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姫=토미코[富子]]와 결혼하였다. 둘 다 재혼이었다. 테루마사의 첫 번째 부인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전사한 셋츠[摂津] 이바라키 성[茨城城] 성주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딸이었다.

 토쿠히메의 전 남편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였으나,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후 몰락하여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돌아와 있었다. 결혼은 히데요시[秀吉]가 선 중매였지만, 이에야스의 사위라는 조건이 테루마사의 출세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전쟁터에서 공명을 다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이렇게 빈정댄 적이 있었다.
 “산사에몬[산사에몬[三左衛門=테루마사]이 지금은 거대한 영지의 영주로 출세했지만 그건 오로지 그의 ‘거시기’ 덕분이다. 창 한 자루로 이렇게 출세한 나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테루마사는,
 “확실히 나는 ‘거시기’로 이렇게 출세했지. 만약 창까지 사용했다면 천하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창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하고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인이 이에야스의 딸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신경 썼었던 듯 하다.
 토쿠히메를 따라서 이케다 가문[池田家]에 온 늙은 시녀[老女]가 어느 날 테루마사 부부 앞에서,
 “우리 가문이 이렇게 번영한 것도 토쿠히메 님 덕분이옵죠”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얼굴색을 확 바꾸며,
 “내가 공적을 세웠기에 부인도 우리 가문에 시집온 것이며 영지도 더 하사 받은 것이다.”
 고 말하며 평소와는 달리 엄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는 테루마사가 연극한 것이다. 그 후 은밀히 그 늙은 시녀를 불러서는,
 “사실 말하자면 우리 가문의 영달은 자네 말마따나 토쿠히메 덕분이지. 그러나 그걸 대놓고 말하면 부인이 기어오를지도 몰라. 앞으로도 부인 앞에서는 그러한 말은 자제해 주기 바라네”
 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날 제후가 열석한 주연(酒宴)에서 테루마사는 왜소한 키에 대해서 비웃음 당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내 왜무(矮舞)라고 새로 만든 춤과 노래가 있으니 한번 들어보시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박수를 치며,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아와지[淡路][각주:1]라는 세 지역[国]의 주인이기에 키 따위 바라지도 않으니…”
 하고 부채를 펼치고, 몸과 손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둘째 아들로 키요스 성[清洲城]에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저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 츠네오키의 전력(戰歷)은 혁혁한 것이었다.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세운 공적으로 한 부대의 부대장[侍大将]가 되었고, 계속해서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정벌[朝倉征伐], 오우미[近江]의 오다니 성[小谷城] 공략,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등에 출진하였다.

 테루마사의 데뷔전은 1580년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공략이었다. 16세인 테루마사는 부친이나 형과 함께 셋츠 하나쿠마 성[花隈城]을 공성하였는데 이케다 부자(父子)의 활약은 눈부셔, 공략이 끝난 후 노부나가는 츠네오키에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영지를[각주:2], 장남 모토스케[元助]에게 이타미 성[伊丹城], 테루마사에게는 아마가사키 성[尼崎城][각주:3]을 하사하였다. 노부나가가 츠네오키에게 내린 표창장에서 테루마사에 대해 언급하길,

나이 16살에 불과하면서도 적진에 돌격하여 큰 무용을 자랑하니, 이는 정말 이케다 키이노카미[池田 紀伊守=츠네오키] 자네의 아들 답네. 내가 눈 여겨본 것이 틀리지 않아 기쁘며, 세운 공적 또한 비할 대 없도다
 고까지 말하며 격찬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이케다 부자는 히데요시 편에 서지만, 부친과 형은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와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전사하였다. 히데요시는 특별히 테루마사의 조모 요우토쿠인[養徳院][각주:4]에게 편지를 보내어, 츠네오키와 모토스케의 죽음을 위로하며 남겨진 테루마사를 포함한 아들들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사위로 토쿠가와 진영에 접근하였고 곧바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테루마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격렬한 공적 다툼을 벌인다. 이해의 7월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5]에 나섰던 이에야스는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거병소식을 듣고 급거 철군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선택된 것이 테루마사와 마사노리였다.

 우선 목표로 한 것은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노부나가의 손자]가 지키는 기후 성[岐阜城]이었다. 주공의 대장은 마사노리, 조공은 테루마사로 정해졌다.
 8월24일. 전투가 시작되어 기소가와 강[木曽川]을 도하한 테루마사 휘하 7천의 병사는 성 밖 엔마 당[閻魔堂]에 포진한 오다의 군세를 습격하여 수급 700을 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주공인 후쿠시마의 군세는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테루마사의 공적이 한발 앞서나가자 마사노리는 화가 났다. 왜냐면 공격은 동시에 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마사노리의 분노를 느낀 다른 장수들이 테루마사를 설득하여 다음 날 공성전에서는 마사노리가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테루마사는 그 약속을 어기고 앞서나가려 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내며 결국 테루마사가 나아가려는 길에 불을 질러 진로를 막았다. 이 양자의 공적 다툼은 낙성된 뒤에도 이어져 어느 쪽이 먼저 성에 진입하였는가에 대해서 서로 자기네가 먼저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아, 마사노리는 테루마사를 죽인다고 까지 말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당신은 이에야스의 사위잖소’라며 독전관[軍監]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말에 테루마사는 깨끗이 공을 마사노리에게 양보했다고도 하며, 양자가 동시에 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했다는 말도 있다.[각주:6]

 테루마사는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에서는 그다지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이 기후 성 공성에서 세운 공적으로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에서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 52만석이라는 대봉(大封)을 하사 받아, 이곳에 후세까지 명성이 자자한 히메지 성[姫路城] 축성을 개시하였다.
히메지 성은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등 서국(西国]의 토자마다이묘우[外様大名] 감시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위압하기 위해 무엇보다 웅대하게 만들어졌다.

재능있는 낭인(浪人)을 고용하여 자가(自家)의 강군(强軍)을 꾀했지만 그로 인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각주:7]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를 고용하여 그의 옛 주가인 쿠로다 가문[黒田家]은 물론 막부(幕府)에서도 클레임이 왔지만 테루마사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565년 생. 1584년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 성주[각주:8]. 1590년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으로 옮겼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메지[姫路]를 하사받았다. 1613년 1월 27일 죽었다. 49세.

  1. 이상 테루마사의 영지. [본문으로]
  2. 거성은 아리오카 성[有岡城]. [본문으로]
  3. 그냥 표창장[感状]만 받았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노부나가의 유모(乳母). 고귀한 집안은 젖물리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아기 때의 노부나가는 다른 유모의 젖꼭지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테루마사의 조모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의 젖꼭지는 물어 뜯는 일 없이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요우토쿠인은 후에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의 측실이 된다. [본문으로]
  5.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6. 테루마사는 5년간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였다. 때문에 마사노리 보다는 성 공격이 수월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대신 그만큼 절약하여 부인 토쿠히메[督姫]가 놀이개를 갖는 것도 금지했으며, 아이들에게도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1585년엔 기후 성[岐阜城] 성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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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10.11.23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친구도 참 난세를 거쳐 예상치 못한 출세를 한 대표적인 인물이죠
    이에야쓰의 사위가 되서 출세를 한 것도 행운이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아버지와 형이 횡사를 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히데요시 입장에서 이께다 부자가 괜히 오까자끼 공격하겠다고 나서서 사실 손해만 본 싸움이었는데
    그래도 그 아들을 잘 돌봐 줬으니 히데요시에 대한 의리도 큰데 말이죠
    아무튼 눈치 빠르게 이에야쓰에게 붙어서 영화를 누렸으니
    역시 센코쿠 지다이의 공명은 눈치싸움이 아니었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23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정동희님.

      개인적으로는 운만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테루마사의 부친 츠네오키는 노부나가 유모의 아들입니다. 당시 그리고 에도 시대 때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유모의 혈통들은 막부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더군요. 만약 노부나가가 살았다면 테루마사 역시 오다 정권의 중추에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아...이것도 운이라면 운이군요. ^^;)

      혈통문제를 하나 더 언급하자면 테루마사의 여동생(누나??)은 칸파쿠 히데츠구[秀次]의 정실이었습니다. 히데요시 정권이 이어졌더라도 테루마사는 순풍만파한 인생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테루마사 역시 범용한 무장은 아니던 것 같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했다는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던데, "주군에게 받은 녹은 인재를 모으는 데 써야 한다". 노부나가 역시 자기 부하들에게 축재를 하지 말고, 영지를 주면 거기서 나는 이익으로 인재를 모으는데 쓰라고 하지요(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도 그런 말을 합지요).

      테루마사도 그런 말을 하였는데,
      "내 스스로 다 할 순 없으니까 인재를 모아야 한다"
      라고 하며 50만석 이상의 다이묘우가 2~3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하며, 자기 부하 중에 그렇게 실천하는 자들을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합니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정벌전 때 세운 공 역시 상당했던 것을 보면 나름 능력은 있었다 생각합니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이 일어나기 2년전에 죽었는데, 토요토미 가문과 나름 인연이 깊었던 인물 들(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이 동시기에 죽었기에 에도 막부에 의한 암살설도 있습죠.

      센고쿠 뿐만 아니라 지금도 눈치(=시세를 읽는 능력)는 중요한 재능이라 생각합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11.23 2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장터 표끊어서 갔을때 근처에 아버님 츠네오키 무덤도 있었던 듯 한데 이게 또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 이래저래 능력있던 무장인듯은 싶습니다...

    정작 혁신에서는 그 간지 일러스트에 비해 능력이 그 마사노리보다 놀랄만큼 구려서 세키가하라 사나다로 플레이시에는 잡자마자 냉큼 +9 명검이 아까워서 참수시켰던 기억이라 이래저래 안습이(....)

    요즘엔 센고쿠 관련 게임만 하다보니 정작 역사쪽으론 등한시 하는 경향이 생겼는데(OTL...)발해지랑님 포스팅덕에 이래저래 많이 배우고 갑니다.

    //

    그 암살설에 관해서는 소녀 닌자 아즈미...라는 괴 영화에서 잘 다루고 있더군요(OTL....)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24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름 무패의 장수입죠. ^^(싸운 횟수가 그만큼 적지만요)

      확실히 신장의 야망에선 뭐 하나 특출날 것 없는 평범 그 자체같더군요.

      그쵸. 아즈미가 싹 다 죽이더군요. 오히려 너무 쉽게 죽이는 거 같아서 개인적으로 어처구니 없더군요(뭐 만화에 많은 것을 바랄 순 없습니다만)

  3. 맹꽁이서당 2010.11.28 15: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주군이었던 오다 가문보다 결과적으로 더욱 부흥했군요.
    도쿠가와 가문을 원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사위가 되고 거대한 영지까지 받았으니.. 묘하네요. ^^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전 초가을에 이스탄불과 파리에 잠시 다녀왔답니다. ㅎㅎ
    http://belldandy314.blog.me/50100327508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29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죠. 오다의 핏줄들이야 전부 1만석 쩌리들이었는데 이케다 핏줄은 10개 가까운 다이묘우에 전 영지를 따지면 100만석 가까웠다고 하니까요.

      여담으로 이케다 테루마사가 이에야스의 딸과 결혼할 때, 이에야스에게 부탁하여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테루마사의 아비 츠네오키[恒興]를 죽인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를 불러 아비가 전사할 때의 모습을 듣고 난 뒤,
      "자네는 영지가 얼마나 되나?"라고 묻자 나가이 왈,
      "5000석입니다"
      는 말을 듣고,
      "아버지의 목이 5000석밖에 안 되는구나"
      라고 하여 이에야스는 즉좌에서 나가이의 영지를 1만석으로 가증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
      .
      .
      ...만 실제로는 나가이 나오카츠가 1만석을 얻게 되는 것은 결혼식(1594)이 있는 후 몇년 뒤 세키가하라가 끝난 뒤인 1601년에 1만석이 되었다고 하니 그냥 일화일 뿐인 듯 합니다.

      ==================================================

      유럽여행기 잘 보았습니다. ^^
      엄청나게 풍부한 사진을 찍어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b

      양이 엄청난 만큼 오늘은 3일차까지만 보았습니다.

      이스탄불은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물가와 비슷한 듯 합니다.

      이교의 건물들을 그냥 놔두는 데에서 그들의 관용(??)을 느낄 수 있더군요.

      냥이 사진도 있어 기뻤습니다. ^^

      대항해시대에 관련된 것은 놓치지 않고 언급하시는데에서 맹꽁이서당님이 얼마나 대항해시대를 좋아하셨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아 나름 동질감을 느껴 기쁩니다. ^^

.

 

 선천적인 인격자였을지도 모른다.

 코이치로우[小一郎]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은 것은, 형제의 첫 대면을 치른지 3년 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낮은 신분인 채로 스노마타[墨俣]의 요새() 수비에 임명 받았을 즈음이었다. 히데요시는 코이치로우뿐만 아니라 그 어미, 누나와 매형, 그리고 여동생인 아사히[朝日]도 요새로 불러 크게 대접하였다. 이 때 오나카[]는 처음으로 히데요시의 처인 네네[々]와도 대면하였고, 네네의 양갓집 동생인 아사노 야헤에 나가마사[野 弥兵衛 長政]와도 면식을 텄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가족과 네네의 친정 쪽의 사람들과의 대면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그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접대하였고 곧이어 술자리가 끝나자,

 

 코이치로우는 이 요새에 남아라

 

 라고 이 아비 다른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나카는 될 수 있으면 막고 싶었지만 코이치로우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코이치로우는 이날부터 무사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동생을 별실로 불렀고 이어서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처남에 해당하는 아사노 나가마사도 불러 오게 한 후,

 

 둘이서 나를 도와라

 

 고 말했다. 옛날부터 무가(武家) 관습으로 가문의 당주가 대장이 되며, 그 동생이나 숙부가 곁에서 수족과 같은 부장(副將)이 되어 그것을 보좌하였. 말하자면 가문은 일족의 혈맹에 의해 성립되어 가는 이상 히데요시도 그런 형식을 취하고 싶었다.

 

 코이치로우는 언젠가는 내 대리인(名代)이 되어야 할 때도 올 것이다. 뭐든 잘 익혀두도록

 

 라고 말하며 이 즈음 이미 스노마타 성에 와서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있던 미노[美濃] 출신의 군사(軍師)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에게 코이치로우의 교육을 부탁했다. 한베에는 스노마타로 쳐들어 오는 적과 싸우는 실전 속에서 아이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쳐 주듯이 전투의 밀고 당김을 알려 주고 적 상태를 보는 법, 명령을 내리는 법, 사졸들을 돌보는 방법 등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가르쳤다.


 코이치로우는 좋은 학생이었다. 언제나 조신한 태도로 그것을 들었고 전투 속에서 보고 배웠다. 실제로 지휘시켜 보자, 어떤 것이든 과하지 않고 부족함 없이 한베에가 가르친 대로 행했다. 그 이상의 재능은 없었지만, 성을 지키는 것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한베에는 가졌다.

 이것도 하나의 기량일 것이다

 고 한베에는 생각하였다. 한베에가 보건대, 독창성이 없기에 어떤 일에건 익숙해지는 것이 빨랐다. 성격이 이의(異意)를 내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시한대로의 것을 한다. 더구나 그 행함이 견실했다. 마치 성을 지키기 위해서 태어난 듯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오다 군[織田]기후 성[岐阜城]을 공격할 때, 이 동생에게 진()을 지키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 하치스카 당[蜂須賀黨]의 경병(輕兵) 소수만을 이끌고 기후 성 뒷산에서 샛길을 타고 성 안으로 잠입하였다. 출발에 앞서 코이치로우에게 미리,

 

 내가 이끄는 부대는 성 안으로 은밀히 잠입하여 안에서부터 성문의 빗장을 풀겠다. 그 때 신호로 장대에 매단 표주박을 높게 쳐들 테니까 그걸 보면 곧바로 밖에서 문을 열고 성안으로 들어와 나와 합류하거라

 

 고 사전에 계략을 설명해 두었다. 만약 이 방법이 어긋났다면 히데요시는 성안에서 자멸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코이치로우는 타이밍에 맞추어 지시한대로의 것을 멋지게 성공하였다.

 

 좋은 동생분을 두셨군요

 

 전투가 끝난 뒤 한베에가 일부러 축복할 정도였다.

 한베에의 지론으로는 혈족군단에 있어서 뛰어난 인물은 형 하나로 족했고, 동생이라는 것은 형보다 능력이 뛰어나서는 안 되었다. 뛰어나면 사졸은 자연히 동생에게 달라붙어 가문 통제가 흐트러질 것이다. 또한 동생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 는 것이 한베에의 생각이었다. 욕심이 많으면 형의 부하인 다른 부장(副將)들과 공명(功名)을 다투기 때문에 가문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두 가지 점에서 코이치로우라는 젊은이는 거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정도가 좋았다.

 

 스노마타 즈음부터 십 수년이 흘러,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츄우고쿠[国]로 향하였을 때, 코이치로우는 이 군단의 선봉장으로써 전쟁터에 있었고 하리마[播磨]에서 빗츄우[備中]에 걸쳐 각지를 전전하며 무공을 세웠다. 그가 지휘하는 모습은 오다 군단의 다른 무장들과 비교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무장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크게 높아졌다.

 

 이 시기.

 타케나카 한베에는 현지에서 지병(持病)이 재발하여 자리에 누웠다. 코이치로우가 병문안을 하러 왔을 때에 한베에의 용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는 시중드는 소년에게 등을 받치게 해서는 몸을 일으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고 스노마타 때부터 순종적인 제자를 위해서 이미 가냘퍼진 숨을 쥐어 짰다.

 

 몸의 안전을 꾀하시길. 병법에서 궁극(窮極)의 극의(極意)…. 그것입니다.”

 

 한베에의 걱정은 코이치로우의 평판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오르면 자연히 마음도 거만해 진다. 오만해 져서는 다른 부장의 원한을 사게 되어 참언(讒言)을 치쿠젠[筑前](=히데요시)에게 할 수도 있다. 공을 세우면 그것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시길. 다른 무장들은 공명을 세워야 출세를 할 수 있지만 당신은 아무리 공이 없다고 하여도 치쿠젠님의 동생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오셨다

 

 고 한베에는 새삼 코이치로우의 이 십 수년간의 발자취를 칭찬하였다. 전혀 명성을 떨치려고 하지 않았고 공은 부하에게 돌렸으며, 히데요시의 대리인[名代]이 되어도 히데요시만을 세우고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는 일이 없었다.

 

 잘 해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어떨지 모른다. 특히 이 하리마[播磨] 부근에서의 코이치로우의 뛰어난 활약과 평판은 그의 인격을 바꾸어 버릴지도 몰라, 한베에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림자처럼 되시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히데요시의 그림자가 되어 그것만을 만족하고 코이치로우 히데나가라는 존재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앞날을 생각하면 그걸 말고 당신께서 이 세상에 있으실 장소가 없다. 병법의 극의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는 것에 있다. 아시겠습니까? 하고 한베에는 확실히 해 두었다.

 코이치로우는 역시 이론(異論)을 말하지 않고 순순히 끄덕이며,

 

 좋은 말씀 감사 드립니다

 

 고 눈물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이로부터 2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한베에는 숨을 거두었다. 자연히 위에 있는 것은 한베에가 이 세상에서 말한 최후의 말이 되었다.

 

 이 히데요시의 츄우고쿠[国] 공략이 한창일 때,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었다. 히데요시는 쿄우[京]를 점령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기 위해서 빗츄우[備中]에서 군을 되돌려 우선 히메지 성[城]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북부 오우미[近江] 세 개의 군() 외에 하리마[播磨]도 하사 받아서는 이 히메지 성을 거성(居城)으로 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빗 속의 급행군을 마치고 입성해서는 곧바로 욕탕(浴湯)에 들어가, 욕실(浴室)에서 온갖 군령을 내렸다. 히데요시는 이 일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듯이 성 안에 있던 금은이나 쌀을 모두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한 뒤,

 

 성을 지키는 것은 코이치로우가 해라~!”

 

 고 말했다. 코이치로우는 욕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것을 들었다.

 이것은 치욕이다

 라고 생각하여, 한베에가 죽은 뒤 히데요시의 모신(謀臣)의 자리에 앉아 있는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에게 따지며, 이 너무도 불명예스러운 자리 배치의 변경을 원했다.

 하고자 하는 주장은 당연할 것이다. 형인 히데요시가 아케치와의 일전에서 패하기라도 한다면 이 히메지 성은 적의 일격에 무너져 버릴 것이. 성 안에는 500명의 수비병밖에 없으며 더구나 농성에 필요한 병량(兵糧)은 나누어 주어서 없고, 또한 그 수비 임무라는 것이 하리마[播磨]의 여러 호족들에게 받은 인질의 감시와 히데요시의 첩인 통칭 히메지도노[路殿][각주:1]라고 불리는 여인의 보호 정도였다. 이 천하존망의 시기에 남자로서 명예로운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쿠로다 칸베에는 코이치로우의 소매를 끌고서는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말씀을 하시는군요

 

 라고 말했다. 칸베에가 말하기를 이번 일전은 천하를 판가름하는 싸움이 될 것이다. 히데요시 휘하에 있는 무장들의 8할은 오다 가문에서 파견 나온 장수들로, 이번 일전에서 히데요시를 앞세워 자기 가운(家運)을 트이게 하기 위해서 안달들이 나있다. 치쿠젠님(=히데요시)의 운은 이런 그들의 활약으로 인해 트이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은 육친이시니 참으시길. 그들과 공을 다투면 안됩니다. 공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시라는 것이었다. 평소의 코이치로우였다면 온후한 얼굴로 끄덕이며 이 도리에 따랐을 것이지만,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이 온후한 남자라도 감정을 주체 못하고,

 

 나는 언제나 성이나 지켜야 한다. 형이 모든 것을 거는 이 때만큼은 이 코이치로우도 야마시로[山城]의 전쟁터에서 죽고 싶다!”

 

 고 큰소리로 외쳤다. 목소리만이 히데요시와 닮아 컸다. 그 목소리가 욕실에 있던 히데요시의 귀에도 달했다.


 코이치로우!!”

 

 하고 역시 큰소리로 외치며,

 

 다 들린다! 뭐 그런 생각이 다 있느냐! 니가 그런 말을 한다면 나가하마[長浜]는 어쩌란 말이냐? 나가하마는 지금 버린 성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쯤 어머니도 내 마누라도 시뻘건 불길 속에서 타 죽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고 소리질렀다.

 오우미 나가하마 성은 히데요시의 본성(本城)으로, 거기에 오나카도 네네도 살고 있었다. 적은 당연히 이 성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병가상사(兵家常事). 어머니도 네네도 아녀자지만 성벽 뒤에 몸을 기대고 지키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래도 니는 히메지의 수비가 불만인가? 아니면 히메지에서 죽을테냐?”

 

 히데요시도 역시 흥분했는지 말을 꼬여가며 되지도 않는 논리를 내세우며 무조건 호통만 치고 있을 뿐이다. 코이치로우는 이미 그 호통소리에 압도되어 풀이 죽었다.

 세상에 동생이라는 자리만큼 처량한 것이 없다

 고도 생각하였다. 형인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세상에 동생만큼 편리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정도로 매도(罵倒)당하면 - 다른 무장이라면 원한을 가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갈지도 모르지만, 동생이라면 그런 점에서 안심할 수 있어 좋았다. 지금도 코이치로우는 뚱뚱한 몸을 움츠리고서는 둥그런 얼굴도 들지 않고 그냥 떨고만 있었다.

 

 알겠느냐?”

 

 하고 히데요시가 못을 박자 코이치로우는 허리를 굽히며,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데요시는 히메지를 출발, 곧이어 야마시로[山城] 야마자키(山崎)에서 아케치 군[明智軍]을 물리치고 오다 정권의 후계자로써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 후 코이치로우는 히데요시의 천하 패권을 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い][각주:2]에도 참가하였고, 코마키[小牧] 전투[각주:3]에도 종군하였다. 또한 킨키[近畿]소탕전(掃蕩戰)이라고 부를 수 있는 키슈우 정벌[紀州征伐]에 참가하여 평정 후, 히데요시에게서,

 

 코이치로우는 키슈우를 다스려라

 

 는 명령을 받았다. 키슈우는 노부나가 시대부터 골치를 썩여왔던 곳으로 지역 무사들의 기풍이 거칠고 독립심이 강하여, 센고쿠[戦国] 100여년 동안 그들은 연합하여 키이[紀伊]를 합의에 의해 운영하여, 한 번도 통일 다이묘우[大名]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거기에 '잇코우 종[一向宗][각주:4]의 기반이 되는 땅으로 영민(領民)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만을 절대적인 존재로 하여 지상(地上)에 있는 현세의 교주(敎主)조차 존중하지 않는 풍토가 있었고, 또한 산에는 산적이 많았으며 해안의 항구는 대부분이 해적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키이[紀伊]는 코이치로우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다스려지지 않는다

 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쓰다듬으며 가지고 있는 불평들을 끈기 있게 잘 들어주고, 계속해서 불공평을 없앤다는 점에서는, 많은 장수들이 있다고 하여도 코이치로우만이 할 수 있었다.

 

 이 동생은 그 기대에 응했다. 1585 3월 봉토(封土)를 받자마자 코사이가[賀][和歌山城]을 쌓아 신영주(新領主)의 위용을 나타내는 한편, 부하의 잘못에는 벌을 내려 법제를 철저히 하고, 민치에 힘을 썼기에 그토록 다스리기 어렵다고들 하던 이 지역의 호족들이 이상할 정도로 잘 따라 키노카와[川] 강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히데나가의 영지(領地)북으로는 이즈미[和泉]에서 남으로는 쿠마노[熊野]에 있는 70여 만석의 산야(山野)가 아주 평온해 졌다.


 코이치로우에게는 기묘한 품성과 재능이 있구나

 하고 그것을 명령했던 히데요시가 제일 먼저 놀랐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코이치로우는 천성의 조정가(調整家)이며 민정가(民政家)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히데요시를 또 기쁘게 한 것은 좆병진들이 많은 히데요시의 혈연 중에서도 이 코이치로우만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걸출하다는 것이었다. 장래에 그 기량과 인격을 보건대 필시 히데요시 정권의 (柱石)이 되어 줄 것이다.

이 글은 소설입니다.


  1.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織田 信包]의 딸인 히메지도노[姫路殿]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 것은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의 일로(내가 알기로는 노부나가의 셋째 노부타카[信孝]와 히데요시가 싸울 즈음 노부카네가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받쳤다는 설이다). 아무리 히데요시가 유력 무장이라도 노부나가의 조카를 측실로 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2. 오다 가문 서열 1위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의 싸움. [본문으로]
  3. 보통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라고 한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오와리 근방에서 싸운 전투. [본문으로]
  4. 정확히 설명하면 복잡하니 여기서는 혼간지[本願寺] 세력을 뜻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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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4 14: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케나카 시게하루가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하는 말은 마치 자신이 그래 온 것 같이 해 달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신의 한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라. 그러고 보니 얘도 하시바 히데요시의 육친으로써 히데나가보다도 더 숨어서 일하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히데요시의 일문중 중에서 이 히데나가랑 나가마사 빼면 쓸 만한 사람이 없긴 없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4 14: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까 나가하마 성을 공격한 것이 다케다 모토아키랑 교고쿠 다카쓰구군요. 좀 중량 있는 무장을 여기다 배치했으면 어땠을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04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김이 약간 빠졌습니다. ^^a

    신사본론 님의 답글을 읽고 아사노 나가마사는 히데요시와 어떤 친척 관계인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 봤는데, 위키의 친족표를 보니 데릴사위와 양녀 관계가 섞여서 뭔가 복잡하더군요. --a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나가마사 아들 있잖습니까~
    (히데츠구도 나름 괜찮았다~ 는 글들이 보이더군요... 저도 실은 그런 쪽입니다 ^^; )
    나가하마가 오우미다 보니 거기의 슈고였던 쿄우고쿠 씨는 제법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만 ^^
    뭐 결과가 그렇다 보니 뭐라고 말하기도 뭐하지만 말입니다.

    맹꽁서당님//에... 끝에 요약글 말씀이십니까?
    달까 말까 하다가... 일본에서도 시바 선생의 글을 역사로 여기는 분들이 많다고 하다 보니 달게 되었습니다.(^^ 다음 부터 비슷한 경우가 생길시에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04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아니요... 그래도 소설도 읽고 정확한 역사적 지식도 얻는 것이 금상첨화겠지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정확한 지식을 알게되는 기회가 잘 없는지라... 다음에도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04 2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젊은이-라고 평한 히데나가가 다케나카 한베에보다 4살이나 더 많았으니..;;

    그런데 히데나가 보면 볼 수록 삼국지의 노숙이 떠오르는군요;; 참 온화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그 사람 나름대로 고충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걸 보여줄 수 있는게 소설의 묘미 아닐까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5 14: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맹꽁서당님//타이밍이나 흐름봐서 적당히 하겠습니다. ^^

    다메엣찌님//아~ 그런가요?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요 ^^;
    그러고보니 말씀대로 형주의 관우와 자기 주군을 오가며 고뇌하는 모습과 겹치는 부분도 있군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06 1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실제 노숙은 문무를 겸전한 상당한 터프가이입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6 20: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그렇군요!!! 저는 삼국지연의의 노숙말고는 모르다 보니.. ^^;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07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의 말고는 정사는 촉서 번역된거 밖에 안읽어봐서(ㅎㄷㄷ)

 '살무사 도우산'이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사이토우 도우산의 평판은 굉장히 안 좋다.

 타이라노 마사카도[門][각주:1],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등과 함께 악인(惡人)의 전형적인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같은 시대에도 도우산을 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낙서가 유행했다고 한다.

주인을 베고, 사위를 죽이는 것은 몸의 파멸. 옛날엔 오사다, 지금은 야마시로

主を斬り、聟を殺すは身のおわり、昔はおさだ、いまはやましろ

 미노오와리(()のおわり)미노[美濃]오와리[尾張]를 말하는 것으로, 주군 토키 요리요시[土岐 芸]가 도우산에게 추방 당하여 미노에서 오와리로 쫓겨난 것을 말하며, ‘오사다 [헤이지의 (平治)]에서 주군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 義朝][각주:2]를 죽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 忠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야마시로는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도우산[斎藤 山城守 道三]을 말한다. 어느 쪽이건 주군을 배신한 극악인(極惡人)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던 것이다.


 잔혹한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도우산은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으며, 혹은 솥에 죄인을 넣어 그의 부인이나 부모형제에게 불을 피우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삶아 죽이게 하였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기름 상인에서 미노[美濃] 일국(一国)의 태수로 출세했을 만큼 젊었을 때부터 두뇌의 명석함은 발군이었다.

 쿄우토[京都]의 묘우카쿠 사[妙覚寺]에서 수행할 때는 '배움은 부처의 가르침에 통달하였으며, 변설(辯舌)부루나(富樓那 석가의 제자로 변설가)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내외(內外)를 잘 깨닫고 있으니 훗날 굉장한 명승(名僧)이 될 것이다'고 촉망 받았다. 묘우가쿠 사()에서는 호우렌보우[法蓮坊]라는 이름이었다. 이 시절에 알게 된 난요우보우[南陽坊]가 훗날 도우산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난요우보우는 미노의 호족 나가이 토시타카[長井 利隆]의 동생으로, 후에 미노[美濃]명찰(名刹) 죠우자이 사[常在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이라 불리게 된다.


 도우산의 전반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쿄우토[京都]의 교외에 있는 니시노오카[西]의 낭인 마츠나미 모토무네[松波 基宗]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마츠나미 가문은 대대로 '북면의 무사(北面武士 상황(上皇)의 거처를 지키는 무사)' 집안이었다고 한다.

 호우렌보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하여 기름 상인이 되었다. 나라야[奈良屋]데릴사위로 들어가, 야마자키야 쇼우고로우[山崎屋 庄五郎]라는 이름을 칭었다.


 미노[美濃]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서 기름 행상을 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손님을 모으기 위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기름을 에 담아 손님의 항아리에 옮기는데 깔때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일문전(一文銭[각주:3])의 구멍을 통해서 흘려 넣은 것이었다. 한 방울도 구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멍 주위에 한 방울이라도 묻는다면 공짜로 주겠다고 하였기에 그에게는 손님들이 잔뜩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 퍼포먼스를 미노[美濃]의 호족 나가이 토우자에몬[長井 藤左衛門]의 가신 중에 한 명이 보게되었다.

 굉장한 기술이군. 저 묘기를 무예로 살린다면 필시 뛰어난 무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이 나가이 가문의 무사가 한 말이 도우산을 무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도우산은 기름 상인을 관두고 창() 수련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3간반(間半=약 6미터40센티[각주:4])이라는 굉장히 긴 창(=나가야리(長槍))을 만들어, 그 창 끝에 바늘을 달아서는 대나무 가지에 매단 일문전의 구멍을 뚫는 연습을 하였다. 필사의 수련 끝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고 이어서 백발백중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야리[長槍]는 센고쿠[戦国]전투에는 필수인 것이 되었는데 도우산이 그것의 발명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철포()의 실력도 또한 굉장했다고 한다[각주:5].
 이리하여 무예가 숙달된 도우산은 예전 묘우가쿠 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난요우보우=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의 연줄로 나가이 토우자에몬 나가히로[長井 藤左衛門 長弘]를 섬기며, 마츠나미 쇼우고로우[松波 庄五
郎]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우산이 가진 다른 매력적인 면으로 나가이 씨()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다. 기름 상인이라고 하여도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야마자키 하치만 궁[山崎八幡宮]전매권(專賣權)을 가진 기름 조합(油座)에 속해있던 상인으로 대단히 큰 규모의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름 조합의 상인은 관소(關所[각주:6])를 통과할 때도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상인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도우산은 미노 슈고[美濃守護] 토키 모리요리[土岐 盛頼][각주:7]의 동생인 요리요시[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그의 야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는 요리요시를 꼬드겨 자신을 멀리하고 있던 당주인 모리요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당주가 된 요리요시는 도우산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애첩 미요시노[深芳野]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독선적 행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노신(老臣)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도우산을 천거했던 나가이 토우자에몬이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그러자 도우산은 은혜를 입었던 이 토우자에몬을 모살(謀殺)해 버린다. 이미 나가이 신쿠로우 토시마사[長井 新九朗 利政]로 이름을 바꾸고 있던 도우산은 이렇게 나가이 가문을 완전히 빼앗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나가이 일족의 반발을 사 공격을 받아, 주군 요리요시 밑으로 도망쳤으나 오우미[近江]의 슈고다이묘우[守護大名] 사사키 씨[木氏][각주:8]의 중재로 겨우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후 도우산은 또다시 성()을 바꾸어 사이토우 성[姓][각주:9]을 칭하였다. 쇠약해져 있던 사이토우 씨()의 양자로 들어가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히데타츠[藤 山城守 秀竜]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착실히 그는 출세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야망은 끝없이 커져만 갔다. 다음 목표는 미노[美濃]의 주인 자리였다.


 그의 독선적인 행동이 또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노의 호족들이 반 히데타츠 연맹군을 조직하여 공격해 왔다. 그러나 운 좋게 오우미[近江]의 사사키 씨(),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중재로, 큰일이 터지기 전에 화해하였다. 이때 히데타츠는 그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이때부터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우산의 덫이었다.

 15425. 갑자기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거성 오오가 성[大桑城]을 습격하여 주군을 추방하여 명실공히 미노[美濃]의 태수(太守)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도우산은 곧이어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딸인 노히메[]를 노부히데의 적자 노부나가와 결혼시켜 평화협정을 맺었다.

 당시 얼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를 받고 있던 노부나가를 한번 보자마자,

 안타깝게도 이 얼간이 집 앞에 내 자식들은 말을 메게 되겠구나[각주:10]

 라고 탄식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이 즈음의 일인데, 도우산은 멍청함을 가장한 노부나가의 얼굴에서 일찍부터 후년 천하의 패자(覇者)가 가진 재능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역시 예언은 적중하여,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興] 때가 되어 사이토우 가문은 노부나가에게 멸문 당해 버린다[각주:11]

 

 도우산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는 주군 요리요시의 복수를 받게 된다. 그의 부인이 된 미요시노는 도우산에게 왔을 때 이미 요리요시의 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도우산의 적자 요시타츠[]였다. 이 설의 진위는 확실치 않지만 도우산의 애정은 이 장자에게는 박했고, 둘째인 마고시로우[孫四郎], 키헤이지[喜平次]에게만 쏠려 있었다.

 

 도우산은 요시타츠에게 가독을 물려주어 킨카잔 성[金華山城][각주:12]에 있게 하고, 자신은 나가라가와[長良川] 강 건너편에 있는 사기야마 성[鷺山城]에 은거하였다.

 요시타츠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고 65(195cm)이라는 큰 키였으며 성격도 굉장히 과격했다고 한다.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않아 날이 갈수록 험악해 져 갔다. 도우산은 요시타츠를 없애고 둘째인 마고시로우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은밀히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요시타츠가 선수를 쳤다. 꾀병을 부려 숨이 있는 동안 유언을 하고 싶다고 하여 두 동생을 성에 불러들여 죽인 것이다.

 도우산은 격노하였다. 두 아들을 단번에 잃은 실망도 컸다. 이리하여 아비와 아들이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56 4.

 결국 둘은 전쟁을 벌인다. 도우산은 63세가 되어 있었다. 젊은 요시타츠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패하여 키다이 사[城田寺]로 도망치던 도중, 요시타츠의 가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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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가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사이토우 가문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은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567년이었다.

 

[사이토 도산(藤 道三)]
이름은 토시마사[利政], 후에 히데타츠[竜]. 말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을 칭했다. 미노 슈고[守護] 토키 씨[土岐氏]의 가신이 되었고, 1542년 주군 요리요시를 추방하여 미노 슈고가 된다. 1556 4 20일 적자 요시타츠와 싸워 전사(戰死).

  1. 939년에 칸토우(関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텐노우(新皇)]를 자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일본 3대 원령(怨靈)] 중의 하나.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바쿠후[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부친. [본문으로]
  3. 우리 나라의 엽전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본문으로]
  4. 아시가루(足軽)가 아닌 일반 무사의 창은 1간반(약 2.7~3미터)~2간(약 3.6~4미터)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본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이라고 하니 이 당시는 아직 철포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말년(도우산 1556년 몰) 즈음의 이야기 일 것이다. [본문으로]
  6. 당시는 각 지방의 실력자(영주, 절, 신사 등)들이 재정 확충을 위해서 자신의 영지(領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곳이 많았다. [본문으로]
  7. 요리타케(頼武), 마사요리(政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보통 롯카쿠[六角]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9. 사이토우 씨(氏)는 대대로 미노[美濃]의 슈고다이[守護代]였다. [본문으로]
  10. 얼간이 집 ‘가서’ 인사를 올리거나 지시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 [본문으로]
  11. 멸문은 당했지만, 도우산의 막내 아들인 사이토우 토시하루[利治]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고 후에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 부속 가신 되어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때, 노부타다와 함께 싸우다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죽게 된다. [본문으로]
  12. 이 시대에는 이리 불렸다 한다. 후에 이나바야마[稲葉山]를 거쳐 노부나가 시대에 기후[岐阜]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또한 이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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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3.20 2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우산의 아들 요시타츠나 손자 타츠오키의 이름에 '타츠'가 들어가서 왜 그런가 했더니 도우산의 본명에 '타츠'가 들어있었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1 05: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확실치는 않지만...그 윗대에 '타츠(龍,竜)"자가 없는 것을 보면 도우산 때부터 붙이기 시작했나 봅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3.21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다. ^^ 역시 도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 히데요시처럼 밑바닥부터 발발 기어오른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밑바닥이락고 생각하는 기름장수설마저도 거상이라는 가설을 담고 있네요. 동전구멍으로 기름따르는건 대망에서도 본것 같은데 여기서 보니 또 새롭네요 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1 18: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3년만 버텼어도 나병으로 알아서 죽을것을 뭣하러 도발해서(-_-;;)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1 2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iroyume님//저 [야망의 사나이 도삼] 보시지 않으셨다면 함 보세요. 볼 만합니다. 다만 끝부분은 서둘러 끝내는듯한 인상을 받지만요.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찢어죽이거나 삶아 죽이는 것 같은 잔인한 행적은 나오지 않지만요)

    다메엣찌님//워낙 내정에 어두운 도우산이라 다른 호족들이 "못살겠다 바꾸자"라고 해서 도우산이 어디 간 사이를 노려 봉기했다는 말도 있지만요. ^^ (이노구치(井ノ口)등의 정비나 라쿠이치(楽市)등의 설치를 보면 내정에 어둡다기 보다는 그에 관련된 코쿠진(国人)이나 절, 신사 등의 이권 문제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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