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빈고 님[備後殿][각주:1]오와리[尾張]의 군세를 규합하여 어느 달은 미노노쿠니[美濃國]으로 진격하셨고, 또 다음 달은 미카와노쿠니[三川の國]에 출격하셨다.

  어느 때[각주:2]인지 9월 3일. 오와리 국내의 군세를 이끄시고는 미노노쿠니에 침공하셨다. 이곳저곳에 불을 지르며 진격하셨고, 9월 22일에 사이토우 야마시로 도우산[斎藤 山城 道三]의 거성 이나바야마[稲葉山]의 산 밑의 마을들을 목표로 불지르며 마을 입구까지 다가갔으나, 이미 밤에 가까운 오후 4시 전후가 되었기에 군세를 물리려 하셨다. 군세의 반 정도가 철수 하였을 즈음에, 야마시로 도우산이 갑자기 남쪽을 향해서 돌격해 왔다. 반격에 나섰지만  여기저기 무너졌기에 수비하지를 못하였고, 빈고 님의 동생 오다 요지로우[織田 與次郎][각주:3],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각주:4], 오다 몬도노카미[織田 主水正], 아오야마 요소우에몬[青山 與三右衛門][각주:5], 센슈우 키이노카미[千秋 紀伊守][각주:6], 모우리 쥬우로우[毛利 十郎][각주:7], 가문의 장로인 테라사와 마타하치[寺澤 又八]의 동생 모우리 토우쿠로우[毛利 藤九郎], 이와코시 키사부로우[岩越 喜三郎]를 시작으로 총 5000명 정도가 전사하였다.

  1. 노부나가의 애비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 [본문으로]
  2. 1544년 추정 [본문으로]
  3. 요지로우는 '與(与)二郎'라고도 씀. 노부사다의 차남 오다 노부야스[織田 信康]. [본문으로]
  4. 키요스 삼봉행[清洲三奉行] 중 한명. [본문으로]
  5.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 위키에서는 아오야마 노부마사[青山 信昌]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라는 기록만 있다고 하니, 이 블로그에선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로 한다 사족으로 아오야마는 앞의 '3. 킷포우시 님 관례식에 대하여[吉法師殿御元服之事].'에서도 등장하지만, 앞의 주석에서도 달았듯이, 노부나가가 관례식을 치른 해는 1546년이기에, 앞의 기록은 저자 오오타 규우이치[太田 牛一]의 착각으로 여겨지고 있다. 단, 신장공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 4장의 기사를 1544년이 아닌 1547년의 일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본문으로]
  6. 센슈우 스에미츠[千秋 季光]. 사족으로 센슈우 가문[千秋家]은 아츠타 신궁[熱田神宮]의 신관들의 우두머리(大宮司)를 맡는 가문. 키이노카미 스에미츠는 83대째. [본문으로]
  7. 모우리 아츠모토[毛利 敦元]. 후에 신장공기에 또 모우리 쥬우로우[毛利 十郎]라는 인물이 등장(14. 부에이 님, 자결하신 일에 대해서[武衛様御生害之事])에도 등장하나 아들로 추정. [본문으로]

 킷포우시 님[吉法師殿]이 13살 되셨을 때, 하야시 사도노카미[林 佐渡守][각주:1], 히라테 나카츠카사[平手 中務][각주:2], 아오야마 요소우에몬[青山 與三右衛門][각주:3], 나이토우 쇼우스케[内藤 勝介]를 거느리시어, 후루와타리 성[古渡の御城]에서 관례식을 치르시고는, 오다 사부로우 노부나가[織田 三郎 信長]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셨다. 주연과 축하연이 무척이나 성대히 치러졌다.

 다음 해[각주:4], 오다 사부로우 노부나가는 성인이 된 기념으로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때 히라테 나카츠카스노죠우[平手 中務丞][각주:5]가 여러 준비를 해 주었는데, 그 모습은 빨간 줄이 그어진 두건, 하오리[각주:6], 말에도 갑옷을 걸친 모습이었다.

 (노부나가는) 스루가[駿河]의 군세가 배치된 미카와[三河]의 키라[吉良]와 오오하마[大浜]에 병사를 보내어 이곳저곳에 불을 지르게 한 후, 이날은 야영을 하셨고, 다음 날 나고야[那古野]로 귀성하셨다.

  1.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 [본문으로]
  2.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 [본문으로]
  3.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 위키에서는 아오야마 노부마사[青山信昌]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라는 기록만 있다고 하니, 이 블로그에선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로 한다 사족으로 아오야마는 1544년 9월,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織田信秀]의 미노[美濃] 이나바야마[稲葉山] 공격 때 전사. 노부나가가 13세가 되는 해는 서력으로 1546년으로 이때는 이미 사망한지 2년이 지난 후로. 이는 작자 오오타 큐우이치[太田牛一] 착각으로 여겨지고 있음. [본문으로]
  4. 1547년 [본문으로]
  5. 상기의 '히라테 나카츠카사[平手中務'와 동일인물. [본문으로]
  6. 갑옷 위에 입는 조끼같이 생긴 옷. [본문으로]

출처 : http://www.mofa.go.jp/mofaj/gaiko/page23_000044.html?show=pc

이 글은 2013년 6월 17~18일 영국 북아일랜드 에른 호수에서 행해진 G8 서밋의 정상회의 공동선언문에서 언급된 ‘오픈 데이터 헌장’을 해석한 것이다.




세계는 데이터나 정보를 이용한 기술이나 사회 미디어에 의해 촉진된 국제적인 움직임의 가속을 눈 앞에서 보고 있다. 이는 보다 설명가능하며, 효율적이고 책임이 동반된 실효적인 행정이나 비즈니스를 구축하고,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커다란 가능성을 가져다 준다.

오픈 데이터는, 이러한 세계적인 움직임의 중심에 있다.
데이터로의 접속은 인간이나 조직의 생활을 개선하며, 국내 및 국가간 정보의 흐름을 개선하기 위한 시점이나 혁신을 진화시켜 간다. 정부 및 비즈니스는 폭 넓은 범위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긴 하지만, 반드시 사람들이 이용하기 쉬운 형태로 공유되어 있진 않다.

이는 잃어버렸던 기회이다.
사람들은 정보나 서비스를 편리한 디지털로 가질 수 있길 기대하고 있으며, 정부의 정보 또한 그런 것 중에 하나다. 또한 오픈 데이터는 자국의 천연자원이 어떻게 사용되며, 자원사업의 수익이 사용되어지고, 토지가 어떻게 거래되며 또한 이용되고 있는지 등의 인식을 향상시킨다. 이런 것들이 책임이 의무나 안정된 행정을 촉진시키며, 사람들의 논의를 촉진시키고, 정부 비리에 대한 투쟁을 지원한다. 또한 G8의 개발원조에 대한 투명성 있는 데이터는 책임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 데이터로의 접속을 제공하는 것은 개인, 미디어, 시민사회 및 비즈니스계에 보건, 교육, 안전, 환경보호나 행정 등 공공서비스를 보다 좋게 행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오픈 데이터는 이하에 따라 이런 것들을 행할 수 있다.

  • 세금이나 공금 사용의 용도를 게시함으로서, 보다 효율적인 사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사람들이 서비스나 그 수준에 관해서 상세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

무료로 된 정부 데이터는 사람들이 보다 쾌적한 현대생활을 보내기 위한 수단이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될 수 있으며, 결국에는 민간부분에서의 개혁을 위한 촉매가 되어, 기존의 시장이나 비즈니스 및 고용 창출을 지원한다. 우리들은 오픈 데이터가 기술혁신과 번영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시민의 요구에 합치된 강고하고 상호보완적인 사회를 구국하기 위한 커다란 가능성을 가진 미개발된 자원이라는 것에 합의한다.

그를 위해 우리들은 이하의 원칙에 합의한다.

  • 원칙적으로 오픈 데이터
  • 질과 양
  •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다.
  • 행정 개선을 위한 데이터의 공개
  • 기술혁신을 위한 데이터의 공개

우리들은 각각 자국의 정치적, 법적 틀 안에서 행하면서도, 본보기나 국내 행동계획에 설정된 시간축에 따라, 이러한 원칙을 이행해 간다. G8각국은 연말까지 이 원칙을 이행하기 위한 활동계획을 책정하여, 2014년 다음 회담에서 진행평가를 행한다.

우리들은 다른 국가 및 다자간협의[각주:1]에도 이 헌장의 검토를 호소한다.

원칙 1 : 원칙으로서의 오픈 데이터

  • 데이터에 따라서는 공개할 수 없는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한편, 이 헌장에 제시되어 있듯이 정부의 모든 데이터가 원칙적으로 공개될 것이라는 기대를 양성한다.

원칙 2 : 질과 양

  • 시기적절하게 포괄적이고 정확한 질 높은 오픈 데이터를 공개한다.
  • 데이터의 정보는 다른 언어들로 번역될 필요는 없지만, 평이하고 명확한 언어로 기술될 수 있도록 한다.
  • 데이터가 장단점이나 분석의 한계 등, 그 특성이 알 수 있도록 설명될 수 있도록 한다.
  • 가능한 빨리 공개한다.

원칙 3 :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다.

  • 폭 넓은 용도를 위해서 누구나가 입수가능한 오픈적인 형식으로 데이터를 공개한다.[각주:2]
  • 가능한 많은 데이터를 공개한다.

원칙 4 : 행정 개선을 위한 데이터의 공개

  • 오픈 데이터의 이익을 전세계의 누구나가 얻을 수 있도록, 기술적 전문성이나 경험을 공유한다.
  • 데이터의 수집, 기준 및 공개 과정에 관한 투명성을 확보한다.

원칙 5 : 기술혁신을 위한 데이터의 공개

  • 오픈 데이터의 응용도를 높여, 오픈 데이터에 관련된 사람들을 육성한다.
  • 다음 세대의 데이터 기술혁신가의 능력을 강화한다.


(기술적인 면에 관한 첨부)

파트 1. 본보기

원칙 1 : 원칙으로서의 오픈 데이터

  • 공공에 대한 취지 설명 중 우리들의 오픈 데이터에 관한 노력을 알린다.
  • 자국내의 활동계획을 공개한다.
  • 자국내 포털사이트에 데이터를 공개한다.

원칙 2 : 질과 양

  • 확실하고 일관성 있는 메타데이터(테이터에 관한 속성정보를 설명하는 테이터)의 사용.
  • 최근에 생성된 중요한 메타데이터 해설의 최신화 및 갱신(업데이트).
  • 충분히 구체화된 데이터의 확보.
  • 데이터 사용자에게 의견 청취.

원칙 3 :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다.

  • 편리하고 공개된 포맷으로 데이터를 이용 가능하게 한다.

원칙 4 : 행정 개선을 위한 데이터의 공개

  • 민간조직이나 개인과의 연결을 구축한다.
  • 우리들의 데이터 수준에 대해 정보개시한다.
  • 오픈 데이터에 관한 작업을 행하며 얻은 경험을 기록한다.

원칙 5 : 기술혁신을 위한 데이터의 공개

  • 저작권을 존중하면서, 오픈 라이센스를 사용한 데이터의 생성을 지지한다.
  • 데이터를 모아 기계판독할 수 있도록 한다.
  •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를 사용하여 데이터를 공개한다.
  • 데이터의 혁신적인 사용방법을 촉진한다.


파트 2. 공동 행동

행동 1 : G8 각국내행동계획

  • 자국내 체재에 맞춘 오픈 데이터 헌장의 이행을 위해 각국의 행동계획 발표(2013년 10월).
  • 연 1회 이행보고(2014년 10월 및 2015년)

행동 2 :고부가가치 데이터의 공개

  • 고부가가치 데이터의 이행 및 개발의 촉진.
  • ‘원칙으로서의 오픈 데이터’ 및 ‘질과 양’의 각각의 원칙에 따라, 특정 우선분야의 데이터를 점진적으로 공개하기 위해 힘쓴다.
  • 통계, 지도, 국정선거, 국가예산의 주요한 데이터 세트의 작성(2013년 6월부터).
  • 2013년 12월까지 공통된 데이터 세트의 설정을 행한다.
  • 자국내 체재에 따라, 그 외의 데이터 공개에 관한 자국내 활동계획을 작성한다(2013년 10월).

행동 3 : 메타데이터의 도표화

  • G8의 메타데이터 도표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2013년 6월)


ps; 해당 분야의 문외한이다 보니 관련 용어 등의 차이가 있으나, 하해와 같은 맘으로 이해해 주심 고맙겠습니다.
ps2; '오픈 데이터'를 '정보 공개'로 번역해야 하나 담배 필 동안 고민했습니다만, 검색해보니 '오픈 데이터' 쪽이 많은 듯 하여 '오픈 데이터'란 용어를 썼습니다.

  1. 예를 들어, OPEC이나 ASEM, NATO 등. [본문으로]
  2. 그러니까 .hwp 나 .alz 같은 거 쓰지 말아달란 이야기. [본문으로]

민아님의 체조송

그냥 생각난 것 2013. 5. 20. 10:28 Posted by 발해지랑

...그냥 웃으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http://jbpress.ismedia.jp/articles/-/36130
저자 : 코모리 요시히사[古森 義久]

 많은 중국의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일데모가 몹시 거칠어지고 있다. 일본이 센카쿠 제도[尖閣諸島]를 국유화한 일에 대한 중국 국민의 분노라고 한다.

 그러나 공산당 일당독재로 결사의 자유나 집회의 자유가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는 중국에서 일반 국민부터 시작되는 자연발생적인 데모는 있을 수 없다. 정부당국이 묵인 혹은 선동하지 않는 한 다수의 인간이 모이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국에서의 집회라던가 데모라는 것은 당국에게 있어서 수도꼭지를 조절하는 것과 비슷하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의 양을 조절하는 것처럼, 항의의 움직임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말이다.



중국의 반미데모와 반일데모의 차이

 필자 자신이 목격한 실례는 1999년 6월 베이징(北京)에서의 반미데모였다. 이 데모는 미군기를 주력으로 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소속 항공기가 당시 유고슬라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하여 안에 있던 중국인 3명이 사망하고 20명 정도가 중경상을 입은 사건(wike_en)에 대한 중국측의 항의였다. 미국은 당초부터 일관되게 오폭이라 해명하고 있었다.

 사건으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베이징의 미국대사관 앞으로 매일같이 항의 데모대가 몰려들었다. 당시 산케이 신문[産経新聞] 중국총지국장으로 현지에 머물고 있던 필자도 매일 미국대사관 주변에서 상황을 관찰하였다.

 이 데모는 완전히 정부당국의 관리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데모 행진을 하며 미국대사관 안으로 돌까지 던지던 당사자들은 모두 베이징 내외에 있던 대학의 학생들이었는데, 전원이 버스로 동원되었다. 대학별로 현장 근처까지 버스로 수송된 남녀학생들은 버스에서 내려 대열을 정돈하고는 대사관 앞까지 행진했다. 도중 길에서 돌을 주워 대사관에 던졌는데, 미국대사관 앞에는 중국인 경찰관들이 줄지어 서서는 보통 크기의 돌을 던지는 것은 묵인했지만 일정이상으로 큰 돌을 던지려고 하면 곧바로 정지시키는 식의 정교한 '데모 관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 당국이 쓴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항의데모였던 것이다.

 이번 반일데모도 중국 당국의 그러한 관리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이 명백하다. 단지 중국의 일반국민들은 원래부터 일본이나 일본인을 굉장히 싫어하는 경향이 높기에, 중국 당국은 '반일'의 움직임을 방치해 놓기만 하여도 알아서 활발해진다. 당국의 관리는 오히려 '언제쯤 막을까?'이다. 반일의 움직임이 폭주하여 '반중국공산당', '반중국정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중국 일반국민이 가진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중국사회에 가득 채우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오랜 기간 행해온 반일교육이 그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센카쿠 문제에 대해 알아서 양보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 중국 내부적으로는 반일표명으로 애국심과 공산당정권 지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중국 당국에 있어서는 이러한 대규모 반일데모의 확산도 효용성이 있는 것이다.


심어진 '희생자의식에서 시작되는 일본에 대한 증오'

 이러한 중국에서의 반일도식에 대해 미국의 중국연구학자가 내셔널리즘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발표한 논문이 흥미로웠다. 그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의 반일 움직임의 전체상을 입체적이고 투명하게 볼 수 있다. 확실히 내셔널리즘의 요인은 지금 중국에서의 반일 움직임의 상징적인 현실의 일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논문은 '뉴욕타임즈'에 2012년 8월. 즉 전달에 기고된 것이었다. 필자는 오클라호마 대학의 미중 문제연구소 소장인 피터 그리스(wiki_en)교수 이다.

 그리스 교수는 소년기를 중국에서 보냈으며, 1999년에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오하이오 대학, 콜로라도 대학을 거쳐 2006년부터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직 40세 전후의 중국연구학의 신진기예이다. 기고논문은 '어째서 중국은 일본에, 그리고 미국에게도 분노하는 것인가?(Why China Resents Japan, and Us)(newyorktime_en)'라는 제목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이번 반일데모는 내셔널리즘적인 이데올로기가 그 기원이라고 한다. 데모 참가자들이 품고 있는 일본에 대한 반감은 진실이며, 결국 그 원인은 중국당국에 의한 과거의 '희생자의식에서 시작되는 일본에 대한 증오'라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자국민에게 행하는 역사교육으로 인해, 특히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워오도록 노력해 왔는데, 그 기반이 되는 것이 내셔널리즘을 강화시키도록 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셔널리즘이라는 단어를 일본어에서는 '국가주의', '국수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번역하는데, 중국의 경우 한(漢)민족 특유의 자기의식이 기초가 되기에 '민족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어쨌든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관해서 일청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부터 일중전쟁에서의 후퇴, 난징(南京) 학살 등 일본의 마이너스한 부분만을 가르치며, 도의적 겸 증오의 차원에서의 내셔널리즘으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심고 있다고도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 교수의 논문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노의 내셔널리즘은 우선적으로 일본에 향해지겠지만 결국 미국도 그 대상이 된다. 중국이 타이완(臺灣)과 일본, 양쪽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미국이 타이완과 일본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크다. 한국전쟁 때 미국이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으로 파견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벌써 타이완을 병합하였을 것이다.[각주:1] 일본이 센카쿠 문제 등으로 중국에 거역하는 것도 미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에 큰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에게 있어 영원한 통치의 정당성은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촉진해 온 것에 있다. 내셔널리즘에 철저한 정치집단이 나라 전체를 통치해 가야만 한다는 인식이다. 이 내셔널리즘 인식은 차기 정치지도층을 선택하는 회의가 한창 진행될 때 특히 중요해진다"

 즉 중국공산당은 이 내셔널리즘과 일체가 된 '반일'이야말로 통치하는 자신들의 정당성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 는 지적인 것이다.


반일감정은 하의상달식의 형태로 활발해지고 있다.

 사실 필자는 그러한 점에 대해 그리스 교수와 4년 전에 이미 개별인터뷰로 견해를 물어본 적이 있다. 2008년 7월 일중관계가 단기간이지만 소강상태인 시기였다.

 그때 그리스 교수의 견해를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소개하겠다. 여기서 현재 중국의 반일데모에 숨겨져 있던 진실이 떠오를 것이라 생각한다.

- 중국의 내셔널리즘의 특징은?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국민이 자국에 대해서 품고 있는 소속감과 지지 의식을 지칭하는 것인데, 중국의 경우에는 굉장히 특수한 형태로 민족문화, 특히 한(漢)민족의 피가 기반이다. 중국은 문화면에서 자국의 오래된 문명에 대한 자긍심이 주된 것이며, 근년에는 거기에 역사상의 굴욕이라는 요소에서 오는 피해자의식이 가미되었다. 그 피해자의식에서 오는 분노가 일본으로 향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 중국의 그 내셔널리즘은 일본에 대한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불행하게도 중국의 대일정책형성에는 이 내셔널리즘이 주요인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는 일중양국에 있어서도, 북동아시아의 평화나 안정에 있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1990년대까지 중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역사인식에서도 '중국공산당의 지도로 일본의 제국주의자를 타파했다'는 식으로, 중국측의 승리나 영웅주의 강조가 주된 것이었다. 그런데 95년 즈음부터 애국주의교육이 개시되며 중국측의 역사교과서가 바뀌어, 제2차대전의 새로운 해석, 난징학살의 새로운 논의 등으로 인해 대일인식도 변했다. 일본은 중국문화에서 오랜 기간 수혜를 입었음에도 그 은혜를 잊고 일청전쟁에서 중국을 이겼고, 이후에도 침략을 계속했다는 역사해석이 퍼졌다. 일본측의 잔학성이나 불공정을 선전해서, 일반중국인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식으로 하여 현대 중국측의 가진 반일감정의 기반이 되었다. 이 감정은 영속성이 강하다. 이러한 점에서는 중국측의 대일감정은 다른 외국에 대한 감정과는 굉장히 다른 것이다."

- 중국 당국이 자국민의 반일감정을 강화시키고 그것을 대일정책의 도구에도 사용한다는 것인가?

"확실히 중국 당국은 자국민의 반일감정을 일본과의 외교나 비즈니스에도 이용하는 일이 많다. 역사카드에도 잘 사용한다. 하지만 반일감정은 상층부에서가 아닌 일반국민에서 시작되는 하의상달이라는 형태로 발달된 부분도 있다. 난징학살의 기념관설립은 해당 지역민의 요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국민의 반일감정이, 정부가 원래 바라던 것보다 더 강경한 대일자세를 취하게 하는 일도 있다. 2005년 봄의 반일데모 때도 그러했다."

- 중국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자국민에게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만든다는 지적도 있는데?

"우리 공산당이야말로 일본의 군국주의세력을 물리치고 중국을 해방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은 군국주의를 부활시킬 위험이 있기에 우리 공산당이 계속 정권을 잡고 있어야만 한다는 '정당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반일감정에는 당의 바람대로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코이즈미[小泉]정권시절, 중국 당국이 코이즈미 이치로우[小泉一郎] 수상을 굉장한 비난한 적이 있었는데, 중국 일반국민들은 그것을 보고 더욱더 부정적인 코이즈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런 일반국민의 과격한 증오 때문에 중국 지도자가 코이즈미 수상과 회담을 하고자 하여도 불가능해진 것이 그 실제적인 예이다."

- 일중관계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

"표면적으로는 확실히 개선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기본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과거 요 수년 동안 일어난 민간레벨의 충돌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중국측에서 과격한 반일데모가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상기의  '일중관계의 현재 상황'이라는 것은 2008년 7월 시점에서의 상황을 말한다. 그 4년 뒤인 현재, 중국에서 활발한 반일데모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리스 교수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  된다. 그리고 현재 중국에서의 '반일'은 내셔널리즘의 발로로서 중국 공산당정권의 존속에 필요한 활력제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 중국은 1950년 10월 타이완 침공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미국이 대비의 측면에서 타이완해협에 제7함대를 배치...한 것을 말하는 듯.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