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商人)출신으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까지 승진한 인물. 그리고 기독교도.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는 센고쿠 무장으로서 이색적인 존재이다.  
 상인으로서의 특질은 언변이 뛰어난 외교관, 경제감각을 갖춘 행정관으로 발현되었다. 거기에 무인으로서도 재능도 상당하여, 히데요시를 섬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82년 히데요시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에 수공(水攻)을 결행하였을 때, 유키나가는 물 위에 배를 띄어 놓고 타카마츠 성에 포격을 하는 활약을 보였다.[각주:1]
 “힘이 굉장히 셌고, 지모는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흰 피부에 키가 커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는 소리를 들은 유키나가는 역시 평범한 상인이 아니었다.

 200석으로 히데요시를 섬긴 것이 1579~80년[각주:2] [각주:3], 나이는 21~2세 즈음이라고 하는데, 10년도 지나지 않은[각주:4] 1588년에는 히고[肥後] 절반인 24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발탁되었다. 이례적인 스피드 출세로, 유키나가의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유키나가가 확실한 기독교도로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1583~84년 즈음으로 경건한 기독교 무장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친교를 맺으면서 부터이다. 유키나가의 양친은 예전부터 기독교도였기에 유키나가도 어려서부터 세례를 받아 ‘아고스티뉴(Agostinho)’라는 세례명이 있었지만 형식적인 것으로 신앙은 그다지 깊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타카야마 우콘과 친해지면서 유키나가는 그때까지 거만했던 행동이 사라져,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신앙도 깊어져 오오사카[大坂]에 한센병 병원을 세우거나, 고아원 사업에 힘썼다.

 하지만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중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갑자기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한 것이다. 이로 인해 타카야마 우콘도 다이묘우에서 추방의 몸이 되었다.
 유키나가는 이때 선교사나 우콘이 숨을 수 있는 집을 준비해 주었으며, 큐우슈우[九州]의 기독교 다이묘우들에게도 선교사 보호에 힘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미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히데요시에게 알려져 추방당한다면 순교(殉敎)하려고까지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힐문하자 유키나가는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역설하였다.[각주:5] 그 때문인지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은 완화되었다. 거기에 다음 해인 1588년 유키나가는 히고 절반 및 예부터 기독교의 아성인 아마쿠사 지방[天草地方]까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히고의 나머지 절반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주어졌다. 창 한 자루로 출세한 전형적인 무공 다이묘우이다. 이러한 인간은 보통 유키나가처럼 머리를 쓰는 능력으로 출세한 자에 대해 세찬 반감을 품고 있다. 한편 유키나가 역시 키요마사와 같은 무장을 ‘머리가 없는 녀석’이라고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구나 이 둘, 키요마사는 열렬한 법화종(法華宗) 신자였으며 유키나가는 경거한 기독교도였다. 서로 사이가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양자의 반목은 조선침략에서 함께 선봉을 서게 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 침략에서 유키나가는 시종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키요마사는 끝까지 주전론자였다. 이 대립은 일본군의 작전에 지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유키나가와 친한 감찰[軍監]의 불리한 보고로 인해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귀국하게 되어 질책을 받은 것이다. 키요마사의 유키나가-미츠나리에 대한 증오는 참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決戦]은 천하제패의 야망에 불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이러한 키요마사를 대표로 하는 무공파(武功派)와 미츠나리-유키나가 등 봉행파(奉行派)의 대립을 이용해 일으킨 것이다. 패한 유키나가는 이부키야마[伊吹山] 산중으로 도망쳤지만, 몇 일 뒤 근처의 마을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동군(東軍)의 진영으로 데려가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인 유키나가는 자신의 신앙상 자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사카이[堺]의 약종상(藥種商)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아들.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에 있는 상인 가문의 양자가 되어 오카야마 성주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히데요시[秀吉]의 츄우고쿠 공략[中国攻略] 때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외교관으로 히데요시에게 접근,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 함께 로쿠죠우 강변[六条河原]에서 참수되었다.

  1. 히데요시[秀吉]의 일생을 다룬 군기물 태합기(太閤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와 함께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이 당시는 아직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어용상인 아부라야[油屋]의 양자였는데, 유키나가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 본 우키나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히데요시로 보내는 사자로 유키나가를 보냄으로 히데요시와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시 히데요시의 참모로 사카이[堺]의 유력자 중 하나였던 유키나가의 애비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존재도 영향을 끼쳤던 듯 하다. [본문으로]
  3. 이전까지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었던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직신이 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81년 히데요시의 명령을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 즈음 무로츠[室津]를 관리한 이 즈음부터가 아닐까 한다. 그후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야마자키 전투[山崎の合戦] 후인 1582년 히데요시에게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쇼우도 섬[小豆島]의 관리권과 3000석의 녹봉을 받으며 수군의 장수로 세토 내해[瀬戸内海]를 장악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런 그를 '바다의 사령관'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중간인 1585년 히데요시의 키이 정벌[紀伊征伐] 때의 공으로(기록으로는 패했다는 것만 있음 - 프로이스의 일본사) 3000석에서 1만석으로 봉록이 가증됨과 동시에 관리만 하던 쇼우도 섬[小豆島]를 영지로 받게 됨. 일설에는 10만석을 영유했다고도 함. [본문으로]
  5. 사실 처음에는 도움을 청하는 선교사들을 '내 사정도 있잖아~'하는 식으로 쫓아내거나 잠시동안 단교하였지만 오르간티노 신부에게 설득당하여 타카야마 우콘이나 기독교 신부들을 영지인 쇼우도 섬[小豆島]에 숨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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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0.13 15: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달만의 글이라 매우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이웃국가나 이웃영지에 대한 반감과 증오는 참으로 오래된 역사를 가진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히고를 나눠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졌을 증오는 오랜 기간 쌓여서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겠지요. 도도 다카토라나 가토 요시아키라 역시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만 서로를 인정하는 상태는 있었을텐데 과연 기요마사와 유키나가는 그러한 수준까지는 유지했었던걸까요? 흥미롭네요.

    유키나가가 죽은 이후 고니시 가문이 유지는 되었습니까? 하타모토로도 남아있지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3 2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자주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도 가까운 나라 사람들과는 사이가 안 좋듯이 당시도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나 유키나가는 그래도 많은 외교적 절충(이게 전투에서 활약보다는 훨씬 높게 쳐주는 편입니다)이나 수송 등의 임무를 맡은데 비해, 키요마사는 정말 시즈가타케 칠본창 때의 얻은 영지(이전 1000+시즈가타케 3000) 총 4000석에서 단번에 히고 반국 19만여석 + 히데요시 직할지 3만석 대관으로 총 23만석의 다이묘우로 단번에 출새합지요.

      그래도 노력한 만큼 출세한 유키나가에 비해, 히데요시와 동향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출세한 키요마사는 안 좋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거기에 키요마사는 틈만나면 유키나가가 무가 출신이 아닌 상인 출신이라고 깠다고 하니까요.

      유키나가가 죽은 뒤 코니시 가문은 멸문됩니다.
      장남[코니시 효우고노카미小西 兵庫頭]은 세키가하라 당시 오오사카 성[大阪城]에 (아마도) 인질로 있다가 싸움에서 졌다는 소식에 당시 오오사카 성을 수비하고 있던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지레 겁먹고 죽였다고 합니다. 이에야스는 너무한 처사라며 엄청 화냈다고 하던데... 음...

      아들 '아사야마 야사에몬[浅山 弥左衛門]'은 실제로 코니시의 아들인지 불명이나, 쿠로다 가문[黒田家]의 가신들 선조를 기록했다는 '쿠로다 가문 가신 선조 유래기[黒田家御家人先祖由来記]'에 따르면 유키나가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쪽은 야사에몬 손자 이후에는 기록에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 측실의 자식이라고 하는 '코니시 히데사다[小西 秀貞]'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인물은 우키나 가문[宇喜多家]에 맡겨졌다가 (역시 인질??) 싸움에 패했다는 소식에 시코쿠[四国]의 사누키[讃岐]로 도망쳐 중이 되어서는 세이렌 사[西蓮寺]를 세워 초대 주지가 되었고, 이후 그 자손들이 사누키에 대대로 살았다고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딸이며 대마도주 종의지(소우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시집간 딸(코니시 마리아[小西マリア])은 세키가하라 후 이혼 당하고 나가사키에서 숨어살다가 죽었습니다.
      종의지와 코니시 마리아 사이에 생긴 아들(그러니까 유키나가의 외손) 만쇼 코니시[マンショ 小西]는 에도 막부의 기독교추방령으로 인해 마카오로 추방당한 뒤 로마에 가서 사제의 직위를 얻고 일본에 돌아와 포교활동을 하나 잡혀서 처형(일본인으로서는 마지막 사제였다고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10.13 18: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쿠사... 아마쿠사 시로? ^^; 세키가하라에서 고군분투 한 보람도 없이 한방에 훅 갔죠. 공명의 갈림길에선 조선에서 막 돌아온 기요마사&마사노리가 미츠나리한테 죽빵 날리려던걸 유키나가가 말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3 2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그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天草 四郎 時貞]가 나온 땅입지요.
      이곳은 유키나가 영지였던 만큼 기독교도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그런만큼 막부의 감시와 탄압도 심하여 1613년 추방당한 기독교 선교사 마르코스 페라로는 추방당하면서 "앞으로 25년 뒤 신동이 나타나 하느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고, 실제로 25년 뒤인 1637년 아마쿠사 시로우를 대장으로 한 잇키[一揆]가 막부의 대관(代官)을 죽이면서 시마바라의 난이 시작됩지요.

    • 본다충승 2011.10.13 2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 예언은 마치 영화나 소설에 나올법한 이야기 네요.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처참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죠. 예언이란게 무책임해서 그럴 듯하게 만들다 보니 거기에 혹한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이게 하여 피도 더 많이 흐르게 만들죠.

  3. Gyuphy IV 2011.10.13 2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엔도 슈사쿠 선생님의 '숙적'에서 아주 인상깊게 그려진 무장이라 기억에 오래 남았다죠. (소설 결말부에서 딸내미와 부인이 '무려' 카토 키요마사를 독살(..;;)하는 듯한 암시를 넣어둬서 어린마음에 아주 흥미깊었습니다만..)

    사실 종교인이 저정도로 살며 저정도로 출세하기도 힘든데 다카야마 우콘처럼 마닐라오쿠리(..)되는것 보다는 나름대로 삶의 한 궤적을 남기고 갔으니 괜찮은 삶이었다 보여집니다. 뭐 국내입장에서는 임진왜란(..) 탓에 좋게 볼래야 좋게 볼수 없다쳐도 천연기념물 잡아간 키요마사보다는 낫다 싶긴 하덥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4 0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숙적이라는 소설에서 나카우라 쥬리안[中浦ジュリアン]이 죽는 장면이 쓰여있나요? '이 남자가 죽을 때'에 써먹으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엔도 슈우사쿠 선생이 그 '숙적'이라는 곳에 나온다고 하여서요.

      뭐.. 어떤 성격의 기록인지 잘 모르겠지만 豊臣秀吉九州下向記라는 책에는 조선에서 파죽지세로 진격 중인 유키나가를 히데요시가 "문무천하제일이며 충절은 비할데 없다. 조선이라면 1/3, 대명을 손에 넣었을 때는 50개국을 줄테다"고 할정도로 히데요시에게 인정받던 인물이니 기독교도라 하여도 어느 정도는 눈 감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4. Gyuphy IV 2011.10.14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게 꽤 오래전에 본 책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마지막 장면이 니죠성 회견 마치고 뱃편에서 키요마사가 혀꼬이고 엎어져서 바로 죽는 장면(..-_-...)이었으니 나카우라 쥬리안의 몰년을 생각해보면 아마 안나왔었던듯 싶은데 집에 책을 두고온바람에 확인이 되지 않아 죄송합니다(..)

  5. 정동희 2011.10.18 1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도라노스케나 이치마스도 히데요시와의 인척 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까지 출세하지는
    못했을 텐데요...
    쵸닌의 자식이었던 유키나가쪽이 능력은 더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암튼 이게 다시 히데요시 때문이고... 조일전쟁 때문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8 2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도 나중에 나름 행정력을 갖추었다곤 하지만 말씀대로 그들이 오와리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만큼 출세하기도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의 통일전에 유키나가는 다방면으로 활약하더군요. 주로 수군으로 활동하는 한편 군수물자 수송이나 하카타[博多]의 재건 등 동시기 키요마사가 3~400명 이끈 소부대의 지휘관(뭐 큐우슈우 정벌 시 군량 쪽 회계담당이었다고도 합니다만)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둘 사이에 차이는 꽤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부(祖父) 때부터 삼대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는 로마로 [텐쇼우 소년 사절단(天正少年使節)]을 파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 등의 다이묘우(大名)와 공동으로 파견하였는데 이 소년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아리마의 히노에 성(日野江城)아래에 만든 일본 최초의 세미나리요(초등신학교[각주:1]) 출신들이었다.
 사절단을 파견한 1582년에 하루노부는 16살이었다. 이 해의 1월 28일 4명의 소년들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하기 위해 저 먼 이탈리아를 향해서 출발한 것이었다.

 하루노부는 이 사절단 파견의 3년 전에 세례를 받아 '동 프로타지우(Don Protasio)[각주:2]'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하루노부는 세미나리요에 이어 영내(領內)인 카즈사(加津佐)에 고등신학교라 할 수 있는 '콜레지오'를 세웠다. 이곳에는 후에 소년 사절단이 유럽에서 가지고 온 일본 최초의 인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미나리요에서는 교리(敎理) 외에도 국어(일본어), 라틴어, 문학, 음악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회화(繪畵)나 천에 수를 놓는 자수(刺繡)까지 과목에 들어갔다.

 아리마 가문의 시조는 해적대장군으로 유명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 純友)[각주:3]라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선조인 타이라노 나오즈미(平 直純)가 스미토모의 아들이라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그런 설이 내려온 것이라 한다.
 후에
큐우슈우(九州)의 다섯 개 지역(
)[각주:4]과 두 개의 섬(島)[각주:5]을 영유(領有)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조부 하루즈미(晴純)때부터의 숙적이었다. 하루즈미는 히젠(肥前) 내의 4개 군(郡)을 영유(領有)하며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각주:6]에 이름을 올렸지만, 1563년 타카노부와 싸워 대패한 이래 아리마 가문(有馬家)은 류우조우지 가문 아래서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1581년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씨(島津氏)가 류우조우지 공격군을 일으켜 히고(肥後)로 진격해 왔다. 하루노부는 이 소식을 듣자 드디어 때가 왔다며 곧바로 류우조우지와의 협정을 파기하고 시마즈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전선은 고착되어 1584년에 되자 하루노부는 시마즈에 원군을 요청. 한편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도 5만7천의 대군을 이끌고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로 진격을 개시했다. 류우조우지 군은 무기도 풍부하여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정공법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3월 24일. 모리타케 성(
森岳) 기슭에 포진한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적을 자군 진영 깊숙이 끌어들여 적의 전열을 늘어지게 만든 뒤 복병을 이용하여 기습, 분단된 류우조우지의 대군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류우조우지 타카노부까지도 죽인 것이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에서도 살아남았지만 토쿠가와(川)의 세상이 되자 하루노부는 불행한 사건에 휘말려 자해하게 된다.
 발단은 1609년 12월에 일어났다. 나가사키(長崎)에 정박 중인 포루투갈의 배 '마드레 데 제우스(Madre de Deus)' 호를 하루노부가 습격하여 침몰[각주:7]시킨 것이다. 2년 전 아리마 가문의 무역선 승무원이 마카오에서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서양선 습격 사건이 뜻밖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라는 사기꾼에 낚인 것이다. 오카모토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으로 하루노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였다.
 이 오카모토가 하루노부에게 서양선 습격에 대한 은상으로 이에야스가 땅을 하사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온 것이다. 하루노부는 이 거짓말에 속아넘어가 막대한 금품을 오카모토에게 바친다. 기다려도 땅을 주겠다는 말이 없음에 오카모토를 수상히 여긴 하루노부의 문의로 거짓이란 것이 들어나지만 감옥에 갇힌 오카모토는 하루노부가 나가사키의 행정관을 암살하려 했다
[각주:8]고 고발한 것이다. 어째서인지 하루노부는 변명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 카이(甲斐) 츠루 군(都留郡)으로 귀양가 거기서 자해하였다.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
1567년생. 1576년 형 요시즈미(義純)의 뒤를 이어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가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ヶ原) 전쟁 때 처음에는 서군에 속했지만 나중에 동군으로 돌아서 영지(領地)를 안도 받는다. 1612년 5월 자살. 46세.

참고: 아리마 하루노부의 목상()을 볼 수 있는 사이트(더 큰 이미지)

  1. 포르투갈 어. seminaryo. [본문으로]
  2. 사족으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이런 이름으로 나온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의 타이라노 마사카도(平 将門)와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기에 서쪽에서 난을 일으켰다.[죠우헤이-텐교우의 난(承平天慶の乱)] [본문으로]
  4.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5.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6. 바쿠후의 중신. [본문으로]
  7. 선원들을 탈출시킨 뒤 선장이 자침. [본문으로]
  8. 포르투갈 배를 처리할 때 제대로 못한다고 핀잔주는 나가사키 행정관에게 '이 일이 끝나면 저 놈도 죽여주마'라고 홧김에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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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7.04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체로 센고쿠의 기독교도들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게 되는군요. 사족입니다만 그 당시 일본 전 인구의 3%나 되던 교세가 왜 지금은 이렇게 자유로운데도 1%에도 미치지 않느냐는 점에 대해 모리야선생께서 한번 외국인으로서 생각을 피력해보라 하시기에 '에도막부 탓이 아닐까요' 라니 '무르군!'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_-; 으헣헣..

    아.. 이거 개인적인 일 탓에 코맨트 남기는데에도 마음이 떨려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5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 현대에선 기독교가 일본에서 확장을 못하는 것일까요? 궁금하군요. 가르쳐 주시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 제 나이 대가 되면 그런 감정도 잘 일어나지 않아서요. 전 부럽군요.
      어떤 경험이든 그것을 나중에 뒤돌아 보았을 때 아름다운 추억이 될지 다시 생각하기 싫은 트라우마로 만들지는 앞으로의 노력 여하입니다.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2. shiroyume 2009.07.04 2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뇌물사건은 알고 있었는데 죽은 이유가 고작 저거군요. 생각해보면 양이(?)로써 포르투갈함선을 격침시킨 공로가 훨씬 더 클텐데. 하여튼 이래서 에도 바쿠후는 맘에 안들어요. 처리방식이 막말까지 음험하단 말입니다.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5 2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리마의 영지는 히데요시의 선교사 추방령 이후로 일본 전토에서 도망 온 선교사들이 숨어 살고 있었으며, 역시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네요. 그 지역은 기독교 왕국과 같았다고...기독교 다이묘우인 하루노부와 그 지역을 분리시키기 위한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운 것이 나가사키 행정관과의 다툼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에야스까..라서 어떻게든 이에야스를 깔아 뭉개고 싶지만 그가 세운 에도 바쿠후는 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처리 방식은 '조용히 조용히...'가 모토다 보니 모략을 많이 이용하긴 하지만요. 덕분에 전란에 휩싸이지 않고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Bolivar 2009.07.05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사기 사건이 결국 막정의 중핵인 혼다 마사즈미 실각의 한 원인이 되었으니 이름 자체는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5 2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잠깐 타격은 입었을 지 모르지만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후로 오히려 라이벌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를 실각시킬 정도로 보니.

      오히려 너무 자존심이 센 것이 자기 몸을 나락으로 빠지게 만든 것은 아니가 싶습니다. 이에야스에게 많은 신뢰를 받다 보니 이에야스의 아들이 자신을 모략에 빠뜨려 놓고 베푸는 아량을 참을 수 없었을지도.

  4. 나라 2009.07.06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다는 한 성깔, 토요토미는 여색, 도쿠가와는 음험...
    그래도 도쿠가와 방식이 사람을 가장 덜 죽이긴 하니까 다행인걸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7 22: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셋 다 천하인인 고로 어느 면이나 특출난 것이 있었다 생각합니다.
      오다도 여색을 좋아하고..음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토요토미도 한 성깔하고 음험했으며,
      토쿠가와도 여색을 좋아하고 한 성깔했으니까요.

  5. 스펀지송 2013.11.11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우연히 이 곳에 들어와서 재밌게 읽고 갑니다.
    윗 글에 보니 중세 일본의 기독교 신자가 3퍼센트인데 현대의 자유로운 일본에서 1퍼센트도 안되는
    이유가 뭐냐? 는 말이 있네요.

    제 생각에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게 패배했고, 특히 원폭을 맞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 때문에 반기독교 성향이 강한 듯 합니다.

  6. 스펀지송 2013.11.11 0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중세 일본에서 서양 기독교인들이 보인 사기와 만행을 봐도 일본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생길 듯도 합니다.

 한때 큐우슈우[九州] 6개 지역[国]에서 위세를 떨친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로도 유명하다.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여 당시
야마구치[山口]에 머물고 있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자기 영지(領地)인 붕고[豊後]의 후나이[府
=현 오오이타 시[大分市]]로 초대하여 회견하였다. 소우린 22살 때였다. 이때부터 이 젊은 붕고의 주인은 이국(異國)의 종교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한다.
"…(전략)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들은 이 가르침보다 고귀한 말씀은 없었다. 또한 이 가르침보다 도리에 맞는 가르침 역시 없을 것이다"
 이때는 이렇게 고백하였지만 사실 당시만 해도 아직 기독교에 입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붕고 영내(領內)에 포교를 허용하였으며 후나이[府
内]에 교회를 세워 한때 소우린의 영지(領地)는 일본 기독교 활동의 근거지가 될 정도였다.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까지 지었다.

 한편 청년 소우린은 믿음직한 기독교 보호자이기는 하였지만 호전적이고 빠굴을 굉장히 좋아하는 센고쿠 무장이기도 하였다. 1553년에는 가신의 부인 중에 미모로 유명한 여성을 강제로 빼앗아 첩으로 삼았기 때문에 부인을 빼앗긴 핫토리 우쿄우노스케[服部 右京助]를 시작으로 한 이치마다 아키스케[一万田 鑑相], 무네카타 아키히사[宗像 鑑久] 등의 중신들이 모반을 일으켰다[각주:1]. 그외에도 소우린은 친족이나 가신들의 부인에게 손을 댔다.

 가독을 상속할 때 피비린내 나는 가문 내란이 일어났다.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
義鑑]가 난폭한 소우린[각주:2]을 미워하여 총애하던 측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시오이치마루[塩一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장자상속을 주장하는 두 중신[각주:3]이 1550년 2월 10일 밤에 오오토모 저택의 2층에서 자고 있던 요시아키를 습격하여 시오이치마루와 그 어미를 죽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이층의 붕괴[二階崩れ]'라고 한다.[각주:4]

 소우린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가 있으면 육친이라 하더라도 용서치 않았다.
 1554
히고[肥後]의 키쿠치 요시타케[菊池 義武][각주:5]가 붕고[豊後]를 노렸다는 이유로 나오이리 군[直入郡] 키하라[木原]로 불러들여서[각주:6] 살해하였다. 요시타케는 소우린의 숙부였다. 이 숙부의 수급을 검사할 때 소우린은 "오오토모 가문을 노린 괘씸한 놈"이라며 채찍을 휘둘러 그 목을 마구 쳤다고 한다.

 1559년부터 1570년 동안 오오토모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 사이에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고승 이운 화상[惟雲和尙]을 초대하여 그에게 사사 받아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즈이호우 소우린[瑞峯宗麟]'이라는 법호(法號)를 얻었다. 여전히 소우린은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1571년 소우린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軍]에게서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에 임명 받아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붕고[豊後], 히젠[肥前]의 6개 지역을 영유(領有)하는 거대 다이묘우가 되었다. 당시 후나이[府内]에 있던 선교사도 "일본 최대의 영주 중 한 명"이라며 소우린의 위세를 전해주고 있다.

 큐우슈우[九州]에 남은 곳이라고는 명문 시마즈 씨[島津氏]가 영유(領有)하는 휴우가[日向]의 일부, 사츠마[薩摩], 오오스미[隈] 3개 지역이었다. 그 시마즈 씨가 큐우슈우[九州] 제패를 목표로 북상하여 소우린의 이웃 나라인 휴우가[日向]에 침입하였다.

 이해 즉 1578년 49세의 소우린은 불교의 법의(法衣)를 벗고 세례를 받아 '프란시스코'[각주:7]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다년간 그의 입신을 거부해 왔던 부인을 버리고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여 입신한 것이었다. 신앙도 철저하여 영내(領內)에 있던 신사(神社), 사원(寺院)을 계속해서 불태워 파괴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우린의 기독교 개종과 동시에 오오토모 가문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1578년에 4만 대군으로 휴우가[日向]에 진출한 오오토모 군[
大友軍]은 시마즈 군[島津軍]이 선두에 내세운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의 깃발에 위압당해 전군이 붕괴되어 패주하였다. 사상자 2만에 달하는 참패였다. 이것이 유명한 휴우가[日向] 미미가와 전투[耳川の合戦]이다.

 이후 오오토모 왕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1587년 소우린은 실의 속에 이 세상을 떠났다.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30년생. 이름은 요시시게[
義鑑],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 1582년 오오무라[大村], 아리마[有馬] 등과 함께 일본 최초로 유럽의 로마 교황에게 사절(使節)을 파견하였다. 1587년 5월에 죽었다. 58세.

  1. 실은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에 후계자로 보낸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가 큐우슈우에 있던 오오우치 가문 영지에 손을 썼고 그에 동조하여 상기의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했다. 부인을 취한 것은 그 후의 일. 참고로 이치마다 아키스케의 부인도 취했다. [본문으로]
  2. 소우린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소우린을 폐적하고 시오이치마루 옹립을 주도적으로 꾀한 이리다 치카자네[入田 親誠='이리다'는 '뉴우타'라고도 읽는다]는 소우린의 후견인 & 스승이었다...지만 여기엔 또 히고[肥後]의 영지를 둘러싼 오오토모 가문 내의 파벌 싸움도 섞여 있었다. [본문으로]
  3. 소우린을 폐적하기 위해 요시아키는 네 명의 중신과 협의하였지만 네 명 다 반대. 그래서 요시아키는 네 명중 두 명을 살해하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두 명이 난을 일으켰다. [본문으로]
  4. 침입한 중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참살. 요시아키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틀 후 사망. [본문으로]
  5.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가 히고의 명문가인 키쿠치 가문을 빼앗기 위해 키쿠치 가문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자신의 동생(즉 소우린에게는 숙부가 됨)을 양자로 들여보냈지만 독립심과 야망, 멍멍이 같은 성격에 비해 능력이 딸려 결국 키쿠치 가문의 가신들에게 추방. [본문으로]
  6. 갈 곳이 없는 차에 소우린이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초대하였다. [본문으로]
  7. Dom Francisco.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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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06.02 19: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사람도 나름 능력자이긴 한데 종교에 잘못 빠져 그만 망한 듯...
    나중에 시마즈 씨에게 처절하게 깨지는 걸 보면 정말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히데요시가 조금이라도 천천히 왔다면 시마즈가 정말 큐슈 제패를 했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그래도 히데요시에게 깨졌겠지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창천항로...라는 만화에서 조조가 원소를 평하길..
      "원소는 패배를 자신의 승리로 만드는 힘이 있다"...
      미미가와에서 시마즈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우린은 그런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모우리, 류우조우지와의 전술적 패배에도 결국엔 전략적 승리로 이끌어 내는 것을 보면 능력은 상당한 것 같습니다.

      시마즈는 언제까지고 본거지를 사츠마(薩摩)에서 옮기지 않았던 것을 보면 설사 큐우슈우를 제패했더라도 일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2. 朴先生 2009.06.02 2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독교로 개종하면 악업을 구원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조강지처를 버리면서까지 개종한 걸 보면 다른 목적이 있었던걸까요? 스페인과의 교역이나 뭐 다른 이유로...
    하지만 그간 행적이 막장이었으니 전자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기독교 다이묘치고 타카야마 우콘이랑은 또 다른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워낙 많이 일어나는 가신들의 반란과 내분 속에서 정신적 안정을 종교에서 찾았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래서 머리 밀고 중도 되었으며, 거기서 만족감을 못 찾아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6.02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대인배였지만 내적모순과 외적모순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고밖에..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은 사람이지만 뭐 어차피 일본에서 기독교다이묘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조금 빠른 몰락'으로 받아들이면 되는거겠죠(어허허)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외로 동 시메온처럼 겉으로는 "안 믿을께요~"하고 뒤로는 믿으면서 신앙을 지켰을지도...

      노부나가, 이에야스, 마사무네처럼 본거지를 옮기며 영지를 재편하는 센스가 없는 한 결국 멸망만이 기다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4. 나라 2009.06.03 16: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 그렇게 따지면 역시 오다, 도쿠가와, 다테 정도만이 그런 센스를 가졌군요. 서국에선 의외로 그런 센스를 가진 다이묘가 없네요...; 우에스기도 옛 자기 영토에 좀 집착하고 말이죠. 도쿠가와는 어찌보면 앗싸 ㅋ 영지 바꿨다 ㅋ 라는 느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는 미카와(三河) 오카자키(岡崎)에서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에 자력으로 옮긴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고보니 서국도 미요시 나가요시 같은 사람은 본거지를 옮겼군요. 아와(阿波)에서 수도권(近畿)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소위 기독교 다이묘우(大名)는 많이 있지만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보다 독실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伴天連追放令)를 선포하지만 이때도 우콘은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비호를 받으며 쇼우도시마(小豆島) 섬에서 우콘과 함께 몸을 숨이고 있던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우콘에 관해,
 "우콘님(右近殿)의 용기 있고 굳건한 신앙에는 놀랄 따름이다"

 며 예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581년 우콘의 영지인 셋츠(津) 타카츠키(高槻)에는 20개의 교회가 세워져 영민(領民) 2만5천 중 1만8천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기독교 왕국이었다[각주:1].
 우콘의 부친 히다노카미(飛
守)[각주:2]도 세례명을 '다리오'라고 하는 성실한 신자였다. 텐쇼우(天正) 연간[각주:3]에 가독을 우콘에게 물려주고 오로지 포교에 헌신하였다[각주:4].
 선교사 프로이스(Luís Fróis)가 기록한 일화에 따르면 히다노카미의 신앙도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성내를 순시하다 추위에 떨고 있던 하급병사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새로 맞춘 고가의 옷을 벗어주고는 헌 옷으로 갈아있었다고 한다. 성으로 돌아온 남편을 보고 이상히 여긴 부인 마리아(세례명)가 묻자 히다노카미는
"나는 그 옷을 주님께 바쳤다오"
라 말했다고 한다.

 타카츠키 영내(領內)에서는 장례식 때 빈부의 차가 없었다고 한다.
 영내의 가난한 기독교도가 죽었을 때 우콘 부자는 사제(司祭)를 맡았으며 장례행렬이 묘지로 옮겨질 때는 다리오와 우콘도 그 관을 짊어졌다. 더구나 최하층 천민의 역할인 묘를 파는 것마저 하였다. 그것을 보고 모두 괭이를 들고 함께 구멍을 팠으며 중신의 부인들도 맨손에 흙을 닮아 파묻는데 힘을 보탰다고 한다.

 1576년 가을. 셋츠(津) 아리오카(有岡) 성주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갑자기 모우리(毛利)-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반기를 들었다. 무라시게에게 배속된 장수였던 우콘은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무라시게는 듣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우콘을 빼내오기 위해 수 차례 선교사를 파견하여 설득하였다[각주:5].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최후의 카드로 꺼내어 들었다. 아군이 되지 않는다면 선교사들을 모두 십자가에 꺼꾸로 메달아 창으로 찔러 죽일 것이며 교회도 파괴할 것이다. 반대로 오다 진영에 참가한다면 셋츠(
津)의 반을 하사할 것이며 기독교 보호에도 만전을 기한다고 하였다. 하필이면 그때 부친 히다노카미가 아라키 군에 참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육친을 선택할 것인가 신앙을 선택할 것인가? 우콘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영주의 지위를 부친에게 되돌리고 자신은 은거한다며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으로 인해 죽은 노부나가의 장례식에서도 우콘은 기독교도라는 입장을 내세워 참가한 수 많은 다이묘우(大名)들 앞에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향도 피우지 않았다.

 1587년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함에 따라 우콘의 운명은 어둠으로 변한다. 후나게 성(船上城)을 몰수 당한 뒤에는 코니시 유키나가를 의지하였으며 나중에는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비호를 받았다[각주:6].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토시이에의 아들 토시나가(利長)와 함께 동군에 속하여 서군과 싸웠지만 1613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기독교 금교령이 반포되자 결국 국외로 추방당한다.

 다음 해인 1614년 9월 24일. 부인을 포함한 백여 명의 교도들과 함께 필리핀 루손 섬으로 가 그 다음 해인 1615년 마닐라에서 죽었다.

[다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1552년생. 이름은 나가후사(長房), 시게토모(重友) 혹은 토모나가(友
)[각주:7]. 세례명은 동 유스토[각주:8].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모반을 일으킨 다음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배속된 다이묘우[각주:9]가 되지만 미츠히데가 모반하자 1582년부터 히데요시(秀吉)의 휘하[각주:10]가 된다. 마닐라에서 죽었을 때는 63세.

  1. 여담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곳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카야마 토모테루(高山 友照). 히다노카미(飛騨守)는 자칭. 또한 '즈쇼(図書)'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1574~1593년 사이. [본문으로]
  4. 우콘에게 기독교 신앙을 권한 것이 이 부친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처음엔 무라시게의 반란에 참가하였지만 상기의 언급된 오르간티노 신부의 말을 듣고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코쿠다카는 약 3만석. 우콘은 많은 영지 대신 교회를 세울 수 있게만 해달라고 하였고 토시이에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토모요시'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8. Dom Justo [본문으로]
  9. 코쿠다카(石高)는 약 4만석. [본문으로]
  10. 이때 받은 영지는 아카시(明石) 6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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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05.31 0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시대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안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우콘의 삶은 그야말로 고뇌의 연속이더군요. 그 고뇌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은 것...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도건 뭐건 아니지만, 저런 사람을 보면 감격스러워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5.31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독교 작가로 유명한 엔도 슈사쿠옹이 쓰신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인공인 숙적이란 물건을 읽다가 처음 알게된 다이묘군요(생각해보면 90년대에 접했으니 제법 저와 관계가 깊다면 깊은 사람입니다;)

    거친 항해로 마닐라에 닿자마자 객사한 점이 참 안타깝더군요. 코에이에서는 기독교도를 별로 안좋아하는지라 능력치가 좀 형편없는점이 아쉬웠습니다마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1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최상급이었나 봅니다.

      아케치 토벌전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선봉(...뭐 미츠히데 휘하 다이묘우였다는 정치적 이유도 있겠지만요)에 임명될 정도의 뛰어난 전술 능력.

      아카시로 영지가 옮겨졌을 때 절을 파괴하여 스님들이 불상을 이고지고 히데요시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거긴 우콘의 영지니까 지가 맘대로 해도 괜찮아'할 정도로 히데요시에게 인정받을 정도이니까요.

      후에 히데요시가 큐우슈우에서 기독교도들이 절 파괴하는 것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우콘을 얼마나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만이라도 "안 믿으면 되잖아요~"라는 것을 못해서 영지에서 추방당한 후에도 마에다 토시이에가 거두어 거성인 카나자와 성(金沢城)를 시작하여 자기 영지의 여러 성을 축조케 한 것을 보면 두루두루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다메엣찌님 말씀 들어보니 그렇군요.
      코에이가 기독교 무장에게 능력치가 짠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등청정의 경우 그 축성 능력(쿠마모토 성~)은 월등하겠지만 소서행장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소서행장이 더 뛰어난 부분..특히 전술적인 면에서는 소서행장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만...게임 상에서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Bolivar 2009.06.02 0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친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나오는 "너희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에게 해 주는 것이.." 를 연상케 하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2 04: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경을 안 읽어 보아서요. ^^;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했다는 말씀인가요?...검색해 보니 비슷한 것이 보여서요)

      예수님의 말씀이 현재 가장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그 가르침이 그 만큼 알기 쉽고 공감 가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4. 朴先生 2009.06.02 2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 큐슈 정벌 때 꽤 타카야마 우콘과 그 가신들은 꽤 큰 활약했다고 하지요
    히데요시의 명령 때문이 아니더라도 큐슈가 기독교 신자도 많고해서
    우콘에게는 그 곳이 예루살렘이었을지도...
    "성지를 탈환하자!!!" "성전이다!!!"라는 십자군같은 기분으로 원정을 떠나지 않았을까싶습니다

    결론... 이렇게 신의 가호를 받고있다고 믿는 군대가 제일 무섭습니다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처럼 말이죠)
    정신력으로 당시 일본 최강의 군대는 아니었을란지요 ㅎㄷㄷ 그냥 저의 허접한 감상일 뿐입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콘이 큐우슈우 정벌에서 활약을 했나 보군요.
      아직 그 부분은 잘 아는 편이 아니라..

      어쨌든...
      저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계시군요~
      무섭죠...종교라는 갑옷으로 무장하 군대는..
      각종 서적이나 지역마다 최강의 군대를...
      사츠마 하야토(薩摩隼人)라던가, 타케다 기마 군단이라던가, 우에스기 군단이라던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혼간지(本願寺)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극락정토라고 하며 닥돌하는 무리들이야 말로 등 뒤에 지켜야 할 땅과 가족들이 있는 무사단보다는 몇 배나 강하다고 생각합지요.

      기독교 교인의 군대도 강했을 것 같습니다.
      이에야스가 금교령을 내린 배경 중에 하나로 그들이 오오사카(히데요리)를 지원할지도 모른다는데 공포를 느낀 것에 있다고도 하니까요.

  5. 朴先生 2009.06.03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현실에서도 그렇게 독실히 믿는 신자들을 보면 경건해지면서도 뭔가 무섭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에이에서는 앞으로 종교라는 요소를 넣으면 어떨까싶습니다
    세례를 받고 안 받고의 유무에 따라 가신이나 타 다이묘와의 관계라던가
    전투에 나가면 무조건 사기치가 +20이 된다던가하는..
    태합같은 경우에는 켄뇨나 우콘한테 신겐의 '풍림화산' 처럼 '신불의 가호'나 '천주의 은총'같은 사기커맨드를 넣어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
    오히려 밸런스 붕괴의 요소가 되려나요~??
    제가 코에이 쪽 게임을 전부 접해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미 이런 요소가 한 번은 나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6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혁신에서...처럼 한 부대에 여러 명이 속할 경우 그런 식으로 하는 것도 좋겠죠. 단 한 유니트에 전부 같은 종교만 있고 만약 다른 종교일 경우 오히려 혼란 걸리기 쉽다던가 하는 식의 페널티도 있어야 겠고요.

      비슷한 것으로는...
      천하창세에서 영지 내에 혼간지의 御坊가 있을 경우 수비시 플러스 효과가 있더군요.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텔리[각주:1] 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온 무장이면서도 끈적끈적한 정치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의 행동거지에서 미적인 품위를 느낄 정도이다.

 중세 굴지의 문화인(文化人) 센노 리큐우(千 利休)는 우지사토를 평하길,
 “일본의 무장 중에서도 하나나 둘 있을까 말까 한 문무 겸비의 명장”
 라 말하며 칭송했다고 한다.

 우지사토 스스로도 자신이 명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서에 따르면 측근에게,
 “
토요토미 타이코우(豊臣 太閤)가 죽은 뒤 천하인(天下人)가 되는 사람은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아니면 나다”
 고 단정지었다고 하다.
 또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는,
 “이에야스는 가신에게 땅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인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미의식을 통한 인물감정이기에 현실과 밀착한 통찰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뜻하는 바가 웅대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히데요시에게서
아이즈(会津) 42만석[각주:2]의 거대한 영지(領地)에 봉해졌을 때 우지사토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반대로 변경으로 옮겨지는 원통함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를 메이지(明治) 시대의 문호(文豪)
코우다 로한(幸田 露伴)은,
 “내 비록 미관말직이더라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있다면 여차할 때 무슨 일이라도 하여 깃발을 천하에 휘날릴 수 있을 터인데, 이제 큰 영지(領地)를 받았다곤 하여도 산과 강이 사이에 놓여진
시라카와(白河) 관문[각주:3] 저 너머 오우슈우(奥州) 데와(出羽)의 깡촌에 있어서는 평소 가지던 큰 뜻도 펼치기 힘드니…”[코우다 로한의 蒲生氏郷]
 라 표현하였다. 우지사토의 눈이 항상 천하로 향해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 장재(將材)는 노부나가도 눈여겨볼 정도였다. 부친 카타히데(賢秀)가 오우미(近江)의 롯카쿠(六角)씨를 버리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을 때 13살의 우지사토는 인질로 오다 가문에 오게 되었다. 우지사토를 본 노부나가는,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며 장래의 대기(大器)를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사위로 삼는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다음 해 14살의 데뷔전(初陣)[각주:4]에서는 이름있는 무사의 수급을 취하였다. 이 해 약속대로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姫)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히데요시도 우지사토의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의 일이다. 당시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성주였던 우지사토도 출진하였다.
어쨌든 히데요시 앞에서 그의 측근들이 심심풀이로 인물비평에 열중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때,
 “우지사토는 나와 닮았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해내더군. 정말 두려운 녀석이야”
 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즈(会津)의 대봉(大封)을 받을 때 있어서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이즈(会津)는 오우슈우(奥州)를 제압하는 주요지점이었다. 히데요시는 누가 적임일지 여러 장수들에게 토의하게 하였다. 10명중 9명이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추천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네놈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어라”며 우지사토를 지명했다고 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 부임할 때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였다. 히데요시의 특기 인심장악술이었다. 자신의 전권대리인으로서 오우슈우(奥州)의 지배자가 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전해진다. 우지사토가 너무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이쪽에 두기에는 너무 무서운 녀석이다”
 고 생각한 히데요시가 오우슈우(奥州)의 깡촌으로 쫓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각주:5]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오우슈우(奥州)로 출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같은 자리에 아이즈(会津)와 인접한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에 영지(領地)를 가지고 있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와 그의 아들 키요히사(清久)가 있었다.
 “이세노카미. 너희들은 앞으로 우지사토를 주군 혹은 부모라 생각하고 섬기거라. 앞으로 쿄우토(京都)에 올 필요 없다. 그 대신 아이즈(会津)로 출사하거라”
 그리고 우지사토에게는,
 “이세노카미를 자식 또는 동생이라고 여기며 돌봐주길 바란다”
 고 말하였다.
 우지사토는 오우슈우(奥州) 총독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오우슈우(奥州)에서 으뜸가는 실력자로 자타가 공인하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자연스레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우지사토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그런 분위기를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마사무네가 세이쥬우로우(清十郎)라는 16살의 자객을 가모우 일족의 타무라 나카츠카사노쇼우(田村 中務少輔)의 시동으로 잠입시켰다. 목적은 우지사토의 암살이었다. 어쩌다 편지가 국경초소에서 발각되어 정체가 탄로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우지사토는 그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며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각주:6]

 우지사토는 세례명을 ‘레온[각주:7]’이라고 하여 기독교에 신앙했었다. 센고쿠 당시의 지식계층은 이 서양의 종교를 신지식으로 받아들였는데 우지사토의 인텔리전트적인 면모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풍류의 길에도 밝아 사세구로써,

 끝이 있으니 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질 것을
 성급도 하구나 꽃샘바람
 限りあれば吹かねど花は散るものを
 心みじかき春の山嵐
  라는 것을 남겼다.

 다도(茶道)도 리큐우의 뛰어난 일곱 제자 중 하나[각주:8]로 꼽혔다.

 말년의 영지(領地)는 92만석에 달했지만 안타깝게도 40세에 죽었다.
 가모우 가문 자체의 명맥도 짧아 아들인 히데유키(秀行)의 대[각주:9]에 단절되었다.

[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56년
오우미(近江) 가모우 군(蒲生郡) 히노 성(日野城)에서 태어났다. 첫 이름은 마스히데(賦秀)[각주:10], 통칭을 츄우사부로우(忠三郎)라 하였다. 1584년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12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서의 공으로 쇼우쇼우(少将)로 승진하여 '마츠자카 쇼우쇼우(松坂少将)'라 불렸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공을 세워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 42만석에 봉해졌다. 1591년 오우슈우(奥州)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각주:11]를 진압하여 타무라(田村), 시노부(信夫) 등 5개 군(郡)이 더해졌고, 같은 해 또다시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2]에 참가하여 다테 군(伊達郡)을 가증 받아 영지(領地)는 91만9320석에 달하였다. 1595년 2월 7일 죽었다.

  1. '지식인'..이라고 번역해야하지만, 왠지 네이버 지식즐~ 때문인지 뉘앙스가 좀... [본문으로]
  2. 46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4. 대다수의 서적들은 1569년 8월의 이세(伊勢) 키타바타케(北畠) 공략이라고 하지만, 우지사토가 이토우 한고로우(伊藤 半五郎)에게 보낸 편지에는 1568년 9월의 노부나가 상경전 때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이와는 반대로 우지사토에게 세례를 한 오르간티노는 우지사토가 죽자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사람이 죽었다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다. [본문으로]
  7. 레오(Leo)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리큐우 칠철(利休七哲)을 말한다. 우지사토를 제외한 나머지는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오리베'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 우지사토는 이 칠철 중 No.1으로 꼽힌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업치락뒤치락 후 우지사토의 손자 타타도모(忠知) 때 완전히 끊김. [본문으로]
  10. '야스히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11. 상기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가 영내 정치를 잘못해서 '카사이-오오사키의 난'이 일어난다. [본문으로]
  12. 정확히는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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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5.21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92만석이면 5대로 수준이었네요. 전국시대라면 역시 땅따먹기가 재미있는지라, 지난번에 언급하신 니와 123만석 같이 가장 전성기 때의 세력을 알게 되는 것도 흥미있더군요.

    히데요시 시절의 아이즈라면 우에스기도 그 근방에 있지 않았나요? 두 가문 중 어느 쪽이 더 북쪽(교토에서 더 멀리?)에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2 1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준은 확실히 오대로 수준입죠.
      오대로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같은 경우 33만석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우에스기는 에치고(越後)에 있었습죠. 이 우지사토가 죽은 다음 우지사토의 아들을 시모츠케(下野)로 쫓아버리고 우에스기를 아이즈로 옮기게 됩죠.

      쿄우토에서라면 아무래도 에치고가 인식상 가까웠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2. 나라 2009.05.21 1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모우 가문이 왜 단절되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그거 굉장히 궁금한데 잘 안 나오더군요 ^^;
    항상 번역하신 것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2 2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아이즈'라는 위치가 남쪽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북쪽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라는 두 거물을 감시하고 만약의 사태에서는 제압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지사토 사후에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라는 이 또한 거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에도 바쿠후(幕府)가 들어선 다음에도 그 중요성은 변치 않아 아이즈 북쪽의 다테 마사무네의 센다이 번(仙台藩)이라는 실질 에도 시대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번을 감시하여야 했습지요. 따라서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요네자와라는 곳으로 옮겨지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현대에서는(라기보다는 koei의)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당시는 뛰어난 전쟁꾼이었다는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그 카토우 가문 다음에는 에도 바쿠후가 가장 신임했던 아이즈 마츠다이라(会津松平 - 시조는 2대 쇼우군 히데타다가 몰래 낳은 호시나 마사유키(保科 正之))를 배치할 정도였습니다.

      ...사설이 길어졌는데(^^;) 그렇게 중요한 위치였는지라 우지사토가 죽은 다음의 아들은 그런 중요한 위치를 사수하기에 너무 어렸고 또한 밑에 시로유메님의 말씀대로 가문도 다스리지 못할 정도라 다른 곳으로 쫓아버리게 된 것입니다.(...라는 것이 아이즈 가모우 가문의 단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가모우 가문의 단절은 간단합니다.
      그의 손자 가모우 타다토모(蒲生 忠知)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도 바쿠후의 법도에 따르면 후사가 없는 한(藩)은 없애버리거든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주 들려주세요~

  3. shiroyume 2009.05.21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안녕하세요 자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라/단절이 영지 감봉을 말하는지 혹은 아예 단절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후의 경과를 말하면 아들 히데유키는 가모 사토야스란 중신이 우지사토 때부터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 사토야스란 양반이 정무를 독차지하고 다른 가신들하고 사이가 안좋아서 전쟁직전까지 불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데요시로부터 니는 안되겠다. 그냥 감봉되라고 하면서 히데유키는 감봉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는데 이 분쟁의 원인이 된 사토야스는 그 후로 세키가하라에서 할복전까지 그럭저럭 지내는데 이 사토야스란 양반은 미쓰나리하고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히데요시하고 미쓰나리하고 사토야스하고 감봉시킬명분을 만들려고 짜고 소동을 일으켰을 확률이 높다는 소리.
    그 다음 우지사토의 손자에 해당하는 다다사토, 다다토모가 있는데 다다사토는 요절하고 다다토모는 원래 분가해서 새영지를 갖고 있었으나 다다사토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가모가를 잇습니다. 그러나 이 다다토모도 가신들간의 분쟁을 겪고 골머리 썩히다가 산킨고타이(에도의 쇼군 방문)도중 교토에서 급사합니다...후손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가문을 이으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문을 닫게 한 걸 보면 이로부터 첫째 바쿠후의 직할령을 넓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위한 그당시 바쿠후의 통치방침을 알수 있다. 둘째 가모가는 우지사토빼고 능력이 다이묘로서는 영글러먹었다..

    발해지랑/우연찮게 검색하다가 들어왔네요.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네요 종종들릴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2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시로유메님 ^^


      대신해서 작성해 주신 장문의 리플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오셔서 저 대신 쫌(~퍽~)...^^;
      (제가 좀 설명하는 능력이 딸려서 말입죠)

  4. 나라 2009.05.22 08: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iroyume 님 정말 감사합니다.

  5. 朴先生 2009.05.26 0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약 시로유메님이 말씀하신대로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와 오르간티노가 전하는 히데요시가 눈물흘린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히데요시... 흠좀무...
    뭐 '우지사토가 죽어서 히데요리의 후사를 보좌해줄 사람이 죽은 건 슬프지만
    아비에 비하면 그에 못 미치는 아들이 거대 영지를 갖고 있는게 불안요소다, 국가경영에 情과 理는 별개의 문제다'라고 생각했다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6 15: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미츠나리와 우지사토의 죽음 사이에 연관성은 없다고 봅니다.

      '가모우'라는 성과 '사토(郷)'를 물려 받은 우지사토의 가신들이 미츠나리와 함께 세키가하라에서 싸운 것을 보면요.

      예전 호쿠리쿠(北陸) 120만 여석을 가진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도 죽자 히데요시는 그의 아들 나가시게(長重) 15만석 정도만 준 것을 보면, 히데요시 자체가 능력있는 사람에게는 땅을 왕창 주지만 그 후계자에게는 꼭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덤으로 그렇게 생긴 공백지에는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집어 넣을 수 있어 자기의 힘도 늘릴 수 있고요)

      ...써 놓고 보니 전혀 딴소리군요. ^^ 그렇다고 쓴 것 지우기도 아쉽고 하니 그냥 남겨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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