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82 3 11일 할복(割腹) 37.

1546 ~ 1582.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넷째 아들. 스와 씨[諏訪氏]를 상속하지만, 신겐이 죽자 타케다 가문[武田家] 상속. 나가시노 전투[長篠合戦]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川] 연합군에게 패한 이후 일족, 중신들에게 계속해서 배반당하여 텐모쿠잔 산[天目山] 산기슭인 타노[田野]에서 부인과 아들 노부카츠[信勝]와 함께 자살.








비극의 무장


 명장(名將) 신겐의 뒤를 이었던 타케다 카츠요리의 비극은 1575 5월 나가시노 전투 때 이미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 전투는 구식인 활과 화살로 무장한 타케다 군이 신병기 철포로 무장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졌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상(眞相)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카츠요리에게 통솔력이 부족했음을 한탄한, 신겐을 오랫동안 섬기며 싸워 왔던 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이 오히려 나가시노 전투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츠요리의 멸망은 전투의 치졸함보다도, 부친 신겐이 쌓아 올린 군단을 유지할 수 없었던 통솔력 부족이 전면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카츠요리가 막 타케다 가문을 상속 받았을 때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시나노[信濃] 군단이, 멸망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모두 배반하여 반기(反旗)를 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1581년에 들어서 신푸 성[新府城]을 축성했지만, 성에 있었던 것은 불과 3개월하고 보름. 공격태세를 취하기 보다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도 비극이 있었다. 더구나 자기 영지(領地)로 적을 끌어들여 물리친다는 그 자세가 너무도 후수(後手)로 인식된 것이다. 때문에 그 멸망은 카츠요리에게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가진 비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츠요리 부인의 기원(祈願文)


 그 멸망의 모습을 전해주는 사료로써, 카츠요리의 부인 호우죠우 씨[北条氏]-19-타케다 하치만 신사[武田八幡神社]에 올린 기원문과 비구니인 리케이니[理慶尼][각주:1]가 쓴 '타케다 멸망기[武田滅亡記]'[각주:2]가 유명하다. 부인이 하치만 사[八幡社]에 올린 기원문을 의역해 보면,

신이시여,

카츠요리는 운을 하늘에 맡겨 제 목숨 아끼지 않고 적진을 향하였습니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와중에 가신들 중에는 정의(正義)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안위에만 있사옵니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 義昌]는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신의 뜻을 더럽히고 있으며 불쌍하게도 가족까지 버리고[각주:3], 모반의 병사를 일으켜 버렸습니다. 또한 타케다 가문 누대(累代)에 걸쳐 은혜를 받았던 후다이[譜代] 가신들 까지도 모반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카츠요리에게 반항하려 하고 있습니다.

라고 누대에 걸쳐 은혜를 받은 자들까지 모두 배반해 버렸다고 신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이 부인이 신에게 호소한 것을 보면 카이[甲斐]의 산천과 카이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원망과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텐모쿠잔[天目山]의 이슬


 이리하여 모든 것을 잃고 신푸 성()을 불태운 뒤 그 성을 뒤로 한 카츠요리 일행 7백 여명은 하루 동안 이동하여 카시오야마 산[柏尾山山]다이젠 사[大善寺]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하룻밤 다케다 일족의 리케이니[理慶尼]에게 신세를 졌다. 여기서 츠루 군[都留郡]의 이와도노 성[岩殿城]을 목적지로 하였는데, 여기서 재기(再起)를 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고토우게[笹子峠] 고개의 입구에서 반기를 든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 자신의 영지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당한 카츠요리 일행은 어쩔 수 없이 텐모쿠잔 기슭의 타노[田野]에서 자신들 운명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타노에는 '한 손 베기[片手切り]'[각주:4]라 불리는 사적이 있는데, 이 근방에서 아군에게 배신당하거나 오다 군[織田軍]의 습격을 받은 카츠요리(37)가 부인(19), 노부카츠(16) 들과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 마지막을 맞이한 때 카츠요리 부인은,

검은 머리 나부끼듯 흔들리는 세상에서,

가없는 마음에 떨어져 지워지는 이슬 방울의 흔적.

[黒髪れたる世ぞ,はてしなき思いに消ゆる露の玉の]

라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고 [코우란키()]는 전하고 있다.


 그 후 리케이니[
理慶尼]는 카츠요리 일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타노[田野]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넋을 하나하나 기렸다고 한다.

케이토쿠 원[景徳院]에 있는 카츠요리의 묘(墓) [야나나시 현[山梨県] 야마토 촌[大和村]

  1. 타케다 신겐과는 사촌(신겐의 아비인 노부토라의 동생(카츠누마 노부토모[勝沼 信友]의 딸)이며, 카츠요리의 유모(乳母)였다. [본문으로]
  2. 다른 이름으론 '리케니기[理慶尼記]'. [본문으로]
  3. 인질로 바쳤던 70세의 모친, 13살의 장남, 17살의 장녀 모두 사형. [본문으로]
  4. 카츠요리의 측근 츠치야 마사츠네[土屋 昌恒]가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타케다 신겐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8. 1. 12. 00:50 Posted by 발해지랑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1573 4 12일 병사(病死) 53.

1521 ~ 1573.

카이[甲斐] 슈고[守護][각주:1]. 이름은 하루노부[晴信]. 아비인 노부토라[信虎]를 쫓아내고 가독(家督)을 차지. 시나노[信濃]를 침공하였고,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다섯 번에 걸쳐 카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싸웠다.[각주:2] 스루가[駿河]를 차지한 후 상락(上洛)[각주:3]을 개시[각주:4],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쳐부수지만 노다 성[野田城] 포위 중에 병으로 죽었다.








신겐의 사인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를 만들어, '천하 전국에 있어서는……[天下戦国……]'을 언급하며, 왕도(王道)국가 실현을 목표로 했던 타케다 신겐은 1573 4 12 53세의 나이로 시나노[信濃] 이나 군[伊那郡] 코만바[駒場]에서 불귀의 이 되어 버렸다.


 그 사인에 대해서는 철포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는 설과 병사설(病死說)이 난무하며 유포되었다.
 
철포설은 '미카타하라 전투기[三方原合
]', '무덕편년집성[編年集成]'[각주:5] 등 그 외에도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탄환에 맞은 자리라는 곳도 미간, 귀 근처, 넓적다리 등이 있어 여러가지 억측, 풍문 등이 섞여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에 대해 병사설도, '갑양군감[甲陽軍鑑]', '칸토우 칸레이 기[東管領記]'를 시작으로 많이 있는데, 사실적으로 보자면 후자 쪽이 물론 옳으며, 그 병 상태는 1570년 즈음부터 서서히 자각 증상을 느낄 정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른 조바심이 서상작전(西上作戰)강행(强行)으로 이어진 것이다.


 병사설의 근본 사료로써는, 미슈쿠 켄모츠[御宿 監物][각주:6]의 보고서나 '현공 불교에 대한 말씀[玄公事法語]' 등이 있다. [코우요우군칸]을 보면 품 제39에,

계유(癸酉) 2월 중순에 전장(戰場)에서 네 곳에 뜸을 뜨시고 몸에 좋은 약을 여러가지 취하셔서 몸이 나아지셨다
라고 쓰여 있지만 곧이어 악화되어 임종의 때를 맞이해 버린 것이다.


 갑양군감에는

4 11일 미시(未の刻)[각주:7]부터 신겐공 상태가 나빠지셔서 맥박이 굉장히 빨라졌으며, 또한 12일 밤 해시(亥の刻)[각주:8] 토하면서 이빨 5~6개가 빠졌다. 그때부터 차츰 약해지며, 이미 죽은 목숨이니 맥이 뛰고 있을 때 말해두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며, 후다이[譜代]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과 일문(一門)들을 불러들여, 6년 전 스루가[駿河]로 출진하기 전에 이타자카 호우인[板坂法印][각주:9]이 말하길 [카쿠()]이라는 병의 징후가 있다고 했을 때 조심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굉장히 진상에 가까운 기록일 것이다.


 미슈쿠 겐모츠의 보고서를 보아도,

폐와 간(肺肝)을 아프게 하던 것이 배로 전이되어 편안치 못하시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쿠마가이 가문 전기[熊谷家]'를 보면,
11일 밤. 총대장 신겐 공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공성(攻城)의 포위를 풀고 진을 물리셨다. 날이 밝은 12일 네바[根羽]에서 숨을 멈추시다(중략), 타구치[田口]의 후쿠덴 사[福田寺]에 머무시던 밤에 이빨 6개가 빠졌으며, 이 병은 곽(癨)[각주:10]이라는 풍문을 들었다
고 한다.


 이런 여러 설을 종합하여, 메이지[明治] 시대에 야마나시 현[山梨県][각주:11] 현립병원장을 역임했던 의학사(醫學士) 무라마츠 가쿠스케[村松 佑]가 병명인 '(카쿠()'이라는 것은 위암(胃癌)의 옛날식 호칭으로, 또한 '폐와 간(肺肝)'이라는 것도 오장(五臟)이라는 뜻이기에 신겐의 죽음은 필시 위암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후 이 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학회에서 인정 받고 있다.


'3년간 상()을 숨기라'는 유언


 이러한 신겐의 죽음이 국내외에 끼친 영향은 거대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신겐을 마음속으로 따르던 중신(重臣)들이었으며, 동시에 신겐도 또한 통한의 미망(迷妄)에 잡혔을 것이라 생각된다.


 몇 개인가의 유언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3년간 상을 숨기라'는 것이 있다. 만약 신겐의 죽음이 적국(敵國)에 알려진다면, 그야말로 총반격을 맞이하여 타케다의 영토는 곧바로 위기와 혼란에 빠질 것이기에 적어도 3년간은 죽음을 숨기라는 것으로, 그렇기에 장례식도 치르질 않았고 형식적으로는 비밀이 지켜진 것이었다.


그러나 후계(後繼)의 비밀은 3개월 만에 깨어져, 후계자인 카츠요리[頼]도 부친의 죽음을 끝까지 숨기지만은 안았다. 오히려 갑양군감 품 제39에 기록되어 있는 유언 부분은 격조(格調) 높고 감동이 담긴 문장이 쓰여 있어, 가슴을 울리는 것이 있다.

……신겐공 고통을 참으시며 말씀하시길,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감히 우리 땅에 침입하는 놈이 없을 테니 3년간 방비를 철저히 하라며 눈을 감으셨지만, 한편으론 야마가타 사부로베에[山県 三兵衛][각주:12]를 불러, 내일은 자네의 깃발을 세타[田][각주:13]에 세우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이 흔들리셨다. 그러나 조금 뒤 눈을 뜨시며 말씀하시길,

대부분은 땅에 맡겼으니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도 없이 내 인생은 풍류였다
(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하단 역자 주)’
고 말씀하셨다. 53세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내일의 이슬로 사라지셨다


 이렇게 신겐의 '3년간 상을 숨겨라'는 것은 굳게 지켜져, 많은 모순을 품으면서도 뒤를 이은 카츠요리는 1575 4 12 부친의 죽음으로부터 3년 뒤에 중신인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코우야 산[高野山]에 파견하여 법요(法要)를 치르게 함과 동시에, 다음 해인 1576 4 16일에 신겐의 장례식이 보제사(菩提寺)인 에린 사[恵林寺]에서 카이센[快川] 도사() 맡아 성대히 치러졌다.


Ps; 이 글을 쓰신 분은 우에노 하루오[上野 晴郎]. 타케다 가문 연구에 대해선 꽤나 유명하신 분 같으신데, 대부분 고어로 쓰신 글이라 그야말로 oTL. 누누이 말씀 드렸다시피 전 고어를 잘 모릅니다(--;) 전부 의역이니 실제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돌 날라오기 전에 피해야지~)

Ps2; 이 글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실 분 대환영입니다.


하단역자 주


신겐의 죽을 때 남긴 시(世辞)는 일본에서도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가령 http://www5a.biglobe.ne.jp/~shici/jpn49.htm에서 본 바에 따르면,

원어는 [大底還他肌骨好 不塗紅粉自風流]인 듯하여, 윗글의 [()] 부분이 여기선 [()]로 되어 있습니다. 저 유언은 보통 한문의 문법과는 또 다르고, 중세 일본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겨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요시다 유타카[吉田 豊]()가 현대문으로 편역한 [갑양군감(甲陽軍鑑)-間書店]에 따르면,
'
내 불후의 생명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의 육체에 전하마. 그것은 조금도 꾸밈없는 나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라고 합니다.
참고로 책의 부분의 이미지(그 블로그에 있는 사진입니다.)


  1.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2. 4차를 제외하고는 서로 대치한 끝에 물러났다. [본문으로]
  3.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4. 상경설과 미카와-토우토우미 제압설이 있다. [본문으로]
  5. 18세기에 저술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일대기. [본문으로]
  6. 신겐의 주치의. [본문으로]
  7. 13~15시 사이. [본문으로]
  8. 21~23시 사이 [본문으로]
  9. 당시 신겐의 주치의. [본문으로]
  10. 일본 발음으로 '카쿠’로 ‘격(膈)’과 같은 발음. [본문으로]
  11. 과거 카이(甲斐)가 현재 야마나시 현에 속해있다. [본문으로]
  12.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를 지칭. [본문으로]
  13. 동쪽에서 쿄우토[京都]에 들어갈 시에 예전엔 반드시 거쳤다는 곳으로, 깃발을 세우라는 말은 쿄우토까지 군세를 이끌고 상경(上京)하라는 뜻. [본문으로]

타케다 노부토라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2. 29. 17:30 Posted by 발해지랑
다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1574 3 5일 병사(病死) 81.


1494 ~ 1574.

타케다 가문[武田家] 18대 당주. 친족(親族), 지방 호족[人]들과 싸워 카이[甲斐]를 통일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백성과 중신(重臣)들의 원한을 사, 장남 하루노부[晴信]에게 스루가[駿河] 이마가와 가문[今川家]로 추방당하였다. 후에 쿄우토[京都]로 가서, 당시의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가 되었다.

 




 



루가[駿河]로 추방과 은거

 

 난세를 산 전형적인 무장 중 하나인 타케다 노부토라는 1541 6, 아들 하루노부(신겐[信玄])에게 돌연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스루가[駿河]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손님 대접을 받았으며, 타케다 가문[武田家]에서는 생활비를 받아 측실(側室)까지 두고 아이까지 얻었다. 이는 노부토라와 요시모토의 관계가 이외로 깊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전사한 뒤 요시모토의 아들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와 사이가 멀어져 결국 1563 69살 때 스루가를 떠나 쿄우[]에 올라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가 되었다.

 

 쇼우군의 쇼우반슈우라는 것은 매일 이야기를 나누면서 출신 혹은 관계했던 지역의 정보 등을 쇼우군에게 전해주는 역할이다. 필시 노부토라는 카이[甲斐], 시나노[信濃], 스루가[駿河] 등의 정보를 얻어서는 끊임없이 쇼우군에게 보고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1573년 타케다 신겐이 죽었다는 소식이 노부토라에게 전해졌다.

 노부토라는 이 해에 이미 81살이라는 고령이 되어있었지만, 필시 그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의 충격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결과, 노부토라는 이 해의 9월에 시나노[信濃] 타카토오[高遠]까지 서둘러 왔는데, 신겐에게 추방을 당해서부터 벌써 3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한때 자신이 다스리던 카이[甲斐]정세(情勢)가 굉장히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오 성()에서 재회

 

 '갑양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타카토오까지 왔을 때 머물던 숙소는 사위인 네즈 신페이[祢津(禰津) 神平]의 집이었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그 감추어진 면을 읽을 수 있다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노부토라의 셋째 아들은 타케다 노부카도[武田 信廉 = 쇼우요우켄[逍遙軒]]이다. 이해인 1573 그때까지 타카토오 성주(城主)였던 타케다 카츠요리[勝頼] 죽은 신겐의 후계자가 되어 카이[甲斐]로 거처를 옮겼기에 그런 카츠요리를 대신하여 노부카도가 타카토오 성주가 되어 막 부임했을 때였기에, 노부토라는 우선 타카토오 성주인 노부카도와 만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부카도와 노부토라의 관계는 형인 신겐과 노부토라 만큼 나쁘지 않았기에, 당연 둘은 타카토오 성에서 재회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증거로 노부카도가 부친의 말년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다이센 사[大泉寺]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노부카도가 부친과 만나지 않았다면 늙은 노부토라의 초상화는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필시 부친과 만난 후 그 모습을 성에서 그렸고 그 반년 후인 1574 3 5일에 노부토라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기에, 5월에 초상화에 써 넣는 글을 쵸우젠 사[寺]의 슌코쿠 화상[尚]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남긴 것이다.

 

카이[甲斐]를 다시 얻고자 했던 꿈?

 

 노부토라의 묘소(墓所)는 코우후 시[甲府市]의 다이센 사[大泉寺]에 있다.

 장례식은 1574 3 7. 손자인 타케다 카츠요리의 주도로 시나노[信濃] 류우운 사[寺]의 스님인 홋코우 젠슈쿠[北高全祝]를 불러와 경을 외우게 하여 치러졌다.

 

 타카토오까지 돌아온 노부토라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행해지고 있다.

 다시 한번 카이[甲斐]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였다. 아니다 - 단순히 고향이 그리웠고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돌아온 지 반년 만에 죽은 것을 보면 후자 쪽의 해석이 적당한 것 같다.

 

 여담으로 시나노[信濃]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옛 전장 터에는 사나다 노부유키[田 信之]가 세운, 노부토라의 둘째 아들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繁]의 명복을 비는 텐큐우 사[寺][각주:1]가 있으며, 그 반대편으로 카와나카지마 서쪽으로 이어진 산속에는 '텐큐우의 진짜 무덤[本塚]'이라는 것이 어느 개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없지만 노부시게를 모신 텐소우 사[天宗寺]가 있어 노부시게를 따르던 인물들이 모여 넋을 기렸다고 한다.

 

 이렇게 카와나카지마에는 노부시게를 기리는 곳이 많다. 노부토라는 타카토오까지 돌아왔을 때, 옛날 귀여워했던 노부시게의 이야기를 듣고 몸소 몸 무덤을 찾아가 노부시게의 넋을 기리고, 옛날을 그리워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물론 글로 적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전해 내려올 뿐으로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쿄우토[京都]에서 먼 길을 달려왔던 말년의 노부토라라면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 타카다 노부시게의 관직은 사마노스케[左馬助]였는데 사마노스케의 당명(唐名)을 덴큐우[典厩]라 하였다. [본문으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619 7 21일 병사(病死) 85.

1535 ~ 1619.

형인 요시히사[義久]와 함께 큐우슈우[九州]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한 후에 가독 상속. 분로쿠-케이쵸우의 역[慶長役][각주:1]에서 활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에 속했지만, 패배 후에도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전쟁터가 어울리는 무인(武人)

 

 1535년.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島津家] 15대 당주 타카히사[貴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요시히사가 후방에서 전군을 컨트롤하고 있었고, 요시히로는 그런 요시히사의 수족이 되어 각지에 출진.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며 화려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본래대로라면 시마즈 가문의 한 무장으로 생애(生涯)를 끝마쳤을 터였다. 하지만 1595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있던 요시히사를 은거하게 만들고, 시마즈 가문의 차기 당주에 요시히로를 앉힌 것이다. 요시히사나 시마즈의 가신들 대부분은 이 명령에 불만을 품었지만 히데요시의 명령에는 거부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따랐다.

 

 당주 요시히로의 지위는 토요토미 정권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1598년에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정권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요시히로의 지위도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이 때문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 요시히로의 동원 명령이 요시히사나 가신들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에 요시히로는 얼마 안 되는 수하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군이 패배하자 적중 돌파를 감행하여 귀국하지만 이 패전으로 인해 요시히로의 정치 생명은 끝나게 되었다.

 

다도(茶道)에 몰두

 

 정치 생명이 끝난 요시히로가 몰두한 것은 다도와 그것에 필요한 차제구(茶諸具)의 제작이었다.

 요시히로가 언제부터 다도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카고시마[鹿島] 현립 도서관에는 요시히로가 센노 리큐우[千 利休]에게 다도의 오의(奧義)에 대해 질문한, '이신(惟新 = 요시히로)님이 리큐우에게 물어본 조서[惟新より利休江御尋]'사본(寫本)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는 언제나 츠루쿠비의 차기(茶器 - 鶴首の茶入 학의 목의 형태를 한 차 가루를 넣는 사기로 된 도구(비슷한 형태역자 주)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차를 즐겼다고 한다.

 

 1606. 요시히로는 쵸우사[帖佐]에서 히라마츠[平松], 또 다음 해인 1607년에는 카지키[加治木]로 거처를 옮겼다. 이 카지키에 있을 때 요시히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차를 함께 즐길 상대를 찾았으며 응하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카고시마에서 열린 다회(茶會)에 초대받았을 때에는 기대에 부푼 나머지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전날의 오후 8시 즈음에는 카지키를 출발하여 날이 밝기 전에 카고시마에 입성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에 갔을 때, 자신이 원하는 차기를 만들기 위하여 조선인 도공(陶工)사츠마[薩摩]로 데리고 왔다. 이것이 사츠마야키[薩摩焼]의 기원이다.

 데리고 온 도공들은 총 80 여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에 김해(金海)라는 도공이 요시히로의 맘에 특히 들었다고 한다. 요시히로는 그에게 '호시야마 츄우지[星山 仲次]'[각주:2]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5년 정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유학시켰다고 한다.

 

 요시히로는 김해에게 쵸우사 저택의 북서쪽에 '우토[宇都] 가마'를, 카치키 저택의 북서쪽에 '오사토[御里] 가마'를 만들게 하여 자신 취향의 차제구를 만들게 하였다.

 동시에 이 당시에는 사츠마[薩摩]에서 사기를 만들기에 적합한 백토(白土)를 찾지 못하여, 조선에서 가지고 온 백토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히바카리테[火計手]'이다. 조선인 도공이 조선의 흙을 사용하여 만들어 구운 불() 만이(ばかり)[각주:3]이 사츠마[薩摩]의 것이라는 의미이다.[각주:4]

 

 또한 요시히로는 자신이 맘에 드는 차제구가 만들어 졌을 때에는 도장[각주:5]을 눌러 구웠다고 한다. '고한테[御判手]'라 한다. '카지키 영감탱이 이야기[加治木古老物語]'에는 고한테 하나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손가락 하나쯤은 아깝지도 않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진중(珍重)받았다고 한다.

 

 타나카마루 컬렉션[田中丸コレクション]의 '카타츠키 챠이레[肩衝茶入][각주:6]'인 이름()사이노호코[サイノホコ], ‘토우쿄우 국립 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의 '코쿠유우분린챠이레[釉文琳茶入]'[각주:7]인 이름 모치즈키[望月]등. 현재도 '코사츠마[古薩摩]'[각주:8]의 명품으로써 높은 평가를 얻고 있는 다기(茶品) 등도 이 우토와 오사토의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병상(病床)에서 울리는 전쟁터의 함성

 

 1618년 봄.

 요시히로는 병으로 쓰러졌다. 예전의 전우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나 류우큐우[琉球][각주:9] 국왕 등이 문병(問病)의 사신을 보내고, 막신(幕臣)[각주:10]으로는 쿄우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11]였던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 勝重], 요시히로의 아들이며 당주인 이에히사[家久][각주:12]의 요청을 받아 쿄우토[京都]에서 명의(名醫)로 소문 난 쥬토쿠안[寿徳庵]을 카치키에 파견하여 요시히로를 진찰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요시히로는 쇠약해져 음식도 먹지 못 하게 되었지만, 가신들이 전쟁터에서의 함성을 지름과 동시에 옆에 있던 가신이 빨리 준비를 갖추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요시히로는 갑자기 제 정신으로 돌아와 단번에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 삼켰다고 한다. 항상 전쟁터에 몸을 두고 있었기에 전쟁터의 함성을 들으면 멋대로 몸이 반응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허무하게 병은 회복할 조짐도 보이지 않고 다음 해인 1619 7 21일.

 카치키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5.

  1.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본에서 지칭하는 말. [본문으로]
  2. 대대로 타테노 계[竪野系]의 도공은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김해의 자손들이라 한다. [본문으로]
  3. 일본어로 “~만”, “~뿐”일 때 사용하는 부조사. [본문으로]
  4. 여담으로 '테[手]'의 의미는 차제구의 분류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보리 엔슈우[小堀 遠州]'라는 다인과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가장 뛰어난 다기에 붙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자신의 이름 글자 중 하나인 '요시[義]'라는 글자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6. 한 쪽이 돌출 된 형태를 말함. [본문으로]
  7. 검은 광택이 나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8. 초기 사츠마 도자기, 즉 조선인 도공인 만든 도자기를 지칭. [본문으로]
  9. 현 오키나와[沖縄] 지역 [본문으로]
  10.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신하 [본문으로]
  11. 에도 바쿠후의 쿄우토[京都] 치안 유지를 임무로 하는 직책이나, 쿄우토에 있던 막신들의 총 책임자였기에 황실 및 쿠게[公家], 서국 다이묘우[大名]들의 감시 등을 임무로 하였다. [본문으로]
  12. 타다츠네(忠恒)가 1606년 개명. [본문으로]

시마즈 요시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1. 28. 17:50 Posted by 발해지랑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

1611 1 21일 병사(病死) 79.

1533 ~ 1611.

시마즈 씨[島津氏] 16대 당주(). 오오토모 씨[大友氏], 류우조우지 씨[造寺氏]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대하지만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고, 가독(家督)을 동생인 요시히로[義弘]에게 물려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카이에키[改易][각주:1]의 위기에 빠지자,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교섭하여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가 내린 은거 명령

 

 1595 6.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영지안도장(領地安堵)을 발급하였다.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점하고 있던 영지에 행해지던 태합 검지[각주:2]가 종료되어 산출된 57 8천 여석의 영유(領有)를 승인한 것인데, 그 영지안도장에 쓰여진 이름은 시마즈 가문당주 요시히사가 아닌 동생 요시히로[義弘]로 되어있었다. 이것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요시히사에게서 시마즈 가문의 가독을 몰수하고, 친 토요토미 적인 요시히로를 시마즈 가문 당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동시에 요시히사는 시마즈 가문이 대대로 거성(居城)을 삼고 있던 사츠마[薩摩]카고시마[鹿児島]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아, 오오스미[大] 토미쿠마[富隈]에 있는 토미쿠마 성[富隈城]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가 끝난 후인 1604년에는 오오스미[] 코쿠부[国分]에 마이즈루 성[舞鶴城]을 신축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단지 요시히로의 가독 계승은 토요토미 정권이 요시히사나 시마즈 가신단의 의향을 무시하고 멋대로 결정한 것이었기에 실권은 여전히 요시히사가 계속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실권을 누구에게 물려주는가에 대해서 강제로 은거를 당했던 요시히사를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든 것이다.

 

세 딸과 두 명의 후계자 후보.

 

 요시히사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모두 여자였다.

 

 첫째 딸인 오히라[御平] 1551년생으로, 삿슈우 가문[薩州家][각주:3]의 시마즈 요시토라[島津 義虎]에게 시집갔다.

 요시토라의 부친 사네히사[久]와 요시히사의 부친 타카히사[貴久][각주:4] 예전에 종가(宗家)의 가독을 쟁취하려고 계속 다투어 왔던 사이였기에 요시토라도 겉으로는 요시히사에게 복종하고는 있었지만 그 본심은 알 수 없었다.

 1585년. 요시토라가 병으로 죽어 오히라가 낳은 타다토키[忠辰]가 그 뒤를 이었지만, 그 타다토키도 진심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었기에 틈만 나면 본가를 탈취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1592년. 조선 출병 시[각주:5]에 요시히사의 휘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멋대로 행동하다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다음 해인 1593년 카이에키 당하여 처지를 한탄하다 병으로 죽었다.

 또한 오히라는 타다토키 외에 타다키요[清], 타다히데[栄] 등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삿슈우 가문 카이에키 후 히고[肥後] 반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코니시 가문[小西家]로 보내져 유폐되어 있었기에 요시히사의 후계자로 삼기 힘들었다.

 

 둘째 딸(이름 불명)[각주:6] 1563년생으로, 타루미즈 가문[垂水家] 시마즈 테루히사(島津 彰久)의 부인이 되었다.

 타루미즈 가문은 타카히사의 동생 타다마사[忠昌]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테루히사는 3대째 가주(家主)였다. 테루히사는 1594 7월 조선에서 병으로 죽었지만, 1585년 그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이 타다나오[忠仍]를 낳았었다.

 

 또한 셋째 딸 카메쥬[亀寿] 1572년생으로, 처음엔 요시히로의 세자(世子)인 히사야스[久保]에게 시집갔지만, 1593년 조선에서 히사야스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동생인 타다츠네[忠恒]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둘째가 낳은 외손자 타다나오와 셋째 카메쥬의 남편이며 사위 겸 조카인 타다츠네. - 이 둘이 요시히사의 후계자 후보가 된 것이다.

 

제비뽑기로 정해진 후계자

 

 요시히사가 은거했던 1595년. - 타다나오는 11, 타다츠네는 20살이었다.

 요시히사는 자신의 피가 흐르는 외손자 타다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었던 듯하지만 너무 어렸다.

 

 타다나오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죠우 시마즈 가문[新城 島津家]의 족보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요시히사는 사위인 타다츠네로 할지 외손자인 타다나오로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결심하지 못하였고, 쇼우하치만 궁[正八幡宮] 현 카고시마 신궁(鹿 神宮)에서 후계자를 정할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 결과. 타다츠네를 후계자로 하는 제비가 뽑아져 요시하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한다.[각주:7][각주:8][각주:9]

 이 제비뽑기의 이야기는 '신죠우 시마즈 가문 족보[新城島津家家譜]' 이외의 사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필시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시히사는 타다츠네와 카메쥬 사이에서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타다츠네는 이 외손자가 가독을 이어받을 때까지의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요시히사의 기대와는 반대로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생기질 않았다. 카메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자, 요시히사의 머리 속에서는 타다나오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이리해서 가독 계승문제가 다시 문제가 되어 요시히사와 요시히로-타다츠네 부자(父子)간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가신들도 타다츠네 파()와 타다나오 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그러던 중 요시히사는 병이 나 1611 1 21.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

 요시히사의 사망으로 인해 가독 계승문제는 잠잠해져, 타다나오를 지지했던 가신 일부가 숙청되는 것을 끝으로 가문 분열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마즈 가의 가독은 타다츠네에서 타다츠네의 측실(側室)이 낳은 미츠히사[光久]에게로 이어졌다. 이 측실의 부친은 코니시 가문으로 유배를 갔던 삿슈우 가문의 시마즈 타다키요 - 즉 요시히사의 첫째 딸인 오히라의 아들이었다.

 종가(宗家) 적류(嫡流)에 자신의 피를 남기고 싶어했던 요시히사의 꿈은 외손의 혈통이 이어가는 것으로 현실이 되었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2. 타이코우 켄치(太閤 検地)라 읽음. 태합[太閤] 히데요시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삿슈우는 사츠마[薩摩]의 별칭. 시마즈 가문의 분가(分家), 당주가 대대로 사츠마노카미[薩摩守]를 자칭했었던 것이 이름의 유래. [본문으로]
  4. 사츠마의 이사쿠[伊作] 지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시마즈의 분가 이사쿠 가[伊作家] 출신. [본문으로]
  5.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6. 타마히메[玉姫]라는 설이 있음. [본문으로]
  7. 일본은 예전부터 중요한 일을 정하는 제비뽑기를 신의 뜻이라 여겼기에로 정했기에 아주 어처구니 없는 일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8.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의 6대 쇼우군[将軍]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 義教]는 3대 쇼우군 요시미츠[義満]의 셋째 아들로, 별칭이 [제비뽑기 쇼우군]라 한다. 형인 4대 쇼우군 요시모치[義持]의 아들인 5대 쇼우군 요시카즈[義量]가 아버지 보다 먼저인 19살의 나이에 죽고, 3년 뒤에 요시모치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 때문에 당시의 칸레이[管領 – 무로마치 바쿠후의 수상 격] 하타케야마 미츠이에[畠山 満家]는 3대 요시미츠의 아들들 사이에 누구를 쇼우군[将軍]으로 할지 이와시미즈하치만 궁[石清水八幡宮]에서 제비뽑기를 한 결과, 당시 중이었던 기엔[義円]을 환속시켜 쇼우군[将軍]으로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9.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각종 선거에서 동수의 표를 얻었을 경우에는 제비뽑기로 당선자를 정한다. 2007년 11월 27일만 하더라도 오키나와[沖縄]의 나고 시[名護市]의 시장은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