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이에[秀家]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제일의 악모가(惡謀家)로 악명 높았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581년 나오이에가 죽기직전에 당시 오다 가문[織田家]의 쵸우고쿠[中国] 모우리 공략[毛利攻め]을 담당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히데이에(당시는 하치로우[八郎])의 후사를 부탁하여, 이에 응한 히데요시는 나중에 히데이에를 유자(猶子)[각주:1]로 삼게 된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름글자도 히데요시의 ‘히데[秀]’를 하사 받아 하치로우[八郎]에서 히데이에[秀家]로 바뀌었으며, 히데요시 덕분에 관위도 계속해서 승진하였다. 1594년 조선침략 중 공적을 세워 24살의 젊은 나이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 받아, ’비젠 츄우나곤[備前中納言]’으로 칭해질 정도였다.
 결혼 또한 히데요시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었다. 부인은 히데요시가 친자식처럼 기른 양녀 고우히메[豪姫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였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히데이에에 대한 애정은 친자식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도 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양자들 중 관백(関白) 히데츠구[秀次]는 자살을 언도 받았고, 히데아키[秀秋]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내졌지만, 이 히데이에만은 유자의 신분을 계속 보장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병상에 누워서 후사를 부탁한 오대로(五大老)[각주:2]의 면면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히데이에는 어렸을 적부터 내 손수 키웠던 사람이기에, 히데요리를 지켜는 것에 있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히데이에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첫 번째 신호는 집안싸움[御家騒動]이었다.
 히데이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은 꽤 있었지만, 영지(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 절반)를 다스리는 정치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과보호 상태에서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히데이에의 가신단 중 본거지에 있는 ‘본거지파[国許派]’와 수도권에 올라와 있던 ‘수도권파[上方派]’의 가로(家老)들 사이에 험악한 파벌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히데이에가 부인인 고우히메 휘하 가신으로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 파견된 나카무라 지로우베에[中村 治郎兵衛][각주:3]를 중용한 것이 본거지파를 자극했다.

 그래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공공연히 다툼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본거지파 가로들의 분노가 폭발, 나카무라를 주살해야 한다면 공공연히 병사를 일으켜 수도권으로 올라온 것이다. 필두가로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坂崎 出羽守]][각주:4], 토가와 히고노카미[戸川 肥後守][각주:5],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각주:6] 등이었다. 하지만 나카무라를 아낀 히데이에가 나카무라를 카가로 도망치게 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쿄우노스케 들은 이번엔 주군이 적이라며,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문 저택 앞에 바리케이트[逆茂木]를 치고 화톳불을 피워 전투준비를 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시가전으로 발전할 듯 하였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중재로 전투는 회피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커 우키타 가문의 본거지파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활약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히데이에는 서군의 부사령관 격으로 1만7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결전의 이틀 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군 제장들의 동요하는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그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있는 것이 든든하다’고 적었는데,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히데이에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초반의 활약은 훌륭했다.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7]가 이끈 우키타 군[宇喜多軍]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는 동군(東軍)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서군은 패했다. 히데이에는 전쟁터에서 후퇴, 해로(海路)를 타고 사츠마[薩摩]까지 잠행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끝까지 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당한다.

 이후 이 섬에서 살길 50년, 1655년 84세에 죽었다고 한다. 그 사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는 멸망하였고, 토쿠가와 쇼우군[徳川将軍]도 4대 이에츠구[家継]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1572년생. 히데요시[秀吉] 휘하로 시코쿠 정벌[四国征伐]
[각주:8],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조선의 역[朝鮮の役][각주:11]에 종군하였다. 전성기 때는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절반, 하리마[播磨] 일부를 합쳐 총 57만4천석을 영유했다.


  1. 양자와 같은 개념이나 양아비의 성(姓)과 재산을 상속받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3.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4와 5편에 등장하는 인물. [본문으로]
  4. 우키타 아키이에[宇喜多 詮家]. 히데이에와는 사촌지간(각각 아비가 형제) [본문으로]
  5. 토가와 타츠야스[戸川 達安]. [본문으로]
  6. 하나부사 마사나리[花房 正成] [본문으로]
  7.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5와 6편에 등장하는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을 말함. [본문으로]
  8. 1585년 행해진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羽柴秀長]의 시코쿠[四国] 침공.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합쳐 일본에선 이렇게도 부른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7.18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의 글이시군요!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은 글에 첫 댓글을 남기는 것은 인터넷을 키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 감히 말하겠습니다.

    뭐랄까요, 어떠한 인물들의 삶에서 히데요시는 때론 냉혹하지만 때론 매우 따뜻한 사람의 양면성을 보이며 개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히데이에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을 떠나 정말로 히데이에를 사랑한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아마 히데이에의 착하고 순수한 성품이 순수한 일면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생각되네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에야스가 굳이 히데이에를 죽이지 않은 것은 마에다 가문과의 관계도 있지만 5대로 시절부터 그 역시 히데이에의 성품을 알고 있었던 것 역시 작용을 하지 않았나 감히 추측해봅니다. 물론 유배생활을 하게 된 히데이에는 자신이 50년을 더 살거라곤 생각을 못했겠지만 말입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시바 선생의 우키타 히데이에 #2에 이런 문장이 있습죠.
      " 히데요시 자신도 하치로우 모친의 몸을 알고 있던 만큼 어렴풋이 그렇게 착각할 법한 정념(情念)을 이 소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이라는 것은 원래 출산의 고통이라는 동물적인 체험이 없이, 단순히 그 아이의 모친의 몸을 알고 있을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히데요시는 히데이에 부친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 히데이에 모친 엔유우인[円融院]의 몸을 통해서 정말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을지도...

      저 개인적으로는 시바 선생의 평과 같습니다.
      이에야스가 생각하기에 히데이에가 주도적으로 큰 일을 벌일만한 그릇이 아니었기에(거기에 자신의 가문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도 있고), 그냥 유배로 끝나지 않았을지.
      (물론 성품이 뛰어난 것도 있었기에, 여러 다이묘우들의 조명탄원 운동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2. 맹꽁이서당 2011.07.18 18: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가의 사람들... 예전에 올리셨을 때 반갑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벌써 3년전이라니 세월 참 빠릅니다 ㅎㄷㄷ
    그나저나 우키다 가의 본거지파는 좀 어정쩡했겠네요. 아무리 도쿠가와를 위해 활약했더라도 세키가하라 이후 가문 자체가 날아간 상황이니.. 어디 다른 가문에 취직이라도 했을까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는 나름 자주 포스팅을 했었는데 말입죠.. 정말 세월 참 빠릅니다.

      주군의 가문 자체는 날아갔어도,

      사카자키(우키타 사쿄우)는 이와미[石見] 츠와노 번[津和野藩] 3만석(오오사카 공성전 후 가증 되어 약 4만 3000석).

      토가와 히고노카미(타츠야스)는 니와세 번[庭瀬藩] 3만석.

      하나부사 시마노카미(마사나리)는 5000석의 거물 하타모토[旗本]가 되었던 지라 나름 알아서들 출세했다고 보아야 합죠.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 이에야스[家康]로 이어지는 소위 겐키[元亀][각주:1] - 텐쇼우[天正][각주:2]의 천하 통일기에 저 3명과 가까이 하며 백만석의 기초를 쌓아 올린, 센고쿠[戦国] 역사에서도 특필할 만한 무장이었다.

 토시이에는 14살 때 당시 나고야[那古野] 성주였던 4살 연상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각주:3], 같은 해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섰다[각주:4]. 19살 때 노부나가가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信行]를 공격한 이노우 전투[稲生の合戦]에서 노부유키의 청년 친위대장[小姓頭] 미야이 칸베에[宮井 勘兵衛]라는 강적을 쓰러뜨리는 공적을 세웠다.[각주:5]

 이 즈음 토시이에는 카부키모노[かぶき者]로 성질이 급하여 자주 남과 싸웠다.
 ‘카부키모노’라는 것은 기발하고 특이한 복장이나 행동을 해서 남을 놀라게 하고는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기풍이었다. 예를 들어 토시이에는 굉장히 화려한 장식을 한 창을 들고 다녔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창의 마타사에몬[槍の又左衛門][각주:6]’이란 이명(異名)을 붙었기에 이를 들은 토시이에는 기뻐하였다.
 그런 토시이에였기에 늙어서도 특이한 젊은이를 사랑하였으며, 또한 말하길,
 “젊은이에게는 큰소리 치도록 만드는 편이 좋다. 그러면 자신이 했던 말들을 거짓으로 만들 수 없다며 분투하게 되니까”
 라고 하였다.

 카부키모노였던 22살의 1559년, 토시이에는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노부나가의 도우보우[同朋][각주:7] 쥬우아미[十阿弥]가 토시이에의 남성용 비녀[笄][각주:8]를 훔쳤다. 토시이에는 곧바로 노부나가에게 쥬우아미를 처벌할 테니 허락을 내려달라고 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토시이에는 주군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이런 토시이에를 보고 쥬아미 등이 ‘용기도 없는 놈’ , ‘무사라는 자가 한번 벤다고 했으면 베어야지 주군의 명령이라고 베지도 못하다니’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깠다.[각주:9]
토시이에는 이를 듣고 불문곡직하고 쥬우아미를 베어 죽였다. 더구나 일부러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을 골라서 죽여버린 것이다. 평소부터 카부키모노라는 점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토시이에로서는 당연한 행위였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토시이에를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노(宿老)들의 중재 덕분에 목숨만은 건져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낭인(浪人)이 된 토시이에가 취한 방도는 슬며시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세워 복귀를 허락 받는 것이었다.[각주:10] 그런 기회가 그 다음 해인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가 되어 찾아왔다. 토시이에는 오다 군[織田軍]에 참가하여 이마가와[今川] 측의 목을 세 개를 가져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시이에가 그 목을 노부나가의 앞으로 가져왔지만 노부나가가 무시했기에 그 목들을 버리고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결국 노부나가의 용서는 없었다.

 그 2년 뒤, 노부나가가 미노[美濃]를 침공하였을 때 토시이에는 또 참가하여 모리베 전투[森部の合戦]에서 ‘목 사냥꾼 아다치[首取り足立]’라는 이명(異名)을 가진 강한 무사를 죽이는 수훈을 세우자 노부나가도 용서를 하여, 다시 오다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복귀하게 되었다.[각주:11]

 그 후 토시이에는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함께 호쿠리쿠 방면[北陸方面]에서 활약하며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자,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곧이어 이 둘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토시이에의 입장은 복잡했다. 토시이에에게 있어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에서 쫓겨나 낭인으로 보내던 시대에 몇 번이나 도와주었던 은인이며, 오랜 기간 전쟁터를 함께 해 온 의리가 있었다. 한편 히데요시와도 젊었을 적부터 친교가 있어, 딸 중 하나인 ‘고우[豪]’[각주:12]는 태어나자마자 히데요시에게 양녀로 주었을 정도였다. 토시이에는 어느 쪽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 는 것이 본심이었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영지가 이웃인 시바타 측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1583년 4월 21일부터 다음 날 아침에 걸친 시즈가타케의 전투[賤ヶ岳の戦い]는 히데요시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지만, 이때 마에다 군[前田軍]은 그다지 전투에 참가하는 일 없이 영지(領地)인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로 철퇴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가 이 전투에 대한 기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히데요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토시이에가 농성하고 있는 후츄우의 성은 단숨에 낙성시킬 수 있었다. 이때가 토시이에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각주:13]

 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포위망을 친 히데요시는 혼자 말 타고 후츄우의 성문 앞에 와서는 “마타사[又左]~ 마타사~”하고 토시이에의 통칭을 불렀고, 성안에 들어 온 히데요시는, 서로 원한이 없으니 앞으로도 사이 좋게 지내자며 토시이에에게 말하였다. 이런 것은 히데요시의 특기인 남의 마을을 끌어들이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미움 받지 않는 토시이에의 인덕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리하여 토시이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멸망 당하여 죽은 뒤 히데요시의 둘도 없는 한 팔이 되어 신뢰를 받았고, 나중에는 여러 장수들에게서도 신뢰를 받아 히데요시 정권에서 무게감을 더해 갔다.

 토시이에가 여러 장수의 인망을 모았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병들었을 때, 토시이에는 당시 명의로서 명성을 떨치던 의사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에게 직접 의뢰하여 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며, 우지사토가 죽자 그 아들 츠루치요[鶴千代 = 후에 히데유키[秀行]]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즈[会津]라는 중요한 곳을 지키기 힘들다는 의견이 높았지만, 부인 호우슌인[芳春院]과 함께 히데요시 부부를 설득하여 가모우 가문[蒲生家]의 영지 상속을 실현시켜 주었다.[각주:14]
 
 또한 이해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 사건이 일어나 평소 히데츠구와 친밀했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가 연좌의 혐의를 받자, 토시이에는 온갖 수단을 다해 변호하여 아사노 부자에게 쏠린 혐의를 벗게 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조선에서의 행동 때문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근신 당하고 있다가 ‘지진 카토우[地震加藤]’[각주:15]라는 이명(異名)을 얻을 때의 활약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풀었는데, 이것도 토시이에의 중재에 의한 것이 컸던 듯 나중에까지 키요마사는 토시이에의 중재를 고마워하였다.

 이렇듯 토시이에가 장수들의 위기를 구했기에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신뢰할만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토시이에는 말년이 되어 적자 토시나가[利長]에게 여러 다이묘우들의 차용증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죽은 뒤 마에다 가문의 편에 선 다이묘우의 차용증은 돌려주라고 하며, 그렇게 되면 한층 더 아군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는 단순히 ‘좋은 인간성’만의 무장이 아니라 상당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시이에는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그것도 센고쿠 무장[戦国武将]로는 드물게 경제감각의 소유자로 수치에 밝아 항상 주판을 가지고 다니며 병사의 수를 세거나 금전 출납, 곡물을 계량할 때도 주판을 튕겼다. 그랬기에 토시이에는,
 “돈이 많으면 남에게도 세상에게도 겁먹을 일이 없지만, 가난해지면 세상이 무서운 법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1598년 8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가 죽었다. 정치와 어린 히데요리[秀頼]의 안전은 오대로(五大老)[각주:16], 오봉행(五奉行)[각주:17]의 손에 맡겨지게 되어, 토시이에는 주로 히데요리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대로의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우들과 사돈관계를 맺으려 하는 등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기 시작하기에 이르자, 토시이에는 긴박한 정치의 장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이에야스를 가장 적대시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봉행이었다. 그리고 이 미츠나리는 무공파(武功派)라 일컬어지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의 격한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리 되자 천하는 이에야스-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등 반 이에야스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에야스의 다음가는 실력자 마에다 토시이에는 미츠나리 등과 함께 이에야스에게 힐문장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변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답변으로 응대하였다. 오오사카의 토시이에와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간에 불온한 공기가 흘렀다.
 이 사태에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8]와 토시이에에게 은혜를 입은 카토우 키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 여러 장수들이 열심히 양자간의 사이를 중재하여 겨우 화해하였다고 한다.
 그때 토시이에는 이미 병상이 깊어 마에다 가문의 의지는 적자 토시나가가 결정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인망이 두터웠던 토시이에였기에 여러 장수들도 중재에 힘썼던 것이며, 이에야스 역시 예부터 알고 지낸 그런 토시이에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는 죽었다.
 그 임종의 자리에서 토시이에는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이빨을 간 뒤 베갯머리에 있던 ‘신도우고 쿠니유키[新藤吾 国行]’의 작은 칼[脇差]을 뽑지도 못해 칼집 채 가슴에 누르고는 무언가 크게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9]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83년
오와리[尾張] 출신. 통칭 이누치요[犬千代]. 오다 가문[織田家]를 섬겼고, 형 토시히사[利久]를 대신하여 본가를 이었다[각주:20].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공적을 세워 에치젠[越前] 후츄우 성[府中城]의 성주가 되었고[각주:21], 이어서 노토[能登] 나나오 성[七尾城]의 성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후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카가[加賀] 오야마 성[尾山城][각주:22] 성주가 된다. 1585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각주:23]의 칭호를 하사 받았고, 1590년에는 토요토미 성[豊臣姓]을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 죽은 지 8개월 후인 1599년 죽었다. 62세.[각주:24]

  1. 1570~1573년. [본문으로]
  2. 1573~1592년 [본문으로]
  3. 봉록은 50관.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이며 키요스[清須]의 성주인 오다 노부토모[織田 信友]와의 카야즈 전투[萱津の戦い]. [본문으로]
  5. 오와리 통일전에 참가하며 봉록은 100관으로 증가. [본문으로]
  6. 토시이에의 통칭이 마타사에몬[又左衛門]이었기에. [본문으로]
  7. 다이묘우[大名] 곁에서 잡무를 맡거나 다도[茶道]에 관련된 일을 하던 스님. [본문으로]
  8. 일본 시대극을 자주 보시는 분이라면, 주인공이 도망치는 적이나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표창 대신 젓가락 비슷한 것을 던지는 장면을 보셨을 것이다. 그것이 코우가이[笄]. 이것으로 머리를 긁거나 머리를 다듬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가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10. 이런 행위를 '진가리[陣借り]'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복귀하면서 얻은 봉록 300관. [본문으로]
  12. 토시이에의 4째 딸. 나중에 오대로 중 한 명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에게 시집간다. [본문으로]
  13. 도망치던 시바타 카츠이에는 토시이에의 후츄우 성[府中城]에 들러, 무단 퇴각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오랜 기간 자신을 잘 도와 주웠다는 것에 감사한 뒤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여기에는 토시이에의 2남 토시마사[利政]의 부인이 우지사토의 딸인 점이 컸을 듯. 즉 서로 사돈지간. [본문으로]
  15. 596년 9월 5일 킨키[近畿]에 지진이 일어나 후시미[伏見]가 혼란에 빠졌을 때 키요마사는 근신의 몸임에도 군사들을 이끌고 후시미 성[伏見城]에 가 히데요시를 수비하였기에 붙은 이명. [본문으로]
  16. 이 당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7.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18.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는 타다오키의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 즉 토시이에와 타다오키는 사돈지간. [본문으로]
  19. 일설에는 복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신도우고 쿠니유키의 작은 칼로 스스로 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토시이에는 4남이어서 원래 자격은 없으나, 1569년 토시히사가 병약해서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토시이에가 당주가 되도록 명령. [본문으로]
  21. 나가시노의 공적보다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감시역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2. 후에 카나자와 성[金沢城]으로 이름을 바꾼다. [본문으로]
  23. 히데요시가 한참 동안 쓰던 성과 관직명. [본문으로]
  24. 가보나 계보도에는 62세라고 하나, [케타신사 문서[気多神社文書]]나 [토시이에 야화[利家夜話]] 등에서 63세로 하는 사료도 많아 63세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노부나가 가신단 연구가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12 0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시대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지녔던 오다계열의 필두가신들 중에서 센고쿠 시대의 끝자락까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란 점에서 도시이에란 인물의 역량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니와나 삿사는 히데요시 손에 의해 숙청되었고 시바타, 다키가와, 아케치들은 히데요시에게 칼을 겨누는걸 택하고 패망했으니 말이죠. 예외라면 장렬히 죽으면서 아들 데루마사와 가문을 지킨 이케다 쇼뉴 정도일까요.

    결과론적으론 가모 히데유키를 아이즈에 놔두게 되면서 가모 가문이 쇠퇴하게 된 셈이네요. 차라리 가모 가문을 아이즈보다 중요도가 덜한 곳으로 전봉했으면 어떻게 되었을런지. 전국에 이러한 우호 가문들을 만들어놓은 것이 에도가 훗날에도 가가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동맹의 울타리에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2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1588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가 쥬라쿠다이[聚楽第]에 행재하여 다이묘우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문서를 쓸 때, 노부나가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히데요시 일족과 이에야스, 모토나리 등과 함께 오다 가문 계열 무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것만 보아선 히데요시의 신뢰와 더불어 역량도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시바타, 아케치, 타키가와 등은 아무래도 히데요시 보다 서열이 위거나 동등하다 보니 천하를 노리는 히데요시로서는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가모우 가문[蒲生家] 자체가 우지사토[氏郷]를 중심으로 급격히 커져 신규 가신들을 다수 받아들이다 보니 가모우 가문 자체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계자라고 하여도 히데유키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졌나 봅니다. 이건 아무래도 일찍 죽은 잘못이 있는 우지사토 때문인 듯 합니다.

      좀 벗어난 이야기 입니다만, 에도 시대 때 혼슈우[本州]에 있는 마에다 가문을 시코쿠[四国]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습죠. 막부도 나름 마에다 가문에는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습죠.

      마에다 가문도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자식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를 자신의 가문으로 초빙하여, 가신으로서는 파격인 7만석을 안겨주며 막부와의 절충에 힘쓸 정도로 에도시대 초기에는 카가 번[加賀藩]과 막부는 나름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었던 듯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06.03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즈카타케에서의 무단 이탈 + 딸 2명중 한명은 히데요시의 양녀로, 또다른 한명은 히데요시의 측실로... 갠적으로 이 두가지로 인해 평소 좋게 생각했던 마타자의 환상이 팍 깨져 버렸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가타케 전투 때 토시이에의 마에다군은 마지막까지 후군에서 달려드는 히데요시를 막았고, 토시이에는 직접 창을 쥐고 싸웠다고 하는 기록도 있더군요.

      히데요시도 니와 나가히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시이에를 살린 것은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방파제로 남긴 것으로 에치젠에 있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임. 토시이에에게 마음을 열지 마시길'
      이라고 보낼 정도로 시즈가타케 전투 직후에는 토시이에와 히데요시가 알려진 만큼 친하진 않았던 것 같더군요.

      더더군다나 딸 2명 중 하나(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 간 고우히메[豪姫])는 태어나자 마자 간 양녀이고, 마아히메[摩阿姫=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는 원래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바쳐진 인질을 히데요시가 인수했던 것이라, 당시 인식으로 보아서 토시이에를 욕하기는 좀 부족하지 않을지...

  3. 지나다가 오타지적 2011.11.06 04: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바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4문단 6번째 줄

  4. 한남충 2018.06.24 0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아무리 의리가있고 인덕이 있어도
    시바타와의 의리를 지키기위해 수많은 식솔들과 가신들의 목숨을 뒤바꾸기는 힘들었을겁니다.
    저는 토시이에의 상황이 이해가는군요..
    참 의외인게 이에야스가 히데타다의 딸 타마히메를 마에다가문에 시집보낸것인데..
    토시이에 사후라 카가정벌까지 결정할뻔했던걸 혼인동맹을 맺어주며 포용한것이..
    포상할 땅을 엄청 필요로해서 카가를 먹기는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듯한데..

.

 

 그 후 히데요시[秀吉]는 히데이에[秀家]를 어떤 경우라도 곁에서 떨어뜨리질 않았다. 전쟁터에는 반드시 데려갔으며, 여러 장수들을 만날 때도 자신의 곁에 있게 하였다. 자연히 무장들은 히데이에에게 공손한 예()를 취했다.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는 이 소년을 유자(猶子)에서 양자로 삼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일족으로 하였다. 그 이전이건 그 이후건 히데요시는 어떠한 경우라도 히데이에에게 언짢은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히데이에가 똑똑한 대답이라도 하면,

 

 허허~ 하치로우[각주:1]가 제법이구나~”

 

 하며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였다. 히데요시는 핏줄이 닿는 다른 양자들 보다 이 핏줄이 닿지 않은 양자 우키타 히데이에를 사랑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친자식 같군

 

 라고 사람들은 뒤에서 쑤군거렸다. 히데요시 자신하치로우 모친의 몸을 알고 있던 만큼 어렴풋이 그렇게 착각할 법한 정념(情念)을 이 소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이라는 것은 원래 출산의 고통이라는 동물적인 체험이 없이, 단순히 그 아이의 모친의 몸을 알고 있을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히데요시는 히데이에 부친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운이 좋은 도련님이지

 

 라고 토요토미 가문에서는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는 고(故)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자식을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친 덕분일 것이다

 

 라는 사람도 있었다.

 

 오후쿠(ふく = 히데이에의 모친)는 오오사카[大坂]에 와 있었다. 오오사카 성 밑 비젠지마[備前島]에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저택이 있었다. 그러나 오후쿠는 이 저택에서 살지 않고 오오사카 성내(城內)에 거처를 얻고 있었다. 그렇다고 측실(側室)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후궁(後宮)에는 많은 명문가 출신의 귀부인들이 이었다.

 죽은 주인 노부나가의 딸 중 다섯째인 산노마루도노[丸殿][각주:2], 역시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信包]의 딸인 히메지도노[姫路殿][각주:3] , 오우미[近江] 아자이 씨[氏] 출신인 니노마루도도[丸殿=요도도노[淀殿]][각주:4],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셋째 딸 카가노츠보네[加賀局][각주:5], 오우미[近江] 쿄고쿠 씨[京極氏] 출신인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6],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여동생으로 재녀(才女)라 소문난 산죠우노츠보네[局] 등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다. 오쿠후는 이 화려한 꽃밭에 속해있지 않았다. 그녀는,

 '비젠 님[備前殿]'

 이라 불리며 법체(法體)가 되어있었다.

 나오이에가 죽은 다음 해. 장례식이 공표된 후 관례에 따라 머리를 밀고 흰 옷을 입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법체인 몸을 측실로 삼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성 안에 암자를 짓게하여 거기에 살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때때로 이 암자에 들려,

 

 법체가 되어서 더욱더 아름다워지셨구먼. 나는 여전히 그대가 사랑스럽네

 

 라고 큰 목소리로 말하거나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다시 밤자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구니 모습의 과부에게 밤 시중을 들게 할 정도로 히데요시는 변태가 아니었다. 단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할 뿐이었었고, 그것조차도 이 히데요시라는 남을 기쁘게 하는데 천재적인 인물은 멀리 원정을 나가있을 때조차 정실이나 다른 측실들에게도 그러했듯이 이 오후쿠에게도 자신이나 히데이에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거나 했다. 또한 항상 오후쿠에게,

 

 하치로우만큼 귀여운 녀석은 없지

 

 라고 말하거나 하였다. 그렇다고 이 히데요시의 애정은 꼭 오후쿠에 대한 애정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하치로우 히데이에 자신도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을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듯 하였다. 성격이 시원시원했으며, 말하는 것에도 막힘이 없었고, 행동거지에도 봄바람이 이는 듯 상쾌함에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기 친인척의 아이들이 볼품이 없었으며, 표정이 둔하였고, 언동도 또한 어리석었기에 더욱더 히데이에를 사랑하였다.


 그러면서도 히데요시는 히데이에가 조금 가엾다고도 생각하였. 양자라고는 하여도 일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히데이에에게는 토요토미 가의 상속권이 없었다. 이 점 누나의 아들인 히데츠구[秀次],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인 히데아키[秀秋]에 비해 히데이에라는 양자의 존재에게는 약간의 허전함이 있었다. 그 허전함을 당사자는 물론 느끼지 못했고, 단지 양아비인 히데요시만이 느끼고 있어 느낄 때마다,

 하치로우에게 잘 해주어야지……’

 라고 생각하여 다른 양자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미소도 히데이에에게는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위에 서는 자로서의 교육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히데이에가 13살이 되자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코노에츄우죠우[左近衛中将]에 임관시켜 시코쿠 정벌[征伐][각주:7]에 데려가 아와([阿波]의 키즈 성[木津城] 공격에 참가시켰으며, 2년 뒤에는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8]에 종군시켜 개선(凱旋)한 종삼위(從三位) 산기[議]에 임명해 주었다. ‘산기를 중국에서는 재상(宰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비전재상(備前宰相)]

 이라 불렸다. 15살 때였다.

 이어서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는 불과 18살의 나이로 해군 총사령관을 맡으면서도 대과(大過)가 없었다. 다만 히데요시 자신이 직접 지휘하듯 하였고 또한 가로(家老)들의 보좌도 있었기에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 즈음 히데이에게는 벌써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히데요시의 양녀(養女) 고우히메[姫]였다.

 

 고우히메를 히데이에에게 시집 보내겠다

 

 라고 히데요시가 말하였을 때 히데이에의 행운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고우히메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딸이었다. 토시이에의 딸이라고 하면, 처음엔 마아[摩阿]'[각주:10]라는 셋째 딸이 14살에 양녀가 되었고 이어서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마아의 동생 고우히메를 히데요시가 아직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일 때 양녀로 삼아 손수 길렀다. 히데요시의 고우히메에 대한 애정은 친부모라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가 오다 가문의 부하 장수로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 있었을 즈음에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던 이 꼬마 숙녀에게 전쟁터에서 편지를 보냈다.

 

자가 들어가는 아가씨에게

 

~ 정말로 보고 싶구나. 장난 같은 거 하다가 다치지 마라(날뛰다가 다치면 안돼요~). 또한 건강을 위해서 뜸을 받아라. 이것은 유모에게도 말해 두마. 너는 기특한 아이다. 밥도 많이 먹고 있는지 궁금하구나(언제 함께 먹자꾸나). 어쨌든 니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겠구나. 꼭 이 히메지 성[城]에 부를 테니 맘 편히 먹고 있으렴. 그 때 꽃가마가 필요하다면 준비해 둘 테니 필요하면 말하거라.

 

                                                                                                                                             진중(陣中)에서 

                                                                                                                                                         아빠가

 

 라는 편지였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고우히메가 자랐어도 언니인 마아처럼 손대지 않았고, 그녀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아빠]로 있으려고 하였던 듯했다.

 

 고우히메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남편을 골라주마

 

 라고 말은 했지만, 맘속으로는 일찌감치 히데이에로 정하고 있었다. 양자에게 양녀를 줌으로 해서 토요토미 가에서 히데이에의 위치를 한층 더 강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히데이에는 두 번의 조선 침공[각주:11]에도 참전하였다.

 그 사이 곤츄우나곤[中納言]에 승진하였고 이에 따라,

 '비전중납언[備前中納言]'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1화에 언급했던 다섯 다이묘우[大名]의 도()를 맞추었다 하는 것도 이 즈음일 것이다.

 

 이 즈음부터 히데요시의 육체건 정신이건 눈에 띄게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적통(嫡統) 히데요리[頼]가 태어나 있는 상태였고, 그로인해 히데요시의 모든 관심은 이 갓난아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히데요리 장래의 지장이 될 것 같았던 칸파쿠[白] 히데츠구는 주살(誅殺)되었으며, 히데츠구의 다음가는 지위에 있던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주었다. 남은 것은 히데이에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상속권이 없었던 만큼 히데요시의 사랑은 여전하였고,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히데요시 쪽이 양자 히데이에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모습조차 보였다.

 

 어느 날.

 히데이에를 불러,

 

 히데요리가 15살이 되기까지 나는 어떻게든 살아 있었으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것 같구나. 내 몸에 만일의 경우라도 생긴다면 예전에 내가 고아인 너를 지키며 키워왔던 것처럼 니 동생인 히데요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라고 히데이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히데이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반응이 빠른 젊은이가 평소와는 달리 기분 나쁜 듯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어째서 아무 말 없는 게냐?”

 

 라고 캐묻자 히데이에가 말하길, 그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새삼스레 당부를 하심은 내 마음을 애매하다고 여기셔서 일 것이다. 사나이로서 불유쾌하다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

 그것을 듣고 히데요시는 안심하여,

 역시 하치로우밖에 없구먼

 이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교육자의 입장으로 돌아왔다.

 

 너의 진실함은 알지만 지금의 태도는 좋지 않구나. 오해를 살만하다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다이묘우[大名]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하나 모두가 정치여야만 한다. 정치라는 것은 권모술수의 길이 아닌 자신의 진실함을 남에게 전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하여라. 너에게는 그것이 없다. 지금은 나조차도 너의 진실함에 대해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예전부터 너의 그러한 결함에 대해 걱정이 들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 하나뿐이다.”

 

 라고 말했다.

 

 집은 잘 다스리고 있는가?”

 

 라고 히데요시는 물었다. 우키타 가문[宇喜多家]가로들 간에 서로 반목하여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들썩했다. 히데요시조차 다소는 듣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히데이에는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의 곁에서만 있었던 히데이에는, 오랫동안 토요토미 가문에서만 생활하였기 때문에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나 영지(領地)를 다스림에 어두워, 57만여 석의 처리는 필두(筆頭)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에게 전부 맡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기 가문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무 일도 없습니다

 

 라고 정직히 대답했다. 사실 히데이에는 그렇게 믿고 있었으며, 그 이외에 대답할 것이 없었다.

 이 젊은이는 생각했던 만큼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히데이에가 전쟁터에서는 꽤 용감하였으며 사졸의 통제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내정(內政)에 서투른 듯했다.
 
귀족으로써의 교양은 있었다. 시가(詩歌)에도 능했으며
츠즈미[]도 치고 노우[]도 연기하는 등 궁중 사교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능했다. 그러나 이런 교양이 궁중에서는 도움 되겠지만 우키타 가문을 통솔함에 있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 하치로우를 궁중에서만 머물게 한 내가 잘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교육에 잠깐 후회를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상 우키타 가문 내부 문제에 대해 참견할 정도의 체력도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 여름(1598)에 들어서면서부터 원인불명의 설사가 계속되어 식욕도 잃고 있었다. 다시 올 여름을 히데요시는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오오사카(大坂)의 그 가혹한 열기를 피하기 위해, 그 즈음은 후시미[伏見]의 높다란 곳에 세운 궁궐로 옮겨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웠다. 이 가냘퍼진 체력으로 여름을 지낼 수 있는가 하는 불안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그 불안을 주치의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에게만 은밀히 전했다. 불안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토요토미 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히데요시의 건강만이 토요토미 정권의 영광이었으며 유일한 정치적 근거였고 동력이었다. 그 건강의 몰락과 함께 이 정권도 망할 것이라는 것은 다소 냉정한 눈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의 머리로건 이해할 수 있었다.



 전 시대인 오다 정권의 멸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16
년 전, 노부나가[信長]의 죽음과 함께 망했다.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을 소멸시킴으로써 죽은 주군 노부나가의 권력을 계승해서 토요토미 정권을 성립시켰다. 어떤 사람보다도 당사자인 히데요시가 이 원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이 원리에 의해 히데요시는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고, 그 생명이 꺼져가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반대로 이 원리에 계속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빌었다. 이 원리를 극복하여 아직 갓난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싶었다. 무리라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던 만큼이나 바둥거리듯이 그것을 빌었다. 그런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꽉 차있었다. 히데이에의 가문에 대한 충고를 오랫동안 머리에 둘 정도의 끈기도 관심도 지금의 히데요시에게는 없었다.

 

ps; 많이 늦어졌네요 ^^; 핑계를 대자면 원인불명의 두통으로 금요일부터 오늘 낮까지 고생했습죠..

  1. 히데이에의 아명. [본문으로]
  2.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세 번째 성곽[三の丸]에 거처가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3. 히메지 성에 살고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거처가 두 번째 성곽에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5. 토시이에의 영지(領地)인 카가[加賀]에서 왔기 때문에. [본문으로]
  6. 거처가 후시미 성[伏見城] 마츠노마루[松ノ丸]라는 이름의 성곽에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7. 1585년 시코쿠[四国] 쵸우소카베 가문[長宗我部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8. 큐우슈우[九州]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9. 1590년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10. 상기의 카가노츠보네[加賀ノ局] [본문으로]
  1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03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고있었습니다.(ㅎㅎ)

    역시 제일 밑의 문장이라던가, 문장이 꼬여서 길어지면 어렵더군요.. 히데이에 표정에 관한 에피소드도 어설프게 의역해서 읽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많이 달랐었네요(ㅎㅎ;)

    五자가 들어가는 아가씨에게였었군요(에휴... 이 돌머리;;)

    히데요시의 원인불명의 설사는 지속성의 독을 먹어서 그렇게 됐다는 음모론이 끊이질 않았는데.. 실상은 뭐 노환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건 그렇고.. 히데요시는 양자 포함해서 자식교육이란 능력에서는 낙제점이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04 0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우'가 아니라 '고'로 바꾸어야 겠군요.
    그리고... 그 ~もじ라는 것은 의역입니다. 궁궐 나인들의 말(끝에 접미어로 もじ라고 붙는 것)이 후세에 퍼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히데요시는 획수가 많은 한자는 간단한 동음으로 바꾸는 버릇이 있다고 하니까요.
    ごう(豪) -> ご(五)

    그 히데요시의 독살설은 명의 사자 심유경 계략이었다고 하던거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저도 노환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살이라는 것이 쉬운 것(특히나 단발성이 아닌 지속성이라면 더더욱)이 아닐테니까요.

    천재의 단점이라고들 하죠.
    자기가 해냈으니 남들도 쉽게 해낼 것이라 생각한다는...
    (여담이지만 신선조의 오키타 소우지(沖田 総司)도 남들 가르치는 것은 정말 못했다고 하더군요. 평소 미소를 달고 다니던 사람이 훈련때만 되면 온갖 신경질은 다 냈다고.. 왜 이걸 못해!! 라면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2.08 2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 히데이에.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를 쌓았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09 07: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 방문 감사드립니다. 못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2.10 1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뭘요... 언제나 여기서 좋은 글을 많이 읽고 가네요...저야 말로 감사하죠 ^-^;;

  6.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1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에서 히데이에 지력 정치가 엉망인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 秀家]

1655 11 20일 병사 84.

1572~1655.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적자(嫡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섬기며 천하통일에 공헌. 분로쿠의 역[文禄の役][각주:1] 케이쵸우의 역[慶長の役][각주:2] 공을 세워 오대로(五大老)[각주:3]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의 주력이었다. 그러나 패하여 사츠마[薩摩] 도망 가지만 후에 잡혀서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 유배당했다.









영광에서 좌절로


 우키타 나오이에는 센고쿠[戦国] 효웅(梟雄)으로 공포의 대상이었 우키타 나오이에의 세자(世子), 1572년에 비젠[備前]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태어났다.
 시대는
신흥세력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선봉으로 하리마[播磨]로 진출해 온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세력과 츄우고쿠[中国]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패권을 놓고 싸우던 시기였기에, 그 사이에 낀 우키타 씨()는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 하던 때였다. 결과적으론 히데요시 쪽에 붙게 되어 히데이에는 불과 10살의 나이로 히데요시를 후견인 삼아 가독(家督)을 상속하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얻어서 지은 '히데이에[秀家]'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그의 일생은 토요토미 씨()의 번영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연표(年表)처럼 그의 영달 과정을 적어보면,

  1. 1585(13). 시코쿠[国]의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와의 전쟁에서 데뷔 전을 장식했다.

  2. 1587(15).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씨[島津氏]와의 전쟁에 종군하였고 그 싸움이 끝난 후에는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에 서임(敍任).

  3. 1589년(17세). 카가[加賀] 카나자와 성[金沢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어 있던 고우히메[豪姫]와 결혼.

  4. 1594(22). 분로쿠의 침공[각주:4] 때. 6군의 주장(主將)으로 바다를 건너 벽제관의 싸움에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등과 함께 명나라의 장수 이 여송군을 대파하였다. 이 때의 공적으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서임.

 식으로 항상 토요토미 정권을 지탱하는 중신으로 활약하여, 히데요시에게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을 때는 아직 26세의 청년 다이묘우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히데이에의 영광은 지속되지 않았다.


 1600 9월.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히데이에는 당연히 서군(西軍)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 6천 여라는 최대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방관을 하던 장수들이 많은 서군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서군이 패배함에 따라 히데이에는 명예나 지위를 모두 잃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히데이에는 미노[美濃] 카스카와[粕川] 골짜기에서 이틀간 떠돈 끝에 패잔병을 노리는 노부시[野武士][각주:5] 무리에게 포위 당하지만, 두목인 야노 고로우자에몬[矢野 左衛門]은 히데이에의 인품에 반하여 반대로 히데이에 일행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우키타 가의 가보(家寶)이며 히데이에가 차고 다니던 쿠니츠구[次]의 긴 칼[太刀]을 고로우자에몬이 토쿠가와 쪽에 바쳐서 히데이에가 죽었다고 위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엄중한 탐색을 피하면서 시간을 번 일행은 고난의 도피행 끝에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저택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처()인 고우히메와의 재회를 기뻐할 틈도 없이 히데이에 일행은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의지하여 도망쳤다.


종언의 땅,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


 히데이에 주종(主從) 오오스미[大隈] 키모츠키 군[肝属郡] 타루미[垂水]의 호족인 히라노 씨[平野氏]의 집에 숨겨졌다.


 그 후 1603 9월.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각주:6]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각주:7]의 조명탄원(助命嘆願) 덕분에 사형을 면한 히데이에는 스루가[駿河] 쿠노우 산[久能山]에 유폐(幽閉)되었, 그 후 3년 뒤인 1606 4 적자(嫡子)인 히데타카[秀高], 가신(家臣) 12명과 함께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히데이에 34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큐우후쿠[休福]'란 호()를 칭하고 있었는데 이 때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때 50만석 넘게 영유[각주:8]하고 있던 비젠[備前] 태수(太守)였기에 섬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섬의 대관[代官][각주:9]인 키쿠치 사콘[菊池 左近]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처() 고우히메의 친정 마에다 가문에서는 1614 이후 1년 터울로 생활물자가 보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여 섬사람들에게 보리 빌리지 못하면 생활할 없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패군의 장수가 되었을 죽음을 선택했다면 이러한 고생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이에가 유배생활을 50년이나 계속할 있었던 것은, 산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고 담담히 살고자 하는 인생철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655
11 24일. 84세로 사거(死去)했다.

하치죠우지마 섬[八丈島]에 있는 히데이에의 묘.

  1. 임진왜란. [본문으로]
  2. 정유재란.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5. 무장 농민집단. [본문으로]
  6.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사츠마번[薩摩藩]의 초대 번주(藩主). [본문으로]
  7. 토시이에[利家]의 첫째 아들로 히데이에의 부인 고우히메[豪姫]의 오빠. 카가 번[加賀藩] 초대 번주. [본문으로]
  8. 약 54만 7천석. [본문으로]
  9. 섬의 지방관.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espylaco BlogIcon 하루노부 2007.12.16 16: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 담아갑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7 0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신다고 하여도...링크만 가능케 한지라...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6.29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운의 무장이죠;
    오.. 그런데 꽤 미남상이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2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도 초상화만 본다면 가장 미남이라고 생각합니다. ^^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