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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라텐노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6.20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 센고쿠에서 가장 정의로웠던 명장 (10)
  2. 2008.04.27 대화대납언(大和大納言) -2- (4)

 

 우에스기 켄신의 그림이 야마가타(山県)() 요네자와()()우에스기 신사(上杉神社)에 있는데, 거기에 그려진 켄신은 오히려 온화한 인상이다[각주:1]. 그 귀신과 같이 가열찬 무장의 모습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증언이 전해 내려온다. 켄신과 실제로 만났던 승려가,

 [날카로운 눈빛과 억센 표정을 하여 보는 이를 두렵게 하였다], 카와다 부젠(河田 豊前)이라는 사무라이와 닮았다 - 고 그 용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한 에치고(越後)에서 켄신과 대면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의 사자 사사키 사다츠네(木 定)는 독경(讀經)을 끝내고 나온 켄신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타치(太刀)를 꽉 쥐고 서 있는 그 모습은 오오미네(大峰)의 고키(五鬼)[각주:2], 카츠라기타카마(葛城高天)의 대천구(大天狗)[각주:3]의 화신인가 싶어, 온 몸의 털이 전부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켄신은 풍모뿐만 아니라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진언밀교(眞言密敎)의 엄격한 계율을 지키고 여성은 절대 가까이 하는 일 없이 일생 불범(不犯)”이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켄신은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관음대사(觀音大士[각주:4])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생모 토라고젠(虎御前)의 영향이기도 하였으며, 어렸을 때 부친의 거성(居城)카스가야마(春日山)성(城) 밑에 있는 린센(林泉)()에 맡겨져 명승(名僧) 텐시츠코우이쿠(天室光育)를 스승으로 삼아 엄격한 계율의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중이 되어 소우신(宗心)이라는 호()를 칭하며[각주:5], 카스가야마 성() 내에 비사문(毘沙門), 스와(諏訪), 고마(護摩) 등 세 채의 당()을 지었다.

 

 가혹하고 격렬한 전쟁터에서도 대일여래(大日如來)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목상 등을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전쟁터에 악업, 번뇌퇴산(煩惱退散)의 상징인 [()]의 군기를 휘날렸다. 어디까지나 우에스기의 군세는 [항마(降魔)의 군]이라고 켄신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정신주의(精神主義)의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정의와 질서가 그의 행동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배신, 배반 등이 일상다반사인 센고쿠의 시대에서는 희소가치가 있는 무장이었다. 그런 면에서 인간다운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는 대조적이다.

 1564. 켄신이 에치고(越後) 이치노미야[각주:6](宮) 히코 (弥彦神社)에 봉납한 [타케다 하루노부의 악행에 대해서(武田晴信)]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원문이 확실히 그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거기서는 자신의 싸움은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후, [친아비인 타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를 추방해서는 길에서 걸식(乞食)하게 만들어 효()를 버렸다. 이것은 신불(神佛)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써서 신겐의 악행을 비판하였다.

 

 황실에 대한 존경과 숭배도 두터웠다.

 당시 텐노우(天皇) 가문은 빈곤의 극에 달하여 즉위식 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1553년 당시의 고나라(後奈良) 텐노우(天皇)를 알현했을 때,

 가문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행복. 성은이 하해와 같다

 고까지 말하며 감격하였다.

 

 여성을 싫어하는 도덕가라고 하면 히틀러와 같은 비인간성을 상상해버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지금도 태어난 지방인 에치고는 물론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적측인 카이(甲斐)에서까지 인기가 높다. 그 중에서도 숙적 타케다 신겐에게 소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568년 신겐이 스루가(駿河)에 침입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이때 스루가의 이마가와 지자네(今川氏)와 사가미(相模)호우죠우 우지야스( 氏康)가 동맹하여 카이(甲斐)로 들어가는 소금을 국경에서 막아버린 것이다. 켄신에게도 에치고의 소금을 들여보내지 말라는 요청이 왔다.

 하지만 켄신은 신겐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겐)과 싸울 때는 활과 화살이지, 쌀과 소금으로 싸우겠는가?]

 라고 말하며 시나노로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보증할 수 없지만, 토우쿄우(東京) 국립박물관에는 신겐이 소금을 보내준 답례로써 보냈다고 하는 타치(太刀)가 전시[각주:7]되어 있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사서는 전해주고 있다.

 1573. 켄신 생애의 라이벌인 타케다 신겐이 죽었을 때의 일이다. 켄신은 본거지인 카스가야마 성()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뜨스운 물에 밥 말아먹고 있던 중이었지만, 갑자기 젓가락을 놓더니 입 안에 있던 것을 뱉어내고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명장이 죽었구나. 영웅인걸이라는 것은 신겐이야말로 어울리는 것. 칸토우() 무사의 기둥이 쓰러졌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가중(家中)에 명하여 3일간 상()을 치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혹은 이때 켄신은 - 이것은 신겐을 존경하는 의미가 아닌, 어디까지나 [무사의 신에 대한 예의로써 하는 것이다]라 말했다는 기록한 책도 있다.

 

 신겐의 죽음은 우에스기에게 있어서 타케다 공략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일거에 시나노로 쳐들어 가 타케다의 군세를 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노신(老臣)들은 그렇게 켄신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켄신은,

 젊은 카츠요리()가 이제 막 대를 이었는데 그걸 노리다니,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고 말하며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켄신은 여인을 가까이하지는 않았지만 술은 사랑한 무장이었다. 지금도 우에스기 신사에 애용했던 큰 술잔이 있다. 술안주로는 매실장아찌(우메보시=梅干)를 좋아했다고 한다.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화근이 되어 뇌일혈(腦溢血)로 죽었다.

 

 켄신의 생애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숙적 신겐과의 일기토였다.

 1561 9 9일 한밤 중. 우에스기 군은 은밀히 대군을 움직여 치쿠마가와(千曲川) 강을 건너고 있었다. 사이죠산(妻女山)에 진을 치고 있던 켄신을 기습하고자 한 신겐의 작전을 간파한 켄신은, 타케다 군의 허를 찔러 산을 내려온 것이었다. 산정에는 여전히 지금도 야영하고 있다는 듯이 화톳불을 활활 태워두었다.

 

 우에스기 군이 도하작전을 끝내고 카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전투 태세에 들어간 것은 다음 10일 새벽이었다. 짙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서서히 안개가 겉혔다.

 카와나카지마의 중앙 하치만바라(八幡原) 들판에 진을 치고 있던 타케다의 본진에서는, 사이죠산 기습의 소식이 언제 도착하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안개 건너편에서 갑자기 우에스기의 대군이 나타난 것이다.

 켄신은 특기인 [쿠루마가카리(車懸) 전법]으로 노도와 같이 타케다 진영을 덮쳤다. 타케다의 군세는 필사적으로 방어하였지만 차츰 밀리게 되어 신겐의 본진도 위험해 졌다.

 마침내 우에스기 군은 신겐이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켄신은 돌격하였다. 십 수기와 함께 신겐의 본진을 목표로 질주한 것이다. 감색의 갑옷에, 금색의 투구를 색의 명주로 감싼 모습이었다. 신겐은 칼을 뽑을 틈도 없었다. 걸상에 앉아 있는 신겐에게 마상에 있던 켄신이 칼을 내리쳤다. 그것을 신겐은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다. 켄신의 칼은 계속 신겐을 노렸다. 그때 마침 신겐의 근시(近侍)인 하라 오오스미노카미(原 大隅守)가 달려들어 켄신을 향해서 창을 찔렀지만 빗나가 말의 엉덩이를 맞추었다. 놀란 말을 켄신을 태운 채로 질주하여 신겐은 위험에서 목숨을 건졌다.

 이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타케다 측의 사상자 17000, 우에스기 측은 9000이라는 격전이었다고 한다.

 

 신겐 사후에 켄신의 전투로 유명한 것은 나나오(七尾)성(城) 공략일 것이다. 나나오 성()은 해발 300미터 높이의 험준한 곳에 있는 성이었다. 이를 켄신은 실로 40여 일을 소비하여 겨우 함락시킨 것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켄신은 카가(加賀) 테토리가와(手取川) 천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5만 대군을 물리쳤다.

 [우에스기와 만나서는 오다도 명성에 먹칠하는 강, 달려드는 켄신에 날라 튀는 노부나가]

 (上杉に逢うては織田も名取川( 手取川 역자 ), はねる謙信逃るとぶ長( 信長 역자 ))

 라고 후세에 쿄우카(狂歌)가 만들어질 정도로, 오다의 군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에스기 켄신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켄신의 죽음은 불시에 찾아왔다.

 1578 3 9.

 칸토우 출진 준비가 모두 끝나있었다. 노토(能登), 엣츄우(越中), 카가(加賀)를 평정한 지금, 남은 화근은 칸토우 뿐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켄신은 갑자기 기절하여, 인사불성인 채로 4일간을 보낸 후 생애를 마쳤다. 49세였다.

 

 사세구()로는,

한 때의 영화는 한 잔의 술, 49년은 한 번 취한 것.

삶 모르고 죽음 또한 모른다. 달을 희롱하는 이 또한 꿈과 같도다

一期ノハ一盃ノ酒、四十九年ハ一ノ間、

生知ラズ死又知ラズ、月是又夢中ノ如シ

 라는 한시(漢詩)가 남아 있다.[각주:8]

 

[우에스기 겐신(上杉 謙信)]

1530 1 12. 에치고(越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의 아들로 태어났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후에 마사토라(政虎)[각주:9], 테루토라(輝虎)[각주:10]로 바꾸었다. 형 하루카게(晴景)나 일족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각주:11])와 싸웠지만,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의 중재로 슈고다이를 이어받고 에치고 카스가야마 성주가 되었다. 1552년 망명해 온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서 우에스기(上杉)’라는 성()과 칸토우칸레이(管領)의 역직(役職)을 물려받았다. 타케다 신겐과의 카와나카지마 결전은 다섯 번에 이르렀다. 엣츄우(越中)를 평정하고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진공해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대결하여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578년 병으로 쓰러졌다.

  1. 글 머리에 있는 그림. [본문으로]
  2. 오오미네(大峰)산(山)은 도를 닦는 슈겐도우(修験道)의 도를 닦는 곳으로 유명한 곳으로, 그런 사람들을 수호하는 신으로 고키(五鬼)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다른 이름으로는 ‘카츠라기타카마보우(葛城高天坊)’라고도 한다. 일본 귀신인 천구(텐구=天狗) 중에서도 더욱 강력한 천구 한다. [본문으로]
  4. 대사(大士)는 보살(菩薩)의 존칭. 즉 관음보살(觀音普薩)을 말한다. [본문으로]
  5. 소우신이란 호를 칭하기 시작한 것은 1553년 켄신 나이 23살 때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텟슈우소우쿠(徹岫宗九)에게 사사받은 후에 쓴 법호이다. [본문으로]
  6. 그 지역(国)에서 가장 격이 높은 신사를 말함. [본문으로]
  7. ‘塩どめの太刀(소금막기의 칼)’이라는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죽기 한달 전에 만든 시라고 한다. [본문으로]
  9. 1560년에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의 직책과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의 가독을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 물려받을 때 노리마사에게 '마사(政)'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0. 1561년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테루(輝)'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1. 켄신의 후계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아비이며 켄신에게는 누나(仙桃院)의 남편 즉 매형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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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0 0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향년 49세라면 노부나가와 같군요. 그러고보니 일부 게임에서 여성화 된 우에스기 캐릭터는 피규어까지 나왔다죠... --a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0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장실 - 기절이라면 역시 뇌졸중 이겠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0 1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맹꽁서당님//란스에 나오는 켄신 양은 귀엽더군요~

    고사천사님//뇌내출혈(뇌일혈)과 뇌졸증은 다른 것인가요? 어느 쪽이건 전 의학 쪽은 '닥터 K'이후로는 관심을 끊은 상태라...^^;
    사족으로... 어떤 사람은 알콜 중독에 이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카게카츠의 암살설, 노부나가의 암살설 등등... 이 양반도 좀 죽음에 여러 설이 있더군요.
    어느 것이나 공통점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 후 4일간 한번도 깨어나지 않은 뒤 죽었다.. 정도인것 같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1 1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로 뇌출혈이 일어난 환자를 한번 옮겨봤는데 증세가 정말 순식간에 나빠지더군요, 변기에 머리를 대고 쓰러져 있었는데, 처음에 부를땐 반응을 하던데 구급차에서 의식 잃고, 단카에서 베드로 옮긴 뒤 보호자 기다리는 동안 의사가 부르더니 '지금 돌아가시기 직전인데 보호자 아직 안오는가요?' ..래더군요;

    그래도 4일 간게 켄신의 정신력 덕분 아니었을까..도 싶습니다마는..(아.. 이건 켄신빠로서의 생각이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yat2004 BlogIcon 개구쟁이 2008.06.21 15: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곡된 국사, 세계사를 바로 알리는 카페


    우리 인류는 오래전부터 역사를 기록하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수십, 아니 수백 수천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역사 자료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중에는 사실과 거짓이 들어있다.


    역사에는 기본원칙이 4가지정도 있다.

    1.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며,
    2. 역사는 역사가의 양심에 달렸으며,
    3. 역사는 주관적인 생각이자 입장, 느낌이고,
    4. 역사는 정확한 역사 기록이 아닌, 소문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역사가 또한 3종류로 분류된다.

    1. 거짓말하는 사람
    2. 잘못 알고 있는 사람
    3. 알지 못하는 사람


    우리 역사에는 수 없이 많은 날조, 과장, 왜곡이 되어있다.
    국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세계사 지식조차 거짓으로 꽉 차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국사 왜곡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정보화 시대이므로 세상을 넓게 바라보아야 한다. 포털 사이트 중에는 왜곡된 국사를 밝히는 카페는 수 없이 많다. 물론 그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만,
    우리 카페는 국사, 세계사 둘다 동시에 왜곡, 날조된 역사를 재평가 재조사하는 곳이다.

    노예해방자라고 알려져 있는 링컨, 비폭력 평화주의라고 알려진 간디,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 바스티유 감옥, 히틀러, 루즈벨트, 카이사르의 명언, 우리가 자주 보는 세계지도... 등등 수 없이 많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해 숨겨진 진실을 말하며, 알리려 한다.

    http://cafe.naver.com/nazzis - 승전국이기 때문에 파묻히고 날조, 왜곡 과장된 역사를 전 세계에 바로 알리는 카페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1 1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생과 사의 순간을 많이 접하셨겠군요. 안타까운 장면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근데 그런(켄신빠) 말씀하시면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섭해할 것 같습니다만..^^; )

    개구쟁이님//방문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하시는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22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이 자기 죽을 때는 아는 모양입니다 미리 사세구를 지어놓은 것을 보면말이죠
    아님 평소에 지어놓는게 그 시절엔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언제 죽을지모르는... 생과 사가 항상 함께한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3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세구로 지은 것이 아니라...
    그냥 만든 시인듯 합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사세구라고 그냥 붙인 듯 하고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16 18: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16: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20년이 지났다.
 
마치 하늘나라에 사는 것처럼 모든 환경도, 운명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을 계승하여 천하의 중앙부를 얻고, 쿄우[]를 발 밑에 두었으며, 오오사카[大坂]에 본거지를 두어 오나카[仲]는 그 성에서 수많은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치쿠아미[竹阿弥]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은 사지 휴우가노카미[佐治 日向守]라는 하시바 정권[羽柴政権]의 조그만 다이묘우[大名]의 부인이 되었고, 코이치로우 히데나가[小一 秀長]는 종오위하(從五位下) 하시바 미노노카미[羽柴 美濃守]라 칭하며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의 2개국 영주로써 히메지 성[城]을 거성(居城)으로 하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군
 
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단 오나카가 갑자기 이런 귀족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1년 전,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20만석의 다이묘우[大名]에 봉해졌을 때, 오나카는 기후[岐阜]의 저택에서 나가하마 성[長浜城]으로 옮겨와, 그 호반(湖畔)의 성()에서 처음으로 기와집(御殿)에 살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11년이었다.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올해 즈음부터 공가(公家)가 되고자 하는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거주구역[奥]을 공가(公家) 풍으로 바꾸기 위해서 쿄우[京]에서 공가(公家)의 딸들을 다수 여관(女官)으로 들여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화장실의 관례까지 바뀌어 버렸다.

 할멈은 혼자 갈 테다

 고 오나카가 말해도 시녀들은 허용치 않고 몇 명인가가 따라 붙어서는 입구에서 공가의 관례에 따라 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을 본 것의 떨어지는 장소는 항아리가 아니라 모래상자였다. 모래 위에 그것이 떨어지면 어떤 사람이 와서 그것을 가지고 가 버렸다.

 저건 거름으로 쓰려는 것인가?”

 하고 오나카는 어느 날 쿄우[]의 궁궐에서 온 여관에게 물었다. 백성으로 살아온 오나카는 저것을 채소밭에 뿌리는 건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요 하고 여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이치쿠사이가 살펴 봅니다

 하고 말했다. ‘수이치쿠사이라는 것은 뭘까? 일본말로 쿠사이는 냄새가 난다는 것을 뜻하기에, 웃기게도 오나카는 왠지 냄새 나는 것을 담당하는 관리를 그렇게 말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쿄우[京]의 궁정시의(宮廷侍醫)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라는 사람이 요즘 오오사카로 내려와 히데요시 일족의 시의(侍醫)가 되어 있었다. 그 호() '수이치쿠사이[雖知苦]'라고 하였다. ()기는 하지만() 답답하다()는 의미로 붙인 호일 것이다.[각주:1]

 갑작스런 영달이 오나카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또 있었다. 어느 날,

 마님께선 옛날에 궁중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여관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오와리[尾張] 고키소[御器所] 마을에서 가진 땅도 없이 소작이나 부쳐먹던 백성의 자식으로 태어나, 나카무라[中村]에 사는 야에몬[弥右衛門]의 배필이 되어, 다음 남편으로 치쿠아미를 들였다. 그랬을 뿐인 전반생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자, 이런히데요시가 말하고 있다고 했다.
 
저 녀석이?’
 
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녀석도 환경이 갑자기 변했기 때문에 미친 것은 아니겠지? 더 캐묻자 이야기는 정말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야기에서
 
오나카는 옛날 궁중에서 물을 담당하는 하녀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텐노우[天皇]인 고나라텐노우[後奈良天皇]가 오나카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오나카의 소매를 잡아 끄셨다. ‘갑자기 옥체(玉體)에 다가가 받든 적도 있다고 히데요시는 말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 오나카는 텐노우의 씨를 품고 태어난 고향 오와리로 돌아와서 낳은 것이 이 히데요시다 고 말하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것을 히데요시가 입 밖으로 낸 것은 쿄우토[京都]의 세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의 저택에 있을 때였다. 히데요시는 입궐할 때, 이 저택을 옷 갈아입는 장소로 빌리고 있었다. 들은 사람은 마츠나가 테이토쿠(松永 貞)였다.

 마츠나가 테이토쿠는 왕년에 쿄우()에서 위세를 떨쳤던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아들로[각주:2], 히사히데 멸망 후에는 무사(武士)를 버리고 쿄우[京]에서 렌가[連歌], 하이카이[俳諧]에 전념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공가(公家) 사회에 섞여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이 테이토쿠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둠으로 인해 공가(公家)의 소식도 알고, 조정의 정보도 알 수가 있었기에 쓰임이 좋았다. 이 날도 테이토쿠를 근시(近侍)시키고 있었다. 이날 옷을 갈아입고 기둥에 기대어 휴식을 하고 있던 중에,

 나의 모친 젊었을 적에……”

 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테이토쿠는 그것이 믿기건 믿기지 않건 제쳐두고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우선 그 이야기대로 필기하는 한편 사람들에게도 퍼트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오나카는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 후 히데요시가 키슈우[紀州] 정벌을 끝내고 오오사카 성으로 귀환했다. 이 효자(孝子)는 귀환해서 반드시 제일 먼저 오나카와 대면하여 모친의 건강을 묻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때 오나카는 일부러 사람들을 물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너는 감히 궁궐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구나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목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말을 퍼트렸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 일을? 허영심 때문이냐?”

 고 물었다. 아무리 오나카라도 이 자신이 낳은 자식놈의 심사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노부나가)님을 보시길

 하고 히데요시는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은 옛 주인의 예를 들었다. 노부나가의 선조도 가계(家系)가 애매했다. 오다 가문의 선조는 에치젠[越前] 니부 군[丹生郡] 오다 신사[織田(神社]의 신관(神官)으로, 노부나가부터 거슬러 올라가길 백 수십 년 전에 오와리로 흘러와 호족이 되었고 차츰 세력을 길렸다. 족성(族姓)은 후지와라 씨[藤原氏]라고 한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는 처음엔 후지와라 씨[藤原氏]를 칭하고 있었지만, 천하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을 즈음 갑자기,
 
-
우리 집안은 헤이시[平氏]이다. 타이라노 스케모리[平 資盛]의 후손이다[각주:3].

 라며 그 선조를 변경하였다. 이유는 겐지[源氏]인 아시카가 씨[足利氏]를 멸망시키고 그 천하를 잇기 위해서는 헤이시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당시 호족들은 [겐페이 교대사상(源平 交代思想)]이라는 것[각주:4]을 믿고 있었기에, 노부나가는 그 설을 이용하여 천하에 오다 대세론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노부나가는 유우히츠[祐筆]에게 명령하여 족보를 만들게 하였지만, 어째서 오다 가문이 헤이시[平氏]인 것이냐는 점에서 힘들었다. 그래서 타이라노 치카자네[平 親実]라는 가공의 인물을 창조하였다.

 치카자네를 단노우라[浦][각주:5]에서 죽은 타이라노 스케모리의 둘째 아들로, 헤이케[平家]가 멸망할 때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은 아기였지만, 그 어미가 품에 안고 오우미[近江]도망쳐 츠다[津田] 아무개의 부인이 되었다. 그 후, 에치젠[越前] 오다 신사의 신관 오다 씨[織田氏]가 치카자네의 운명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후사로 삼았다 는 것이 노부나가가 만들게 한 오다 가문의 헤이시 전설이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경우는 그러한 전설도 만들지 못할 정도로 비천한 출신이었다. 이럴 경우 히데요시는 겐지[源氏]를 칭하고 싶었을 것이다. 헤이시[平氏]인 노부나가 다음은 겐지인 히데요시여야 했다. 겐지라면 궁정의 전례에 따라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軍]에 임명 받아 막부(幕府)를 열 수가 있었다.[각주:6] 미카와[三河]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는 노부나가의 개성(改姓)과 비슷한 시기에 개성[각주:7]하여 족보를 창작해서는 겐지를 칭하고 있었지만 히데요시의 경우는 이제 와서 그것이 불가능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될 수 없는 이상, 히데요시는 아예 공가(公家)가 되어 칸파쿠()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각주:8] 칸파쿠는 셋케[家]의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 점이라면 편법을 써 누군가 친한 공가(公家)의 양자(養子) – 결국 키쿠테이 다이나곤(菊亭 大納言)의 유자(猶子)[각주:9]가 되었지만[각주:10]가 되어 버리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로 명문가에 들어간다고 하여도 자신의 출신이 지금과 같아서는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자신이 텐노우[天皇]의 씨라는 풍설을 유포시켰다.

 물론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래도 좋았다. 히데요시 자기도 그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묻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크게 한번 웃고 그 자리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치부할 생각이었다. 즉 후지와라 공가(公家)의 양자가 될 때까지의 시간 동안,
 
-
세간에서는 그렇다고도 한다.
 
라는 정도의 풍설만 만들어 퍼트려 두면, 형식 중시인 궁정은 히데요시라는 남자를 받아들이기 쉽게 될 것이다. 이 텐노우의 씨라는 설은 그것만을 위해 쓰려고 창작한 것으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모친이 트집을 부려오면 오히려 히데요시 자신이 곤란했다.

 너에게는 누나가 있지 않느냐

 라고 오나카는 말했다. 그 누나가 죽었다면 모를까, 지금 남편과 함께 아와[阿波]의 명족 미요시 씨[三好氏]의 성()을 잇고 있으며, 현재 그 아들 히데츠구[秀次]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오나카가 앳된 소녀일 즈음에 텐노우[天皇]의 씨를 품고 오와리[尾張]로 돌아왔다면, 이 누나의 존재가 이상해지지 않느냐? 아이가 있는 앳된 소녀라면 이야기의 설정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하하~”

 히데요시는 웃었다. 어떻든 상관 없는 것이다. 형식적인 것을 좋아하는 궁정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만들었을 뿐인 동화 같은 이야기에 딱 들어맞는 설정붕괴건 뭐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니 동생 코이치로우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건 치쿠아미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너만이 텐노우(天皇)의 아드님이신가?”

 오나카는 자못 무서운 말이라도 들을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가 낳은 아이이면서 이 야에몬의 씨로 낳은 자식은 꼬꼬마일 때 가출해버렸던 만큼 예상도 할 수 없는 인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치쿠아미의 씨인 코이치로우 히데나가는 성인이 될 때까지 오나카가 직접 키웠으며, 저런 형과 비교해 보면 어쩜 이렇게 솔직하고 귀염성이 있는 남자란 말인가……

  1. 斎라는 글자의 의미에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호에 많이 쓰였다. [본문으로]
  2. 사실 손자라고 한다.(이것조차 추측) [본문으로]
  3. 타이라노 스케모리는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서 무사의 모범이라고 하는 타이라노 시게모리[平 重盛]의 둘째 아들. 여담으로 시게모리는 무가(武家)로서는 처음으로 다이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첫째아들. 즉 스케모리는 키요모리의 손자. [본문으로]
  4.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교대로 천하를 쥔다는 사상. 카마쿠라 막부 쇼우군 가문[鎌倉幕府将軍家](겐지) -> 카마쿠라 막부 싯켄 호우죠우 가문[鎌倉幕府執権 北条家](헤이시) -> 무로마치 막부 쇼우군 아시카가 가문[室町幕府将軍家 足利家](겐지). [본문으로]
  5. 겐페이 쟁란 최후의 전투. 해전(海戰). [본문으로]
  6. 겐지[源氏]만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노부나가의 경우 조정에서 칸파쿠[関白],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중 아무 거나 하나 되라는 말을 들었다.(三職推任問題) [본문으로]
  7. 후지와라[藤原]에서 겐지[源氏]로. [본문으로]
  8. 실제로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보다 칸파쿠[関白] 되는 것이 훨~~~~씬 어렵다. [본문으로]
  9. 성이 바뀌지 않는 등 계약에 따른 양자 관계. [본문으로]
  10.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키쿠테이 가문[菊亭家]은 칸파쿠가 될 수 없는 세이가케[清華家]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히데요시는 셋케[摂家] 필두인 코노에 가문[近衛家]에 유자로 들어갔다. 키쿠테이는 그 코노에 가문과 히데요시를 연결해 주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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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27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 이번 편에서는 히데나가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7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 끝에 솔직하고 귀염성 있는 남자라고...^^;
    다음 편은 본격 히데나가 이야기입니다(원래 이번 편 자체가 히데나가긴 하지만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28 2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혁신 플레이 하다보면 키쿠테이공이 자꾸 헌납하라고 시쯔코이하게 불러대서 초반에 귀찮았던(이라고 말하고 힘들었던 이라 읽는다) 기억이..

    아무튼 고노에가의 유자로 히데요시가 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일제 강점기 때의..(뭐 실권은 없었다지만) 먼 후손(..이라고 말하면 비약일테지만)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떠오르네요. 나름대로 선조의 유지를 이은건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30 0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熙)라는 수상까지 만들었으니, 그걸로도 코노에 가문은 성공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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