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검은 백합 한 송이
라는 편지가 네네()에게 전해진 것은 1587년의 한창 더울 때였다.
근시일 내에 보내겠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낸이는 말하고 있었다.
 
정말일까?’
 
네네는 처음엔 그 목록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합(百合)이 검다니 -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너무 괴이했다.

 뭔가의 착오겠죠

 라고 네네는 시녀(侍女)들에게도 말했다. 그녀는 남편인 히데요시[秀吉]가 그러했듯이 세상의 괴이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네네[々], [々]라고도 쓴다. 네이코[寧子]라고도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귀족이 되면서부터였다. 귀족의 여성은, 예를들면 '켄레이몬인 토쿠[門院 ][각주:1] '식으로 子자가 붙는다. 남편 히데요시가 칸파쿠()가 되었을 때, 칸파쿠의 정실(正室)은 키타노만도코로[政所]라고 불리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간(世間)에서 그리 불렸다. 그 즈음 궁정의 공식 문서에서는,
 
[
토요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
 
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대해서 그녀 자신에게 어떤 주체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吉이라는 글자가 복스럽고 좋다는 뜻에서 그 글자가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네네가 어떤 글자의 이름으로 쓰여지건 그녀가 종일위(從一位)라는 여성으로써 최고의 위계(位階) 소유자이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가정과 후궁, 여관(女官)들의 총지배자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목록을 헌상한 사람은 삿사 나리마사[ 成政]였다.
 
나리마사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범죄자였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토박이 가신(家臣)이며, 노부나가[信長]에게 그 무용(武勇)과 강직(剛直)함을 사랑 받아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군의 장수가 되었다. 노부나가 말년에는 호쿠리쿠 탄다이[北陸探題[각주:2]]였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막하(幕下)에 배속되어 엣츄우[越中] 일국()을 소유하는 신분이 되었다.
 
노부나가가 죽어 호쿠리쿠의 시바타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가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웠을 때, 나리마사는 당연하게도 카츠이에 측에 서서 히데요시에게 대항하였다. 단순히 정치상의 소속으로 그렇게 되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 인물만큼이나 극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한 옛 오다 가문의 장수도 드물었다.

 히데요시는 호쿠리쿠를 제압하고 엣츄우[越中]로 진격해 들어가 나리마사를 항복시켰지만, 이 정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하는 인물의 목숨을 이외로 살려주었다. 세상은 히데요시의 도량에 놀랐는데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나리마사 자신이었다.
 
어째서 내 목숨을 살려준 것인가?’
 
라는 의문은 나리마사와 같이 단순하고 목이 뻣뻣한 인물에게 있어서는 생애 풀 수 없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보다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였다. 자신을 혐오하는 나리마사까지 죽이지 않았다는 평판은 천하로 널리 퍼져 나가, 그것을 전해들은 여러 지역의 대항자(對抗者)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성을 열고 활을 땅에 던지며 복종해 올 것이다. 그런 효과를 히데요시는 기대했다. 이 효과를 더욱 크게 하기 위해서 나리마사에게 엣츄우의 일개 군()을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놀라 자빠졌다. 거기에 이어 큐우슈우[九州] 정복 후, 일본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라고 일컬어지는 히고[肥後] 50여만석을 나리마사에게 주었다.
 
어째서 이 정도로 후은(厚恩)을 받는 것인가?’
 
라고 나리마사는 생각하여, 이 인물 나름대로 겨우 답을 낸 것이 네네의 존재였던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뒤, 나리마사는 잠시 오토기슈우[御伽衆[각주:3]]로서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섬기고 있었다. 이 즈음 네네에게도 배알(拜謁)하였고 또한 선물도 보냈다.
 
이 부인(婦人)에게 허술히 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나리마사에게 있었다. 일단 패해서 살아남은 인물인 만큼 그런 종류의 감각은 오히려 남들보다도 더 날카로워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사(人事)에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모신(謀臣)쿠로다 죠스이[田 如水]나 초창기부터 선봉대장(先鋒大將)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등이 아닌, 이 키타노만도코로라는 것을 나리마사도 알게 되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나가하마[長浜]의 꼬꼬마 코쇼우[小姓] 때부터 손수 길러 어렸을 때의 싹수부터 꿰뚫어 보아 일치감치 히데요시에게 추천한 것이 그녀라는 소문도 있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나리마사는 많이 듣고 있었다. 히데요시도 그녀의 인물 감정에는 신용을 하고 있었으며, 항상 그것을 존중하였고 그 의견을 허술히 하지 않았다. 토우키치로우[藤吉[각주:4]]였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토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와 그녀의 합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네는 명랑한 성격에 더구나 거드름 피우지 않았고 조금도 권세를 휘두르는 일 없는 부인이었지만, 그러나 단 한가지 버릇이 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되어서도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가문 내의 인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여 인사(人事)에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평가에 사심이 없고 적확(的確)하다는 점에서 히데요시도 그것을 존중하여 때로는 상담하거나 하였다. 자연히 그녀의 위복(威福)과 다정함을 우러르는 무장(武將)의 무리가 형성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카토우 키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거기에 그녀의 양갓집의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은 그 살롱(salon)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삿사 나리마사가 자신의 기괴할 정도의 영달이 어쩌면 키타노만도코로덕분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것도 이런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저 부인은 나 같은 놈에게 호의를?’
 
이라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았다. 네네의 남성에 대한 호의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어, 궁중에서 사교(社交)가 뛰어난 인물보다도 전쟁터에서 무용이 뛰어난 자에 대한 평가가 후했다. 남자의 와일드함과 강직함을 사랑하였고, 예를 들어 그들이 저돌적인 것으로 인하여 실패를 하였다고 하여도 그녀는 오히려 그 실패를 미덕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언젠가 두서너명의 무사(武士) '면밀하지 못한 자이다'라는 이유로 추방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듣고 그들의 위해서 여러 번 옹호하여 결국에는 구해 준 적도 있었다.
 
그녀의 아래에 모이는 무장들의 무리는 이윽고 무단파(武斷派)라는 인상을 세상에 끼치기에 이르는 것도 거슬러올라가면 그녀의 그러한 기분에 의한 것일 것이다.

 나리마사는 그런 점에서 자신과 같은 남자가 키타노만도코로의 호감을 얻고 있다는 이유를 알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나리마사는 그녀나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런 점에서도 다소의 경향이 있어, 토요토미 가문에 많이 있는 오우[近江] 사람들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자신과 같은 오와리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친근감을 보였다. 오와리 서부 카스가이 군[春日井郡] 히라 촌[比良村] 출신인 삿사 나리마사에 대해서는 - 이것만으로도 네네에게 타인(他人)이라 생각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하였을 것이다.
 
이 호의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
 
고 나리마사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 인사(人事)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갖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와의 유대(紐帶)를 강하게 해 두는 것이 앞으로 먼 지방에서 생활하는 몸으로써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보내야 좋을지에 대해서 나리마사는 곤혹해 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물욕(物慾)이 없는 것에 더해 지금의 신분이라면 무엇을 보내건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다. 깊게 생각한 끝에 나리마사는 자신이 예전에 지배하고 있던 엣츄우[越中]의 명산(名山) 타테야마 산[立山]의 높은 곳에 검은 백합이 핀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진귀한 꽃은 없었다. 엣츄우에서조차 검은 백합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어, 기껏해야 쿠로베[部] 계곡에 사는 사냥꾼이나 타테야마 산의 권현(權現[각주:5])을 존숭(尊崇)하는 수행자들 몇몇이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정도였다. 나리마사는 이 검은 백합을 보내고자 하여, 한때는 자신의 부하이기도 했던 엣츄우 지역의 무사들에게 급사(急使)를 파견하여 그 채집을 의뢰하였다. 진귀한 것이라고는 하여도 현지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에게 부탁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그루를 얻어서는 그것을 통에 넣어 오오사카[大坂]로 운반시켰다. 꽃은 뜨거운 날씨를 싫어하기 때문에 수송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힘이 들었다. 그것이 오오사카에 있는 나리마사 저택에 도착하자 나리마사는 곧바로 그 중 한 송이를 금(金)으로 그림이 그려진 검은 옻칠을 한 통에 꽃꽂이하여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서(秘書)인 늙은 비구니 코우조우스()에게 보내었다. 코우조우스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두지 않고 곧바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방으로 가지고 가, 그곳의 도코노마(床の間)에 놓았다.

 이것이 편지에 있던 검은 백합인가……”

키타노만도코로는 말을 입에 머금은 채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목을 쭈욱 내밀을 수 있을 만큼 내밀어 꽃에 몰입되었다. 검다……기 보다 엄밀히 말해 검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했던 칠흑의 꽃잎보다도 그 자연스런 색조가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빛 속에서는 선명하게 검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는 통통한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므츠지쥬우[従]님은 참으로 친절하시구나

 라고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리마사는 이 당시, 하시바 성[羽柴姓]을 하사 받아[각주:6] 므츠노카미[守]가 되어 지쥬우[従]에 임명 받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하시바 므츠지쥬우(羽柴 陸)라 통칭되고 있었다.

 오히려 무사(武士)는 이래야 하는 것이죠

 라고 목소리를 적셔서 말했다.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속에 이런 친절함을 가진 인물이야말로 오다 가문[織田家]의 하급 무사 가문에서 자라난 그녀의 미의식(美意識)에 걸맞는 무장상(武將像)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히데요시가 총애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우미[近江] 계의 봉행 나부랭이들에게 이렇게 빛과 색깔을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속으로 비교해서 더욱더 나리마사라는 인물을 중히 평가하며,

 역시 사람에게 깐깐한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각주:7]]님의 눈에 든 사람이구나

 라고 말했다. 거기에 얄밉다고 할지…… 엣츄우[越中]에서 수백 리 길의 산과 강을 오르고 건너게 한, 이 꽃을 단 한 송이만 보낸 나리마사의 생각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노력과 비용 속에서 일편의 와비[[각주:8]]를 찾아낸 나리마사는 평소,

 졸자(拙者)는 차()를 모릅니다

 라고 말했으면서도 이것은 다도(茶道)의 극의(極意)가 아닌가?

 세상에 검은 백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겠죠

 이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으면는 생각에, 이 검은 백합을 위한 다회(茶會)를 열고자 그 준비를 명했다. 그녀가 대접해야 하는 주인(=테이슈(亭主))이기는 했지만, 다회를 실제로 운영하는 접대(=시타토리모치(下取持))에는 사카이[]의 모즈야[屋]의 젊은 부인이 맡았다. 모즈야의 부인은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딸 '오킨[おきん]'을 말하며,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부인들에게 다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다회는 성공하여 큰 평판을 얻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후궁에 있는 귀부인(貴婦人)들로 당연히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부인들은 모두 이 높은 곳의 눈에서만 핀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에나 나오는 꽃에 감탄의 목소리를 내며 약속이라도 한 듯,

 눈에 복을 받을 수 있어 일생의 영광이옵니다

 라고 입을 맞추었다.

 후세(後世).
 
이 다회에는 이야기가 더 추가되었다.
 
이 이야기에는 요도도노[淀殿]를 등장시키고 있다. 요도도노도 이 다회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는데 미리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거기에 한 번 더 궁리하여 자신도 수하를 엣츄우[越中]에 파견하여 검은 백합을 채집시켰다. 엣츄우[越中]는 삿사 나리마사 다음의 다이묘우[大名]를 두지 않고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으로 삼고 있었다. 직할령의 지배는 오오사카[大坂]의 봉행(奉行)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이 봉행들이야 말로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 요도도노를 보호자로 우러르고 있는 오우미[近江]계의 문관(文官)들로, 이 점 그녀에게 있어서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렇게 채집시킨 것이 아직 오오사카에 도착하기 전에 요도도노는 키타노만도코로가 주최한 다회의 손님이 되었다. 다른 손님들은 한 송이의 검은 백합에 이 세상의 신비에 놀라움을 보여 주었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만은 예외였다.
 
조용히 그것을 지긋이 본 후 형식적으로만 찬미하였다. 이 담담한 태도가 키타노만도코로를 의아케 하였다. 원래 둔감한 것일지도 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요도도노는 검은 백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기해 하지 않는 것, 그 둘 중에 하나였다.

 그로부터 3일 후.
 
일이 명확해졌다. 요도도노가 사는 니노마루[[각주:9]]의 긴 복도(長廊下)에서 꽃꽂이에 쓸 꽃을 채집하는 행사가 열려 키타노만도코로도 초대되었다. 그녀가 코우조우스를 데려 가자, 3일 전에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고 그토록 떠들썩하게 다회까지 열게 한 그 검은 백합이 다른 마타리 같은 잡초와 함께 바구니에 마구 담겨 주변을 장식하는 꽃으로 꽂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송이나 두 송이가 아닌 20, 30이나 아무렇게나 꽂혀가며,
 
-
검은 백합 같은 것은 진귀한 꽃도 아니다.
 
고 키타노만도코로의 무지함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이런 창피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그녀의 굴욕은 공개되어 버렸다. 이 문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여성들을 지배하는 사람으로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 되었다. 그녀는 요도도노를 미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검은 백합을 헌상하여 이런 굴욕을 맛보게 한 삿사 나리마사에게까지 증오하게 되었다. 곧바로 히데요시를 움직여 나리마사에게서 새로운 영지(領地)인 히고[肥後]를 빼앗아 결국에는 셋츠[
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할복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다……

 고 한다.
 
이 이야기를 후세 후세 사람들은 믿었지만, 그러나 사실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나리마사가 영지(領地)를 몰수당한 1587년에는 아직 요도도노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나 되지 않았나 하는 시기이며, 저 만큼의 기획을 짜서 키타노만도코로와 대항할 정도의 위세(威勢)는 당연하게도 아직 가지지 못했다.
 
또한 삿사 나리마사의 실각(失脚)은 다른 사건과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으로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빙자하기에는 너무 유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요도도노라는 두 규벌(閨閥)의 다툼이 후에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와 운명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워간다는 사실을 사실 이상으로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이 정도로 높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도 또 없을 것이다.

  1.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딸로 부친의 의향에 따라 황실에 들어가 안토쿠 텐노우[安徳天皇]를 낳았다. 헤이케[平家] 전성기의 상징적 인물. [본문으로]
  2. '탄다이’란 그 지역의 군사, 정치, 판결권을 소유한 총책임하는 기관 혹은 인물. [본문으로]
  3. 히데요시의 말 상대 [본문으로]
  4. 히데요시가 미관말직일 때의 이름 [본문으로]
  5. 일본은 산을 신으로 여기는 산악신앙이 있어, 타테야마 산을 이자나키[伊邪那岐]의 화신이라 여겼다. 또한 일본의 신들을 불교의 부처님들의 화신이라는 신불습합(神仏習合) 사상에 따라 이자나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이라고도 여겼다. [본문으로]
  6.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를 칭하기 이전에 사용했던 성(姓). 유력한 인물들이나 공이 많았던 부하들에게 이 하시바 성을 하사하여 일문(一門)의 효과를 기대하였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지칭. [본문으로]
  8. 심플함 속에서 맑고 한적한 정취 [본문으로]
  9. 두 번째 성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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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4 1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삿사 나리마사 이야기가 이 이야기였군요.. 어쩐지 겨우 이런일로 죽인다니 그 현명한 기타노 만도코로치고는 단순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뭐, 아무래도 자기 지방 사람들을 우대하는건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 싶습니다. 글쎄요.. 왜그럴까요?(쿨럭;)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5 0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화나 에피소드에 있는 이야기들은 뛰어난 인물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은 백합이야기도 그런 의미가 아닐지...

    저도 그게 이해가 안가더군요... 자기 지역 출신 우대가...
    임진왜란 때 출진한 어느 부대(...음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군요)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무장단과 그렇지 않은 하급자들의 알력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렇게 전 생각합니다.
    당시는 세금 &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사람 머리수를 갖추어야 했기에, 자기 영내의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다른 쿠니(国)의 사람들과 만나기 힘들었고, 지금도 외국인을 배척하듯이 당시는 더욱 배타적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다른 지역의 흉은 곧바로 받아들이지만, 칭찬은 믿기 힘든 것도 또한 사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없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일본은 있다"는 생각했던 만큼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거기에 당시의 관습법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国質,郷質라는 것이 있어,
    같은 쿠니, 혹은 마을의 A라는 사람에게 타지역의 B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며, B는 A와 같은 쿠니 혹은 마을 사람인 C에게 돈을 받거나 물품 대금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면에서 사기 치는 사람이 분명 생겼을 것이고, 이런 과정에서 서로간에 불신도 싹트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6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오오.. 생각할 점이 있는 답변을..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7 1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단 것에 오타가 수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군요.. --;;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

  5. 이노센스 2010.02.13 2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현은 일본어로는 곤겐이라 읽습니다. 이는 인간의 몸을 입고 속세에 내려온 부처를 이르는 호칭으로서 명망이 높은 인물에게 종종 붙여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유명한 경우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죽은 뒤에 도쇼구에 모셔져 도쇼다이곤겐의 칭호를 얻었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신호(神號)같이 고유명사를 제외하곤 '권현'이란 불교 용어를 일본식으로 고쳐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권현은 신이 이 세상에 임시의 모습을 가지는 것으로 산악신앙과도 많은 연관이 있던 것 같더군요. 굳이 인간의 몸을 입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묻습니다만 이에야스 말고 또 権現의 호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명망 높은 인물에게 종종 붙여진다고 하시니 생각 외로 여러 명이 있었나 보군요.

      개인적으로는 이에야스가 곤겐이 된 것은 텐카이[天海]와 그의 말에 넘어간 히데타다[秀忠]에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6. 이노센스 2010.02.13 22: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시물의 하단이 잘리는 것이 아쉽네요. [도요토미 가문 사람들]은 저도 서울 교보문고에서 일본어 문고판으로 읽은 기억이 나는 데 번역을 생각보다 잘 해놓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리마 사람 이야기]는 없어서 아쉬웠지만요. 다만 한글로 옮기기 곤란한 말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다소의 장난기 어린 표현이 시바 료타로의 간결하고 침착한 문장 스타일을 망가뜨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어 번역보다 돌출되는 문제인 듯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이버에서 이쪽으로 오면서 뒷글이 많이 잘리더군요....근데 이번 편은 한 번 손을 본 곳이라 잘리지 않았는데...

      '하리마 사람 이야기'는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주인공인 '하리마 바다 이야기[播磨灘物語]'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장난기 어린 표현...이라....
      ^^ 그렇군요. 이노센스님은 제가 쓴 장난기가 담긴 표현을 어떻게 표현하실수 있으시려나요? 시바 선생의 간결하고 침착한 문장 스타일을 살리는 방법 좀 알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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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espylaco BlogIcon 세이버 2006.04.20 0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비운의 삿사 나리마사...정리가 잘 된 자료네요..담아갑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_jegal BlogIcon 도리구름 2006.07.16 0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용이 잘돼있네요.. 저도 담아갈게요ㅎ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polarstar BlogIcon 북극성 2006.07.22 1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overmint BlogIcon 한걸음씩 2006.07.28 2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이것도 담아갈게요.. 요즘 <토시이에와 마츠> 보고 있거든요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edge7744 BlogIcon 우에스기 2006.08.08 1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도 담아가겠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comet2her BlogIcon 루시안 2006.08.28 2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겠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jjang1798 BlogIcon 쌀집 2006.09.10 1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tpress BlogIcon beltpress 2007.01.04 10: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자세하게 정리 되어 있군요 저도 도시이에와 마츠를 보고 있는중입니다.감사하게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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