17. 병들어 추해진 얼굴을 적에게 보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유아사 고스케는 이때 묻는 모습을 토우도우 타카토라의 조카인 토우도우 타카노리[藤堂 高刑]에게 걸려, 타카노리에게 자신의 목을 줄테니 대신 주군의 목이 여기에 묻혀 있는 것을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에야스가 타카노리에게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목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알기는 하지만 유아사 고스케와 약속을 하여 말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자, 오히려 감심한 이에야스에게 상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위에도 언급했지만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가신 출신이 아니라고 한다. 여담으로 유명한 '내적인 일은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외적인 일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에게'라고 가신에게 편지를 보낸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그 편지에 요시츠구의 애미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쎄다는 것도 썼지만, 만약 요시츠구의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의 가신뻘이었다면 특별히 언급하였을 텐데도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오오토모 가문과 오오타니 가문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본문으로]
  20. 한때 킨키[近畿]를 지배했던 미요시 가문[三好家] 마지막 당주의 이름 미요시 요시츠구[三好 義継]의 이름과 같아서 불길하다며 서군에 가담하기 직전에 바꾸었다고 한다. 위에 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세키가하라 병풍에는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본문으로]
  21. 츠루가 성주가 된 것은 1589년의 일 [본문으로]
  22.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tele-mann.tistory.com BlogIcon telemann 2011.09.06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좋은 글 감사드려요. 좋은 하루 되시길....

  2. Gyuphy IV 2011.09.06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헣헣허헣. 요시츠구의 악령이군요. 재밌게 봤습니다.
    그럭보면 세키가하라 고전장에 갔을적에 요시츠구의 묘에도 들렀었던 기억입니다만 참 산새우는소리만 들리는 산기슭이라, 그 처절한 전장터가 지금은 이런 촌구석(정말 학생들도 잘 안다니는 촌..;;)이라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듭니다.

  3. Favicon of http://tele-mann.tistory.com BlogIcon telemann 2011.09.06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어 공부를 하다가 일본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발해지랑님 블로그를 알게되었습니다.

    실시간으로 못 보고 복습하다 보니,, 댓글이 늦었네요.

    글 올라오면 종종 댓글 달아드리겠습니다. ^^

  4.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9.07 0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은 참 가혹한 것이 돋보이는 미남자였던 요시쓰구에게는 나병을 내렸고, 통일을 눈앞에 둔 노부나가에게는 직전의 죽음을 선사했으며, 자식을 그리도 사랑하던 히데요시에게는 자식의 끔찍한 죽음을 내려주었으니 말입니다. 핀트가 엇나간 듯 합니다만, 요시쓰구란 인물은 곱씹을 수록 새로운 맛이 나는 사람입니다.

    군사적 재능은 킨고를 상대로 보여준 분전을 생각해 보았을 때 더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으며(히데요시가 요시쓰구에게 병사 십만을 주어보고싶다고 했던가요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군요.)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이자, 뛰어난 재사였으니 모든 면에서 준수한 팔방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을 등록하기에 생각난 것입니다만, 어쩌면 요시쓰구는 패배를 알고서도 미쓰나리의 편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병이란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이었을테니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7 0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구가 미남이었다는 것은 후세의 창작이 아닐지... 보통 뛰어난 활약을 한 사람은 어느새 미남이 되는 경우가 있나 보더군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도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 등장했을 때만해도 그다지 미남은 아니었나 본데 이후 절세의 미남이 되었듯이요.

      확실히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엄청난 활약을 했습지요. 머리 하나로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의 마에다 군 1만 5천을 되돌리게 하였으며, 사나다 부자를 끌어들여 토쿠가와 주력군 3만 이상을 시나노에 묶어 놓았으니까요. 아마 요시츠구가 없었음 서군은 아예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났을 가능성도 있었습지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병들어 죽느니 전쟁터에서 죽길 바랬을지도.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7 1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네가 미남이 아니었다는 것을 전 튀어나온 이빨을 근거로 한 말이었는데, 당시는 그것이 추남이 아닌 용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자세히는 耿君님의 블로그를 참조해 주시길.
      http://hyunk02.egloos.com/4126094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9.07 2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고가는군요. 요시쓰네는 토끼상이었단 것인가(..)

      사나다 유키무라가 받아온 미화를 생각해본다면, 발해지랑님의 말씀이 사실일 듯합니다. 요시쓰구 본인은 지하에서 이 얘기를 알게된다면 웃고 있겠군요.

      쓸데없는 소리입니다만 어언 100명을 다 채워가는 듯 한데, 요시쓰구는 몇번째인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8 0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구가 84번째 였습니다.
      어서 빨리 이 책을 끝내고 신장공기 해야 하는데 말입죠..--;

  5. Favicon of http://pray4abyss.egloos.com/ BlogIcon 로날드럭 2011.09.14 19: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임 전국바사라3에서는 좀 다크하게 나오더군요.
    분고 오토모 씨와 연줄이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만,
    발해지랑님도 여기에 그닥 동의하시지는 않는 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14 2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에 주석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만약 오오토모[大友] 가신 출신이라면 오오토모 소우린[大友宗麟]이 그런 것을 언급했을 것 같은데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오오타니 씨[大谷氏]가 큐우슈우[九州] 출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9.15 2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이랑 같이 흰두건이 아이콘이 된 것 같은 요시츠구랄까;;
    요시츠구 얼굴 그림은 요괴나 악령 뺨치게 그려놨군요(...) 히데아키가 생각보다 일찍 죽어서 그런지 요시츠구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연관 스토리도 나름 임팩트가 강한거 같네요.

    각주 2번에 히데이에 한자가 나오이에로 써져있네요.

  7. 권지용 2011.09.17 2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에이 일러 탓에 첫인상은 타이의대모험의 미스트번 코스프레인줄 알았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18 1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비슷한가 보죠? 어떤가 해서 찾아보려고 해도 어떤 것인지 모르겠군요. 검색해도 전국바사라의 것만 나와서요
      (전국바사라는 마치 떠돌이 검심의 시시오 같은 이미지군요. ^^)

 1578년 3월.
 천하에 용명이 자자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켄신은 평생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기에 친자식이 없어 자연스레 후계 다툼은 켄신의 양자 중 둘로 압축되었다.
 한 사람은 동족[각주:1]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와 켄신의 누나 센토우인[仙桃院]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게카츠[景勝], 또 한 사람은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의 성주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아들 카게토라[景虎]였다.

 카게카츠는 부친 마사카게가 켄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뒤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 定満]에게 살해[각주:2]당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친과 함께 켄신 아래서 자랐는데, 켄신과는 친척인 것도 있어 켄신에게 귀여움 받으면서 자랐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위해서 손수 습자첩(習字帖)을 만들어 주었으며, 켄신이 에치고를 통일했을 때 받은 ‘단죠우쇼우히츠[弾正少弼][각주:3]’의 관직명을 카게카츠에게 물려주었다. 그런 점 때문에 켄신은 카게카츠를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라 여겨졌다[각주:4].

 하지만 켄신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유언도 남겨지질 않아 카게토라에게도 충분히 후계자의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켄신의 장례식도 치러지지 않은 채 카게카츠와 카케토라 사이에 상속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 에치고를 둘로 나누는 쟁란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이라고 한다.
 다음 해인 1578년 3월 카게카츠는 오타테의 난의 승자가 되었다. 이때 카게카츠의 나이 25세였다.

 카게카츠는 과감한 무장이었다.
 오타테의 난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1582년 3월.
카이[甲斐]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멸문시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명령하여 우에스기 공략을 시작[각주:5]한 것이다. 카게카츠는 각오를 정했다. 칸토우[関東]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에게 그런 결의를 담아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활과 화살을 들고 에치고 하나만으로 일본 전토 60여주와 싸우려고 합니다. 일전을 치러 멸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명예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운 좋게 살아 남는다면 일본에 비할 바 없는 영웅으로 이름을 남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면목을 세우는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사옵니다.[각주:6]

 또한 시대는 나중이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의 도화선이 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생트집[각주:7][각주:8]이 있었을 때, 카게카츠는 휘하의 장수들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모반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냥 나이후[内府=
이에야스]에게 굴복하는 것도 내 뜻과 다르다. 이제는 결심했다. 싸우게 되면 우리 가문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지금 떠나도록”
 카게카츠가 실제로 저렇게 말했는지는 둘째치고 시국에 정면으로 맞서려 한 카게카츠다운 일화이다.

 카게카츠의 직속부하들은 카게카츠를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정말 추상같은 위엄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카게카츠는 직속부하들에게 단 한번도 따스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미소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카게카츠는 한 마리의 원숭이를 길렀다. 어느 날 이 원숭이가 카게카츠의 두건을 쓰고 카게카츠의 자리에 앉아 깍지를 끼고서는, 잘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명령을 내리는 흉내를 내었다. 아마 카게카츠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카게카츠는 웃었는데, 이 웃음은 카게카츠가 근신들에게 보인 생애 유일한 웃음이었다고 한다.

 또한 어느 때인가 후지가와[富士川] 강을 건널 때, 한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가라앉으려 하였다. 카게카츠는 노기 서린 얼굴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배에 있던 부하들은 일제히 강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어 카게카츠가 쿄우토[京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 이하 수백 명의 행렬은 너무도 조용하여 기침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고 오로지 사람과 말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는 막부군에 속하여 오오사카 시기노[鴨野]에 포진하였다. 그곳을 니와 나가시게[丹羽 長重][각주:9]가 방문하였는데, 그때 카게카츠는 몸에 갑주도 걸치지 않고 청죽(靑竹)으로 지팡이 삼아 걸상에 앉아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좌우에는 장병 300여명 모두가 창을 세우고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카게카츠와 함께 오오사카 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깃발은 켄신 때부터 이어져오는 감색 바탕에 히노마루[日の丸]의 부대표식[馬標]과 [毘]의 깃발을 치켜세운 진중은 너무나도 숙연하였다.
 나가시게는 군기가 너무도 빠릿빠릿한 그 모습에 뻑이 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시대를 앞으로 되돌려 1582년 4월부터 시작된 오다 군[織田軍]의 우에스기 공략은 6월 3일 엣츄우[越中]에 있는 우에스기의 속성(屬城) 우오즈 성[魚津城]이 함락되어 카게카츠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바로 이 전날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는 바람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건을 알게 된 오다 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카게카츠는
히데요시[秀吉]를 차세대 패자(覇者)로 보고 접근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오대로(五大老)[각주:10]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아이즈[会津] 120만석[각주:11]으로 당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에 이은 제3위이란 거대한 영지를 하사 받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카케카츠의 인생은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계속 보내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바뀌게 된다.

 천하를 향한 이에야스의 야망이 명확해지자,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지를 다스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1599년 고굉지신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함께 아이즈로 귀국하여, 이후 이에야스의 상경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내(領內)에 있는 성곽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이미 이에야스와의 전쟁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미리 손잡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카게카츠는 이에야스가 물러간 다음에도 병사들을 이에야스의 본거지 에도[江戸]가 있는 남쪽으로 보내지 않고, 배후에 있는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영지 야마가타[山形]를 공격하기 위해 나오에 카네츠구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카네츠구는 야마가타 성[山形城] 근방까지 진격했지만, 그때 이미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서군(西軍)이 패한 뒤였다. 카게카츠는 결국 항복의 길을 택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555년생. 처음엔 키헤이지[喜平次]. 가독(家督)을 이은 얼마 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항복하여 이후 충성을 다했다. 1586년 에치고[越後]를 중심으로 55만석을 영유했으며, 후에 토요토미[豊臣]의 성(姓)과 하시바[羽柴]의 씨(氏)를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임진왜란에도 참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의 패전으로 아이즈 [会津]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되어 이봉되었다. 1623년 죽었다. 69세.

  1. 켄신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가독을 물려받기 전의 성이 나가오[長尾] [본문으로]
  2. 보통 둘이 배타고 연못에서 놀았는데 술에 취해 둘이서 수영하다 익사하였다고 하며, 켄신에게 반항적인 마사카게를 여명 얼마 안 남은 사다미츠(76세)가 살해함으로써 주군 켄신을 편하게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군기물 北越軍談 이야기라고 한다. [본문으로]
  3. 관리를 감찰하는 기관 '단죠우다이[弾正台]'의 차관. 억지로 우리나라의 기관과 비교한다면 감사원 공직감찰본부장 쯤? [본문으로]
  4. 근래에 들어선 에치고의 영주에는 카게카츠,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는 카게토라에게 물려주려 한다는 시각이 대세인 듯. [본문으로]
  5. 엣츄우[越中] 방면에선 시바타 카츠이에, 시나노[信濃] 측에선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코우즈케[上野]에선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각각 카게카츠의 에치고[越後]를 노렸다. [본문으로]
  6. 사실 이때는 정세가 이렇게 사면초가가 되고 나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고,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노부나가와 화해하려고 노력했었다. [본문으로]
  7. 一. 영지 경영하지 말고 빨리 상경해라, 一. 어쩌면 조선을 다시 공격할 수도 있으니 그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 一. 에치고[越後]의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가 말하길 카게카츠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 一. 어째서 무기 사들이고, 길이나 다리를 고치며, 성을 새로 쌓고 있나? 등 [본문으로]
  8. 그러나 사실 우에스기 가문이 정비한 길이나 새로 만든 성 등은 모가미 영토로 침입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카게카츠에게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났을 때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영토로 침입하여 탈취하려 했던 것 같다. 또한 성을 새로 짓는 행위는 히데요시가 엄히 금했던 것이었던 만큼, 이에야스가 괜한 생트집을 잡는다고는 할 수 없다. [본문으로]
  9.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의 아들. 이 당시 히타치[常陸] 훗토 번[古渡] 1만석의 번주. [본문으로]
  10.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1. 아이즈[会津] 92만석, 사도[佐渡] 14만석, 쇼우나이[庄内] 14만석.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5.27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게가쓰와 가게토라의 '분업'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군요. 매우 일리있어 보입니다. 나가오의 핏줄은 에치고를 포함한 호쿠리쿠를 유지하되, 호조의 핏줄을 내세워 간토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의도로 보이는군요. 해석이 제멋대로는 아닌지 모르겠네요.

    도해 전국무장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부분을 봤는데 사례가 제시되지 않아 발해지랑님께 여쭙겠습니다. 여기 보니 슈도에 관한 대목 중 적장에게 반해 사로잡고자한다는 설명이 있는데 혹시 사례를 아시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27 2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슈님이 말씀하시는 의도가 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켄신이 너무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사이가 나뻤던 우에다 나가오 가문[上田長尾家]과 코시 나가오가문[古志長尾家]을 축으로 갈리는 바람에 오타테의 난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집에 내일 들어가기에 그 부분을 좀 봐야겠군요. 다만 과문하여 그런 케이스는 첨 듣는군요.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5.28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가오 가문의 대립에 대해선 불초하여 잘 모릅니다만 간략히 서술해 주실 수 있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02 14: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음... 이건 따로 포스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2. 맹꽁이서당 2011.06.01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에스기 가문도 모리나 시마즈 가문처럼 막부 말기에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한을 풀려고 일어날만 했겠네요. 지역이 외진 곳이라 못 일어났을까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아이즈'라는 국명이 등장하던데, 아이즈 = 에치고 국인가요? 일본 66국 지도를 보면 노토반도 동쪽에서 동해안을 따라 엣츄, 에치고가 있고 그 북동쪽에 데와국이 있더라구요. 처음에 55만석을 받았다는 '에치고'에서 120만석 '아이즈'로 이동되었는지, 아니면 에치고 = 아이즈라서 그냥 영토가 확장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02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네자와 번[米沢藩]은 3대 츠나카츠[上杉綱勝] 때 츠나카츠가 급사하여 대가 끊어질 뻔 합니다만, 당시 막부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아이즈 번[会津藩]의 호시나 마사유키[保科 正之(아버지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도움으로, 츠나카츠의 여동생과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 츄우신구라[忠臣蔵]에서 유명한 악역] 사이에서 낳은 츠나노리[上杉綱憲]를 양자로 받아서 번을 유지할 수 있어(대신 30만석에서 15만석으로 감봉), 그 은혜를 막말까지 잊지 않고 있었기에 아이즈 번과 같은 길을 택하게 됩니다.
      (아이즈 번이야 쵸우슈우 지사들이 薩賊会奸[도적의 사츠마, 간신배의 아이즈]라고 하며 신발 바닥에 쓸 정도로 좌막파의 기수).

      아이즈[会津]는 무츠[陸奥] 남부에 있는 군(郡)의 이름입니다. 일본지도를 보시면 토우호쿠[東北] 지방에 후쿠시마 현[福島県]의 한 가운데 이나와시로 호수[猪苗代湖]가 있고, 그 옆에 분지가 있는데, 대충 그 부근입니다.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동된 것입니다. 우에스기 가문이 떠난 에치고의 자리엔 만화 센고쿠에도 등장하는 호리 히데마사[堀秀政=센고쿠에는 호리 규타로]의 아들 호리 히데하루[堀秀治]가 30만석으로 입국합니다(그 외 5~6만석급 가문이 몇개 더).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은 아이즈로 떠나면서 연공을 싸그리 가져가는 바람에, 호리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은 사이가 엄청 안 좋아지고, 그것이 주석 7번에 언급된 호리 가문이 우에스기 반란 운운하는 계기로 이어집니다.

    • 맹꽁이서당 2011.06.02 1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그럼 간토8주로 이봉된 이에야스처럼, 가게카쓰도 히데요시에 의해 더 많은 영지를 얻은 대신 더 먼 곳으로 이봉된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세키가하라 패전으로 이봉한 요네자와는 더 북쪽?)

      요세 '센고쿠' 2부가 번역되지 않아서 참 아쉽더라구요. 언제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아이즈라는 자리가 워낙 요충지다 보니 뭐 영전이라면 영전이라고 할 수 있습죠. 다만 그 시대는 워낙 자신들 본거지에 목을 메던 시대(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도 오와리를 내 놓고 이에야스가 다스리던 자리로 가라니까 거부했듯이)라 우에스키 가중은 조금 떨떠름해 하지 않았을지...

      그렇습죠. 요네자와는 아이즈보다 쪼금 북쪽으로 볼 수 있습죠.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6.02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게카츠가 켄신 죽고 카게토라보다 빨리 일을 착착 진행한걸 보면 어느 정도 준비는 하고 있었던거 같군요. 생전에 얘기를 안해뒀으니 생각 하고 있었던게 당연한 걸수도 있겠고...

    원군도 없고 교섭도 안먹히고 결국 자결한 카게토라도 카게토라지만
    카게토라 쪽에 붙었다 죽어버린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왠지 더 억울해 보이기도...
    애초에 왜 카게토라한테 붙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호죠라면 무지하게 싫을법도 한데...혹시 알고 계시면 가르침을 구해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착착 진행이라기 보다는, 운 좋게 켄신이 죽을 당시 친카게카츠 파들이 그 주위에 있어서, 카게토라 등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로 일을 진행시킨 듯 합니다.

      카게카츠파와 카게토라파가 처음 맞부딪힐 초기만 하더라도 에치고를 둘러싼 다이묘우들은 대개 카게토라를 응원했다고 하더군요. 카게카츠파의 공작이 그만큼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왜 붙었는지는 궁금하더군요. 다만 켄신이 죽고 카게카츠파가 우에스기 가문의 가독과 그에 딸린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의 직까지 계승한다고 선언하자, 노리마사가 '딴 건 몰라도 우에스기 가문 가독과 칸토우칸레이 만은 내 결제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말은 하였지만, 카게카츠파는 '이미 켄신이 정한 일이다'고 우겼다는 말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쪽에서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을지...

      어쩌면 그냥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 대항할 만한 곳이 노리마사 거관이었던 오타테[御館]였기에, 카게토라파가 그곳을 점령하다보니 휩쓸린 것이 아닐지...
      (...라고 예전엔 생각했습니다. 지금 오타테의 난을 다룬 책을 하나 기다리는 것이 있으니, 책 도착하여 특별한 것이 있으면 따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6.18 18: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제라...그럴수 있겠군요.
      개인적으론 결제로 맘 상하는거보다 자기 쫒아낸 집 자식인게 더 큰일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아비는 아비고 자식은 자식이었을런지;;;;

      적당히 물어본 질문에도 언제나 장문으로 답변을 써주셔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왠지 죄송하기도 하고...^^;; 그래도 신경써서 답변 달아주시니 매번 감사합니다.

  4. 본다충승 2011.06.03 14: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키헤이지 당신은 요로쿠를 멀리 했어야 했습니다. 갠적으로 우에스기 몰락(?ㅋ)의 주범을 야마시로노카미로 보기에... ㅎ 참으로 오랜간 만에 들어 왔습니다. (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카네츠구가 없었음 아예 그런 기회조차 없었을 것 같군요. 카네츠구는 알려진 만큼 뛰어난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데와[出羽] 전역에서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군세와 싸운 하세도우 전투[長谷堂合戦]를 그린 '하세도우 전투 병풍[長谷堂合戦図屛風]에 그려져 있는 요시아키[義光]

 야마가타[山形] 성주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이웃나라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모친 요시히메[義姫]의 오빠이다. 혈통 자체가 우월한 몸매에 뛰어난 용모를 가졌던 듯 하다.[각주:1] 후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의 용색에 반하여 오우슈우[奥州] 원정 때 쿄우토[京都]로 데려가 측실로 삼았다.

 각설하고, 요시아키의 활약은 16살 때 강도퇴치의 일화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부친 요시모리[
義守]와 타카유[高湯] 온천[각주:2]에 휴식을 취하려 갔는데, 그날 밤 강도가 습격해 온 것이다. 이때 요시미츠는 '형형한 눈빛을 하고 마치 화살이 쏘아지듯이 뛰쳐나가 날카로운 칼질로' 단번에 강도 2명을 베어 부상을 입혔고, 이어서 그 중 가장 거대한 사나이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려 제압한 후 두 번 찔러 상대가 힘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목을 베어 칼끝에 꿰어서 높이 쳐들고는 우렁차게 함성을 질렀다 한다.

 부친 요시모리는 옆 나라 다테[伊達]의 비호(庇護) 하에 있었기에 젊은 날의 요시아키가 너무나 뛰어나고 용맹한 것에 불안을 느껴 요시아키의 폐적(廢嫡)하기로 결심하고 유폐시킨다. 물론 이는 다테 가문[伊達家]의 의사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모가미 가문의 자립을 목표로 하는 요시아키를 위험하다 여겨 부친인 요시모리에게 아들 요시아키 살해를 명령한 것이다. 유폐 중의 요시아키는 이런 다테 가문에서 독립을 기원하며 주변에 있던 절 릿샤쿠 사[立石寺]에서 소원성취를 빌었다. 요시아키 23~25살 즈음의 시기였다. 요시아키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부친 요시모리를 강제로 은거시킨 후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공격하여 자살하도록 만들었다[각주:3]. 이어서 1577년에는 다테 측에 붙어있던 텐도우 성[天童城]의 텐도우 요리사다[天童 頼貞]를 공격하였다[각주:4]. 다음 해에는 남쪽으로 공세의 방향을 돌려 카미노야마[] 성을 낙성시켰으며, 또다시 북쪽의 신죠우[新庄]로 향해 마무로[] 성을 점령하여 마침내 모가미 군[最上郡] 전체를 판도에 넣었다. 1582년에는 숙원이던 쇼우나이[]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다다음 해인 1584년, 요시아키는 야치 성[谷地城]의 성주 시라토리 나가히사[白鳥 長久]를 모략을 이용해 야마가타 성으로 불러서는 살해하였다. 모략이야말로 요시아키의 진면목으로, 그는 힘으로 몰아 붙이는 타입의 무장이 아니었다.

 1587년,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하는데 이로 인해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와 험악한 관계에 빠진다. 마사무네가 쇼우나이 지방의 무토우 씨[武藤氏]의 부탁을 받아 중재(仲裁)에 나서자, 겉으로는 마사무네의 중재를 받는 척하며 방심시킨 후 불시에 대군을 이끌고 쇼우나이 지방으로 침공한 것이다.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에게 있어서는 모친 요시히메의 오빠이기에 외삼촌이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이 배신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체면이 깎였다. 이 원한을 붓으로 다 적기도 힘들다'고 말하며 마사무네는 격노하였다. 모가미와 다테 사이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사태로 번졌다. 그때 요시히메가 양국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곳에 가마를 타고 들어가 80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결국 양자의 충돌을 회피시켰다고 한다. 이때의 반감은 나중에까지 이어져, 후에 요시아키와 요시히메는 손을 잡고 마사무네 독살 미수사건으로 이어진다(다테 마사무네 항 참조)

한편 쇼우나이 지방은 강적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세력이 손을 뻗쳐왔다. 1587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전국에 영()을 내려 다이묘우[大名]들간의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였기에[각주:5], 다음 해 5월에는 모가미-우에스기 간의 항쟁을 멈추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에 우에스기 측의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가 이를 무시하고 쇼우나이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하 역자 가필================================================

 1587년. 다테 가문의 종속하에 있던 오오사키 가문[大崎家]에서 내분이 일어나, 친 다테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던 오오사키 가문의 가신 우지이에 요시츠구[氏家 吉継]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구원을 요청. 마침 다테 가문에게서 독립을 바라고 있던 오오사키 요시타카[大崎 義隆]는 분가 격[각주:6]인 모가미 가문의 요시아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비슷한 시기 요시아키는 쇼우나이를 지배하고 있던 무토우 씨[武藤氏][각주:7]의 당주인 무토우 요시우지[武藤 義氏]를 모략으로 요시우지의 부하를 이용해서 살해. 요시우지의 뒤를 이은 요시오키[武藤 義興]는 우에스기 가문의 맹장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의 아들인 요시카츠[武藤 義勝]를 양자로 받아 들임과 동시에 혼죠우와 그의 주군인 우에스기 가문의 힘을 빌어 영내를 안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쇼우나이 지방의 친 모가미 파의 호족들의 불안을 부채질하여 호족들은 일제히 봉기한다. 이를 호기로 본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 요시오키를 살해하고 요시카츠를 에치고[越後]로 쫓아 보내어 일단 쇼우나이 지방을 손에 넣는다. 이때 오오사키 가문의 구원 요청이 도착한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오사키 령으로 진격하나, 마사무네는 나카니이다 성[中新田城]를 공격 중 대패하여 중신 이즈미다 시게미츠[泉田 重光]를 인질로 바치고 겨우 궁지를 벗어나지만, 오오사키 령에 원군으로 온 모가미 요시아키의 군세와 나카야마[中山]란 곳에서 대치하게 된다. 또한 이 패배는 오우슈우 전역에 소문이 퍼져 반 마사무네 파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일제히 마사무네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위기에 빠진다.

 한편 오오사키 령에 도착하여 마사무네의 군세와 대치하고 있던 요시아키에게도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에치고로 도망쳤던 무토우 요시카츠가 지 애비인 혼죠우 시게나가와 함께, 요시아키가 마사무네와 싸우는 틈을 타 쇼우나이로 진격. 쇼우나이의 모가미 측 호족들을 물리치고 쇼우나이를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모가미 령으로 침공한다.

 서로 적들에게 침공 당하였지만 대치하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던 마사무네와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모친이며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이 대치하는 곳에 가마를 타고 와 화해를 종용. 서로 다방면에 적들을 두고 있던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된다.

======================================이상 역자 가필====================================================

 요시아키는 분노하여 히데요시에게 호소하였으나[각주:8],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는 이미 히데요시와 면식을 튼 사이였으며 더구나 히데요시 측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도 친한 사이였다. 소송은 우에스기 측이 월등히 유리했다. 요시아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통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소송에 졌다[각주:9]. 이후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서 이에야스를 통해 매[] 등을 헌상했지만, 히데요시의 태도는 냉담하여 요시아키가 쿄우토로 인사를 올리러 간다고 하여도 '그럴 필요는 없소'하며 거부하였다.

 요시아키는 더욱더 이에야스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요시아키는, 히데요시가 "조금 더 늦었다면 여기가 위험했을 것이야"라고 하며 목을 툭툭 친 다테 마사무네보다도 더 늦게 오다와라에 당도하였지만[각주:10], 이때도 이에야스가 중간에서 잘 주선해 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어 이에야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크게 갖게 되었다.

 이후 요시아키는 자기 가문의 안전을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였다.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측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에게 편지를 보내, "히데요시님을 섬기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습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였고, 오다와라 정벌을 끝낸 후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온 히데요시의 처소에 처자식을 몽땅 데리고 출사하여 히데요시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1591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 15만의 대군이 난부[南部]의 쿠노헤 마사자네[ ]를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奥州]로 왔을 때도 요시아키는 중앙의 실력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이에야스에게는 둘째 이에치카[家親][각주:11]를 가신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일종의 인질제공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다이묘우[大名]의 자식을 가신으로 한 최초의 사례였기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히데츠구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에게 눈독을 들인 것도 이때이다. 쿠노헤 정벌을 마치고 쿄우토로 돌아가던 도중 야마가타 성에 들린 히데츠구를 요시아키는 성대히 영접하며, 그 시중으로 아직 12살인 딸 코마히메를 내보냈다. 히데츠구는 그녀의 미모에 빠져 요시아키에게 청하여 쿄우토로 데려가 시첩으로 만든 것이다. 마사무네의 숙부 다테 시게자네[伊達 ]는 이를 '만천하의 비웃음거리'라고 자신의 일기에서 비난하였다.

 히데츠구의 측실이 된 코마히메는 이름도 '오이마노츠보네[お]'로 불리게 되지만, 히데츠구의 실각사건 때 산죠우 강변[河原]에서 참수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더구나 요시아키에게도 히데츠구 모반사건의 불똥이 튀어 한때는 쥬라쿠테이[楽第]에 감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히데요시 사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당연히 이에야스 측에 서 야마가타로 진군하는 우에스기의 지장(智將)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의 군세와 싸웠다. 정강을 자랑하는 나오에 군단이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지만,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전보가 전해져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너무나도 자기 가문 안전을 위해 머리를 굴린 결과가 반대의 결과로 나온다.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어있던 둘째 이에치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장남 요시야스[義康]를 살해하게 되는데, 요시아키가 죽은 뒤 이로인해 가문이 흔들려 이에치카의 아들 요시토시[義俊]의 대[각주:12]에 모가미 가문의 야마가타 번은 소멸하게 된다[각주:13].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546년생. 데와[
出羽] 야마가타[山形] 성주. 아시카가 씨[足利氏]의 일족 시바 카네요리[斯波 兼頼][각주:14]의 후손으로 요시아키는 11대째. 임진왜란 때는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이에야스[家康]와 함께 주둔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야마가타 57만석이 된다. 1614년 1월 18일 죽었다. 69세.

  1. 요시히메도 한 미모로 유명했다 한다. [본문으로]
  2. 현재는 자오우 온천[蔵王温泉]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동시대의 군기물 혹은 다테 가문의 기록에도 요시아키의 동생 요시토키의 기록이 없기에(요시토키의 이름이 처음으로 거론되는 것은 18세기 들어서라고 한다) 요시아키가 동생을 공격하여 자살하게 만든 것은 의문시 되고 있다. [본문으로]
  4. 점령은 못하고 요리사다의 딸을 요시아키의 측실로 삼는 것으로 화해. 그러나 1582년 요시아키의 삼남 이에치카[清水 義親 - 모가미 씨의 일족 시미즈[清水] 가문을 상속]를 낳고 죽어 텐도우 가문과의 동맹이 끊기게 된다. [본문으로]
  5. 이 전인 1585년에 큐우슈우[九州]지방을, 1587년에는 칸토우[関東]와 오우슈우[奥州]에 각각 선포하였다. 이것을 선포함으로써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본문으로]
  6. 오오사키와 모가미 가문의 선조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오우슈우 칸레이[奥州管領] 시바 이에카네[斯波 家兼]이다. 이에카네의 큰아들인 타다모치[大崎 直持]가 오오사키[大崎] 지방을 영유하며 '오우슈우 탄다이[奥州探題]'가 되었으며, 둘째아들인 카네요리[最上 兼頼]를 데와[出羽] 모가미 군[最上郡]에 파견하여 '우슈우 탄다이[羽州探題]'로 만들었다. [본문으로]
  7. 코에이[光栄]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다이호우지 씨[大宝寺氏]로 표현된다. [본문으로]
  8. 히데요시의 사투금지령은 1587년 12월. 혼죠우 시게나가가 침공한 것은 1588년에 들어서이기에. [본문으로]
  9.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이때 얻은 쇼우나이 지방과 나중에 이봉된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가문의 영지로 인해 분단된 상황이었기에, 세키가하라 전쟁 때 모가미 영토를 침공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그에 따른 실패로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줄어들게 된다. [본문으로]
  10. 부친 요시모리[最上 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당시 이에치카의 나이 10살로, 성인식 후 이에야스[家康]의 이름글자 중 뒷글자 '야스[康]'가 아닌 앞글자 '이에[家]'를 받은 것을 보면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았던 듯. 후에 2대 야마가타[山形] 번주가 되지만 3년만에 죽어 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본문으로]
  12. 요시아키의 넷째 아들 야마노베 요시타다[山野辺 義忠]와의 다툼 끝에. 요시토시의 그릇이나 능력에 의문을 품은 가로들이 야마노베 요시타다 옹립을 꾀하였다. [본문으로]
  13. 그후 모가미 가문은 오우미[近江]에 1만석으로 멸봉 당하나 9년 뒤 요시토시가 병으로 죽자 남겨진 아이(요시토모[義智])가 너무 어려(당시 2살) 영지는 반인 5000석으로 줄어,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다이묘우 급 직신[交代寄合]이 된다. 사족으로 에도 시대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일족을 제외하곤 최대급(57만석)의 삭탈관직[改易]. [본문으로]
  14. 모가미 카네요리[最上 兼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shiroyume 2009.10.05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마히메가 히데츠구 첩인건 알았지만 이에치카를 가신으로 바쳤던건 처음알았던 사실. 자신이 행했던 업보는 결국은 자신에게나 친한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교훈을 주는 인물...... 정말 이런꼴 보고 있으면 조선이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어요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치카와 비슷한 케이스로,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바쳐졌던 구마모토 호소카와[熊本細川藩]의 2대 번주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 忠利]도 비슷한 케이스입죠. 세째이면서도 이에야스와 안면을 튼 덕분에 둘째 오키아키[興秋]를 제쳐두고 번주가 될 수 있었습죠(장남인 타다타카[忠隆]는 세키가하라 때 부인이 시어머니(가라샤)를 버리고 튄 것 땜시 폐세자)

      조선도 뭐 왕자의 난이나 영조-사도세자를 보면 비슷하지 않나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건 흑역사는 있습니다.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05 1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도를 때려잡는걸 보면 깡 있어 보이는데 반대로 가문 보전 때문에 열심히 뛰어다녔군요;;;

    뻘플로....혁신에서 요시아키 나오기전 모가미로 플레이하면 카키자키 이상으로 빡세던 기억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6척짜리 철로된 봉을 들고 다녔다고 하네요.
      위에 있는 그림 전체 화면(신역사군상17. '나오에 카네츠구' 실려있습죠)을 보면 저런 표정으로 도망치는 어떤 놈을 그 6척짜리 철봉으로 떼리고 있는 장면입죠.

      혁신에서 카키자키도 다이묘우로 등장하던가요?..라고 한자 변환하고 있으니 홋카이도우[北海道]의 그 분이셨군요. ^^

  3. 나라 2009.10.05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 친구는 정말 인생무상이더군요..(멍)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런데 시게자네가 마사무네의 숙부였나요? 사촌으로 알고 있었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리 오랫동안 비워서 죄송했습니다. ^^

      깊이 들어가면 워낙 사람 좋던 요시아키가 이놈저놈에게 땅도 많이 떼어준 것이 화근이 된 듯하더군요. 그렇게 기득권이 된 세력이 강성한 탓에 어린 주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듯 합니다.

      다테 시게자네는 마사무네 할아버지 타네무네[稙宗]의 자식 사네모토[実元]의 아들이기에 우리나라로 하면 5촌 당숙이 됩죠.

  4. 이거참 2009.10.05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이런거 보면 일본인들이 참 독종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조상들이 이런 시대를 살아와 이렇게 잔인하고 독한 인종들만 살아남는 시대가 있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의 일본인들이니 말입니다. 지금도 무의식 한켠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안 가린다는 의식이 그들의 역사적 체험과 기억으로 남아있을거라 생각하니 소름끼치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렇지도 않기는요. 부하들의 주도권 다툼에 아들 잃었다고 슬퍼했다고 하더군요.
      이 글은 요약입니다. 한 인물에 관한 것을 쓰는데 천 몇 백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덧붙여..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가히 좋지 않은 시각이십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자기 오줌으로 갈증을 풀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데도 결국 죽였던 영조가 있는 우리는 역시 그렇게 잔인한 족속인가요?

      국가존망의 위기 때 자신의 영달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충무공을 모함하고 충무공의 참모부 건물을 하렘으로 만든 원균과 같은 민족인 우리는 역시 수단방법 안 가리는 막장인가요?

      편견과 우월감은 백해무익한 감정입니다. 부디 그런 감정에서 헤어나오셨으면 하는 마음에 건방진 소리를 하였습니다. 기분 나쁘셨겠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그네 2012.11.10 0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래전 포스트의 댓글이지만 몇가지 주제넘은 첨언을 해봅니다.
      영조의 경우도 비교적 최근인 몇년전에 비밀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죠.
      몰래 음식물의 반입도 지시하였으나 모두 차단되고 심지어는 건강상태의 보고도 거짓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죽고난뒤 무척 애통해하며 힘없는 자신을 원망했다는데..
      편지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실제 역사적 사건은 인과관계가 명확치않은 복잡한 사연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벌어지는것이므로 영조 자신의 의지만이었다고 보긴 어렵겠죠.
      일본의 경우 전쟁 + 인접한 여러 쿠니와의 혈연,정치적관계가 워낙 복잡한데 가신들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도 무시못하니.. 다테의 경우도 그렇고 그런 비극이 많을 수 밖에 없겠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은 어느나라나 비슷할것같습니다. ^ ^

      발해님 포스트 즐겁게 읽고 갑니다. 'ㅇ'¥

  5. 나라 2009.10.06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전국시대의 일본들인은 조선인들보다 잔인하기야 하겠습니다만. 에도 막부 시절이 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돈이 없어 칼을 팔고 타케미츠를 들고 다니는 30석 사무라이 모습을 그린 야마다 쇼지 감독 영화가 생각나네요.
    권력투쟁에 있어 잔인하게 끝나지 않은 예가 얼마나 될까요? 일본인들이 특별나게 잔인한 게 아니라, 그런 예가 드물 것 같은 걸요. 조선시대 당파 싸움도 끔찍한 결과를 낳았었습니다. 몽고나 중세 유럽, 혹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의 잔인함은요? 남아공의 샤카, 아메리카 제국끼리의 전쟁, 심지어 뉴기니나 에스키모인들은 규범에 맞지 않으면 그냥 죽여버리는 걸요. 굳이 오래 내려가지 않더라도 한국전쟁 시기의 한국인들은 아귀인가요? 일본을 구석기 시대로 돌릴 뻔한 미국은요? 영국과 독일의 2차 대전은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가시는 것 자체가 그렇게 싫어하시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악독한 일본인의 모습을 닮아가시는 것 같네요.

  6. 맹꽁이서당 2009.10.06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몰랐던 다이묘 한 명 또 알고 갑니다. ^^ 57만석이라는 거대한 번이 소멸한 것이 안타깝네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우에스기와 싸웠던 가문이었군요. 저는 아직도 세키가하라 전투의 방아쇠를 당겼으면서도 도쿠가와 가문과 한판 제대로 붙지 않은 우에스기 가케카쓰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에서는 모가미나 다테 가의 배후 습격이 두려웠다... 고 했는데, 그럴거면 아예 시작하지를 말던지.. --a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늦었지만 추석 잘 쇠셨길 바랍니다 ^^ 그러고보니 2016 올림픽은 리오데자네이루가 되었더군요. 남미 첫번째라는 상징성이 있으니 명분에서는 네 도시 중 가장 컸지만, 실제로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a

    아, 새 블로그는 무기한 연기하고 있습니다. 번역이란게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세키가하라 때의 우에스기 군의 행태는...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결전이 하루만에 끝난 것이 아니고 더 길어질 것이라 예상한 것이라고.

      모가미 가문으로 인해 분단된 영토를 하루 속히 연결하여 다시 침공해 올 이에야스에 대한 대비하던지,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졌다면 그 길로 칸토우로 침공했을 때를 위한 후방 안전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몰라도 불온한 시기에 쇼우나이[庄内]와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영토로 분단되어 있는 우에스기는 필연적으로 모가미 령을 침공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 다테 마사무네도 장기간 펼쳐질 것을 대비하여 오우슈우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같은 동군 계열인 난부 가문에 반란(와카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이용. 후에 이에야스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 한 마사무네가 암살)을 일으키기도 했습죠.

      조금 씩이라도 미리 해 놓는 편이 오히려 빨라지더군요.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

  7. ulanfu 2012.11.10 0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모술수와 암살,이간으로 점철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간악하고 비정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실제 가독을 물려받았을땐 무력을 사용할수도 없는 처지였고(친다테파들이 워낙 많은 상태여서)
    본인이 전쟁에 의한 피해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저런 간악한 인물에게 내통하거나 자기 주군을 배신하는 행동을 하진 못할겁니다 여하튼 배신이건,이간책이건 자기위하의 가신들에겐 굉장히 후한 군주여서 일개 항장에게도
    몇만석씩 녹봉을 줄정도로 관대한 군주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결과 지나치게 새력이 큰 가신들의
    모반으로 개역당하게 됩니다만... 실제 야마가타현은 현재에도 일본제일의 곡창지대고
    전국시대때도 사카이와 비견할정도로 사카다 지방의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가미직속 50만석포함 가신들의 녹봉을 다 합치면 50만석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요시아키가 죽기전엔 모가미계 무사들의 녹봉은 총 100만석을 넘겼다고 합니다

2009년 2월 2일에 산 책.

내 이야기 2009.02.07 17:48 Posted by 渤海之狼
간 만에(작년 11월 이후) 산 역사군상 시리즈...



뭐 이거야 이번 대하 사극이니 그냥 있었음 해서...아직 펼쳐 보지도 않았음.



잠깐 펼쳐 보았는데....대실망... --;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나왔던 책들의 짜깁기에 대부분이 만화 이야기...
뭐 어차피 케이지에 관한 이야기라면 '일몽안풍류기(一夢庵風流記)' 이상의 이야기는 나오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돈이 아까움.



역사군상은 신,구,특별 시리즈 포함해서 대략 60권 가까이 되고(뭐 센고쿠(戦国) 한정이라면 그 반으로 줄지만)
그 외의 잡다한 책들도 있는데 우에스기 켄신에 관한 책은 처음.
개인적으로는 켄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점이 컸지...
의(義)~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내 이미지 상으로 켄신은 저 '꽃의 케이지(花の慶次)'에서 주판알 굴리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처럼 계산적인 인물.
무(武)의 신으로서 비사문천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재물의 신으로서 비사문천[각주:1]을 섬긴 것 같은 느낌이 더 강함.
뭐 이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개인적인 생각의 갭이 큰 탓인지 관심이 안 갔음.

뭐 그래도 첫경험(으훗~)이기에 두근두근거림.
  1. 비사문천은 손에 보석으로 된 탑을 드는 모습이 많듯이 현세이익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서의 모습도 있다. [본문으로]

'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년 3월 1일에 산 책.  (4) 2009.03.06
서울역 북오프에 갔다 옴  (6) 2009.02.12
2009년 2월 2일에 산 책.  (0) 2009.02.07
첫 400명 돌파.  (0) 2009.01.17
2009년 첫 포스트는 역시 변명으로...  (0) 2009.01.01
지긋지긋한 광고댓글  (7) 2008.10.04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