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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학습연구사[学習研究社, Gakken] [역사군상-유럽전사 시리즈 Vol.12 독일장갑부대전사2]의 p134~p139에 실린 군사평론가 노기 케이이치[野木 恵一]씨의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또한 사진등은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의 것을 참조하였습니다.

연비가 좋고 피탄 당하여도 폭발할 위험이 적은 디젤 엔진. 이렇게 전차(戰車)에 적합한 동력기관의 발명자는 독일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독일은 전차에 폭발하기 쉬운 가솔린 엔진을 계속 사용했다. 이런 기술사(技術史)적 의문에 다가서 보자.

발명가의 죽음

 1913년 9월 29일 밤.
 벨기에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배에서 한 사람의 독일인이 사라졌다.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좌절과 인간관계, 빚 문제와 같은 스트레스로 바다에 뛰어들었을 거라 추측된다. 그러나 그의 발명이 타국의 손에 건네지는 것을 막고자 독일 정보기관이 살해했다고 추리하는 사람도 있다.

 발명가 루돌프 디젤. 그의 발명품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디젤 엔진이다.
 확실히 디젤의 엔진은 그가 죽은 다음 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U보트에 사용되어 그 우수성을 알렸기에, 그의 조국 독일은 디젤 엔진의 기술이 가상적국 영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일정부가 암살하려고 할 정도로 루돌프 디젤의 발명을 높게 평가했다면 그가 스트레스 받을 정도로 몰리지 않았을 것이며 일부러 외국까지 자신의 발명품을 팔러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 암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디젤 암살설은 경향 신문의 이 기사를 참조)

 디젤의 죽음(향년 55세)은 너무 빨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71살에 죽은 부친만큼 살았다면 자신의 발명품이 잠수함이나 기관차, 자동차나 비행기에 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디젤의 엔진은 그의 사후 20여 년 지나자 전차에도 실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한 것은 조국 독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실현시킨 것은 그의 조국과 싸우게 되는 소련이었으며, 먼 동양의 나라 일본이었다. 그의 모국 독일이 디젤 엔진을 사용한 제식 전차는 2차대전이 끝난 후인 레오파르트 1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디젤의 모국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하지 않았는가? 이는 이외로 맹점을 찌른 의문일지도 모른다.

열효율을 추구하며

 루돌프 크리스티안 칼 디젤(Rudolf Christian Karl Diesel)의 조부나 부친은 제본공(製本工)이었다. 부친 테오도르(Theodor) 때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테오도르는 파리에서 독일상인의 딸 엘리세(Elise)와 만나 결혼해서 루돌프와 두 딸을 두었다.

 디젤 일가는 187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외국인이라 추방된다(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전쟁이 원인). 루돌프는 가족과 떨어져 아우크스부르크의 친척집에 맡겨져 독일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모국 독일에서 그는 엔지니어가 되는 꿈을 꾸며 우수한 성적으로 뮌헨 공과대학에 진학, 1880년에는 뮌헨 공과대학 사상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다.

 처음에는 은사의 추천으로 냉장고 회사에 취직하였고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 지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883년 파리에서 살던 독일여성 마르타(Martha Flasche)와 결혼. 이를 계기로 회사를 관두고 발명가, 기술 컨설턴트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디젤은 대학시절부터 효율이 좋은 내연기관 발명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연기관의 이론적 근거는 1824년 프랑스의 니콜라 레오나르 사디 카르노가 발표하였다. 또한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는 1876년에 카르노가 제시한 기관(4사이클 엔진)을 실제로 제작하였다. 1883년 독일의 고틀립 다임러빌헬름 마이바흐가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에 개량을 더하고 연료에는 가솔린을 채용하였다. 이것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엔진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은 14%의 열효율(발생한 전 에너지 중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율)밖에 발휘하지 못하였고, 다임러의 엔진조차 효율 18~19%로 낮았다(가솔린을 연소시켜 얻을 수 있는 열에너지 중 80%이상을 버리는 엔진. 현대의 엔진 효율은 40%정도).

 디젤이 제작한 엔진은 혼합기 대신에 공기만을 압축하여 거기에 연료를 내뿜어 연소시키는 구조였다. 단열압축하면 보일의 법칙샤를의 법칙에 따라 공기는 섭씨 수 백도의 고온이 되기에 적당한 타이밍에 연료를 내뿜는 것만으로도 점화기 없이 연소, 폭발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디젤 엔진을 ‘압축점화기관’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엔진은 디젤 이전부터 연구되었으나 실제로 제작에 성공한 것은 루돌프 디젤이 처음이었다. 그는 1893년에 ‘합리적 열기관의 이론과 설계’를 간행하였고, 같은 해 독일정부에서 특허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엔진이 완성된 것은 1897년의 일이었다. 완성될 동안 그는 고압축비(高壓縮比)나 연료분사(고기압 하의 실린더에 연료를 넣기 위해서는 가솔린 엔진처럼 부압을 이용한 카브레터가 아니라 연료를 분사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 인젝션이라도 부르는 장치가 디젤 엔진 개발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다)에 따른 기술적 문제 해결에 고심하였으며, 덤으로 특허소송에도 연루되었다.

 디젤의 발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를 이끌고 있던 하인리히 폰 부츠(Heinrich von Buz)였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원래 인쇄기계를 전문으로 하는 기계 메이커였지만, 디젤이 아우크스부르크 출신 제본공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면 일종의 동류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1898년에 뉘르베르크 기계제작소와 합병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기계제작소(약칭
MAN)가 되는데, 흥미롭게도 디젤의 모친은 뉘른베르크 출신이었다.
 MAN사(社)와 더불어 디젤을 지원한 것이 독일을 대표하는 철강, 병기 회사인
크룹(wiki_en)사(社)였다. 즉 디젤의 발명은 실용화 되기도 전부터 강력한 지원자를 얻었다는 것이 된다. 디젤은 엔진을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젤은 기업 경영감각이 떨어졌고 상업적인 재능도 없었다. 거기에 아직 디젤의 엔진은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어 그다지 팔리지 않아 특허가 실효되는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연간 판매대수는 200~300대뿐이었다. 디젤은 이상가에 완고하였고 사교성이 없는 독불장군이었기에 1906년에는 MAN사(社)와 결별하고 자신이 만든 디젤사(社)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거기에 더해 특허수입으로 부동산에 투기하여 거액의 빚을 지게 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소식불명이 된 만큼 자살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자 차츰 디젤 엔진 보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특허실효 후에 영국을 시작으로 한 각국이 독자적으로 디젤 엔진을 개량한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보아도 디젤 엔진 보급에 디젤 개인의 존재는 절대적 요건이 아니었고, 기술이 영국에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 한 독일 정보기관이 그를 암살하였다는 추측도 난센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디젤 엔진의 장점

 디젤 엔진의 장점 특히 가솔린 엔진(니콜라스 오토의 엔진)과 비교할 경우 장점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디젤 엔진의 장점은 다음 세가지가 있다.

 (1). 열효율이 높다.
 즉 같은 출력이라면 연료소비율이 낮다(연비가 좋다 = 항속거리가 길다).
 디젤 엔진의 이론적인 열효율은 50%~60%나 된다. 가솔린 엔진으로는 기껏해야 40%정도일 것이다. 물론 이론대로의 열효율이 나올 순 없었지만, 실제로 디젤 엔진은 같은 양의 연료로 가솔린 엔진보다 1.5배 더 이동할 수 있었다.

 (2). 경유 등 저가의 연료를 사용할 수 있기에 경제성이 높았다.
 가솔린 엔진은 가솔린 밖에 쓸 수 없었지만 디젤 엔진은 연료의 융통성이 높아 가솔린은 물론 알코올도 쓸 수 있었다. 루돌프 디젤은 입도가 0.5mm 이하인 석탄가루를 연료로 할 생각까지 하였다(물론 실용화되지는 않았지만).

 (3). 구조가 단순하고 튼튼하여 내구성이 높다.
 디젤 엔진은 압축비가 20전후(통상기압의 20배)나 달하기에 처음부터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돌프 디젤이 실용화하기까지 많은 실패를 거듭했던 것도 엔진 부품을 튼튼하게 제작하고 결합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장점을 뒤집어 보면 디젤 엔진은 무겁고 부피가 커진다는 단점이 된다.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할 경우 (1)열효율이 높다는 점은 이동거리 연장으로 이어진다. 즉 같은 양의 연료통 용적이라면 연료소비율 에 반비례하여 이동거리가 길어진다. 전차가 보병의 동반병기였을 즈음이라면 몰라도 전차가 집단으로 질주하게 되자 1회의 연료보급만으로 오래 가는 편이 좋았다.

 (2)는 연료비의 저하는 물론이고 가솔린보다도 쪽이 확보하기 쉽기에  전쟁 때도 쉽게 연료가 부족해지는 일은 가솔린에 비해 덜했다. 전쟁 때 가솔린은 항공기의 연료로 우선적으로 배당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경유라면 확보하기 쉽다.
 또한 디젤 연료(경유)는 인화점이 높아 가솔린과 같이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전차가 피탄 당했을 시의 생존성 향상으로 이어진다.
T-34 등 소련 전차는 후부에 드럼통처럼 생긴 예비연료통을 외부에 대놓고 탑재하였다. 이는 디젤 연료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만약 안에 가솔린이 들어있었다면 피해가 더 늘었을 것이다.

전차와 디젤

 처음으로 전차용 디젤 엔진을 설계한 곳은 영국의 리카도 사(社)(wike_en)이다. 4기통 액냉 슬립 밸브로 90마력의 엔진이 비커스 중전차용으로 설계되어 1927년에 탑재되었다.
 그 후
A-12 마틸다 보병전차, 발렌타인 보병전차 등에 AEC(wike_en), 레이랜드(wike_en), 제너럴 모터스(GM) 제작의 디젤 엔진이 탑재되었지만 영국 전차의 주력은 항공기용에서 전용된 가솔린 엔진이었다.

 미국에서도 M4A2 셔먼이 GM의 디젤을 탑재하였지만 대부분은 무기대여법에 따라 소련으로 보내졌고, 미육군 자신들은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2차대전 중 본격적으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한 나라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소련과 일본이었다.
 소련은
피아트제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을 연구하여 V형 12기통의 BD-2를 개발. 1933년에 BT-5 쾌속전차(wike_en)에 탑재하여 테스트하였다. BD-2엔진은 V-2엔진으로 발전하여 1939년에는 표준엔진으로 제정. KV-1 중(重)전차, T-34 중(中)전차, 스탈린 중(重)전차 등에 탑재되었다. V-2 시리즈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197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가솔린 확보의 불안, 화재 위험 등을 고려하여 디젤 엔진 개발을 단행하였다. 또한 중국대륙에서의 작전 중 냉각용수 확보의 어려움(냉각수에는 칼슘 등 미네랄이 적은 물이어야 했다. 우물이나 강물은 부적절)이나 냉각계통이 얼어붙을 위험(극한의 중국 동북부에서 작전행동을 고려했기 때문) 등도 감안하여 1932년부터 공냉식 디젤 엔진 개발에 들어갔다. 세계적으로도 공냉식 디젤 엔진 모델이 없어 독자적인 개발이 되었지만, 우선 직열 6기통 4사이클 디젤 엔진이 1936년 제식 채용되어 89식 중전차(을형)에 탑재되었다. 이어서 일본은 동일 실린더의 조합을 바꾸어 각종 사이즈의 엔진을 만드는 – 모듈러 사상의 선구자와 같은 4사이클 디젤 엔진 개발에 착수했다.

 통제 디젤(100식 엔진)(wiki_jp)이라 부르는 보아(내경)120mm, 스트로크 160mm의 배기량 1.8리터의 실린더를 1단위로 하고, 이것을 4본(직렬4기통)에서 최대 12본(V형 12기통)으로 조합함으로써 배기량 7.2리터에서 21.6리터의 디젤 엔진을 만드는 것이다. 최대 V형 12기통 과급기 내장 엔진의 최대출력은 300마력으로 공냉식 외에 수냉식도 있었다. 통제 엔진은 1식 중전차(치헤) 이후의 전차에 탑재되었다.

 패전으로 인해 일단 일본은 병기개발에서 손을 떼지만 자위대의 발족과함께 전차 개발을 재개. 2차대전 후 첫 번째인 61식 전차에는 2차대전 때의 기술을 살려 공냉식 4사이클 디젤이 탑재되었다. 그 후에도 74식 전차(공냉 2사이클), 90식 전차(공냉 2사이클)에 디젤 엔진을 탑재하였다. 즉 일본은 반세기에 걸쳐 일관되게 전차용 디젤 엔진을 계속 추구한 것이다. 전차용 디젤 엔진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이후까지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던 일본의 병기개발사상 드문 예가 되었다.


가솔린 엔진을 채용한 독일

 디젤 엔진의 원조 독일에서는 2차대전 중 전차에 가솔린 엔진을 계속 탑재했다.
 디젤 엔진을 탑재한 시작전차라 하면 판터의 다임러 벤츠의 시작차(VK3002DB)에 동사(同社)의 디젤 엔진을 탑재하긴 했지만 저 시작차는 채용되지 않았다. 제식전차는 I호 전차 B형 이후 전부 마이바흐 사(社)의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였다. 마이바흐 사(社)는 비행선이나 철도차량용 디젤에서 실적이 있던 회사였던 만큼 독일이 디젤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은 수수께끼다.

 또한 디젤의 발명에 처음부터 관여했던 MAN 사(社)나 크룹 사(社)도 2차대전 중에 전차의 생산이나 설계에 관여하였다. MAN 사(社)나 크룹 사(社)에서 디젤 엔진을 탑재한 전차가 등장하여도 이상하지 않았음에도 실제로 전차에는 마이바흐 제의 엔진을 탑재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독일육군의 기술정책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한 디젤 엔진이라 아울러 말하지만 잠수함, 기관차용과 자동차, 전차용은 설계 자체가 많이 달랐다. 잠수함이나 기관차용은 대형대중량으로 저회전인 소위 저속디젤이며, 자동차용과 전차용은 소형경량의 고속디젤이 요구되었다. MAN의 특기인 U보트 용 디젤 엔진 기술은 기관차에 적용할 수 있었지만 그 상태대로 차량용에는 전용할 수 없다.

 디젤 엔진의 소형경량화에 공헌한 기술은 연료의 공기분사에서 무기분사로의 전환이었다.
 디젤이 설계한 시작 엔진이나 1920년대까지의 실용 디젤 엔진은 대부분이 연료를 압축공기와 혼합하여 실린더 내에 분사하는 방식을 채용하였다(공기분사).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연료를 단독으로 깨끗한 안개 상태로 뿜어내는 노즐, 고압연료 펌프 등을 제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기압축기는 부피가 커 필연적으로 엔전 전체도 크고 무거워졌다.

 1927년 독일의 로베르토 보슈 사(社)가 무기연료분사 펌프 개발에 성공한다. 덕분에 1930년대가 되자 차츰 무기분사 디젤 엔진이 보급되었다. 이와 함게 디젤 엔진의 신뢰성도 눈에 띄게 향상되어 갔다.
 흥미롭게도 1930년대에는 열강들이 경쟁하듯 항공기용 디젤 엔진 개발에 분주하였다. 디젤 엔진은 가솔린 엔진보다도 필연적으로 무겁기에 항공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좋은 연비율과 내구성은 장거리용 항공기에게 있어서는 무게에 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엔진이 무거워도 필요한 연료가 적다면 차감하여 엔진 중량이 무거워도 연료를 적게 실으니 가벼워 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긴다.

 실제 디젤 엔진은 우선 1930년대에 비행선용으로 확고한 지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MAN, 다임러 벤츠, 피아트, 롤스로이스, 융커스(wike_en), 리카도 등 유명한 회사가 대형 항공기용 디젤 개발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실용의 영역에 달한 것은 융커스 사(社)의 유로204/205/207 시리즈가 유일했다.
 융커스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은 긴 기통의 양측에 크랭크 샤프트가 있어 두 개의 피스톤 사이엔 연소실을 형성하는 대향(對向) 피스톤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채용하였다. 이 엔진은 종전 후 영국의
치프틴, 소련 T-64의 디젤 엔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석유를 갈구하며

 지금은 디젤 엔진을 탑재한 승용차나 트럭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독일이 전차 개발을 재개한 1920년 말 즈음은 디젤 엔진 차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디젤 연료(경유)보다 가솔린을 구하기 쉬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 침공한 독일 육군의 장갑부대는 길가에 있던 주유소에서 연료를 약탈하여 사용하였다. 경유라면 현지조달이 어려웠을 지도 모르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전쟁 때라면 모르겠지만 근대적인 군대에서 연료나 식량을 현지조달 하겠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연료를 최전선까지 보낼 수 있는 보급체재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전쟁은 시작할 수도 없다.

 연료(석유자원) 확보에 관해서는 독일군 수뇌부보다도 히틀러 쪽이 확실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정권을 잡기 전인 1932년 6월 히틀러는 독일의 석유화학기업 I.G.파르벤(wike_en)과 손을 잡고 보호를 약속하였다.
 I.G. 파르벤은 석탄을 원료로 하는
석탄액화연료를 개발하고 있었다.
 석탄을 석유로 만드는 합성에는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수소 첨가법(wike_en)과 석탄을 일단 수소와 일산화탄소로 분해해서 재합성하는 피셔 트로프슈 공법(wiki_en)이 있는데, 파르벤의 방법은 베르기우스의 수소 첨가법으로 이는 항공기용 가솔린을 합성하는데 적합했다.

 히틀러는 강박관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항상 석유자원 확보에 신경썼다. 그가 말하는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생존권)에는 식량산지와 더불어 유전지대도 포함되어 있다. 루마니아를 동맹국에 끌어들여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확보했으며, 1941년 소련침공 때는 장군들을 물리치고 주공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로 돌렸다. 그는 장군들에게 “자네들은 전쟁의 경제적 측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독일군은 카프카스 산맥 앞에 도달하여
바쿠의 유전지대가 보이는 곳까지 육박했지만,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프랑스 전선과는 정반대인 일이 러시아 전선에서 일어난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보급기지를 점령하지만 비축되어 있던 연료는 디젤 용의 경우로 독일군의 전차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42년 공세에서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를 목표로 하였다. 바쿠 유전을 점령하면 독일은 그리도 바라던 석유자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소련의 전쟁유지 능력을 뺐어 패배로 몰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점령한 유전을 복구하기 위한 석유기술여단까지 재빨리 편성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42년 공세도 역시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실패했다. 독일육군은 다시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추었기에 공세에서 수세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기대했던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는 1944년 초반에는 석유공급의 54%를 점할 정도가 되었고, 항공 가솔린은 92%나 석탄액화연료에서 만들어졌다.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 옆에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 고장이 건설되어 유대인 수용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연료생산에 종사했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의 1/3은 이런 강제노동의 산물이었다.

 연합국 공군은 1944년 5월부터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공장을 공격하였으며 또한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폭격하였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생산은 곧바로 1/10이하로 떨어져 항공기는 날 수 없게 되었고 전차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독일은 운명은 석탄액화연료와 함께 다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지 않았을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 독일육군 수뇌부가 주로 유럽 안에서만 작전을 상정하였기에 연료 확보를 문제시 하지 않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전차는 보병의 동반병기라는 개념을 계속 가지고 있어 그다지 긴 작전행동을 요구하지 않음 점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기에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점도 있었을 테지만 그 정도라면 독일의 기술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 전차가 디젤 엔진을 채용했다고 하더라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석유생산의 근원을 파괴당하면 디젤 연료(경우)건 가솔린이건 부족하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독일 전차의 이동거리가 좀 더 길어졌을 것이며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을까?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춘 몇몇 국면에서는 좀 더 유리하게 진행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루돌프 디젤의 모국 독일이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하고자 하지 않았던 점은 기술사적으로 기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차대전 서적을 읽다가 삘받아서 번역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2차대전과 이런 기계에 관한 것은 무지에 가까우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가차없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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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i IV 2010.10.10 17: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나 지금이나 공돌이가 이래저래 현실에서 몰리는건 변함이 없는듯(..이 아니라 글의 주제에서 묘하게 벗어나 있긴 합니다만...;;;;)

    그러고보면 그렇군요. 그 히틀러의 갈곳잃은 진격이 저는 스벤 헤딩의 이론에서 나온 '세계의 중심'을 제패하려는 전략에서 나온줄 알았는데 유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측면도..

    허허.. 사실 전쟁사에서 탱크나오고 나면 좀 긴박감이 떨어진다고 할까요. 그런점에서 사실 1차대전 후의 전쟁사는 찾아보려니 영 근성부족이었습니다만 이렇게 번역해주신 덕에 잘 읽고 갑니다(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10 1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것 같습니다. 거의 연구실이나 공구실에서 인생을 보내다 대박을 친들 사회경험의 없음으로 인해 실패를 맛보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 합니다. 처음으로 비행했다는 라이트 형제도 특허 소송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예전에 읽은 책에서 히틀러의 전략에 반대하던 OKW 참모들의 의견을 물리치며 히틀러가 '자네들은 전쟁경제를 모르네'라고 본문에서 나오는 말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는 것이 생각나는군요. 어쨌든 모스크바보다 곡창지대와 유전이 더 중요하다고.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같은 경우 2차대전에 관심은 좀 있는 편입니다만 그에 상응하는 지식도 없고(...무엇보다 영어, 독어, 러시아어를 못하다 보니 일본을 거쳐오는 것들만 취해서요...^^; ) 해서 잘 알진 못합니다.

  2. 우독사 2011.03.21 2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평소 디젤엔진에 관심이 많았는데
    좋은정보주셔서 고맙습니다~

  3. 울프 독 2011.06.13 2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군도 휘발유 엔진을 사용했는데 이유는 디젤 엔진이 고가이고 정밀 제조도 힘들며
    대형 전쟁이 되면 미숙 노동력으로 대량 생산해야 되는 소모품 전차 엔진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글을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디젤 생산 기술이 시원치 않았던 3-40년대의
    개념이 적용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서 모두 디젤 엔진으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4. 배고픈팬더 2013.04.05 2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퍼가도 될까요?

  5. 라군 2013.06.25 1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독일이 가솔린 엔진을 사용한 것은 진동 문제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외에도 당시 전차는 기동중 사격이 불가능하여 기동 중 정지하여 사격하였는데, 가솔린 엔진이 진동이 적고 재기동시 이점이 있어 채택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6. 라군 2013.06.25 1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독일이 가솔린 엔진을 사용한 것은 진동 문제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외에도 당시 전차는 기동중 사격이 불가능하여 기동 중 정지하여 사격하였는데, 가솔린 엔진이 진동이 적고 재기동시 이점이 있어 채택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7. 디젤라 2014.07.28 0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벤츠디젤엔진 내구성등 모두따져도 참좋져

  8. 나그네 2014.12.10 1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성능이 좋은 커먼레일 엔진생산까지 긴 세월이 흘렀군요.

  9. 디젤킹 2015.05.05 15: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번역해주신 거였군요. 부드럽게 잘 읽히고 기계 용어도 이질감없이 부드럽게 읽혀 전혀 몰랐네요
    과제 하는데 유용하게 참고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10. KD 2016.03.07 23: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장 유력한 것은 경유확보의 어려움이라고 본적 있습니다. 1936년 상용 디젤 승용차를 개발하고 디젤 인젝터 펌프와, 그 어렵다는 초정밀 인젝터 노즐도 개발한 독일이기에 40년대 디젤엔진 개발에는 기술적 어려움은 없었을 겁니다. 저소음, 저배기량 대비 고출력, 범용성 높은 휘발유가 더 적합했다고 여겼겠지요. 융커스의 jumo205 엔진만해도 항공용 엔진치고는 극히 소형인 16리터로 880마력으로 너무 고성능이었습니다. 40리터나 되는 t-34보다 콤팩트하고 훨씬 고성능이죠.

  11. Kurfurst 2017.03.18 16: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일이 가솔린 엔진을 쓴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건 가솔린을 즐겨쓴 미국과 영국도 공통되는 얘기.

    1. 미개척 영역이었던 디젤 엔진에 비해 기존의 가솔린 엔진은 철저히 검증된 엔진이며, 기술력 축적도 충분히 되어있었다.

    2. 수요와 공급이 많아 디젤보다 생산비가 저렴했다.

    3. 현장에서는 생각보다 그리 큰 성능차를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유지보수 측면에서는 정비병들에게 친숙했던 가솔린 쪽이 더 나았다.

    이상의 3가지 이유로 독일(그리고 영국과 미국)은 가솔린 엔진을 즐겨썼다고 보는게 적절합니다. 사실은 미국의 사례(포드 GAA)만 들고와도 설명이 끝납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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