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이로부터 몇 년이 흘러 토쿠가와 가문의 가정에도 많은 변동이 있었다. 변동 중에 최대의 흉사(凶事)는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기후[岐阜]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지시로 인하여 그 생모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자결를 강요 받아 죽은 것이다.
 1579년이었다.
 이유는 노부야스와 관련된 정치상의 의혹이었다. 비밀리에
카이[甲斐]의 타케다 가문[武田家]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았다. 당시 토쿠가와 가문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았지만, 그러나 노부나가는 믿었다. 이에야스에게 처와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노부나가는 토쿠가와 가문 적자의 기량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듣고 오다 가문 장래에 불안을 느꼈다. 그를 죽이는 것으로 노부나가는 자기 자손의 안전을 꾀했다 – 는 설도 있다.

 노부나가의 진짜 의중은 모르겠지만 그 명령은 명쾌했다. 그의 산하(傘下) 다이묘우[大名]인 이에야스에게 있어 따르던지 반항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반항하기에는 이에야스가 너무 약소했다. 동쪽에는 타케다 씨(氏)가 있어 그 무력이 여전히 토쿠가와 가문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 타케다 씨(氏)의 군사적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종전대로 오다 가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가문을 보전해 가기 위해서는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죽였다. 그들을 죽인 것은 부친이며 남편인 이에야스의 마음이 아니라, 이에야스가 필사적으로 키우고 있던 자신의 권력이라는 것이었다. 그 권력의 의지에는 이에야스 자신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노부야스의 죽음은 1579년 9월 15일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二俣]에서 행해졌고, 그의 모친이 죽은 것은 그 전달 25일 토오토우미 토미츠카[冨塚]에서 행해졌다. 노부야스 21세였다. 미카와[三河]의 백성들은 이 불행에 통곡하며,

[참으로 분하고 억울한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또 나오기 어려우니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
 라고 쑤군대며 자해한 젊은 주군을 아쉬워했다.

 이때 얻은 이에야스의 상심은 천하를 얻은 말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물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다만 이에야스의 성격은 참을성이 매우 깊기에 이런 슬픔을 충분히 견뎠다. 비통한 나머지 흐트러지는 일 없이 평소대로 군무(軍務)도 정무(政務)도 막힘이 없었다. 죽이라고 명령한 노부나가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견딘 이 인물 쪽이 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는 순서를 가지고 말하자면 오기마루(於義丸)가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이에야스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은 듯 했다. 오기마루가 장래 토쿠가와 가문을 짊어질 정도로 똑똑한가, 아니면 우둔(愚鈍)한지를 판별해 보려는 것 조차 이에야스는 흥미가 없는 듯 했다. 때때로 사쿠자[作左]가 이에야스 앞으로 나아가서는 - 오기마루님의 일상을 지켜보건대 필시 뛰어난 명장이 되실 기량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 말을 해보곤 했지만 이에야스는 말려들지 않았다.

 “여섯 일곱 먹은 아이의 행동으로 장래의 기량을 점칠 수는 없다”

 고 말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키우며 교육하고 있는 사쿠자에게는 그렇게 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사쿠자가 보건대 결국은 히데야스의 생모 오만[おまん]에게 문제가 있는 듯했다. 이에야스는 그 부자대면 후 오만을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불러들여 방을 하나 내 주었지만, 그러나 오만과 다시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와의 애정을 이어갈 정도의 매력이 오만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 배에서 나온 아이에게도 정이 잘 가지 않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실은 어린 과부를 사랑하고 있었다. 오아이[お愛]라는 이름이었다. 그 오아이가, 노부야스가 죽은 해의 8월. 눈썹이 엷은 남자 아이를 낳았다. 모친인 오아이는 그래도 18살로 젊었으며,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에야스는 그녀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 자연히 그 핏덩이에게도 깊은 정을 보냈다. 아기이름을 나가마루[長丸]라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야스는,

 “타케치요(竹千代)라고 불러라”

 고 말했다. 이것로 사태는 매듭지어졌다. ‘타케치요’라는 것은 토쿠가와 가문 대대의 관례로써 후계자인 아이에게 붙이는 아기이름이었다. 이에야스도 꼬꼬마일 즈음은 타케치요라 불렸으며, 먼저 죽은 노부야스도 꼬꼬마일 때는 타케치요였다. 그렇다고 하면 이 핏덩이는 토쿠가와 가문의 세자(世子)라는 것이 될 것이다.

 다섯 살 연상의 형 오기마루는 무시되었다.
 - 동생을 세우고, 형을 무시하면 나중에 가문 내란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하고 그리 속삭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모르는 척 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러한 것에 가장 신경을 쓰는 인물이였기에 은밀히 여러모로 궁리하여 오기마루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음 해, 또 오아이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셋째이면서도 오츠기마루[於次丸[각주:1]
]라고 이름 지었다. 세자의 다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장남일 터인 오기마루는 또다시 무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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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흘렀다.

 이에야스의 운명이 180도로 변한 것은 1582년 6월 오다 노부나가가 쿄우[京]의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자신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살해 당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의 머리 위에 서 있던 사람이 사라졌다. 남겨진 오다 정권을 이을만한 인물은 자기라고, 이에야스는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더 빨리 미츠히데를 물리친 것은 오다 가문의 엘리트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였으며, 히데요시는 그 기세를 타고 정권을 손에 넣으려 했다. 당연 그 반대파와의 사이에서 권력 쟁탈의 내홍(內訌)이 일어나 히데요시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싸웠고, 결국에는 오다 가문의 호쿠리쿠[北陸] 총독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침으로 인해 정권 탈취 전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이 쟁란(爭亂)의 밖에 있었다. 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밖에 두었다. 이에야스는 오히려 이 난을 틈타서 자기 영지(領地)를 늘리는 것에 방침을 두고 토우카이[東海] 지방의 이삭줍기에 전념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때 이에야스는 본국인 미카와 말고는 불과 토오토우미를 가진, 양 지역을 합쳐 60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 눈깜짝할 사이에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 세 지역을 주워 총 130만 석으로 땅을 늘렸다. 그 동원병력은 가볍게 3만4천을 넘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토우카이의 패왕(覇王)’이라 말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정권을 확립하였다. 그 지배영역은 킨키[近畿], 호쿠리쿠[北陸], 산인[山陰], 산요우[山陽]의 일부를 포함한 6백30만석에 가까웠다.

 당연히 양자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信雄]에게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의 동맹자가 되어 히데요시를 고발(告發)하는 입장으로 도전했다.
 히데요시야말로 오다 정권을 도둑질한 자이다 – 라는 입장이었다. 명분으로써는 유리했다. 곧이어 양군은 노우비[濃尾[각주:2]]
평야에서 대치하였고, 1584년 늦은 봄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군의 이동을 탐지하여 그것을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크게 물리쳤다. 하지만 기껏해야 국지적 승리로 전쟁 자체에는 영향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이루어가는 과정 중이었기에 여기서 이에야스와 결전을 벌이기 보다 오히려 외교로 꼬셔서 자신의 막하(幕下)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우선 오다 노부카츠를 회유(懷柔)하였다. 이에야스는 고립되었다. 거기에 그 이에야스를 히데요시는 회유했다. 이에야스는 그 권유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상 싸우면 압도적 다수인 히데요시의 군세에 멸망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9월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사이에 강화(講和)가 성립되었다. 히데요시가 내민 조건 중에 하나는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받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질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 고 이에야스는 처음에 그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전투의 승리자가 인질을 받치고 적에게 평화를 구걸하는 것은 고금동서에 예가 없었다. 히데요시는 곧 그 말을 고쳤다.
 - 양자를…
 이라는 것이었다. 인질이건 양자건 자신의 아이를 받친다는 그 내용에 변함은 없었지만, 그러나 양자 결연이라고 한다면 세간에 대해 이에야스의 체면이 선다. 이에야스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거기서 이에야스는 오기마루를 토요토미 가문에 바치기로 한다. 타케치요는 그 동생이면서 세자이기 때문에 보낼 수 없었다.
 - 이제서야 오기마루의 쓸모가 생겼군.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오만이 낳은 오기마루는 이러한 외교상의 재료로 사용되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에서 키워진 듯한 것이었다. 나이도 11살이 되어 있었다.

  1. ‘츠기(次)’는 ‘다음’이라는 뜻. 이에야스의 네째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본문으로]
  2. 미노(美'濃')와 오와리('尾'張)에 걸쳐있기에 이런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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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9 07: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
    흠.. 이 글에도 노부야스를 노부나가가 죽인 것으로 나와 있네요. [기초지식] 포스트 이후 내내 궁금했는데, 언제 한번 그 속사정을 시원하게 알고 싶군요.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07: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사는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
    오늘 내에 예전에 그에 대해서 번역한 것이 있으니 찾아서 올리겠습니다.
    (뭐 이에야스가 죽였다는 설도 세부에는 차이가 있으니, 어디까지나 그 중 하나입니다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30 0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노부야스는 생존설까지 있는걸 보면 참 인기도 좋았던듯...
    이번에도 잘 보고 갑니다. 히데타다는 어떻게 보면 참 자리를 거저먹은 듯..기량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술적 재능은 GG였는데도..(뭐 그것도 운이라면 운이겠습니다만..)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30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시 당시엔 눈썹 엷은 놈은 태어나면서 부터 히키마유(引眉)하기 편해서 키슈(貴種)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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