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 隆信)

1584 3 24일 전사(戰死) 56.

1529 ~ 1584.

류우조우지씨() 19당주(). 쇼우니()()를 물리치고 강대해져,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과 자주 다투었다. 히젠(肥前)을 평정한 후 치쿠고(筑後), 히고(肥後)에도 침공했다. 오오토모 씨()의 쇠퇴 후,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오키타(沖田) 외길()의 전투(沖田)]에서 패하여 죽었다.








출가(出家)환속(還俗)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는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는 자동차와 같은 인생을 보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말년에 접어들어 가독(家督)을 물려주고 승복(僧服)을 입고서는 하루 종일 염불을 외며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여 조용히 일생의 막을 내린다. 이러한 인생은 많은 사람들이 선망(羨望)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명(兒名)이 쵸우호우시마루(長法師丸)였던 타카노부는 7살의 나이에 출가했다. 현재의 초등생부터 고등학생 시대를 [엔게츠(円月)]라는 이름으로 절에서 보냈고 18살 때 환속했다. 인생에서 가장 학식이 몸에 붙는 나이다.
거기서 고승(高僧)이 되기 위해 불문(佛門)의 길을 일생 걸었다면 특필할 만한 인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50세를 넘어서부터 교만(驕慢), 잔인(), 비도(非道), 주색(酒色)에 빠짐 이라는 비난의 문구(文句)가 그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여생의 유무(有無)


 류우조우지 가 중흥(中興)의 시조로 숭상받는 타카노부의 증조부 이에카네(家兼)는 막 태어난 타카노부를 보자마자 [영리]하다고 느꼈다. [구족(九族)극락왕생할 수 있을 정도의 공덕을 쌓을 것]을 바라며 그를 출가 시켰다고 한다.


 그랬던 증조부가 이번엔 죽음을 앞두고,
 
그 애는 대기(器)이니 반드시 류우조우지 가문을 크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다. 환속시키거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 본인의 의사는 상관 없었다.


 거기에 19살의 나이로 무라나카(村中) 류우조우지 가의 미망인과 결혼을 하게 되어(宗)의 당주가 되었다. 즉 부설되어 있는 레일 위를 달렸을 뿐이다. 타카노부가 가독을 적남(嫡男)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주고 은거를 시작한 것은 1580년으로 52세의 나이였다.

 사가(佐賀)()에서 남쪽 약 2Km정도 떨어진 수코 성(須古)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자신의 힘으로 6년 전에 히라이 씨(平井)에게서 빼앗은 성이었다.

 다섯 주() – 히젠(肥前), 치쿠고(筑後), 히고(肥後)의 반치쿠젠(筑前) 아홉 군(), 부젠(豊前) 세 군() – 의 태수로 경외(敬畏)받으며 여생을 수코성()이 있는 시라이시(白石) 평야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향년은 56.
 
표면상의 은거 생활은 5년이다. 보통 사람의 노후로 본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지만 타카노부의 최후는 전쟁터에서 적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1584 3월이었다.


 공격 당하는 성을 관으로 삼아 죽은 것은 아니다.
 
출진 하지 말아달라는 충신들을 뿌리치고 성을 출발. 시마바라(島原) 반도(半島) 군세를 진출시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투였다. 더구나 주군을 안전 지대로 이동시키려 하는 가신들의 진언을 무시했던 결과로써 패하여 죽은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몸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결과 - 비대해진 몸으로 여섯 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지휘를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위풍당당한 총대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하다.

 낮은 언덕에 본진을 설치하고 의자에 앉아서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와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센고쿠 시대에 큐우슈우(九州)에서 시마즈, 오오토모(大友)씨와 3강을 이룰 정도의 강심장이었다.


 그러나 후방의 소란을 아군 병졸들의 싸움이라고 착각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운은 여기서 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타카노부의 최후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난 적장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 밖에 없게 된 타카노부는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어렸을 때의 쌓은 학식이 되살아났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적장에게 대장의 목을 베는 작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말에 적장이 대답을 주저하자 타카노부가 말했다고 한다.


 “홍로(紅爐[각주:1]) 위에 내린 눈 한 송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 위에 떨어진 눈 한 송이가 눈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저 세상의 염라대왕은 엄격했다.

 자아 도취를 용서치 않았다. 폭주 끝에 죽음은 비참했다.

 타카노부의 목이 사츠마(薩摩) ()에서 치쿠고(筑後)의 에노키()의 나루터까지 보내져 왔다. 돌려줄 테니 여기까지 받으러 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타카노부의 한 팔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는 그 목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타카노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이유였다.

 그의 목은 히고(肥後) 타카세()의 간교우(願行)()로 보내졌다.


=======================이하 역자 가필======================================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패배한 장수의 목은 재수가 없으니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1)당시 타카노부의 분노를 사서 삐져있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였기에 그런 말을 했다는것.

(2)목을 건네고 받을 때 시마즈의 사자에게 자신들의 약점을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타카노부의 목은 위의 이야기 외에, 타카노부에게 원한이 깊었던 어느 호족의 미망인[각주:2]에게 전해져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결국 역시 재수없다고 여긴 시마즈 쪽이 그냥 강물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1.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져 붉게 달거진 화로. [본문으로]
  2. 아카호시 가문(赤星家)의 미망인. 타카노부는 인질로 와 있던 그녀의 14살난 손자와 8살난 손녀를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였다. [본문으로]