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히데요시[秀吉]도 그렇게 생각한 듯 했다. 실은 이 히데야스가 마장에서 일으킨 사건이 있던 해에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태어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는 그렇게 많이 양자를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히데야스가 가지고 있던 ‘인질’로서의 정치적 효용도 과거의 것이 되고 있었다.
 - 이을만한 명문가가 있다면……
 하고 히데요시는 양자 히데야스를 다른 가문에 보내기로 마음먹기 시작했다. 후년, 같은 양자인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를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낸 것과 같은 것을 –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마장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 칸토우[関東]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에게서 이야기가 왔다. 유우키 씨(氏)라고 하면 카마쿠라 시대 때 부터의 명문가로, 센고쿠[戦国] 때 갑자기 생긴 벼락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다. 현 당주는 하루토모[晴朝]라고 하며, 이 해 – 1590년 히데요시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공격했을 때, 하루토모는 내속(來屬)해서 토요토미 가문의 산하에 들어왔다. 그때 그는 히데요시와의 유대를 강하게 하기 위해,

 “소인에게는 아이가 없어 유우키 가문은 졸자의 죽음과 함께 끊어지게 생겼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가 누군가 정해주시면 그 사람을 상속자로 하겠습니다”

 하고 부탁해 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기특함을 기뻐하며,

 “그러고 보니 알맞은 사람이 있네”

 하며 곧바로 히데야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유우키 가문이라면 카마쿠라 때부터 무문(武門)의 명문가로 일본에서 유명했다.

 이 오다와라의 진(陣)에 이에야스[家康]도 참가하고 있었다. 부르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올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항상 가신으로 대하지 않고 객장(客將)으로 존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성의를 보여 일부러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에는 이런 종류의 용무에 항상 얼굴을 내미는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 ]를 선택해 알선을 맡겼다. 요시타카는 이에야스의 진영으로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귀가(貴家)에 있어서 정말로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고 요시타카는 말했다.
 정말 그러할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이 오다와라 정벌의 종결과 함께 칸토우 250만석 이봉(移封)의 내락을 받고 있었다. 새로 이전할 곳의 수도는 꼭 에도[江戸[각주:1]]
로 하시길 – 이라는 조언까지 히데요시에게 받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낳은 히데야스가 유우키 가문을 상속받아 유우키 성(城)의 성주가 된다고 한다. 유우키 성(城)은 칸토우의 북동에 위치하며, 오우슈우[奥州]에서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요새(要塞)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땅에 히데야스를 둔다는 것은 토쿠가와 가문의 방위에 있어서 이 보다 고마운 일은 없었다.

 “예. 이보다 고마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는 감격하여 졸자에게 있어선 아무런 이의도 없다는 뜻의 대답을 했다.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곧바로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자식이라는 자격으로 칸토우로 내려가, 에도에서 진짜 아비인 이에야스와 대면을 한 후 거기에서 오우슈우 가도(街道)를 거슬러 올라가 유우키 성(城)에 들어갔다. 거기서 처(妻)를 얻었다. 처는 유우키 가문의 당주 하루토모의 손녀로 사쿠코[咲子]라 하였다.
 히데야스는 이때부터 ‘
유우키 히데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석고는 5만석이었다. 전 당주인 하루토모는 은거하였고,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따로 은거료(隱居料)를 하사하였다.

 득을 보았다 – 는 것이 이에야스였다. 인질인 히데야스를 실질적으로 되돌려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더구나 그를 위해서 따로 영지(領地)를 떼어 줄 필요도 없이, 다른 가문의 땅을 상속받아서 돌아온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히데야스는 복을 가져다 주는 자식일 것이다.

 하시바 성[羽柴姓]에서 유우키 성(姓)을 이은 히데야스는 다이묘우(大名)로서의 입장도 바뀌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토쿠가와 가문에 속한 다이묘우였다.
 - 격이 떨어졌다.
 는 감정이 히데야스에게는 있었다. 거기에 조금 맘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동생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보다 끗발이 낮아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이런 노골적인 감정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있을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의중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저 자존심 강한 히데야스의 기상으로 보건대, 이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불운한 환경에 만족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을 히데야스는 참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오만[おまん]의 자식은 굉장히 참을성 있는 사나이로 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런 만큼 장래가 두려웠다.

 가문을 상속한 뒤 히데야스는 그에 대한 보고 겸 인사를 하기 위해서 에도에 왔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크게 환대하라고 시켰고 아예 날을 잡아서는 이 자기 아들과 대면하였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굉장히 정중하게 히데야스를 대했다.
 - 유우키 쇼우쇼우님(結城 少将殿 –
이하 ‘쇼우쇼우[少将]를 ‘소장’으로 씀 – 역자 주).
 이라는 호칭으로 이 아들을 불렀으며, 무언가를 물어볼 때도 항상 미소를 띄웠다. 조심함이 있었다. - 라기보다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히데야스가 태어났을 때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대면을 꺼렸고 그 후 토요토미 가문에 양자로 주고 말았다. 더욱이 토쿠가와 가문의 자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가문을 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고 생각하여, 그렇게 생각하면서 히데야스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이 혈색이 좋고 눈이 큰 젊은이는 이에야스에 대해서도 히데타다에 대해서도 공손하여 조금도 그러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젊은이를 화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하여, 말 그대로 종기가 난 곳을 건드리는 듯이 조심조심하였다.
 - 소장님께 예의를 다할 것.
 이라고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도 머리에 새겨질 정도로 말해두었으며, 특히 세자인 히데타다에 대해서는 그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성격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만 채워 주면 되었다. 만약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히데야스의 자존심에 상처라도 주는 행태를 보인다면 이 젊은이는 필시 이에야스가 죽은 후 히데타다를 멸하고 토쿠가와 가문을 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남이 띄워주면, 지 잘난 줄 아는 병진은 아닌 듯 하구만’
 이라고도 이에야스는 관찰했다. 이 점이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다소 안심이기는 했다.

 그런데 히데야스는 에도에서 이에야스와 만남을 가진 후 자기의 영지(領地)로 되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상경해서는 후시미[伏見]를 떠나지 않았다. 후시미에 있는 히데요시의 의향이었다. 히데요시는 히데야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으며, 어디까지나 후시미의 궁중 안에서 근시(近侍)시키고자 있었다. 히데야스도 히데야스로 칸토우에 있는 것보다 히데요시의 슬하에 있는 쪽이 편했으며 마음도 흥겨운 듯 했다.

 이후, 히데야스는 예전 양아비인 히데요시의 죽을 때까지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1592년의 조선 침략 때는 히데요시를 따라서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의 대본영까지 따라갔으며, 히데요시가 후시미로 돌아오면 그림자와 같이 호종하며 후시미[伏見]로 돌아왔다. 한시도 히데요시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토요토미 가문 양자들 중에서는 가장 충실한 양자였을 것이다. 하기사 히데요시가 놓지 않았다.

 “소장님은 내 곁을 떠나지 마시게”

 하고 히데요시는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끝에 꼭 이 말을 붙였다. 노인이 되어 심약해진 탓인지 아니면 소장 히데야스라는 젊은이가 그렇게나 귀여웠던 것인지 혹은 정치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 필시 이유는 그것들이 전부 섞여 있을 것이다.

 정치상의 이유라는 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적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면서부터 생긴 것이다. 히데야스의 존재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눈에 복잡미묘하게 비쳐져 왔다.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과 토쿠가와 가문을 잇는 가교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 히데요시는 죽는다. 히데요리는 남는다. 천하의 권력은 이에야스의 손에 쥐어질지도 모른다. 히데요리의 앞날은 예전 오다 가문 공자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죽을까, 쫓겨날까, 약소 다이묘우의 위치로 떨어지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때야말로 유우키 히데야스가 일어나 히데요리의 좋은 보호자가 되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기대했다.

 어쨌든 히데야스는 칸토우로 돌아가지 않았다. 유우키 성(城)은 가신에게 맡겨둔 채 그 자신은 오오사카[大坂]와 후시미에 저택을 지어 거기에 상주했다. 매일 후시미 성(城)에 등성하였다. 히데야스의 모습은 항상 궁중의 대기실에서 볼 수 있었으며, 히데요시는 그런 것을 노옹(老翁)의 천진난만함으로 기뻐했다.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히데요시가 기쁘다고 하면, 그리고 그것이 이에야스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히데야스는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말년, 병으로 인해 눕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때때로 히데야스에게 허리를 주무르게 하거나 했다. 어느 때인지,

 “이것이 늙어서의 즐거움이란다”

 하고 히데요시는 누워서 말했다. 젊을 때는 분골쇄신하며 일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몸의 뭉친 곳을 주무르게 한다. 이승에서 이보다 행복한 것은 없다 –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야스의 손바닥이 스쳐가고 있는 히데요시의 몸은 더 이상 육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정도로 말라 삐들어져 있었다. 히데야스는 그것에 슬픔을 느꼈다.

 “오히로(お拾=히데요리)는 너의 동생이다. 오랫동안 잘 돌보아 주렴”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검게 변색된 피부가 이제는 종이와 같아, 생기가 없었다. 그 건조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말을, 히데야스는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동생이다’
 라는 말을 들어도, 솔직히 말해 히데야스에게는 그런 실감이 나지 않았다. 히데요리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천하의
숭경(崇敬)을 모으고 있었으며, 관위는 정사위(正四位) 코노에츄우죠우[近衛中将]였고, 양자이지만 형이라고 하는 히데야스는 아주 멀치감치 떨어져서밖에 배알(拜謁)할 수 없었다.

 동생이라고 하면 한 명 더 있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 히데타다였다. 그는 틀림없이 피가 이어진 동생이었지만, 그러나 이쪽의 동생도 이미 종삼위(従三位) 츄우나곤[中納言]이며, 형인 히데야스는 그 가신 격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히데야스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 동생은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에 비해 형이라고 하는 자신은 현실의 위세가 너무나도 낮았다. 히데야스는 지금도 여전히 유우키 5만석의 영주이며 불과 200명 정도의 무사[侍] 밖에 거느리지 못하였다. 이것이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자신의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자신이 너무 비참했으며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히데요시라는 양아비에 대해서 골육의 정과 같은 마음을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즈음엔 함께 욕실에도 들어갔으며, 욕실뿐만 아니라 히데요시는 불이 붙은 선향(線香)을 들고 손수 히데야스의 피부를 태우며 뜸을 떠준 적도 있다. 그런 기억은 진짜 아비 이에야스와는 한번도 없었다. 이에야스라는 아비의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그 몸과 스친 적은 없었다.

 지금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지금 손에 느껴지는 이 노인 쪽이 훨씬 육친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수년이 지나 히데야스가 28살 때 히데요시가 죽었다. 1598년 8월 18일이었다. 그날 밤 이후 정세는 불안정이 이어져 후시미 성(城) 밑은 밤마다 소란스러웠으며, 유언비어가 날라 다녔고, 3일이 지나지 않아 시민들은 가재를 짊어지고 도망치기 위해 거리를 내달렸다.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의 권위에 의해 억제되어있던 토요토미 가문의 파벌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공공연해졌다. 그들은 무력으로 대항하며 싸우고자 했다. 다이묘우끼리 성 밑에서 싸운다는 소문이 자주 돌았으며 더구나 이는 뜬소문이 아니었다.

 토요토미 정권의 질서가,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질서를 재건할 수 있는 인물은 어린 주군 히데요리가 아닌 이에야스여야만 한다는 자연스런 기대가 그에게 모였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정권하에서 가장 큰 다이묘우이며, 오다 가문 때부터 이어진 그 역사적 명성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가라앉히는데 충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세상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겐키-텐쇼우[元亀-天正][각주:2]의 혼란이 다시올 것이라는 바램이나 견해가 세상의 밑바닥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1. 현 토요쿄우[東京] [본문으로]
  2. 각각 일본의 연호로 1570년~1591년까지를 지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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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13 2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리는 내 동생'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말이었군요.
    사실 유우키 히데야스가 장수했다면.. 뭐 장수라고 할 것도 없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도요토미가는 메이지때까지 이어졌을지 모르지요.

    그나저나 유우키씨가 5만석밖에 안됐었다니 의외군요.. 혁신의 1국 1성개념이 너무 익다보니..;;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5 0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능성은 있었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보는 방식에 따라선) 토쿠가와에서는 조금 무시받는 듯 했기에, 토요토미 측에 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10만석, 10.1만석 이라는 소리는 들어보았습니다. 언제 함 찾아봐야겠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7.15 1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쿠가와 휘하 다이묘가 되었었군요. 전 히데요시가 마사무네와 함께 히데야스를 이에야스를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배치시킨거라고 생각했는데 흠. 이 양반은 확실히 운이 더럽게 없음. 쓰끼야마도노 이후에 정실이 정해져서 양자로 정실의 아들로 봉해져서 세자가 되면 보내질건 사실상 히데다다고 자신은 에도에서 방바닥에 뱃때지 땃땃하게 지낼 2대 쇼군. 그렇지만 결국 몇년의 시간차로 아사히히메의 아들로 정해져 세자가 히데다다로 정해지고 자신은 변방(-_-;;)다이묘. 역시 인생은 운인겁니다. 네네.. 그래서 우린 로또를 사야되는겁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5 2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에야스의 아들을 방비책으로 보내기는 좀 힘들지 않았을까요? ^^
    그렇습니다. 우리는 로또를 해야 합니다. 제가 100억대의 1등이 되고 나면, 흰꿈님의 대박을 꼭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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