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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베시마카츠시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10.27 나베시마 나오시게 4
  2. 2007.07.12 미즈노 카츠나리 10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

1618 6 3일 병사(病死) 81

1538 ~ 1618

의형[각주:1]류우조우지 타카노부(龍造寺 隆信)를 섬기며 활약하지만 타카노부가 전사한 후 그의 아들 마사이에(政家) 휘하에서 히젠(肥前)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섬기면서 기반을 다져 후의 사가 번(佐賀)의 기초를 쌓았다.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류우조우지 가문의 가독(家督)을 가신인 나베시마 카츠시게(勝茂)가 상속하여 명실공히 [나베시마 사가 번()]이 성립된 것은 1607년이다.

 카츠시게의 아비인 나오시게는 이 해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자식이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70세였다. 그 후 81세까지 산다.


 그의 일생은 [기다림]의 인생이었다.
 무리해서 덜 익은 과일을 따지 않고 [익어서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천하의 권력자나 조직이 류우조우지 가의 상속을 나베시마 씨()가 이을 수 있게 인정하기까지 나오시게는 류우조우지 타카노부가 전사한 후에도 23년이란 시간 동안 기다렸다. 암묵적으로 타카노부의 후계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라고 대부분의 류우조우지 가신들이 인정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나오시게는 타카노부가 전사한 책임을 진다는 이유로 치쿠고(筑後) 야나가와(
柳川)에 틀어박혀 버렸다.

 류우조우지 일문(一門)이나 나베시마 가신단(家臣團)을 시작으로 히젠(肥前), 치쿠젠(筑前)등의 호족들이 복귀하라고 사정에 사정을 하고 나서야 사가 성(佐賀)에 가까운 카마치 성(蒲池)으로 돌아왔다.


 그는 과정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인간이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말이다.


오래 산다는 것


 은거 후의 일이다.

 나오시게가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부하 중 하나가,

이 마을에는 90살이 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오래 산 노인이니 만나서 축하해 주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하고 권했다.

 그러자 나오시게는 차갑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굉장히 불쌍한 인간이군. 오래 살았기 때문에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자식이나 손자, 친한 친구나 지인들과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 기분을 생각해 보게.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 노인에게 정말로 축하할 일인지를

 나이를 많이 먹는 것에 존귀함과 경하스러운 일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인생을 보냈는가가 더 가치가 있다 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자 [죽음]에 임하는 생각도 엄격해졌다.

 사가 성()개수(改修)가 끝날 즈음. 카츠시게(사가 초대 번주)가 부친인 나오시게에게 성 안내를 한 적이 있다. 안내를 받은 후 옆에 있던 측근에게 살짝 말했다.

 “카츠시게는 적이 공격해 왔을 경우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여차했을 경우 배를 가를 장소를 잊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할복을 무사의 미학으로써가 아닌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종언(終焉) 중에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늙은 무장의 유머러스한 경고였다.


나뭇잎 그늘의 꽃


 [나베시마 카가노카미 토요토미노 아손 나오시게(鍋島 加賀守 豊臣 朝臣 直茂)]

 나오시게가 살아 있을 때, 은거소에서 자기 자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석탑에 쓰인 문자이다.[각주:2]


 나오시게는 히데요시의 신뢰가 두터웠다. 나오시게의 주군이었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를 히데요시가 평했을 때,

 “확실히 타카노부라는 사람은 명장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면 나오시게에게 국정(國政)을 맡겼기 때문이다.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

 라는 의미의 말을 할 정도였다.

 류우조우지 사가 번()을 대신하는 나베시마 사가 번()으로 현실 상의 이행을 처음으로 공인한 것도 히데요시였다. 당시의 히데요시는 이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오오사카 성(大坂)을 쌓았고 칸파쿠()의 위치에 올랐으며 그의 거처인 쥬라쿠테이()로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天皇)를 초대하는 등 권세의 절정기였다. 히데요시가 54, 나오시게가 50세일 때이다.


 이해(1589) 1월에 나오시게는 종오위하(從五位下) 카가노카미(加賀守)에 임명받았다. 물론 히데요시의 주청(奏請)에 의한 영진(榮進)이다. 이때 그 때까지의 이름인 [노부나리(信生)]에서 [나오시게(直茂)]로 고쳤다. [나베시마 카가노카미 토요토미노 아손 나오시게(鍋島 加賀守 豊臣 朝臣 直茂)]의 유래인 것이다.


 이 문구를 돌에 새겨 남기려고 그가 결심한 때 - 천하는 토쿠가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다스릴 때였다. 은혜를 입은 고인(故人)에 대한 마음을 세키가하라(ヶ原) 때 실현시킬 수 없었지만 이제 나이라는 것이 그를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로 이끈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나뭇잎 그늘에 떨어져 있는 꽃을 발견했을 때, 마음속에 그리던 당신을 만난 듯한 기분이더이다

れに りとどまれる のみぞ びし 心地する

라는 [하가쿠레([각주:3])]라는 책 이름의 유래라고 알려진 사이교우(西行[각주:4])의 시구() 그 자체가 지장(智將) 나베시마 나오시게 일생의 좌우명이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1.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어머니가 나오시게의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본문으로]
  2. 여담으로...그가 죽은 후, 그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는 “鍋島加賀守'藤原'朝臣直茂”로 ‘토요토미(豊臣)’라는 본성대신 '후지와라(藤原)'라는 본성이 붙어있는데, 나베시마 씨(氏)는 본디 우다 겐지(宇多 源氏) 사사키(佐々木)씨(氏)의 후예이기에, 제대로 하려면 “鍋島加賀守'源'朝臣直茂”라 해야 한다. 이리 된 데에는 바쿠후의 눈을 의식한 결과이겠지만 뭔가 착오가 있었던 듯 하다. [본문으로]
  3. 무사도라는 것은 죽는 것을 깨닫는 것(武士道と云ふは死ぬ事と見つけたり)’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사가 번(藩)의 무사 교육서. [본문으로]
  4. 1118년 ~ 1190년. 승려, 시인(和歌). [본문으로]
미즈노 가쓰나리[水野 勝成]

1651 3 15일 병사 88.

 

1565 ~ 1651.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지만 이에야스의 휘하를 떠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쿠로다 나가마사[田 長政] 등을 섬긴다. 1598년에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복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오오가키 성[大垣城] 공략에 참가.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는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 등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카츠나리[勝成]라는 인물

 

 미즈노 카츠나리의 부친인 소우베에 타다시게[兵衛 忠重]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모친인 오다이[於大]의 동생이다. 따라서 카츠나리는 이에야스와는 외사촌지간이다.

 카츠나리는 토우쥬로우[藤十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청년시대에 부친 타다시게와 싸우고 집을 나가 15년 간에 걸친 방랑 끝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를 목전에 앞두고 그제서야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부친 타다시게와 화해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7 23 부친 이즈미노카미 타다시게[和泉守 忠重]미카와[三河]의 치리후[池鯉鮒]에서 카가노에 야하치로우[加賀江 弥八郎]에게 죽음을 당했기에 가문을 이어 미카와 카리야[刈谷] 3만석의 영주가 되었다.

 

 그 뒤 오오가키 성 공략,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 冬の陣],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무공[각주:1]을 세워 1615 7 19일에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6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이어서 4년 후인 1619 7 15 빈고[備後]-아키[安芸] 49 8천석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카이에키[改易][각주:2]로 인해 공석이 된 빈고 후쿠야마[福山] 의 영주가 되었다. 영지(領地)는 빙고 국[] 남부(南部) 7개() 빗츄우[備中] 오다 군[小田郡], 시츠키 군[後月郡]을 합쳐 10만석이었다.

 

 이후 미즈노 카츠나리는 후쿠야마에 새로운 성을 쌓고 성 밑 마을[城下町]의 형성 및 영지 경영에 힘 썼다.

 가독(家督)을 장남 카츠토시[俊]에게 물려준 것은 1639년 윤 11 16일로 이때 휴우가노카미 카츠나리[日向守 勝成] 76, 미마사카노카미 카츠토시[美作守 勝俊] 42세였다.

 

시마바라[島原] 출진

 

 카츠나리가 마지막으로 전쟁터로 나간 것은 그가 독전관[軍監][각주:3]이 되어 시마바라 농민 반란을 토벌하러 출진했을 때이다.

 

 막부(幕府)의 명령을 받아 아들 미마사카노카미 카츠토시, 손자 이오리[伊織][각주:4] 이하 총 6344명의 장병을 이끌고 빈고 토모노츠[津]를 출항한 것은 1638 2 8일이었다.

 

 2 23히젠[肥前] 아리마[有馬]에 도착. 다음 날 24일에는 군사회의에 출석하여,

 이제와서 뭘 맘 편히 회의 같은 것을 하는가? 곧바로 군을 움직여 무조건 공격해서 성을 함락시켜야만 한다!”

 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여러 장수들은 26일을 총공격의 날로 정하였지만 하필이면 그 날 밤부터 비가 내려 26일 정오까지 계속 내렸기에 실제로 공격을 개시한 것은 다음 날인 27일이 되었다.

 

 이 때 오니휴우가[鬼日向][각주:5] 카츠나리가 이끄는 빈고의 군세는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 勝茂][각주:6]의 사가[佐賀]의 군세와 치열한 선봉 다툼을 하여 미즈노 가의 전사자는 106, 부상자는 382명이었다고 한다.

 

 농민군이 농성하는 하라 성[城]27일과 28 양일간에 걸친 총공격으로 인해 함락되었는데 막부(幕府)의 전사자 1127, 부상자 7800명인데 비해, 3 2일 참수된 농민군의 목은 남녀 합쳐 3만7000명이었다.

 임무를 끝낸 카츠나리가 히젠 시마바라의 코우지로 항[神代港]항에서 뱃길로 빈고 토모노츠로 귀환한 것은 3 18일이었다.

 

영지 개발에 힘 쓴 여생(餘生)

 

 1639 9 9일.

 카츠나리는 에도 성[江戶城]에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알현하면서, 노령으로 인해 은거한다는 뜻을 밝혀 허락을 받은 후 다음해인 1640 1 3일에 마지막으로 이에미츠를 알현한 뒤 빈고 후쿠야마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은거한 몸이기에 남들처럼 글이나 그림, 골동품 수집에 몰두했겠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시마바라 농민 반란군들의 참수당한 불쌍한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기독교 반란이라고 하지만 실은 영주의 가렴주구로 인해 생긴 실정(失政)의 희생양이었다.

 실제로 걷어 들일 수 있는 것이 4만석에 지나지 않는 영토임에도 시마바라의 영주 마츠쿠라씨[松倉氏][각주:7] 막부에 10만석이라고 보고하였고 또한 바쿠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 공사를 자청하여[각주:8] 생긴 재정적인 구멍을 농민들에게서 긁어 모았기 때문에 이러한 큰 난리가 난 것이다.

후쿠야마 시[福山市]에 있는 카츠나리의 묘(墓).

 

 그리하여 카츠나리는 정치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지 개발과 산업 발달에 의한 백성 생활의 향상'임을 깨닫고 남은 여생을 하천의 치수공사와 신전(新田) 조성에 받쳤다.

 그는 이런 영지 개발에 가노(家老)[각주:9]인 코바 효우자에몬[木場 兵左衛門]과 나카야마 게키[中山 外記], 칸야 지부[神谷 冶部] 등의 유능한 부하를 행정관으로 발탁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진두지휘하였고 공사를 할 때는 각 마을에서 매일 2000~3000명이나 농민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하루 쌀 2.7Kg씩 인건비를 지급했다.

 

 이 사업은 카츠나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그가 빈고에 들어왔을 때인 1619년에 10만석이었던 것그 후 79년이 지난 1698년 미즈노 가이 카이에키[각주:10] 당했을 때는 1323백석으로 증가하였다.

 은거 후 소우큐우[宗休]라는 호()를 칭한 카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1651 3 15.

 향년 88세였다.

  1. 여담으로 이 당시 카츠나리의 아들 카츠토시의 진영에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 武蔵]가 속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마사노리의 경우는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 5천석으로 줄었다. [본문으로]
  3. 군사(軍事)를 감독하는 직책 또는 사람. [본문으로]
  4. 후에 3대 번주(藩主)가 되는 카츠사다[勝貞] [본문으로]
  5. 용맹과감한 무장 혹은 남들이 세우지 못한 공적을 올린 맹장의 이름 또는 관도명[官途名 - 미카와노카미[三河守]나 휴우가노키미 같은 것[日向守]] 앞에 오니[鬼]라는 글자가 붙었다. [본문으로]
  6.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적자. [본문으로]
  7. 선대(先代)는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우콘사콘[右近左近] 중 우콘인 마츠쿠라 시게노부[松倉 重信]....사족으로 사콘은 시마 사콘[島 左近]. [본문으로]
  8. 영지의 수입에 맞게 부역이 내려졌는데 시마바라번은 배 이상 부역을 자청했다. [본문으로]
  9. 번의 수상(首相) 격인 인물. [본문으로]
  10. 5대 번주 카츠미네[勝岑]가 2살의 나이로 죽어 후계자 단절로 인한 것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